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청화 큰스님 서적/5. 원통불법의 요체

제3장 수증(修證)과 공덕(功德)-제1절 참선(參禪)

제3장 수증(修證)과 공덕(功德)




제1절 참선(參禪)


 불교에서는 문자를 많이 배우고 학문적으로 공부하는 것을 산사업(算沙業)이라고 폄하해서 말하기도 합니다. 모래사장에서 모래알을 헤아리는 것이 한도 끝도 없듯이 학문세계라는 것은 끝도 갓도 없이 분별시비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비록 불교의 경(經)이라 하더라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다 말씀하시지 않은 위경(僞經)도 많아서 그런 것을 볼 때에는 우리 마음이 망연해져서 어떻게 할 것인가, 도리어 혼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특히 밀교 가운데 의궤(儀軌)같은 것은 더욱 그렇습니다. 이상야릇하게 우리의 소중한 삼학도(三學道)인 계율도 무시하고 방만한 대문이 다분히 있는데 후래인들은 그런 것을 무슨 도인들이 한 것처럼 생각하여 마음에 혼란을 느낍니다. 물론 그런 것 가운데는 머리 좋은 사람들이 경전의 명구문도 인용을 해 놓았기에 '방편으로는 필요한 것이구나' 하고 느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모래알을 헤아리는 것과 같은 산사업처럼 그런 번쇄한 것을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마음을 쉬어야 할 것인데, 마음을 쉬려고 할 때는 우리 마음이 하나의 도리로 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이른바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모두를 하나의 통일 원리로써 마음의 섣부른 의단을 풀어 버려야지 그러지 않고서는 마음을 쉴 수가 없습니다.


벽암록(碧巖錄)에 휴거헐거(休去歇去)라는 말이 있습니다. 쉬고 또 쉬어라, 상대 유한적(相對有限的)인 분별시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누구와 아무런 얘기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말 한마디에나 어느 순간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인 진여법성(眞如法性) 자리에서 비추어서 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스피노자(Spinoza, Bartach 1632~1677)에 대한 말을 인용합니다. 그는 비록 가난한 철인으로 이층 하숙방에서 생명을 마쳤습니다만, '영원의 상에서 현실을 관찰하라, 그러면 그대 마음은 영원에 참여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의 철학에는 부처님 사상이 많이 스며 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의 소견을 산에 비유하면 산기슭에서나 중턱에서의 전망 같은 그런 하찮은 중생 경계에서 보니까 십인십색으로 가지가지의 번뇌에 묻어서 나오기 때문에 때 묻은 행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의 상, 영원의 이미지(image)에서 보라는 말은 법의 정상에서, 본질에서 보라는 것입니다. 제법공(諸法空)의 자리,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자리에서 보아야 바로 보이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은 바로 보일 수가 없습니다. 본질적인 관조(觀照)는 바로 우리 마음을 본질적으로 성숙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화두를 드는 것이나 염불하는 것이나 근본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상대적인 개념지식, 헤아림을 떠나버린 본체를 여의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말이나 행동 하나하나는 우주의 근본 도리, 법성 도리에 입각해서 하라는 말이나 같은 뜻입니다.

 마땅히, 우리는 상대적이고 개념적이고 유한적인 지식은 휴거 헐거라, 쉬고 또 쉬어버려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진여법성(眞如法性)이 발현(發現)되지 못하는 것은 마음을 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휴거 헐거(休去歇去)라, 그러면 철수개화(鐵樹開花)라, 쇠로 된 나무에서 꽃이 핀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신비로운 것이나 부사의(不思議)한 소식을 보통은 눈에 안 보이는 것이라 무시 합니다마는 천지 우주 자체가 부사의 덩어리요 신비의 창고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로 마음을 쉬고 또 쉴 때는 자기도 모르게 자기한테 있는 초인적인 힘이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분별심으로 해서 초인적인 부처의 힘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쉬고 쉬어라. 그러면은 쇠로 만든 나무에서 꽃이 피어난다' 마음 쉬는 지름길이 참선(參禪)입니다. 우리가 제 아무리 이것저것 많이 하더라도 결국은 마음을 쉬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 출가사문은 모두가 선(禪)을 생명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부좌 위에서 생명을 바칠 사람들입니다.


 1. 선(禪)의 정의(定義)


 禪(Dhyana, 持訶那, 禪那)

思惟修, 寂慮, 棄慾, 功德叢林, 獨法樂住 또는 三摩地(Samadhi삼매)라고도 하며, 모두 心-境性의 이름이다. 또한 禪宗의 禪은 其名은 同-하나 其體는 涅槃妙心이다. 三明六通 등 諸功德이 禪定에 依하여 發得되므로 禪定은 最學適요 安樂法門이며 德叢林이라 한다.


 선(禪)은 무엇인가? 우선 뜻을 알아야 보다 더 확신이 서지 않겠습니까? 선(禪)은 선나(禪那 Dhyana)나 같습니다. 풀이하면 사유수(思惟修)라 합니다. 바른 생각으로 닦는다는 말입니다. 그냥 보통 생각이 아니라 정사유(正思惟) 곧 바른 생각입니다. 바른 생각이란 반야(般若)의 도리, 제법공(諸法空) 도리, 오온개공(五蘊皆空) 도리를 분명히 알고서 또는 다만 공(空)이 아닌 중도(中這)의 도리,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도리가 이른바 정사유요, 정사유 하면서 닦는 공부가 선이란 뜻입니다.

 
그 다음에는 적려(寂慮)라는 뜻입니다. 번뇌를 소멸하여 고요하고 밝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본분사(本分事)에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는 기악(棄惡)의 뜻이 있습니다. 상대유한적인 악만 아니라, 내가 있다 네가 있다 무엇이 좋다 궂다 하는 분별망상도 버리는 것입니다.

 
또는 공덕총림(功德叢林)이라 합니다. 달마 스님과 양무제(梁武帝)가 거량할 때에 양무제는 "절도 많이 짓고 다리도 많이 놓고 많은 스님네 한테 보시도 했는데 그 공덕이 얼마나 됩니까?" 하니까 달마 스님이 일언지하에 무공덕(無功德)이라 했습니다. 달마 스님은 선(禪)의 조사(祖師)이기 때문에 상대 유한적인 공덕을 말씀하실 필요는 없었겠지요. 상대적인 공덕은 또 분명히 있으나 영원적인 진여법성에서 볼 때는 때 묻은 공덕인 것이지 무루공덕(無漏功德)은 못되는 것이기 때문에 무공덕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참선은 공덕총림이라, 공덕이 하나 둘 있는 것이 아니라 총림같이 무더기로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한공덕입니다. 한도 끝도 없는 무루지혜를 얻는 것이거니 무한공덕이 안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오해 하실까봐서 부언합니다마는 우리가 설사 무주상(無住相)이 못 된다 하더라도 밥 한 끼 베푸는 것도 꼭 공덕이 됩니다. 저희들은 공부할 때 느낍니다마는 유위공덕(有爲功德)의 복덕도 많이 지은 사람들은 공부할 때 장애가 적습니다.

 그러나 공을 못 세우고 자기 몸뚱이만 생각하고 자기 공부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연도 잘못 만나고, 병마가 엄습하고 장애가 많습니다. 따라서 유위공덕도 조도(助道)로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공부하는 참선수행자들은 마땅히 복잡한 정(情)에 얽힌 것은 단연코 끊어버려야 하겠지요.

 
그리고 우리가 정말로 삼매(三昧)가 발득(發得)되어서 멸진정(滅盡定)을 성취할 때는 부처님께서 초기경전에서 말씀하신 신통부사의한 공덕인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못하니까 여러분들에게 자신 있게 보여드릴 수는 없으나 확신은 분명히 합니다. 다만 게을러서 깊은 삼매에까지 못 들어가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지 꼭 된다는 확신은합니다.


 그리고 부처님 말씀은 헛된 말씀은 한 말씀도 없습니다. 우리가 보통 부처님이 말씀한 신통자재(神通自在)같은 것은 비유나 상징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꼭 사실로 되는 것입니다. 가사, 천안통(天眼通)을 하면은 정말로 안목이 밝아서 우주를 다 보는 것입니다. 천이통(天耳通)을 하면은, 순수 청정무구한 청정법신에서 오는 본래의 청각(聽覺)이라는 것은 천지 우주의 음성을 다 듣는 것입니다. 영어를 안 배워도 영어로 말하는 것을 알아듣는 것입니다. 가사, 천도재(薦度齋)를 모실 때에 굉장히 어려운 한문 아닙니까? 천도법문의 대부분이 화엄경, 법화경, 어록 등 중요한 데서 따온 법문이기에 한자도 어렵지만 뜻이 어렵습니다. 그런 어려운 것을 얼핏 생각하는 천박한 마음으로서는 한문을 전혀 안 배운 영가(靈駕)들이 어떻게 알 것인가 하지만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지금 컴퓨터(computer)를 보십시오. 입력(入力)만 시켜놓으면 기기묘묘한 것이 다 나옵니다. 우리 마음 곧, 불심(佛心)이란 것은 무한의 가능 곧, 모두를 다 알고 할 수 있는 힘이 갖추어 있습니다. 마음의 능력은 이른바 컴퓨터로 비유한다면 무한공덕이 본래로 입력되어 있는 컴퓨터인 것입니다. 일체를 다 알고 할 수 있는 능력이 갖추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음이 중요하고 인간성이 존엄스러운 것입니다. 무엇을 좀 배우면 알고 안 배우면 모르는 정도 같으면 우리 인간성의 존엄이란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마음은 그와 같이 위대한 것이기 때문에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입니다. 우리 불교가 아니면은 인간의 존엄성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보통, 참선할 때 분별시비를 항시 못 끊어 버립니다. 삼매에 들어가야 비로소 끊는 것입니다. 일념(一念)이 딱 되어서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 마음이 오직 한 덩어리가 되어 버려야 삼매에 들어가는 것이고 삼매를 성취해야 삼명육통(三明六通)이라, 천안통, 숙명통, 누진통의 삼명통(三明通)을 합니다. 그러기에 부처님의 여래십호(如來十號) 가운데 명행족(明行足)이 있습니다. 밝은 것을 능히 다 갖추고 있다는 말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훤히 보는 천안통이요 또는 숙명통이라, 무시이래의 과거를 다 아는 것입니다. 지금은 최면술만 좀 잘해도 몇 생을 거슬러 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무량무변의 불지(佛智)를 통한다고 할 적에는 정말로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또는 누진통(漏盡通)이라, 모든 번뇌 습기(煩惱習氣)를 다 떼어버리는 것입니다. 습기를 못 떼었을 때는 아직 공덕이 못 나옵니다. 이른바 현법락주(現法樂住)라든가 하는 공덕이 못 나오는 것입니다. 습기를 떼어버려야 비로소 우리 심리와 생리가 정화되어서 공덕이 나오는 것입니다. 불경에, 우리 마음에서 욕심의 뿌리만 뽑아버리면 우리 발이 하늘로 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중을 비행하다가도 순간만 욕심을 내면 이른바 신족통(神足通)이 다 소멸되어 땅에 떨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심공덕(佛心功德)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여불공덕이 분호불수(與佛功德分毫不殊)라, 부처의 과불공덕(果佛功德) 즉, 불과를 성취한 공덕이 나와 더불어서 눈곱만큼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것이 참다운 신(信)입니다. '부처는 저기 있고 나는 여기 있고 부처 공덕은 부처의 것이지 나한테는 무관하다'고 생각할 때는 참다운 신(信)이 못되는 것입니다.

 
또한 선정(禪定)을 현법락주(現法樂住)라고 합니다. 이 현법락주라는 것도 우리가 크게 관심을 둘 문제입니다. '참선하면 아무런 재미도 없겠지' 합니다마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선처음에 재미는 몸과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음식도 있으나마나 별 문제가 아니고 모든 것에 대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상(相)이 점차로 가시게 됩니다. 이 상에 얽히고 저 상에 얽히면 굉장히 괴롭고 구속되는 옹색한 구속감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인데 우선 나라는 생각이 차근차근 줄어지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 가다가 죽어도 무방하고, 언제 죽어도 무방하다' 이런 생각이 들어갑니다. 이렇게 집착이 스러지다가 드디어 육계를 초월한 법락(法樂)을 얻어서 한량없는 행복에 잠기는 것이 현법락주입니다.


삼매(三昧)는 삼마지(三摩地 Samadhi)와 같은 의미입니다. 앞에 든 것이 모두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 하여 우리 마음이 한 경계에 머물러서 즉 본체에 머물러서 분별망상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또한 선종(禪宗)의 선은 그 이름은 동일하나 그 체(體)는 바로 열반묘심(涅槃妙心)입니다. 열반묘심은 바로불심(佛心)을 말합니다.

 선종(禪宗)이 이루어질 때는 화엄종이나 법화종 등 다른 종파와 대립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화엄이나 법화 등 모든 경론이나 종파를 초월해서 선종이 나왔습니다. 따라서 참선하는 분들은 다른 종파와 대립하거나 교(敎)와 대립한 것도 아닌 것이고, 팔만사천법문 모두를 포괄하고 초월해서 선종이 나왔기 때문에 조금도 그런 문제에 대해서 상을 내지 말고 설사, 경을 안 배웠다 하더라도 불심(佛心) 가운데는 모두가 다 함장(含藏)되어 있으니 '우주의 진리 모두를 다 갖춘 공부를 한다'하는 자부심으로 우리 선객(禪客)들은 공부를 지어 나가야 합니다.


또  삼명육통(三明六通) 등 제공덕이 선정에 의하여 발득(發得)되므로 최학도(最學道)라 곧, 배우는 길 가운데서 가장 수승한 길이란 말이요, 또는 안락법문(安樂法門)이라 합니다. 참선이란 것은 몸도 마음도 가장 안락스러운 것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가부좌(跏趺坐)하고 앉았으니까 어렵다고 생각할런지 모르지만 처음에 습인(習忍)이 발득될 때까지는 어려울지 몰라도 나쁜 버릇만 떨어지면 제일 쉬운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앉는 것도 그냥 함부로 앉고 자는 것도 함부로 자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참선수행자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인간의 자세 가운데서 가부좌같이 좋은 자세가 없습니다. 가사, 이틀이나 사흘이나 누워 있으라고 하면 마음도 무겁고 머리도 무겁고 오히려 괴롭습니다만 가부좌가 행습이 되어서 앉아 있으면 며칠도 무방합니다. 왜냐 하면, 가부좌한 정삼각형 모습이 기하학(幾何學)적인 의미에서도 가장 안정된 모습인 것입니다. 둥그런 것은 아예 안정이 될 수도 없겠고 네모꼴보다도 정삼각형은 아래가 무겁고 넓고 위가 좁아서 제일 안정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정삼각형을 미타(彌陀)의 지인(智印)이라 합니다. 아미타는 제불의 본사(本師)요 제불의 왕인데, 미타의 묘관찰지(妙觀察智)의 상징이 정삼각형입니다. 밀교에서는 부처님의 참다운 지혜의 상징적인 표치가 정삼각입니다. 이 모습이 가부좌하고 똑같습니다. 따라서 가부좌할 때는 가장 몸이 안정되고 지혜가 제일 발동되기 쉬운 것입니다. 참선에 대한 공덕을 이와 같이 표현하는 것은 모두가 다 경론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저 가부좌 모양을 취하면 참선하고 있다고 하지만 참다운 참선이 못됩니다. 오직 마음이 본분사, 본체를 안 여의어야 참선입니다. 우리는 선에 대한 정의를 확실히 해 두어야 합니다. 달마 스님의 어록을 보나, 육조단경을 보나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상을 여의고서 본래면목 자리를 여의지 않아야 참선입니다. 하나의 테크닉이나 형식적인 모양으로는 참선 같은 모양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진정한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화두를 참구 하더라도 제일의제(第一義諦), 상(相)을 떠나고 유무공(有無空)을 떠나버린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본체에다 마음을 안주시켜야 참된 화두가 되는 것이지, 그냥 의심만 한다고 참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무리하게 어거지로 의심한다 해가지고서 몸도 안 좋고 그러겠지요.


 묵조선(黙照禪), 묵조한다 하더라도 제일의제가 전제가 되고, 제일의제를 관조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혼침만 와서 꾸벅꾸벅합니다. 우리 마음으로 비추어 보는 반야가 있어야지, 반야 없이 덮어놓고 앉아 있다고 할 때는 혼침만 많이 오는 것입니다. 공부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마장이 혼침(昏沈)과 도거(掉擧)라, 혼침과 분별시비입니다. 어떻게 이 혼침을 이길 것인가? 어떻게 이 분별시비를 이길 것인가? 그것을 못 이기면 결국은 심일경성(心一境性)인 삼매에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2. 선(禪)의 종류(種類)


 ① 外道禪…因果를 不信하고 有漏功德을 爲하여 닦음.

 ②凡夫禪…因果를 信하고 有爲功德을 爲하여 닦음.

 ③小乘禪…我空을 信하고 解脫을 爲하여 닦음.

 ④大乘禪…我空및 法空을 信하고 解脫을 爲하여 닦음.

⑤最上乘禪--如來禪  本來 부처로서 一切無漏功德이  

             祖師禪 원만히 具足함을 信解하고 닦는禪.


 다음은 선(禪)의 종류를 살펴 보겠습니다.

이른바 초월적 명상법(瞑想法)이나 다른 명상법 등 명상법에서도 무슨 재미가 좀 붙으면 그것이 참다운 선(禪)이라면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선(禪)을 과소평가하는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한계를 분명히 알아야 지금 미국에서나 또는 인도 신지학(神智學 theosophy)에서 많이 나오는 명상법 같은 것 때문에 혼미를 당하지 않습니다.

 
외도선(外道禪)은 인과(因果)를 불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악을 행하고 파계무참(破戒無慙)한 짓을 하면 분명히 그 과보로 고(苦)가 있는 것이고 지금은 전생의 선근 덕택으로 넘어갈지 모르지만 죽은 다음에는 그 업덩이를 짊어지고 다시 고생을 많이 합니다. 인과를 무시하면 불교의 가르침이 못되는 것입니다. 또는 우리가 선(善)을 짓는다면 분명히 선의 과보로 안락을 얻는 것입니다. 불교는 인과를 밝히고 인과를 초월하는 것이지 인과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과를 믿지 않고서 우선 재미가 좀 있고 우선 머리가 좋아지고 몸이 좋아지는 유루(有漏) 공덕을 위해서 닦는 것이 외도 선입니다. 명상계통은 보통 다 그렇습니다.


다음에는 범부선(凡夫禪)이 있습니다. 외도는 불교를 안 믿는 것이고 범부라 할 때는 벌써 불교는 믿는 분입니다. 인과를 믿는 것입니다. 인과를 믿지만 아직은 무위공덕(無爲功德), 해탈을 믿는 것이 아니라 복이 많아지고 재수도 좋아지고 집안도 좋아지고 자기 병도 낫고 하는 이런 세간적인 유위(有爲)공덕을 위해서 닦는 것이 범부선 입니다.


 그 다음에는 소승선(小乘禪)입니다. 소승이라 하더라도 소승법은 깨달은 분상(分上)입니다. 구경적인 깨달음은 못되어도 역시 견도(見道)해서, 진여불성이 현전해서, 자기 자성을 알긴 알았으나 다만 습기를 못 여의었다는 말입니다. 아공(我空)을 믿습니다. 내 몸뚱이는 지수화풍 사대(四大)로 이루어지고 내 마음도 역시 수나 상이나 행이나 식이 인연 따라 잠시 합해져서 되었으므로 내가 공(空)하다는 것을 믿지마는 일체만법이 다 비었다는 법공(法空)을 미처 못 깨달은 것입니다. 소승도 깨달음이 철저하지 못하여 완전한 깨달음은 못되나 역시 깨달음의 분상이기 때문에 이러한 소승의 해탈을 위해서 닦는 것이 소승선 입니다.


그 다음에 대승선(大乘禪)은 나도 원래 비고, 일체 만법도 다 비었다는 아공(我空), 법공(法空)을 믿습니다. 무슨 이데올로기나 무슨 주의나 또는 어떤 학설이나 이런 것이 모두가 다 인연 따라서 나온 것이지 본래 이것이 이른바 무가정(無假定)의 원리가 못되는 것입니다. 이런 법공자리를 미처 잘 모르는 사람들은 사회주의라 하면 사회주의 사상을 원리적으로 믿고서 모두를 거기에 끼워 맞추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경직된 교조주의(敎條主義 dogmatism)인 것입니다. 불교를 공부하더라도 법공을 철저히 못 증(證)한 사람들은 꼭 자기 식으로, 같은 법문도 자기 견해만 옳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별로 신통치 않게 생각합니다. 자기주장, 자기가 느끼는 것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법공을 미처 모르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아공, 법공을 믿고서 해탈을 위하여 닦는 것이 대승선 입니다.


그 다음 최상승선(最上乘禪)은 여래선(如來禪) 조사선(祖師禪)을 말합니다. 더러는 여래선을 대승선 가운데 넣는 분도 있습니다만 뜻을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최상승선이란 다시 위없는 선이란 말입니다. 여래선, 조사선도 원래 둘이 아니요, 조사선이란 말도 원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구태여 본래성불(本來成佛)의 뜻을 강조한 방면에서 구분할 때 여래선은 주로 부처님 경전을 참고로 많이 하였다고 볼 수가 있고, 조사선은 부처님 가르침을 무시한 것은 아니겠지마는 이른바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교 밖의 격외(格外) 도리에 보다 더 철저히 들어간다는 데서 이름지어진 것이라 볼 수가 있습니다. 최상승선은 본래부처로서 일체 무루공덕(無漏功德)이 원만히 구족함을 신해(信解)하고 닦는 선입니다. 따라서 최상승선이 될 때는 모든 공덕을 다 원만히 갖추고 있음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공, 법공을 믿고 공덕총림(功德叢林)이나 또는 현법락주(現法樂住) 모두가 다 갖추고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쉬지 않으려야 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공덕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마음자리에 있습니다. 남을 미워도 하고 좋아도 하고 분별 시비하는 이 마음은 본래 마음이 아니겠지마는 망상하는 이 마음 떠나서 또 다른 마음이 있지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분별 시비하는 중생심, 이 마음 가운데에 일체공덕이 다 갖추어 있는 것입니다. 다만 닦지 못해서 공덕을 발득(發得) 못하는 차이 뿐입니다. 앞으로 닦은 뒤에 비로소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불이라 할 때에 본래성불(本來成佛), 즉신성불(卽身成佛) 또는 당래성불(當來成佛)의 세 가지로 성불의 뜻을 구분해서 얘기도 합니다. 본래성불은 본래 부처가 되어 있다는 말이요, 즉신성불은 이 몸 이대로 금생에 바로 부처를 이룬다는 말입니다.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금생에 충분히 부처를 이룰 수가 있어야 하겠지요. 또는 금생에 그렁저렁 했으면 금생에는 못 이룬다 하더라도 당래성불이라, 당위(當爲)적으로 마땅히 미래에는 성불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참선하는 분들은 본래성불 자리를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일체의 번뇌와 때 묻지 않은 모든 공덕을 원만히 갖추어 있다'고 믿을 때에 이른바 안심법문이 되는 것입니다. 구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내 마음만 믿어버리면 사실은 구할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휴거 헐거(休去歇去)라, 이 마음 쉬고 또 쉬어버리는 것입니다.


앞에서 복잡하고 어려운 근본불교를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마음 공덕을 생각할 때는 모두가 헛것입니다. 다만, 복잡한 현대사회요 고학력 시대라서 학자도 많고 또 수도인도 많은데 그런 분들이 또 불교를 했다는 분들이 여러 가지로 부처님 가르침을 쪼개고 보태고 하기 때문에 근본적인 체계를 못 세운 사람들은 혼미하고 혼란을 느껴 버립니다. 따라서 그런 혼란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근본불교부터 여러 시간 동안 얘기를 했습니다마는 우리가 윤곽을 취해서 근본적인 줄거리만 잡은 다음에는 누구의 말씀에 대해서나 참고로는 할망정 거기에 먹혀들 필요까지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최상승선만이 문제입니다. 이 가운에 다 들어 있으므로 그 외에 것은 문제시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땅히 출가사문(出家沙門)은 최상승선만을 문제로 해야 합니다. 그래도 우리 생과 더불어서 묻어있는 근본적인 본능적인 구생기(俱生起)번뇌, 또는 금생에 나와서 잘못 듣고 잘못 배우고 잘못 생각하고 지은 분별기(分別起)번뇌, 이런 번뇌 때문에 최상승선을 한다 해도 역시 자꾸만 끄달리고 장애가 되고 합니다. 마땅히 우리는 최상승선 도리를 한발도 헛딛으면 안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구체적으로 최상승선은 어떠한 방편이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3. 선(禪)의 방법(方法)


 ⓛ 公案禪(話頭禪)

 ② 黙照禪

 ③ 念佛禪


 선(禪)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 않습니다마는 우리가 보통 아는 바 공안선(公案禪) 즉 화두선(話頭禪)입니다. 우리 한국은 주로 화두선으로 되어 있습니다. 조계종은 특히 그렇습니다. 그러나 다른 종파에서는 좀 다르겠지요. 그러나 조계종에서는 참선을 한 번도 안한 분도 선을 말하면 '화두만 선이다'고 얘기를 합니다. 선방에서 한 철도 안 나본 학자들도 참선에 대한 논문을 쓸 때는 으레 공안선 화두선만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참선에 대해서 논할 때는 자기 스스로 몇 철이나 참선공부를 해 본 사람이 말해야지 참선을 안 해본 이가 선(禪)을 말하는 것은 마치 헤엄칠 줄 모르는 사람이 수영(水泳)법을 말하는 것과 같이 오류를 범하기 쉽습니다.

또 묵조선(黙照禪)은 화두없이 그냥 잠자코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불심(佛心) 경계를 관조하는 것입니다. 묵조(黙照)가 나올 때에 그 연기유서(緣起由緖)를 보면 분명히 불지(佛智)인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를 관조하는 것이며, 묵조란 뜻도 잠잠히 묵묵히 비춘다는 무념무상의 도리로, 일체 무루공덕(無漏功德)을 갖춘 본래면목 경계를 비추는 선인 것인데 뒤에는 덮어놓고서 묵묵하니 앉는 것으로만 압니다. 그러니까 근본 뜻도 잘 모르고 혼침 등 병통이 많이 생깁니다.

 
그러나 공안선도 가사, 조주 무자(趙州無字)의 화두의 연원을 보십시다. 어떤 승(僧)이 조주(趙州 778~897)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개가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불법의, 중도(中道)의 도리를 이치로라도 안다면 그런 질문은 할 턱이 없습니다. 진리를 이치로 알아버린 사람이 그런 질문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나 사실은 한 천년(千年) 전이라서 지금 사람들같이 논리적으로나 합리적으로 생각을 못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말씀으로는 일체중생 개유불성(一切衆生皆有佛性)이라, 일체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고 했으니 개도 역시 중생인지라 마땅히 불성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사람 같으면 그래도 선악의 분별이 있기 때문에 불성이 있다고 할런지 모르겠지만 개란 껌껌하게 미혹되어 먹을 것이나 암놈 숫놈  밖에는 모르는 개한테 무슨 불성이 있을 것인가?' 그렇게 의심이 안 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일체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는 말을 듣고도 역시 현실로 눈앞에 보이는 개가, 어두운 업장 많은 그런 짐승이 무슨 불성이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에서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라고 물었겠지요. 그 물음에 따라서 조주 스님이 "무(無)라 " 없다고 하였습니다. 분명히 부처님께서는 있다고 하셨는데 왜 조주 스님이 없다고 하는 것인가? 그러면 참말로 없는 것인가? 우리는 이'공안선(公案禪)의 뜻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럴 때는 우리 마음자리를 선행적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마음이 본래 부처인데, 어째서 부처가 나타나지를 못하는 것인가? 이것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산란심(散亂心) 때문입니다. 파도가 치면은 중천에 휘영청 밝은 달그림자가 물 위에 제대로 비칠 수가 없겠지요. 똑같습니다. 우리 마음도 역시 산란스러우면 참다운 지혜가 못 나옵니다. 안정이 되어야 바른 지혜가 나올 수 있는 것이고, 특히 진여불성, 우리 본심자리는 정말로 산란심이 딱 정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호흡도 산란심과 정비례합니다. 마음이 산란스러우면 호흡도 그 마음만치 산란스럽고 호흡이 고요해지면 마음도 고요해지고, 또 역으로 마음이 고요해지면 호흡도 고요해집니다. 그러기에 덮어 놓고 하는 분들이 많지만 호흡법도 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 마음도 어느 문제에다가 의심을 골똘히 품게 되면 우리 마음이 모아지고 정화(淨化)가 되겠지요. 그러나 수승한 근기가 된 사람들은 빨리 모아지는데 보통 근기는 그 의심 때문에 굉장히 괴로워지는 것입니다. 남을 믿는 것은 기분이 좋지만 남을 못 믿을 때는 괴롭지 않습니까? 그와 똑같이 의심도 제일의제(第一義諦) 본래면목 자리를 안 놓치고 의심하고 불성자리를 분명히 참구(參究)하는 태도로 의심한다면 빨리 모아지지마는 단순히 의심하는 의심으로는 더딘 것입니다.

 수승한 근기를 갖추면 빨리 하나가 되어서 몸도 마음도 개운하니까 별 문제시가 안 되는 것입니다마는 업장이 많은 사람들은 의심한다는 것이 괴로우니까 그 때문에 상기(上氣)가 되고 별별 병이 나오게 됩니다.


앞서, 칠각지(七覺支)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칠각지 법문은 정(定)과 혜(慧)가 쌍수(雙修)가 되는 법문 아닙니까. 정과 혜가 균등(均等)이 되어야 합니다. 왜 그러는 것인가? 진여불성자리는 정과 혜가 본래로 구족원만하게 갖추어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우리 마음자리가 정만 있고 혜가 없다면 정만 닦아도 되겠지요. 또 혜만 있고 정이 별로 없다거나 치우치게시리 무엇이 더 많다고 한다면 한 가지만 해도 될는지 모르겠지마는 우리 마음자리 불성은 원래 정과 혜가 균등하게 원만히 갖추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부하는 인행적(因行的)인 수행법도 정과 혜가 가지런히 나가야 됩니다. 마치 새가 두 날개가 있어야 하늘에 잘 날을 수 있고, 수레에 양 바퀴가 있어야 바로 가듯이, 공안선의 화두를 든다 하더라도 '내 마음이 정혜균등(定慧均等)이 되어 있는 것인가? 점검을 하여야 하고 남의 공부도 그렇게 점검을 해 주어야 됩니다.


 그러면 정혜균등한 것은 좋지만 어떻게 균등할 것인가? 좀 어려운 문제입니다. 무엇을 혜(慧)라고 할 것인가? 불경이나 조사어록이나 많이 외우는 것을 혜라고 할 것인가? 우리 공부하는 분상의 혜는 그것이 아닌 것입니다.

 보조 국사 어록에 적이상조(寂而常照)라, 적(寂) 곧, 고요한 것은 바로 정(定)에 해당합니다. 모든 번뇌가 없어져버린 자리입니다. 그러나 번뇌가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모르면 바보 아닙니까? 이른바 무기(無記)인 것입니다. 꼭 반야의 혜가 있어야 합니다. 반야의 혜는 모든 상을 다 떠나버린, 훤히 열린 바로 밝은 마음자리인 것입니다.

 앞으로 현대 물리학을 말씀드릴 적에 이 마음의 광명자리를 현대 물리학적으로 증명한 것을 소개하겠습니다마는 사실 우리 마음은 본래가 바로 지혜 덩어리요, 본래 빛, 광명 덩어리입니다. 후불탱화(後佛幀畵)를 보십시오. 부처님의 광명이 삼천대천세계를 다 비추고 도로 정수리로 들어가는 모습, 특히 정상에 광명이 들어오고 나가는 상징화가 그려져 있지 않습니까? 부처님뿐만 아니라 우리 중생도 똑같이 광명이 나와서 천지 우주를 다 비추는 것인데 우리가 번뇌에 가리어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가 예수의 부활(復活)입니다. 꼭 그들은 자기들만 있는 중요한 보배같이 부활설을 내세우나, 예수만 부활한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이 '다 부활하는것입니다. 우리가 죽어지면 죽는 것입니까?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뱀이 허물 벗듯이 몸뚱이 허물만 벗는 것이지, 우리 생명 자체는 죽음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부활이 아니라 바로 영생 자체가 우리 인간인 것입니다. 그네들은 그런 도리를 잘 모르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가 죽은 뒤 삼일(三日)만에 어느 신도한테 모습으로 나타냈겠지만 예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달마 대사 전기를 본 분들은 알지 않습니까?


 달마(菩提達磨) 대사가 소림굴(少林窟)에서 9년 간 계시고 모든 교(敎)는 배격하여 문자(文宇)를 세우지 말라 하였는데, 그 때에 중국에는 번역 불교가 성행하여 구법승(求法僧)들이 인도에 가서 천신만고 가져온 목숨보다 소중한 경전인지라, 경을 외우고 풀이하는데 세월 다 보내버리는 것입니다. 중국 사람들이 경을 번역하고 풀이하고 연구하는 것은 좋은데, 정작 마음 닦는 법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었습니다. 따라서 자기가 '중국에 와서 할 일은 무엇인가? 사명은 무엇인가? 마땅히 경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경의 본뜻을 중요시해야 할 것 아닌가? 경의 본뜻은 무엇인가? 결국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오직 우리 마음 가리켜서 마음 깨달으면 본래 마음자리, 본래 자기, 참다운 대아(大我)가 곧 부처다' 그래서 달마 스님이 중국에 와서 참다운 진리는 문자 밖에 있다고 설파한 것입니다.

그러나 2조 혜가(慧可) 선사한테 능가경(楞伽經) 네 권을 전수했던 것입니다. 잘 모른 사람들은 '불립문자 교외별전이라, 경전은 필요없다'고 말하지만 달마 스님이 전법(傳法)의 표신(表信)으로 가사와 능가경 4권을 혜가 선사한테 전했다는 것만 보더라도, 경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경을 중요시한 것입니다. 경을 중요시하고 숭상한다는 것은 많이 외우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경의 진의(眞義)인, 마음 닦고 바른 행동 취하고 삼매에 들어 바른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다시 공안선 말씀으로 돌아가면, 우리가 화두를 드는 공부에 있어서 도인이나 선지식들이 말씀한 혜(慧)를 어떻게 놓치지 않을 것인가? 오직 마음을 모으는 정(定)과 더불어 어떻게 혜를 세울 것인가? 혜는 따지는 혜가 아니라 다 버리는 혜인 것입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하니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리요' 본래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관념도, 좋다 궂다 하는 것도, 이 현상계도 본래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없다고만 생각하면 무기(無記)에 빠집니다. 그냥 없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에 훤히 빛나는, 조금도 막힘이 없는, 우주 삼천대천세계에 무장무애(無障無碍)한 진여연기(眞如緣起)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불성(佛性)이 상주(常住)하는 것입니다.


저는 라즈니쉬에 대해서 그의 방만한 행위 때문에 배격해버렸습니다만 그가 어떻게 공부를 했던 간에 천재이기 때문에 그의 저서 가운데 아주 좋은 대문이 있었습니다. '눈을 감을 때나 눈을 뜰 때나 행주좌와(行住坐臥)에 모든 것을 빛으로 생각하라'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눈을 뜨나 눈을 감으나 언제나 누구를 보나 모두를 다 광명의 화신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모두가 광명입니다. 금덩어리나 다이아몬드만 빛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투명한 마니보주(摩尼寶珠)같은 빛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불안청정(佛限淸淨)한 부처님의 차원에서는 진여불성 자체가 바로 광명이기 때문에 모두를 다 빛으로 안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도인들이 깨달은 분상에서 '심월고원(心月孤圓)하니 광탄만상(光呑萬象)이로다, 마음달이 훤히 우주를 비추는데 광명이 우주를 다 삼키고 있구나!' 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깨달을 때에는 그런 경계가 되어야겠지요. 천지 우주가 그야말로 송곳 끄트머리나 냄새나는 똥이나 모두가 다 부처님의, 순수한, 심심미묘한 광명으로 빛나있다는 말입니다.

 
운문(雲門 864~949) 선사도 "여하시불(如何是佛)이니꼬?" 부처가 무엇인가? 라고 묻는 어느 스님네 대답에 "간시궐(乾屎橛)이니라" 마른 똥막대기라는 말입니다. 하필이면 마른 똥막대기 뿐이겠습니까? 가장 더러운 것도, 가장 좋은 것도 모두가 다 부처가 아님이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공안선의 '이뭣고' 선이나, '무자(無宇)'선이나 어떤 선을 하나 제일의제(第一義諦) 자리를 안 놓치는 것이 이른바 혜(慧)가 됩니다. 그러면 정(定)은 무엇인가? 정은 그 자리를 지속적으로 간단(間斷)없이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시삼마(是糂麽)선'의 시초를 보면 혜를 어떻게 드는〔擧〕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나한테 한 물건이 있으되 밝기는 해와 달보다 더 밝고, 검기는 칠보다 더 검고 ' 이른바 명암을 초월한 것이 되겠지요. 그러나 우리 중생분상에서는 검은 것을 생각하면 혼침이 빨리 와버립니다. 참선하면서 눈을 감고 해보십시오. 참선이 익은 분들은 문제가 아니겠지만 초심자는 그냥 혼침이 와버립니다. '밝기는 해와 달보다 밝고 검기는 칠보다도 더 검은 그 무엇이, 하늘을 받치고 땅을 괴고 이미 천지를 감싸고 두루하는 것이, 명암(明暗)을 초월한 밝은 생명이 나와 더불어 있다'고 참구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머리에 있습니까, 가슴에 있습니까, 발에 있습니까, 어느 처소에 부분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몸뚱이 전체가 불성 덩어리인 것입니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천지 만물 두두물물이 불성 덩어리인 것입니다. 진여불성이 연기(緣起)한 현상이기에 현상 그대로 진여불성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뭣고'선 곧 '시삼마'선에서도 천지를 하나의 광명 덩어리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화두나 '시삼마'선이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 무엇인가? 는 본래면목 자리가 무엇인가? 라는 말입니다. 달마 스님께서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인가? 부처가 무엇인가? 또는 본분사(本分事)가 무엇인가? 이런 데 따라서 천칠백(千七百) 공안이 나왔습니다. 따라서 참구(參究)하는 마음 자세 역시 그 자리를 안 놓쳐야 선인 것입니다. 묵조선도 똑같습니다.


그 다음에 염불선(念佛禪)이라,

  저는 이번에 문제의식으로 삼은 것이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어떤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입니다.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아닙니다. 돈오돈수도 옳고 돈오점수도 옳습니다. 다 말씀을 했습니다. 육조단경을 보더라도 돈오돈수란 대목도 있고 돈오점수라고 문자로 표현은 안했지만 그 의미로는 벌써 돈오점수가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부질없는 갈등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개념적인 해석을 잘 해버리면 갈등 될 필요도 없습니다. 돈오돈수를 무슨 뜻으로 말했던가? 뜻으로 생각할 때는 같은 뜻이 되어 버립니다.


 또는 여래선과 조사선의 문제입니다. 이것도 괜히 부질없이 싸우는 것입니다. 부처가 말한 것이 옳은가? 조사가 말한 것이 옳은 것인가? 다 옳습니다. 다만 부처님이나 조사 스님이나 때에 따라, 너무 집착하면 집착하지 말라, 또 너무 집착을 안 해서 허무감에 빠져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고 무기에 떨어지면 곤란스럽기 때문에 이럴 때는 이것저것 점차로 닦아야 한다고 나온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해석하면 되는 것이지 그런 표현된 문제 가지고 괜히 쓸데없는 낭비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갈등(閒葛藤)이라, 한가로운 희론(戱論)에 불과합니다.


또는 염불이 옳은가? 참선이 옳은가? 또는 주문이 옳은가? 또는 참선과 염불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저한테 문의하는 젊은 스님 네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이런 기회에 미흡하나마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면 자기가 내키는 법문이라 좋게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므로 마땅히 권위 있는 경론을 전거로 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염불선(念佛禪)도 역시 원래 최상승선 도리입니다. 그러나 '극락세계가 저 십 만억 국토를 넘어서 있다. 또는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이 우리 마음 밖에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참다운 염불도 못되고, 염불선도 못됩니다. 부처님께서 극락세계가 밖에 있다고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우리 마음이나 부처가 내 밖에 있어서 애쓰고 생각하면은 우리를 돕는 가피를 주신다고 생각하셨을 리는 만무합니다.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라, 천지 우주가 바로 부처요, 시방여래시법계신(十方如來是法界身)이라, 부처는 바로 우주를 몸으로 합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근본 뜻을 헤아려야 하는 것입니다.

 원래, 극락세계나 나무아미타불이나 정토(淨土) 법문을 말씀하신 경은 주로 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아미타경(阿彌陀經)인데 그런 경을 착실히 보아도 압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착실히 잘 안 보고 말을 합니다. 착실히 본다면 한 경 내에서도 방편과 진실이 아울러 있습니다. '극락세계가 저 밖에 있다'고 말씀해 놓고도 같은 경 내에서 '그대 마음이 바로 극락세계다. 닦으면 그대로 극락이다'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근(下根) 중생은 방편설(方便說)만 가지고 따지며 시야비야(是也非也)합니다.


따라서, 참다운 염불도 '본래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닌 자리'를 확인시키기 위해서, 천지 우주가 바로 부처고 내 마음이 부처기 때문에,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부처 이름을 자꾸만 외워야 자기 암시가 되어 가까워지겠지만 부처님 이름을 외지 않고서 분별하는 생각만 할 때는 우리 마음이 부처와 가까워지겠습니까? 화두도, 무자나 이뭣고나 또는 판치생모(板齒生毛)나 모두가 다 일체 유루적(有漏的)인 상대 유위법을 떠나서 오직 불심(佛心)만 잡으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공안이나 염불이나 모두 다 같은 것입니다.

 묵조(黙照)도 청정미묘하고 일미평등한 진여불성을 관조하니까 같은 것이고, 또는 공안도 제일의제(第一義諦)인 한 물건 자리를 참구하는 것이니까 같은 것이고, 염불도 부처가 밖에 있다고 생각하고 행복스러운 극락이 십 만억 밖에 있다고 생각할 때에 방편이 되는 것이지만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요 만법이 본래 부처일 때는 바로 선(禪)인 것입니다.


외도(外道)와 정도(正道)의 차이는 무엇인가? 외도는 마음 밖에 도를 구합니다. 별스런 재주 있는 짓을 다해도 마음 밖에 무엇을 생각하면 외도인 것입니다. 행복도 불행도 화합도 모두가 다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행동 바르게 하고 진리를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스려야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다스리는 방법은 무엇이 좋은가? 산을 생각하고 물을 생각하고 무엇을 생각하더라도 마음의 본래면목을 생각하는 것 같이 빠르고 쉽고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은 본래 정서(情緖)와 지혜(智慧)와 의지(意志)가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전생의 숙업 따라서 정서가 좀 더 많은 사람 또는 의지가 더 강한 사람 또는 지혜가 더 밝은 사람 등으로 비중의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정서나 지혜나 의지가 조화롭게 갖추고 있으면 모르거니와 우리 중생들은 조화롭지가 않습니다. 오직 부처님만이 지혜나 의지나 정서가 다 조화롭고 완벽한 것입니다.

 
우리 불성은 원래 원만무결한 것이지만 중생은 숙업(宿業) 따라서 그렇지 않기 때문에 정서나 의지로 참구하는 쪽보다 화두(話頭)를 의단(疑團)으로 참구(參究)하는 것도 무방할 것이고, 확신을 위주하고 의단을 싫어하는 사람은 화두 없이 묵조(黙照)하는 것도 좋겠지요. 어느 쪽으로 가나 다 성불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빠르고 더딘 차이는 있겠지요. 자기 근기에 맞으면 더 빠르고 쉬울 것입니다. 또는 정서가 수승한 사람들은 이것저것 별로 따질 필요가 없이 다만 근본 성품인 생명의 실상을 인격적으로 그리워하는 흠모심을 냅니다. 원래 부처인지라 어떤 누구나가 다 부처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누구나 다 한결같이 염불의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화두하는 분도 기도를 할 때는 아미타불을 외우고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영가천도 할 때는 또 부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바로 우리 마음의 뿌리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 뿌리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바로 자연의 도리며 몇 만생을 윤회해도 필경에는 부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거니 이 몸뚱이를 비롯한 모든 집착 때문에 공부를 잘못하는 것이지, 일체 분별망상이 없을 때는 바로 선정(禪定)에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고인들 말씀에 무슨 공부 방법이든 '득정(得正)하면 가야(可也)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수행법에 있어서 주문을 외우든 화두를 참구하든 묵조하든 염불하든 득정하면 가야라, 바른 도리 바른 원리를 얻으면 좋다는 말입니다. 꼭 염불해야만 좋고 꼭 묵조해야만 좋은 것이 아니라 어느 행법을 취하든지간에 그 본분사, 본래면목 자리, 진여불성자리를 안 놓치는 것을 득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바른 도리를 얻지 못하면 꼭 화두만 든다고 선이 되는 것도 아닌 것이고 또는 꼭 묵조만 한다고 선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요는 본체를 안 여읜, 본체에 걸맞는 공부가 참다운 공부요 참다운 선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에 인간들이 합리적으로 잘 생각을 못하니까 맨 처음에 화두공안을 내세운 도인들이 필요에 의해서 시설한 것이지만 뒤에 사람들은 부질없는 분별시비를 합니다. 묵조도 '고인들의 어구(語句)나 기연(機緣)에 대해서 이것저것 희론(戱論) 곧, 부질없는 분별시비를 하니까 그럴 필요가 없다. 본래 부처인지라 적연이응(寂然而應)해서 가만히 잠자코 있으면은 저절로 맑아져서 부처가 될 것이 아닌가?'이렇게 그 당시에는 필요하니까 나왔던 것입니다.


대혜(大慧宗杲 1089~1163) 스님도 위대한 도인인데, 그냥 묵묵하니 고목(枯木)처럼 앉아서 꾸벅꾸벅 혼침에 떨어지니까 마땅히 무엇인가 참구를 해야 하겠기에 그래서, 화두선을 역설했고 그리고 선사들의 어구에 치우쳐서 따지고 부질없는 의심을 하니까 천동정각(天童正覺 ?~1157) 스님이 묵조선을 창도했던 것입니다.

 염불은 부처님 당시부터서 염불(念佛)․염법(念法)․염승(念僧)이라고 무슨 경전에나 다 나와 있고 원래, 우리가 부처이기 때문에 또, 부처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염불은 따지고 보면 내가 참 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본래부처가 부처를 생각하기 때문에 역시 선(禪)이 됩니다.

 그런데 깊은 고려 없이 염불은 하근기(下根機) 중생이 하는 것이라고 하면 문제가 큽니다. 우리네 할머니나 어머니들이 천념(千念)을 헤아리면서 애쓰고 몇 십 년 동안 염불한 분도 어느 스님 네가 "염불은 근기가 낮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화두를 해야 한다" 그렇게 해버리면 염불을 그만두고서 억지로 화두 의심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시간 낭비인 동시에 병통이 생기기 쉽습니다. 근세에 수월(水月音觀 1855~1928) 스님은 일자무식인데도 천수다라니(千手陀羅尼)로 깨달은 분 아닙니까? 모두가 다 부처라 생각하고서 노력하면 되는 것이지 섣부른 졸도(拙度)법문은 소경이 길을 인도하는 격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공안선, 묵조선, 염불선 이런 수행법에 부질없이 시야비야 하는 것이니까 그럴 필요가 없다는 데서 저는 이와 같이 새삼스럽게 역설하게 되는 것입니다.


 

 

 4. 선(禪의) 자세(姿勢)


 一相三昧 ―慧… 觀(如猫捕鼠)   

                                      眞如三昧

 一行三昧 ―定… 止(如鷄抱卵)


정과 혜를 말씀 드렸습니다마는 선(禪)이나 삼매(三昧)나 같은 뜻으로 삼매를 총괄해서 백팔삼매(百八三味)라고도 하고 또 포괄적으로 말할 때는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어제도 대체로 살펴본 바와 같이 달마 대사의 리입사행(理入四行)도 따지고 보면 일상삼매 일행삼매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달마의 리입(理入)즉, 본래 일체만유와 불성(佛性)이 둘이 아니라는 원리에 들어가는 것은 지혜(智慧)고 일상삼매입니다. 천지 우주 모두를 하나의 부처로 보는 것이 이른바 일상삼매입니다. 네가 있고 내가 있고 천차만별로 두두물물 구분하면 일상(一相)이 못되겠지요. 오직 부처라는 불성 일상(一相)으로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상(相)은 우리가 상을 내는 상이 아니라 우주를 하나의 성품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지혜적이고 이른바 관(觀) 이 됩니다.


어느 행법에 치우친 사람들은 관법(觀法)이 외도라고 합니다. 저는 관법만 좋아하는 사람도 아닙니다만 어느 분은 저더러 애는 퍽 쓰는데 관법 외도한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그러나 관은 바로 부처님 반야를 관조(觀照)한다는 말입니다. 또는 관심론 허두에 이른바 '관심일법이 총섭제행(觀心一法 總攝諸行)이라' 마음을 관찰하는 법이 모든 법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화두나 주문이나 모두가 다 원리적으로는 관(觀)속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남을 비판할 때는 잘 알고 해야 하는 것이지 잘 모르면서 피상적으로 비판해서는 오류를 범합니다. 그런 것은 하나의 구업(口業)이 되겠지요.

 
따라서 일상삼매(一相三昧)는 혜적(慧的)이고 관적(觀的)이란 말입니다. 관도 그냥 땅을 보고 하늘을 보는 그런 관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성(自性)을 보는 관이요 혜도 보통 분별지혜가 아니라 반야지혜(般若智慧)입니다.


육조단경 부촉품에 일상삼매 일행삼매가 있고 4조 도신(道信) 대사의 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에도 일상삼매 일행삼매가 나와 있습니다. 또는 5조 말씀에도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불경이나 조사어록이나 공부하는 방법이 다 정(定)과 혜(慧)로 포괄이 됩니다. 혜(慧)를 삼매분상에서 말할 때에 일상삼매인 것이고 정(定)은 일행삼매입니다. 일행삼매는 일상삼매라는 혜 경계를 놓치지 않고서 염념상속(念念相續)으로 지속을 시킨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정과 혜가 쌍수(雙修) 곧, 아울러 닦아야만이 정혜균등(定慧均等)으로서 가지런히 조화가 되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가 부처거니, 부처 가운데는 정과 혜가 구족원만(具足圓滿)이거니, 우리 공부도 그렇게 상응(相應) 조화해 나가야 계합(契合)이 빠른 것입니다.


 삼매가 발득(發得)이 못되는 것이 정혜불균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칠각지(七覺支) 법문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 공부가 지금 정과 혜가 균등히 조화가 되는 것인가? 조화가 된다면 혼침(惽沈)도 도거(掉擧)도 점차로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이러한 자세를 여묘포서(如描捕鼠)라,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 찰나도 한눈팔지 않고, 눈도 깜짝 않고서 쥐만 노려보는 것처럼 화두를 참구할 때나 염불할 때나 눈도 깜짝 않고서, 마음이 한눈팔지 않고 그 자리만 생각하고 관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허튼 마음이 없이 그 자리만 관조(觀照)하고 참구하는 것을 여묘포서라고 조사어록에 표현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여계포란(如鷄抱卵)이라, 마치 닭이 알을 품듯이 한다는 뜻입니다. 닭이 계란을 품어서 부화시킬 때는 21일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드렸듯이 21이나 7이나 굉장히 심심미묘한 수치(數値)인 것입니다. 21일 동안에 계란이 부화되는데 닭이 경망해서 계란을 품고 있다가 며칠 안 되어서 풀떡 일어나 버리면 되겠습니까? 따스한 온기로 훈습을 시켜서 적당한 온도가 되면 계란의 생명이 차츰 무르익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른바 줄탁동시(琫啄同時)라, 그 안에서 생명이 발육이 되어 곧 나가야겠다고 미묘한 신호를 보내면 동시에 어미닭이 껍질을 쪼읍니다. 시기가 딱 맞아서 병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가 다 어미 닭이 쉬임없이 계속 품고 있었기에 되는 것입니다.


 참선 좀 하다가는 한 해나 했다고 해서 '내가 무던히 했는데' 그리고서 기분이 좀 좋으면 그만 둔다든가 또는 마음이 약간 열려서 몸도 마음도 공중에 뜨는 것 같은 생각이 들면 이것이 깨달음인가보다고 훌쩍 자리를 떠나고 '그대 공부가 아직 멀었다'고 충고해도 선방을 떠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일행삼매가 못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남전보원(甫泉普願 748~834) 선사도 30년 동안 산에서 안 나온 선지식입니다. 달마 대사도, 물론 교화를 위해서지만 소림굴에서 9년간 있었습니다. 일행삼매를 진득하니 못하기 때문에 근래에 와서 삼명육통(三明六通)하는 분들이 거의 안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 출가사문은 한사코 정해탈(定解脫) 곧, 선정해탈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야 재주가 있고 구변 좋고 경 많이 외우고 위풍이 늠름하면 충분히 도인으로 대접받을 수도 있겠지만, 선정해탈(禪定解脫)은 오랫동안 삼매에 들어앉아야 되는 것입니다. 닭이 계란을 품듯이 진득하니 오랫동안 앉아야 합니다. 우리 참선 수행자들 정말로 명심을 하여야 합니다.  선방에서 공부하다가 방선(放禪)죽비 치면 나와서 잔소리나 하고, 그러면 안하는 것보다는 낫다 하더라도 그래서는 공부가 익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방선  해서 일어날 때도 안상(安詳)이라, 우리 수좌나 부처님 거동은 안상이라, 조용하고 점잖하고 사뿐히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이 본체에다 머무르고 있는 그 마음이 흩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밥 먹을 때도 하마 그 마음이 흩어질새라 소중하니 가꾸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보임(保任)입니다. 그렇게 해야 마음이 익어져서 병아리가 나오듯이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자성(自性)을 깨닫는 이른바 생사 대사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우리 번뇌가 얼마나 무겁습니까, 지금 닦아나가는 우리 진지한 수행자들은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기 번뇌가 얼마나 지겹고 무거운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