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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3. 광륜

광륜 13호. 천지우주는 바로 지금 참선을 하고 있습니다 (1)

【 광륜 13호 2005년 봄 】

천지우주는 바로 지금 참선을 하고 있습니다 (1)


 

 

 저희들이 출가해서 맨 처음에 받는 계가 사미십계입니다.

 사미십계 가운데서 여섯 번째가 불좌와고광대상(不坐臥高廣臺上)인데, 출가수행자는 청정한 생활을 해야 하므로 마땅히 자기 분수에 넘는 높고 또는 넓은 자리에 앉지 말라는 계입니다.

 그런데 지금 저는, 저 산간 토굴에 있는 중이 이와 같이 자기 분수에 넘는 높은 자리에 앉고 보니, 마치 고슴도치가 쥐구멍에 들어간 듯한 모양으로 굉장히 불편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인연에 따라서 이와 같이 할 수 없이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열반경에, 여러 가지 말씀이 많이 있으나 그 가운데 사자후결정설(獅子吼決定說)이라. 사자후는 부처님의 참다운, 조금도 에누리 없는 일승법문이 아니겠습니까. 부처님의 가장 수승한 법문 가운데서 결정적으로, 조금도 오류가 없는 그러한 법문이 사자후결정설인데 그것이 무엇인가하면, 여래상주무유변역(如來常住無有變易)이며 상주도량(常住道場)하시고 상전법문(常轉法門)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언제나 어디에나 항시 계시면서 조금의 변역도 없는 것이고, 우리가 불법을 성취하는 도량에 항시 머물러 계시며, 모든 중생이 다 본래면목을 성취하는 성불의 법문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장엄스러운 우리 불자님들이 모이는 좌석뿐만 아니라 산간이나 마을이나 또는 하나의 싸움판이나 어디에나 부처님은 항시 계시면서 언제나 최상법문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은 우리하고 떠나서 멀리 계시는 것인가?

 부처님은 우리를 떠나서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부처님은 가득 차 계시며, 또한 우리가 안 보이는 공간에도 가득 차 계십니다. 그렇게 계시면서 우리 중생의 오염된 귀로는 들을 수 없는, 청정미묘한 법문이 항시 계시는 것입니다. 다만 중생이, 제한된 업장에 가리워져서 미처 못 듣고 있을 뿐입니다.


 저는 이와 같이 서원이 충만된 우리 불자님들, 우리 소중한 법우님들을 대할 때 감격하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이 자리는 이렇게 평온스럽고 아늑합니다마는 한 발 나가면 정치싸움, 경제싸움 또는 구세대와 신세대의 싸움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불자님들이 세상에 계시는데, 왜 사회는 이와 같이 혼란스러운 것인가?

 현재 통계 낸 것을 보면 기독교인구, 불교인구, 이슬람인구, 또는 대종교인구, 유교인구 등 모두가 6,000만이 훨씬 넘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다 종교를 믿고도 나머지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분열이 생기고 싸움이 생기는가를 생각할 때 우리는 깊이 자기성찰을 아니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이건 불교이건 또는 무슨 종교이든지 간에 모두가 사람사람끼리의 화합, 또는 고도한 도덕률을 내세워서 인간의 평화와 정의를 말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마는, 그런 종교인들이 꽉 차고 종교인 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도 이와 같이 혼란스럽습니다. 이는 어째서 그러는가? 각기 자기정도에 따라서 여러 가지 분석도 하고 비판도 합니다마는, 우리가 흐린 시냇물을 맑히기 위해서는 제 아무리 중류나 하류에서 이래저래 방편을 다 쓴다 하더라도 흐린 물이 맑혀지지가 않습니다. 흐린 시냇물을 맑히기 위해서는 저 상류에 올라가서 상류근본을 다스려야 합니다.

 중국의 황하를 중간에서 아무리 애를 써서 제방을 쌓고 별 짓을 다한다 하더라도 황하물은 백년하청(百年河淸)이라, 상류에서 계속 토석 또는 누런 물이 흘러 내려오니 황하물을 조금도 맑힐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도 여러 가지 정신적인 시도, 이데올로기적인 문제, 가지가지 종교의 덕목설, 도덕설 등이 많이 있다 하더라도 이 사회가 혼란스러움을 면치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이른바 인간의 근본악, 기독교식의 표현으로 말하면 원죄, 근본원죄말입니다. 인간의 근본문제, 근본무명을 다스리지 못한데서 오는 것입니다.


 저는 우선 근본악, 인간의 근본무명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근본무명과, 근본무명을 어떻게 우리가 벗어나야 할 것인가? 그러한 문제를 요지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인간적인, 상대유한적인 여러 가지 시도가 많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 것으로 해서는 사실 상대에 그쳐버리고, 불교의 말로 하면 윤회에 그쳐버리고, 참다운 해탈이라든가 참다운 인간의 행복은 얻을 수가 없습니다. 가사 니이체같은 분은 초인을 내세워서 인간의 악을 제도하고자 애쓰고 또 싸르뜨르같은 분은 ‘실존은 휴머니즘이다’라고 말해서 역시 인도적인 말을 내세웠지만 그런 것으로 해서는 인간 사회는 제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각기 철인들이나 종교인들이 가지각색의 말을 많이 했다 하더라도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근본악 문제, 인간성에 원래 갖추고 있는 번뇌문제, 근본무명을 제도 않고서는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를 이끄는 분들이 모두가 그 근본인간성문제, 그런 가장 기본적인 철학문제를 무시하고서 정치를 말하고 경제를 말하면 혼란을 면할 수가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 도리입니다.


 부처님경전에 보면 사인관세(四人觀世)라는 네 사람의 차원 따라서 인간의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법문이 있습니다.

 맨 처음에 가장 낮은 차원의 사람들은 일반 중생의 세상을 안락스러운 처소로 봅니다. 인간은 행복스러워야 하고 음식도 잘 먹어야 하고, 기왕이면 옷도 화려하게 입어야 하는 등 인간의 의식주에 관해서 화려를 추구하고 안락을 추구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그런 것이 일반 범부의 심경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조금만 거기에 어긋나면 반발도 하고 비판도 합니다. 인간은 안락스러운 것이다 인간은 그저 잘 먹고 잘 살다가 쾌락을 만끽하고 가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기왕이면 명예나 어떤 것이나 남보다 앞서야 하겠다는 굳은 집념을 가진 분들은 모두가 인생의 목표를 안락이라는 데에다 세우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조금 더 올라가서 불교에서 말하는 소승들은 인간을 어떻게 볼 것인가? 소승은 인간을 과학적인 범위 내에서 보기는 보더라도 근본을 다 못보고 인간을 고(苦)로, 고통으로 봅니다.

 어째서 고(苦)인가 하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냥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 현대인들은 과거 전생을 무시하는 분도 있습니다만 과거 전생은 명명백백한 사실입니다. 금생에 자기생명이 있다고 생각할 때에 자기생명의 근원인 전생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만일 전생을 부인하면 인과를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형태가 금생 같은 사람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생명은 분명히 과거 전생이 있습니다. 따라서 금생 생명은 과거 전생에 지은 대로 받습니다. 과거 전생에 사람으로 태어날 정도로 밖에는 우리가 선근이 부족했기에 이렇게 인간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나올 때부터 그런 제한된 고통을 우리가 안 겪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가사, 많이 닦아서 천상에 올라갈 때는 나올 때부터 고통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천상중생들은 어머니 뱃속에서, 태 안에서 고생하다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런 중생들은 고통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고, 또 더 올라가서 극락중생들은 화생을 합니다. 극락에 관해서도 우리 부처님을 믿는 분들 역시 눈에 안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부인도 합니다만 극락세계도 역시 명명백백한 사실입니다. 다만 극락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그런 차이문제인 것이지 극락의 실존적인 것은 명명백백한 사실입니다.

 극락중생들은 화생, 한 생각 자기 마음으로부터 마음만 청정하면 그냥 순식간에 태어납니다. 따라서 극락중생은 나올 때 생의 고통이 없습니다. 생의 고통이 없으므로 거기에 따르는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라든가, 인간보다도 못한 중생은 응당 피할 수 없는 생과 늙음과 병과 죽음의 고통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품은 굉장히 깊이가 있고, 무한하기 때문에 유한적인 어떤 것을 준다 하더라도, 이런 한계상황을 인간의 성품은 절대로 만족을 못 취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불성(佛性)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성이 불성으로 하나가 되기 전에는 언제나 불만스러운 것을 면치를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본래 불성이기 때문에 제아무리 못났다 하더라도 구하는 것은 역시 무한을 구합니다. 행복도 지혜도 다 한계 없는 무한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지은 복력이, 인간된 제한성이 그와 같은 무한의 복력을 다 채울 수가 없습니다. 채울 수가 없기에 불안스럽고 좌절을 하고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 할 때에 인생은 소승이 보듯이 정말 고(苦)가 아닐 수 없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은 아픈 사람들의 고통을 모르고, 아직은 안 죽어봤으니까 죽음의 고통도 모릅니다만 누구나 늙어야 하고 아파야 하고 결국은 시일이 되면 가고 맙니다. 마땅히 생각해 보면 생각해 볼수록 그러한 제한된 인간이 고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인간을 고(苦)라고 생각할 때는 웬만한 것은 참을 수가 있는 것인데 인생을 쾌락이라고 규정을 세운 사람들은 조금만 고생스러우면 못 참습니다. 본래 인간은 응당 쾌락스러운 것인데 왜 고통을 받을 것인가? 그러나 소승들이 깊이 과학적으로 생각해보면 인생은 다 고통입니다. 안락스러운 것 같이 보이지만 그것은 순간찰나고 또 그 근원은 모두가 고(苦)에서 연원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보다 한 단계 올라가 보살들은 어떻게 볼 것인가?

 사인관세(四人觀世), 이것은 우리 중생이 인간을 어떻게 보는 것, 또는 소승은 어떻게 보는 것, 또는 보살이 보는 것, 또는 가장 본래면목 본래인간자리에 들어간 부처가 보는 것, 이 네 차원에서 인간을 보는 견해를 지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보살이 본다 할 때는 우리 인생이나 모든 것을 텅 빈 공(空)으로 봅니다.

 내 생명,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는 또 하늘의 성수(星宿)와 뭇 산천(山川)이 있는데 왜 이것이 공(空)인가?

 공(空)이라는 문제를 우리 불교를 믿는 분들은 굉장히 어렵게 생각을 하고, 이 관문을 잘 못 넘어섭니다. 그러나 텅 빈 공(空)이라는 관문을 못 넘어서면 인생의 고액을 면할래야 면할 수가 없습니다.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하니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라, 오온법(五蘊法)이라는 것은 물질과 정신 즉, 우주만유의 모든 현상에 있는 모든 존재가 오온법 아니겠습니까. 인간과 일체존재가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다 비어있음을 비추어 통찰해야만이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라, 인생고를 떠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박학다식(博學多識)하더라도 인생 모든 존재가 비었다하는 본래적인 투철한 견해가 없으면 인생고는 못 떠납니다. 사회가 혼란스러운 것도 자기 개인적으로 갈등을 일으키는 것도 또한 가정적으로 불화스러운 것도 모두가 다 텅 비었다 하는 공(空)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우리 불교인들이나 현대인들의 중대한 과제가 있습니다. 한사코 제법개공(諸法皆空)이라 하는 공(空)을 넘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째서 공(空)인 것인가? 분명히 있는데 왜 공(空)인 것인가? 가장 정밀과학이라는 현대 물리학에서도 분명히 물질은 분석해 들어가면 나중에는 텅 비어버린 에너지만 남는다는 것을 증명했지마는, 배운 사람도 역시 공(空) 그러면 잘 납득이 안 갑니다. 그런데 하물며 부처님 당시에 그런 무식한 때에 공(空)을 말해본 들 어떻게 누가 잘 알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 법문도 초기에는 쉬운 것부터,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이와 같이 중생의 업장차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차원 실존차원에서 생각할 때는 텅 비었습니다. 왜 비었는가? 용수보살이 지으신 중론(中論)에 보면 인연소생법 아설즉시공(因緣所生法 我設卽是空)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인연따라서 생겨난 법은 모두가 다 곧바로 공(空)이다. 분석한 뒤에 공(空)이 아니라 즉시공(卽是空)이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空)이 아니라 색즉공(色卽空), 물질이 바로 공(空)입니다. 다만 그런 견해의 차이가 업장에 가려있고 무명을 못 떠나는 우리 중생이 생각을 할 때엔 명명백백히 있지마는, 성자의 우주의 본실상을 볼 수 있는 청정안목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명명백백히 바로 공(空)인 것입니다. 어떠한 것도 인연을 떠나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인과 연이 잠시 합해서 순간도 머물지 않는 것이 일체현상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의 원자구조를 보건 분자구조를 보건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를 본다 할지라도 어떠한 것이든 모두가 잠시 합해져서 순간찰나도 머물음이 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른바 만법유전, 만법이 모두가 다 운동하고 있습니다. 만법이 다 순간찰나도 머물음이 없이 운동하고 있는데 어떠한 존재도 고유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제아무리 자기얼굴이 잘났다고 하더라도, 순간찰나 앞과 순간찰나 뒤와의 얼굴이 같지가 않습니다. 다만 중생이 차이를 못 볼 뿐입니다.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 역시 그때그때 신진대사가 되어서 구세포(舊細胞)는 죽어지고 새로운 세포가 나오는 것인데 우리 중생은 그것을 못 느끼니까 내 창자는 항시 그대로인 창자다. 또는 막 태어난 나와 오십이나 육십 먹을 때의 나는 똑같다. 이와 같이 생각하지만, 사실은 같지가 않습니다.


 모든 물질을 구성한 원자구조는 불확정성 존재이기 때문에 어떠한 것도 일정한 것이 없습니다. 하물며 그런 원자가 모여서 원소가 되고, 또 원소가 모여서 각 분자구조가 되고, 그런 것이 모여서 이루어진 물질이 일정하니 고유한 상태가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가사 전자현미경으로 본다고 할 때, 잘난 자기 몸뚱아리나 자기 얼굴 등 어떤 것이든 모두가 하나의 산소나 수소 등 각 원소가 빙빙, 결합되어서 운동하고 있습니다. 엄격히 따지면 이것밖에 아닌 것인데 우리는 고유한 자기라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불교는 엄격한 실존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모두가 우주의 실사에 입각한 것입니다. 조금 더 차원이 높은 법문, 낮은 법문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본뜻은 모두가 다 실상에 입각해서 우리 중생을 실상까지 이끄는 법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자기 개인적인 갈등 혹은 어떠한 조직체의 갈등이나 반목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이 나라는 존재, 천지우주의 모든 존재가 다 인연생이기 때문에, 인연 따라서 잠시간 합해진 존재이기 때문에 사실은 나라고 고집할 것이 없습니다. 나라고 고집할 것이 없으니 내 소유나 자기에 딸린 권속이 자기의 것이라고 고집할 필요도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아버지 되는 책임을 망각하고 어머니 되는 자기위치를 떠나라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인연 따라서 최선을 다한다 하더라도, 자기성불을 도모하고 자기 권속의 성불을 도모하고 자기 벗의 성불을 도모하고 일체중생의 성불을 위해서 우리가 모든 힘을 다 바친다 하더라도, 우리의 바른 인생관 바른 가치관만은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두가 본래는 텅 비었다 하는 본래적인 실상을 느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부처님은 어떻게 보실 것인가?

 사실은 보살이 텅 빈 공(空)으로 본다 하더라도 공(空)으로 보는 그것만으로는 완전한 것이 못됩니다. 다만 현상적인, 우리 중생이 보는 그것만 비었다는 것이지 아무 것도 없는 그 때는 허무만입니다.

 부처님이 본다고 생각 할 때는 그때는 유심(唯心)입니다. 이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이 몸도, 또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금도 다이아몬드도 이것이 다 오직 마음입니다. 이것 역시 우리 중생들은 납득이 안가는 문제입니다. 어떻게 해서 다 마음일 것인가? 이렇게 천차만별로 많은 불자님들이 모여 계신데 왜 이분들이 모두가 다 마음일 것인가? 그러나 분명히 이것도 명명백백히 마음입니다. 삼계유심이요 만법유식이라. 비단 이 경계뿐만 아니라 천지우주가 다 마음뿐입니다.

 욕계나 색계나 무색계나 삼계 모두가 다 식(識)뿐입니다.

 삼계유심(三界唯心)이란 말이나 만법유식(萬法唯識)이란 말은 똑같은 뜻입니다.

 이 자리는 참선공부를 열심히 많이 하신 분도 계시고 여러 훌륭한 지성적인 분도 많이 계시리라고 믿습니다만 가사 우리가 참선을 한다 하더라도 부처님께서 보신 안목을 우리 안목으로 하지 못하는 한에는 참선이라고 말을 못 붙이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모두가 다 오직 마음뿐이다 하는 유심(唯心)을 꼭 잘 느끼셔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개인적인 갈등도 쉬고 참선공부도 제대로 할 수가 있습니다.

 어째서 모두가 다 마음인가 하면,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보살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주가 다 텅 빈 공(空)입니다. 공(空), 여기까지는 현대 물리학도 역시 다 증명을 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물질은 결국은 끄트머리 가서는 다 에너지만 남아버립니다. 알맹이 입자도 아니고 파동도 아니고 알 수 없는 그 무엇이고 결국 보다 미세한 데에 가서는 -,+ 라는 전하도 없고 또는 물질이라는 질량이 없습니다. 질량이 제로(0)이고 전기적인 대전관계도 제로(0)이기 때문에 물질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정밀과학인 물리학이 증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물리학이 저 에너지가 되어버리는, 에너지가 무엇인가 하는 그 소식을 다 알면 좋은데 물리학은 거기까지는 다 모릅니다. 어느 학문도 어느 종교도 물질이 텅 비어버리는 그 자리를 모르고 있습니다. 오직 알고 있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뿐입니다. 이것은 우리 불교인들이 아전인수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 역시 명명백백한 사실입니다.       (계속)


<1989년 3월 19일 KOEX 대강당에서 서울 금륜회 창립법회시 법문 내용입니다. 3회로 나누어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