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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청화 큰스님 서적/5. 원통불법의 요체

제 3절 삼매(三昧)

제3절 삼매(三昧)


1. 삼매(三昧)의 뜻


  o 三摩地(Samadhi) 舊稱 三昧 新稱 三摩地, 定․等持․心一境性․正受․調直定․正心行處․息慮凝心․現法樂注 等. 心念이 定止하므로 定이라 하고, 掉擧를 여의므로 等이라 하며 心이 散亂치 않으므로 持라 함. 定心과 散心에 通하고 다만 有心으로 平等保持함.


大論云 善心一切處에 住하여 不動함을 是名 三昧라 함. (大論은 智度論)


  o 三摩鉢底(Samahita) 定의 一名 等至라 譯, 等은 定力에 依하여 惛沈의 煩惱를 여의고 心을 平靜安和의 境地에 이르게 하므로 至라함. 有心과 無心에 通하고 다만 定에 在하며 散心과 不通함.


o 三摩呬多(samahita) 定의 一名 等引이라 譯, 等은 定力과 散亂을 여의고 心을 平等하게 함이요, 이 境界에서 모든 功德을 일으키므로 引이라 함. 有心과 無心과 有漏와 無漏의 五蘊의 功德을 그 體로함. 散心과 不通함.      - 智度論․ 唯識論․ 瑜伽師地論․俱舍論 -


삼매(三昧)에 대해서 계속해서 더 말씀을 하겠습니다.


삼매는 삼마지나 같은 뜻입니다. 삼마지(Samadhi)라는 인도 말을 한 문으로 할 때에 줄여서 삼매라고 했습니다. 전에는 삼매라 하고 새로 말할 때는 삼마지라 ,합니다. '뜻으로는 정 (定), 등지(等持), 심일경성(心一境性) 또는 정수(正受), 조직정(調直定), 정심행처(正心行處), 식려응심(息慮凝心), 현법락주(現法樂住)로, 다 같은 뜻이며 이름마다 다 각기 그에 따른 공덕이 들어 있습니다. 이런 이름은 우리가 닦는 모양새라든가 또는 마음의 자세라든가 또는 얻어지는 공덕이라든가에 따라서 이름이 붙었습니다.


등지(等持)란 평등보지(平等保持)라는 말의 준말입니다. 조금도 차별이 없이 우리 마음을 평등하게 지니게 하는 것이므로 등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심일경성(心一境性)은 우리 마음이 진여불성자리 곧 하나의 본래 자리에 그대로 머무르는 경계이기 때문에 심일경성이라 합니다.


정수(正受)는 우리가 정다웁게 올바로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우리 범부들은 모든 것을 올바르게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올바르게 받아들이면 결국은 다 부처로 보여야 하는데 중생들은 업장대로 보는 것이니까 밉기도 하고 좋기도 합니다. 따라서 삼매는, 마음의 번뇌가 가시고 마치 파도가 자면 모두가 제대로 비치듯이, 때 묻지 않은 거울 모양이나 같은 것이 정수입니다.


조직정(調直定)이란, 범부 중생의 마음은 조화가 잘 안되어서 더러는 정(定)이 많기도 하고 지혜가 많기도 하고 의혹이 심하기도 할 때는 마음이 항시 산란스러운 것입니다. 마치 정(情)과 지(知)와 또는 의(意)가 조화되어야 하듯이 정(定)과 혜(慧)가 균등히 되어서 조화가 되면 마음이 곧게 됩니다. 그래서 조직정이란 마음이 조화롭고 곧은 선정이라는 뜻입니다.


정심행처(正心行處)는 우리 마음의 자세나 사념(思念)이 항시 바른 곳에 머물러 있다는 말입니다.


식려응심(息慮凝心)이란 분별시비하는 마음을 쉬고 본래 불심(佛心)에다 우리 마음을 집중시킨다는 말입니다.


현법락주(現法樂住)는 삼매 공덕에서 나오는 기쁨을 말합니다. 세속적인 오욕락(五欲樂)이 아니라 청정 불멸한 안락, 무량의 법락(法樂)에 안주한다는 뜻입니다. 현대가 너무나 물질이 풍요한 사회인지라 우리는 육감적이고 감각적인 것을 너무 많이 추구합니다. 이런 속락(俗樂)은 우리한테 업(業)만 더 증장을 시킵니다. 몸에나 마음에나 좋은 것이 못됩니다. 몸이 비대하기 때문에 주체 못하는 것 보십시요. 마땅히 법락만이 우리 마음에나 몸에나 가장 숭고한 행복인 것입니다.


삼매(三昧)란, 심념(心念)이 정지(定止)하므로 정(定)이라 하고, 우리 마음이 흔들려서 분별 시비하는 도거(掉擧)를 여의므로 마음이 가지런하게 평등하게 되어서 등(等)이라 하며, 마음이 산란치 않으므로 지(持)라 합니다. 중생 마음은 산란스러운 산심(散心)인 것이고 수행이 되어서 삼매에 들면 안정된 정심(定心)이라 합니다. 그런데 산심과 정심에 통하고 다만 유심(有心)으로 평등보지(平等保持)함을 삼마지(三摩地) 곧 등지(等持)라 합니다. 지금 말씀드리는 것이 번쇄하게 느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요즈음 삼매의 문제를 잘못 해석하는 분도 있고 책도 있어서 정확한 개념을 알아두면 참고가 되겠기에 번쇄함을 무릅쓰고 말씀을 드립니다.


포괄적으로는 삼매 가운데 삼마지․삼마발저․삼마희타 등이 다 들어 있으나, 구체적으로는 삼마지 삼마발저 삼마희타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마지는 정심(定心)과 산심(散心)에 통하고 다만 유심(有心)으로 평등보지(平等保持)하는 것입니다.


삼매에도 유심삼매(有心三昧)와 무심삼매(無心三昧)가 있습니다. 아직 정도가 낮은 때는 분별하는 마음이 남아있는 유심(有心)삼매고 정도가 깊어지면 분별심이 스러진 무심삼매입니다. 그래서 삼마지는 아직은 무심삼매가 못되어 유심삼매(有心三昧)입니다. 그리고 우리 중생의 산심(散心)에도 삼마지 법이 있고 또 정심(定心)에도 있는데 산심(散心)에 있는 삼마지는 그 정도가 낮은 삼매이고 정심(定心)에 있는 삼마지는 고도한 삼매가 됩니다.


지도론에서는 '선심일체처(善心一切處)에 주(住)하여 부동(不動)함을 삼매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불교에서 선심(善心)이란 유루법(有漏法)이 아닌 무루법(無漏法)에서 말할 때는 바로 불심(佛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삼매라 하면 진리에 머물러 있는 마음이 삼매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삼마발저(Samapatti)가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삼매의 일종입니다. 정(定)의 뜻으로서 삼매의 일종이라 등지(等至)라고 합니다. 앞에 삼마지도 등지(等持)로서 음(音)은 같으나 가질 지(持)자요 삼마발저는 이를 지(至)자를 씁니다. 등(等)은 정력(定力)에 의하여 혼침과 산란의 번뇌를 여의고 마음이 평정(平靜)하고 평화스러운 경계를 의미하고 이러한 경지에 이르게 하므로 이를 지(至)자를 쓰는 것입니다. 등지(等至)는 유심(有心)과 무심(無心)에 통하고 오직 정심(定心)에만 있으며 산심(散心)에는 없는 것입니다. 삼마지 곧 등지(等持)는 산란스러운 산심(散心)에도 있는 정도의 것이었지마는 삼마발저는 삼매가 보다 더 깊이 되어서 산심은 벌써 사라지고 정심(定心)만 있으나 마음까지 무심(無心)이 된 것은 아닙니다. 더러는 유심 (有心)도 되고 더러는 무심 (無心)도 된다는 것입니다. 산심이 없을 때 비로소 정심(定心)이라 합니다. 산심이 있는 사람들은 아직은 정에 든다는 말을 못 쓰는 것입니다. 산심이 사라져야 정에 든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삼마희타(Samahita)는 역시 삼매의 다른 이름의 하나로서, 삼마희타를 등인(等引)이라 번역하는데 등(等)은 혼침과 산란을 여의고 마음을 평등케 함이요 이 경계에서 모든 공덕을 일으키므로 인(引)이라 합니다. 유심(有心)과 무심(無心)과 또는 유루(有漏)와 무루의 5온의 공덕을 그 체(體)로 하며 산심(散心)과는 안 통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앞에의 삼마지나 삼마발저와 다른 것은 삼매에 깊이 들므로 해서 삼명 육통이라든가, 여러 가지 많은 공덕을 얻는 자리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등인(等引)이란 삼매로 해서 공덕을 이끌어 온다는 뜻입니다.


지도론이나 유식론이나 유가사지론이나 구사론이나 이런 데에 이렇게 번쇄하게 나오니까 마음 닦는 공부하는 분들은 혼동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서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則傅)이나 조사 스님들의 간결한 법어가 있는 것이니까 이런 삼매 풀이는 참고로만 하시길 바랍니다.



2.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


용수(龍樹) 보살께서 저술한 책 가운데서 보리심론(菩提心論)이라 하는 논장에 공부하는 요체가 많이 설명되어 있습니다마는 이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은 그 논장 가운데서 공부하는 요령을 금타(金陀 1898~1948) 스님께서 간추린 것입니다. 여기 있는 문장도 금타 스님께서 쓰신 문장 그대로 입니다. 전에 금강심론(金剛心論)을 낼 때는 저희들이 현대적인 어법을 좀 구사해서 냈습니다마는 생각해 보니까 별로 오래된 분도 아닌데 고인들의 문장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그 분들의 생명을 호흡하는 것 같아서 금타 스님 문장 그대로 옮겼습니다.


菩提方便門


이의 菩提란 覺의 義로서 菩提方便門은 見性悟道의 方便이라 定慧均持의 心을 一境에 住하는 妙訣이니 熟讀了義한 후 寂靜에 處하고 第一節만 寫하야 端坐正視리 壁面에 付하야써 觀而 念之옳되 觀의 一相三昧로 見性하고 念의 一行三昧로 悟道함.


阿彌陀佛


心은 虛空과 等할새 片雲隻影이 無한 廣大無邊의 虛空的 心界를 觀하면서 淸淨法身인달하야 毘盧遮那佛을 念하고 此 虛空的 心界에 超日月의 金色光明을 帶한 無垢의 淨水가 充滿한 海象的 性海를 觀하면서 圓滿報身인달하야 盧舍那佛을 念하고 內로 念起念滅의 無色衆生과 外로 日月星宿 山河大地 森羅萬象의 無情衆生과 人畜 乃至 蠢動含靈의 有情衆生과의 一切衆生을 性海無風 金液自涌인 海中漚로 觀하면서 千百億化身인달하야 釋迦牟尼佛을 念하고 다시 彼 無量無邊의 淸空心界와 淨滿性海와 漚相衆生을 空․性․相 一如의 一合相으로 通觀하면서 三身一佛인달하야 阿(化)彌(報)陀(法)佛을 常念하고 內外生滅相인 無數衆生의 無常諸行을 心隨萬境轉인달하야 彌陀의 一大行相으로 思惟觀察할지니라.


보리(菩提)란 깨달음의 뜻으로서 보리방편문은 견성오도(見性悟道)의 하나의 방편입니다. 정(定)과 혜(慧)를 가지런히 지니는 마음을 한 가지 경계에 머물게 하는 묘한 비결이니 잘 읽어서 뜻을 깨달은 후 고요한 곳에 처하고 제일절만 써서 단정히 앉아 바로 보는 벽면에 붙여서 관(觀)하고 생각하되 관의 일상삼매(一相三昧)로 견성(見性)하고 념(念)의 일행삼매(一行三昧)로 오도(悟道)함이라,


육조단경의 일상삼매 일행삼매나 또는 4조대사의 일상삼매 일행삼매와도 상통이 되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고 특별히 여기에서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심(心)은 허공과 등(等)할새 편운척영(片雲隻影)이, 조그마한 그림자나 흔적이나 흐림이 없는 광대무변의 허공적 마음 세계를 관찰하면서 청정법신(淸淨法身)인달하야, '인달하야'이 말은 '무엇무엇인' 하는 접속사로 고어입니다. 곧 청정법신인 비로자나불을 생각하고 이와 같은 광대무변한 허공적 심계(心界)에 일월(日月)보다도 초월한 금색광명을 띈 무구(無垢)의 정수(淨水)가, 눈부신 세간적인 금색광명이 아닌 순수한 금색광명을 띄고 있는 티끌이 없는 청정한 물의 성품이 충만한 해상적(海象的), 마치 바다와 같은 불성(佛性)바다를 관찰하면서 이 자리가 바로 원만보신(圓滿報身)인 노사나불임을 염하고 자기 마음으로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멸해지는 무색중생(無色衆生)과, 불교에서 중생이라 하면 자기 생각 즉 관념도 중생이라 합니다. 다만 모양이 없으니까 무색중생인 것입니다. 밖으로 눈으로 보이는 일월성수(日月星宿)나 산하대지 삼라만상의 무정중생(無情衆生)과, 의식이 없이 보이는 중생은 우리 중생차원에서 무정중생인 것이지 본질적으로 본다면 일체존재가 다 진여불성의 화신인지라 모두가 다 마음이요 모두가 다 식(識)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이나 축생이나 내지 꾸물거리면서 식이 있는, 인간 같은 6식이 아니라 5식을 말하겠지요. 준동함령의 유정중생(有情衆生)과의 일체중생을, 광대무변한 불성바다에 갖추어 있는 공덕으로 바람도 없이 금색파도가 스스로 뛰는 마치 바다에서 일어나는 물거품으로 관찰한다는 것입니다.


즉 앞에 든 우리 관념상의 무색중생이나 또는 우리가 밖으로 보이는 해나 달이나 또는 각 별들이나 산하대지나 삼라만상의 무정중생이나 우리 사람이나 축생이나 내지 준동함령의 유정중생이나 이런 것 모두를 어떻게 관찰하는가 하면, 광대무변한 불성바다에 바람도 없이 거기에 갖추어 있는 불성공덕으로 스스로 뛰노는 불성(佛性)의 물거품으로 관찰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인 석가모니불이구나 하고 념(念)하고, 석가모니불의 명의를 좁게 본다면 역사적인 석가모니 부처님만 화신이겠지마는 광범위하게 본질적으로 본다면 두두물물(頭頭物物) 모든 중생이 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는 화신입니다. 따라서 무색중생이나 또는 무정중생이나 유정중생이 모두가 다 천백억 화신이라는 말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과 우리 중생은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상에서 볼 때에 석가모니 부처는 깨달은 부처이고 중생은 깨닫지 못한 부처일 뿐입니다. 다시 처음부터서 되풀이하여 저 무량무변의 청공심계(淸空心界)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인 청정하고 끝도 가도 없이 광대무변하게 비어 있는 마음세계와 정만성해(淨滯注海)와, 그 가운데 진여불성의 무량공덕의 성품이 가득 차 있는 생명의 바다인 원만보신과 또는 구상중생(漚相衆生)을, 불성바다에서 인연 따라서 물거품같이 일어나는 것 같은 천백억 화신인 구상중생을, 청공심계의 공(空)․정만성해인 성품의 바다인 성(性)․거기에서 일어나는 일체중생의 상(相)이 원래 셋이 아니라 하나인, 합해서 하나의 실상으로 통해서 관찰하면서 이것이 삼신일불(三身一佛)인, 청정법신이나 원만보신이나 또는 천백억화신이나 이 삼신이 원래 하나의 부처인 아미타불이라고 회통(會通)해서 항상 끊임없이 관찰하고 생각(念)하고,


부처님 명호는 그때그때 쓰임새의 차이가 있어서 학문적으로 공부할 때는 여러 가지로 갈등을 느낍니다. 아미타불이라 하면 우리가 쉽게 생각할 때는 극락세계 교주라고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마는 그것은 상징적으로 하신 말씀인 것이고 가사, 관무량수경(觀無量燾經) 등에 나와 있는 아미타불은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바로 우주 자체를 말합니다. 따라서 대일여래(大日如來) 또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나 같은 뜻입니다.


아미타불을 극락세계의 교주라 할 때도 뜻을 깊이 새겨보면 극락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요, 천지 우주가 바로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다만 중생이 번뇌에 가리어 극락세계의 무량공덕을 수용 못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정수(正受)와 같이 정다웁게 여법히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더러운 땅인 예토(穢土)요, 사바세계(娑婆世界)가 되는 것이지 우리가 정말로 삼독오욕(三毒五慾)을 다 떼어버리고서 청정한 마음이 된다고 할 때는 정수(正受)가 되어 이대로 사바세계가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따라서 극락세계 교주의 아미타불이란 뜻이나 천지 우주가 바로 아미타불이란 뜻이나 결국은 같은 뜻인 것입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아(阿)자는 화신을 의미하고 미(彌)자는 보신을 의미하고 타(陀)자는 법신을 의미하나니 아미타불 곧, 참 나〔진아〕를 생각하고, 마음으로나 밖으로 보이는 모든 현상이나 생하고 멸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의 덧없는 모든 행위를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이라, 이것도 대승경전에서 자주 나옵니다. 우리 마음이 만 가지 경계로 구른다 곧, 바꿔진다는 말입니다. 마음이라 하는 우주의 실존 생명이 만 가지 인연 따라서 만 가지 경계로 전변한다, 인연 따라 변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 실상인 마음 곧, 불성은 변하지 않겠지요. 다만 상만 나툴 뿐인데 우리 중생은 상만 보고 본 성품을 못 보는 것이니까 다르다, 변한다 하는 것이지 본체에서 본다면 변동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만 가지 경계에 전변하는 미타(彌陀)의 일대행상(一大行相)으로 생각하고 관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如來

              法身......淸淨法身毘盧遮那佛 ........空                   眞如 

                                                                                       法性

           報身 .....圓滿報身盧舍那佛 ...........性            佛    實相
              化身 .....千百億化身釋迦牟尼佛 .....相                   菩提

                                                                                        道

                                                                                       大我

                                                                                       眞我

                                                                                       涅槃

                                                                                       極樂

                                                                                       一物
                                                                                       中道

                                                                                         覺
                                                                                      主人公
   
그래서 이 뜻을 보다 더 명확히 하기 위해서 다시 정리를 해봅니다.

보리방편문 전 뜻을 한마디로 하면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마음이 바로 부처인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본체는 법신(法身)입니다. 더 구체화시키면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즉, 대일여래나 비로자나불이나 같은 뜻입니다. 또 마음의 본체에 갖추어

있는 무량공덕이 보신(報身)입니다. 마음이 텅 빈 허무한 마음이 아니라 거기에는 자비나 지혜나 무량공덕이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무량공덕이 원만보신 노사나불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인연 따라서 일어나는 별이나 은하계등 우주나 인간이나 일체존재는 모두가 다 화신(化身)입니다. 더 구체적인 이름으로 하도 수가 많고 헤아릴 수 없으니까 천백억화신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좁게 석가모니 부처님을 인도에서 나오신 부처님이라고만 생각하면 그것은 소승적이고, 대승적으로는 일체존재가 다 석가모니불인 것입니다. 화신의 현상계는 아미타불의 아(阿)에 해당하고 보신경계는 현상의 성품이 되니 미(彌)에 해당하고 화신과 보신이 둘이 아닌 본래 공(空)한 근본 경계가 법신으로 타(陀)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신일불(三身一佛)인, 한 부처인 아미타불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명호는 중생을 교화하는 인연 따라 그 공덕에 들어맞게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여래(如來)라 곧 진리 그대로 왔다. 진여(眞如)라, 진리 그대로다. 또 진리에서 오고 진리로 돌아가기 때문에 여래여거(如來如去)라 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그대로 있지마는 사람은 자기 무명 따라 스스로 업을 지어 스스로 받을 뿐인 것입니다. 진여도 진리 그대로라는 말입니다. 진여를 줄여서 여(如)라는 말만으로도 진리를 표현합니다. 이렇듯 올바른 것이 진리요, 또는 일체 존재의 근본 성품이니까 법성(法性)이요 또는 불성(佛性)이라 또는 실상(實相)이라 하는데 이른바 우주 만유의 실존(實存)이라는 말입니다.


실존철학도 우주의 실상이 무엇인가? 나의 본래가 무엇인가? 를 탐구하는 철학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키에르케고르나 하이데거나 또는 야스퍼스의 철학을 보면 시각의 차이는 있으나 실존을 알려고 애도 쓰고 방불하게 실존의 윤곽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또는 보리(菩提)라 또는 도(道)라, 대아(大我)라 합니다. 중생은 소아 또는 속아(俗我)입니다. 속된 아(我)란 말입니다. 또는 진아라, 열반이라, 또는 극락이라, 또는 오직 하나의 일의제(一義諦) 즉 일물(一物)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이 무엇인고'할 때는 결국 이 자리를 구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중도(中道)라, 또는 깨달음의 각(覺)이라, 바로 이것을 주인공(主人公)이라고도 합니다.


이렇게 법신, 보신, 화신도 원래 셋이 아닌 것입니다. 근본 체성(體性)은 법신이고 근본체의 성공덕(性功德)인 자비나 지혜 등 무량 공덕은 보신이고 법계연기(法界緣起)라, 법계에 갖추어 있는 성공덕이 인연 따라 이루어지는 일체 존재가 화신입니다. 따라서 법신, 보신, 화신은 셋이 아니기 때문에 삼신일불(三身一佛) 입니다.


그래서 이 보리방편문같은 공부 방식은 우리 자성(自性)이 바로 부처임을 밝힌 법문이기 때문에 이른바 자성선(自性禪)이라고 이름 붙인 경론도 있습니다. 어느 선(禪)이나 다 부처를 또는 자성을 근본으로 하기 때문에 사실은 본질적으로는 똑같은 것입니다. 다만 어떻게 해야 빨리 마음을 통일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문제 아닙니까. 이렇게 해 보고 저렇게 해 보고 우리가 몸부림치는 것도 다 마음이 통일이 안 되고 산란심과 혼침이 제거되지 않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혼침과 산란심을 어떻게 빨리 없앨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 수행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부처님의 경전을 보면 거의가 다 산란심을 어떻게 제거하고 혼침을 막는가에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우선 음식에 대한 계율을 보더라도 모두가 다 우리가 혼침을 덜 내게 하는 데에다 초점을 두고 말씀이 되었습니다. 가사 많이 먹거나 짜게 먹으면 분명히 혼침은 더 옵니다. 계율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을 하겠습니다마는 아무튼 혼침과 도거(掉擧) 문제는 깊은 관심을 두고 싸워서 극복해야 할 문제입니다.


따라서, 산란심을 제거하려면 자기 수행법에 대해서 스스로가 환희심을 가지고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싫증나는 문제를 억지로 하라면 잘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 수행법 가운데 구분한 것을 보면 수신문(隨信門)과 수법문(隨法門)이 있습니다. 믿음을 주로 하는 문이 있고 또는 부처님이나 조사 스님들이 말하는 어떤 법에 따라서 가사, 관법(觀法)에서 무슨 관을 한다든가 또는 화두를 든다든가 어떤 법에 따라서 하는 수행법이 수법문(隨法門)입니다. 수신문은 신앙대상을 생명의 실상으로 확신하고 믿음을 위주로 공부하는 방법이 수신문(隨信門)입니다. 기독교라든가 이슬람교라든가의 가르침은 수신문에 해당하겠지요. '오! 주여' 하듯이 하나의 신앙 대상에 대해서 전폭적인 신심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으로 가는 수신문은 타력문(池力門)이고 또는 어떤 수행법으로 관조하고 참구해가는 수법문은 자력문(自力門)으로서 다 각기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만 필요하고 다른 것은 필요 없다고 하면 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물론 어떻게 하든지간에 공부 정진에 있어서 한 고비만 넘어서 버리면 자력 타력이 하나가 되어버립니다마는 우리 인간 자체가 원래 믿는 정서도 필요하고 지혜도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한 가지에만 치우쳐 버리면 오래 감내(堪耐)를 잘 못합니다. 중간에 하기 싫지 않게 나가려면 우리 인간성에 본래 갖추어 있는 믿음도, 참구하는 지혜도 가지런히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흠모 추구하는 부처님은 바로 생명 자체요, 나 또한 생명이요, 본래면목도 역시 생명이기 때문에 일체 존재가 바로 생명인지라 부처란 바로 생명의 실상이며 내 생명의 본질이라고 생각할 때는 저절로 자기 고향같이 그리운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 생명의 본질이라고 생각하여 흠모하고 연모하는 염불하는 마음이 밑받침되어 있어야 어떤 공부를 하든지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4선정법(四禪定法)에도 말씀이 나옵니다만 아함경(阿含經)에서 보면 석존께서 보리수하에서 성도하실 때도 사선정 멸진정(滅盡定)을 닦아서 대각(大覺)을 성취했습니다. 또 열반 드실 때에도 역시 멸진정을 거쳐서 4선정의 삼매에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그리고 아라한도 초선(初禪) 2선 3선 4선을 거쳐 멸진정에서 아라한도를 성취한다고 여러 군데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달마 스님께서 중국에 오시기 전까지는 대체로 선이라 하면 4선정 멸진정 법을 닦았습니다.


그러면 달마 스님 뒤에는 필요가 없는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근본불교(根本佛敎)가 필요가 없다면 마땅히 4선정 멸진정이 필요가 없어 폐기를 해야겠지요. 그러나 근본불교도 필요하다면 4선정 멸진정을 꼭 참고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근기가 수승해서 범부가 비약적으로 멸진정에 들어가면 모르겠지만 보통은 그렇게 되지 않고 성불까지의 과정에 수많은 경계가 우리를 산란하게 하는 것입니다. 경계에 따라 기분이 좋은 때와 나쁜 때가 있어서 좋은 경계에는 집착해서 얽매이고 나쁘면 나쁜대로 또 벗어나려고 얽매이는 것입니다. 참선할 때에 무서운 것이 나와서 유혹도 하고 공포심을 준다면 우리는 그놈 떼려고 몸부림치고 애를 씁니다만 그럴수록 도리어 더 달라붙습니다. 따라서 그때그때 경계를 대치(對治)해 나가고 부정(否定)해 가는 법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삼매의 과정을 설명한 것이 4선정 멸진정이기 때문에 반드시 닦아야 할 삼매법인 것입니다.


우리 범부가 견성오도(見性悟道)하는 직전에 들어가는 선근의 경계가 무간정(無間定)인데, 무간정까지 갔다 하더라도 기분이 너무 황홀하니까 만심(慢心)을 부리기가 쉽습니다. '이만치 되었으니 사회에 나가서 중생 제도하면 되겠지, 불경이나 법의 해석도 척척 되니 이것이 바로 견성이겠지!'하고는 닦지 않아 버리면 결국은 그대로 범부로 끝나 버리지요. 아만심이나 자의식이 과잉한 사람들은 견성을 핑계해 가지고서 도인이라고 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은 무던히 아니까 도인같이 보이기도 하겠지요.

그러면 대망언(大妄言) 죄를 짓게 됩니다. 따라서 단박에 깨닫는 분도 있겠지마는 그와 같이 단박에 쉽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부하는 방법이 자기 마음에 내켜야 환희심을 내고 환희심을 내야 피로가 안 생기고 몸에 병도 안 생기는 것입니다. 싫어하면서 억지로 하면 꼭 병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항시 우리 마음의 바닥에서는 훤히 빛나는, 행복도 자비도 지혜도 모든 것을 다 갖춘 그 자리, 눈만 바로 뜨면 바로 나올 수 있는 자리, 나한테 본래 갖춘 그 자리를 한사코 여의지 않아야 합니다. 다만 우리 번뇌 망상 때문에 가려져 있는 것인데, 번뇌 망상을 대별하면 이른바 혼침과 도거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분별시비 망상하는 도거나 또는 꾸벅꾸벅 혼침해 버리는 동안은 결국은 우리가 죽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그걸 없애기 위해서 우리가 최선의 힘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감성적(感性的)으로 예술적인 능력도 있고 그런 소질이 많은 사람들은 역시 부처님을 생명적으로, 그리움 쪽으로 참구하는 수신행(隨信行)이 훨씬 더 적성에 맞을 것이고 또는 자력적으로 '내가 본래 부처인데 어디에 무얼 의지할 것인가?' 이렇게 성격상 아주 강직하고 이지적(理智的)인 분들은 수법행(隨法行)의 수행법을 참구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또는 감성적이고 예술적인 유연심(柔軟心)이 더 강하다 하더라도 본래 지혜도 갖추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감성적인 쪽만 구해서는 싫증을 내는 것이므로 지혜로 참구(參究)하는 방법도 참고로 해서 보완을 시키는 것이고, 또는 강강(剛剛)해서 자력적인 분도 부처님을 생명으로 추구해서 어느 때는 법당에서 절도 많이 해보고 해제(解制) 때는 기도를 모셔보는 그런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꼭 염불만 해야 한다거나 죽도록 까지 꼭 화두만 해야 한다고 집착을 말고서 화두나 염불이나 내나 진여불성 그 자리를 밝히는 것이니까, 자기 적성과 인연에 따라서 정진하면 공부에 싫증이 안 나고 우리 마음이 정혜균등(定慧均等)해서 깊은 삼매 경계를 성취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3. 삼매(三昧)의 종류(種類)



1) 사종삼매(四種三昧)


四種三昧


o 常坐三昧…又名一行三昧(文殊說般若經에 依함) 九十日을 一期로 함, 閑居靜處․持戒淸  淨․端坐正念


o 常行三昧…又名般舟三昧로서 般舟三昧經에 依하여 修함.


       ※ 般舟三昧 參照.


   要言하면 步步聲聲念念唯在阿彌陀佛


o 半行半坐三昧…方等三昧 또는 法華三昧라고도 함. 大方等陀羅尼經에 依함. 閑靜處에서 道 場을 莊嚴하고 七日을 期하여 長齋하고 日에 三時洗浴至誠心으로 罪咎를 懺悔하고 行旋과 坐禪을 적당히 兼하며 中道實相의 理를 觀함.


o 非坐非行三昧…위의 三種三昧에 屬하지 않은 諸三昧를 말하며 大品般若經에서는 覺意三昧 또는 自意三昧라고도 稱함. -止觀 -


  ※ 흔히 春秋에는 常行三昧․夏冬에는 常坐三昧를 修行者의 樂欲에 따라 이를 修함.


천태(天台) 스님같은 분이 불교의 복잡한 여러 가지 수행법 상을 정리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참 많이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종삼매(四種三昧)도 역시 천태지의 선사가 체계를 세운 것입니다.


상좌삼매(常坐三昧)는 항상 앉아서 하는 삼매라는 말입니다. 좌선할 때 결제하는 것은 상좌삼매가 되겠지요. 끊임없이 행한다고 해서 일행삼매(一行三昧)라고도 합니다. 문수설 반야경(文殊說般若經)에 의한 것인데 4조 도신 대사께서도 의지했다는 경이고 육조단경도 부촉품에 문수설 반야경에 의지해서 말씀을 하였고 90일을 일기(一期)로 한거정처(閑居靜處),즉 고요하고 한가한 곳을 선택해야 할 것이고 마땅히 지계청정(持戒淸淨)이라, 계행이 청정해야 합니다. 계행이 청정하지 않으면 삼매에는 절대로 못 들어갑니다. 그리고 단좌정념(端坐正念)이라, 단정히 가부좌해서 바로 정념으로 화두나 염불이나 일심으로 참구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상행삼매(常行三昧)가 있습니다. 일행삼매와 상행삼매는 구분을 해야 합니다. 일행삼매는 바로 끊임없이 닦는다는 상좌삼매와 같은 것이고 상행삼매는 서서만 하는 삼매입니다. 앉아 있으면 졸림이 오는 것이니까 서서 포행(布行:經行)하면서 하는 삼매이며 반주삼매(般舟三昧)라고도 합니다. 반주삼매경(般舟三雌渤에 의지해서 닦는데 과거의 선지식들이 반주삼매경에 의해서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결제 동안에 7일 동안 용맹정진을 하는 것도 이 반주삼매경에 의지해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좌삼매와는 앉아서 하는 것과 서서 하는 차이 뿐입니다.


상행삼매는 어떻게 하는고 하면, 밥 먹을 때와 용변 볼 때 외에는 앉지를 않고 사뭇 서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 자고 안 눕고 하루에 한 끼 먹고 누구와 말도 않고, 좀 어려운 수행이 되겠지요. 목욕도 하루에 한번 이상 세 번까지 하라는 것이고 내의(內衣)도 꼭 하루에 한 번씩 갈아입으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주 엄격하니 규제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 것이 무슨 필요가 있는 것인가? 하지마는 생각을 깊이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서 악취가 풍기면 나쁜 악귀들이 주변에서 냄새를 맡고 배회하고, 우리 몸에서나 주변에서 향내가 풍기고 깨끗할 때는 도량청정무하예 삼보천룡강차지(道場淸淨無程穢 三寶天龍降此地)하듯이 선신들이 옹호합니다. 틀림없이 호법선신들은 향기를 좋아하고 맑은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는 보보성성 염념유재 아미타불(步步聲聲 念念唯在 阿彌陀佛)이라, 걸음걸음 소리소리 생각 생각에 오직 아미타불만 염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기왕이면 불호(佛號)를 부를 때는 이른바 부처님의 총대명사요 삼신일불인 아미타불을 외우는 것이 합리적이 되겠지요. 처음 공부하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하나에다 마음을 딱 잡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공부가 안 되는 것입니다. 화두면 화두 또는 부처면 부처 명호를 딱 잡아서 참구해야 산란스러운 마음이 모아지는 것입니다.


다음 반행반좌삼매(半行半坐三昧)라, 반(半) 정도는 서서하고 반(半)은 앉아서 하는 것으로 방등삼매(方等三昧) 또는 법화삼매(法華三昧)라고도 합니다. 대방등다라니경(大方等陀羅尼脚)에 의하여 역시 한적한 곳에서 도량을 깨끗이 장엄하고 이레 동안을 기하여 장재(長齋) 곧 일일일식(一日一食)합니다. 장재의 재는 낮에 사시(.巳時)에 올리는 것입니다. 부처님께 낮에 한번 올리고 우리는 한 끼를 먹는 것입니다. 비구계(比丘戒)에서는 재 한 때만 먹으라는 것입니다. 장재란 일주일이면 일주일 동안 하루 한 끼만 먹으라는 것입니다.


또 하루에 세 번 목욕을 하고 지성심(至誠心)으로 자기의 허물을 참회합니다. 우리가 공부할 때 무참괴(無慙愧)면 공부가 안 나아가집니다. 가령, 공부할 때 아무리 공(空)을 관찰해도 법성(法性)을 미처 못 깨달은 사람들은 죄의 허물을 못 벗어나는 것입니다. 참회를 해야 죄가 가벼워지고 소멸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생참회(無生懺悔)로 본래 죄가 없다는 생각과 더불어서 작법참회(作法懺悔)라, 법으로 즉 말이나 행동 등 모양을 취해서 참회하는 것입니다. 참회의 참(懺)은 자기 양심에 참회하는 것이고 회(悔)는 남에게 참회는 것입니다. 지성심으로 죄구(罪咎)를 참회해 버려야 마음이 개운해지고 차근차근 몸도 마음도 가벼워집니다. 죄를 지었는데도 부끄러움 없이 지내면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지가 않습니다. 반행반좌삼매(半行半坐三昧)는 왔다갔다 포행하면서 하는 행선(行禪)파 좌선(坐禪)을, 적당히 겸해서 합니다.


반주삼매는 행선만 하는 것인데 혼침도 제거하고 몸의 거북한 점을 풀기 위한 것이므로 좌선을 좋아하는 분들은 좌선만 해도 좋은 것이지만 한 가지만 할 때에 너무나 지루하면 이것저것 섞어서 겸해도 무방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우리 마음은 중도실상(中道實相)의 원리 즉 진여법성 경계를 관조합니다.


그 다음에 비좌비행삼매(非坐非行三昧)는 좌선이나 또는 행선을 떠나서 그 외의 자세로 하는 삼매입니다. 곧, 삼종삼매에 속하지 않는 모든 삼매를 말하며 이것은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에 있는 각의삼매(覺意三昧) 또는 수자의삼매(隨自意三昧) 곧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뜻에 따라서, 근기에 따라서 구애 없이 하는 삼매입니다. 누워서 하는 것도 비좌비행삼매의 한 방법입니다.


이렇게 4종삼매를 말씀 드렸습니다. 이 삼매를 하는데 있어서는 흔히 보통, 계절 따라서 봄이나 가을에는 상행삼매 쪽을 하고 또는 여름이나 겨울에는 우리가 결제하듯이 상좌삼매를 하는데 수행자의 취향과 인연 따라서 하면 됩니다.


부처님 당시에 다라표(陀羅票 Dravya) 비구라고 별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만 저는 그 분을 굉장히 위대한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부처님 제자로서 총명하고 독실하여 14세에 출가해서 거의 2년 동안에 공부를 마치고 16세에 아라한과를 성취해서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중생에게 모든 것을 바쳐야겠구나 ' 생각하고 요새 말로 지객(知客) 소임을 맡아 어두운 밤에는 좌수출화(左手出火)라, 화광삼매(火光三昧)에 들어서 왼편 손에서는 광명을 내어 비추고 오른손으로 우수지와(右手指臥)라, 오른손으로는 와구(臥具)있는 .처소를 가리켜서 오는 분들을 맞이해 대중 시중을 들었습니다. 겨우 14세에 출가해서 16세에 아라한과를 성취하고 화광삼매를 낼 수 있는 법력을 다 갖추었습니다. 우리 인간성이라는 것은 개발 여하에 따라서 얼마나 위대한가,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신라 진흥왕 때에도 현광(玄光) 스님은 화광삼매에 들었고 제자들도 화광삼매나 수광삼매(水光三昧)에 들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앞서도 말씀 드렸습니다마는 부처님부터 6조 혜능까지 삼십삼(三十三) 조사 가운데 거의 6할 정도는 다 임종 때에 화광삼매에 들어서 자기 심장에서 삼매의 불을 내어 자기 육신을 스스로 화장하여 사리(舍利)를 남겼습니다.


사실 우리 불성(佛性)이라 하는 것이 마니보주(摩尼寶珠)같은 무량무변한 만능(萬能)의 공덕장(功德藏)이기 때문에 불성을 밝혀서 깊은 삼매에 들어 갈 수만 있다면 신통도 마음대로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몸을 우주에 가득차게 할 수도 있는 것이고 또는 조그만한 쇳덩이 속에 들어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왜 가능한 것인가? 제법공(諸法空)도리에서 본다면 모두가 물질적으로 있지가 않은 것이니까 석벽무애 비행자재(石壁無碍飛行自在)라, 바위벽도 거리낌이 없고 비행도 자유자재하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색(色) 즉 공(空)이라 바위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게도 실제로 무게가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몸의 체중이 대류권(對流圈) 이내에서는 50㎏, 60㎏ 하지만 성층권(成層圈)에 올라가면 그렇게 안 됩니다. 또는 더 올라가서 중간권(中間圈), 온도권(溫度圈) 또는 전리권(電離圈) 자기권(磁氣圈)에 올라갈수록 무게가 줄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권 위에 진공(眞空)권에 이르게 된다면 무게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류권 내에서 우리 무게가 몇 십㎏하는 것이지 꼭 정해진 고유한 것이 아니듯 바위라는 것도 강도가 얼마고 무게가 얼마라고 물리학적으로는 계산할 수가 있겠으나 본질적으로는 강도가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제법이 공일 때 어느 것만 공이고 쇳덩어리나 바위 덩어리 같은 것은 공이 아니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도 역시 분석한 뒤에 공이 아니라 그대로 바로 공 곧, 색즉공(色卽空)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점에서도 신통자재(神通自在)하는 것이 무슨 요술이나 기적처럼 부사의(不思議)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요 우리와 절대로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다라표 비구도 역시 우리하고 똑같이, 본래 갖추어 있는 것은 호리불차(毫釐不差)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한테 갖추어 있는 그런 부사의한 신통묘지(神通妙智)를, 마니보주같은 부사의한 힘을 자아내는 것입니다. 어떻게 자아낼 것인가? 우리가 여법(如法)히 바로 행동하고 깊은 삼매에 들어서 번뇌를 모조리 없애는 멸진정(滅盡定)을 성취하고 무량공덕을 자아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꼭 4선정에 들어가야 합니다. 4선정에 들어가야 욕계 번뇌(欲界煩惱)를 여의고 색계 무색계까지 들어가고 그래서 멸진정으로써 삼계(三界)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선은 욕계 번뇌를 한사코 버려야 합니다. 욕계 번뇌를 못 버리면 절대로 자성(自性)공덕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우바국다(優婆麴多 upaguta) 존자는 33조사 중 제4대(第四代 조사(祖師)입니다. 부처님 다음 마하가섭, 아난존자, 상나화수, 그 다음에 제 4대인데 우바국다 존자는 별로 잘 생긴 얼굴은 아니기 때문에 무상호불(無相好佛)이라고 불리웁니다만 이 분은 사방(四方)이 사십장(四十丈)이나 되는 석실(石室)에 한 사람 제도할 때마다 성냥개비만한 산가치 하나씩을 넣어서 그 석실이 가득 차도록 까지 많은 사람들을 아라한과를 성취하도록 제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행(遊行)을 하다가 갑자기 날씨가 흐려 비가 오기 때문에 빈 석실에 들어갔는데 마침 한 젊은 여인도 비를 피하여 석실로 들어와 밤새 비가 개이지 않아서 할 수 없이 함께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그 이튿날 지나가던 바라문이 보고서 나쁜 소문을 퍼트렸습니다. 더구나 부처님 제자고 위대한 사람이니까 바라문교에서는 시기심에 불타서 갖은 모략과 별별 모함을 다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아쇼카(阿育포 Asoka)왕은 대중 앞에서 해명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우바국다가 그 자리에 나가서 즉시에 삼매에 들어 하늘로 솟아올라 18신변(十八神變)의 부사의한 신통을 보였습니다. 삼명육통을 다 통달한 도인들은 18신변을 다 합니다. 신통이라는 것은 계행이 절대로 철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음욕을 미처 못 여의면 신통을 못한다는 것은 공변된 정설입니다. 18신변을 바라본 비방한 사람들이 도리어 찬탄해서 숭앙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무튼, 신통자재하는 법력을 부리기 위해서는 꼭 근본선(根本禪)인 4선정과 멸진정을 거쳐야 합니다. 근본선을 못 거치면 결국 신통은 못하는 것이고, 당시에 부처님께서 하시던 무량신통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공상같이 생각하고 소위 '상징 적이라든가 또는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과장해서 표현했겠지' 합니다마는 근본선을 충분히 이해한다면 그런 모든 신통묘지를 온전히 믿게 되는 것입니다. 4선정은 외도(外道)도 삼매정진하면 발득(發得)할 수 있으나 번뇌와 습기(習氣)를 모조리 멸진(滅盡)하는 멸진정은 성자(聖者)에 한(限)하는 것입니다.


2) 반주삼매(般舟三昧)


 般舟三昧(Pratyuypanna samadhi)


一切佛現前三味라 譯함. 또는 見佛定이라고도 한다. 이 三昧를 닦으면 모든 부처님이 눈앞에 現前하기 때문이다. 此三昧의 威信力․三味力․本功德力에 依하여 아직 天眼通을 得하지 않았으나 能히 十方現在諸佛을 見得한다.    


                     -智度論 -


此三昧를 修함에는 ① 獨處閑居 ② 持戒完具 ③ 日中一食 ④ 黙言精進 ⑤ 三時洗浴 ⑥ 飮食과 用便外에 坐不得 ⑦ 常經行無休息 ⑧ 一念彌陀佛(般舟三昧經은 彌陀經典中 最古의 文獻, 現存 大乘經典중 最初의 經典)



반주삼매(般舟三昧)에 대해서 얼핏 언급은 했습니다마는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뜻으로 풀이하면 일체불현전삼매(一切佛現前三昧)입니다. 일체 부처님이 눈앞에 나오는 삼매이니까 불자라고 하면 누구나 다 지대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는 견불정(見佛定)이라고도 합니다. 이 삼매를 닦으면 모든 부처님이 눈앞에 현전하기 때문에 견불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삼매의 위신력 또는 삼매력 또는 근본 공덕력에 의하여 아직 천안통(天眼通)을 득하지 않았으나 능히 시방 현재 제불을 견득(見得)한다고 합니다. 천안통을 통하면 응당 원근(遠近)에 관계없이 다 보이는 것이고 또 삼세제불을 다 볼 수가 있겠지만 천안통을 통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일념이 되고 사무치도록 성실하다면 그런 위신력 삼매력 또는 사무친 그 공덕력에 따라서 부처님을 뵐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용수보살 지도론에 있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기도만 잘 모셔서 몸과 마음이 청정히 된다면 꼭 천안통을 안 통한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신통을 부릴 수가 있는 것이고 특히 부처님을 뵐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이라는 것은 가만히 어디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근본 생명, 정기, 에너지이기 때문에, 사람끼리도 누군가를 간절히 생각하면 그 사람이 이상하게도 끌려오듯이,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통하는 것인데 하물며 중생염불 불환억(衆生念佛 佛還憶)이라, 우리 중생이 부처님을 간절히 생각한다면 그 정성에 끌려 역시 부처도 우리를 굽어보는 것입니다. 생명은 그런 신비로운 힘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그런 신통력이나, 또는 아직 4선정을 성취하지 못했더라도 정성에 따라 그런 공덕력 또는 위신력 삼매력에 따라서 삼세불을 눈앞에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이 삼매를 수행할 때 인연조건이란 독처한거(獨處閑居)라, 우리가 대중적으로 공부할 때는 사실 오로지 삼매에 들기는 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주변 조건에 관심을 두어야 하니까요. 옆에서 누가 아프면 우리 수자가 그대로 놔 둘 수는 없겠지요. 돌봐야 하는 것이고 또는 자기가 한 끼 먹는다고 어디 가서 혼자 있기도 곤란스러운 것이고 대중이 근기가 달라서, 이 반주삼매는 근기가 약한 사람들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닦는다고 생각할 때는 모르거니와 정말로 내가 꼭 며칠 동안에 깨달아야겠다고 비장하게 마음먹을 때는 한가한 데서 혼자 독처(獨處)에서 지내면서 수행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효과적입니다.


지계완구(持戒完具)라, 계행도 그냥 보통이 아니라 철저히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신청정 심청정(身淸淨心淸淨)이라, 우리 몸이 청정해야 마음도 청정합니다. 상관성이 있는 것입니다. 또는 동시에 우리가 공부해서 꼭 가피를 입으려면 제불보살은 말할 것도 없지만 호법신장이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여러 가지 저급신 고급신이 많이 있는 것인데 우리가 청정하지 않아서 냄새가 나고 더러운 때는 더러운 것과 상응하는 악신 악귀가 모여 오는 것이고 청정한 때는 악귀들은 침범 못하고 청정과 상응하는 선신들이 우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중국의 율종을 세운 남산도선(南山道宣 596~667) 율사(律師)가 어두운 밤에 보행하다가 허방을 잘못 디뎌가지고 넘어지니까 시꺼먼 놈이 앞에 나오더니 부추겨서 일으킵니다. 그래서 도선 국사가 "누구인고?" 하니까 "저는 북방 비사문천왕(毘沙門天王) 왕자의 장경인데 율사님께서 넘어지시니까 일으켜 드립니다. " 도선 국사가 "기왕이면 내가 넘어지기 전에 할 것이지 넘어진 뒤에 그러느냐"고 하니까 "제가 미리 알기는 했지마는 율사님이 뒤를 본 다음에 닦지 않아서 냄새가 나서 미처 접근을 못했습니다. " 이런 것은 뒤에 분들이 만들어 낸 말씀인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역시 그런 선신들은 우리 몸에서나 옷에서나 냄새가 나면 접근을 잘못 하는 것입니다.


일중일식(日中一食)이라, 일중일식은 오정(午正)을 넘어서면 안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루에 한 끼를 먹되 많이 먹는 것이 아니라 일단식(一端食 또는 一段食) 곧 주먹밥 정도로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묵언정진(黙言精進)이라, 말이라는 것이 개념이기 때문에 말을 하면 그만치 산란스러워집니다. 우리가 말을 안 하면 갑갑하겠지만 공부가 익어진 사람들도 역시 묵언하는 것이 참 좋습니다. 그래야 마음이 헷갈리지 않고 오롯이 통일되어가는 것입니다.


삼시세욕(三時洗浴)이라, 세 때에 목욕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음식과 용변외에는 좌부득(坐不得)이라, 앉지 말아야 합니다. 앉아 버리면 편해지고 또는 혼침이 오기 쉬우니까 그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상경행 무휴식(常經行無休息)이라, 항시 경행(經行 vihara)즉, 거닐며 포행하고 휴식을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일념아미타불(一念阿彌陀佛)이라, 오로지 아미타불을 생각하고 외우며 끊임없이 공부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반주삼매를 닦는 것입니다. 7일 동안 이렇게 닦는다면 업장이 무거운 사람이 아니면 꼭 부처님을 뵈올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일체불현전(一切佛現前) 삼매가 되지 않습니까.


중국의 선도(善導 613~681) 대사나 율종(律宗)의 도선(道宣)율사나 또는 여산(廬山)에서 공부한 혜원(慧遠) 대사 그 분들은 꼭 이런 반주삼매를 매월 한 번씩은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보통 사람들은 매월 하기는 어렵겠지요. 선방에서도 하안거 때나 동안거 때나 일주일 동안 용맹정진하지 않습니까만 참고로 하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此三昧를 修持하면 諸厄難을 免하고 諸天龍神이 擁護愛敬하며 十八不共法을 發得함. 또한 이 三昧가 成熱하면 或은 스스로 天眼․天耳를 得하여 十方佛所에 飛到하여 間法斷疑網하고 또한 스스로 神通이 無하여도 恒時 阿彌陀佛 等 諸佛을 念하여 心을 一處에 住하면 곧 佛을 見하고 疑間을 請問할 수 있으며, 또는 念佛을 修習하는 者中에 離欲이 있고 未離欲이 있는데 그들 中에 佛像을 見하는 者, 生身을 見하는 者, 過未現 諸佛을 見하는 者도 있다. 換言하면 諸佛의 法身은 定相이 無하므로 皆是衆緣에 依하여 生하고 畢竟空寂 無相하여 如夢 如幻하여 實體가 없다.     


                - 諸經論及 特히 廬山慧遠의 質疑를 鳩摩羅什이 答함 -


이 삼매를 받들어서 지닌다면 모든 액난을 면하고 또는 모든 천상이나 또는 용이나 신장들이 우리를 옹호애경하여 공경하고 18불공법(不共法)을 발득한다고 합니다. 불성의 무량공덕을 18종으로 구분해서 보통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성불의 경계는 아니기 때문에 완전한 것은 못되지요. 또한 이 삼매를 성취하면 원력에 따라서 천안(天眼) 천이(天耳)를 얻어서 시방 부처님이 계신 곳에 날아가서 의심 있는 법을 물어 해결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것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꼭 이렇게 않는다 하더라도 착실히 공부하는 분들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꿈속에서라도 홀연히 문제가 척척 풀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는 어느 스님 모습을 하고 왔다든가 또는 어떤 고귀한 모습을 하고 와서 의문을 다 풀어주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천지 우주란 부처님의 심심미묘한 불성이 충만해 있기 때문에 진지하고 청정한 마음으로 구한다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척척 풀려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비로운 불성에 갖춘 무한공덕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두를 다 할 수가 있고 모두를 다 알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반주삼매행을 닦는다면 천안ㆍ 천이통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방불(十方佛)의 부처님 처소에 날아가서 법을 묻고서 의심을 끊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설사 신통이 안 나온다 하더라도 항시 아미타불 등 제불을 염하여 마음을 한군데에 머물게 하면 바로 부처님을 뵈옵고 의문을 청문(請問)할 수가 있으며 또는 염불을 수습(修習)하는 자 중에는 욕심을 다 떠난 분도 있고 또는 욕심을 미처 떠나지 못한 분도 있는데 그들 중에는 부처님의 상호를 볼 수 있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법신의 몸은 원래 상(相)이 없는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나투었다 하더라도 본래는 상이 없는 것입니다. 결정상(決定相)이 없기 때문에 인연 따라서 상이 나오겠지요. 일정한 고유한 상이 있다면 인연 따라서 상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마치 꿈과 같고 허깨비 같아서 실다운 그러한 고유한 몸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산 혜원(廬山慧遠 335~417) 선사는 굉장히 위대한 분입니다. 당시 승속(僧俗)간에 명사들 123인을 모아 백련사 염불회(白蓮社念佛會)를 시설하였습니다. 혜원 선사는 이 반주삼매경을 읽고서 의문이 생기니까, 그 당시 삼장법사인 구마라습(鳩摩羅什kumarajiva 343~413) 존자에게 사람을 보내 물어보니 구마라습이 답신을 한 내용을 위에 말씀 드렸습니다.


이 반주삼매경은 미타경전(彌陀經典)인 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아미타경(阿彌陀經)이라든가 기타 여러 가지 경전 가운데서 최고(最古)의 문헌에 속하며 또한 현존한 대승경전 중에서도 가장 최초의 경전이라고 전래되어 있습니다.


4. 삼매수증(三昧修證)의 인원과만(因圓黑滿)


우리가 공부하는 인행공덕(因行功德) 곧 성불(成佛)을 위한 수행하는 공덕이 원만하게 되어야 결과도 원만히 되겠지요. 보통 우리가 의욕만 있어서 실제로 인행공덕을 닦지 않으면서 결과만 얻으려고 생각합니다. 마땅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인행공덕은 여법(如法)히 수순(隨順)해서 닦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공덕의 과보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운문(雲門) 선사가 말씀한 삼종병(三種病) 가운데 미도조작(未到造作)이라, 우리가 아직 이루지 않은 분상에서 애쓰고 높은 경계로 올라가려고 성급한 마음으로 구하기만 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더욱 초조하고 공부도 잘 안 되는 것입니다. 인행공덕만 착실히 닦아나간다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점차로 마음이 열려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의젓하고 느긋한 마음으로 범부지의 인행공덕을 충분히 닦아야 하겠습니다.


  因圓果滿


如斯히 間斷없이 傳心全力하야 觀而念之하면 習忍(修習安忍)이 生하면서 相似覺을 成就하는 동시에 明得定과 明增定의 性忍位인 性地를 거쳐 印順定에서 비로소 道種忍이 生하고 純一無雜한 一心支인 無間定에 入하매 心이 明鏡止水와 如할지라. 오직 加行功德으로써 假觀的 一相三昧에서 見性的 實相三昧에, 念修的 一行三昧에서 證道的 普賢三昧에 如此히 觀念에서 實證에로 思惟修得하나니 於是乎 身證心悟로써 正覺 初步의 信忍을 成就하고 順忍으로써 金剛喩定에 住하야 修者의 願力에 따라 隨分覺으로써 無生忍을 거쳐 寂滅忍인 究竟覺에 達하는 것이 本覺境地인 涅槃岸에 到하는 據徑이니 勤策衆은 如是觀으로서 如是果를 證할진져.  


              - 金剛心論 -


이와 같이, 일승법문(一乘法門)을 일상삼매나 또는 일행삼매 즉 진여삼매, 진여법성을 떠나지 않는 공부를 간단없이, 끊어지거나 쉬는 사이도 없이 전심전력하여 관이념지(觀而念之)하면, 관찰하고 생각하면 이란 말입니다. 관념(觀念)이라는 것이 우리 공부 인에 있어서는 깊은 뜻입니다. 관(觀)은 지혜(慧)고 념(念)은 정(定)에 해당합니다. 바꾸어서 말하면은 관은 일상삼매고 념은 일행삼매입니다. 관은 상대적인 관이 아니라 바로 진리를 관조(觀照) 관찰하는 것이니까 바로 정수(正受)고 정심행처(正心行處)입니다. 진여를 관하는 것이 참다운 관이 됩니다. 따라서 그와 같이 관하니까 바로 지혜가 되지요. 념하는 것은 간격이 없이 염념, 생각 생각에 상속적(柏續的)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반야 지혜의 경계, 진여법성 경계를 조금도 빈틈이 없이 바로 생각해 나간다고 하면 습인(習忍) 곧 수습안인(修習安忍)이 생깁니다. 곧 닦아 익혀서 편안히 머문다는 말입니다. 참선공부에 있어서 이 습인이 생기게 되면 한 시간 두 시간 앉아 정진하는 정도는 어렵지 않고 습인이 안 되면 부스럭거리며 굉장히 괴로움을 느낍니다. 따라서 관이념지(觀而念之)해서 화두나 또는 기타 염불이나 어떤 진리를 지혜와 선정과 쌍수해서 닦아 나간다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수습안인(修習安忍)인 습인(習忍)이 생기는 것입니다.


또한 상사각(相似覺)을 성취합니다. 상사각은 참다운 정각(正覺), 견성이 아니고 어렴풋이 닮은 깨달음이란 말입니다. 자의식이 과잉하고 또는 아만이 있는 사람들은 자칫하면 상사각 정도 가지고서 공부를 다 마쳤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분별지혜 곧 간혜지(乾慧智)로는 별로 막힘이 없는 경계인 것입니다.


동시에 명득정(明得定)과 4선근에서 말씀했습니다만 마음이 껌껌하다가 확 열려 오는 것입니다. 몸이 짜르르해서 전류에 감전된 모양으로 몸이 개운해지고 또는 머리도 시원하고 가슴도 쾌적하고 아주 가뿐한 상태입니다. 명득정과 또는 공부 정도가 더욱더 깊어져서 명증정(明增定)의 성인위(性忍位)인 성지(性地)에 이르면 한결 마음이 안정되어 가는 것입니다.


인순정(印順定)에서, 인순정은 보다 마음이 맑아옴을 확실히 확인하는 경계입니다. 전에는 공부에 대한 신념이 모호했지만 공부가 익어지면 자기 몸에 대해서도 별로 애착도 생기지가 않고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가 완전히는 못 된다 하더라도 어렴풋이나마 인증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비로소 도종인(道種忍)이 생기고, '정말로 진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겠구나, 다른 것은 안해야겠구나' 하는 마음 그런, 서원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른바 도의 종자가 마음에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순일무잡(純一無雜)한 일심지(一心支)인, 다른 헛것이 섞이지가 않고 순수한 마음 곧, 다른 생각이 없이 오로지 순수한 마음 하나뿐인 무간정(無間定)에 들어가니, 이것은 번뇌 때문에 마음이 괴롭지 않고 즉 번뇌가 사이에 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순일무잡의 순수한 일심지가 되니 어떻게 번뇌가 그 사이에 낄 수가 있겠습니까.


마음이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은지라. 맑은 거울에 때가 없이 모든 것이 바로 다 비춰오고 파동치지 않는 고요한 물위에 모든 형상들이 비춰오듯이 그와 같다는 말입니다. 공부할 때에 자기 마음을 점검해 보면 짐작되지 않겠습니까. 내 마음이 명경지수 같은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계도 공부가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오직 가행공덕(加行功德)으로써, 더욱더 정진해 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무간정에 들고 또는 마음이 맑은 거울과 고요한 물같이 되었다 하더라도 함부로 망동하면 그만 뚝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입선(入禪) 중에 무간정을 체험했다 하더라도 방선(放禪)한 뒤에 잔소리나 하고 함부로 해버리면 간곳이 없게 됩니다. 따라서 안상(安祥)과 보임(保任)이라, 그 명경지수같은 마음을 하마 흩어질세라, 소중히 가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질없는 말도 않고 밥 먹을 때나 걸어갈 때나 항시 마음을 불성경계(佛性境界)에다 딱 머문, 그 자리를 조금도 여의지 않고서 공부해야 더 나아가지는 것입니다. 무간정까지 갔다가도 견성까지 가려면 앞서 말씀드린바 한껏 가행공덕을 거듭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관(假觀)적 일상삼매란, 아직은 참다운 무루(無漏) 정관(正觀)에는 못 드는 것입니다. 가사 '무량무변한 진여불성 광명이 충만해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더라도 실제로 보이는 것이 아니요, 부처님께서 말씀했으니까 '있거니'하고서 믿고 나가는 것이지 실제로 있지 않으니까 가관(假觀)인 것입니다. 가관적 일상삼매에서 항시 '그렇거니'하고서 상을 안 내는 일상삼매가 오랫동안 익혀지면 실지로 진여불성이 있는 줄 확신이 되어 견성적(見性的) 실상삼매(實相三昧)에, 익어져서 점차로 나가다가 번뇌가 끊어지면 본래 부처인지라 응당 필연적으로 견성이 되어야 이른바 실상삼매가 되는 것입니다.


또는 염수적(念修的) 곧 염념상속해서 끊어지지 않게 공부해 나가는 일행삼매에서 증도적(證道的), 도를 증하는 보현삼매에 들게 됩니다.


이와 같이 관념(觀念)에서 실증(實證)에로 사유수득(,思惟修得)하나니, 맨 처음에는 관념입니다. 우리는 관념을 처음부터서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견성할 수는 없는 문제 아닙니까. 처음에는 부처님 말씀, 조사 스님들 말씀에 의지해서 우선은 관념으로 착실히 공부하다 보면 안주(安住)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부처다'고 하다보면 결국은 본래 부처인지라 부처가 되어간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닦아서 얻는 것입니다.


어시호(於是乎), 이에 있어서 신증심오(身證心悟)로써, 몸으로 증하고 마음으로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몸으로 증해야 하기 때문에 꼭 철저한 계행이 필요합니다.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철저한 계행이 앞서야 합니다.


정각초보(正覺初步)의 신인(信忍)을 성취하고 순인(順忍)으로써 금강유정(金剛喩定)에 주(住)하여, 정말 정각초보인 진여불성을 초견성을 해야 참다운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성을 못 보았을 때는 항시 의심이 남는 것입니다. 확실히 믿음이 생긴다면 부처님 말씀에 온전히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증명을 해버렸으니 어떻게 안 따라 가겠습니까. 순인으로써 금강유정이라, 곧 견성오도를 하는 것입니다.


견성오도에 주(住)하여 수자(修者)의 원력에 따라 수분각(隨分覺)으로써, 보살십지로 한다면 초지에 견성하고 그로부터 점차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역시 자기 원 따라서 용맹정진을 안 쉬고 한다면 비약적으로 차서(次序)를 뛰어 넘어갈 수도 있는 것이고 게으름 부린다면 차근차근 더디 올라가고 또 더구나 중생제도 핑계하고 사회사업이나 한다고 할 때는 더 못 가고 멈추고 말겠지요.


무생인(無生忍)을 거쳐 적멸인(寂滅忍)인 구경각에 달하는 것이 본각경지(本覺境地)인 열반안(涅槃岸)에 도(到)하는 첩경이니 근책중(勤策衆)은, 부지런히 닦아나가는 수행자는 이와같이 진여실상의 관법 곧 실상관(實相觀)으로써 부처님의 불와를 증득(證得)해야 합니다.


5. 불성공덕 (佛性功德)


1) 오지여래 (五智如來)


우리가 '불성(佛性)이 어떻다, 불성은 무한공덕을 갖추고 있다. 우리 자성은 심심미묘하다' 이렇게 말을 보통은 합니다마는 정말로 체계적으로 어떤 공덕이 있는가? 그런 것은 잘 모르고 넘어가지 않습니까. 그러나 밀교(密敎) 등 경전에 소상히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순수밀교에 있는 법문으로 법성공덕(法性功德) 진여불성공덕(眞如佛性功德)을 체계적으로 다섯 공덕으로 구분한 것이 5지여래(五智如來) 법문입니다.


지수화풍의 4대(四大)와 거기에 공(空)을 더하여 5대(五大)라고 합니다. 우리가 물리적인 상징으로서 표현할 때는 지수화풍공 5대라고 하는 것이고, 물질이 그대로 물질인 것이 아니라 바로 불성이요, 성품으로서는 바로 생명이니까 5지여래(五智如來)라고 말합니다. 또 5지 여래에 따른 각기 지혜가 있어서 5지(五智)라고 합니다. 그러나 5지(智)나 5대(大)가 각기 뿔뿔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원융무애한 일미평등(一味平等)의 불성(佛性)인데 그 별덕(別德)을 5지․5대․5여래(如來)라하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물리적 상징으로 본다면 땅기운 같은 이른바 물질적인 질료가 되는 것은 지(地)요, 수분은 수(水)요 또 불기운 온도는 화(火)요 동력은 풍(風)이요 지수화풍 4대가 의지할 공간은 공(空)입니다. 이와 같이 질적으로 보아서는 그렇지만 그것이 바로 생명이기 때문에 오지여래(五智如來)라 하고 각기 여래마다 특징적인 지혜인 5지(五智)가 있는 것입니다.


五智如來


毘盧遮那를 光明遍照 盧舍那를 淨滿 그리고 釋迦牟尼佛을 能仁寂黙覺이라 譯하니 能仁의 良心을 가지고 寂靜에 處하야 身口意를 三緘한 후 淨滿의 性海를 見證하고 究竟覺을 成就함일새 自身이 곧 大日이라 心이 虛空과 等하야 其 體性이 無障無碍함으로 第一智名을 法界體性智라 云하고 其 無碍光明이 如日遍照함으로 佛號를 大日如來 곧 毘盧遮那佛이라 謂하는 바 器界日은 一小世界를 照明하되 有障有碍하나 心界日은 大千沙界를 遍照하되 無障無碍함으로 大日이라 稱하며


心이 虛空과 等하되 但空이 않이오 風性的 一氣가 等量平滿함으로 第二智名을 平等性智라 云하고 佛號를 不空如來라 謂하며 一氣平滿한 等虛空의 心界에 火性的 智光慧焰이 等量炯滿하야 明暗이 無하되 能히 起滅을 示하는 沙界의 差別相을 通하야 眞如의 隨緣不蠻性을 觀察할새 第三智名을 妙顧察智라 云하고 佛號를 彌陀如來라 謂하며


無邊無量의 等虛空的 心界에 超日月의 金色光明을 帶한 水性的 識水가 淨滿함으로 第四智名을 大圓鏡智라 云하고 佛號를 阿闊如來라 謂하며



彼 淨光의 地性的 金色에 主로 團寶色을 帶하였으니 寂體엔 風性的 黑金色과 火性的 赤金色과 水性的 白金色와 地性的 黃金色이 純一混和하야 紫磨金色의 一道光明이 常住不動하되 其 照用엔 四寶色光明이 各其性能의 無量功德을 發揮하야 交徹炳煥할새 正午當陽의 摩尼寶珠가 輝煌燦爛하야 無數寶光이 無邊爀曜함과 如함으로 第五智名을 成所作智라 云하고 佛號를 寶生如來라 謂하나니


第一智는 法身의 總智요 其他는 別智라 第二 第三 第四의 三智는 報身의 能智요 第五智는 化身의 所智인 바 別稱하야 五智如來라 云하고 總稱하야 阿彌陀佛이라 謂하니 諸佛中 首班이오 彌陀의 妙觀察智印 △印이 그切如來智印의 原型이니


阿宇는 無의 義로서 化身, 彌字는 滿의 義로서 報身, 陀字는 法의 義로서

法身을 意味하야 本具三身인 阿彌陀佛에 總該할새 法界體性인 一法身에

平等性으로 妙觀察하는 大圓鏡的 能智報身과 成昕作의 所智化身을 兼하고

四智에 萬德을 俱하니라       

                                                                      -金剛心論-


비로자나불의 비로자나(毘盧遮那 Vairocana)는 인도말 범음(梵音)을 딴 것인데 뜻으로는 광명변조(光明邊照)라, 부처님의 청정미묘한 정광(淨光) 적광(寂光)이 우주 삼천대천세계에 끝도 가도 없이 충만해 있다는 뜻입니다. 광명이 두루 비춘다는 말입니다. 비로자나불은 이른바 법신불입니다. 보신인 노사나불의 노사나(盧舍那)는 정만(淨滿) 즉 법성, 불성이 충만해 있다는 말입니다. 법신이 그냥 그대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법신의 체에 불성이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석가모니는 능인적묵각(能仁寂黙覺)이라는 뜻인데 모든 무주상(無住相)의 지혜와 자비를 신․구․의 삼업(三業)으로 원만히 갖춤과 동시에 우리 마음의 산란을 여의고 깨달은 각(覺), 곧 깨달은 부처라는 말입니다.


환언하면 무주상의 자비와 지혜를 갖춘 능인(能仁)의 양심을 가지고 고요한 곳에 처하여, 마땅히 수행자가 공부할 때는 자기 혼자만의 성취를 위하는 식의 마음 갖고는 공부가 안 되는 것입니다. 내 몸뚱이를 언제나 모든 중생한테 바쳐야겠다는 능인의 양심을 가지고 있어야 공부가 성취되는 것입니다. 본래 공부 자체가 자타를 떠난 우주적인, 우주와 둘이 아닌 자리의 공부이기 때문에 차별심을 가지고 공부하면 공부가 안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주상의 자비와 지혜라 할 수 있는 능인의 양심을 가지고 고요한 곳에 처해서 신․구․의를 삼함(三緘)이라, 봉한다, 닫아버린다는 뜻이지요 몸으로 허튼 행동 않고 입으로 허튼 말 않고 또는 뜻으로 부질없는 생각을 않을 뿐만 아니라 가급적이면 일체 활동을 삼가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주좌와(行住坐臥)에 그렁저렁 공부하는 식으로 나가려면 모르겠지만 '꼭 내가 불성을 증명한다, 한사코 견성한다‘고 할 때에는 자기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대사일번 대활현전(大死一番大活現前)이라, 한번 크게 죽어야 크게 산다는 말입니다. 기독교에서도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진정으로 우리는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신․구․의 삼함이라, 몸으로 활동을 될수록 적게 합니다. 구참 수행자들은 산책이나 활동을 않더라도 공부 자체로 해서 몸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나간다면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정만(淨滿)의 성해(性海) 즉 불성 자리를 깨닫고 증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경각을 성취함일새 자신이 곧 대일(大日)이라, 비로자나불이란 말입니다. 마음이 허공과 같아서 마음의 체성(體性)이 무장무애하므로 비로자나불에 상응되는 지혜가 법계체성지(法界體性智)입니다. 법계의 모든 것을 다 알고 또는 법계체성에 계합된 지혜라는 말입니다.
 
또 법계체성지의 거리낌 없는 광명이 마치 해와 같이 두루 비추므로 부처 이름을 대일여래(大日如來) 곧 비로자나불이라 말하는바 태양계의 태양은 태양계 한 세계를 비추고 밝게 하되 유장유애(有障有碍)라, 거리낌이 있고 장애가 있습니다. 그래서 깜깜한 암실이나 물질을 뚫고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 달〔心月〕은 삼천대천세계를 다 두루 비추되 무장무애라,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것입니다. 쇳덩이 속에나 바위 속에나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돌이나 쇠나 다 본래 공(空)하여 불성으로 되었기 때문에 무장무애 입니다. 무장무애하므로 이른바 보통 태양이 아니라 대일(大日)이라 칭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허공과 같되 다만 공이 아니요, 풍성적(風性的)인 기운이 등량평만(等量平滿)하므로 평등성지(平等性智)라 하고 부처의 이름을 불공여래(不空如來)라고 말합니다. 5지여래 가운데 두 번째가 되겠지요.


일기(一氣) 곧 우주 에너지, 에너지나 정기(精氣)라고 하면 우리가 알기가 쉽지 않겠습니까. 우주의 정기가 평등하고 가득찬 허공 같은 마음세계에 화성적(火性的) 지혜의 불꽃 곧 그런 지혜 광명은 조금도 흠이 없이 원만하게 빛나고 충만해서 본래 꺼짐이 없으되 능히 일어났다 멸했다하는 것을 보이는 사바세계의 차별상을 통하여 진여의 수연불변성(隨緣不變性) 곧 인연에 따르되 변치 않는 성품인데 진여불성이 인연에 따른다 하더라도 진여는 변치가 않는 것입니다. 진여가 나무가 되면 나무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假相)이 그렇게 보일 뿐인 것이지 진여의 성품은 변치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여의 수연불변성을 관찰함을 신묘하게 관찰하는 지혜인 묘관찰지(妙觀察智)라 말하고 불호(佛號)를 미타여래 (彌陀如來)라 합니다.



무변무량의 허공 같은 마음세계에 일월을 초월한 금색광명, 곧 순수한 불성광명(佛性光明)을 말한 것입니다. 태양광선이나 그런'가시적(可視的)인 눈부신 광명은 물리적인 광명이지만 순수한 불성 광명은 그런 물리적인 광명이 아닌 것입니다. 금색광명을 띄고 있는 수성적(水性的)인 성품의 물 에너지가 청정하게 충만함으로 모든 것을 원만하게 비추는 지혜를 대원경지(大圓鏡智)라고 말합니다. 마치 큰 거울이 형상을 비추듯이 우주를 비추는 지혜입니다. 그리고 불호는 아촉여래(阿闊如來)라 합니다.


청정한 광명인 지성적(地性的) 금색에, 금색도 역시 사바세계에 있는 물질적 금색이 아닌 청정광명 금색에 주로 사보색(四寶色)을 띄었으니 적체(寂體)인 법신의 몸에는 풍성적(風性的) 흑금색(黑金色)과 화성적 적금색과 수성적 백금색과 지성적 황금색이 순일 혼화(混和)하여, 뿔뿔이 있는 것이 아니라 원융하니 혼화하여 그 색이 자마금색(紫騫金色)이라, 자마금색은 순수세계의 광명입니다. 도인들이 견성할 때도 자마금색의 원광(圓光)을 증득(證得)하고 열반에 들 때도 자마금색의 광명 구름이 떠오르는 가운데 열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마금색의 순수 광명이 상주부동하게 항시 머물러 있습니다. 법성경계 불성경계는 영원히 불생불멸한 자마금색의 광명이 항시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런 광명이 인연 따라서 산이 되고 또는 지구가 되고 또는 태양이 되더라도 역시 그런 광명은 변치가 않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인간의 눈에 태양으로 보이고 무엇으로 보이고 할 뿐인 것입니다. 상주부동하되 곧 항상 변함없이 머물러 있으나 비추는 용(用)에는 그런 사보색 광명이 각기 성능의 무량공덕이 있습니다. 가사, 흑금색은 흑금색의 공덕이 있고 또는 황금색은 황금색의 무량공덕을 발휘하여 그런 공덕이나 빛이 서로 피차 어우러져서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한없이 찬란한 보배인 마니보주는 밤에도 빛나는 것이지마는 더구나 대낮에 정오에 태양이 빛나고 있을 때는 얼마나 휘황찬란히 빛나겠습니까. 마니보주가 휘황찬란하여 헤아릴 수 없는 보배광명이 한량없이 빛남과 같음으로 성소작지(成所作智)라 말하고 부처이름을 보생여래(寶生如來)라 말합니다.



제1 지혜인 법계체성지는 법신 비로자나불의 총지(總智)요, 기타는 별지(別智)입니다. 제2, 제3, 제4의 삼지(三智)는 보신의 능지(能智)요. 제5지는 화신의 소지(所智)인 바 별칭하여 5지여래라 하고 총칭하여 아미타불이라고 말하니 제불중(諸佛中) 수반(首班)이요 미타의 묘관찰지인 삼각형(△)이 일체 여래지인(如來智印)의 원형입니다.


아미타의 아(阿)자는 무(無)의 뜻으로서 화신, 미(彌)자는 원만하다는 의미로 해서 보신, 타(陀)자는 법의 뜻으로서 법신을 의미하여 본래 삼신(三身)을 다 갖추어 있는 아미타불에 모두 다 해당할새, 법계체성지인 한 법신에 평등성으로 묘관찰하는 대원경적 능지(能智)보신과, 또는 성소작의 소지(所智)화신을 겸하고 4지에 만덕을 갖추어 있는 5지 여래가 바로 우리의 자성공덕(自性功德)입니다. 그리고 법신 보신 화신의 삼신일불(三身一佛)인 아미타불이 바로 우리의 참 자아(眞我)요 본래면목입니다.



2) 열반사덕(涅槃四德)


불교와 같은 가장 위없는 종교가 아니더라도 어떠한 분야에서나 고결한 비젼(Vision)이나 이상(理想)이 없으면 우리 행동이 감격스럽게 실천할 수가 없습니다. 이른바 목적의식, 이상에 대한 가치관을 확실히 해두어야 하는 근본문제에 있어서 불성공덕이 어떠한 것인가? 불성공덕에 대한 인식이나 믿고 해석하는 신해(信解)가 애매모호하면 생명을 내걸고 공부도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출가한 의의에 대해서도 항시 회의를 품습니다. 성불이란 것은 얼마만치 중요한 것이고 어떠한 가치와 공덕이 있는 것인가? 이런 것에 대한 정립이 꼭 선행적으로 우리 수행자한테는 필요합니다. 거기에 대응한 법문이 이미 밝힌바 오지여래(五智如來)와 열반사덕(涅槃四德)입니다.


  涅槃四德


涅槃…滅度․不生․安樂․極樂․解脫


1. 常德… 常恒不變하여 生滅이 없음.


2. 樂德… 無爲安樂함.


3. 我德… 神通妙用이 大自在함(八大自在我)


4. 淨德… 一切垢染을 解脫하여 淸淨함.


열반(涅槃 nirvana)이란 멸도(滅度) 곧 번뇌가 다 완전히 다 멸해버렸다는 뜻입니다. 불생(不生)이라, 불생불멸한 불생은 바로 영생(永生)과 같은 뜻입니다. 낳지 않고 죽지 않으니까 응당 영생이 되겠지요. 또는 안락(安樂)이라, 아무런 번뇌가 없으니 안락스러울 것이고 또 같은 안락도 변동과 소멸이 없고 사무친 위없는 안락이기 때문에 바로 극락(極樂)입니다. 또 어떤 구속이나 얽매임이 없이 자유자재하기 때문에 해탈(解脫)이 되는 것입니다.


열반의 공덕은 물론 무량공덕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 경전마다 부처님 공덕은 불가설(不可說) 불가설이라, 어떻게 말씀을 다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항하사 모래수와 같다는 비유로도 부처님 공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무량공덕을 네 가지 속성으로 구분한 것이 열반사덕(涅槃四德)입니다.


다시 환언하면 처음에 상덕(常德)이라, 상덕은 상항불변(常恒不變)해서 우리들이 얻는 지혜나 자비나 무량공덕이 변동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런 변동이 없어서 생멸이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아무리 변동이 없다 하더라도 행복감을 주지 않아서는 또 별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행복도 무한의 행복이 되어야 현상적인 오욕(五慾)경계에서 맛보는 시원찮은 행복에 관념이나 몸을 내던지지 않겠지요. 우리가 출가한 것도 세속적인 행복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생사해탈의 무한한 행복이 있기 때문에 출가를 했던 것입니다. 락덕(樂德)이란, 무위안락(無爲安樂)이라, 조금도 조작이 없는, 상대적인 행복이 아닌 절대적인 행복이 란 말입니다.


다음 아덕(我德)이라, 아덕을 잘못 생각하여 단순히 피상적으로 해석을 하는 분도 더러 있습니다. 아덕은 무한의 가능성 무제한의 지혜공덕 자리입니다. 이른바 중생들의 속된 아(俗我), 조그만한 소아(小我) 또는 망령된 망아(妾我)  이런 것이 중생들이 나라하고 고집하는 아(我)가 되지 않겠습니까마는 아덕은 그런 아가 아니라, 본래면목을 훤히 밝힌 깨달은 자리의 대아(大我)의 덕이란 말입니다. 이것도 나나 너나 하는 상만 떠났을 뿐이라고 간단히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일체 모든 것을 다 알 수가 있고 다 할 수가 있는 무한의 능력을 이미 합니다. 신통묘용(神通妙用)을 대자재(大自在)라 하는데 대자재를 갖춘 공덕이 아덕(我德) 입니다.


열반 아덕을 팔덕(八德)이라, 여덟 가지로 덕을 말한 것도 있습니다. 이런 것은 무량신통을 다 갖추어 있는 자리를 여덟 갈래로 풀이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천안통, 천이통 등 모든 신통이 다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기 몸을 바늘 구멍만한 데에도 자재롭게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고 또는 삼천대천세계로 자기 몸을 한없이 키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원래 크고 작고 상대를 떠나버린 세계이기 때문에 마땅히 그런 능력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잘못 생각한 사람들은 신통은 외도(外道)나 하는 것이라고 폄하(販下)를 합니다. 물론 누진통(漏盡通)을 빼놓고 다른 것은 외도도 합니다. 그러나 외도가 한다 하더라도 외도도 철저한 계행을 지켜야 5신통을 하는 것입니다. 그냥 그렁저렁 하면서 천안통 천이통 그런 신통을 할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외도 공부하는 법칙을 보면 굉장히 까다롭습니다. 하물며 그 보다도 훨씬 더 넘어선 누진통까지 하려면 그야말로 보다 한결 철저해야 되겠지요.


마땅히 아덕(我德) 자리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두고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한테 갖추어 있는 자성공덕, 본래면목 공덕이 무한함을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프다는 것은 과거 숙세인연도 있고 금생에 섭생을 잘못해서 아픈 것도 있겠습니다만 협소한 자아(自我) 관념 때문에 아픈 경우가 많습니다. 마음이 옹졸하면 그마만치 우리 세포 활동도 거기에 따르는 것입니다. 기분 좋을 때 음식을 먹으면 소화가 잘 되고 기분 안 좋을 때 억지로 먹으면 소화가 안 되듯이 마음이 아덕(我德), 본래면목 쪽으로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우리 생리도 따라서 좋은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내가 없고 네가 없고 내 것도 없고 천지 우주 모두가 다 만 공덕을 갖춘 진여불성 뿐이라고 확신을 해버리면 웬만큼 속이 답답한 우울증이나 조울증이나 그런 것은 싹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말씀이나 위대한 선지식 말씀은 한마디 들으면 그냥 마음이 시원스럽게 툭 트이는 것입니다. 우리 자성공덕 자체가 조금도 막힘이 없는 것인데 그 자리에 무슨 생사가 있겠습니까 무슨 병이 있겠습니까. 병도 따지고 보면은 일체가 유심조(唯心造) 아니겠습니까. 금생이 되었든 과거가 되었든 마음 잘못 썼기에 병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병을 빨리 나으려고 생각할 때는 마음 자세가 본래의 자리, 병도 없고 생사도 없고, 남을 미워할 것도 없고 좋아할 것도 없는 자리에다 마음을 둔다면 웬만한 병은 물러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른바 귀신같은 것은 절대로 못 짚이는 것입니다.


다음에 정덕(淨德)이라, 맑은 덕이라는 말입니다. 일체 구염(垢染)을 해탈하여 청정함이라, 구염은 바로 번뇌입니다. 따라서 일체 번뇌가 없는 자리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영생불멸해서 모든 공덕이 조금도 변치 않고서 그대로 갖추어 있는 상덕(常德)이 있고 위없는 최고의 행복을 완전히 갖추어 있는 락덕(樂德)이 있고 또는 모두를 다 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신통묘용을 갖추어 있는 아덕(我德)이 있고 또는 일체 번뇌를 다 떠나 오염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 정덕(淨德)이 열반사덕(涅槃四德) 즉 우리 자성의 무량공덕입니다. 이 자리를 확신하여야 합니다. 이 자리를 확신하고 닦아야 용기도 나고 생사대사를 위하여 이 몸뚱이 몇 천 개 바친다 하더라도 아깝지 않다는 대 결단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5지여래도 내나 열반4덕을 다른 각도로 풀이한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5지 여래와 열반4덕을 함께 정리하여 봅니다.


   五智如來-五      智 - 混槃四德․․․五大 


1. 大日如來-法界體性智-  總    德․․․空 ․․․ Ɵ


2. 不空如來-平 等 性 智- 樂    德․․․風 ․․․반원


3. 彌陀如來-妙 觀 察 智- 常    德․․․火 ․․․△


4. 阿鬧如來-大 團 鏡 智- 我    德․․․水 ․․․○


5. 寶生如來-成 所 作 智- 淨    德․․․地 ․․․口



우리 자성(自性)에 갖추어 있는 총덕(總德)은 대일여래(大日如來), 비로자나불 입니다. 자성의 자비 지혜 광명이 삼천대천세계를 비추되 조금도 장애 없이 무장무애합니다. 곧 삼천대천세계가 바로 자성 광명이기에 부처님은 바로 법계를 몸으로 하는 인격적인 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대일여래 부처님이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로자나불이나 아미타불한테 참배한다하더라도 결국 참 자기한테 귀의하는 것입니다.


다음 불공여래(不空如來)입니다. 대일여래가 끝도 가도 없이 우주를 두루 비춘다고 했지만 그러면 그 가운데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었을 것인가? 비지 않고 무량공덕이 충만합니다. 불공여래는 평등성지요 락덕(樂德)입니다. 열반4덕의 락덕은 지나치지 않고서 원만하게 조화를 이룬 락덕입니다만 선정을 닦을 때 기쁨이 넘쳐서, 기쁨이 도리어 지나치면 마장(摩障)이 되는 것입니다만 여기 락덕은 청정무구한 순수한 기쁨을 의미합니다. 불공여래는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불공성취 여래라고도 합니다.


그 다음에는 미타여래(彌陀如來)라, 아미타불을 삼신일불(三身一佛)이라고 생각할 때는 5덕을 다 갖춘 총덕(總德)을 의미합니다만 여기 있는 미타여래는 묘관찰지 즉 일미평등한 진여불성 공덕이 무량의 세계를 나투는데, 은하계가 되고 태양계가 되고 또는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된다 하더라도 오히려 조금도 진여불성과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중생은 하나의 현상적인 무엇이 되어버리면 그것에 집착해서 그것이 실지로 있다는 실제성으로 느낍니다마는 부처님의 무량지혜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되든지 진여불성이 그대로 조금도 변질이 없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한 바와 같이 영(零)이 곧 제로가 몇 천 개 곱하나 보태나 내나 영은 영 아닙니까. 또는 그림자를 몇 천 개 중복시키고 곱하나 보태나 나누나 결국은 그림자는 그림자라는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진여불성은 산이 되고 내(川)가 되고 나가 되고 네가 되고 무엇이 된다 하더라도 진여불성 자리는 조금도 변동이나 변질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지혜가 미타여래의 묘관찰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른바 동체대비(同體大悲)라, 강도를 보나 누구를 보나 그 죄를 미워하는 것이지 사람자체를 미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주부동(常住不動)한 상덕(常德)이고 또 지수화퐁 사대(四大)로 생각할 때는 화(火)요, 화는 지혜를 상징합니다.


다음에 아촉여래(阿閦如來)의 지혜 공덕은 대원경지입니다. 일체존재의 모두를 다 원융무애하게 조금도 차별이 없이 비추어보는 지혜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묘관찰지혜는 현상계가 되어도 조금도 변동이 없는 경계를 비추어 본다고 할 수 있는 것이고 대원경지는 성상체용(性相體用)을 다 융통무애하게 한 번에 비추어 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나누어서 이것저것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공덕을 우리 중생들이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구분한 것에 불과한 것이지 원래는 모두가 하나의 대일여래 공덕인 것입니다. 그래서 대일여래 공덕은 총덕(總德)인 것이고 나머지 불공여래, 미타여래, 아촉여래 또는 보생여래의 공덕은 별덕(別德)입니다.


그 다음 보생여래(寶生如來)의 지혜공덕은 성소작지라, 사바세계에서 문학이나 예술이나 과학이나 이런 재주를 부리는 문화현상, 문명현상 등 모든 작위(作爲) 행위가 성소작지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자기가 아주 훌륭한 시를 지었다고 합시다. '내가 재주가 있고 학문을 많이 공부하고 또 예술성이 풍부하니까 이와 같이 지었다' 하는 것을 불교의 견해로는 사부견(士夫見)이라 하는 망견(妾見)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내가 공부를 많이 해서 내 능력으로 훌륭한 집을 지었고 내 능력이 많아서 에디슨같이 많은 발명을 많이 했다거나, 딴은 에디슨도 만일 우월심을 품고 스스로 자랑했다면 사부견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대통령이 되어서 치적을 많이 남겼다고 한다면 이것도 사부견입니다. 내나 잘 되고 못되고 이런 것이 따지고 보면 진여불성의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원래 없고 너라는 것이 없는 것인데 어떻게 내가 무슨 재주가 있어 가지고 내가 특별히 무엇을 만들고 하겠습니까? 우리 중생들은 본래면목자리를 잘 모르므로 자기가 무슨 책을 내고 글씨를 잘 쓰고 하면 꼭 자기 솜씨가 좋고 기능이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을 사부견이라 합니다. 여기 말씀하는 성소작지는 정덕(淨德)이라, 조금도 오염됨이 없는 일체 무작위(無作爲) 공덕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것을 지수화풍으로 말하면 지(地)에 해당합니다.


지수화풍 4대와 공(空)을 물리적인 것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으나 하나의 성품이 형상화 될 수 있는 요소로 본다면 지요 수요 화요 또는 풍이요 공이라는 말입니다. 천지 우주가 이루어지는 것이 성겁(成劫)인데 성겁은 어디서 나을 것인가? 하면 이것은 공겁(空劫)에서 나옵니다. 공겁은 아무것도 없는 것인가? 하지만 공겁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볼 수 있는 현상적인 즉 물리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으나 진여불성의 성품은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 조금도 더하지 않고 덜하지 않고 꽉 차 있는 것입니다. 모양(相)만 없는 것이지 본질적인 성품은 온전히 갖추어 있는 것입니다. 그 성품은 무엇인가? 하면은 여기 있는 지요, 수요, 화요, 풍이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수화풍 4대도 능조사대(能造四大) 즉, 물질이 아닌 성품적인 4대는 능조사대라 하는 것이고 가사, 산소나 수소와 같이 원소 화된 4대는 소조사대(所造四大)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능조사대는 공겁이 되어서 우주가 텅텅 비어지고 또는 괴겁이 되어서 전부가 파괴된다 하더라도 조금도 부증불감이라, 감되지도 않고 더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깊이 느껴 삿된 견해를 갖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소조사대는 파괴가 되고 소멸되고 바꾸어지고 텅텅 비어지고 하는 것입니다. 공(空)은 지수화풍이 존재해야 할 이른바 장(場), 순수한 공간성을 말합니다. 또 우리가 보는 공간은 산소, 질소, 수소 등 물질로 차 있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허공세계는 그런 것이 없는 순수 공간성을 의미합니다.


부처의 공덕, 우리 자성공덕을 열반사덕, 오지여래로 되어있는 법문 체계는 누가 개인이 만든 것이 아니라 부처님 당시부터 내려온 것인데, 근래에는 이런 훌륭한 가르침을 별로 찾아내어 역설을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스스로 깨달으면 이것저것 아는 것이므로 안내하는 정도로만 소개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지수화풍공 오대(五大)를 하나의 도식으로 만든 것이 이 오지여래 오지총관도(五智總觀圖)입니다. 밀교에서 잡부밀교(雜部密敎)가 아닌 순수밀교는 부처님의 정당한 가르침입니다. 대일경(大日經) 또는 금강정경(金剛頂經)을 의지한 가르침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또는 분별시비하는 마음으로 느낄 수도 없는 자리를 말씀하신 것이 주로 밀교입니다.


        五 智 總 觀 圖


(又名金剛心印  佛心印  字輪  金輪圖)


그림처리 오지총관도


따라서 밀교에서는 오지여래를 관찰하는 법이 있습니다. 관찰하는 법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지만 우선 우리 몸을 중심으로 공부하는 것이 실감이 나고 빠르겠지요. 그래서 우리가 앉아 있다면 아래 부분인 배꼽 밑으로는 지(地)로 봅니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이 생각해 보면 아주 합리적이고 또 심심미묘한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수(水)는 둥그런 복부, 배꼽 위에서 심장까지를 말하고 화(火)는 심장에서 목까지이고 풍(風)은 얼굴 전체를 말하고 공(空)은 지나 수나 화나 풍이나 모두가 공간성이 있어야 존재성을 가질 수가 있으므로 모두를 합한 중심점에다 두는데 우리 머리의 정상으로 봅니다.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중심으로 해서 관찰하는 법은 밀교에서 오륜신관


(五輪身觀) 또는 오자엄신관(五字嚴身觀) 이라 합니다. '내 아랫도리는 지(地)로서 성소작지를 갖추었고 내 복부는 대원경지이기 때문에 아주 원만스러운 지혜를 다 갖추었으며 내 심장은 묘관찰지이기 때문에 모든 관찰하는 지혜를 다 갖추었고 내 목 위에는 풍이기 때문에 평등성지를 다 갖추었으며 공(空)자리는 머리 꼭대기인 정상으로서 가운데 중심인 동시에 총덕을 온전히 갖추었다 ' 이렇게 관찰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복잡하니까 참선하는 분들은 '이런 것도 있구나' 하고서 자기 몸뚱이가 싫어질 때는 내 아랫도리는 정덕(淨德)이고 내 심장은 상덕(常德)이극 이와 같이 몸을 불성공덕에 비추어 생각하면 그때그때 싫증을 제거할 수가 있는 방편도 되겠습니다. 별덕으로는 자기 몸을 떠나서 지(地)덕으로 성소작지를 생각하고 수(水)덕으로 대원경지를 생각하고 이렇게 각기 5지 여래에 마음을 두고 생각하는 법도 있습니다. 부처님의 법문은 모두가 우리에게 어떻게 번뇌 망상을 없앨 것인가? 또는 혼침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 하는 선교방편(善巧方便)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일체 공덕이 갖추어 있고 우주에도 조그마한 티끌 가운데도 모두 갖추어 있다고 느껴버리면 사실은 복잡하고 어려운 방편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 가지 공덕을 다 모아서 표현한 것이 오지총관도(五智總觀圖)입니다. 네모진 것은 이 지(地)의 정덕(淨德)이요 둥그런 원은 아덕(我德)이 되고 또 삼각형은 상덕(常德)이며 묘관찰 지혜이고 또한 반원은 이른바 락덕 (樂德)입니다. 그리고 공은 정상의 한 점이니까 가운데 점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5지총관도를 그려서 우리가 혼침이나 분별시비 번뇌 망상이 많을 때 이를 없애기 위해서 오지총관도(五智總觀圖) 곧 금강심인(金剛心印) 불심인(佛心印) 금륜도(金輪圖)를 공부하는 앞에다 붙여놓고 부처님의 무량공덕이 한량없음을 관조(觀照)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와 있는 법문은 어느 개인적인 독단은 조금도 없으며 또한 금타 스님께서 말씀한 법문은 모두가 불경에 있는 말씀을 인용했고 다만, 현대적인 과학 이론이나 현기(懸記) 곧 미래에 대한 통찰 등은 금타 스님의 독창적인 법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