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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청화 큰스님 서적/5. 원통불법의 요체

제5절 중국불교(中國佛敎)의 교관(敎觀)

5절 중국불교(中國佛敎)의 교관(敎觀)


1.중국불교(中國佛敎)의 교상(敎相)과 관심(觀心)


中國 佛敎의 敎觀(敎相과 觀心)

敎相…敎理判釋을 말하며 釋尊一代時敎를 自己宗義에서 分別判斷  함.

觀心….自宗에서 세운 眞理를 觀念하는 法을 말함.

法相宗은 三時敎를 敎相으로 하고 唯識觀을 觀心으로 함.

天台宗은 五時八敎를 敎相으로 하고一心三觀을 觀心으로 함

 華嚴宗은 五敎十宗을 敎相으로 하고 一眞法界觀을 觀心으로 함.

 眞言宗은 顯密二敎十住心을 敎相으로 阿字不生觀을 觀心으로 함.

        

중국불교의 교관(敎觀)을 살펴보겠습니다.

교관(敎觀)은 교상(敎相)과 관심(觀心)이라는 말입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교상은 그 당시에 불교 교리가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중국은 처음에는 번역(飜譯)불교라 하여 구법승(求法僧)들이 인도에 가서 부분적으로 경전을 가지고 와서 번역을 하였습니다. 법현(法顯 369?-45l?) 삼장이나 현장(玄奘 622-664) 삼장이나 또는 의정(義淨 635-713) 삼장이나 또는 우리 한국 스님인 혜초(慧超 704-787) 대사나 그분들에 의해서 경전이 전해졌습니다.

        

특히 주로 우리한테는 구법승들에 대한 행각이 깊은 감동을 주게 됩니다. 구법승들이 한 번씩 갔다 오려면 십팔 년 이십년 걸립니다. 이른바 청춘이 다 지나가 버립니다. 갈 때도 서역국으로 통과하여 수만리 길인데 혼자 가겠습니까마는 처음에는 몇 십 명이 발심을 하여 출발했다가도, 가는데 3년 오는데 3년, 보통은 3년 세월 이상이 걸리는 가운데 몽고의 고비사막(Gobi 沙漠)을 지나야 하고 티베트 파미르고원(Pamirs 高原:蔥嶺)을 넘어야 하는 고생이 극심하여 그야말로 십중구퇴(十中九退)라, 열 사람 가면 아홉 사람쯤 후퇴할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죽기도 합니다. 현장법사가 갈 때도 이른바 서유기(西遊記)같은 것을 보면 사막지방에 가다가 쓰러져 죽어서 버려진 구법승들의 해골이 수 없이 많았다고 합니다. 또한 다 돌아온 것이 아니라 현장이나 또는 법현이나 또는 의정이나 혜초나 또는 혜일(慧日 680-748)이나 그런 분들은 모두가 다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분들입니다. 그야말로 목숨을 내건 너무나 모험적인 구도행각이었습니다.

        

 종교란 마땅히 자기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목숨을 걸어야 무엇인가 얻는 것입니다. 생명을 건다는 것은 현상적인 상을 여읜다는 것입니다. 상을 여읜다고 할 때는 자기 몸뚱이가 안중에 없어야 한다는 말이나 같습니다.

구법승들이 그렇게 난행, 고행, 고생고생하고 가까스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생명을 건 길인지라 돌아온 사람은 정작 몇 사람 밖에는 안 됩니다.

우리는 행복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들 가운데도 과거 전생에
구법승도
있을 것입니다마는 우리가 금생에 이렇게 편한 때에 와서
한 번에 다 불경을
볼 수가 있고 여러 스승들 덕택으로 발췌해서
요점만 추릴 수가 있는 것이고 아무튼,
역사적으로 고찰을 꼭 해야
합니다.

        

우리 강원교육도 그런 점에 역점을 둬야 하는 것입니다. 철학을 공부해도 철학사(哲學史)를 공부하지 않고서는 바른 철학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불교도 인도 불교사(佛敎史), 중국 불교사, 또는 동남아 불교사, 일본 불교사, 한국 불교사를 우리가 꼭 읽어야 합니다. 어렵다고 해서 보지 않으면 그만치 자기가 아는 것만 옳다고 생각하고 집착하게 됩니다.

        

공부도 하다보면 가사, 염불을 애쓰고 한 사람들은 염불에 대해서 재미를 보는 것이고 또 거기 따른 공덕을 얻는 것입니다. 화두를 많이 참구한 사람들은 화두에서 또 무엇인가 얻습니다. 어떤 공부나 다 그렇습니다. 오! 주여 하고 기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또 그것으로 해서 무엇인가 얻습니다. 외도나 정도나 어떤 것이나 하다보면 결국은 재미가 붙습니다. 그러면 미련한 사람들은 꼭 그것만이 제일이고 다른 것은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있어서 역사적인 고찰이 필요한 것입니다.

        

교상(敎相)의 구체적인 말은 교리판석(敎理判釋)입니다. 교리를 그 당시에 이루어진 불법으로 판단 해석하는 것입니다. 석존의 일대시교(一代時敎)를 자기 종의(宗義)에서, 자기들 종지(宗旨)에 따라서 분별 판단하는 것입니다.

관심(觀心)은 무슨 종파를 세우면, 우리 종파는 무슨 법으로 공부한다고 하는, 공부하는 방법이 있어야 하겠지요. 곧 자기 종파에서 세운 진리를 관념 (觀念)하는 법을 말합니다.

일본 일련종(日蓮宗) 계통은 '나무묘호우렌게교(南無妙法蓮慕經) 하는 것만이 제일이고 다른 것은 별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참 딱한 일 아닙니까? 그런 것도 모두가 역사적 고찰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일련(日蓮 1222~1282) 대사 같은 위대한 사람이 나왔을 때는 그 사람대로 특수한 방편을 세웠겠지마는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비판할 때는 반드시 공변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인가 저는 일련 대사 책을 한번 보았습니다마는 사종격언(四種格言)이라고 해서 선천마(禪天廳)요, 참선하는 것은 하늘 마구니요, 염불은 무간지옥 가는 길이라고 합니다. 극락 간다고 애쓰는 것이 정토종이고 참선하는 것이 삼계를 초월하는 것인데 그와 같이 반대로 말합니다. 또 율종(律宗)은 국적(國賊) 곧 나라의 원수요, 또 일본의 순수밀교인 진언종(眞言宗)은 망언(妄言)이라 합니다. 이것이 일련종의 사대격언이라 합니다. 부처님 말씀은 다 옳은 말씀인데 이렇게 꼭 자기 것만 내세우는 것입니다. 한 종파를 내세운 사람들은 대부분 다 독선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 법상종(法相宗)에서는 어떻게 하는가? 법상종은 유식사상(唯識思想)을 주로 합니다. 법상종은 삼시교(三時敎) 곧 유교(有敎) 그 다음에 공교(空敎) 그 다음에 중도교(中道敎)를 교상으로 하고 또 만법이 유식(萬法唯識)이라, 물질은 티끌 하나도 본래가 없고 모두가 식(識)아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유식이나 유심(唯心)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내나야 식은 바로 마음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우주 전체가 오직 마음뿐이다 '이렇게 관하는 유식관(唯識觀) 을 관심법 (觀心法)으로 합니다.

        

천태종(天台宗)은 오시팔교(五時八敎)라, 일대시교를 다섯 시교(時敎)로 나누고 공부하는 여러 가지 행위에 따라서 팔교(八敎)로 구분합니다. 우리 마음자리에서 바로 공(空)과 가(假)와 중도(中道)를 관하는 일심삼관(一心三觀)을 수행법으로 합니다.

우리 마음의 본체는 조금도 집착하거나 잡을 수가 없는 무장무애하고 텅텅 비어 있지마는 인연에 따르면 현상적인 상(相)이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상이 본래 바로 공이지마는 가상(假相)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을 가(假)라고 하는 것이고, 그러나 공과 가가 둘이 아니므로 결국 중(中)이라 합니다.

        

화엄종(華嚴宗)은 오교십종(五敎十宗)을 교상으로 하고 일진법계관(一眞法界觀) 곧 우주만유 모두가 간격도 없이 일여 평등한 진여법성이라고 관조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관법이 있으나 대체로 이렇게 관하는 법을 관심법으로 합니다.

그리고 진언종(眞言宗)은 순수밀교입니다. 일본에 들어간 순수밀교로 해서 진언종이 여러 모로 훌륭한 체계를 세웠습니다. 일본의 구우까이(空海 774~835)라는 스님이 일본 진언종을 세웠습니다. 진언종은 현교, 밀교, 2교와 십주심(十住心)을 교상으로 하고 아자(阿字) 곧 아미타불의 아자입니다. 아자불생관(阿字不生觀) 을 관심법으로 합니다. 여러분들께서 자칫 혼란을 느끼실 수도 있으니까 이런 것을 세밀히 말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다만 윤곽만을 알면 되겠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 이 정도는 알아두는 것이 나중에 경을 보고 또는 불교사를 보더라도 한결 명료하게 납득이 될 것입니다.


2. 법상종(法相宗)의 삼시교(三時敎)


  三時敎 
 第一時敎…外道․凡夫의 實我의 執着을 破하기 爲하여 四大五蘊 等의 實有를 說하고 人我의 空無를 밝힘. (四阿含經이나 經論)

 第二時敎…小乘實法의 執着을 破하기 爲하여 一切諸法이 本空한 般若波羅蜜을說하여 我․法 俱空을 밝힘. (諸部의 般若經)

第三時敎…有執과 空執을 아울러 破하기 爲하여 心外의 法은 有가아니며 心內의 法은 空이 아님을 說하여 非空非有의 中道實相을 밝힘. (解深密經․華嚴經․法華經 等)

        

그래서 앞에 든 법상종의 삼시교(三時敎)를 조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제일시교(第一時敎)는 외도․범부의 참말로 내가 있다는 실아(實我)의 집착을 파하기 위하여 지․수․화․풍 사대(四大)와 오온(五蘊) 곧 지수화풍 4대인 색(色)과 심법(心法)인 수와 상과 행과 식의 사온(四蘊)을 합해서 5온인데, 이런 4대 5온 등이 참말로 있다는 실유(實有)를 설하고 사람 몸은 지․수․화․풍으로 되었기 때문에 허망하고, 우리 마음도 결국은 수와 상과 행과 식과 4온이 인연 따라서 잠시간 합한 것이기 때문에 인아(人我)는 원래 비어 있는 아공(我空)이지마는 지․수․화․풍 이런 것은 실지로 있고 또는 수․상․행․식도 실지로 있다는, 말하자면 그런 법은 있다(法有)고 하는 것입니다.

        

제이시교(第二時敎)는 내 몸뚱이나 내 관념이나 있다는 이른바 실아(實我)는 반야에서 볼 때는 내 몸뚱이나 내 관념도 본래가 없는 공(空)인 것이고, 그 뿐만 아니라 지․수․화․풍․의 물질이라든가 또는 어떠한 주의나 이상이라든가 그런 모든 법이 원래 있지가 않으므로 실아 실법의 집착을 파하기 위하여 일체제법이 본래 공한 반야바라밀을 설하여 아법구공(我法俱空)이라, 아(我)나 또는 법(法)이나, 아집이나 또는 법집이나, 모두가 다 함께 공했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제1시교는 4아함경이나 또는 기타 소승적인 경론 가운데 들어있는 것이고 제2시교의 뜻은 주로 제부(諸部)의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에 들어 있습니다.

        

제삼시교(第三時敎)는 있는 것에 대한 집착인 유집(有執)과 또는 다 비었다는 것에 대한 집착인 공집(空執)을 아울러 파하기 위하여 마음 밖에 있는 법은 있지가 않고, 유(有)가 아니며 심내(心內)의 법은 공(空)이 아님을 설하여 비공비유(非空非有)인, 공도 아니고 또는 유도  아닌 중도실상(中道實相)을 밝힌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상으로 볼 때는 초목국토실개성불(草木國土悉皆成佛)이라, 나무나 풀이나 또는 국토나 모두가 다 본래 성불해 있다는 것이요, 법화경에서 말한 일색일향이 무비중도(一色一香無非中道)라, 조그마한 하나의 색이나 또는 한낱 냄새나 또는 맛이나 모두가 다 중도 아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삼시교에서 말하는 공집(空執)과 유집(有執)을 다 여읜 중도실상에서 말하는 가르침입니다. 이런 도리는 해심밀경(解深蜜經)또는 화엄경(華嚴經), 법화경(法華經) 등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사량(思量)하고 비판하는 작업을 안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 수행인의 분별시비는 시(是)나 비(非)나 간에 어떠한 것도 다 진여불성 자리에서 조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곧 진여불성의 조명을 받은 시비인 것이라야 합니다. 말하자면, 내가 있는 경우도 '내가 없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있기는 있는데 다만 진여불성의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한낱 가상이다' 또는 우리가 사업도 하고 무슨 일을 하더라도, '나나 너나 모두가 다 부처의 화신인 것이고 또는 정치하는 것도 파는 물건도 받는 돈도 역시 진여불성의 화현(化現)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불자의 자세입니다. 순간 찰나도 본체를 안 여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로 헤아릴 때는 그것이 우리 공부와 직결이 됩니다.






3. 천태교관(天台敎觀)


 1) 오시교(五時敎)

 第一華嚴時…佛成這後 21日間 華嚴經을 說.

 第二鹿苑時…12年間 鹿野苑 等에서 阿含經을 說.

 第三方等時…8年間 維摩․勝鬘 等의 諸大乘經을說.

 第四般若時…22年間 諸部의 般若經을 說.

 第五法華涅槃時…8年間 法華經을 說하고 一日一夜에 涅槃經을 說함.

        

번쇄한 감이 있으나 적어도 법상종, 천태종에서 말하는 것은 알아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천태철학은 불교를 총괄해서 체계를 세웠기 때문에 교학적으로 공부하는 분들은 필수적으로 천태학을 해야 한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께서 학승이 될 필요는 없는 것이고 세밀한 법상을 다 알 필요는 없으나 한 번씩 살펴보는 것은 상당히 참고가 됩니다. 공부할 때 막히는 것이 있을 때는 '이것은 어떤 것이구나' 하고 빨리 납득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태교학에 대해서 조금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천태종의 오시팔교(五時八敎)라, 천태종은 부처님의 일대시교를 다섯 시기로 구분했습니다. 그래서 제일시(第一時)에 화엄시(華嚴時)라,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뒤 삼칠일(三七日) 동안에 화엄경을 설했다는 말입니다. 삼칠일 곧 21일 동안에 어떻게 80권 또는 60권이나 되는 방대한 화엄경을 설했을 것인가? 의심을 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뜻을 우리가 깊이 음미해야합니다.


부처님께서는 화엄경을 보통 알아듣는 우리 사람들에게만 설하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특히 젊은 세대들은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있다〔有〕는 것에 대해서만 주로 배우는 처지라 눈에 안 보이는 세계는 보통 부인하고 불신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법문은 형이하학적인 있는 세계와 형이상적인 안 보이는 세계도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 법문은 그런 견지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삼칠일 동안 화엄경을 설하신 것은 눈앞에 있는 사람들한테 설하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이라는 언어의 도구를 써야만 알 수가 있습니다만 저 천상 사람들처럼 몸뚱이가 없는 존재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한낱 점쟁이라도 다른 사람 속을 좀 아는 것입니다. 그네들이 아는 것은 내나야 욕계의 범주 안에서만 좀 알 정도이나 그런 것을 보더라도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만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깨달으신 심심미묘(深甚微妙)한 일승법문(一乘法門)인 화엄경을 천중(天衆)들이나 또는 시방삼세(十方三世)의 보살들을 위해서 설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불교가 아직도 안 나온 때인데 화엄경 같은 고도의 철학을 당시의 사람들이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당시부터서 화엄경이 문자화 되고 유포화 된 것은 아니고 그 뒤에 용수(龍樹) 보살이 비로소 화엄경의 대요를 풀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화엄경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화가 있습니다만 생략하겠습니다.

        

제이시(第二時)는 녹원시(鹿苑時)인데, 녹야원을 중심으로 중생들이 알 수 있는 정도의 범위 내에서 아공(我空)을 주로 하고 법공을 미처 말하지 않는 유교(有敎)의 가르침입니다. 녹야원 등에서 12년간 아함경을 주로 말씀을 했습니다.

제삼시(第三時)는 방등시(方等時)라 합니다. 8년간은 유마경 또는 승만경 등의 제 대승경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시(第四時) 반야시(第四般若時)는 특히 공(空)사상에 역점을 두고 22년 동안이나 반야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째서 다른 때보다 더 많은 세월을 반야부를 설했는가? 그것은 중생은 다 보이는 대로 있다고만 보는 것인데, 있다는 유집(有執)을 타파하기가 굉장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달마(達磨)때부터서 6조 혜능까지의 어록을 볼 때도 주로 공사상이 많습니다. 그래서 공관(空觀)을 많이 하는 것인데 어느 분들은 공관을 하면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공관을 할 때는 절대로 무기공에 안 떨어집니다. 이론적으로 '다 공이다, 모든 것이 다 비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집착해서 그런 것이지 '진정으로 내 관념이나 내 몸뚱이나 대상이나 객관 주관이 다 비어 있다 ' 이렇게 공부해 들어갈 때는 무공에 안 떨어집니다. 왜냐하면,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는 본래 공(空)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여불성이 다만 허무하게 다 비어 있는 공 같으면 들어갈수록 공이 되어버리겠지요. 그러나 다만 공이 아닌 바로 실상(實相)이요, 바로 진공묘유(愼空妙有)이기 때문입니다. 진공 따로 있고 묘유 따로 있지 않습니다. 진공 즉 바로 묘유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공관을 하더라도 계행을 청정히 하고 일체 만법이 다 바로 공(空)함을 닦아갈 때는 절대로 무기공에는 안 떨어지는 것입니다.

        

제오시(第五時) 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에는 8년간 법화경을 설하고 하루 낮 하루 밤에, 열반경을 설하셨습니다. 부처님 설법을 49년 설이나 또는 45년 설을 말하나 49년 설치 더 정확하다는 분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천태도 49년 설로 말했습니다. 그래서 대수로 50년 설법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녹야원 12년 방등 8년 반야시 22년 법화 열반시 8년, 50년 설법, 이른바 49년 설법이 됩니다.

그래서 천태교에서는 아함십이방등팔(阿含十二方等八) 이십이년반야설 (二十二年般若說) 법화열반공팔년 (法華涅槃共八年) 화엄최초삼칠일(華嚴最初三七日)이라고 50년 설을 게송화 하여 외우기도 합니다.


 2) 화법사교(化法四敎)


化法四敎…所說의 敎義

1. 三藏敎…經․律․論 三藏의 都類가 判然하고 因緣生滅러 四諦를 說하여 主로 聲                    聞․ 緣覺 二乘을 敎化함.

2. 通 敎…卽空無生의 眞諦를 說하여 三乘을 通하여 同學시킴,

3. 別 敎…二乘人에 共同하지 않고 菩薩에 對하여 大乘無量의法을 說한

4. 圓 敎…最上利根의 菩에 對薩하여 事理圖融한 中道實相을說함.


천태종에서 오시교(五時敎)의 교설을 깊고 옅은 순서로 체계 있게 구분한 것을 화법사교(化法四敎)라 합니다. 이는 소설(所說)의 교의(敎義)로서 곧 설하는바 교의 뜻을 말합니다. 화법사교는 삼장교(三藏敎), 통교(通敎), 별교(別敎), 원교(圓敎)로 구분한 것입니다.

삼장교(三藏敎)의 삼장이란 경(經)과 계율인 율(律)과 론(論)장을 말합니다. 부처님 말씀은 경이요, 출가사문이나 불자가 지키는 행위 규범은 율이고, 부처님의 경율을 정통조사가 중생의 편의에 따라 새로 논한 것이 론입니다. 경율론 삼장의 부류(部類)가 판연(判然)하고 또는 인연 따라서 이루어지고 인연 따라서 멸해지는 인연생멸(因緣生滅)의 사제(四諦)를 설하여 주로 성문, 연각 이승(二乘)을 교화한 것이 삼장교입니다. 제일 녹원시로 아함경을 설하는 때에 해당되겠습니다.

        

통교(通敎)는 즉공무생(卽空無生)의 진제(眞諦)를 말씀합니다. 즉공이란, 있다는 것이 모두가 다 분석한 뒤에 공이 아니라 현상 그대로 공이란 말입니다. 공사상에 대해서 석공(析空)과 즉공(卽空)은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공은 원소 등으로 분석하고 난 뒤의 공이 아니라 컵이면 컵, 사람이면 사람 바로공인, 즉공인 것입니다. 반야경의 골은 모두가 다 즉공입니다. 어째서 즉 공인 것인가?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진 것은 실체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잠시간 그림자 같이 모양을 낸 것이지 실다운 모양이 있지가 않은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내 몸은 지수화풍 사대(四大)가 합해서 되었다는데 지수화풍은 각각 무엇인가? 불경에 '지불가득(地不可得)이요 수화풍도 불가득(水火風亦不可得)'이라, 지(地)도 얻을 수가 없고 또는 물도, 불도, 풍도 얻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왜 얻을 수가 없는 것인가? 지나 수나 화나 풍이나 모두가 물질이 아닌 진여불성의 화현(?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공간성이 없고 물질이 아닌 진여불성이 그때그때의 연(緣) 따라서 지(地)가 되고 화(火)가 되고 수(水)가 되고 풍(風)이 되었습니다.

        

우리 중생은 그림자만 보는 것이니까 다만 그림자같이 있다고 하는 것이지, 투철한 안목으로 진여불성을 깨달은 차원에서 통찰한다면 있는 그대로 공(空)인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인연생(因緣生)이기 때문에 인연 따라서 생겨난 것은 순간찰나도 그대로 머물지 않습니다. 일초의 몇 억분지일도 머물지 않고 동요해서 마지않는 것들이 내 몸도 구성하고 다이아몬드도 구성한 것입니다. 다이아몬드도 내나야 탄소의 결합체 아닙니까? 탄소가 그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탄소는 무엇인가? 탄소는 원자핵(原子核)을 중심으로 해서 6개의 전자(電子)가 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전자는 무엇이고 원자핵은 무엇인가? 그런 것은 하나의 파동(波動)에 불과합니다. 공간성이 없는 파동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공간성이 없는 것이 이렇게 모아지고 진동을 해서 어떠한 상(相)을 낸다 하더라도 그건 상일뿐이지 실체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을 몇 번 곱하거나 나누거나 보탠다 하더라도 내나야 공입니다. 제로(零)는 제로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모양을 내든 지간에 바로 즉공(卽空)인데, 잘 모르는 사람들은 꼭 이렇게 분석한 뒤에서야 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즉공무생(卽空無生)이라, 바로 공이기 때문에 본래 낳지 않았습니다. 본래 불생불멸(不生不滅)입니다. '내가 태어났다, 나를 낳아서 우리 부모님이 좋아했다' 물론 부모가 좋아도 했겠지요. 그러나 본래에서 볼 때는 낳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어느 한 가지만 투철히 알아버려도 마음이 시원해져 버립니다. 그러나 어느 한 가지에만 막혀도 마음이 항시'거리끼고 그림자가 생기는  것입니다.


'본래무일물하니 하처야진애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리요 '6조 혜능 대사 게송 아닙니까, 본래 아무것도 없거니 어느 곳에 티끌이 있을 것인가? 물질이나 관념이나 있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100% 못 믿으니까 닦음이 있는 것이지 공상(空相)에 투철해 버리면, 여실히 공상을 알 때는 닦음이 없습니다. 따라서 전생에 선근이 많은 사람들은 '즉 공이다 ' 는 말 한마디에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공(空)자리가 그렇게 어렵기도 하고 소중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22년 동안이나 고구정녕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한 어떠한 공부나 반야공(般若空)이 전제되어야 참다운 선(禪)이고 참다운 염불이고 참다운 주문인 것입니다. 반야공이 전제가 못되면 모두가 다 방편 설입니다. 이러한 진제(眞諦)를 설하여 삼승(三乘)을 통하여 동학(同學)시키는 가르침이기에 통교(通敎) 라고 합니다.


별교(別敎)는 이승인(二乘人)에 공동하지 않고 보살에 대하여 대승무량의 법문을 설하신 것입니다. 대승을 설한다고 하더라도 특수한 대승인에 대해서 주로 법문을 설한 가르침이란 말입니다. 화엄경도 원융무애한 원교(圓敎) 사상도 많으나, 주로 특수한 대승들에 대해서 설한 대문도 있습니다.

원교(圓敎)는 최상리근(最上利根) 곧 위없는 근기의 보살에 대하여 현상적인 사(事)나 또는 근원적인 리(理)나 원래 둘이 아닌, 사리(事理) 원융한 중도실상을 설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일대사 인연은 중도실상의 원융무애한 도리에 있습니다. 다른 것은 여기에 이르기 위한 방편설입니다.


3) 화의사교(化儀四敎)


化儀四敎…說法儀式

1. 頓 敎…頓機에 對하여 別敎 圖涕낄 法을 說함. 華嚴時와 如함.

2. 漸 敎…漸機에 對하여 漸次로 四敎를 說함.

3. 秘密敎…一種의 機에 對하여 秘密히 法을 說하여 會中에서 서로 알지 못하게 함.

4. 不定敎…一會中, 一法을 論하여 聞者로 하여금 달리 해석케 하 여 이익을 얻기도, 얻지 못하기도 함.

※ 化法四敎는 藥味와 같고 化儀四敎는 蘂方文과 같음. 別敎․圖敎의 差異는 다만 隔歷과  圖融의 差異뿐임.


화의사교(化儀四敎)란, 앞에서 말씀드린 사교(四敎)가 어떻게 설해져 있는 것인가, 즉 설법 의식을 말한 것입니다.

 돈교(頓敎)란 문득 깨닫는 가르침이란 뜻입니다. 문득 깨달을 수 있는 근기에 대하여 별교, 원교의 법을 설하는 것입니다. 화엄경같이 말씀입니다.

 점교(漸敎)는 점차로 순서를 밟아서 들어가는 가르침입니다. 점차로 순서를 밟아서 가는 근기가 있기 때문에 그런 근기 들은 점교가 되어야 알 수가 있겠지요. 유(有)에 너무나 집착한 사람에게 단박에 '다 비었다'하면 허무해서 공부를 잘 못할 것입니다. '자기는 허망한 것이지마는 법은 본래 있는 것이다'하면서 점차로 이끄는 식이겠지요. 점기(漸機)에 대하여 점차로 사교(四敎)를 설하는 것입니다.

        

다음 비밀교(談密敎)란, 일종의 특수한 비밀스런 법을 납득할 만한 근기에 대하여 비밀히 법을 설하여 회중(會中)에서 서로 알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설사 알지 못하더라도 비밀스런 법을 특수한 비밀스러운 기질들에게 설해서 알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다음 부정교(不定敎)는 돈교도 아니고 또는 점교도 아니고 비밀교도 아닌 기질에 대해서 즉 일회중(一會中) 일법(一法)을 설하여 듣는 자로 하여금 달리 해석케 하여 이익을 얻기도 하고 얻지 못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돈교나 점교나 비밀교가 아닌 근기들한테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서 하는 법문이 부정교인 것입니다.


앞에 든 삼장교․통교․별교․원교 등 화법사교(化法四敎)는 마치 우리가 아파서 먹는 약의 맛, 약의 성분에 비교할 수가 있는 것이고, 뒤에 든 돈교․점교․ 또는 비밀교․ 부정교인 화의사교(化儀四敎)는 약방문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별교, 원교의 본뜻은 거의 같은 뜻인데 다만 격력(隔歷)과 원융(圓融)의 차이 뿐입니다. 가사, 삼신불(三身佛)이라 하면 별교적인 해석은 법신(法身) 따로 있고 보신(報身)따로 있고 화신(化身) 따로 있다고 한계 있게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막혀서 보는 것입니다. 즉 천태교의 관법에서 일심삼관(一心三觀)은, 한 마음에서 공관(空觀) 가관(假觀) 또는 중도관(中道觀)을 보는 것인데, 이것도 공관 따로 있고 가관 따로 있고 중도관 따로 있다고 보는 식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격력(隔歷) 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격력해서, 막혀서 따로 따로 보는 것이 별교의 가르침인 것이고, 원교는 원융이라, ‘법․보․화 삼신이 원래 셋이 아니고 삼신일불(三身一佛)이다. 또 공(空)․가(假)․ 중(中)도 원래 셋이 아니요, 공(空)인 동시에 가(假)요, 가인 동시에 중(中)이다'라고 보는 것이 원융무애한 법이므로 부처님의 본래적인 가르침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삼장교는 경․율․론 삼장인 장교(藏敎)우 통교(通敎)는 소승이나 대승이나 다 통한다고 해서 통교입니다. 반야를 떠나면 불교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소승도 반야가 들어 있어야 하고 대승은 다시 말할 것도 없기 때문에 대소승을 통해서 있는 가르침이 통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별교․원교의 차이는 거의 같은 도리인데 별교는 아직 원융무애한 도리를 잘 모르는 입장에서 따로 설정하고 간격을 두는 격력이요. 원교는 원융무애라, 모든 것이 조금도 간격 없는 일미평등한 이른바 법신 자체, 일체 만유 선악시비를 다 초월해서 진여 자체를 말하기 때문에 원교라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법아님이 없거니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된다고 하는 것은 법의 참 공덕을 미처 몰라서 그러는 것이고, 또 법을 증명한 삽삼조사(卅三祖師)가 파계무참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법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진 만큼 마음도 유연스럽고 자비심도 더하고 또는 우주의 도리에 대한 계율이나 질서도 더 잘 지키는 것입니다. 천태에서 화법4교와 화의4교를 합하여 8교(八敎)라고 합니다.

        

4) 사종사제 (四種四諦)

四種四諦(涅難輕聖行品所說에 依하여 天台가 安立함)

1. 生滅四諦…苦․集․道의 三諦는 因緣에 依하여 實로 生滅이 있고 滅諦는 生法에 對하여 實다운 滅法이라는 實生實滅 위에 세운 四諦로서 根本佛敎 卽 三藏敎의 所說 임,

 2. 無生四諦…苦․集․道의 三諦는 如幻卽空하여 實다운 生이 없고 滅함이 없다. 滅諦는 本來 自空하여 不生不滅이다. 이와 같이 苦集道의 因果當體卽空임을 깨닫고 生滅을 不見하므로 無生四諦라 함. 通敎所說

3. 無量四諦…苦諦에 있어서 界의 內外를 通하여 無量의 相이 있고 또한 道諦에도 無盡한 差別이 있는데 이는 大菩薩이 修學하는 바이다. 別敎의 四諦

4. 無作四諦…煩惱卽菩提이므로 集을 斷하고 道를 修하는 造作이 없고 生死卽涅槃이므로 苦를 滅하고 滅을 證하는 造作이 不要하다. 이와 같이 斷證의 造作을 여읜 四諦이므로 이를 無作四諦라 함. 圖敎의 四諦.

        

우리는 고․ 집․ 멸․ 도 사제(四諦)라 하면 보통 근본불교에 있는 가장 쉬운 법문이라는 생각을 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장교ㆍ통교․ 별교․ 원교를 각 가르침의 심천 따라서 차이 있게 해석하듯이 4제도 정도에 맞추어 네 가지로 구분해서 천태지의(天台智顗 538-597) 선사가 열반경 성행품에 있는 것을 참고로 안립(安立)한 것입니다. 안립이란 불교의 독특한 술어인데 규정이나 결정이나 시설의 뜻이 됩니다.

저는 누구에게나 말씀합니다마는 사제(四諦), 팔정도(八正道),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 또는 육바라밀(六波羅蜜)은 어느 때나 우리 행동의 지침이 되고 불교의 기본인지라 정고 기억해야 합니다. 십이인연법도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새롭고 우리 행동을 그때그때 법성으로 인도하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첫째 생멸사제(生滅四諦)란 고제․집제․도제의 삼제(三諦)는 인연에 의하여 진실로 생멸이 있고 또 멸제는 생법(生法)에 대하여 실다운 멸법(滅法)이라는 실생실멸(實生實滅)의 4제 곧, 정말로 우리가 낳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일체법이 생기기도 하고 멸하기도 한다는 4제로써 근본불교 즉 삼장교의 가르침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초기 불교에서 짐작이 되는 바와 같이 무식하고 진리에 대해 어두운 사람들에게 말할 때, 살아있는 그 사람에게 '그대가 본래 공이다. 그대가 본래 없다'거나 또 지극히 좋아하는 물질세계에 대해서 '그런 것도 모두가 다 허망하다'고 할 때는 진리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초기에는 정말로 멸하는 것도 있고 정말로 생하는 것도 있다는 실생실멸(實生實滅)의 차원에서 말씀한 법문인 것입니다.

 지금도 사제법문이라 하면 보통은 생멸사제 수준에서 알고 있습니다. '번뇌의 집(集)이 있어서 탐심, 진심을 내고 삼독심(三毒心)으로 업(業)을 지으니까 과보로 고(苦)를 받는다. 따라서 고를 떠나기 위해서는 마땅히 팔정도, 도(道)를 닦아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 해서 해탈의 멸(滅)을 얻는다 ' 보통은 이런 수준이 아닙니까? 이것이 생멸사제의 차원에서 말씀한 가르침입니다.

        

그 다음 무생사제(無生四諦)란 고․집․도의 삼제(三諦)는 여환즉공(如幻卽空)하여, 원래 허깨비 같아 실다운 것이 아니라 바로 공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고(苦)도 공이요, 집(集) 공이요, 또는 도(道)도 공인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 무명(無明)이란 것도 무무명(無無明)이라 하듯이, 현상적인 차원에서 무명인 것이지 실상적인 차원에서 볼 때는 무명이 본래 없는 것입니다. 무명의 실상이 바로 법신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분명히 고생을 받고 있지만 중생 차원에서 고생인 것이지, 고생도 바로 볼 때는 고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야공 사상에서 모두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고가 있고 집이 있다고 하면 응당 집제(集諦)가 있으니까 고제(苦諦)가 있게 되겠지요. 그러나 집제 역시 반야공에서 볼 때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가 있을 턱이 없고, 고도 없고 집도 없으니 닦아서 나가는 도(道)가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고 ㆍ집ㆍ도의 삼제(三諦)는 허깨비같이 공하여 실다운 생이 없고 멸이 없다' 또는 해탈의 인(因)은 도(道)고 해탈의 과(果)가 멸(滅)인데, '멸제는 본래 스스로 공해버려서, 본래 자공(本來自空)하여 불생불멸이다' 이와 같이 고․집․도의 인과 당체(因果當體)가 즉공(卽空)임을 곧 고의 인은 집이고 멸의 인은 도라는 이런 것이 당체가 바로 공임을 깨닫고, 생하고 멸하는 것을 보지 않으므로 무생사제(無生四諦)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야 사상 즉 통교(通敎)의 말씀입니다.

        

 다음에는 무량사제(無量四諦)입니다. 우리 중생의 과보가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받는 고제에 있어서 삼계의 내외(內外)를 통해서 무량의 상(相)이 있습니다. 우리가 반야의 공으로 볼 때에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 되겠습니다마는 그러나 전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가제(假諦)의 차원에서는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가제가 없으면 허무가 되어 버리겠지요. 삼계 내에도 많이 있고 삼계 외에도 무량의 가상(假相)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도제(道諦)에도 무진(無盡)한 차별이 있습니다. 팔정도(八正道)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호흡법도 있고 육바라밀도 있고 하여 해탈의 길로 가는 도제도 무진한 차별이 있는데, 이는 대보살이 수학하는 것입니다. 소승들은 복잡한 것을 보통은 싫어해서 얼마만치 가다가 마음이 개운하면 더 못가는 것이 소승입니다마는, 대승들은 성불할 때까지 쉼 없이 가는 기질이기 때문에 무량법문을 다 수용하는 것입니다. 무량사제는 별교(別敎)의 사제입니다.

        

다음 무작사제(無作四諦)란 임운등등(任運騰騰)하는 곧, 조작이 없는 4제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우리 분상(分相)에서 얻기는 어려우나 이것이 본래적인 모습입니다.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이므로 번뇌라고 하더라도 중생이 괴로운 단계에서 번뇌인 것이지 깨달아 버리면 번뇌가 곧 보리고, 또는 설사 깨닫지 안 했다 하더라도, 내가 지금 괴롭다는 그 괴로움 또는 아프다는 그런 아픔도 근본 바탕에서 볼 때는 괴로움이 아니고 아픔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상만 보는 것이니까 번뇌가 있고 아픔이 있습니다마는 본체에서 볼 때는 없는 것입니다.

        

번뇌 즉 보리이므로 무명과 무명으로 이루어진 탐심, 진심, 치심과 여기에서 우러나는 여러 가지 업인 집(集)을 끊고 팔정도 같은 수행법을 닦는 조작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번뇌가 있고 보리가 따로 있다면 닦는 것도 것이지마는 번뇌의 본바탕이 바로 보리라고 생각할 때는 천지우주가 오직 보리뿐이요, 오직 참 진리뿐입니다. 천지우주가 진리뿐일 때는 새삼스럽게 우리가 집이라고 할 것도 없고, 또 집을 끊고서 도를 닦는다는 조작(造作)스러운, 억지로 지어서 하는 것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므로, 생하고 멸하고 고를 받는 우리 중생계 이대로 바로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이런 것은 범부지에서는 넘겨다 볼 것이 못됩니다. 닦아서 증명해야 하는 것인데 증명도 않고서 그렇다고 하면 그냥 함부로 그렁저렁 해져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사에 있는 것이고, 견성한 뒤에 비로소 생사 즉 열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지혜와 믿음만은 분명히 '생사 이대로 열반이구나' 이렇게 믿고 나가야 합니다. 다만 업장에 가려서 증명만 못할 뿐 사실이기 때문에, 증명하기 위해서 마땅히 믿음과 혜(慧)는 이와 같이 막힘이 없는 원융한 혜를 내야 합니다.

따라서, 무작사제(無作四諦)의 혜를 가지고 공부를 해야 바로 선(禪)이 되고 참다운 염불이 되는 것입니다.

        

생사 즉 열반이므로 고를 멸하고 멸을 증(證)하는 조작이 필요치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끊고 증하는 조작을 여읜 4제이므로 이를 무작사제라 하는 것입니다.

높다 낮다 또는 내가 지금 어떻다 하는 분별시비를 내는 것은 아직 조작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설사 무진 애를 쓰며 공부해나간다 하더라도 마음에는 걸림이 없이해야 무념수(無念修)라, 무심히 닦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본래 부처고, 본래 부처니까 무루지성 본자구족(無漏智性本自具足)이라, 조금도 허물이 없는 지성이 원래 갖추어 있는 그 자리를 믿고서 무념으로 철저히 계행 지키고 나가면 저절로, 본래 불성인지라, 계합이 되겠지요. 이는 원교(圖敎)의 4제입니다.

        

5) 칠각지 (七覺支)

七覺支(七覺分․七菩提分法)

聖道가 不生함은 定慧不調하기 때문에 定慧를 均等시키는 法이다.

見這位에서 見惑을 斷하고 修道位에 있어서 思惑을 斷함은 이 七覺支의 힘에 依한다.

1. 擇法覺支…般若智慧로써 法의 眞僞를 簡擇함.

2. 精進覺支…勇猛心으로써 邪行을 떠나고 眞法을 勤行함.

3. 喜 覺 支…心에 善法을 得하여 歡喜를 生함.

4. 輕安覺支….除覺分이라고도 하며 身心의 鳥重을 끊고 身心을 輕利安和케 함.

5. 念 覺 支…항상 定慧를 明記不忘하고 이를 均等케 함.

6. 定 覺 支…心을 一境에 住하여 散亂치 않게 함.

7. 行捨覺支…모든 妄念을 버리고 一切法을 捨離하여 心을 平心坦懷케 하고 다시 追憶하지 않음.

※ 이 七法에 있어서 行者의 心이 浮動할 때는 輕安․行捨․定의 三覺支를 用하여 다스리고, 心이 沈沒할 때는 擇法․精進․喜의 三覺支를 用하여 心을 일으키며 念覺支는 항시 慧를 念하여 끊임이 없어야 한다.                                                                                                   ㅡ止觀 -

        

우리 불자는 복잡하다 하더라도 적어도 37보리분법(菩提分法) 정도는 알아야 합니다. 근본불교의 수행법이 주로 37보리 분법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팔정도(入正道)를 무시 못 하고 사념주(四念住)를 무시 못 하듯 이런 법은 다 필요하니까 제정이 된 것이므로 번쇄하지마는 알아두면 공부 정진할 때 크게 참고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37보리분법 안에 있는 칠각지(七覺支) 법문도 굉장히 소중한 법문인데, 공부하는 분들이 팔정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마는 팔정도 다음에 칠각지법문이 나와 있는데도 별로 관심을 안 둡니다. 마땅히 소홀히 할 수 없는 귀중한 법문이요, 특히 참선 공부할 때, 이른바 정혜쌍수(定慧雙修)할 때는 꼭 필요한 것입니다. 

        

칠각지를 칠각분(七覺分) 또는 칠보리분법(七菩提分法)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인 성도(聖道)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정혜부조(定慧不調)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혜균등(定慧均等)을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정(定)이 앞에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혜(慧)가 앞에 있는 것도 아닌 것인데 분별 좋아하는 사람들은 선후를 가릴려고 애쓰기도 합니다마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원래 법성 가운데는 정과 혜가 원만 무결하게 원융무애로 갖추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법성 가운데 정과 혜가 원만히 갖추어 있기 때문에, 정만 닦으려고 애쓰거나 혜만 닦으려고 할 때는 정혜부조라, 조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심리도 지(知)적인 요소, 정(情)적인 요소, 또는 의지〔意〕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에 너무 지성으로 치우치면 정이 소외를 받으니까 어쩐지 불안스럽고, 의지가 부족하면 결연하고 강직한 행동을 못 취하게 되듯이 마땅히 조화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심리적으로는 지와 정과 의라 하지마는 불교적인 사상으로 볼 때는 정과 혜 가운데 다 들어갑니다. 지관(止觀)이라 하면 지는 정에 해당하고 관은 혜에 해당하며, 앞서 말씀드린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도 역시 일상삼매는 혜에 해당하고, 일행삼매는 정에 해당합니다. 모두를 이와 같이 정과 혜에 대비시킬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공부가 빠르게 되려면 꼭 정혜균등이라, 정혜쌍수가 되어야 합니다. 보조국사 어록을 한 말로 말한다면 돈오점수와 정혜쌍수로 포괄할 수가 있습니다. 그와 같이 소중합니다. 우리가 마음이 잘 열리지 않는 것은 정혜부조하기 때문입니다. 정과 혜를 조화시키는 법, 정혜를 균등 시키는 법이 칠각지법입니다. 따라서 주의해서 보시고 그때그때 공부할 때 참고로 하셔야 합니다.

        

정혜조화법을 마치 공중에 날아가는 새에 날개가 둘이 있어야 잘 날아갈 수가 있고, 또 굴러가는 달구지에 바퀴가 둘이 있어야 바로 갈 수가 있는 것과 같다는 비유 말씀도 있습니다.

도를 깨닫는 자리인 견도위(見道位)에서 도리에 막힌 번뇌인 견혹(見惑)을 다 끊어버리고 수도위(修道位)에서 습기(習氣)가 되어 있는 번뇌인 사혹(思惑)을 끊는 것은 칠각지의 힘에 의합니다. 이것이 견도에도 필요하지만 특히 수도할 때 곧 보임(保任) 수행할 때 미세번뇌, 습기번뇌를 녹일 때 칠각지의 힘이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첫째는 택법각지(擇法覺支)라, 택법이란 법을 간택(簡擇)한다는 말입니다. 불교 술어로는 선택이란 말은 안 쓰고 간택이라 합니다. 반야 지혜로써 법의 진위(眞僞)를 간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은 이것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판정을 잘 못합니다. 그러나 반야도리, 제법공(諸法空)도리에 비추어 봐서 맞는가 안 맞는가 택하는 것입니다.

공부해 갈 때도 부질없이 상대유한적인 문제로 의심하면 그것은 참다운 반야 지혜가 못되겠지요. 반야 지혜에 비추어서 항시 제일의제(第一義諦), 본체를 여의지 않는 행법을 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법을 가리는 것입니다.

또는 어떤 법이 자기한테 맞는가 간택하는 것입니다. 가사,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 너무나 지성적인 것에 치우친 법으로 갈 때는, 본래가 부처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힘을 많이 낭비합니다. 또 지성적인 사람들이 감성적인 방법으로 할 때도 거의 그와 비슷한 것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튼 자기 성질, 원래 품성을 잘 헤아려서 택법을 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은 정진각지(精進覺支)라, 용맹심으로써 삿된 행을 떠나고 진법(眞法)을 근행(勤行)하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닦는다는 말입니다. 내 평생 이 일로 목숨을 바치겠다고 확신이 서지 않으면 정진이 안 되는 것입니다. 따라, 마땅히 자기 품성이라든가 또는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가장 선행적(先行的)으로 택법을 한 다음에는 용맹정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째는 희각지(喜覺支)라, 마음에 좋은 법을 득(得)하여 환희를 생(生)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택법을 바르게 하고 용맹정진을 할 때는 부작용이 별로 없고 필연적으로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이른바 법회선열(法喜禪悅)이라는 기쁨이 옵니다. 우리가 택법을 잘 못하고 또는 계율이나 선정이나 다 여법한 정진을 안 할 때는 진척이 안 됩니다. 법의 진도가 없으면 거기에 따라 오는 환희심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당히 할 때는 필연적으로 희각지라, 마음에 선법을 득하여 환희심을 내는 것입니다.

        

다음은 경안각지(輕安覺支)라, 경안은 앞에서 여러 차례 말씀했습니다마는 제각분(除覺分)이라고도 합니다. 추중번뇌(島重煩惱)라, 이른바 거칠고 무거운 번뇌를 없애므로 해서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고 편안스럽게 하는 곧 경리안화(輕利安和)케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염각지(念覺支)라, 항상 정(定)과 혜(慧)를 명기(明記)하여 불망(不忘)하고 마음에다 명심해서 잊지 않고 균등케 하는 것입니다. 가사, 우리가 가만히 바보같이 그냥 묵조(黙照)하고 앉아 있다하면 정(定)을 주로 하고 혜를 무시한 것이 되고 또 진여불성자리, 진여불성은 우리가 더위잡을 수 없는 광대무변한 자리 아닙니까마는, 그 자리만 생각하며 정을 무시하고 갔다 왔다 망동한다든가 오로지 지속적으로 하지 않고서 그때그때 혜만 발동을 시켜서 법성자리만 관조할 때도 역시 공부가 더딘 것입니다.


마땅히 지혜로 해서 상이 없고 자타 시비선악이 다 끊어진, 청정무비하고 무량공덕을 갖춘 진여불성자리를 훤히 생각해야 합니다. 훤히 트인 그 자리에다 마음을 두는 것은 혜라 할 수 있고 그 자리를 안 떠나고 염념상속 하는 것은 정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비로소 정혜균등이 되어서 선정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정혜균등이 안되면 선정에는 못 들어갑니다. 법성에다 우리 마음을 안주시키고 행주좌와(行住坐訓臥) 어묵동정(語黙動靜)에, 앉으나 서나 남하고 얘기할 때라도 마음의 저변에는 영원적인, 생멸이 없는 그 자리를 여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정각지(定覺支)란 마음을 한 경계에 머물게 해서 산란치 않게 하는 것입니다. 역시 정혜균등이 되려고 노력하다 보면 차근차근 공부가 익어지면서 마음이 착 가라앉고 산란심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야 정이 되겠지요.

        

다음 행사각지(行捨覺支)란 모든 망념을 여의고 일체법을 사리(捨離)하여 마음을 평심탄회(平心坦懷)케 하고 다시 추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공부할 때 과거에 미워했던 생각이 한번 일어나면 더욱 더 미워질 수가 있습니다. 남을 좋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이런 것을 다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사(行捨)도 중요한 공부입니다. 무엇이 좀 안되면 그것 생각하느라고 공부가 안되고 또 잘되면 잘됐다고 그러는 것이므로 잘되나 못되나 다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형제가 죽으나 누가 죽으나, 과거에 창피스런 일을 당했거나, 법성(法性)에서 볼 때는 그런 것이 사실은 별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공부할 때는 다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7법에 있어서 수행자의 마음이 부동(浮動)할 때, 즉 마음이 들뜰 때는 경안(輕安)과, 다 버리는 행사(行捨)와 또 마음을 오로지 한군데만 집중하는 정(定)의 3각지를 써서 다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마음이 들뜰 때와 너무나 침울해서 혼침이 올 때 가장 공부의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혼침(惽沈)과 도거(掉擧)는 마음이 가라앉거나 들떠서 곤란스러운 것으로서 공부할 때 두 가지의 큰 마장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들뜰 때는 몸이나 마음이나 번뇌가 다 허망한 것이니까 훨훨히 마치 사자분신(獅子奮迅)같이, 사자가 갈기를 떨치고 위용을 부리듯이 다 떨쳐버리는 경안(輕安)이나, 추억하지 않고 다 버리는 행사(行拾)나 또는 마음을 집중하는 정(定)의 3각지로 해서 들뜬 마음을 다스리고, 그 반대로 마음이 침울할 때는 택법(擇法)으로써 보다 더 알맞은 수행법을 철저히 간택하고 정진(精進)도 용맹심으로 더욱 분발하여 정진을 지속해 나가면 법회선열의 경계를 얻게 되는데 이러한 3각지로써 침울한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염각지(念覺支)로 항시 정․혜(定․慧)를 염하여 끊임없어야 합니다. 한량없이 밝은 불성자리를 떠나지 않는 이른바 일상삼매(一相三昧)의 지혜와 그 법성 자리를 비추어 보는 일상삼매를 지속적으로 닦아나가는 일행삼매(一行三昧)의 정(定)을 균등하게 닦으면서 마음을 다스려 나가는 것입니다.

        

아무튼 공부해 나가면서 이 택법, 정진, 희 또는 경안, 념, 정, 행사 등을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서 조절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7각지법은 지관법(止觀法)의 구체적 방법입니다. 지관의 지(止)는 이른바 정(定)에 해당하고 관(觀)은 혜(慧)에 해당합니다. 지관이나 정혜나 또는 일상삼매, 일행삼매나 다 같은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