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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3. 광륜

광륜 15호. 천지우주는 바로 지금 참선을 하고 있습니다 (3)

【 광륜 15호 2005년 가을 】


천지우주는 바로 지금 참선을 하고 있습니다 (3)



 부처님의 지혜는 어떤 것인가?

 부처님께서 우주와 인생을 보신 것이 유심관(唯心觀)입니다. 모두를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모두를 마음으로 본다는 것은 모두를 부처님으로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곧 마음이니까 말입니다.

 마음을 잘못 쓰면 굉장히 더럽기도 하고 아주 비겁합니다. 그렇기에 달마스님께서도 ‘마음을 찾기가 가히 어렵구나. 마음을 좁히면 옹졸하기가 바늘구멍도 못 들어가고 마음을 넓히면 마음 넓기가 삼천대천세계 천지우주를 다 포섭해 있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을 좁은 쪽으로 보면 천지우주가 다 마음뿐이거니 바늘만 아니라 먼지나 하나의 소립자나 어떤 것이든 모두 마음이 들어가 있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또 아무리 넓다 하더라도 천지우주가 마음뿐이니 마음 밖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즉 마음보다 더 넓은 것도 없고 마음보다 더 작은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나쁜 것도 마음보다 더 나쁜 것도 없습니다. 잘못 쓰면 결국은 가장 나쁘단 말입니다. 젊은 세대는 미처 못 느낍니다마는 6 ․ 25사변 때 저희 같은 세대는 사람끼리 서로 죽이고 죽는 모습을 많이 봤습니다. 상당히 많이 배운 사람들, 어떤 경우는 남을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분들 역시 그 상황에서는, 별로 죄가 없는 사람을 장작이나 몽둥이로 때려죽이는 것도 보았습니다. 평소에 나쁜 사람이 아니었는데 상황 따라서 마음의 동물성이 발동되게끔 환경이 되면 굉장히 나쁜 짓을 많이 합니다. 잘못 되면 사람처럼 싸움 좋아하고 남 배신 잘 하고 잔인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본성은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부처 아니겠습니까!

 부처라는 이런 고귀한 차원을 유물론자는 알 까닭이 없습니다. 김일성이 주체주의를 말합니다마는 그 주체는 유물론에 입각해서 모두가 물질이고, 역사의 발전이라 하는 것은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든가 그러한 것으로 말해왔습니다. 이런 것으로 해서는 인간성의 본질을 알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성이 소중하다 인간성의 본래면목이 부처다 하는 여기까지는 미처 모른다 하더라도 인간성을 보다 더 추구하는 분들, 인간성의 존엄성을 내세우고자 하는 분들이 그런 유물론자의 굴레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자본주의 구조 역시 굉장히 모순이 많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응당 우리가 과감히 시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 몸뚱아리가 내 것이 아닌데 내가 갖는 재산 내 회사 모두가 내 것일 수가 없습니다. 다만 임시간 관리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내 것도 아니고, 네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가 보다 더 잘되기 위해서 남을 희생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남북의 진정한 통일을 위해서도 역시 시기가 언제 오려는지 모르지만 분명히 부처님의 사상, 모든 것을 바로 보는, 근원에서 보는 사상을 갖는 우리 불자님들이 차근차근 수가 불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더디 오건 빨리 오건 간에 보다 확실한 통일이 되는 것입니다.

 불교는 현대 과학에서 미처 모르는 정도까지도 다 알고 있습니다. 과학은 다만 상대유한적인 물질세계밖에는 모릅니다. 그러나 불교는 형이하학적인 물질세계도 다 알고 또 물질보다도 훨씬 근원적인 에너지세계 그런 무형적인 세계를 압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형이하학적 물질세계 또는 형이상학적 정신세계를 다 통틀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물질세계만 겨우 분석하고 거기에서 콱 막혀있는 과학이 보다 더 생생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물질세계가 아닌 정신세계, 순수에너지세계, 에너지에 포함되어 있는 무한광명세계를 알아야합니다. 이걸 모르고서는 과학이 보다 더 효과적으로 발전을 못 하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도 과학이 보다 더 생생한 힘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불교와 같은 종교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사실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다종교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만 하더라도 우리 불교인들이 2,000만이라고 합니다마는, 너무 과장된 말로 생각이 됩니다. 기독교인들은 우리 불교인들 2,000만보다 더 많겠으므로 종교 인구 통계수치를 합치면 우리 한국 인구보다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딘가는 과장이 있으리라 봅니다. 아무튼 이와 같이 우리가 종교 인구를 생각해 볼 때 한국을 비롯한 세계 불교인구가 거의 10억쯤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구도 불교보다 더 많은 10억보다 많든가 적든가 하고 그리고 또한 몇 백종의 종교가 있습니다. 종교는 하나의 철두철미한 신앙체계이기 때문에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기종교가 가장 좋다고 치켜세우고 확신을 가질 것입니다. 확신도(確信度)는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자기신앙을 위해서는 서슴없이 남을 배격하고 편견을 내세웁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중세기에서 기독교의 십자군원정, 또 영국과 프랑스의 30년 전쟁을 보면 모두 종교가 원인이 되었습니다. 또 지동설을 부르짖다가 화형에 처한 부르노와 같은 중세기 철인을 봅니다. 이렇게 평화나 정의를 위주로 하는 종교 밑에서 도리어 그런 잔인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처럼 고도로 발달된 시대에 있어서 우리 인간은 다시 비참한 짓을 안 할 것이다, 남북전쟁은 다시없을 것이다, 세계인들은 1차나 2차 대전 같은 무시무시한 전쟁을 안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것은 모양은 꽤 화려하고 찬란스럽습니다마는 인간성 자체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 진전이 없습니다. 따라서 어느 기회만 되면 다시 전쟁도 하고 무시무시한 싸움이 일어납니다. 우선 이란과 이라크의 7년 전쟁 보십시오. 같은 이슬람교도인데 7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혈투를 펼쳤던 것입니다. 왜 그런가? 이것은 법집(法執)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견해가 옳다는 독선적인 법집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만일 양편이 다 법집을 떠나서 정말 이슬람사상이 철두철미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게 될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 불교를 보십시오. 벌써 파가 몇 파입니까? 저 같은 사람은 감히 부끄러워서 불교의 이야기를 할 엄두도 못 냅니다마는 하여튼 무슨 종파 무슨 종교이든지간에 이와 같이 분파되고 분열된 상황을 보십시오. 과연 종교가 필요한 것인가? 종교의 상황을 볼 때 정의감에 불타는 분들은 종교의 무용론(無用論)을 펼치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 불교도 문중대립으로 얼마나 추태를 많이 보입니까. 이런 것 역시 다 부처님 법을 떠나서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법집을 못 떠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우리 불법뿐만 아니라 일체종교가 모두 다 법집을 떠나서 울타리를 헐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불교인의 경우에 아집(我執)이라 하는 나(我)라는 관념은 제법공(諸法空)이다 하니까 대강 떠나지마는 법집을 못 떠나니까 각 종파가 대립해 싸우는 것입니다.

 아함경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바라문이 부처님께 가서 “당신은 괴로움 또는 근심이 있습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 말씀이 “무엇을 잃었기에 내가 괴로워하고 근심할 것인가?”하셨습니다. 부처님 안목에서 본다고 할 때는 잃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천지우주가 부처님뿐인데 부족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부처님께 그 바라문이 다시 “당신은 기뻐할 것이 있습니까?” 라고 물으니 부처님께선 “무엇을 얻었기에 내가 기뻐할 것인가!” 하셨습니다.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천지우주가 모두 다 원만구족하게 갖추고 있으므로 사실 잃음도 없고 새로 다시 얻음도 없습니다. 행복은 우리가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이므로 나한테 있는 본생명이 일체 공덕을 다 갖추고 있는 부처이므로 새삼스럽게 우리가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다만 잘못 봐서 헛보는 것이지 바로 보면 그럴 것이 없는 것입니다. 부처가 되어버리면 또는 부처가 되는 과정에서도 한없이 무량법락(無量法樂)이 있으며, 모든 문제를 근본 본질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잃음도 없고 또는 얻음도 없이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법의 독선을, 법집을 떠나버리면 나와 남의 한계가 없고, 좋다 궂다 하는 시비가 있을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승찬대사가 신심명(信心銘)에서 ‘지도무난(至道無難)이오 유혐간택(唯嫌揀擇)이니’ 이것은 지극한 도는 어렵지가 않다, 다만 중생의 섣부른 상대적인 지식 가지고 옳다 그르다 모두 시비분별 하니까 어려운 것이니, ‘단막증애(但寞憎愛)하면 통연명백(洞然明白)이라’ 미워하고 좋아하는 그런 관념만 떠나버리면 훤히 틔어서 천지우주가 다 부처뿐이란 말입니다.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 이것이 우리 번뇌의 시초입니다. 우리 눈이 어두워지는 시초가 무엇이냐 하면, 원래 본래면목이 청정미묘한 불성인데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 때문에 우리가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어두워지면 그때는 그것이 무명심이 됩니다. 따라서 ‘단막증애하면’, 미워하고 좋아하는 것만 떠나버리면 ‘통연명백이라’, 천지우주가 오직 청정미묘한 부처님뿐이란 말입니다. 그 자리가 쉽지는 않겠습니다마는 우리가 그 자리에 가려고 애써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본무이(道本無二)라, 원래 도(道)라는 것은 둘이 아닙니다.

 예수나 공자나 노자 같은 분들이 성자가 아니라면 석가모니 마음하고 다르겠지만 성자라고 할 때는 부처님 가르침과 둘이 아닙니다. 성자라는 것은 우주의 본바탕, 인생과 우주의 본진리를 보고서 그대로 행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위대한 분들이 물론 역사적 배경 따라서 약간의 표현은 다르고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 중생의 그릇 따라서 설법하는 여러 가지 방편은 다르다 하더라도 근본 줄거리, 우주의 본바탕, 인생은 무엇이며, 어디서 왔는가,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같은 것입니다.

 우리 불교인도 마음을 가다듬어서 기독교의 요한복음서나 마태복음서 또는 누가복음서의 구절을 보십시오. 물론 부처님 가르침같이 철저한 것은 안됩니다마는 그래도 역시 중요한 법문은 같습니다. 따라서 그 같은 것을 궁극적으로 한다고 생각할 때는 내가 옳다 네가 그르다 아귀다툼하고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공연히 힘의 낭비일 뿐입니다. 한 세상 살다가는 인생, 몇십년 살다마는 인생, 정말 부처님만 믿어도 오히려 짧은 세상입니다. 본래 부처라 하더라도 우리가 오랫동안 성불의 길을 닦아 나가야하는 것입니다. 성불의 길로 나아가기만에도 우리 인생은 너무나 짧습니다. 이런 짧은 동안에 기독교나 유교나 모두가 근본은 불교와 같은 것인데 우리가 무슨 필요로 공연히 비방하기 위해서 힘을 낭비합니까?

 따라서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마땅히 아집 곧 나라는 집착을 떠나고, 또는 내 종교만 옳다하는 자기관념상 즉 법집을 떠나버린다면 각 종교의 울타리나 벽은 저절로 무너지고마는 것입니다. 또 앞으로 종교는 그래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종교무용론이 나오기 십상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본래 부처다, 본래 부처니까 그냥 내가 한 생각 돌이키면 곧장 부처가 되겠지, 이렇게 부처경계를 너무나 안이하게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마는 역시 부처님 공부하는 가장 지름길, 그야말로 가장 성불의 정문이라 하는 것은 참선 아니겠습니까? 참선을 우리는 성불의 정문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인들은 모두가 다 참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를 믿는 분들도 어느 분들은 염불이나 주문은 하기 쉬운데 참선은 어렵다 하고 처음부터 참선에 대해서 굉장히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참선같이 쉬운 것은 없습니다. 참선의 별명(別名)이 안락법문이라, 즉 안락스럽단 말입니다. 어째서 안락스러운가 하면, 참선하면 몸도 개운하고 좋아져서 생리건강에 좋고 또한 정신건강에 좋습니다. 마음도 개운하고 또 자기 분위기도 고요해집니다. 우주의 도리에 안 따르면 참선이 못됩니다. 참선이란 우주의 도리에 따르는 것이므로 누구한테나 참선은 좋습니다. 가사, 우리가 관세음보살은 저만큼 어딘가에 계신다, 계시다가 열심히 염송하면 우리를 도와주겠지. 이렇게 생각할 때는 염불은 되어도 참선은 못됩니다. 이것이 무엇일까, 저것이 무엇일까, 그런 의심하는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할 때라도 우리가 그냥 상대적인 문제나 의심하고 있으면 참선이 못되는 것입니다.

 본래면목 자리를 분명히 추켜들어야 합니다. 불심자리를 안떠나야 비로소 참선이 됩니다.

 보조국사 어록의 돈오(頓悟)라는 대목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본래 부처니까, 무한의 공덕이 본래 갖추어 있고 그 공덕이 부처와 더불어서 조금도 차이가 없다고 딱 느끼고서 참선해야 돈오(頓悟)라고 말씀했습니다. 물론 돈오라는 것이 지금 여러 가지 논쟁거리가 됩니다마는.

 따라서 부처라 하는 우리 마음의 본래면목 자리를 분명히 느끼고서 그 자리를 안 떠나려고 해야 선(禪)인 것입니다.

 가사, 관세음보살님을 외운다 하더라도 관세음보살을 저만치 밖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천지우주의 자리, 천지우주가 부처님뿐인데 천지 우주의 부처님자비가 관세음보살이다, 부처님지혜가 문수보살이다라고 느낄 때는 그것이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좋아서 하느님을 부른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천지우주가 모두 부처님뿐이다, 이렇게 느끼고서 하느님을 부르면 참선이 됩니다. 우리 마음이 현상적인, 유한적인 문제를 떠나서 절대적인 본래면목에다 우리 마음을 머물게 하고 안주(安住)를 시킨다면 모두가 참선이 됩니다.

 더 완벽히 말하면 천지우주는 바로 지금 참선을 하고 있습니다.

 천지우주가 다 부처거니 바로 참선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천지우주의 그 도리에 따르면 그것이 바로 참선이란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그런 것을 여묘포서(如猫捕鼠)라 합니다.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 조금만 한눈팔면 쥐가 하도 잽싸니까 도망가고 맙니다. 집중해서 노려야만이 쥐가 도망 못가고 고양이한테 잡히게 됩니다. 그와 같이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천지우주가 부처 아니라는 생각이나 나와 남이 따로 있고 분별시비하는 생각을 다 털어버리고서, 모두가 다 무량공덕을 가진 부처뿐이라는 이 생각을 바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생각을 한 눈 팔지 않고 한다 하더라도 우리 중생은 과거 전생에 지은 버릇, 금생의 버릇이 굉장히 많아서 자꾸 마음이 빗나갑니다.

 그 때는 여계포란(如鷄抱卵)이라, 마치 어미닭이 병아리를 안 듯이 말입니다. 어미닭이 병아리를 부화할 적에 21일 동안을 제대로 안아야 하는데 사흘정도 안다가 그냥 훌쩍 떠나버리면 계란이 병아리가 못 됩니다. 21일 동안을 진득하게 참고 참아야만이 병아리가 나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원래 부처인데도, 즉 계란이 병아리가 될 수 있는 힘이 다 갖춰 있는데도 참아야 하듯이, 어미닭이 계란을 품듯이 한 눈 팔지 않고 부처님 자리를 지켜서 염념상속(念念相續) 이어가야 합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일행삼매(一行三昧)입니다.

 천지우주가 다 부처다 하는 것은 일상삼매(一相三昧)에 해당하고 그러한 일상삼매, 천지우주가 다 부처뿐이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이어가는 것은 일행삼매(一行三昧)에 해당합니다.

 이와 같이 천지우주가 부처뿐이라는 생각을 계속적으로 이어가는 일행삼매를 또한 금강삼매(金剛三昧)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하는 것이 이른바 무염오수행(無染汚修行) 즉, 오염되지 않은 수행이라 합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좋다 궂다 시비를 가리고 또는 부처와 중생이 따로 있다는 생각을 괜히 해대면 그것이 오염된 수행인 것이지 무염오수행이 못 되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범부라 하더라도 역시 참선할 때는 적어도 내가 부처가 다 된 셈치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별 차이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천지우주는 조금도 차이가 없는 부처님이므로 부처님을 안 떠나고서, 잘나도 부처님 못나도 부처님 넘어져도 부처님입니다. 죽으나 사나 옆을 보나 뒤를 보나 모두 다 부처님뿐입니다. 따라서 그 생각을 안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이 선(禪)이 됩니다. 즉 본래면목을 안 떠나는 것이 선(禪)인 것이고 그래야 오염을 떠난 무염오수행입니다. 무염오수행이 되어야 그때는 돈오돈수(頓悟頓修)인 것입니다. 천지우주가 부처님뿐이라는 생각을 딱 해야 비로소 돈오(頓悟)인 것이고 말입니다. 물론 이론도 더러 있을 수가 있으나 그 생각을 안 떠나고 수행을 해야 돈수(頓修)란 말입니다. 이것이 정통적인 해석인 것입니다.

 천지우주가 부처님의 생명의 광명이기 때문에 대일여래(大日如來)라, 우주가 바로 대일여래입니다. 또한 우주의 생명이 나한테 똑같이 다 들어있습니다.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거니, 너와 나와 우리가 둘이 아니거니, 일체존재는 다 간격이 없이 불성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천지우주가 부처님의 광명뿐이거니, 비로자나불이라, 광명변조 즉 광명이 두루 해 있다는 말입니다.

 비로자나불을 우리말로 풀이하면 광명변조입니다. 에너지 광명이 우주에 꽉 차 있습니다.

 물질의 근원에는 광명만, 불성광명만 충만해 있습니다. 공부를 하면 광명을 분명히 보는 것입니다. 도인들은 모두 그런 광명을 보고, 자기 생명과 자기 모두와 광명과 하나가 딱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무아무소유(無我無所有)라, 나와 남이 없고 또 내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나무아미타불이라, 아미타불이라는 것은 무량광불, 부처님의 광명이 우주에 충만해 있어 무량광불입니다. 그 가운데는 행복이나 여러 가지 가능성이나 안락 모두가 충만해 있기에 환희광불입니다. 기쁨과 환희가 충만해 있습니다.

 광명과 행복과 환희가 우리 자성, 우리 인간의 본성 가운데 가득 차 있습니다. 인생은 그것뿐인데 우리가 잘못 본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치를 하나 또는 경제를 하나 또는 학교스승이 되나 어떤 지위에 있든지간에 인생의 본래면목자리를 딱 느끼고서 그 자리를 안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원의 차원에서 봐야지 그냥 중간쯤 되는 데에서 본다면, 같이 어우러지고 같이 시야비야하고 맙니다.

 우리는 순간찰나도 영원의 차원에서, 불성차원에서 문제를 조감하고 반조해서 봐야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행동 하나를 모두가 성불하기 쉽듯이 말입니다. 우리 이웃을 모두가 성불로 이끄는 것이 우리 불자의 보살행이 되지 않겠습니까.

 천지우주는 바로 무량광불입니다. 대일여래입니다. 천지우주는 부처님 광명으로 충만된 비로자나불입니다.

 우리 역시 그와 같이 똑같은 아미타불인 것이고 우리 자비는 관음보살이고 우리 지혜는 문수보살입니다. 조금도 간격과 틈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어야만이 인간은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하늘 아래나 하늘 위에 가득 차 있는, 더 나을 것이 없는 가장 고귀한 인간의 존재입니다.

 이렇게 해서 금생에 한사코 성불하십시오. 우리가 성불할 때에 우리 이웃도 정화가 될 것이고 우리 사회도 정화가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 이것으로 마칩니다.


 <1989년 3월 19일 KOEX 대강당에서 서울 금륜회 창립법회시 법문내용입니다. 3회로 나누어 연재하는 중 마지막 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