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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청화 큰스님 서적/5. 원통불법의 요체

※ 게송음미(偈頌吟味) ①

                ※ 게송 음미 (偈頌吟味) ①


 불경(佛經)을 보면 무슨 경이나 꼭 게송이 같이 곁들여 있습니다. 역시 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하는 묘(妙)가 부사의(不思議)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을 평온하고 순수한 정서로써 순화시킨다는 의미가 포함되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더구나 저같이 말주변 없는 사람이 하루에 네댓 시간씩 원리만 말을 하니까 굉장히 딱딱할 것입니다. 그래서 밤에 한 시간 동안에는 공부하는데 유익한 게송을 골라서 음미(吟味)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부용(芙蓉) 스님의 임운무애게(任運無碍偈)


 부용도해(芙蓉道楷 ?~1118) 스님은 중국 중세기 북송(北宋)때 조동종(曹洞宗)의 위대한 선사입니다. 이 스님은 청백하고

도행(道行)이 높아 총림(叢林)에는 물론이요 도속(這俗)이 존경하므로 당시 휘종(微宗) 황제가 자가사(紫努裟) 즉 금란가사(金欄袈裟)와 당호를 하사했는데 받지를 않고 되돌려 보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자기가 유명한 선사(禪師)라 하더라도 감격을 하면서 받아야 할 것인데 몇 번 간청을 해도 사절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그 벌로 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귀양도 참 별난 귀양도 있지 않습니까. 한 5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하였는데 그곳에 수백 명의 학도들이 모여 스님 밑에서 공부를 하게 되니 황제는 뉘우치고 화엄선사(華嚴禪寺)라는 절 이름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유명한 스님입니다. 그 뒤 병도 없이 입적하였는데 나이가 아마 76세이었던 모양이지요. 그래서 벌써 우리도 그 나이에 가까워지니까 더욱 친밀감이 들어서 가장 허두에 말씀드리겠습니다.


  任運無碍偈

 吾年七十六       내 나이 이미 칠십육인데

 世緣今已足       세상인연 이제 모두 마치었도다

 生不愛天堂       살아서는 천당을 바라지 않고

 死不伯地獄       죽어서는 지옥도 두렵지 않네

 撒手橫身三界外   뿌리치고 삼계 밖에 내 몸을 두니

 騰騰任運何拘束   등등임운에 무슨 구속 있을 것인고      
                (걸림없는 경계에)                _ 芙蓉道楷 _


 '오년 칠십육(吾年七十六)인데 세연금이족(世緣今已足)이라' 내 나이가 벌써 76인데 세상 인연이 다 해서 더 바랄 것이 없이 이거로서 이미 만족을 한다는 말입니다. '생불애천당(生不愛天堂)이요 사불파지옥(死不伯地獄)이라' 살아서는 참선 공부에만 애썼지 천상같은 것은 바랄만 한 틈도 겨를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오로지 정진만 했다는 의미가 되겠지요. 또한 금생에 닦을 만큼 닦았으니 죽음에 이르러서는 지옥을 두려워 할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살수횡신삼계외(撒手橫身三界外)하니' 살수는 손을 뿌리친다는 말로 그냥 모든 잡연(雜緣)을 다 뿌리치고 간다는 뜻입니다. 삼계 밖에 몸을 누인다는 말은 공부를 했으니 삼계에 갇혀 있지 않고 해탈을 했다는 뜻이 됩니다. 이제 손을 뿌리치고 해탈의 경계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등등임운 하구속(騰騰任運河拘束)이리요‘ 등등임운(騰騰任運)은 조금도 조작이 없이 법 그대로, 불교말로 하면 법이자연(法爾自然)이라, 법 그대로이니 조금도 구속이 없이 당당하다는 뜻입니다. 등등임운이니 어찌 내가 구속이 있을 것인고. 이런 게송입니다.


 공부하다가도 이런 게송을 한번 읊어보면은 그마만치 마음이 시원스럽기도 하지 않겠습니까?

 내 나이 76세 세상 인연이 다해서 가는 것인데 서운할 것도 미련도 애착도 없고 조금도 불평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살아서는 오직 내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였을 뿐이지 천상이고 행복이고 그런 것을 바랄만 한 겨를도 없었다. 바르게 살았으니 죽어서 지옥이 두려울 것도 없는 것이고 잡연을 뿌리치고 삼계 밖에, 해탈의 경계에다 몸을 두니 등등임운 하구속이리요, 이제 당당하고 활발발지(活鱍鱍地)라, 무엇을 두려워하고 꿇릴 것이 있을 것인가, 그저 의젓이 인연 따라서 자연의 법도에 따를 뿐이라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임금이 주는 금란가사, 찬란한 가사를 보통 사람 같으면 못 받아서 한(恨)일 것인데 그렇게 안 받다가 귀양살이까지 할 수 있는 청빈(淸貧)한 수행자의 귀감입니다.


 2) 석옥(石屋)화상 임종게(臨終偈)


 다음은 임제종(臨濟宗) 전등법사요 한국 조계종의 종조(宗祖)인 태고 보우(太古普愚) 선사의 스승 되는 석옥청공(石屋淸珙 ?~1352) 화상이 읊은 임종게(臨終偈)입니다. 앞의 게송도 임종게입니다만, 다른 게송도 중요하겠지만 도인들이 열반 들 때에 남겨 놓은 임종게는 우리에게 더욱더 숙연한 감명을 줍니다.


  無火定偈

 靑山不着臭尸骸   청산은 냄새나는 시체를 받지 않는데

 死了何須掘土埋   죽어서 하필이면 땅에다 묻을 것인가,

 顧我也無三昧火   나를 돌아보니 삼매의 불이 없구나

 先前絶後一堆柴   앞에 있다 이내 사라질 장작더미 뿐,  

                                                  - 石屋淸珙 -


 '청산불착 취시해(靑山不着臭尸骸)하니' 청산은 냄새나는 시체를 받지 않으니, 붙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맑은 청산도 바로 본다면 하나의 생명인데 그런 맑은 청산이 나같이 참선 공부를 좀 했더라도 죽으면 냄새나는 시체이므로 붙이기를 싫어할 것이니, '사료하수 굴토매(死了何須掘土埋)리요‘ 죽어서 가는 길에 어찌 하필 땅을 파고서 시체를 묻을 것인가? 속인들이나 매장을 할 것이지 우리 공부하는 출가사문들을 무슨 필요로 매장을 할 것인가 하는 말입니다. 청산도 냄새를 풍기는 시체를 붙이기 싫어하는데 그 땅에다 냄새나는 시체를 무슨 필요로 묻어야만 할 것인가? 그러니까 자기 시체를 매장을 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지요. 그러나 '고아야무삼매화(顧我也無三昧火)라' 그렇다고 해서 과거 위대한 조사들처럼 화광삼매(火光三昧)에 들어서 자기 몸을 태우면 좋은데 그럴만한 '법력도 없다는 한탄입니다. 나를 돌아다보니 삼매의 불이 없다는 말입니다.


 삼매의 불, 출가사문이 되어서 참선 수행을 하는 우리 수행자들이 저나 여러분이나 임종 때에 이런 한탄이 안 나오리라고 장담을 하겠습니까?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니고 달마와 나와 둘이 아닌데, 그런 분들은 화광삼매에 들어서 삼매의 불로 자기 시체를 태워서 사리(舍利 Sarira)를 남겼던 것입니다.


 아란(阿難ananda, 阿難陀)존자는 마하가섭 다음의 제삼대(第三代)조사입니다. 대체로 그런 분들이 임종 들 때는 미리서 내가 언제 가겠다고 말씀을 합니다. 그런 것은 미련을 두어서가 아니라 마지막 설법을 하기 위해서, 제도 못한 사람들을 마저 제도하기 위해서 방편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아란존자도 열반에 들 것을 미리서 예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열반들 장소로 마가타국(Magadha國)에서는 오래 있었으므로 갠지스강(Ganges江)을 건너서 한가한 비사리국(毘舍離 Vaisali國)으로 갈려고 하였습니다. 아란존자는 삼대조사이고 부처님 종제(從弟)이며 부처님을 20여 년 동안 시봉하였고 부처님 법문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다 외울 정도로 위대한 분이기 때문에 아란존자의 열반상(涅ㅈ槃相)을 뵈옵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그런데 마가타국을 떠나서 저쪽 비사리국으로 간다고 하니까 그때 마가타국의 왕인 아사세왕(阿사闍世王Agatasatru)은 숭앙하는 성자가 다른 나라에 가서 열반 든다는 소식에 굉장히 섭섭해서 가지 못하게 말리려고 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아란존자가 떠난 길을 뒤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이미 갠지스강 저 편에 있는 비사리(비야리)에서는 그 나라 왕이 아난존자를 마중하러 군대를 이끌고 갠지스강 기슭으로 오는 것입니다. 아란존자는 갠지스강을 건너려고 모래사장으로 나왔는데 그때 벌써 아사세왕은 곧바로 뒤쫓아와서 진을 치고 있고 저쪽을 건너다보니까 그곳 비사리국 왕이 군대를 거느리고 마중을 나와있는 것입니다. 아란존자는 자기 때문에 큰 싸움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배를 타고 강심(江心)에 이르러 배 위에서 공중으로 솟아올랐습니다. 그리고는 18신변(神變)을 나투고 화광삼매(火光三昧)에 들어 가슴에서 불을 내어 공중에서 자기 몸을 태웠습니다. 삼매가 순숙되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이나 물이나 무엇이든지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불성 가운데는 불이나 물이나 무엇이고 모든 성품이 모두가 다 들어 있어서 깊은 삼매에 들면 그걸 자재(自在)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광삼매로써 사리를 내어 양쪽 기슭으로 이분(二分)해서 떨어뜨렸습니다. 그러니 싸울 수가 있겠습니까? 양편이 다 한없이 슬퍼하고 우러러 찬탄하였습니다.


 그러한 열반상을 청공화상이 모를 리가 만무하겠지요. 그래도 조실로 불리고 태고 스님뿐만 아니라 위대한 제자가 많이 있는데, 자기가 자기를 돌아보니 마땅히 화광삼매 정도는 있어야 할 것인데 푸른 청산에다 냄새나는 시체를 묻는다는 것은 아예 내키지 않고 그렇다고 화광삼매에 들 만한 법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이대로 죽으면 어찌할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가당치도 않습니다. 앞으로 죽을 날까지 얼마나 가려는지 모르겠지만 부지런히 공부해가지고 이런 정도의 한탄은 안해야 할 것인데 어떻게 되려는지 참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나를 돌아보니 삼매의 불이 없고서 다만' '선전절후일퇴시(先前絶後一堆柴)라' 지금 자기 앞에는 사부대중이 모여서 화장하려고 쌓아놓은 한 무더기 장작더미가 있는데 자기를 화장하면 곧 사라지고 말겠지요. 그래서 자기 앞에 있지만 이윽고 사라지고 없어질 한 무더기의 나무뿐이로다 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석옥청공 화상은 읊었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 참선 공부하는 스님 네들은 명감(名鑑)을 삼아서 부지런히 삼매를 닦아서 꼭 이런 후회를 하지 않도록 공부를 해야 할 것입니다.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니고 또는 아란존자와 나와 둘이 아니지 않습니까?


 3) 천고송(天鼓頌)


 우리는 도리천(忉利天)이라든가 또는 야마천(夜摩天)이나 도솔천(兜率天)이나 말하면 꿈속 나라처럼 감도 잘 안 잡히고 믿지도 않는 불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천상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색즉공(色卽空)이라 또는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모든 상이 본래 공이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나도 없고 인간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상(相)도 허망상이나마, 가상(假相)이나마 있다고 할 때는 욕계(欲界) 뿐만 아니라 색계나 무색계나 삼계(三界)가 엄연히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 있는 것은 인간도 가상으로 있듯이 실존적이 아니라 가상으로 있다는 말입니다.


 도리천은 바로 사왕천(四王天) 다음이니까 욕계천(欲界天) 가운데는 낮은 천상입니다. 도리천 다음에는 야마천 그 다음에는 도솔천, 그 다음에는 화락천(化樂天), 욕계천의 마지막 하늘이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인데,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욕계에서 올라갈수록 점차로 욕심이 희박해지다가 색계에 올라가서는 잠욕〔睡眼欲〕, 식욕, 음욕 등 욕심이 모두 떨어지는 것입니다. 욕계천에 있는 도리천의 공덕에 대한 게송이 있습니다. 이 게송은 당화엄경(唐華嚴經)에 있는 법문인데 어떻게 해서 이런 게송이 나왔는가 하는 그 연원이 있습니다.


 도리천의 왕은 제석천(帝釋天)입니다. 그런데 도리천은 욕계의 범주에 들어있어서 역시 게으름도 피우고 또는 망상도 하고 번뇌를 다 떼지 않은 욕계천입니다. 우리 인간 세상 같으면 게으름 피우면 계속 게을러질 수도 있고 공부를 조금 했으면 그때그때 반성하고 경각심을 내겠습니다마는 도리천에 있는 중생들은 인간 보다는 조금 더 높은, 업장이 더 가벼운 세계이기 때문에 게으름을 내면 북이 없는데도 법성(法性:佛性)자연의 도리로서 자동적으로 북소리가 울려오는 것을 천고(天鼓)라고 합니다. 천고는 하늘 북인데 물형적(物形的)인 어떤 북이 있어서 소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게으름 부림에 따라서 그에 상응하여 울려나오는 북소리 자체가 게으름을 없애고 정진을 일깨우는 북소리라는 뜻입니다. 극락세계의 나무나 숲이나 모두 염불(念佛)․염법(念法)․염승(念僧)이라, 부처를 노래하고 또한 법을 노래하고 승가를 노래하듯이 그런 높은 세계는 소리 가운데 법문의 의미가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도리천에서 저절로 울려오는 북소리도 어떻게 들려오는가 하면, 이를 천고송(天鼓頌) 이라 하는데,


  天鼓頌

 一切五欲悉無常   일체의 오욕락은 모두 다 무상하여

 如水聚沫性虛僞   물거품과 같아서 성품은 허위로다.

 諸有如夢如陽焰   모든 것 꿈같고 아지랑이 같아

 亦如浮雲水中月   또한 뜬구름이요 물에 비친 달이로다.

                                                   - 唐華嚴經十五 -


 '일체오욕실무상 (一切五欲悉無常)이라' 일체의 오욕이 모두가 다 덧이 없다는 말입니다. 오욕은 재색식명수(財色食名睡)라, 재물욕이나 음욕 식욕 명예욕 잠욕이나 이런 오욕이 모두가 다 허무하고 무상하다는 말입니다. 명곡(名曲) 리듬에는 거의 다 무상(無常)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명곡을 듣고, 같은 연극이라도 비극을 보는 것이 훨씬 더 우리 인생을 성숙되게 합니다. 그것이 이른바 카타르시스(Katharsis) 아니겠습니까.


 '여수취말성허위(如水聚沫性虛僞)라' 마치 우리 인생이나 세상의 모든 것은 물거품 같아 그 성품이 허망하고 거짓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인간도 바로 못 보듯이 도리천도 욕계천상이기 때문에 바로 못 깨달아 좋다 궂다 하지만 모두가 다 사실이 아니요 거짓되어 허망하다는 말입니다.

 '제유여몽여양염(諸有如夢如陽焰)하니' 제유(諸有)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로서, 상대적으로 있는 것은 모두가 다 꿈같고 아지랑이(陽焰) 같으며 '역여부운수중월(亦如浮雲水中月)이라' 역시 뜬구름 같고 물속에 비친 달 같도다. 이와 같이 도리천 북소리가 울려온다는 것입니다.   참선을 깊이 하면 경험을 한 분도 있을 것입니다마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북소리 같은 아주 청아한 소리가 울려오면 불현듯 심신이 개운해지고 산란한 마음의 갈등이 풀려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경계가 바로 도리천의 북소리가 되겠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주란 것은 이렇게 신비로운 것입니다.


 4) 대지(大智)선사 영득한인송(羸得閑人頌)


 그 다음에는 대지(大智)선사의 게송입니다. 한 200년 전의 일본 스님으로 참선도 통달했다는 분이고 또는 역대 일본 승려 가운데 게송을 제일 잘 하는 분이라는 정도로 이름 있는 분입니다.

 진불암(眞佛庵)에서 저와 같이 지낸 도반들은 이 게송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때 이 게송을 써서 벽에 붙인 적이 있습니다.


  羸得閑人頌

幸作福田衣下身   다행히도 가사를 입는 몸이 되어서

乾坤羸得一閑人   천지에 한가로운 사문이 되었도다.

有緣卽住無緣去   인연 있어 머물다 인연 다 하면 떠나가나니

一任淸風送白雲   맑은 바람 부는 대로 흘러가는 횐구름처럼,

                                                - 大智禪師 -


 '행작복전의하신(幸作福衣下身)하니' 다행히도 복전의(福田衣) 밑에 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복전의란 가사로서 바로 복 밭이 되는 옷이라는 뜻입니다. 생각해보면 생각할수록 옷 가운데서 가사같이 복 밭이 되는 옷이 없는데 다행히도 자기 같은 존재가 복전의 아래의 몸이 되었다는 깊은 감회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건곤영득일한인(乾坤羸得一閑人)이로다 ' 천지간에 모든 것을 극복하고 모든 번뇌를 다 이겨낸 위대한 승리자요 삼계를 초월한 한가로운 사람이 되었도다.


 그러니 '유연즉주무연거(有緣卽住無緣去)요' 인연이 있으면 머물고 인연 다 하면 바로 떠나는 것이니 조금도 집착이 없이 인연 따라 산다는 말입니다. 죽을 때나 또는 이별할 때나 또는 어느 절에서 살다가 떠날 때나 말입니다. 보통은 불사(佛事)나 좀 해놓으면 모두 계속 살려고 합니다만 인연이 다할 때 떠나지 않으면 결국은 번뇌의 앙금이 가라앉는 것입니다. 천지간에 일체를 다 초월해 버렸으니 어디 가나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도리어 자기 것이 아무것도 없으면 공부하기 편리합니다. 천지간에 모든 것을 다 초월하여 이겨버린 한가한 사람, 불교에서는 한인(閑人)이라 하면 공부를 다 해 마쳐서 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한가한 사람이 되었으니 인연이 있으면 머물고 인연이 없으면 떠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일임청풍송백운(一任淸風送白雲)이라' 마치 맑은 바람에 흰 구름이 가는 것이나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수행자를 가리켜서 운수(雲水)라 하지 않습니까? 행운유수(行雲流水)라, 구름이 떠가는 것 같고 물이 흘러가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아무런 찌꺼기나 섭섭함이나 아쉬움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저 그런대로 인연 따라서 가되 마음은 항시 진여불성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공부가 되어버리면 진여불성과 온전히 하나가 되었으니 아무런 조작인 없이 임운등등 등등임운이 될 것이고 공부가 미숙한 때에는 애써야 되는 것입니다.


 5) 부설거사(浮雪居士) 사허부구게 (四虛浮漚偈)


 저는 출가했을 때에 운문암(雲門庵) 절에 가서 보니 법당 안

에 수릉엄삼매도(首楞嚴三昧圖)와 순치황제 출가시(順治皇帝出家詩), 그리고 부설거사 사허부구게(浮雪居士四虛浮漚偈)가 붙여 있어서 특별히 인상 깊게 간직하고 외우고 있습니다. 요 근래 큰스님들도 순치황제 출가시나 부설거사 사허부구게는 상당히 좋아하면서 소개를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공부인 한테 이 부설거사의 허부구게가 굉장히 의의 깊은 법문이 됩니다.


 부설거사(浮雪居士)는 다 아는 바와 같이 신라 때 도인 거사입니다. 자기 아내 묘화(妙花)도 아들 등운(登雲)과 딸 월명(月明)도 다 깨달은 도인이라고 전합니다. 부안(扶安) 변산 월명암에 가면 월명각시라고 부설거사 딸의 부도가 있을 정도로 네 분 다 위대한 분으로, 마치 인도의 유마거사(維摩居士)나 중국의 방거사(據漏士)와 비교하기도 하는 위대한 분입니다. 애초에는 승려인데 과거 숙세 인연으로 묘화 아가씨와 만나게 되어 할 수 없이 결혼은 했으나 거사로 있으면서도 승려 못지않게 공부 정진하여 도반들보다도 더 빨리 깨달아서 도반들을 다 제도한 분이라고 합니다.


 浮雪居士四虛浮漚偈  

妻子眷屬森加竹   거느린 처자권속 삼대밭 같고

金銀玉帛積似耶   쌓여진 금은옥백 산더미 같아도

臨終獨自孤魂逝   임종에 당하여 외로운 혼만 떠나가니

思量也是虛浮漚   생각하면 이 또한 허망한 뜬 거품이요,

朝朝役役紅廛路   날마다 힘들여서 살아온 세상길에

爵位纔高已白頭   벼슬길 올랐어도 머리는 백발이라

閻王不怕佩金魚   염왕은 벼슬과 영화를 두려워 않거니

思量也是虛浮漚   생각하면 이 또한 허망한 뜬 거품이요,

錦心繡口風雷舌   재주가 뛰어나서 말로는 요설변재

千首詩輕萬戶候   천글귀 시를 지어 만호후를 경멸해도

增長多生人我本   다생겁의 아만의 근본만 늘게 하나니

思量也是處浮漚   생각하면 이 또한 허망한 뜬 거품이요,

假使說法如雲雨   가사, 비구름 몰아치듯 설법을 잘 하여

感得天花石點頭   하늘 꽃 감동하고 돌멩이 끄덕여도

乾慧未能免生死   껍데기 지혜로는 생사를 못 면하니

思量也是虛浮漚   생각하면 이 또한 허망한 뜬 거품이로다.


 '처자궐속삼여죽(妻子眷屬森如竹)하고' 처자와 권속이 번성해서 마치 삼대나 대밭의 대나무같이 수가 많고, '금은옥백적사구(金銀玉帛積似邱)라도' 금이나 은이나 또는 옥이나 비단이나 재산이 많아서 마치 산더미같이 많다 해도, '임종독자고혼서(臨終獨自孤魂逝)하니' 죽어서 갈 때는 홀로 외로운 혼으로 돌아가니, '사량야시허부구(思量也是虛浮漚)라' 생각해보니 이것도 허망한 뜬거품이로다.


  네 가지 끝 글귀가 모두가 허부구이기 때문에 허부구게라고 합니다. 처자권속이 그렇게 많고 재산인 금은옥백이 산더미같이 많다 하더라도 임종 때는 결국은 홀로 외롭게 혼만 가는 것이니 생각해보면 이것도 역시 허망한 뜬 거품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수행자라고 해서 허망하지 않겠습니까?

조조역역홍진로(朝朝役役紅塵路)요’ 아침마다 날마다 하루 종일 애쓰고 애쓰는 세상길에서, 세상은 복잡하고 번뇌가 많으니까 홍진이라 합니다. 이러한 고달프고 때 묻은 세상 바닥에서, '작위재고이백두(爵位纔高已白頭)요’ 벼슬 지위가 가까스로 높이 좀 올라갈 땐 이미 벌써 센머리가 되는 것이니 '염왕불파패금어(閻王不怕佩金魚)라' 금어는 벼슬아치들이 차는 훈패나 같은 것입니다. 염라대왕은 저승에서 우리의 행동을 심판하는 존재입니다. 설사 심판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잠재의식 마음자리에 들어 있는 업의 종자는 스스로 심판이 되어서 업 따라 굴러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징적으로 염라대왕이 한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겠지요. 염라대왕은 우리가 높은 벼슬아치가 된 것을 두려워하지 않나니, 이것도 생각해보면 허망한 뜬 거품이로구나.


 다음에는 '금심수구풍뇌설(錦心繡口風雷舌)이라' 비단 같은 마음 수놓아서 울긋불긋한 입이니까 재주가 많아 말재간의 요설번재가 바람 같고 번개같이 능란하고 '천수시경만호후(千首詩輕萬戶候)라도’ 천호후나 만호후는 이른바 지방의 호족이나 왕자 제후(諸候)라는 말입니다. 시를 잘 지어서 많은 시로써 이름이 유명해지면 만호후와 같은 제후(왕)도 가벼워 한다는 말입니다. 그럴 정도로 명예라든가 능력이 훌륭하더라도, '증장다생인아본(增長多生人我本)하러' 인아란 아만심을 말합니다. 다생겁래로 우리가 인간인지라 어떤 누구나가 아만이 있습니다. 아무리 못난 사람도 자기 잘났다는 생각은 있는 것입니다. 시를 잘 쓰고 제후(왕)를 가볍게 할 수 있을 만한 정도가 되어도 이런 것은 모두가 다 다생겁래로 자기 아만심의근본만 더 증장을 시킨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참다운 깨달음의 경계에서 본다면 이것도 아무 쓸데가 없는 것이라, 생각해 보니 이것도 역시 허망한 뜬 거품이로구나.


 다음 마지막 절에는 '가사설법여운우(假使說法如雲雨)하고' 가사, 법을 설하는 것이 마치 구름과 비와 같이, 구름이 흘러가고 또는 비가 오듯이 막힘없이 설법을 잘해서(법사를 말하겠지요) '감득천화석점두(感得天花石點頭)라도’ 사람만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늘 꽃도 감동하고 돌 같은 무생물도 끄덕끄덕 수긍할 정도로 한다는 말입니다.


 옛날 남인도의 진나(陳那 Dinnaga) 법사(보살)는 대승법문을 하는 데도 당시에 모두들 법집(法執)에 휩싸여 수긍하지 않고 오히려 비방만 하니까 하도 한탄스러워서 산에 올라가 돌을 세워놓고 대승법문을 했더니 어찌나 도리에 맞는 법문이던지 돌들이 끄덕끄덕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석점두(石點頭)라 합니다. 하늘에 있는 꽃이 감동하고 돌들이 수긍할 정도로 설법을 잘 하더라도 '간혜미능면생사(乾慧未能免生死)하니' 간혜(乾慧)는 마른 지혜라는 말입니다. 물기가 있으면은 바싹 마르지가 않겠지요. 선정의 물이 없으면, 선정은 물로 비유합니다. 바싹 마른 지혜 곧 실증(實證)이 없는 허망한 분별 지혜라는 말입니다. 세간에서 남한테 칭찬도 받고 잘났다는 말도 듣고 설법도 잘 하더라도 생사 문제에는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를 욕하고 조사를 나무라고 별스런 똑똑한 소리를 다 하더라도 선정으로 습기를 못 녹였으면 생사에는 힘이 없고 해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설법을 잘 해서 돌멩이들이 끄덕이고 하늘에 있는 꽃이 감동할 정도가 된다 해도 바싹 마른 지혜, 다만 이론만의 지혜. 해오(解悟)만의 지혜인 간혜(乾慧)로는 생사를 면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생각해 보면 이것도 역시 허망한 뜬 거품이로구나.


 중국 당나라 약산유엄(藥山惟儼 745~828) 선사는 석두희천(石頭希遷 700~790) 스님의 제자로 마조(馬祖) 스님과 같은 시대의 선사입니다. '강남(江南)은 약산 유엄선사요 강서(江西)는 마조 도일 스님이라'고 할 정도로 유명한 분입니다. 그런데 선사이기 때문에 설법을 잘 안 하는데 많은 대중들이 간절히 설법을 청했더니 법상에 올라가 아무 말 없이 한참 눈만 끔벅끔벅하고 있다가 내려와서 조실방으로 가버렸습니다. 원주(院主)가 따라가서 이렇게 수많은 사람이 모여서 스님의 법문을 청했는데 어찌 그러시느냐고 물었더니 '불경(佛經)의 해설은 강사(講師)가 하고 계율을 설 (說)하는 데는 율사(律師)가 있는데 나는 선사(禪師)가 아니냐'고 하면서 다시는 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선사들은 이렇게 많은 말이 없는 것인데 저는 선사의 분상에서 너무 번다한 해설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