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청화 큰스님 서적/5. 원통불법의 요체

제4절 인도(印度)의 대승불교(大乘佛敎)

                                                   제4절 인도(印度)의 대승불교(大乘佛敎)


 1.중관파(中觀派)


中觀派… 馬鳴(佛滅後 600年頃․ 起信論著)․龍樹(佛滅後 600~700年頃 中觀論 十二門論․智度論․十住毘婆沙論 等 著)․提姿(3世紀頃․百論著) 等에 依하여 般若空思想이 勃興함.

그 다음은 대승불교를, 대승불교도 전반적인 것이 아니라 주로 인도의 대승불교를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중관파(中觀派)에는 마명(馬鳴 Asvaghosa)․용수(龍樹 Nagarjuna) 제바(提婆 Deva) 등이 있습니다. 마명은 기신론을 저술한 분으로 불멸 후 600년경 나오신 분입니다.

 용수는 조금 뒤인 불멸 후 600년부터 700년경 분입니다. 용수보살은 8종(宗)의 조사(祖師)라고 까지 합니다. 선(禪)이나, 교(敎)나 모든 종파가 거의 비조(鼻祖)로 용수한테다 그 근원을 대는 것이 보통입니다. 용수는 또 용궁에 들어가 화엄경(華嚴經)을 가져왔고 남천축의 철탑을 열고 금강정경(金剛頂經)을 얻었다고 하여 대승불교가 이로부터 발흥하였으므로 후세에서 그를 제 2의 석가라 칭송합니다.


용수가 저술한 책은 주로 중관론(中觀論) 십이문론(十二門論) 또는 지도론(智度論), 지도론은 대지도론 또는 대론(大論)이라고도 하는데 100권입니다. 반야바라밀경의 뜻을 해석하고 정리한 논장 입니다. 다음에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도 중요합니다. 특히 염불하는 사람은 한 번씩 꼭 더듬어 볼만한 것입니다.

용수보살은 십주비바사론에서 여러 가지 법문 가운데 특히 난행문(難行門)과 이행문(易行門) 즉 어렵게 수행하는 문과 쉽게 수행하는 문을 제시하였습니다. 성도(成道)하는 이론도 복잡하고 자기 자신이 오랫동안 애쓰고 용맹정진도 하는 수행법이 난행문이라고 하면 이행문은 믿음으로 해서, 염불에 의해서 쉽게 가는 법입니다.

 다 그렇지는 않다 하더라도 대개 논리적으로 따지는 분별 지혜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순수하게 믿음을 좋아하고 또는 어떤 분은 화두만 참구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데 근기가 차이가 있어서 우리가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마땅히 어려운 문만 있고 쉬운 문이 없으면 불교가 그마만치 옹색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서 용수보살은 자비심, 노파심에서 염불문인 이행도(易行這)를 냈다고 볼 수가 있겠지요.


부처님 법문 가운데는 다 들어있고 또 통달한 도인들이 해설은 미처 못 했다 하더라도 그때 상황 따라서 너무 치우치거나 딱딱하기만 하면 이행문을 내놓고 믿음을 주로 하는 법을 응당 제시를 했던 것입니다.

 
믿음을 주로 하는 것이 굉장히 필요합니다. 지성(知性)적으로는 많이 안다 하더라도 감성(感性)을 무시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정녕 부처님은 바로 생명 자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생명인데, 자기를 비롯한 일체 생명의 근원인 부처가 생명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다만 논리나 또는 지성적인 이치가 아니라 바로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을 생명으로 순수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또 우리 마음은 본래 생명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갖추어 있습니다. 우리 중생은 정도의 차이 뿐이지 누구나 어딘가 가고 싶어 하고 어딘가에 이르고 싶어 하는 향수를 지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본래적으로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가 못되는 한에는 항시 불안스럽고 어떠한 것도 우리 마음을 못 메웁니다. 물질적인, 상대 유한적인 것은 어느 것도 우리 마음을 못 채웁니다. 따라서 우리 중생이 불안한 것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서구의 실존철학(實存哲學)은 주로 불안 의식이 기초가 되어서 나왔습니다. 불안한 마음을 해탈하려는 데서, '계박(繫縛)을 풀고 싶다, 구속을 없애고 싶다.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런데서 이른바 '실존이 무엇인가, 나라는 것은 원래 어떠한 것이고 우주는 어떤 것인가, 우주실상은 무엇인가?' 이런 것을 탐구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실존철학을 한 사람들은  키에르케고르(Kerkegaard1813-1855)나 하이데거(Heidegger,Martin 1889-1976)나 또는 야스퍼스(Jaspers, Karl 1883-1969)나 모두가 대체로 불경(佛經)을 많이 참고로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 글을 보면 불경적인 내용을 상당히 많이 엿볼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불안한 사람들은 법화경을 보아도 불안하고 다 불안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경이고 무엇이고 다 던져 버리고서 마음으로, 생명의 본바탕인, 생명의 본고향인 부처님 자리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네 할머니나 어머니들이나 그분들이 불경을 전혀 모른다 하더라도 하루에 천번 만번 염주만 헤아리는 그런 태도, 그리고 그분들의 행동이나 그 얼굴이나 어디를 보나 자비심이 흐르고 있습니다. 학자보다도 고관들보다도 자비심이 넘쳐 있습니다. 순수한 심성이 그만치 불성 쪽으로 가까워지고 정화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분들은 이치로는 모른다 하더라도 남을 미워할 수가 없고 남한테 듣기 싫은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에 대한 그리운 마음, 부처님을 흠모 추구하는 갈앙심(渴仰心)은 우리 마음을 비약적으로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수행인 에게도 굉장히 필요한 자세인 것입니다.


누구한테 무엇을 베푼다 하더라도 '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베풀어라' '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멘' 그런 태도 같은 것도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독교의 말이기 때문에 그런 건 모두가 미신 같다고 할 것이 아니라 부처님 사상에서 본다면 우리가 참 좋게 이해가 됩니다. 순간 찰나도 부처님(하나님이라 이해할 때)이란 생명자리를 안 떠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염불이란 본뜻도 불이불(不二佛)이라,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니라는 뜻으로 해서 염불하는 것입니다. 부처가 저 밖에 있다고 해서 염불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중생이 모르니까 극락세계를 밖에 설정하는 것이지, 천지 우주가 이대로, 사바세계가 바로 적광토(寂光土)라,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다만 중생이 어두워서 못 보는 것입니다. 또는 불리불(不離佛)이라, 부처와
떠나지 않기 위해서 염불하는 것입니다. 화두나 똑같습니다.

 그런 데에서, 이른바 쉽게 닦아나가는 이행문에서 갈앙심은 논리를 배제한 순수 직관적인 것이지만 우리 마음을 비약시킵니다. 어떤 때나 삼매라 할 때는 비약이 있어야 삼매가 되는 것이지 비약이 안 들어가면 삼매가 못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도 이행문 같은 하나의 신앙형태가 되겠지요. 기독교도 우리가 이해하고 본다면 외도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서나 요한복음서나 또는 누가복음서나 그런 복음서를 부처님의 진여불성 자리에서 관조한다면 옳은 말이 많은 것입니다. 불경도 비유와 상징이 있듯이 기독교도 비유담 상징담이 많이 있습니다마는 그런 비유나 상징의 껍질을, 베일(veil)을 벗기고서 이해할 때는 좋은 가르침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실(如責)하게 인간성이 원래 무엇인가? 우주의 본성이 무엇인가? 그런 것은 별로 말하지 않았기에 참다운 대승법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우리가 지금 불가피하게 기독교와 관계를 해야 하는 시대적 요청을 말하기 위해서 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기독교 인구가 지금 18억이라고 합니다. 18억 인구를 외도라고 해서 우리가 배격하고 서로 피차 싸울 수가 있겠습니까? 마땅히 그들이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자성(自性)을 잘 모르는 정도는 우리가 이끌어 가면서 합리적으로 유도할망정, 바이블(Bible) 한 번도 안 본 사람들이 덮어놓고 배격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이해를 해야 할 것은, 예수(Jesus4 B.C.-A.D. 30)는 30세에 요단(Jordan)강 하반에서 40일 동안 금식 기도 정진을 하여서 하나님과 상통한 사람 아닙니까. 또한 전도 포교한 것은 단 3 년간입니다. 그리고 전도 포교한 대상이 1900여년 이전 사람들인데 현대같이 유식한 사람들이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더욱이 베드로(Petros, Simon)나 그런 사람들이 갈릴리(Galilee) 해안 지방에서 어업에 종사하는 어부가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한테 영원적인 진리를 전도할 때에 고도로 논리적이고 고답적인 말로 할 수가 없고 필연적으로 쉬운 말이나 비유, 상징적인 말이 안 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이해하면서 바이블을 볼 때는 이 분도 틀림없이 견성오도를 하신 분이라고 생각이 든다는 말입니다. 남을 비방하기는 쉬워도 남을 이해하기는 어려운 문제 아닙니까? 가장 불행한 사람은 남의 단점만 보고 가장 행복한 사람은 남의 장점을 봅니다. 장점을 정말로 보다보면 결국은 부처같이 보게 됩니다. 바로 보면은 결국은 다 부처 아닙니까?


제바(提婆)는 3세기경 분으로 용수보살 제자입니다. 백론(百論)을 저술하였습니다. 그 뒤에 중국에서 용수의 중관론(中觀論)과 십이문론(十二門論), 제바의 백론(百論)인 삼론(三論)을 의지해서 삼론종(三論宗)이 성립되었습니다.

 마명이나 용수나 제바 등에 의하여 이른바 반야공(般若空)사상이 발흥하여 대승불법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고 그분들이 공(空)만 역설하고 다른 것은 무시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그 당시는 너무나 유(有)에 집착했기 때문에, 그 당시의 사회상황이나 낮은 수준으로 인해서 석가모니께서 말씀하시고 또는 마명 이전의 모든 도인들이 고구정녕으로 말씀을 하셨겠지 마는 그래도 유병(有病)을 못 버리기 때문에 당시의 시기상응한 법문으로 반야공 사상을 주로 말씀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볼 때나 불교 역사를 볼 때도 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맨 처음에는 유교(有敎)를 주로 하고 그 다음에는 유를 최파(繼破)하기 위해서 공교(空敎)를 위주하고 또 공에 너무 집착할까봐서, 공에 집착하면 그것도 도가 아닌지라 공유(空有)를 종합적으로 지양시켜서 중도교(中道敎)를 창도(唱導) 하였던 것입니다.



  2. 유가파(瑜伽派)


瑜伽派….無着(佛滅後 1000年頃․攝大乘論 瑜伽師地論 等 著)․世親(四․五世紀頃․俱舍論․  十地經論․淨土論 等 著述 千部論師라함.) 이들은 主로 眞空妙有의 瑜伽思想을 鼓吹하였다.

유가파(瑜伽派)라, 유가나 요가(Yoga)나 같은 뜻입니다. 한문자로 해서 유가라고 했을 뿐입니다.


 무착(無着 Asanga) 보살은 불멸 후 1000년경에 나오신 분인데 대승의 모든 원리를 총괄해서 낸 섭대승론(攝大乘論)과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등이 있습니다. 유가사지론은 무착 보살이 미륵보살한테 올라가서 전수 받았다는 말씀도 있고 또는 삼매에 들어서 미륵보살 경계를 발득(發得)해 가지고 저술했다는 말씀도 있으나 우리가 생각할 때는 역시 삼매에 들어서, 깊은 삼매에 들 때는 삼세제불을 다 친견할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깊은 삼매에 들어서, 이른바 미륵보살을 감응(感應)해서 유가사지론을 저술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지요.


용수나 무착이나 세친이나 모두가 보살 지위의 분들이기 때문에 보살이라고 하는 것이 통칭입니다. 또는 용수 대사, 무착 대사, 세친 대사 또는 마명 대사 그와 같이 대사라고도 합니다. 대사도 본래는 역시 보살지위 분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세친(世親 vasubandhu) 보살은 4~5세기경 분으로 무착의 아우입니다. 유명한 구사론(俱舍論)을 냈습니다. 구사론은 근본 불교에 있는 육족론(六足論)이나 또는 발지론(發智論)이나 또는 대비바사론(大毘婆娑論) 등 논장 가운데 중요한 것을 다 포괄해서 냈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 강원 교육도 구사론을 꼭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배우는 데도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십지경론(十地經論)은 화엄경 가운데 십지경을 구체적으로 주석을 한 논입니다. 따라서 보살 초지부터서 보살 십지(十地)까지 올라가 성불하는 법을 아주 세밀하게 차서 있게 다 말씀한 경론 입니다. 그 다음 정토론(淨土論)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등이나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법을 말씀했습니다. 그 외에도 소승 500부 대승 500부의 논서를 저술하였다 하여 천부론사(于部論師)라고 합니다.


중관파(中觀派)는 반야공을 주로 했기 때문에 '용수나 제바나 그런 분들은 공만 알고 다른 진공묘유(眞空妙有)나 중도(中道)는 모르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으로 딱한 사람들은 유(有)라 하면 공(空)을 모르는 것 같이 지적을 하고, 공이라 하면 유를 모르는 것 같이 지적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본바탕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참다운 유는 공도 포함하고 참다운 공은 역시 유를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중관파의 조사들은 다 원융무애하게 하셨겠지 마는 그 뒤에 따라가는 범부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공을 많이 말하므로 '우주의 본체가 공이구나'하고 공에 집착을 해 버립니다. 그러니까 그 뒤에 필연적으로 '다만 공만이 아니고 진공묘유다'하고 역설을 해야겠지요.

 그래서 무착이나 또는 세친 이분들은 진공묘유나 유가사상(瑜伽思想)을 주로 고취하였던 것입니다.


3. 밀교(密敎)


그런가 하면 또 이것저것 다 떠나서, 형이상학적으로 뛰어 넘어서 비밀한 경계만을 좋아하는 부류들 또는 거기에다 인도의 바라문교는 불교가 나왔다고 하더라도 다 손을 든 것은 아니었지요. 그리고 부처님 사상대로 따랐으면은 그렇지 않았을 것인데, 7세기 이후부터는 차츰 불교는 쇠미해져 갑니다. 현대에도 불교가 쇠락한 것은 우리가 잘못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생이 잘못 믿기 때문에, 상을 못 떠났기 때문에, 상만 여의면 바로 안 나갈 수가 없는 것인데 상대 유한적인 세계에 집착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불교가 쇠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간단명료하고 마음도 편하고 몸도 편하고 모두가 다 편한 것인데 세지변총(世智辯聰)으로 자기들의 쥐꼬리만한, 본래 있지도 않은 번뇌 가지고서 자꾸만 분별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유에 집착하고 속인들의 상대적인 것에 집착합니다. 우리는 성자의 법에 대해서 순명(順命)해야 됩니다. 종교란 것은 순명한 자세로 순수하니 성자의 길에 따라야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범부 지혜로 삿된 분별망상을 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갓 상대적인 지식에 불과합니다.


밀교(密敎)란 비밀 불교라는 뜻입니다. 유(有)교나 공(空)교나 중도(中道)교는 주로 우리 중생을 상대로 한 것이기 때문에 나타날, 현자 현교(顯敎)라고 합니다.


 顯敎가 實際로 化身의 身을 나투신 生身의 釋尊과 또는 報身의 阿彌陀佛等을 敎主로 하는데 對하여 密敎는 法身의 大日如來를 敎主로 하며 宇宙를 法身自內證의 境界로 보고, 從來 波羅門敎의 秘法인 탄트리즘(Tantrism) 等을 攝取하여 瑜伽觀行에 應用하는 程度의 雜部密敎로 지내오다가, 七世紀 前後에 大日經․金剛頂經에 依하여 體系가確立됨을 純粹密敎라 한다. 雜部密敎는 西印度에서 純粹密敎는 南印度에서 成立되었다. 이것이 善無畏 三藏, 金剛智 三藏, 不空 三藏等에 依해서 中國에 들어왔고 後에 印度密敎는 俗化되어 金剛乘․時輪敎 等이 되고 그 一部가 티베트로 들어간 것이 라마교의 始初이다.


밀교(密敎)에 대해서 우리가 관심을 좀 가지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사람들이 순수밀교(純粹密敎)를 번역을 하면 좋은데 잡부밀교(雜部密敎)를 번역해서 우리한테 피해를 많이 줍니다. 특히 계율문제에 있어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현대 사회에서 그렇지 않더라도 계율 문제가 문란스러운데, 하물며 잡부밀교 탄트리즘(Tantrism)의 나쁜 점을 유입시킬 때는 굉장히 문제가 많습니다. 따라서 이런 것을 우리가 명심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통달 무애하였기 때문에 형이하학적인 상대유한적인 문제, 형이상학적인 절대적인 문제 등 모두를 다 통해서 모자라는 것이 없으므로 일체종지(一切種智)라고 합니다만 그러나 일반 중생들은 형이상학적인 즉 형체를 초월한 문제는 안보이니까 모양 있는 상에 걸려 버립니다. 따라서 복잡한 것을 믿기 싫어하고 자연적으로, 비밀스럽고 성취가 빠르고 또는 공덕이 많아지고 신통이 빨리 나온다는 그런 것에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부처님 사상 가운데서 불교의 형이상학적인 비밀스러운 대문과 바라문교의 그런 대문이 융합되어서 밀교가 되었습니다.


현교(顯敎)는 석존이 교주고 정토교는 보신불인 아미타불을 교주로 하고 밀교는 대일여래를 교주로 합니다. 법신, 보신, 화신도 뒤에 설명을 또 하겠습니다마는 사실은 화신 따로 있고 보신 따로 있고 법신 따로 있지가 않습니다. 삼신(三身)이 일불(一佛)인 것입니다.

 
기독교도 성부(聖父), 성령(聖靈:聖神) 또는 성자(聖子)가 삼위일체(三位-體)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런 것을 보더라도 기독교가 뭐라 해도 부처님 사상을 그대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확인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예수가 인도에 가서 공부했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마는 아무튼 쇼펜하우어(Schopen-hauer,Arthur 1788-1860)도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석가모니가 가신 뒤 200~300년 뒤에 나온 아쇼카왕(Asoka阿育王B.C.2世紀)때, 인도를 통일하고 이스라엘 지방보다도 더 먼 이집트 지방까지도 불교를 포교했는데, 그 당시에 예수가 탄생한 이스라엘지방까지 포교사가 안 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갔다고 안 볼 수 없기 때문에 지금 기독교와 유태교와의 유사성보다도 기독교와 불교가 더 가깝다는 것입니다 .쇼펜하우어 말입니다.


역시 쇼펜하우어나 니이체(Nietzsche 1844-1900)같은 분들은 성인이라고는 못하더라도 대 천재입니다. 대 천재란 마음의 정도가 순화가 되어서 영원적인 불성(佛性)과 가까워졌다고 불 수 있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천재론에서 규명했습니다. '천재란 것은 영원적인 생명을 음미해야 천재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자기 본인이 정말로 영원적인 진여불성과 하나가 되었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그 분들 말은 참고가 될 만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부터 불교가 이스라엘 지방이나 그런 지방에도 유포가 되었고 따라서 예수가 구태여 인도까지 안 왔다 하더라도, 예수가 요한한테 세례를 받았지만 요한도 역시 불교를 배운 분이라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아무튼 지금 예수 이후의 기독교는,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유태교보다도 훨씬 더 우리 불교에 가까운 대문이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은 천지 우주의 진리 자체이니 예수가 말하는 주님이요 하느님이니까, 예수는 부처님의 제자라고 보는 것도 온당한 해석이 되겠지요.

 그런데 밀교는 대일여래(大日如來)를 교주로 합니다. 대일여래는 바로 우주의 생명을 말합니다. 우주를 법신자내증(法身自內證)의 경계로 합니다. 그래서 우주 자체가 바로 법신의 자기 경계인 것입니다. 우주가 자기 몸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타성일편(打成一片)해서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하나의 실상적인 불신(佛身)으로 해결을 해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이 개운합니다. 우리가 섣부른 견해에 얽매어 의심이 치성하면 공부가 잘 안 되는 것입니다. 마땅히 다 제법공상(諸法空相)으로 해결을 하고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 조그만한 티끌 가운데도 시방세계가 다 들어 있고, 모탄거해(毛呑巨海)라, 털끝 가운데도 사해(四海)가 들어 있는 도리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이와 같이 광대무변함과 동시에 무차별 평등으로 다 청정무비한 진여불성이요, 바로 청정법신(淸淨法身)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주라 하더라도 내나야 법신자내증의 경계로 바로 법신의 몸인 것입니다. 이렇게 느끼는 것이 밀교인데 다만, 순수밀교(純粹密敎)가 못되고 잡부밀교(雜部密敎)로 될 때는 다분히 문란스럽고 요사스런 것들이 개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파계(破戒)도 본래로 보아서는 없는 것이며 남을 죽이는 것도 본래로 봐서는 없는 것이요, 하나의 상에 불과하겠지요. 그러나 불교는 본래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도 중요합니다. 현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현상이 현상적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진여불성의 화현(化現)이기 때문에 진여불성이 그대로 현상이 되었습니다. 진여불성이 연기(緣起)적으로 나무가 되고 풀이되면 나무나 풀로 굳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무나 풀 그대로 바로 진여불성인 것입니다.


 따라서, 나무나 풀이 바로 진여불성이기 때문에 우주의 법칙대로 진행되어 갑니다. 우주의 법칙대로 서로서로 침범하지 않고 서로 화해합니다. 그러나 유정(有情)세계에서 우리 인간들이 그런 법칙을 잘 안 따릅니다. 인간이 법칙을 따르면, 나와 남이 둘이 아니거니 남한테 욕을 함부로 하겠습니까? 남을 죽이겠습니까? 자기만 부자가 되겠습니까? 함부로 남의 권리를 침범하겠습니까? 이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법신자리를 분명히 중요시 할 때는 법신의 도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바로윤리고 도덕인 것입니다. 앞으로 불성계(佛性戒)에서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마는 계율이란 바로 법신에서 나왔습니다. 법신이 평등하고 일체공덕을 갖춘 것이기 때문에 법신에 걸맞는 행동인, 신(身)․구(口)․의(意) 삼업(三業)이 바로 계율에 맞는 것입니다.


밀교는 종래의 바라문교의 비법(秘法)인 탄트리즘을 섭취하였습니다. 요즈음 탄트라로 번역된 것도 많이 있는데 이른바 밀교적인 비법을 탄트리즘이라 합니다.

 또 유가관행(瑜伽觀行)이란 요가스트라(Yoga stura)에서 하는 관법으로서 차크라(chakra)를 발기 시키는 비법이 유가관행에서 나온 것입니다. 차크라가 열리면 마음이 열린다는 것도 거짓말이 아니라 좋은 쪽으로 참고 할 수가 있습니다.

 
다만 그것만이 옳고 부처님 말씀의 다른 것들은 별것이 아니라고 하면 문제가 크지 않겠습니까마는 미련한 사람들은 참 딱합니다. 꼭 자기가 하는 것만 옳다고 생각합니다. 아집(我執) 법집(法執)입니다. 아집 법집을 떠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모든 문제를 진여불성 자리에서 조명하기 때문에 법집이나 아집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탄트리즘을 섭취해서 유가관행에 응용하는 정도의 잡부밀교로 지내오다가 7세기경 전후에 대일경(大日經) 금강정경(金剛頂經)에 의하여 순수밀교로 체계가 확립되었습니다. 순수밀교의 소의(所依) 경전은 대일경과 금강정경입니다. 그러나 잡부밀교는 의궤(儀軌)라고 해서 대일경과 금강정경에 의지해서 일반 중생들의 행동규범이라든가 수행 규범을 지었다고 하는데 그런 의궤 가운데는 굉장히 이상야릇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의궤는 우리가 가감해야 합니다. 좋은 것도 많이 있지만 또 이상한 아주 문란스러운 것이 많이 있습니다.


 잡부밀교는 서인도 지방에서, 순수밀교는 남인도에서 성립 되었습니다. 이것이 선무외(善無畏 637-735) 삼장(三藏), 금강지(金剛智 671-741) 삼장, 불공(不空 705-774) 삼장 등에 의해서 중국으로 들어왔습니다. 선무외 삼장은 왕자를 그만두고 승려가 된 굉장히 위대한 분입니다. 선무외의 아버지인 부왕은 선무외가 형들보다 똑똑하고 총명하여서 12세 때 왕위에 오르게 하니까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 형이 도당을 거느리고서 반역을 했습니다. 선무외는 어린 나이지마는 하도 총명하고 비범한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양보하면 좋으나 저 나쁜 근성을 고쳐야겠다'하고 싸워서 형님을 정복한 다음에는 그냥 선선히 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입산해서 승려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위대한 분입니다.


그리고 선무외․ 금강지․ 불공삼장 이분들은 밀교에는 비밀스러운 행법이 많기 때문에 신통자재(神通自在)하여서 인도에서 이적(異蹟)을 많이 부렸습니다. 밀교한 스승들은 특히 신통에다 관심을 많이 두기 때문에 이적을 많이 부리는 것입니다. 뒤에 인도 밀교는 속화되어서 금강승(金剛乘) 또는 시륜교(時輪敎)등이 되고 그 일부가 티베트로 들어간 것이 라마교(Bla-
ma敎)의 시초입니다.

 지금 한국에서 번역되어 있는 밀교는 대체로 잡부밀교 즉 금강승이나 시륜교 이런 쪽에 많이 있습니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번역되어 젊은층의 환영도 받은 라즈니쉬 같은 분도 역시 잡부밀교와 힌두교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 법은 삽삼조사(卅三祖師)가 그대로 증명한 법 아닙니까? 마땅히 우리는 엄정한 마음으로써 조금도 어긋나지 말아야 합니다. 부처님 계율은 불성계(佛性戒)라 하여 진여불성을, 인간이나 우주의 본성 자리를, 우리 신․구․의 삼업으로 여법히 행동하는 것이 계율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밀교를 보더라도 선무외삼장, 금강지삼장, 불공삼장 등에 의한 순수밀교를 참고해야 합니다. 밀교가 일본으로 가서 진언종(眞言宗)이 되었습니다. 진언종은 순수밀교입니다. 순수밀교는 굉장히 계율이 청정합니다. 따라서 이런 것을 생각하여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어야겠습니다.

 
어느 분야에 있어서나 역사적인 고찰이 지극히 중요합니다. 역사성을 무시하면 법집을 할 염려가 많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대승 소승의 문제라든가, 근본불교 대승불교 문제 같은 것도 역사적으로 관찰함으로써, 좋은 점은 좋은 점대로 살리고 부정적인 것은 버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밀교도 그 당시에 필요에 의해서, 중생들이 요청해서 나온 것이고, 또는 그 당시에 중생들이 부처님 법을 여법히 못 따랐기 때문에 나올 수도 있는 것이고 아무튼, 역사를 훑어 볼 때는 그 당시 사람들의 수준 따라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를 바로 보아야만 현대에 다시 오류를 범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오류를 범했던 것은 과감히 척결해 나가는 것이 수행자의 본의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런 것을 미처 못 버리기 때문에 현대에 와서 개인적으로 공부도 안 되고 또한 여러 가지 물의를 많이 일으키는 것입니다.



  4. 북방불교(北方佛敎)와 남방불교(南方佛敎)


 北方佛敎…大乘佛敎…北印度․西藏(티베트)․中國․韓國․日本.

 南方佛敎…小乘締敎(上座部 Theravada)…스리랑카․버어마․캄보디아․라오스․태국 等池에 流布된 佛敎로서 主로 分別上座部에서 發展되었으며 이를 巴利佛敎라고도 한다.


 북방불교는 순대승(純大乘)불교라고도 말합니다. 중국에도 구사론 등 소승적인 경론을 공부하는 파들이 많이 있지만 그것은 참고하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지 소승적인 종파를 세우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므로 중국에는 소승적인 종파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북인도, 티베트, 중국, 한국, 일본에 유입된 불교를 가리켜서 순대승불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남방불교는 상좌부(上座部 Theravada)불교로서 스리랑카, 버마,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 등으로서 주로 분별상좌부(分別上座部)에서 발전되었으며 이를 이른바 파리불교(巴利佛敎)라고도 합니다. 또한 대승불교에서는 소승적이라 하여 소승불교(小乘佛敎)로 부르고 있습니다. 파리어(巴利語) 경전은 이렇게 해서 나온 것입니다. 중국불교는 보다 발전적인 대승불교니까 인도 불교는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고찰을 함으로 해서 올바른 비판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