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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청화 큰스님 서적/5. 원통불법의 요체

제 2절 해탈(解脫)의 과정(過程)

 제2절 해탈(解脫)의 과정(過程)


 그 다음에는 4가행, 4선정, 멸진정 등 앞에서 다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해탈에 있어서 꼭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 물론 누차 말씀했듯이 근기에 따라 점차로 가는 사람도 있고 단번에 뛰어넘기도 합니다.


解說의 過程

             1.煖法 ․․․․․ 明得定

             2.頂法 ․․․․․ 明增定

1)四加行(四善根)   3.忍法 ․․․․․ 印順定

             4.世第一法 ․․․ 無間定


             1. 초선정 ․․․ 離生喜樂地

             2. 二禪定 ․․․ 定生喜樂地

2)四禪定(四禪天)   3. 三禪定 ․․․ 離喜妙樂地

             4. 四禪定 ․․․ 捨念淸淨地


3)滅盡定    一切煩惱習氣를 滅盡하는 三昧

   *四禪定은은 正道와 外道가 共修하나 滅盡定은 

          政道(聖道)에 限함



 4가행(四加行)은 4선근(四善根)으로서 우리가 미처 견도(見道)를 못할 때는 아직 범부지이니까 수행을 애쓰고 한다고 해서 가행(加行)이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여름 결제(結制)하고 겨울 결제하고 또는 백일 동안 기도하는 것은 모두 다 가행정진(加行精進)입니다. 그냥 그렁저렁 하는 것이 아니라 간단없이 해야 가행이라고 합니다. 그런 한계를 잘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했다 말았다 하는 것은 가행이 못됩니다. 참선 좀 했다고 나와서는 함부로 하고 그만 두어 버리면 바로 후퇴가 됩니다. 우리는 지속적인 가행정진을 해야 난법(煖法)에서 정법(頂法)으로 인법 (忍法)으로 공부가 깊어집니다.


 마땅히 공부 기운이 흩어지지 않도록,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안상(安詳)이라, 부처님이나 수도인의 거동을 안상으로 표현합니다. 부처님께서 탁발하고 오셔서 안상히 앉고 또는 선정에 드셨다가 안상히 일어서고 한다는 말씀이 경에 나옵니다. 안상이란 편안하고 조용하고 조금도 무리가 없고 자연스럽고 자상하게 하는 자세가 안상입니다. 이렇게 정진해야 명득정(明得定)을 빨리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애쓰고 공부해도 난법상에 미처 못 들어가는 분도 있는데 그것은 수행법이 근기에 맞지 않아 무리가 되어서 못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고 또는 과거 업장이 무거운 소치이기도 함으로 법당에 가서 몇 천배 절을 하는 것도 참 좋습니다.


의상(義湘 625~702) 대사는 중국에 들어가서 화엄종 삼대(三代) 현수(賢首 643~712) 대사와 같이 동참 수학하고 또 화엄경을 통달하여 법성게(法性偈)를 지은 분이니까 굉장히 위대한분 아닙니까? 그렇게 했어도 결국은 선정 해탈은 미처 못 했던가 보지요. 그래서 낙산사(洛山寺) 홍련암(紅蓮庵)에서 관음 기도를 모시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자기라는 아(我)의 근본 번뇌가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삼매에 들어가야 자기라는 아(我)가 끊어지는데, 의상 대사도 자기를 점검해 보니 아상(我相)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죄 덩어리인 몸뚱이 차라리 몸을 바꾸어야겠구나' 하고 홍련암 바위에서 바닷물에 몸을 던졌습니다. 몸뚱이를 버리는 그 찰나 활연히 깨닫고 관세음보살이 몸을 안아 안전하였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님 몸이요, 부처님 마음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사무치면 반드시 부사의한 도움이 있습니다. 기도든 공부든 모든 정당한 소원은 꼭 성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삼매에 들기 위해서는 4선근(四善根)의 행으로서 우선 닦아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비약적으로 가기가 어려운 문제 아닙니까?

 그러나 난법상(煖法相) 닦아서 명득정(明得定)이라, 가슴도 머리도 온몸이 시원해 온다 하더라도, 나와서 번잡스러운 일들로 흔들어 버리면 결국은 어디에 간 곳이 없이 공부가 퇴타(退墮)하게 됩니다.


 정법상(頂法相) 곧 명증정(明增定)이라, 이는 밝음이 더 증장(增長)한 경계를 말합니다. 처음에는 앞이 컴컴하다가 난법상에서 부터는 온몸이 맑아와서 정법상이 되면 뿌여니 달 같은 것이 비쳐오는 것입니다. 이 경계를 욕계정천(欲界頂天)이라 하는데 벌써, 정법은 욕계의 꼭대기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다시 파계무참(破戒無慚)한 짓을 한다거나 그렁저렁 방만하게 지내면 다시 후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닦아 나가야 비로소 인법(忍法) 경계가 옵니다.


 인법(忍法)은 무엇인가 하면, 내 몸뚱이나 물질이나 또는 명예나 지위나 모두 다 허망하여 실다웁게 여기지 않는 마음이 깊이 박혀졌다는 말입니다. 인법상(忍法相)이 되면 함부로 행동을 못합니다. 물론 완전무결하게 계율을 다 지킬 수는 없겠지만 벌써 맑고 선량한 기운이 몸과 마음에 깊이 배어져 눈이 샛별같이 빛나오므로 망상이나 혼침이 어디에 붙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도 그만 두면 후퇴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안 쉬고 지속적으로 나아간다면 이른바 세제일법(世第一法)이라, 범부 세간에서는 여기가 제일 높은 곳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번뇌 때문에 시달리지 않고 분별시비가 안 나오니까 분별시비를 몰아내기 위해서 작위(作爲)로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번뇌가 사이에 끼일 수가 없어서 견도(見道) 곧 견성(見性)하는 그 자리와 간격이 없으므로 무간정(無間定)입니다. 이 자리에 머물게 되면 필연적으로 견도에 나아가게 됩니다. 마음이 명경지수(明鏡止水)라, 맑은 거울이나 고요한 물 같으니 모두를 보면 다 그립고 긍정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간정에서 '내 마음을 반조(反照)해 보니 무간정이 되었구나, 공부가 이 정도 같으면 거의 다 하지 않았겠느냐' 하고 흔들어 버리면 결국은 또 견도에는 못 들어갑니다.


 따라서 이런 차서를 잘 모르면은 정진 중에 재미가 좋고 또는 무슨 빛이나 별난 경계가 나타나게 되면 공부가 다 되었다고 자만심을 느낍니다. 대체로 빨리 깨달아야겠다고 하는 성급한 분들은 이런 위험성을 범하기가 쉽습니다. 무간정에서는 가장 근원적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을 완전히는 깨닫지 못했을지라도 상사각(相似覺)이라 하여 거의 비슷하게 깨달은 단계입니다.


 무간정에서 초선정에 들어갈 때는 벌써 욕계를 초월하니까 오염된 몸뚱이가 청정한 몸뚱이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이른바 소조사대(所造四大)가 능조사대(能造四大)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범부 몸뚱이는 오염된 지․수․화․풍인 소조(所造)사대입니다. 그러나 선정을 발득(發得)해서 초선정에 들어갈 때는 오염된 사대가 청정한 능조(能造)사대로 바뀌어지기 때문에, 바뀌어지는 가운데 2, 4는 8이라 8촉이 나옵니다.


 8촉(八觸)은 무엇인고 하면, 그때에 경험되는 동(動)․양(痒)․경(輕)․중(重)․냉(冷)․난(煖)․삽(澁)․활(滑) 등의 여덟 가지 경계입니다.

 처음에 몸이 떨리는 동(動)이라, 몸이 가려운 양(痒)이라, 몸이 가볍게 느껴지는 경(輕)이라, 몸이 묵직하게 느껴지는 중(重)이라, 몸이 써늘하게 느껴지는 냉(冷)이라, 몸이 뜨겁게 느껴지는 난(煖)이라, 몸이 상어 가죽같이 깔깔하게 느껴지는 삽(澁)이라, 몸이 부드럽게 느껴지는 활(滑)이라, 이런 증상들이 그때그때 교차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증상뿐만 아니라 선정의 공덕으로 열 가지가 생깁니다. 십공덕(十功德)이란, 공(空)․명(明)․정(定)․지(智)․선심(善心)․유연(柔軟)․회(喜)․락(樂)․해탈(解脫)․경계상응(境界相應)입니다. 처음에 공(空)이라, 몸이 가벼워서 자기 몸뚱이에 조금도 부담을 느끼지 않고 항시 공중에 뜬 기분이고 그 다음에는 명(明)이라, 마음이 밝아져서 경전에 대한 문제나 모든 의단(疑團)이 훤히 풀리게 되고 다음 정(定)이라, 마음이 고요하여 선정에 들어가며 또는 지(智)라, 성(性)과 상(相)과 체(體)와 용(用)에 대하여 걸림 없는 지혜가 발동하고 선심(善心)이라, 마음이 그지없이 선량해지고 유연(柔軟)이라, 심신(心身)이 유순하여 모든 인연에 수순(隨順)하며 회(喜)라, 의식(意識)에 깨달음의 기쁨을 느끼고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5식(識)에 무분별의 즐거움을 느끼며 해탈(解脫)이라, 만사에 걸림이 없는 해탈을 느끼며 경계상응(境界相應)이라, 모든 경계에 막힘이 없이 수긍하게 되는 것 등이 이른바 초선정에 들어갈 때 증험하는 십공덕(十功德)입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 몸이 뜨겁던 차던 간에 텅텅 비어서 자기 몸에 대해서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고 마음이 훤히 밝아 별로 모르는 것이 없이 이것이나 저것이나 보면 척척 풀리고, 이런 마음이 항시 기본적으로 따라야 초선에 들어가는 증상이 되겠지요. 그리고 2선부터는 이미 오염된 사대(四大)가 청정한 사대로 바뀌어져 버려서 뜨겁고 덥고 그런 증상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욕계를 초월해서 초선정에 들어간다면 몸도 마음도 가볍고 부담이 없고 그지없는 행복감에 충만하게 되니 희락지(喜樂地)라, 진정한 법락(法樂)을 느끼는 경계입니다. 이러한 법락을 느끼게 되면 세속적인 오욕락(五欲樂:재물․이성․음식․명예․수면)에 대한 마음은 아예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 다음 2선정에 들어가면 마음이 한결 청정해집니다. 왜그런고하면 희락지에서는 아직 욕계 번뇌의 뿌리는 여의지 못했으나 2선정에서는 욕계 번뇌의 뿌리를 뽑아 버렸기에 마음이 훨씬 청정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생희락지(定生喜樂地)라, 초선정에서는 기쁨이 있다가 즐거움이 있다가 또는 더했다 덜했다가 하지만 그 다음은 그냥 잠잠하니 희락이 안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 법성(法性)에는 기쁨이나 즐거움의 희락도 없는 것이므로 따라서 선정이 더 깊어지면 마음은 더 총명해지고 더 맑아지면서 희락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3선정 경계인 리희묘락지(離喜妙樂地)라, 기쁨을 떠나고 묘락을 경험하는 경계입니다.


 그리고 4선정에서는 희락을 다 떠나서 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라, 모든 분별심을 여의고 청정한 마음만 지속되는 경계입니다.


 그 다음에 멸진정(滅盡定)은 4선정을 다 통과해서 일체 번뇌의 습기(習氣) 곧 번뇌의 종자를 다 완전히 없애는 삼매(三昧)입니다. 바라문이나 또는 힌두교나 일반 외도도 4선정까지는 닦아 증득할 수 있으나, 외도는 원래 해탈을 구하는 근기가 못되고 천상에 올라가서 신묘한 안락을 맛보려는 것이기 때문에 멸진정에까지는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해탈을 구하는 분들은 안락(安樂)이나 유위(有爲) 공덕은 문제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근기가 약하고 수승하지 못한 사람들은 초선에 올라가서 희락만 느껴도 공부가 다 되었구나 하고 또는 2선에 올라가서 희락에 잠기게 되면 거기에 머물러 버리는 것입니다. 불경에 보면 3선정에 들어갈 때 기쁨의 정도가 제일 좋다는 것입니다. 초선의 희락이나 2선의 희락이나 아직은 거치른 희락이며 약간의 변동이 있으나 3선과 같이 동요를 떠난 묘락(妙樂)은 아주 신묘하기 때문에 불경에서도 기쁨과 즐거움의 절정을 표현할 때는 3선정의 묘락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멸진정은 기쁨이라든가 또는 즐거움, 모두를 떠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됩니다. 며칠이고 몇 년이고 이 몸뚱이 죽어도 좋다 하고 정진을 해야 멸진정에 들어갑니다. 4선정은 정도(定道)와 외도(外道)가 다 같이 닦으나 멸진정은 정도에 한해 있습니다. 또 정도라 하더라도 비약적으로 멸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늦게 되었든 빨리 되었든, 중간 차서를 뛰어넘든 뛰어넘지 못하든 간에 4선정을 닦아야 갑니다. 업장이 가벼우면 더 빨리 갈 것이고 업장이 무거우면 더디 가는 차이 뿐입니다. 마땅히 신명(身命)을 걸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해탈 공부는 자기 목숨을 바치는 공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사일번에 대활현전(大死一番大活現前)이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