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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청화 큰스님 서적/5. 원통불법의 요체

제 4절 심성(心性)과 법계(法界)

제4절 심성(心性)과 법계(法界)


 1. 유식삼성(唯識三性)


 우리 인간성을 풀이할 때 해심밀경(解深密經)이나 유식론(唯識論), 이른바 법상종(法相宗) 계통에서는 유식삼성(唯識三性)이라는 법문이 있습니다. 유식삼성을 살펴보고 공부를 하면은 우리 인간성과 만유의 실상에 대하여 가장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체계를 확립하게 됩니다.


  唯識三性


 1. 遍計所執性…情有理無

 2. 依他起性……如幻假有

 3. 圓成實性……情無理有, 眞如(眞空妙有)

 ※ 上의 三性으로써 非空非有한 中道實相을 表現함.


 맨 처음에는 변계소집성 (遍計所執性)이라, 이것은 우리 중생차원의 마음가짐입니다. 모든 것을 두루 집착해서 바르게 판단하지 못하는 성품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를 삼독심(三毒心)에 가리워진 눈으로 보는 것이라서 바로 못 봅니다. 그래서 만 가지 것을 다 집착하고 헤아려서 바로 못 보는 것이 변계소집성 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정유리무(情有理無)라, 범부의 망정(妄情)에만 있고 원래 본바탕 법성(法性) 자리인 리(理)에는 없다는 말입니다. 아직 범부지에서 옳지 않다고 해서 옳지 않은 것도 아니고 범부지에서 옳다고 해서 옳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영원적인 차원, 불성(佛性) 차원에서 본 것이라야 비로소 바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범부가 두루 헤아리고 집착하는 이것

은 바른 것이 못됩니다.


 그 다음에는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

 이것은 인연(因緣) 따라서 이루어진 성질입니다. 자기란 존재는 인연 따라 이루어지고 한 포기 풀도 인연 따라서 이루어졌습니다. 사바세계에 있는 두두물물, 산하대지, 삼라만상 모두가 다 인연 따라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잠시 허망한 가상(假相)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환가유(如幻假有)라, 허깨비같이, 물 위에 뜬 거품과 같이, 안개같이, 허환상(濫幻相)인 것이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행이 무상이라, 우리에게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실제로는 있지가 않은 것입니다. 왜 그런 것인가? 인연생(因緣生)이기 때문에 순간 찰나도 같은 모습, 고유한 존재가 없습니다. 다만 중생이 안목이 짧아서 그냥 오늘 젊다가 내일 늙어 버려서 수염이 나면 알겠지만 서서히 바꾸어지니까 모를 뿐인 것이지 정밀하게 관찰한다면 일초(一秒)의 일만분의 일 동안도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자기 얼굴 주름살도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차츰 깊이 패어져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산하대지 삼라만상 모두가 다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수유(須臾) 찰나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입니다. 공간적으로 보더라도 어느 공간에도 머물러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상(無常)이요 공(空)이요, 무상이요 공이기 때문에 나(我)라고 할 아무 건덕지가 없습니다.


 그 다음 원성실성(圓成實性) 이라,

이것은 본래적인, 중생의 망상분별을 떠나버린 참다운 성품자체를 말합니다. 이른바, 불성(佛性), 법성(法性), 실상(實相) 경계가 원성실성입니다. 원만히 성취된 무한 공덕을 갖춘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정무리유(情無理有)라, 범부의 망정(妄情)에는 있지 않고 우주의 참다운 도리(理)에는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진여(眞如), 진공묘유(眞空妙有), 이 자리가 원성실성인데 이것이 우리의 본 성품입니다. 우리가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물건이나 또는 유정이나 어느 존재를 볼 때에 바로 보면은 원성실성이고 잘못 보면은 변계소집성 입니다. 오직 견해에 따른 것이지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한 송이 꽃을 본다하더라도 꽃은 꽃대로 자연 그대로 피어 나온 것인데 우리 중생이 곱다 안 곱다 예쁘다 밉다 하는 것입니다. 본래에서는 그런 것이 없지 않습니까, 따라서 본래대로 본다면 진여불성이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꽃같이 꽃의 가상(假相)을 내고, 진여불성이 인연 따라서 사람 같은 가상을 내고, 뜬 구름 같고 또는 안개 같은 모양을 가상으로 내는 것인데 우리가 거기에다 이것저것 나요 너라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삼성(三性)으로서 비공비유(非空非有)한, 공도 아니고 또는 유도 아닌 중도실상(中道實相)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십식 (十識)


 그 다음에는 십식(十識)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十 識

1. 眼 識(안식, 눈)

2. 耳 識(이식, 귀)

3. 鼻 識(비식, 코)

4. 舌 識(설식, 혀)

5. 身 識(신식, 몸)

6. 意 識(의식, 뜻)

7. 末那識(말나식, 我痴 我見 我慢 我愛 등의 妄識)

8. 阿賴耶識(아뢰야식, 藏識)

9. 菴摩羅識(암마라식, 無垢識 白淨識)

10. 乾栗陀耶識(건률타야식, 眞實心, 堅實心, 佛心)


 보통은 9식(識)까지 말하나 총괄한다는 의미에서 10식까지를 시설하기도 합니다. 안식이라, 이식이라, 비식이라, 설식이라, 신식이라, 의식이라, 여기까지를 6식(六識)이라고 합니다.

 제7식을 말라식 (Manas 末那識) 이라 하는데, 말라식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잠재의식입니다. 따라서 서양의 프로이드(Freud,Sigmund 1856~1939)나 융(Jung, Carl Gustav 1875~1961)이나 그런 심리학자들은 말라식 정도는 알았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융 같은 사람은 불교도 공부를 좀 했으니까 어렴풋이 아뢰야식 (Alaya vijnana 阿賴耶識)을 언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말라식은 잘못 봐서 내가 있다고 고집하는 어리석음인 아치(我痴), 또는 어리석음 때문에 나라는 견해가 더욱 더 치성하고 번성하는 아견(我見), 자기를 정도 이상으로 생각하는 아만(我慢) 즉 별것도 아니면서 자기가 하는 것은 꼭 무엇인가 좋고 겉으로는 겸손한 체 하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보통 중생은 아만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아끼고 사랑하는 아애(我愛)가 있습니다.


 아무리 공부를 좀 했다 해도 역시 범부지에서는 자기라는 것을 못 여의니까, 무아무소유가 못 되면은 아애가 있고, 아치가 있고, 아견이 있고, 아만이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 뿐인 것이지 범부라 생각할 때는 이것이 다 있습니다. 따라서 말라식을 망식(妄識)이라, 즉 우리 의식의 뿌리가 되어서 그때그때 나쁜 생각 좋은 생각 모든 허튼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또 말라식의 근거가 무엇인가? 말라식의 근거는 제8 아뢰야식입니다. 이른바 나쁜 종자 좋은 종자 모든 종자를 훈습(蕪習)을 시켜 담아둔다는 것입니다. 좋은 훈기도 여기에다 인상을 머물게 하고 나쁜 행위도 역시 훈기를 아뢰야식에다 나쁜 인상을 머물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종자식(種子識), 또는 장식(藏識)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제9식은 암마라식(Amra 菴摩羅識)이라, 이것은 무구식(無垢識)이라고도 합니다. 때가 없는 즉 번뇌가 없는 식이고 또는 청청한 식이니까 백정식(白淨識)이라고도 이름을 합니다.

 유식론을 공부한 사람들은 제8식만을 말한데도 있고, 제9식까지를 말한 데도 있습니다. 복잡한 문제이지만 한번 들어 두면 나중에 편리할 것입니다.

 8식설은 현장(玄奘 622~664) 법사 등이 주장하였고 진제(眞諦 Paramartha, Gunarata 499~569) 삼장 등은 9식설을 주장한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 차이가 어디에 있는가, 간단히 말하면 8식 아뢰야식까지로 모든 식을 마무리하는 주장은 아뢰야식 가운에 염정(染淨) 곧 오염된 식과 청정한 식이 같이 아울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청정한 식 즉 백정식의 요소가 아뢰야식 가운데 다 갖추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새삼스레 무슨 필요로 9식설을 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9식설을 말하는 분들은 분명히 오염된 식과 청청한 본래 식은 차이가 있는 지라 마땅히 별도로 시설해야 한다고 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싸울 것도 없는 것인데 옛날에는 8식, 9식설 가지고도 많이 싸웠습니다. 현대와 같이 서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훈련을 하였으면 그렇게 되겠습니까?

제10식도 진실심(眞實心), 또는 견실심(堅實心)․건률타야식(Hrdaya 乾栗陀耶識)이라고 하는데 9암마라식의 별칭인 동시에 모든 식(識)을 통틀어서 10식으로 포괄한 것입니다.


 3. 십법계 (十法界)



十法界

六道

 

 1. 地獄法界…上品의 五逆十惡을 犯하여 寒熱叫喚의

       苦를 受하는 최하의 境界

 2 .畜生法界…中品의 五逆十惡을 犯하여 呑噉殺戮라         苦를 受하는 畜類의 境界

 3, 餓鬼法界…下品의 五逆十惡을 犯하여 飢渴의 普를         受하는 惡鬼의 境界

 4. 阿修羅法界…下品의 十善을 行하고 通力自在를           得한 非人의 境界

 5. 人法界…五戒 또는 中品의善을 修하여 人中의          苦樂을 受하는 境界

 6. 天法界…上品의 十善을 修하고 아울러 禪定을       修하여 天界에 生하고 靜妙의 樂을 受하 는 境界

 

四聖

7. 聲聞法界…解脫을 위하여 佛의 聲敎에 따라 四諦의        觀法을 닦는 境界

 8. 緣覺法界…解脫을 위하여  二因緣法을 닦는 境界

 9. 菩薩法界無上菩提를 위하여 六度萬行을 닦는 境界

10. 佛法界自覺覺他․覺行窮滿의 境界

 

    ※ 十善…不殺生․不偸盜․不邪淫…身

             不妄語․不兩舌․不惡口․不綺語 …口

             不貪慾․不嗔恚․不邪見(不痴) …意

    ※ 五逆…殺父․殺母․殺阿羅漢․破和合僧․佛身出血

 


 우리가 바로 깨달으면 일체 만유가 일진법계(一眞法界), 오직 진여불성의 일진법계뿐인데 우리 중생 차원에서, 이와 같이 중생의 근기에 따라 나누어서 시설한 것이 십법계(十法界)입니다.


 제일 아래인 지옥법계 (地獄法界)는 상품(上品)의 오역 (五逆)이나 십악(十惡)을 범(犯)하면 받는 경계입니다. 부처님 몸에서 피를 낸다거나 화합승가를 파괴한다거나 또는 부모를 죽인다거나 아라한을 죽이는 것은 오역죄에 해당하고 십악(十惡)은 십선(善)의 반대로서 오역이나 십악을 범하여 한열규환(寒熱叫喚)의 고를 받는, 그야말로 뜨겁고 춥고 한없는 괴로움에 울부짖는 고통이 극심한 최하의 경계가 지옥법계입니다.


 그 다음 축생(畜生)법계는 중품(中品)의 오역(五逆)이나 십악(十惡)을 범하여 탄담살육(呑噉殺戮)이라, 서로 잡아먹고 서로 삼키고 서로 죽이는 고를 받는 축생의 경계입니다.


 그 다음 아귀(餓鬼)법계는 우리 인간이 안 보이는 경계 아닙니까? 하품(下品)의 오역죄나 십악을 범하여 기갈(飢渴)의, 주리고 목마른 고통을 받는 악귀(惡鬼) 세계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죽어지면 수행자는 죄를 범하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아귀계에는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는 중유(中有) 또는 중음(中陰)이라고 해서 저승에 좀 머물기는 하나 바로, 지은 업장의과보로 해서 다른 생(生)으로 떠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껏 출가사문이 되어서 무상복전의(無上福田衣)를 입었으니 용맹정진을 통하여 한사코 삼계(三界)를 벗어난 성자가 되어야만합니다.

 앞에 지옥, 아귀, 축생은 삼악도(三惡道)이고 그 다음 아수라, 사람, 천상은 삼선도(三善道)입니다.


 다음 아수라(阿修羅)법계는, 아수라도 분명히 존재하는 세계이지만 우리 인간의 눈에는 안 보입니다. 천안통을 통하면 아수라계도 보고 아귀계도 봅니다. 하품의 십선을 행하고 통력자재(通力自在)를 득(得)한 비인(非人), 사람이 아닌 영체(靈體)의 경계입니다.

 아수라 뿐만 아니라 아귀 귀신도 역시 업통(業通)이지만 약간의 저급한 통력(通力)을 합니다. 그러니까 아귀가 되어 헤매이다가 인연이 있는 사람한테 접신(接神)하여 점쟁이가 되게도 합니다. 그러나 아수라세계는 아귀세계보다 더 통력이 있는 세계입니다. 따라서 자칭 도사(道士)라 하며 몇  백 명씩 신도를 거느리고 알아맞히는 소리하는 사람은 보통 아수라신이 지키고 있다고 볼 수가 있지요. 아수라 신들은 꽤 통력이 있기 때문에 어떤 때는 꼭 도인 (道人)같은 행세도 하고 도인 같은 소리도 합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을 보면 압니다. 욕심을 다 떼었는가? 음욕도 못 떼고 물욕도 못 떼고 욕심을 못 떼었다면 별 볼일 없는 욕계중생입니다.


 인(人)법계라, 사람 법계는 오계(五戒) 또는 중품(中品)의 십선(十善)을 닦아서 인중(人中)의 고락을 받는 경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속에 있던 출가를 했던 간에 우리는 다섯 가지 계행이나 중품의 십선계는 닦아서 인간으로 왔습니다. 더욱이 출가사문들은 부처님 당시나 또는 옛날부터 부처님 법을 독실히 믿은 불자였기에 금생에 젊은 나이로 승려가 된 것입니다.


 천(天)법계라, 상품의 십선을 닦고 아울러 선정(禪定)을 닦아서 천상에 생하고 정묘(靜妙)한 안락을 받는 경계입니다. 따라서 천상계는 단계로 본다면 우리 인간보다는 높습니다. 다만 천상이 너무나 안락스러우니까 애쓰고 공부를 더 하려고 마음먹지 않기 때문에 성불을 잘못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고(苦)가 있어서, 생로병사의 고생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데서 성불이 빠른 것인데, 그러기에 성불로 나아가는 의미에서 인간이 소중한 경계입니다. 여기까지 4생(生) 6도(道)라, 태란습화(胎卵濕化) 4생과 6도입니다.


 그 다음에는 4성(聖)이라, 4종류의 성자, 곧 성문법계 또는 연각법계, 보살법계, 불법계입니다.

 성문(聲聞)승은 해탈을 위하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에 따라 주로 4제관법(四諦觀法)을 닦는 경계입니다. 그런데 성문법계는 4제 법문 가운데서도 아직은 무생(無生)4제나 또는 무량(無量)4제나 또는 무작(無作)4제의 정도는 아니고 생멸(生滅)4제 정도입니다. 실제로 고(苦)도 있고 고의 원인이 되는 집(集)도 있고 또는 실제로 멸(滅)도 있고 실제로 닦는 도(道)도 있다는 곧, '상대적으로 고집멸도가 실존적으로 있다는 차원의 가르침을 받고서 닦아 깨달은 하품의 성인경계가 성문법계입니다.


 연각(緣覺)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과거 숙세에 선근이 많아서 자연을 보고 깨닫기도 하고 십이인연이나 인연법을 관찰하여 깨닫기도 합니다. 이런 성자를 연각승 또는 독각(獨覺)승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보살(菩薩)법계라,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위하여 육도만행(六度萬行)곧 6바라밀(六波羅蜜)을 닦는 경계입니다. 과거 전생에 선근이 많아서 자기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남과 더불어서 공부하는 분들입니다. 현대 같은 이런 혼란한 사회에 나온 불자는 대체로 거의 다 보살 후신(後身)입니다. 자기 혼자만 닦고 만다는 분은 거의 없지 않습니까. 자기가 공부를 해서 좀 알면 머물러 버리는 것이 아니라, 보살기질은 절대로 머물지 않습니다. 무상보리를 위하여 성불까지 쉬지 않고 육도만행 곧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는 것입니다.


 불법계(佛法界)는 자각각타(自覺覺他) 각행궁만(覺行窮滿)이라, 모든 행과 지혜, 일체종지(一切種智)를 다 갖춘 경계가 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보살이 되어야 부처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나와 남을 구분하는 정도에서는 도저히'불과(佛果)를 이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자기 스스로 항시 내가 보살인가 아닌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남한테 잘 베푸는가, 인욕은 얼마나 하는가, 또는 선정을, 얼마만치 용맹정진 하는가를 통절하게 성찰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선(十善)은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으로 몸으로 짓는 세 가지이고, 또는 불망어 불양설 불기어 불악구로서 거짓말 말고, 이간질하지 말고, 욕말고, 음탕한 말이나 꾸며서 하는 말 곧 기어(綺語)를 하지 않는 것이 입으로 짓는 네 가지며 또 뜻으로는 탐내지 않고, 성내지 않고, 삿된 생각을 내지 않는 것이 뜻으로 짓는 세 가지입니다.


오역(五逆)은 아버지 죽이고, 어머니 죽이고, 아라한 즉 성자를 죽이고, 또는 파화합승(確和合憎)이라, 이간질해서 승려끼리 싸움을 부추겨 승가의 화합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요사이 종단 싸움 같은 것도 사실은 파화합승의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될수록 서로 양보하고 겸허하게 화합하는 것이 승려인데 그렇지 못하면 파화합승입니다. 불신출혈(佛身出血)이라, 부처님 몸에 상처를 입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