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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청화 큰스님 서적/5. 원통불법의 요체

제 5장 삼계(三界) 해탈(解脫)--제 1절 삼계(三界)와 해탈(解脫)

 제1절 삼계 (三界)와 해탈(解脫)


  1. 삼계(三界)


三 界 (삼 계)

 無色界 

 (무색계)

 非想非非想處(무상비비상처)

 無所有處(무소유처)

 識無邊處(식무변처)

 空無邊處(공무변처)

色 界

(색 계)

淨梵地(정범지)

 大自在天(대자재천)

 和音天(화음천)

 色究竟天(색구경천))

 善見天(선견천) 

 善現天(선현천) 

 無熱天(무열천) 

 無煩天(무번천) 

四禪天(사선천)

 廣果天(광과천)

 福生天(복생천)

 無雲天(무운천)

三禪天(삼선천)

 遍淨天(편정천)

 無量淨天(무량정천)

 少淨天(소정천)

二禪天(이선천)

 光音天(광음천)

 無量光天(무량광천)

 少光天(소광천)

初禪天(초선천)

 大梵天(대범천)

 梵輔天(범보천)

 梵衆天(범중천)

欲 界  (욕 계)

空居天(공거천)

 他化自在天(타화자재천)

 化樂天(화락천)

 兜率天(도솔천)

地居天(지거천)

 須夜摩天(수야마천)

 忉利天(도리천)

  四天王天

  (사천왕천)

東持國天

(동지국천)

南增長天

(남증장천)

西廣目天

(서광목천)

北多聞天

(북다문천)


 우리가 보통 '삼계를 떠난다' 또는 '삼계에 머물러 있다'하는 말들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마는, 삼계(三界)는 중생이 생사 윤회하는 경계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삼계를 벗어나야 하고 삼계를 벗어나는 것은 이른바 성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 전생의 선근에 따라 비약적으로 빨리 벗어나는 분도 있기는 하나 보통은 점차로 공부 정진 따라서 닦아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정에 들어가는 초선정(初禪定), 2선정, 3선정, 4선정 이런 선정은 모두가 다 각 천인(天人)의 선근 정도와 상응되는 것입니다. 가령, 초선천(初禪天)에 나기 위해서는 초선정을 닦으면 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초선천에 있지 않더라도 마음 정도가 초선정에 들어갔다면 벌써 초선천에 있는 존재, 그런 천인들과 정도가 같다는 말입니다. 또, 우리가 2선정(二禪定)에 들어가면 2선천에 있는 천인들과 똑같은 능력과 선근이 되는 것입니다.


 삼계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말하고 욕계는 6욕천(六欲天)으로 되었는데 우선 지거천(地居天)과 공거천(空居天)으로 나눕니다. 지거천은 소위 각 원소의 단계인 지진(地塵) 곧, 지구나 토성이나 다른 별들이나 질료(質料)를 의지해 사는 중생들이 지거천입니다. 공거천은 업장이 좀 가벼워서 지거천을 떠나 있는 허공 가운데 사는 중생입니다. 이런 천인들은 몸뚱이가 우리 몸뚱이 같지가 않기 때문에 허공에서 마음대로 공간을 집으로 알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거천에는 사대왕천(四大王天) 즉 사왕천(四王天)과 도리천(忉利天) 수야마천(須夜摩天) 즉 야마천의 셋이 있고 다시 사왕천 밑에는 동쪽에 지국천(持國天), 남쪽에 증장천(增長天), 서쪽에 광목천(廣目天), 북쪽에 다문천(多聞天)으로 구분됩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우리 인간이 존재하는 곳은 욕계의 4왕천 가운데 남쪽 증장천(增長天)에 딸린 남섬부주(南贍浮洲) 곧 염부제(閻浮提)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자들은 재가, 출가를 불문하고 사실은 벌써 그 업장이 상당한 정도로 정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욕계에 있다 할지라도 얼마만치 욕심을 떠나 있는가? 번뇌를 떠나 있는가에 따라서 그에 상응한 높은 경계에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공거천은 도솔천(兜率天), 화락천(化榮天),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셋인데 다 천상이니까 천상 나름대로 통력(通力)도 있습니다. 삼명육통(三明六通)같은 원래 법성에 갖추고 있는 통력은 못하더라도 그대로 그 업력에 따른 보통(報通)이 있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어머니인 마야(Maha-maay摩耶) 부인은 세연(世緣)을 마치고 도리천에 태어났습니다. 역시 그 어머니가 청정하였기 때문에 그런 훌륭한 세존(世尊)을 낳았겠지요. 흔히 세간에서 알기는 불교는 자기 부모도 모르고 윤리를 무시한다고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머님을 위해서 3개월 동안 도리천에 올라 가셔서 어머님과 도리천의 천상인들을 위해서 설법을 하셨던 것입니다. 어머니도 역시 아들을 낳고 7일 만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 아들에 대해서 두고두고 안스러운 마음이 남아 있었겠지요. 그래서 부처님은 도리천에 올라가서 세상은 허망하고 생사가 본래 없는 것이라고 법문을 하셨을 것입니다. 모자(母子)의 정이라는 게 그렇게 두터운 것입니다. 우리가 출가할 때 '은애불능단(恩愛不能斷)이나' 은혜와 사랑을 끊기가 어렵지만 '기은입무위(奈恩入無爲)면' 은혜와 사랑을 버리고 상(相)을 여읜 무위법에 들어가면 '진실보은자(眞實報恩者)라' 진정으로 은혜를 갚는 것이로다. 라는 게송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때는 어머니 마야 부인이 내려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비감(悲感)에 잠겨 관을 지켜보고 있으려니까 불현듯이 관문이 열리고 세존께서는 가부좌한 채로 어머니에게 마지막 설법을 하셨습니다. "어머니시여! 제행무상이니 회자정리(會者定離)요 시생멸법(是生滅法)입니다. 세상일은 다 무상하여 만나면은 꼭 헤어지는 것이요, 낳는 것은 필시 죽기 마련이니 슬퍼하지 말으시고 이별과 생사를 초월한 부처님 법을 생각하소서"라고 하시니 어머니께서 그제야 슬픔을 진정하고 안위(妾慰)의 미소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도리천도 중생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훌륭한 곳입니다. 도리천에만 가도 음식을 먹고 싶으면 저절로 음식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천상들은 분단식(分段食)을 먹는 것이 아니고 향기만 맡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야마천은 더욱 말할 것도 없고 도솔천, 화락천, 타화자재천 이렇게 올라갈수록 받는 안락이나 능력이 더욱더 수승한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화락천(化樂天)은 문자 그대로 가령, 괴로운 경계도 전화위복(轉禍爲福)을 시켜서 기쁘고 즐거운 경계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있는 타화자재천은 욕계천의 가장 위층인데 마왕(魔王) 파순(波旬)은 여기에 삽니다. 따라서 마왕은 보통 밑에 있는 천상보다도 훨씬 더 능력을 잘 부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앉아 있으면 더러는 이상한 모양을 내어 나투기도 하고 또 꿈속에 현몽하여 우리 공부를 방해하기도 합니다. 마왕은 하여튼 우리가 욕계를 벗어날세라 친구 모습으로 오기도 하고 이성의 모양으로 오기도 해서 가지가지로 훼방을 놓는 것입니다


 그 다음, 초선천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삼매를 닦아서 욕계번뇌를 떠나야 비로소 초선천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입정(入定)이라, 선정에 든다는 것은 욕계번뇌를 떠나야 되는 것입니다. 욕계번뇌의 가장 중요한 것은 식욕(食慾), 잠욕〔睡眼欲), 음욕(婬欲)입니다. 욕계서도 식욕과 잠욕과 음욕의 정도에 따라서 차이가 있습니다. 가사, 음욕에 있어서도 사대왕천과 도리천까지는 남녀 이성의 결합이 있는 셈이지만 야마천에 올라가면 이성 결합이 없이 단순히 서로 포옹할 정도이고 그 다음 도솔천은 악수만 하는 정도고 화락천은 서로 피차 바라보고 미소만 띄우는 정도이며 그리고 마지막 타화자재천에 오르면 그 음욕이 눈으로만 눈웃음 짓는 정도라고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참으로 미묘하고 감사하고 감격스럽습니다.


 우리가 공부를 해서 그와 같이 욕심을 다 떠나면 초선정에 들어 천상으로는 초선천에 납니다. 중생들이 정진하여 공부가 좀 되었다고 하더라도 자기를 점검해서 욕심이 남아 있다면 아직 욕계정(欲界定)이라, 욕계에서의 정신통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른바 명상법이나 닦아서 조금 더 맑아진 것이지 선정(禪定)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공부하는 분들은 자기 점검에 엄격해야 합니다.


 범중천(梵衆天), 범보천(梵輔天), 대범천(大梵天)이 초선천의 세 하늘입니다. 이것은 역시 점차로 번뇌가 희박해져 가는 정도에 따라서 층별(層別)의 차이가 있습니다.


 2선천에 들어가서는 온전히, 그야말로 광명이 훤히 빛나서 광명뿐입니다. 본래가 광명인데 삼독(三毒) 오욕심(五欲心)에 가려 있다가 선정이 깊어짐에 따라 차근차근 빛나는 것입니다. 처음 소광천(少光天)에서는 조금 덜 빛나고 그 다음에는 무량광천(無量光天)이라, 훤히 한량없이 빛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광음천(光音天)에는 광명으로 해서 조금도 막힘이 없이 누구한테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도 마음만 먹으면 광명으로 서로 상통하여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영통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집이 세고 강강(强剛)한 천인(天人)이 허물을 범할 때 옆에서 충고하여도 듣지 않는 천인들에게는 상대하지 않는 벌을 주는 범단지법(梵壇 brahma-danda)이라 하여 서로 말하지 않고 상대하지 않는 묵빈대치(黙擴對治)법이 있습니다.


 좁게 보면 초선천만 범천(梵天)이고 넓게는 초선천  2선천 3선천 4선천을 모두 범천이라고 말합니다. 브라만(Brahman)이 범천에 소속된다고 할 수 있지요. 이런 범천, 곧 4선천에 있는 중생들은 아직도 중생인지라 서로 그릇된 짓도 하는데 그 가운데 말을 안 들으면 그 벌칙이 상대를 안 해버리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 들으시려 하자 아란존자가 '차익(車匿)비구와 같이 고집 센 강강(剛剛)한 비구는 어떻게 다스려야 합니까'하고 여쭈니까 '범단지법으로 대처하라' 하셨습니다. 충고를 하여 들으면 좋은데 안 들으면 우리 출가사문이 서로 싸울 수는 없는 것이고 말하지 않고 상대하지 않는 묵빈대치(黙壙對治)의 법으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3선천의 소정천(少淨天)은 청청하기는 하나 아직은 번뇌의 때가 좀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훨씬 더 맑아져서 한량없이 맑은 경계를 얻음은 무량정천(無量淨天)이고, 그 다음은 변정천(遍淨天)이라, 끝도 가도 없이 삼천대천세계 구석구석까지 맑은 경계입니다. 부처님 나라는 한 삼천대천세계가 전부가 아닙니다. 삼천대천세계가 무량으로 있는 것입니다.


 4선천은 번뇌의 그림자가 없는 무운천(無雲天), 그리고 번뇌의 구름이 없기 때문에 복이 저절로 오는 복생천(福生天), 그리고 넓이가 삼천대천세계와 같이 광대무변한 광과천(廣果天)입니다.

 4선천을 의지해서 정범지(淨梵地)가 있는데 보통 4선천의 광과천까지는 일반 외도나 천중들이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정범지는 청정한 곳이므로 성자만 가는 곳입니다.


 정범지에 있는 무번천(無煩天)은 번뇌가 없는 천상경계요, 무열천(無熱天)은 번뇌가 없으니 항시 청량미를 맛보는 경계요, 선현천(善現天)은 모두가 다 좋게만 광명으로 보이는 경계로서 우리 중생들은 기분이 좀 나쁘면 다 나쁘게 보이고 밉게 보이겠지만 여기서는 벌써 애증(愛憎)을 떠난 경계라는 말입니다. 또는 선견천(善見天)은 모두가 좋게만 보이니 우리의 견해도 응당히 선량하게 되는 경계요, 색구경천(色究竟天)은 모든 존재의 끄트머리 즉 모든 광명의 본질로서 가장 청청한 광명을 음미하고 생활하는 하늘의 경계입니다.


 그 다음 화음천(和音天)은 신묘한 음률(音律)이 우주에 충만해 있는 경계입니다. 우리가 금강경에 색(色)이나 소리로는 여래(如來)를 볼 수 없다는 말씀이 있으니까 색은 별것이 아니고 광명이 별것인가? 극락세계나 영원의 세계는 소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우주란 것은 세간적인 때 묻은 색이나 소리를 초월한 영원한 묘색(妙色)과 묘음(妙音)이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정확한 수리로써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우주 자연의 도리에 어긋나고 잘못 살면 역사의 심판을 받습니다.


앞서 언급한 광명은 태양 빛같이 눈부신 광명이 아니라 청정 적광(寂光), 정광(淨光)입니다. 그런 적광은 영생으로 항시 상주부동한 것이고, 음향이나 하나의 리듬(rhythm)도 화명애아(和明哀雅)라고 하여 법화경이나 또는 화엄경을 보면 천상의 음률 표현을 하고 있는데 보통 우리가 느끼는 명곡과는 비교할 수 없이 한결 청정하고 무상한 오욕(五慾) 경계를 떠나버린 청정하고 평온하며 신묘한 음악인 것입니다. 그런 묘음이 우주에는 항시 울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사, 광명진언(光明眞言)이나 또는 어떤 진언이나 모든 진언이란 우주에 있는 신묘한 리듬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의미로 풀이가 어려운 것입니다. 우주에는 그와 같이 신묘한 리듬이 항시 있습니다. 우리가 명곡을 들으면 좋아하는 것도 가장 신묘한 리듬이 우리 불성 가운데 원래 존재하기 때문에 명곡을 들으면 그만치 우리 마음도 맑아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 무색계는 색을 떠나버린 하나의 심식(心識) 곧, 마음만 있는 중생이 사는 세계입니다. 무색계의 공무변처(空無邊處)는 공이 끝도 가도 없는 무량무변의 세계를 다 수용할 수 있는 경계이고 또 식(識)무변처는 일체가 유심조(唯心造)요 만법이 유식(唯識)이라, 모든 것이 마음으로 통찰해 보이는 경계입니다. 처음에는 텅텅 비어 보였지만 업장이 더 녹아지니까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마음 곧 의식인 생명이 충만해 있음을 깨닫는 경계요, 무소유처(無所有處)는 식(識)이라고 할 것도 없고 무엇이라 이름 지을 수도 없는, 이름과 상(相)을 여읜 경계입니다. 또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는 번뇌가 거의 다 스러져서 번뇌가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아 번뇌가 있는 것을 지각(知覺)하지 못할 정도로 청청한 경계이며 3계 가운데 최상의 천상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보리수하(菩提樹下)에서 성도하시기 전 6년 고행 때도 육사외도(六師外道)한테 가서 여러 가지로 많이 배웠습니다마는 그런 가운데도 3 외도한테 배웠다는 사실은 주목해야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공부와 관계가 있고 우리에게도 아주 훌륭한 귀감이 되기 때문입니다.


 맨 처음에 고행외도(苦行外道)인 발가바(Bha.java) 선인한테 가서 가지가지의 심각한 고행을 했는데, 어떤 기록에서는 발가바 외도한테 배운 고행은 별것이 아니라고 폄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물론 그 당시 싯달타(Siddhartha 悉達多) 태자가 부처님 같은 분을 만났으면 다시 말할 것도 없이 고행을 별로 않고서도 깨달음을 성취했겠지요. 그러나 고행으로서 미처 해탈을 못했다 할지라도 욕계 번뇌는 초월하여 범천(梵天)에 날 수 있는 능력은 얻었던 것입니다. 3 아승지겁을 닦아온 부처님인지라 고행을 해도 느낌과 얻음이 다르겠지요. 업장이 무거운 사람은 고행을 하면 그것에만 집착해서 고행을 하려고 하지마는 선량하고 총명한 사람은 고행을 해도 얻을 것은 얻고 버릴 것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행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부처님께서 물었을 때에 '범천(梵天)에 나는 것'이라고 함으로 '그러면 하늘에 나는 것은 영생(永生)을 하고 인생고를 다 벗어나는 것인가?' 부처님께서 되물으니까 '범천에 난다 하더라도 역시 복진타락(福盡墮落)이라' 복이 다하면 다시 타락한다고 대답하니까 부처님께서는 '내가 바라는 것은 생로병사를 영원히 떠나는 것이요, 그런 하늘에 태어나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하고 발가바 선인을 버리고서 다시 스승을 찾아간 것이 아라라칼마입니다.


 아라라칼마(Alarakalma)는 이른바 수정주의(修定主義)자로서 선정에 드는 공부를 하는 외도의 스승이었습니다. 부처님은 그에게 '대체 어떤 공부를 하느냐'고 묻자 '무색계의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을 닦는 것' 이라고 하였습니다.


 무소유처는 무색계의 셋째번 하늘이니 상당히 높은 경계지요. 그러니까 그 당시 인도에는 벌써 선정에 깊이 들어간 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분들을 가리켜 신선, 바라문선인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벌써 욕심을 떠난 단계이기 때문에 얼마 안 가서 자기 스승과 같은 정도로 무소유처까지 들어가는 삼매(三昧)를 발득(發得)했습니다. 무소유처에 들어가 보니 재미가 있고 쾌락도 있으며 분별망상은 거의 가셨으나 아직은 삼계내(三界內)이기 때문에 해탈의 법락(法樂)은 못되어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 정도 같으면 되겠다 싶어 멈추어 버리겠지요. 수승한 근기와 수승하지 않는 사람의 근기와의 차이는 이런 데에 있는 것입니다. 수승한 근기는 보통 웬만한 것에 절대로 머물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아라라칼마한테 '무소유처까지 들어가는 목적이 무엇인가'라고 물으니까 '무소유처정을 닦는 것은 모든 괴로움을 떠나 안락스럽고, 5신통(五神通)을 얻으며 사후에는 무소유처 천상에 태어나기 위함이라' '그러면 생로병사를 해탈하고 영생을 합니까?' '영생은 하지 못하고 다만 오백대겁(五百大劫)까지는 살고 그 뒤에는 다시 떨어지게 된다'고 대답함으로 부처님께서는 '내가 바라는 것은 영생 해탈이 목적이라'시며 떠나려 하자 자기 아들로서 자기보다 공부가 한 차원 높은 웃다카라마풋타(Uddaka Ramaputta)에게 찾아가라고 하여 그에게 갔습니다.


 웃다카라마풋타에게 가서 '스승님은 대체로 어떤 공부를 하십니까?'나는 무소유처를 지나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증득(證得)하는 공부를 한다 '고 하여 세존께서는 그곳에서 순식간에 비상비비상처정을 증득(證得)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물었습니다. '비상비비상처를 닦는 목적이 무엇입니까?'비상비비상처에 태어나서 오랜 세월 동안 천상묘락을 누리기 위함이라 ' '그러면 그곳에서는 영생을 할 수 있습니까' '영생을 할 수는 없고 팔만대겁(八萬大劫)을 살다가 선정의 복이 다하면 떨어진다 ' 팔만대겁은 그야말로 삼천갑자 동방삭이보다도 훨씬 더 많겠습니다마는 다시 또 떨어져서 잘못하면 지옥에도 간다고 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생로병사를 해탈함인데 여기도 머물 데가 아니구나. 이제는 스스로 혼자 닦아 나가야겠구나' 생각하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세 선인(仙人)들은 그 당시 인도의 위대한 스승이지만 그들의 법은 삼계를 벗어나는 생사 해탈의 법은 못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보리수하(菩提樹下)에서 신명을 걸고 좌정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현교(顯敎)에는 없으나 밀교(密敎)에 있는 법문인데 보리수하에서 싯달타 태자가 공부를 할 때 삼세제불(三世諸佛)이 경각(警覺)을 시켰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밀교도 공부를 하다 보면 참고 할 대문이 많습니다. 그것은 뭣인고 하면, 천지 우주가 바로 부처님 아닙니까.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우리 자성불(自性佛)의 기운과 부처님의 가르침이 서로 화합되어서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 자성이 부처가 아니라면 제 아무리 두드리고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될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자기는 몰라도 사실은 자성불이 부처가 되고자 몸부림치는 것을 우리 중생들이 욕심과 진심과 치심으로써 억지로 막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만 애써서 차근차근 거둔다면 자생적으로 본래 자성불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성불은 꼭 내 몸뚱이의 머리나 심장이나 어디에 갇혀 있는 것인가?

자성불(自性佛)은 바로 무장무애한 우주 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침투가 안 된 곳이 없습니다. 자성불은 자기 몸이 되고 우주 만유가 다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설사 스승이 없다 하더라도 정말로 바르게만 닦는다면 꼭 자성불을 성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계행 지키고 한사코 공부하려고 정진해 보십시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바른 스승이 생기고 공부할 처소가 생기는 것입니다. 천지신명은 심심미묘한 것입니다. 한탄할 것은 자기 번뇌요, 다른 것에 책임을 전가시킬 아무런 것도 없습니다.


 보리수하에서 싯달타가 그와 같이 '이제 다른 이에 의지하지 않고 내 스스로가 깨달아야겠다'고 비장한 결심을 할 때, 선정(禪定)도 벌써 삼계내의 가장 꼭대기인 비상비비상처까지 올라갔다고 할 때 정말로 신묘한 지혜가 발동하였을 것이며 따라서 삼세제불이 감응(感應)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밀교 경전의 표현을 보면 삼세제불이 경각을 시켜서 즉신성불(卽身成佛)하는 오상성신법(五相成身法)을 주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런 복잡한 것은 생략하기로 합시다.


 2. 구해탈(俱解脫)

            

                慧解脫ㆍㆍ一切法이 本來淸淨하고 平等一味하여
                         一切功德을 具足함을 信解함
        俱解脫

                定解脫ㆍㆍ禪定解脫

 
그러면 우리가 삼계(三界)에서 어떻게 해탈을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의 지상 명제가 되는 셈 아니겠습니까?

 해탈(解脫)에는 지혜해탈(慧解脫)과 선정해탈(定解脫)이 있는데 두 가지 해탈이 함께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합하여 구해탈(俱解說)이라 합니다.


따라서 참다운 성자는 지혜에 걸림이 있는 즉, 견혹(見惑)을 타파하고 또는 우리가 선정에 들어서 사혹(思惑) 또는 수혹(修惑) 즉, 일체 사물의 진상을 알지 못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번뇌를 여의는 정해탈(定解脫)을 성취하여야만 합니다.


 사혹 즉, 수혹은 참선이든 기도이든 선정(禪定)에 들어가는 길 외에는 어떻게 여읠래야 여읠 길이 없습니다. 지혜로서는 일초직입 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라, 바로 번연히 깨달아서 '본래 내가 부처구나'하는 확신이 오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정작 우리가 만사에 자재(自在)하는 해탈의 경계에 달하려고 할 때는 꼭 선정에 들어가야 합니다. 선정에 들어가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래야 사혹 즉, 수혹을 여의고 우리의 심리와 더불어 생리가 맑아오는 것입니다. 이른바 환골탈태가 된다는 말입니다.


 혜해탈(慧解脫)은 일체제법이 본래 청정하고 평등일미하여 일체 공덕을 구족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해탈이 못되면 이른바 보임수행(保任修行)을 닦지 못해서 습기가 녹지 않으면 참다운 선정해탈(禪定解脫)이 못됩니다.


 그래서 정해탈이 되려면 꼭 멸진정(滅盡定)을 성취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 공부하는 출가사문들은 한사코 혜해탈의 근거 위에서 선정해탈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부처님의 말씀을 옮길 정도지 자기 스스로 우러나와서 부처님의 무량 법문과 자재신통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