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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3. 광륜

광륜 14호. 천지우주는 바로 지금 참선을 하고 있습니다 (2)

【 광륜 14호 2005년 여름 】

천지우주는 바로 지금 참선을 하고 있습니다 (2)




우리 인간사회에서 가장 궁금한 문제가 사람이란 무엇인가? 인간성의 본질에 대해서 궁금해 합니다. 또한 물질의 본질은 무엇인가? 물질과 인간성의 상관성은 무엇인가? 이것도 궁금해 하는 문제입니다. 사실 사람의 본성이 무엇인가, 물질의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또는 물질과 정신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것만 알면 인생의 모든 문제는 다 풀려버립니다.

 그런데 천만다행히도 부처님법문은 이 문제가 다 풀려있습니다. 풀려있는데 우리 불자님들이 잘 믿지를 않고 또는 공부를 않기 때문에 여실히 못 느끼는 것입니다. 신위도원공덕모(信爲道元功德母)라. 어느 것 하나 틀림이 없이 부처님말씀은 처음도 옳고 중간도 옳고 마지막도 옳습니다. 여법하단 말씀입니다. 또 부처님뿐만 아니라 마하가섭이 증명하고 아난존자가 증명하고 용수가 증명하고 달마가 증명하고 육조혜능이 증명하고 그 뒤에도 굉장히 많은 분들이 다 증명을 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 분들은 일생을 가장 철저히 산분들입니다. 그분들은 계행청정해서 자기 몸뚱아리는 중생을 위해서 다 바치겠다는 분들 아닙니까! 그런 분들이 사심없이 자기평생을 통해서 증명을 한 이런 길이 호리(毫釐)도 거짓말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미처 거기까지는 다 알지 못하고 증명을 못한다 하더라도 우선 믿기라도 분명 믿어야 하겠습니다.

 

 만법이 다 물질이 텅텅 비어있지마는 텅텅 비어있는 저쪽이 무엇인가? 가사 원자력 가운데 들어있는 그 무시무시한 기운을 보십시오. 핵분열에서 나오는 기운이 원자폭탄 아니겠습니까? 핵융합으로 나오는 기운은 수소폭탄이고 말입니다. 그런데 현미경을 안통하면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그런 미세한 존재 가운데 들어있는 무시무시한 힘을 본다고 생각할 때에 저 에너지로 되어버리는 그 자리가 아무 것도 없는 자리라고 생각 할 수 없습니다.

 비록 물질은 아니라 하더라도 에너지만 되어버리는 그 자리, 물질은 텅 빈 그 자리가 무시무시한 그런 힘이 있는 것입니다. 에너지만 되어버리는 그 자리, 순수한 그 자리, 물질이 아닌 그 자리를 부처님께서 ‘일체만법이다, 만유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천지우주가 이렇게 성겁이 되었다가, 우리 중생이 살다가 다시 파괴가 되어서 텅 비어버리는 때가 분명히 옵니다. 이것은 지금 물리학이 증명합니다마는 분명히 천지 우주는 각 성수(星宿)나 은하계나 다 파괴되어 텅텅 비어버립니다. 텅텅 비어버리는 그 자리가 되어도 역시 에너지는 남습니다.

 순수한 생명은 남는 것입니다. 순수한 생명 그것이 불심(佛心)입니다. 그것이 마음인 것입니다. 어떠한 것이나 모두가 다 일체존재의, 일체 모든 물질의 근원이 에너지만 남거니,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색즉공이요 공즉색이라. 물질은 바로 에너지요, 에너지는 바로 물질이라는 등식이 성립이 안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학적인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에너지 가운데 무한한 힘이 있기 때문에 인연 따라서 인연이 합해지면 다시 천지우주가 성겁으로 해서 형체가 나옵니다. 그래가지고서 무수무량의 각 중생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를 생각해본다 하더라도 정말 부처님을 생각하고 남을 사랑도 하고 미워도 하는 이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기기묘묘합니까! 기기묘묘한 중생들이 이렇게 나온다고 생각 할 때에 에너지 가운데 들어있는 그 힘은 무시무시한 무한의 힘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말씀에서, 번뇌를 녹여버린 성자의 경계가 아라한과인데 그 아라한과를 성취한, 나유타 아승지겁에 해당하는 많은 수의 성자가 모여서 무량세월을 두고 그러한 불성 즉, 마음에 들어있는 공덕을 헤아린다 하더라도 능히 헤아릴 수 없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자비도 원만하고 지혜도 원만하고 능력도 원만하고 행복도 원만한 그런저런 공덕들을 우리 같은 중생들이 헤아릴 때는 한계가 있겠습니다만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통달무애(通達無碍)한 아라한과를 성취한 도인들이 무량무수가 모여서 부처님 가운데 들어있는 즉 불심 가운데 들어있는 공덕을 헤아린다 하더라도 능히 헤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이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마음이 보입니까? 마음이 보일 수가 없습니다.

 혜가스님이 달마스님한테 가서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 제 마음을 거두어서 밝혀 주십시오.” 달마스님께서 “그러면 그대 마음을 가져오너라.”

 혜가가 제아무리 자기마음을 더듬어보아도 자기마음이 처소가 없습니다. 자기마음이 자기심장에 있는 것 같지 않고, 발에도 있지 않고 자기 손에도 있지 않고 자기 등 뒤나 자기 앞에나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마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마음이 어디에도 없지마는 결국 분명히 있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더위잡을 수 없는 하나의 영지(靈智)에 불과한 것인데, 영지(靈智)도 제한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명명백백히 에너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끝도 가도 없는 자비와 지혜와 일체공덕이 다 갖추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공덕을 열반경에서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합니다.

 한도 끝도 없는 마음 공덕이지만 이러한 범주로 해서 우선 체계를 세우면 상락아정이란 말입니다. 항상이거니 그때는 영생불멸해서 생사를 떠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죽고 살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생사를 떠나있습니다. 낳음도 원래 없고 죽음도 원래 없습니다. 그저 몸 따라서 몸이 죽어지면 이 몸뚱아리 쓰다가 낡아지면 옷 벗어버리듯이 벗어버리지만 우리 마음 우리 생명자체는 죽지 않습니다. 거기다 업을 지어 놓으면 업에 따라서 다른 몸을 받게 됩니다.


 즉, 이와 같이 부처님이 보신다고 생각 할 때는 천지우주가 모두 다 심심미묘한 마음뿐인 것입니다. 청정무비(淸淨無比)한 마음, 우주에 가득 차 있는 마음, 은하계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그런 은하단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마음뿐입니다. 하늘에 총총한 무수억 별도 모두가 다 마음뿐입니다.

 청정무비한 마음세계에서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나툴 뿐인 것입니다. 지구나 화성이나 금성이나 모두가 다 청정무비한 마음세계, 순수에너지는 마음세계에서 인과의 법칙 따라 그때그때 잠시간 모양을 나툴 뿐입니다.

 몇억 년 또는 몇십억 년 몇백억 년 되면 지구도 허물어지고 각 별도 허물어집니다. 지금 물리학이 이것 역시 다 증명을 했습니다.

 블랙홀이라. 나중엔 하나의 에너지가 되어서 그냥 다 없어져 버립니다. 그러면 여러 가지 에너지의 작용따라 다시 대폭발이 일어나서 그때는 우주가 생겨난단 말입니다. 이것도 역시 지금 천문학이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 중생이 어두위서 모두를 다 안락스럽게 보지마는 사실은 안락스러운 것이 아니고, 조금 더 나아가서 과학적으로 보는 소승이 볼 때는 우주를 고(苦)로 봅니다. 그러나 우주를 고(苦)로 보는 것도 역시 현상적인 관찰뿐인 것이지 본래적인 모습은 아닙니다.


 현상의 본래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보살이 볼 때는 우주가 텅 비어있습니다. 반야심경사상이라든가 금강경사상은 보살이 보는 우주가 텅 비어있다는 색즉공(色卽空)입니다. 우리가 공(空)을 말한다 하더라도 분석한 뒤에 다 쪼개가지고서 공(空)이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 같으면 사람 그대로 바로 공(空)이란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공(空)을 생각할 때에 석공(析空)이라, 분석한 뒤의 공(空)을 보고 석공이라 합니다.

 분석치 않고 사물 그대로 바로 보면 즉공(卽空)이며,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것이 즉공인 것입니다. 다만 무명심이라든가 삼독심, 즉 탐욕심이나 분노심이나 어리석은 마음의 어두운 중생이 볼 때는 분명히 다 있지마는, 삼독심을 떠나고 무명심을 떠나버린 성자가 볼 때는 명명백백히 다 텅 비어있는 것입니다.

 육조혜능스님의 본래무일물 하처야진애(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실은 그와 같이 보살이 볼 때는 텅 비어서 본래무일물 즉, 물질이란 것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도 없는데 어디에 티끌이나 죄나 악이 붙어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근본에서 보면 다 이런 것인데 우리 중생은 그렇게 못 봅니다.


 또 한걸음 더 나아가서 보다 적극적으로 천지만물을 그대로 보는 부처님의 실상견, 다시 말하면 불안청정(佛眼淸淨)이라. 부처님의 안목으로 볼 때는 천지우주가 다 마음뿐이라는 것입니다. 심즉불(心卽佛) 곧 마음이 바로 부처이므로 천지우주는 부처뿐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것은 아시는 바와 같이 존귀해서 무엇과도 견줄 수 없어야 비로소 존엄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법문을 떠나서 우리 중생이 생각하는 상대유한적인 인간의 가치차원으로 해서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말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존엄이라는 것은 위도 없고 아래도 없고 가장 존귀해야 존엄이라고 붙일 것인데 ‘인간은 하느님이 창조했다, 인간이 죽어지면 아무 것도 없는 허무다, 인간은 이렇게 불법을 좀 믿기는 믿지마는 그렇고 그런 것이다’ 이런 정도로 해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내세울 수 없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내세울 수가 있는 까닭은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비록 지금 현재는 고(苦)만 느끼고 인생고(人生苦)만 볼 수 있는 소승경계 밖에는 안된다 하더라도 또는 아직은 미숙해서 인생안락(人生安樂)이다 하는 의식주만 최고로 알고서 거기에 몰입하는 이른바 물질지상주의자 경계밖에 안된다 하더라도, 우리 견해만은 ‘인간은 바로 보면 본래가 마음뿐이다. 본래가 오직 부처님이다. 사람만 부처님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바로 보면 다 부처님뿐이다. 천지우주가 오직 부처님뿐이다. 천지우주는 부처님 생명이다.’ 이렇게 느껴버리고서 자기를 그 자리에 맞추고자 하는, 자기 스스로가 그와 같이 부처님이 되고자 하는 간절한 서원을 세우고 믿고 행하는 데에서 비로소 인간은 존엄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야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하늘 위나 하늘 아래에 비길 수가 없는 것이지 상대유한적인 인생관으로 해서는 존엄을 내세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남하고 화합하기를 바랍니다. 특히 우리세대의 시대적 과제로 지금 남북통일을 간절히 희구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어떻게 통일을 시킬 것인가. 각기 자기들 입장과 위치에 따라서 가지각색의 이론이 나오겠지요.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상대적인 이데올로기 차원에서는 완전한 통일이 될 수가 없습니다. 거창한 남북통일문제가 아니더라도 사람끼리의 화합도 역시 근본적인 인간해석, 바른 가치관이 없이는 참다운 화합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남의 참다운 벗이 되고 참다운 아내가 되고 참다운 아버지가 되고 참다운 불자가 되고, 어떠한 입장에 있던지간에 가장 최선으로 자기 생명을 살리는 것은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 즉, 다시 말하면 인생이 무엇인가 하는 가르침을 모르고서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불교만의 가르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역시 마태복음서에 보면 예수님한테 사마리아인들이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신의 아들이라 하고 스스로를 치켜세우고 장담하지마는 누가 그것을 본 적도 없는 것이고, 혹은 우리가 증명하지 않는데 당신 홀로가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어떻게 믿을 것이냐’고 예수님한테 따져서 얘기합니다. 그 때 예수님 말씀이 ‘나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고 내가 어디로 가는지를 안다. 나는 내 생명이 어디서 온 줄을 알고 있으며, 또한 제한된 내 몸뚱아리인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한테 있는 하느님이 말을 한다. 따라서 내가 한말, 이것은 하느님이 증명하고 천지진리가 증명하거니 공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적어도 성자라 하면 비단 예수뿐만 아니라 공자나 소크라테스나 노자나 어느 분이든지 간에 모두가 다 천지우주의 진리에 입각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인입니다. 우주의 본 바탕을 모르면 성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자라는 것은 인간의 본래생명 우주의 본질을 알아야 성인인 것입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제아무리 내세워 보아도 자본경제라는 것은 역시 모순구조를 면할 수가 없습니다. 범부끼리 서로 경쟁을 하여 자기사업이 보다 더 잘 되게 하고 또 자기가 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가려고 합니다. 우리 범부라는 것은 그런 것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자유경쟁적인 걸로 해서 이북이 그냥 승복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이북은 어떤가.


 공산체제는 어느 면으로 해서는 그야말로 경제면의 공정을 기한다 할지라도 번뇌를 못 떠나버린 일반중생이 다시 말하면 아상(我相)을 미처 못 떠나버린 사람들이 제아무리 공정(公正)을 기한다 해도 참다운 공정이 못되는 것입니다.

 또 너무 통제를 많이 하면 그때는 가장 소중한 인간의 자유를 훼손시킵니다. 따라서 이북적인, 김일성 주체주의 그것으로 남한까지 전부 다 포섭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 남한이 승복할 수가 없습니다. 즉 남한주의도 이북이 승복을 못하는 것이고 이북의 주의도 역시 남한이 승복할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적당히 이북의 좋은 점, 이남 좋은 점, 자본주의 자유사회 좋은 점 또는 통제경제의 좋은 점, 이것저것 섞어서 절충할 수도 있겠지마는 이런 것 역시 임시에 불과할 뿐 중생이 만드는 것들은 완전무결한 화평이나 정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모든 이데올로기를 다 넘고 모든 주의를 다 넘어서 가장 기본되는,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타당한 진리에 입각해서, 저 높은 자리에서 사방을 다 보고 말입니다. 진리의 궁극에서 진리의 기본에서 이북도 보고 이남도 보고 그 높은 자리에서 비판해야지 같은 레벨정도로 해서, 일반 중생 차원에서는 상대편의 좋은 점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일반 중생들은 바이블(Bible)에도 말씀한 바와 같이 자기 마음에나 자기 눈에는 서까래 같은 번뇌가 있는데 남의 눈에나 남의 가슴에 있는 조그마한 티끌 같은 것에만 관심을 둔단 말입니다.

 내가 범부이고 내가 아직은 성자가 못되는 정도에서는 남을 비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 범부는 자기 스스로 자기 번뇌 떼는 데에 열중해야 합니다.

 정말 양심이 있다면 범부인 한에는, 성자가 못된 사람들은 남을 비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스스로 먼저 자기 안목을 맑히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남의 장점과 단점도 보일 수가 있는 것이지, 자기 번뇌 어두운 사람들은 남의 장점도 볼 수가 없고 단점도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번뇌 없이 청정한, 맑은 안목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볼 것인가,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거니 미운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남을 사랑해라 원수를 사랑해라 하지마는 맑은 안목, 본래의 안목에서 볼 때는 원수도 없고 미운 사랑의 씨도 없습니다. 우리가 잘못 보니까 원수가 있고 미워하는 사람이 있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마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 다시 말하면 시냇물이 혼탁할 때에 시냇물을 맑히기 위해서는 저 상류, 인간의 근본악, 인간의 원죄를 다스리면 되는 것입니다. 어느 성자나 현자나 철인이나 다 그 자리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다만 중생이 그걸 잘 안믿습니다.

 각 무수한 성인들이 우리한테 일구여출(一口如出)로 말씀하신 우주의 도리를 지키면 굉장히 쉬운 것인데 잘 안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안락이라는 것이 오욕을 마음대로 누리고 풍족한 물질에 있다고 말을 하고, 산간에서 고행하고 아주 검소한 생활은 무슨 재미가 있을 것인가 이렇게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주의 도리를 잘 모르시는 말입니다.


 불가에서 공부할 때에,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해서 우리가 맑아지면 우리한테 어떤 현상이 있는가 하면 리생희락지(離生喜樂地)라. 우리 중생의 경계를 떠나서 맑은 경계에 들어가면 그때는 자기도 모르는, 중생이 느낄 수 없는 참다운 법락이 있습니다.

 우리 중생이 느끼는 낙(樂)은 속락(俗樂) 즉, 상대유한적인 안락인데 정말 공부를 깊이 하면 속인적인 오욕락을 떠나서 영원적인 영생불멸의 법락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그런 법락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염불도 열심히 하고 참선도 열심히 해서 공부를 하다 보면 그때는 자기 업장이 녹아짐에 따라서 법락이 나오는 것입니다. 법락이 한번 나오면 법락은 후퇴가 없습니다. 법락을 모르니까 불교를 믿는다 해도 부처님 법에 어긋난 짓도 많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공(空)이다라고 느껴져야만이 비로소 법락을 느낍니다. 따라서 법락을 한 번 느낀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서, 자기만을 위한 봉사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는 모두를, 남을 위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튼 남북의 화합과 통일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 역시, 어떠한 물질이라든가 제한적인 하나의 주의를 떠나서 그야말로 상대를 떠난 절대주의, 영원적인 차원에서 보아서 우리가 취사선택해야지 그냥 같은 차원에서 본다 할 때는 결국 다툼을 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시 미봉책으로 그때그때 합할지는 모르지만 그럴 경우 결국 하나마나 다시 혼란스럽게 되고맙니다.


 오직 문제는 근원적으로 고차원(高次元)에서 가정(假定)을 떠난 무가정(無假定)의 원리(原理)에서 봐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지혜가 아니겠습니까!                  

                                                                     (계속)


<1989년 3월 19일 KOEX 대강당에서 서울 금륜회 창립법회시 법문 내용입니다. 3회로 나누어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