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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3. 광륜

금륜 9호. 종교와 철학은 하나다

금륜 9호 불기 2545년 6월 】

 

종교와 철학은 하나다

인간성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이 글은 2001년 5월 11일 성륜사에서 열린 국제철학대회에서 설법하신 청화큰스님 법문입니다.

 

우리 성륜사는 전통이 아주 오랜 사찰이 아닙니다. 가까스로 10여 년 세월이 흘렀을 뿐입니다. 별로 전통이 오래지 않은 우리 절에 철학자들과 세계의 석학碩學들을 모시게 된 것을 대단히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평소 제가 생각해 온 종교와 철학문제, 다시 말씀드리면 신앙信仰과 이성理性문제에 관해서 몇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저는 종교宗敎와 철학哲學은 같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와 철학이 분리되면, 그래서 철학이 분명치 못한 종교는 맹신盲信에 빠지기 쉽고 신앙에 깊이가 없고 바른 신앙이 될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몇 가지 사례事例를 들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지금 인간사회에서 여러 가지 불행과 부조리不條理는 어디서 연원淵源되는 것인가 하면, 각기 견해가 다르겠지마는, 인간성人間性 문제에 대한 불철저不徹底한 인식에서 온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한 문제는 동양뿐만이 아니고 서양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옛날 그리스로부터서 이루어진 인간의 여러 가지 순수사유문제純粹思惟問題를 생각해본다고 하더라도 보다 철저하고 깊이 있는 사유를 했더라면, 모든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도출導出할 수도 있었을 텐데 철저한 사유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즉 순수 사고가 부족했기 때문에, 이론적이고 지엽적枝葉的인 것에 그쳐 버리고 말았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서기 540년 전 경에 살았던 그리스의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BC 5세기경)라는 철학자를 저는 생각하곤 합니다. 그것은 그의 학설에서 밝힌 바가 다른 종교하고도 상당한 관련성이 있고 인간의 순수사유에 대해서도 심도深度있는 근원적인 사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이가 말하기를 이른바 진리眞理에 대한 사유思惟와 진리가 아닌 일반적인 사유를 구분하고, 참다운 것은 󰡐오직 하나󰡑가 있을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하나󰡑라는 것은 사실로 존재하는󰡐유有󰡑로서, 그 󰡐하나󰡑라는 󰡐유󰡑는 그 존재가 영원불멸永遠不滅하고 불가분不可分이며,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영구적永久的 존재存在라고 했습니다. 또 그것만이 우주에 존재하는 참다운 실존實存이라고 파르메니데스는 주장했습니다. 그 당시에 파르메니데스는 헤라클레이토스(Herakraitos)하고도 거의 같은 시대 사람인데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變化하는 동적인 것에 관심을 두었지마는, 그분도 역시 참다운 것은 로고스(logos), 우주의 참다운 이성理性, 참다운 진리에 따라서 행동하고 사유해야 된다고 역설했기 때문에,󰡐헤라클레이토스󰡑나 󰡐파르메니데스󰡑나 별로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바르게 생각한다고 하면, 우리가 이성理性을 100퍼센트 활용해서 바르게 생각한다면, 부당한 것, 필요 없는 것은 자연적으로 제거除去되는 것인데 그렇지 못하고 미온적微溫的이고 애매모호曖昧模糊한 사유思惟 때문에 부당한 것을 우리 스스로도 생각하게 되고, 사회적으로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철저히 사유하면 존재存在하는 것은 모두가 “하나의 진리뿐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의 불철저한 사고 때문에, 상대적相對的이고 연기법적緣起法的인 사고를 하게 되고 그런 상대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을 때는, 현상적인 것은 모두 허망무상虛妄無常한 것입니다. 따라서 현상적現象的인 것은 조건부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실존적實存的인 것이 아니라는 해답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철저하고 바른 순수사고를 한다면, 오직 존재하는 것은 참다운 것󰡐하나 뿐󰡑,󰡐유有 하나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철학적 사고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 말씀드릴 것은 우리의 느낌과 실천적인 삶에서 초월적超越的인 면을 일반 사람들은 소홀히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고와 함께 초월적인 면을 아우르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의 실상實相도 파악할 수 없음과 동시에, 사회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근원적인 것을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모순 현상을 지적합니다마는 그것은 우리 사유체계思惟體系가 불철저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다시 부당한 것을 되풀이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깊이 생각하고 철저하게 사유한다고 하면 마땅히 바로 볼 수가 있고, 바로 볼 수 있으면 자기라는 개인적인 에고(ego)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지엽적인 문제에 우리 생각을 멈춰버리기 때문에, 근원적根源的인 사고思考가 안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근원적인 사고를 어느 정도 깊이 한다고 하더라도, 실천면에서 제대로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가령 우리가 명상瞑想을 한다고 하더라도 보통 차원에서 그쳐 버리면, 자기실상도 깨달을 수가 없고 우주의 실존實存 문제에도 해답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른 사유를 한다면, 실천면에서 깊이깊이 따지고 들어가야 할텐데, 그런 것도 미온적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론적인 사유체계에도 상식적인 분야에 그쳐버리고 실천적인 면도 불철저해서, 자연적으로 모든 면에서 바른 해답을 내릴 수가 없고 자기 스스로도 자기 불안의식不安意識을 해소할 수도 없으며, 만연된 사회의 부당不當한 부조리不條理도 제거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뭘 생각할 때도 현상적인 것에 우리 사고를 낭비浪費하지 말고, 근원적인 문제에 관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상적인 것, 현상적現象的인 것, 그때그때 있다가 없어지는 것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내렸을 때, 실천적實踐的으로 자기초월自己超越을 해야 할 것인데 그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종교와 철학은 서로 상호보완적인 동시에, 더 나아가서 일치一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달마澾摩스님 같은 분은 보통 불립문자不立文字라. 문자를 세우지 않고 그저 명상만 하는 도인으로 생각합니다마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 스님도 정확한 교리 체계를 앞세운 후에 9년 면벽이라. 소림사에서 9년 동안 벽만 바라보고서 명상했다는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달마스님을 신봉하는 불교일반론佛敎一般論에 배치가 되겠지요.

불교 자체가 어디까지나 신앙信仰과 교리체계敎理體系인 철학과 아울러서 있는 것이며, 비단 불교뿐만 아니라 서구사상에서도 실천과 교리가 아울러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가령 기독교적인 신학神學적인 면으로 본다하더라도 ‘에리유게나(Eriugena 815-877)󰡑라는 기독교 신학자도 위대한 분이지만, 역시 이성理性과 신앙문제 즉 철학과 종교문제를 󰡐일치一致한다󰡑는 관점에서 보았습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종교도 살 수 있는 것이고 철학도 살 수가 있단 말입니다.

 

철학이 종교적인 실천면을 소홀히 해 버리면 사실은 철학이 이론적사변理論的思辨에 그쳐버리면, 참다운 철학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마땅히 현대에 와서도 여러 가지 지적들을 하지마는, 모두가 이론적인 것이 불철저하고, 동시에 그것에 실천적인 면이 따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실존철학實存哲學만 보더라도, 야스퍼스(Jaspers 1883-1969)나 하이데거(Heidegger 1889-1976)나 그분들이 여러 가지 심오한 철학 체계를 세웠으나 그분들이 자기자신의 한계상황限界狀況을 초월할 것인가의 문제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미흡未洽한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자기 초월의 문제는, 나날이 자기 개조自己改造를 하고, 나날이 변신變身해 가는 자기초월의 문제는 철학에 있어서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것을 소홀히 해 버리면, 철학은 철학대로 교리敎理만 분석하고 교리만 따지는 것이 될 것이고, 또 종교는 철학이라는 체계가 없어지면 엉뚱한 미신迷信같은 맹신盲信 쪽으로 흘러갈 수도 있겠지요. 마땅히 철두철미하게 사유를 해야 합니다. 철두철미한 사유는 그것이 바른 사유가 되기 때문에, 철두철미한 사유를 하는 사람은 자기 개인적인 에고(ego)는 저절로 끊어집니다. 왜 그런고 하면, 철두철미하게 생각하면 자기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단 말입니다. 모두는 다 연기법緣起法으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몸뚱아리라든가, 자기의 개념적사고槪念的思考라든가 모두가 인연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깊이 생각해보면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기라는 고집固執이나 불교적 표현으로 법집法執을 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철저한 순수사유純粹思惟로 해서 모든 사태事態를 바르게 보고, 동시에 바라본 그 자리에서 철저한 실천이 뒤따라야 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 󰡐다라표󰡑라 하는 위대한 승려가 있었습니다. 다라표는 머리가 총명할 뿐만 아니라 정진력精進力도 굉장히 투철한 분이어서, 14세에 출가를 했습니다. 그래서 2년 동안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서 16세에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성취했습니다. 아라한과는 여러분도 아시는 분은 아시겠습니다마는, 불교에서 공부하는 모든 과정과 명상 과정을 거쳐서 삼명육통三明六通을 16세 약관에 했단 말입니다. 삼명육통은 과거로도 통달하고 미래도 비추어 보고, 또 자기 번뇌煩惱의 뿌리를 뽑아 버렸을 때에 얻습니다.

그것은 기적적인 지혜입니다. 자기 공부는 다 했으니까, 다라표 스님은 봉사할 것을 자원했습니다. 손님들이 오면 손님들을 바라지하는 심부름꾼으로 자처했습니다.

전기가 없는 때라, 밤에 손님이 오면 촛불 등으로 불을 밝혀야 했습니다. 그러나 신통神通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화광삼매火光三昧라, 몸에서 불을 내는 삼매를 내가지고, 왼손으로 불을 비추면서 오른손으로는 이리저리 가리켜서 지도했습니다.

 

삼매를 닦아서 초월해 버리는, 우리 인간의 번뇌성을 초월해 버리는 그런 단계에 이른 분들은 비록 다라표 스님만 아니라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같은 수행자도 공부를 잘 했으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인데, 사실은 제대로 하지 못해서 그렇지, 본래 못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정진력이 부족해서 여실히 못 닦아서 그렇지, 원래 못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성은 아라한도를 성취하면, 누구나 다 삼명육통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성은 정말로 끝도 가도 없는 무한한 가능성을 갖춘 것인데, 중생들은 아라한도를 성취할 만하게 제대로 닦지를 못할 뿐입니다.

 

삼매를 성취해야 자기를 초월할 수 있다

 

그래서 제대로 닦는 길을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우선 철저하게 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이른바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는 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계율 가운데서도 특히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음식을 함부로 먹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음식을 함부로 먹으면 우리의 생리生理와 심리心理가 본래 둘이 아니라서 서로 상응相應하기 때문에 음식을 함부로 먹으면 우리 마음도 흐리멍덩할 뿐만 아니라 우리 몸도 오염이 됩니다.

그래서 철저한 계율로 해서 준비작업을 하고 그 다음에는 불교말로 하면 삼마지三摩地라, 삼매三昧에 든단 말입니다. 삼매라는 것은 명상冥想을 말합니다. 보통명상은 삼마지, 삼매라고 못합니다. 초보적인 비파사나(Vipassana)나 관조觀照하는 초보적인 명상을 해서, 우리 마음이 분열되지 않는 오직 일념一念으로 흘러가는 것을 삼매라고 하지요. 삼매에 들어야 비로소 자기를 초월합니다.

 

삼매에 온전히 들어서 삼매를 성취해야 자기를 초월해 가지고 성자聖者가 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특수한 사람만 성자가 되는 것으로 생각할는지 모르나, 옛날 소크라테스(Socrates)나 플라톤(Platon) 같은 분도 성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소크라테스는 길을 가다가도 가만히 서서 엑스타시스(Ecstasies)라, 명상에 잠기고 자기망아적自己忘我的인, 자기를 잊어버리는 자기를 초월하는 경지에 들어갔단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느끼고 있는 모든 문제가 종교는 종교대로 철학체계가 미흡未洽하면 확실한 종교가 되기 어렵고 또 철학적으로 교리적분석敎理的分析을 잘 해놓고 한 체계가 선다하더라도 항시 교리에만 묶여 사변적인 환경을 벗어날 수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먼저 말씀드린 ‘에리유게나’, 그 분도 철저하게 종교와 철학을 동일시同一視했단 말입니다. 꼭 종교와 철학은 같이 놓아야 한다고 하면서 이른반 신앙信仰과 이성理性은 일치되어야지 이성은 이성대로, 신앙은 신앙대로 간다면 철저한 성과를 얻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현대 여러 분야에서 모순이 야기되고 많은 지적도 나오는데 가장 큰 원인은 순수사유純粹思惟를 미온적으로 하는 데에 있습니다.

깊은 사유를 한다고 할 때에는 모든가 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졌기 때문에, 내 관념觀念이나 내 몸뚱이나 모든 눈에 보이는 현상계는 결국 자기라고 고집할 것도 없고, 자기 소유를 주장할 필요도 없단 말입니다.

 

인간이 자기라는 에고나 소유所有를 주장하지 않고서 생활한다면, 부조리不條理가 생겨날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자기라는 에고가 생기면, 거기에 내 남편, 내 아내, 내 재산, 내 영역領域이 따르겠지요.

그래서 철학이란 것은 철저하게 사유思惟해야 한다고 봅니다. 끝까지 투철하게 사유해 나가야, 이른바 인생과 우주의 본바탕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본래적인 본바탕을 안다고 할 때는, 결국 불교술어로 무아無我란 말입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기독교와 불교와 이슬람교의 어떤 종교도 별도로 따로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하나기 때문에, 종교도 하나란 말입니다. 우리 진리는 하나기 때문에, 저는 종교도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신학 체계를 세운 초기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그 다음에 9세기에 나온 에리유게나나, 14세기에 나온 에크하르트(Eekhart 1260-1327)나 또는 13세기에 나온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나, 니콜라우스 쿠사누스(Nicolaus Cusanus 1401-1464) 등등, 이런 분들이 세운 종교나 철학의 체계는 불교 체계와 같습니다.

 

모든 성자나 철학자들은 별도의 각각 체계를 세운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똑같은 동일률同一律 이라, 하나의 진리에서 온 일체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모두가 하나요, 일원적一元的 존재요, 진리란 말입니다.

깊이 사유해 보면, 눈에 보이는 것은 허상虛像이기 때문에, 진리의 자리는 하나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철학적인 깊은 사유가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노파심에서 자꾸 반복합니다마는, 순수 사유를 해서 자기라는 것이 원래 허망한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라고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불교의 금강경金剛經에서는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다 꿈이요, 그림자요 허깨비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실재實在와 실재 아닌 것을 명확히 구별해야 합니다. 진리라는 것은 결국 하나의 진리인데 하나의 진리는 아까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도 말했습니다마는 ‘존재하는 것’, ‘있는 것’은 오직 하나일 뿐이란 말입니다.

결국은 실상은 하나일 뿐입니다. 실상은 모두가 다 하나이고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다 가상假相에 불과하고 말입니다.

가상假相과 실상實相을 분명히 구분하는 것을 철저히, 철학적 사유를 통해서 거기에다 자기 스스로 본래가 무아無我라는 데에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아라는 것은 아시는 바와 같이, 불교에서 말하는󰡐내가 없다󰡑는 무아 아니겠습니까? 어째서 내가 없는가 생각할 때, 모든 것을 철저히 사유해 나가면, 나라는 것이 어디에 붙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잘못 생각하고 미지근하게 생각하니까 내가 있고 내 손도 있고 하는 것이지, 깊이 생각하면 현상적인 문제는 사실 꿈같은 것이란 말입니다. 허상虛相입니다.

우리가 허상을 떨쳐 버릴 수 있는 데까지 사유를 철저화시켜야 합니다. 다음은 우리가 초월하기 위해서 명상을 해야 합니다. 초월이 안되면 범부성을 초월할 수가 없습니다. 또 초월이 안되면 실상을 파악하지 못하는 셈이 됩니다. 또 실상을 파악하지 못하면, 우리는 언제나 시간성과 공간성空間性과 인과율因果律에 제약을 받는단 말입니다. 초월하는 길이 명상법瞑想法인데, 명상법은 여러 가지 다른 법도 많이 있지만, 철학도들도 명상법은 꼭 불교의 것을 참고로 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가하면 불교의 명상법은 우리 범부중생凡夫衆生이 부처가 되어 가는, 성자聖者가 되어 가는 법을 소상昭詳히 밝혀있단 말입니다. 그것은 제가 문제제기만 합니다마는 구차제정九次第定이 있습니다. 구차제정은 아홉 단계로 단계단계 올라가는 우리의 사유 체계라든가 우리 명상이 올라가는 단계를 말한 것인데, 구차제정으로 나간다면 성자의 지위인 아라한도에 들어가면 초월적인 기적을 낼 수가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의 경전을 보면, 초월적인 기적을 낸 분들이 한 두 분이 아닙니다. 중세에 있어서도 진묵대사震黙大師(1562-1633)나 그런 분들은 상당한 기적을 냈습니다. 서산대사西山大師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또는 신라 때 원효元曉스님은 더욱 그랬습니다. 우리가 깊은 삼매三昧에 들어서 우리 스스로 본래적인 인간성에 갖추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내려고 생각한다면, 누구나가 낼 수 있습니다.

이런 기적을 부사의한 것이고 신화적인 것이라 생각하나, 신화도 기적도 아닙니다. 꼭 누구나 할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입니다. 개발만 하면 됩니다. 따라서 현대에 있어서 인간의 한계상황限界狀況을 놓고 불안한 고민도 합니다마는 한계상황을 넘어서면 길이 분명히 있는데 그런 길을 가지 못한단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저도 제대로 갔다면 그런 초월적인 가능성을 만들 수 있을 텐데, 제대로 못했다는 것을 참괴慙愧합니다.

다른 분들도 앞으로 철학적인 문제라든가 종교적인 문제라든가 사회의 여러 병적인 요소들이 다른 원인도 있겠지만 인간성 문제에 있어서 스스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니까 그렇습니다.

 

인간 자체가 본래적으로 무한을 구하고 영원을 구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쇼펜하우어(Schopenhuer 1788-1860)가 말한 바와 같이, 유한자가 무한無限을 구하고, 또는 시간적인 존재가 영원을 구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했듯이 우리 인간은 본래적本來的으로 영원성을 갖추고 있어서, 무한과 절대와 영원을 구하는 마음이 누구나 있습니다. 있는데도 이것을 구하지 말라고 막을 수가 없습니다. 보다 더 그것을 증장시키고 더 깊이 탐구해 성취하도록 권장해야겠지요. 그렇게 하려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철저하게 순수 사유를 해서 에리유게나나 엠페도크레스(Empedokles BC 493-433)라든가 그런 분들같이, 다른 찌꺼기는 다 털어버리고 순수성만 남을 수 있도록 까지 우리가 사유를 하고 다음으로 도덕적道德的인 결단을 내려서 계율戒律을 잘 지켜야 합니다.

몸이 부도덕한 사람은 삼매三昧라든가 깊은 명상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철저히 도덕적인 행동이 꼭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남녀문제도 역시 깊은 삼매에 들려고 생각한다면 절제節制를 하셔야 합니다. 칸트(Kant)라든가 니체(Neietzsche)라든가 쇼펜하우어(Schopenhuer)라든가 플라톤(Platon) 같은 사람들은 모두가 독신주의자 아닙니까. 사실 독신으로 산다는 것이 보통 뜻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부나 수녀도 독신 아닙니까. 우리 승려도 비구승은 독신 아닙니까. 왜 그런가하면 남녀 성문제를 초월하지 못하면 명상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어느 한계에서, 머물러버리고 절대로 온전한 초월을 못합니다.

 

그런 점에서 음식 문제 남녀이성 문제 이런 문제를 초월할 수 있는 자기를 만들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철학자는 단순히 교육적으로 해서 아주 훌륭한 체계를 세워야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하자없는 인격을 우선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깊은 명상을 하고 그 명상은 불교적인 것이 표준적인 명상법입니다.

구차제정九次第定, 즉 아홉 단계를 밟아서 올라가면 차근차근 정화가 되어서, 마지막에 우리 범부성凡夫性을 초월해서 영원적인 자유로 들어간단 말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성자가 됩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나가 성자가 되는 것이 철학이나 종교의 구경적인 목적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이 한도 끝도 없는 가능성이 원래 있는 것이니까, 다만 거기에 가기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철저한 순수 사유를 해서 이제까지 오염汚染되고 불교적으로 말하면 과거 전생前生부터 무수생 동안에 우리 몸이나 마음에 오염된 것을 씻어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상당한 기간 동안 명상에 잠겨야 됩니다.

그래서 더러는 10년 명상에 잠기기도 하고 30년을 명상에 잠기기도 하고, 또 저와 같이 80이 가까워져도 미처 다 끝내지 못하는 것은 제대로 잘 못해서 그렇습니다. 역시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행복이나 무슨 문제도 결국 개별적인 인격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의 인격자로서 투철하게 깊은 생각을 해서 정당한 진리까지 순환시키고, 다음에는 도덕적인 결단으로 초월超越해야 한단 말입니다.

 

야스퍼스(Jaspers)나 하이데거(Heidgger)나 베르그송(Bergson 1859-1941)이나 그런 분들도 차원만 좀 다르지, 읽어 보면 모두 그런 뜻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오늘 모이신 철학자나 석학들께서 이런 문제에 대해서 연구도 하시고 그러리라 믿습니다. 저는 하나의 수행자修行者 입장에서, 종교와 철학이 절대로 둘이 아닌 하나가 되어서, 종교는 종교대로 실천적인 면을 맡아야 할 것이고, 철학은 철학대로 실천을 바르게 하도록 뒷받침해야 할 것이고 서로 상호적相互的으로 같이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 인간의 행복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金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