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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청화 큰스님 서적/5. 원통불법의 요체

제 4장 수행(修行)의 조도(助道) -제 1절 계율론(戒律論)

제4장  수행(修行)의 조도(助道)



 제1절 계율론(戒律論)


 다음은 계율론(戒律論)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다시 말할 것도 없고 중국 당나라 때 불교가 융성할 때에 백장(百丈720~814) 스님 시대 이전에는 선객(禪客)들이 보통 율원(律院)에서 지냈다고 합니다. 즉 율원에 선방(禪房)이 있었다고 할 정도로 선(禪)과 계율과는 굉장히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중국이나 한국이나 일본이나 대승권에서는 상당히 계율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깊은 삼매에 들어야 때 묻지 않은 무루지(無漏智)가 나오는 것인데 무루지를 얻으려고 할 때에는 삼매에 들어야 하고 삼매에 들려면 계율이 청정하지 않으면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경 율론 삼장(三藏)에 계율에 대하여 극명하게 밝히고 있는 뜻을 깊이 새겨야합니다. 우리 중생이 출가사문이나 재가불자나 성불하기 위해서 꼭 지켜야 할 필수적인 규범이 계율입니다. 따라서 계율은 꼭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재가불자들은 지키기가 어려운 것이니까 지킬 덕목을 좀 적게 하신 것이지 지키지 말라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재가 불자들도 '내가 꼭 성불을 해야겠다. 내가 견성을 해야겠다'고 생각할 때에는 우리 출가사문과 똑같이 계율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뜻으로 이른바 육재일(六齋日)이 있고 이런 육재일 날은 재가불자들도 꼭 출가수행자와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내외간에도 재일(齋日)에는 성관계도 금하고, 공양도 낮에 한 때만 먹고, 고기도 먹지 말고, 이와 같이 육재일 동안만은 출가사문같이 하다가, 죽을 임시만 되면 정말로 출가사문같이 꼭 다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인데 요사이 세상이 문란스럽기 때문에 지금, 육재일 날 지키는 재가불자가 얼마나 있습니까?


 제법이 본래 공(空)한 도리에서만 본다면 선도 없고 악도 없고 나도 없고 너도 없고 본래가 일미평등(一味平等)하니 무엇이 따로 있겠습니까마는 생사윤회 하는 속물이 되지 않고 성불해야 한다고 할 때에는 준엄하게 규범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공자나 또는 마호멧트(Mahomet)나 모든 성자들도 함부로 방종해도 좋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불가에서 출가(出家)가 있지 않습니까? 만일 함부로 해도 좋다고 하면 무슨 필요로 출가가 있겠습니까? 또한 신부나 수녀가 무엇 때문에 있겠습니까?


 1. 계(戒) 의 위상(位相)

 戒律…尸羅(Sila):身心의 過를 防禁하는 것. 淸凉이라 譯함.


 계율은 시라(尸羅:Sila)인데 몸과 마음의 허물을 방지하고 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량(淸凉)이라고 번역합니다. 저는 우리 스님 네와 제 자신에 대해서도 경책하는 의미에서 계율을 역설하게 되는 것입니다. 몇 십년 동안 출가 생활을 해왔어도 계율을 지키기가 어려운 것이니까, 그렇게 더욱 사무치게 느끼는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계율을 온전히 100% 지켰다면 이미 삼명육통(三明六通)을 충분히 통달했을 것입니다.


-切衆生 初入三寶海 以信爲本 住在佛家 以戒爲本  -瓔珞本業經-


우리는 지금, 재가불자나 출가불자나 삼보(三實)의 바다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제는 마땅히 신앙심을 근본으로 하고 불가(佛家)에서 머물고 산다면 마땅히 계율을 근본으로 하여야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꼭 율장을 다 배우고 암송을 하였습니다. 율장에도 사분율(四分律), 오분율(五分律), 십송율(十誦律)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 등 그런 율법이 갖추어 있습니다. 우리승가에서는 율장을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인데 요즈음은 율을 별로 공부를 안 합니다만 자기 스스로라도 꼭 율법을 공부해야 합니다. 저는 율법을 많이 공부한 사람은 아닙니다마는 대강 윤곽은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율법 공부를 안 한 분들을 위해서 이렇게 귀중한 시간이지만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1) 계(戒)의 사위(四位)와 사과(四科)


 戒의 四位…五戒․ 八戒․ 十戒․ 具足戒(比丘:250戒, 比丘尼: 348戒)

※이는 在家戒와 小乘戒의 分相임


 계를 지키는 네 가지 위상이 있습니다. 다섯 가지 계인 오계(五戒)는 재가계(在家戒) 이고 또 팔계(八戒)도 재가계 입니다.

 그러나 십계(十戒: 十善戒는 在家戒)나 구족계(具足戒)는 출가사문의 계입니다. 구족계는 모두를 다 갖춘 계로써 비구계가 250계요, 비구니가 받는 계는 348계입니다. 비구니들은 비구에 대해서 의지가 비교적 여리고 인정이 너무 많아서 정에 끌리기 쉽기 때문에 인정을 막아주는 의미에서 비구보다 계율이 많습니다. 여인들의 몸으로서 출가했다는 것은 지극히 무서운 결의가 있고 장한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는 소승계의 분상입니다. 이와 같이 오계 팔계 십계 구족계를 계의 4위(四位) 라고 합니다.


 戒의 四科…戒法․戒體․戒行․戒相


다음에는 계의 사과(四科)입니다.

계율의 내용적인 구분을 네 과목으로 나누어 계법(戒法) 계체(戒體) 계행(戒行) 계상(戒相)의 사과(四科)라 합니다.

 계법(戒法)이란 어떻게 계를 받는가 하는 계를 받는 의식입니다.


 다음에 계체(戒體)란, 살생(殺生)하지 말라, 투도(偸盜)하지 말라, 또는 사음(邪淫)하지 말라, 또는 망언(妄言)하지 말라, 또는 술 먹지 말라, 하는 계율을 연비를 하고 받을 때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마음에 뜨거운 맹세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업장이 무거운 사람들은 그 맹세가 쉽게 흐려져 버립니다만 보통은 한번 계를 받으면 이러한 계를 받았다 하는 맹세하는 흔적이 형식으로서는 안 보인다 하더라도 자기 마음에 자라하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 잠재의식에다 종자를 심는다는 말입니다.


 취한(醉漢) 바라문 이야기가 있습니다. (智度論十三) 한 바라문이 술에 취해 가지고서도 석가모니 부처님이 위대하기 때문에 계를 받고 출가사문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고서 세존한테 와서 사정해서 계를 받았습니다. 아난존자는 술 취한 바라문에게 부처님께서 계를 주신다고 하니까 불평이 있었는데, 그 술취한 바라문이 하룻밤 자고는 그 이튿날 술이 깨니까 나가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아난존자가 부처님에게 "세존께서는 왜 지키지도 못하고 하룻밤 자고 가버릴 바라문한테 계를 주셨습니까" 하고 말씀을 드리니까 부처님 말씀이 "담복화(薝蔔花)는 시든다 하더라도 여느 꽃보다도 더 향기로운 것이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자의 말씀은 성품도 현상도 다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담복화라는 꽃은 치자꽃 종류인데 향내가 진동하는 꽃이라고 합니다. 그런 담복화는 시든다 하더라도 여느 꽃 보다 더 향기롭다는 말씀은, 한번 계를 받으면 비록 형식적인 계행은 못 지킨다 하더라도 계체(戒體)인, 계를 받았다 하는 종자는 잠재의식 가운데 심어 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연이 도래하면 다시 자라나 꽃피게 되는 것입니다.


 계행(戒行)은 이것은 계체에 따라서 행동에 옮기는 행위입니다. 계행이야 우리 출가사문들은 250계를 받았지만 그대로 다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율사가 된 분도 그대로 지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계체 따라서 우리가 애써서 그대로 지켜 행하는 것이 계행입니다.


 계상(戒相)은 겉으로, 형식으로 나타나 보이는 계행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계의 사과(四科)를 다 갖추어야 하겠지요. 계법도 알아야 하고, 계체는 설사 파계(破契)한다하더라도 분명히 남아있는 것입니다. 계를 한번 받은 분들은 취한 바라문처럼 금생에는 잘못 지킨다 하더라도 다시 어느 생인가는 숙선개발(宿善開發)할 때에, 숙세에 지은 선근이 개발할 때에는 꼭 출가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출가한 것도 금생만의 공덕으로 출가한 것이 아니라 다생겁래(多生劫來)의 선근공덕(善根功德)입니다. 순치황제 출가시(順治皇帝出家詩)에 '석년루대중근기(昔年累代重根基)'라, 과거 전생 무량세 동안에 닦아온 선근이 쌓이고 쌓여서 이렇게 출가사문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수하고 있는 법의(法衣)는 청정복(淸淨服)이라, 청정한 계율을 지키라는 의복이요 자비복(慈悲服)이라, 일체 중생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의복입니다.


 2) 지계(持戒)의 옹호(擁護)


 三歸戒와 三十六部 神王

 佛語梵志 是三十六部神王 此諸善神 凡有萬億恒河沙鬼神 以爲眷屬陰相番代 以謢善男子善女人等 受三歸者          - 不屑灌頂經 -


 그 다음에 삼귀계(三歸戒)와 삼십육부신왕(三十六部神王)이라. 부처님께서 범지(梵志:波羅門)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삼십육부신왕의 모든 선신들이 만억항하사 귀신들을 자기 권속으로 가지고 있어서 안 보이게 서로 교대하여 삼귀의 계를 받은 선남자와 선여인들을 지키느니라' 하시었습니다. 부처에게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고 승에 귀의한, 삼보에 귀의한 분들을 지킨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삼귀계를 받으면 그저 '우리 마음도 몸도 맑아지고 나중에 성불이 되겠지' 이런 정도의 것이 아닙니다. 불보에 12신장(神將), 법보에 12신장, 또는 승보에 12신장 이와 같은 36부신왕들과 신장들이, 중생들이 안 보이는 가운데 서로 교대해서 삼귀계를 받은 선남자 선여인을 수호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지금 수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 곁에는 지금 호법신장이 다 수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를 못 지키면 떠나버립니다. 우리가 아픈 병도 낫고 또는 불사할 때에 잘 풀리기도 하는 것도 모두가 다 우리 사람 힘뿐만이 아닙니다. 불보살과 선신이 지켜서 그러는 것입니다.


 五戒와 二十五善神…一戒에 五善神 合하여 二十五善神이 五戒를 受持한 者를 恒時 擁護함.

                                                        -佛說灌經 -


 5계(五戒)를 받으면 살생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삿된 음행을 하지 말라, 거짓말 등을 하지 말라, 술먹지 말라 하는 5계의 하나의 계마다 다섯 선신(善神)이, 합하여 25 선신이 5계를 수지한 자를 항시 옹호한다고 합니다. 불설관경(佛說灌經)에 있습니다. 다른 경에도 이러한 말씀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삼귀오계를 잘 지킨다 하는 것이 얼마만치 공덕이 큰 것인가를 깊이 느껴야 합니다.


 3) 소승계(小乖戒)와 대승계(大乘戒)․ 삼취정계(三聚淨戒)


 小乖戒…十戒․具足戒(比丘: 250戒, 比丘尼: 348戒)


 小乖戒에는 십계(十戒), 구족계(具足戒)가 있습니다. 10계에는 사미십계(沙彌十戒)와 사미니십계(沙彌尼十戒)가 있고 구족계는 비구 250계, 비구니 348계입니다. 우리가 다 못 지킨다 하더라도 257계의 계상 정도는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분들이 아무렇게나 행동할 때, '부처님 계율에 그래서는 안 되는데' 하고 바른 충고도 할 수 있고 스스로도 한결 경건해지는 슬기도 생기는 것입니다.


 大乘戒…十重四十八輕戒․三聚戒(三聚淨戒)


 대승계는 십중사십팔경계(十重四十八輕戒)라, 지금은 보통계를 받을 때에 십중사십팔경계를 받고서 말아버리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금구직설(金口直說)이라, 거짓말이 아닌 진실한 말씀이기 때문에 250계 등의 다른 계율도 꼭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가운데는 인도에는 있고 우리 한국에서나 중국에서는 필요 없는 것도 없잖아 있습니다. 그런 사소한 것은 별문제가 아니겠지요. 그러나 사소한 것도 그 당시에는 꼭 성불에 필요하기 때문에 재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三聚淨戒…攝律儀戒․攝善法戒․攝衆生戒


 大乘小乘의 온갖 戒法이 다 이 가운데 包攝되며 그 戒法이 본래 淸淨하므로 淨戒라 함. 五․八․十․具等의 別解脫戒는 三聚淨戒中의 攝律義戒의 一部分임.

 삼취계(三聚戒)는 삼취정계(三聚淨戒)라고도 합니다. 삼취정계는 부처님 계율 모두를 다 통틀어서 통합한 것입니다.

 섭율의계(攝律義戒)는 십계나 오계나 출가계나 재가계 등 모든 계를 다 포함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섭선법계(攝善法戒)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선한 행동을 취하는 것입니다. 계율에 없다 하더라도 보살심(菩薩心)을 내어가지고 6바라밀을 지키는 육도만행(六度萬行)도 여기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섭중생계(攝衆生戒)도 역시 적극적으로 우리가 중생을 위해서 베푼다는 말입니다. 보시(布施) 등 모든 섭법(攝法)이 섭중생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삼취정계는 대승 소승의 온갖 계법이 다 이 가운데 속하며, 그 계법이 본래 청정하므로 정계(淨戒)라고 합니다. 5계나 8계나 또는 17계나 구족계 등을 별해탈계(別解脫戒)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라' 등 여러 종류로 경계하는 말씀이기 때문에 별해탈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별해탈계는 삼취정계 중의 섭율의계의 일부분입니다.


 在家戒…五戒․八戒(八齋戒 또는 八關戒)․十善戒


 재가계는 앞서도 나와 있는 5계․8계․십선계(十善戒)입니다만 8계는 팔재계 또는 팔관계라고 합니다. 따라서 육재일(六齋日)날 꼭 재를 지켜야 합니다. 재(齋)는 오전에 한 끼만 먹는 것입니다. 음식이 얼마만치 공부에 장애가 있는가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절실히 느낄 것입니다. 오후불식(午後不食)도 하고 일종(또는 日中:一日一食)을 하는 분들은 맨 처음에는 탈기가 되기도 합니다만 나중에 두 끼나 세 끼나 간식을 한다면 몸이 무거워서 공부에 장애를 느낍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조금도 헛말씀이 없습니다. 삼세재불이 다 한결같이 일종〔一日一食〕 위주이셨습니다. 출가 수행자는 원칙적으로 부처님에게 재 한번 올리고서 한 때만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는 과학 문명 시대요 공해 시대이기 때문에 한 끼 먹고 공부를 하려면 힘이 좀 겹겠지요. 그래서 아침에 죽도 먹고 또 오후에는 먹어도 약석(藥石)으로 먹는 것이니까 갖추갖추 먹으려는 생각은 절대로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십선계는 몸으로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불사음(不邪淫) 입으로 불망어(不妄語)․불양설(不兩舌)․ 불악구(不惡口)․불기어(不綺語) 뜻으로 불탐욕(不貪慾)․불진에(不嗔恚)․불사견(不邪見) 등입니다.


 4) 별수계(別受戒)와 통수계(通受戒) , 수계의식(受戒儀式)


 別受戒…五戒․十戒․具足戒 等의 別解說戒(波羅提木叉:Pratimoksa)는 受戒作法에 依하여 스승으로부터 받음.


 별수계(別受戒)라는 말은 5계나 10계나 구족계 등의 별해탈계 이른바 바라제목차(pratimoksa)는 수계작법(受戒作法)에 의하여 스승으로부터서 받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계를 받을 때에는 자서수계(自誓受戒)라, 부처님 앞에서 자기 스스로 목욕재계하여 청정한 몸으로 참회하고 맹세하여 받는 것을 자서수계라 하고, 별수계는 꼭 스승한테 수계법식 따라서 받는 계율입니다.


 따라서 5계나 10계나 구족계나 이런 별해탈계는 꼭 스승한테 작법에 따라서 받으나 8계는 스승이 없더라도 자기 스스로 부처님께 맹세하고 받는 것입니다. 가사, 재가 불자들이 법당에 들어가서 부처님께 참회하고 맹세해도 되는 것입니다. 다만 계를 받을 때에 정말로 참회한다면 몸이 쩌르르하면서 맑은 기운이 자기 몸과 마음에 엄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참회법에 보면 하품 참회(下品懺悔)는 온 몸에 땀이 나고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과거 전생부터서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던가? 금생에 계율을 잘못 지킨다면 모두가 다 과거 전생에 못 지어서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하품참회만 되어도 몸에서 땀이 나고 눈에서는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중품(中品) 참회는 온 몸에서는 견디기 어려운 뜨거운 열과 땀이 솟구쳐 나오고 눈에서는 피눈물이 비 오듯 쏟아져 내리는 것이고 상품(上品) 참회는 온 몸의 털구멍에서 피가 튀쳐 나오고 눈에서도 피가 쏟아져 나온다고 합니다.


 따라서, 계를 받을 때에 적어도 하품 참회 정도는 되어야 계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된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재가 불자들도 계를 받을 때에 부처님 앞에 참회하고 이런 증상을 발득(發得)하는 것이 필요하며 비구계나 비구니계를 받을 때는 미리 사흘이나 칠일이나 참회 기도를 하고 정진하는 것입니다. 참선하는 분들은 용맹정진을 해서 그야말로 상품참회 정도로 사무치게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참회할 때에는 두 가지 참회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무생참회(無生懺悔)라, 출가불자는 마땅히 불생불멸의 불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무생참회란 ‘죄도 없고 너 나도 없고, 내가 없거니 어떻게 죄가 있겠는가’ 선악시비 자타를 다 초월한 자리에다가 마음을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작법참회(作法懺悔)라, 현상적인 의미에서는 또 분명히 우리가 죄를 범했는데 생각만 ‘죄의 자성이 없거니’ 하는 것이지 자기 몸뚱이는 그렇게 말을 안 듣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몸뚱이, 말 안 듣는 그 놈까지를 다스려 버리려면 작법 참회까지 곁들여야 합니다. 그것은 연비도 하고, 손가락도 불에 태우며 이 몸뚱이를 돌보지 않으며 천배(千拜)고 만배(萬拜)고 절도하며 참회하는 것입니다. 손가락을 태우고 몸을 태우는 것이 꼭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나 하여튼 그런 고행도 갸륵하고 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通受戒…十重四十八輕戒․三聚淨戒․出家․在家가 다 通해서 받으므로 通受戒라 함.


 그 다음에 통수계(通受戒)는 재가나 출가나 같이 통해서 받는 계이기 때문에 통수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통수계는 십중금사십팔경계(十重四十八輕戒)이른바 보살계와 삼취정계가 통수계에 해당합니다.


 또한 승가에서는 포살(布薩)을 원칙적으로 한 달에 두 번씩 보름마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포살은 뜻이 정주(淨住)라, 청정계율에 머물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업장의 몸이기 때문에 씻으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출가사문이 어느 누구가 애를 안 쓰는 분이 있습니까?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그때그때 참회도 하고, 더러는 더 사무치면 '이 몸뚱이 차라리 없애버려야겠구나' 이렇게 생각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잘 안됩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막아주기 위해서 이른바 포살일이 있는 것입니다. 이때는 주로 십중금사십팔경계의 계상(戒相)을 법사가 일일이 대중들한테 묻는 것입니다. "대덕들께서 이 계에 대해서 어긋남이 없습니까?" 물으면 없는 사람들은 아무 말도 않지마는 자기가 참회할 것이 있으면 있다고 말을 하고 참회를'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포살한다면 우리가 포살법 때문에 두려워서 함부로 행동을 못할 것이고, 한 번씩 경과할 때마다 새로운 다짐과 맹세를 하게 될 것입니다.


 受戒儀式…스승에 依支해서 받는 從他得과 스스로 佛前에서 善心으로 自誓하여 받는 自誓得이 있음.


그 다음 수계 의식(受戒儀式)입니다. 수계 의식에는 스승에 의지해서 받는 종타득(從池得)과 또는 스스로 불전에서 선심(善心)으로 자서(自誓)하며, 참회하고 받는 자서득(自誓得)의 두 가지 의식이 있습니다.


  2. 계(戒)의 체성(體性)


 1) 성계(性戒)와 차계(遮戒)


 性戒와 遮戒…性戒는 殺生․愉盜․邪淫․ 妄語의 四重戒를 말하며 佛制가 아니라도 저절로 罪惡이 되는 戒임. 遮戒는 性戒以外의 戒律을 말함.


 계에는 성계( 性戒)와 차계(遮戒)가 있습니다. 성계는 계 자체가 악성(惡性)이라는 말입니다. 가사 담배를 피운다던가 술을 먹는다든가 그런 종류는 계 자체가 원래 나쁜 것은 아닌 것이고 다만 많이 먹어서 나쁜 것입니다. 담배도 어떠한 때 한번 피웠다 하더라도 그것이 별로 나쁜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인이 박혀서 중독이 되면 그것은 나빠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차계(遮戒)라고 합니다. 또 대중과 같이 있는데 목욕도 않고 냄새가 역겹게 풍긴다면 이것도 그 자체가 악은 아니겠지만 대중한테 피해를 끼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계는, 살생한다면 생명을 죽이는 그 자체가 악(惡)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설사 말씀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벌써 다른 생명을 해친다면 가령, 어릴적에 개구리를 많이 잡는다거나 또는 낚시를 많이 한다면 내생까지 안 가도 금생에 꼭 과보를 받습니다. 악보(惡報)를 받습니다. 재가 불자들을 제도할 때에 우리는 그런 것을 항시 말씀을 하여야 합니다.


또, 고기를 많이 먹는다면 '요즈음은 공해가 심하니까 단백질을 많이 섭취해야 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운동선수 같은 사람들은 힘을 많이 쓸려니까 많이 먹어야 할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해서 그때그때 너무 관용을 많이 해버립니다. 그러나 고기를 많이 먹는 것도 역시 살생하고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살생을 했으니 고기를 먹는 것이지 살생 안하면 고기를 먹을 수 있겠습니까? 살생하는 어려운 일은 남한테 시키고 자기는 그냥 열매만 따먹는 그야말로 이기심까지 곁들어서 용납할 수가 없겠지요. 그런 살생이나 또는 도둑질이나 그 성품 자체가 죄입니다.


 불교가 아니더라도 도둑질은 악(惡)이 아니요 죄 아닙니까? 옛날 고대에는 남의 것을 훔치면 그냥 팔을 몽땅 잘라버렸습니다. 그렇게 엄하게 외연적(外緣的)으로도 제재를 가했던 것입니다. 죽은 다음에도 살생하거나 훔치거나 꼭 나쁜 벌을 받는 것입니다.


 또는 사음(邪淫)도 자체가 죄입니다. 삿된 음행을 한다면 자기 몸이나 남의 몸도 결국 오염시키는 것입니다. 또는 순결한 마음을 오염시키는 것입니다. 재가 불자들은 배필이 있으니까, 상대적으로 재가 불자들이니까 죄가 안 되는 것이지 부처님 사상으로 본다면 그것도 한 가지 욕심이고 음욕이기 때문에 죄라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관용을 베풀어서, 재가 불자처지에서는 음행을 완전히 금할 수는 없는 것이고 사음만 안 해야 한다고 한 것이지 음행 자체는 벌써 허물이라는 말입니다. 음행의 허물로 해서 우리가 생사 인연을 짓는 것입니다.


 쇼펜하우어 책 가운데에 감명 깊게 남는 말이 있습니다. '천상이 있는가 없는가 나는 모른다. 천상이 있다면 천상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 그는 속인이면서도 평생 동안 독신으로 지낸 분입니다. 저는 그런 위대한 사람들을 많이 헤아려 봅니다. 칸트나 니이체나 쇼펜하우어나 음악가로 베에토벤이나 슈베르트나 또는 조각가로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드로다빈치나 말입니다. 그 분들은 다 독신으로 지냈습니다. 물론 어떻게 지냈던가 개인적 사생활은 알 수가 없습니다마는 아무튼, 그들의 뜨거운 이상과 소신을 위하여 모든 애욕이나 욕망을 다 바친 사람들입니다.


 또는 망어(妄語)라, 거짓말도 역시 자체가 벌써 죄라는 말입니다. 다만 마음 가운데 무겁고 가볍고의 차이만 있습니다. 보통 거짓말은 가벼운 거짓말이지마는 대망어(大妄語)는 4바라이(四波羅夷)죄에 해당합니다. 자기가 진리를 미처 못 깨닫고 깨달았다 하고 못 증(證)하고 증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공부인들이 그야말로 준엄하게 자기 점검을 해야 합니다. 깨닫지도 못하고서 깨달았다고 하고 또는 도인이 아니면서 도인인척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반성해 보면 알 일입니다. 나한테 욕심이 있는가 없는가? 나한테 진심(瞋心)이 남아있는가 안 남아 있는가? 우선 대망언은 자기 양심을 속이는 것이고 성자의 법을 속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성한 법의를 입을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마땅히 우리 출가사문은 준엄하게 자기 점검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살생, 투도, 사음 또는 망어 이러한 사중계(四重戒)는 부처님께서 제정한 것이 아니더라도 저절로 그대로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차계(遮戒)는, 성계(性戒) 외에 다른 계들은 성품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닌 것인데 우리가 잘못 행위함으로 해서 남도 싫어하고 자기 공부에 장애도 있는 것입니다. 술을 많이 먹어서 흥분하면 싸우기 쉽고 지혜도 흐려지고 온갖 허물이 있게 되지 않습니까?


 2) 정공계(定共戒)와 도공계(道共戒)

 定共戒…色界․無色界의 諸禪定을 修持하면 그 定心과 아울러 身中에 스스로 防非止惡의 戒體를 生하는 것. 此는 有漏定이므로 戒體 또한 有漏임,


 그 다음에는 정공계(定共戒)라, 이것은 선정(禪定)과 더불어서 계체가 우리한테 확립이 된다는 말입니다. 색계(色戒), 무색계(無色界)의 제선정을 곧 초선정, 2선정 하는 색계의 4선정과 무색계의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 등의 모든 선정을 수지해서, 벌써 선정에 들어갔다고 하면 정심(定心)이 확립이 된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몸 가운데 또는 잠재의식 가운데 방비지악(方非止惡)이라, 비행을 막고 악을 그치게 되는 것입니다. 벌써 마음이 고요한데 함부로 바람피우고, 함부로 음식을 먹으려고 하겠습니까? 이렇게 방비지악의 계체가 생기는 것입니다. 계체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는 안 보이지만 잠재의식에나 몸에나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그 기운이 베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루정(有漏定)이므로 계체 또한 유루입니다. 성자의 무루청정(無漏淸淨)한, 모든 상(相)을 여읜 경계는 미처 못되나, 외도라도 선정에 들면 살생이나 투도나 사음이나 망어도 못하는 것입니다. 외도에서도 정작 선정을 닦아서 오통(五通)을 통한 사람들은 응당 파계 무참한 짓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삼계를 초월하는 삼매는 우리 성자 밖에는 못 들어가지만 외도라도 색계, 무색계의 삼매에는 들어갈 수 있고 또 삼매에 들어간다면 계율을 범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해탈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유루선정(有漏禪定)이므로 계차 또한 유루입니다.


 道共戒…三乘의 聖者가 見道․修道의 位에 至하여 無漏智를 發하므로 無漏智와 더불어 스스로 防非止惡의 戒醴를 發得한다. 戒體 또한 無漏임.


 그리고 그 다음에는 도공계(道共戒)라, 견성오도와 더불어서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계라는 말입니다. 성문승이나 연각승이나 보살승이나 삼승성자(三乘聖者)가 견도 수도의 위(位)에 이르러서 번뇌의 때가 묻어있지 않는 무루의 지혜를 발하므로 무루지(無漏智)와 더불어서 스스로 방비지악(防非止惡)이 되는 계체를 몸과 마음에 발득(發得)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계체는 바로 무루(無漏)입니다. 남을 점검할 때나 자기를 점검할 때나 이것은 다 통용되는 문제입니다.


 3) 불성계 (佛性戒)


 佛性戒…梵綱經所說의 大乘戒로서 佛戒 또는 佛乘戒라고도 함. 一切衆生이 本具한 佛性이 淸淨無垢하여 一切의 허물을 떠났으며 이 佛性을 體로 하여 佛果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는 諸佛이 住하는 一實相의 淨戒이니 一切大乘戒의 都名임. '一切衆生皆有佛性이니, 一切意識色是情是心이 皆入佛性戒中이므로 一切有心者는 皆應攝 佛性戒할지니 衆生受佛性戒하면 卽入諸佛位하느니라' (梵網經下) '佛離 一切相하야 而住於戒하니 所謂離諸相인 一相一味라. 若能如是 離一切相하여 而住於戒하면 此戒卽是佛性戒라' (大日經十七)


 그 다음 불성계(佛性戒)는 대승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소승계는 그 가운데에 자동적으로 포함이 되어야 하겠지요. 범망경(梵網經) 소설의 대승계인 십중금사십팔경겐(十重禁四十八輕戒)는 불성계입니다.


 불성계는 불계(佛戒) 또는 불승계(佛乘戒)라고도 합니다. 불성계의 불성이라는 말은 일불승(一佛乘)으로서 성문이나 연각이나 또는 보살이나 있지만 사실은 모두가 일불승뿐입니다. 일불승 가운데 다 들어 있습니다. 일체 만유가 일미평등한 진여불성인지라 본래에서 본다면 모두가 다 하나의 불승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때문에 불승이라 합니다. 법화경에 유유일승법(唯有一乘法)이요, 오직 한 불승만 있고 무이역무삼(無二亦無三)이라, 역시 성문, 연각, 보살로 구분한 것은 중생차원에서 얼마만큼 부처님에게 가까워 있는가? 하는 것으로 구분한 것이지 부처님 차원의 불안(佛眼)으로 본다면 성문승도 연각승(緣覺乘)도 중생도 모두가 다 부처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오직 일불승만 존재하고 다른 것은 모두가 다 가상(假相)이요. 실상은 일불승뿐입니다.


 일체 중생이 본래 갖춘 불성이 청정무구하여 일체의 허물을 떠났으며 이  불성을 체로하여 불과(佛果)에 이르기 때문에 불성계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모든 부처님이 머무는 일실상(一實相)의 일미평등한 진여실상의 청정계율이니 따라서 진여불성, 이것은 바로 우주의 실상이기 때문에 우주의 실상은 그 우주에 따르는 규범(規範)이 있습니다. 봄이 되다가 봄이 안 되고 겨울로 되돌아가겠습니까? 이와 똑같이 우주는 우주에 따르는 섭리(攝理)가 있는 것입니다. 다른 생물을 죽이는 것은 벌써 우주의 섭리를 어기는 것입니다. 훔치는 것도 우주의 섭리를 어기는 것이고, 도인이 아니면서 도인인 체 해도 우주의 섭리를 어기는 것입니다. 음행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성계는 일체 대승계의 도명(都名), 즉 모두 한 번에 포괄한 계의 이름인 것입니다. 범망경에 '일체중생 개유불성(一切衆生皆有佛性)이니,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는 것이니 일체의뜻(意)과 분별하는 식(識)과 또는 물질적인 색(色)과 또는 우리 망정(妄情)이나 인정(人情)이나 우리 마음(心)이 모두 불성계 가운데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정도 역시 불쌍한 사람, 가엾은 사람을 보고서 가엾이 생각하는 것을 유교(有敎) 정도로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고 좋게 봅니다마는 부처님께서 본다면 한 가지 속정(俗情)으로 바로 망정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특수한 사람에게 특별히 생각하는 인정이나, 또는 우리가 쓰고 있는 중생심이라든가 모두가 다 불성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불성 가운데 들어가면 모두가 다 불성이 되어 버립니다. 불안(佛眼)으로 통찰하면 일체 만유가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모두 다 불성계 가운데 들어가므로 일체 인간이나 기타 유정인 자는 모두 마땅히 불성계를 수(受)할지니 중생이 이 불성계를 받으면 바로 제불의 자리에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불성계를 받고 맹세를 한다면 이미 우리는 불성자리에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대일경(大日經)에 '불은 리일체상(離一切相)하고, 모든 상을 여의고 정계(淨戒)에 상주하니 이른바 모든 상을 여읜 일상일미(一相一味)라, 만약 이와 같이 일체상을 여의고 계에 머물면 이 계가 바로 불성계니라' 고 말씀하였습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 출가사문들은 다 불성계를 받으신 분들이니까 사실은 모두 불성계 중에 지금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체가 모두가 다 청정합니다. 그러므로 청정한만치 청정 불성에 수순(隨順)해야 하겠지요.


 4) 수대승계(受大乘戒) 십인(十忍)


 受大乘戒十忍…大乘受戒의 精神을 열 가지로 벌린 것.

 1. 割肉食騫  2. 投身餓虎  3. 斫頭謝天  4. 折骨出髓  5. 挑身千燈 

 6. 挑眼布施  7. 剝皮寫經  8. 剌心決志  9. 燒身供佛  l0. 刺血灑地   

                                                    (順正記)


 수대승계십인(受大乘戒十忍)이라. 저는 대승계십인에 대해서 감명이 큰 것이 백양사 운문암으로 6․25사변 전에 출가했습니다마는 그때 법당에 창호지에다 대승계십인이라고 쓴 법문이 붙여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서 적어 두었는데 나중에 불경에 나온 것을 보고 더욱더 깊이 감동했습니다. 대승계를 받을 때는 다짐을 받습니다. 열 가지로 참는 계율인데 '그대가 이것을 참을 수가 있는가?'하고, 옛날에는 그렇게 해서 받았다고 합니다. 대승계 계의 정신을 열 가지로 벌린 것입니다.


 1에 할육식응(割肉食騫)이라, 비둘기를 살리기 위한 인연설이 있습니다만(智度論, 西域記 等), 부처님께서 과거 전생에 인행시(因行時)에 시비왕(尸毘王 Sibika)으로 있을 때에 비둘기 한 마리가 매한테 쫓겨서 품안에 들어왔는데 매가 쫓아와서 비둘기를 내달라고 간청하므로 시비왕이 비둘기 대신 비둘기만큼의 자기 살을 떼어 주겠다 하고는 저울의 한 쪽에 비둘기를 올려놓고 한 쪽에다 자기 살을 아무리 떼어 놓아도 도무지 비둘기하고 무게가 같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팔뚝을 떼어 놓아도 안 되고 나중에는 몸뚱이채 온통 올려놓았다는 설화가 있습니다마는 그대가 이렇게 할 수가 있는가? 하면, 맹세로 다짐을 받으니까 '예 할 수가 있습니다 '하고 대답을 해야 되겠죠.

2에 투신아호(投身餓虎)라, 그대가 주린 범에게 몸을 줄 수가 있는가?


3에 작두사천(斫頭謝天)이라, 부처님께서 과거 설산동자(雪山童子)로 인행할 때 법문 한 구절을 듣기 위해 나찰(羅刹)에게 몸을 바쳤다는 설화에서, 제석천이 나찰로 변하여 법문을 일러 주었으므로 고맙다고 목을 베어 사례할 수 있는가? 하는 다짐입니다.


 4에 절골출수(折骨出髓)라, 이것은 상제(常啼 Sadapralapa) 보살 설화입니다. 반야바라밀을 얻기 위해서 뼈를 분질러서 골수를 낼 수가 있는가?


 5에 도신천등(挑身千燈)이라, 그대 몸에다가 부처님을 찬탄하기 위해서 천등을 키울 수가 있는가?


 6에 도안보시(挑眼布施)라, 그대 눈을 빼어서 보시를 할 수가 있는 것인가? 도안보시에 대해서는 설화가 굉장히 많습니다. 가나제바(迦那提姿 Kana-deva)존자는 용수보살의 제자로 15대 조사입니다. 가나제바는 얼굴이 잘나서 탁발할 때 여인들이 너무나 지겹게 따라오니까 자기의 한쪽 눈을 빼어서 주었습니다. 그래서 애꾸눈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연화색(蓮花色 Utpalavawi) 비구니는 그의 미모를 사모하는 포악스러운 사람이 자기를 겁탈하려 하니 양쪽 눈을 빼어 주었다고 합니다. 또는 사리불(舍利弗 Sariputra)존자가 전생에 탁발을 나갔을 때에 어떤 바라문이 시험하려고 "부처님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은 자기 몸뚱이도 보시한다는데 그대도 그렇게 할 수가 있는가?" 할 수 있다고 대답했더니 "나한테 필요한 것은 당신 눈이다. 줄 수 있는가?" 한참이나 주저하다가 부처님의 보시 말씀을 생각하고 눈알을 빼서 바라문에게 주었습니다. 바라문은 그 소중한 눈알을 받아 가지고 요긴하게 쓰는 것이 아니라 그냥 땅에다 던지고 자기 발로 밟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때에 사리불은 후회가 되어서 '이제부터 중생 보시는 그만두고 내 공부만 해야겠다'고 후회한 허물로 해서 석존회상에서도 오랜 동안이나 성문승이 되었다고 합니다. 부처님 대승계를 받는 것은 이렇게 무서운 계율입니다. 성불을 기약할 때에는 대승계 받을 그런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7에 박피사경(剝皮寫經)이라, 자기 피부를 벗겨서 말려가지고서 경을 베낄 수가 있는가? 요법(樂法)바라문의 설화가 있습니다. 법을 좋아하고 간절히 추구한다고 해서 이름을 요법(樂法)이라고 붙인 것입니다. 요법바라문이 10년 동안이나 법을 얻기 위해 천신만고 별의별 갖은 고행을 다하고 너무나 진실하므로 제석천왕이 감동이 되어 같은 바라문 모습으로 요법바라문 앞에 나타나 '내가 무상법문(無上法門)을 말할테니 그대가 피부를 벗겨서 종이로 하고 피를 먹으로 하고 뼈를 붓으로 해서 내가 말하는 위없는 법을 적을 수가 있는가?' 요법바라문은 주저 없이 자기 피부를 벗겨서 볕에 말리는 것입니다. 그 순간 바라문 모습은 사라지고 허공중에서 제석천의 찬탄하는 소리와 부처님의 법문이 울려 퍼졌다고 합니다.


 또 다른 경전에는 요법바라문이 진실하게 법을 구하니까 마구니 파순(波旬 Papiyas)은 저 사람이 결국 공부가 되어서 성취되면 욕계가 하마 무너질까봐서 항시 전전긍긍하였습니다. 악마 파순은 우리 수행인을 파괴시키려고 그때그때 갖은 노력을 다 하는 것입니다. 잠 속에 이상한 꿈을 꾼다거나 또는 몽정(夢精)을 한다거나 그런 것이 생리적인 것도 있지마는 마구니의 침범이 굉장히 많은 것입니다. 마구니는 요법바라문이 깨달아 욕계에서 떠날까봐 공부를 못하게 하려고, 그 목숨을 빼앗아 버리려고 요법바라문 앞에 나타나 '내가 무상해탈의 법을 아는데 그대가 피부를 벗겨서 종이로 하고 피를 먹으로 하고 뼈를 붓으로 해서 이 수승한 법을 적을 수가 있다면 말을 하겠다 ' 그러니까 요법바라문이 주저없이 피부를 칼로 벗겨 볕에 말리려 하니까 마즉소멸(廳卽消滅)이라, 악마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도를 위해서는 몸을 바치겠다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이 전혀 있을 수가 없을 때에는 마구니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위법망구에 마즉소멸이라' 우리는 이런 뜻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8에 자심결지(刺心決志)라, 자기 심장을 베어내어 성불을 다짐할 수가 있겠는가?


 9에 소신공불(嶢身供佛)이라, 자기 몸을 다 태워서 부처님께 바칠 수 있는가?


 10에 자혈쇄지(刺血灑地)라, 가뭄에 말라죽는 식물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 피를 뽑아서 뿌릴 수 있는가? 이상 열 가지 인욕(忍辱)의 다짐이 대승계 십인입니다.


 대승이라고 장담하는 분들은 이런 다짐이 있어야 비로소 대승이라고 장담할 수가 있습니다. 그저 걸림없이 방만하게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대승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3. 지계(持戒)와 범계(犯戒)의 과(果)


 1) 파계오과(破戒五過)․육식십과(肉食十過)․의어오과(依語五過)

 

破戒五過

1. 自身을 害함.  2. 他人의 呵責을 받음  3. 惡名流布 

4. 臨終後海      5. 死墮惡道   (四分律)


 파계오과(破戒五過)라, 파계에는 다섯 가지 허물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몸을 해칩니다. 파계하고서 자기 몸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나 몸은 절대로 둘이 아닌 것이므로 가책(呵責)을 받으면 자기 몸도 괴롭고 또는 생각도 그만치 장애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타인의 가책을 받습니다. 파계한 사람을 누가 좋다고 하고 꾸짖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또는 악명유포(惡名流布)라, 세상이란 신비롭기 때문에 나쁜 소문은 숨기더라도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흘러 다니는 것입니다. 넷째는 임종후회(臨終後海)라, 죽음에 당하면 내생의 악의 과보를 받을 생각을 하면 응당 후회가 되겠지요. 다섯째는 사타악도(死墮惡這)라, 죽어지면 인과 필연으로 분명히 삼악도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분율이나 오분율이나 각 경론에다 있습니다.


  肉食十過

 1. 衆生己親    2. 見生驚怖   3. 壞他信心   4. 行人不應食  5. 羅刹習氣 

 6.學術不成    7.生命同己     8.天聖遠離   9.不淨斫出    10.死墮惡適                                                  (法苑珠林九十二)


 그 다음에는 고기를 먹는 열 가지 허물입니다. 그때그때 슬며시 고기를 좀 먹는 사람들은 큰 죄는 아니더라도 참회를 하여야 합니다.

 중생기친(衆生己親)이라, 중생이 다 자기와 같은 동체(同體)라는 것입니다.


 견생경포(見生驚情)라, 소나 돼지나 그런 동물들도 고기 먹는 이를 싫어합니다. 우리가 산중에 오래 있으면 알 수가 있습니다. 정말로 우리가 고기 같은 것 안 먹고 몇 년 동안 지내면 확실히 산중에 있는 새들도 가까이 와서 지저귀고 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기를 많이 먹는 사람들은 짐승들도 두려워서 옆에도 안 오는 것입니다. 설사 옆에 온다 하더라도 마음으로는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또 고기 먹는 것이 절대로 살로 안 갑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이치에, 우주의 도리에 다 맞는 것입니다.


 괴타신심(壞他信心)이라, 우리 출가사문이나 불교를 잘 믿는다는 재가불자들이 닭이나 돼지나 통째로 구워먹고 싱싱해야 좋다고 살아있는 생선을 마구 먹는 모습을 다른 신심 있는 사람들이 본다면 신심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이 원수 같은 몸뚱이 때문에 성불을 빨리 못합니다. 몸뚱이는 성불하는 도구로 귀한 것이지, 그렇지 않을 때에는 귀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업장의 덩어리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몸뚱이가 원적(怨賊)이라, 바로 원수요 도적이란 말입니다. 이 원수 같은 몸뚱이 살 좀 찌게 해서 우리한테 무슨 득이 있습니까? 살찌게 해 놓으면 망상만 더 하고 음탕한 마음만 한결 치성하고 비대하여 운신하기 불편하고 질병에 걸리기가 쉽습니다. 따라서 수행자는 마땅히 남이 먹는다 하더라도, 또 권하더라도 응하지 말아야 합니다. 도반 축에 못 가고 소외를 당하기에 할 수 없이 응한다고 하는데 그런 나약한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스승은, 우리 행동의 규범은 부처님한테 있습니다. 설사 안 먹는다고 매를 맞더라도 말입니다.


또는 나찰습기(羅刹習氣)라, 나찰 같은 나쁜 귀신들은 고기 냄새나 또는 파, 마늘 냄새나 우리 몸을 깨끗이 안 해서 냄새가 나면 나찰습기가 따르는 것입니다. 고기를 많이 먹는 서양사람 옆에 가면 노린내가 풍깁니다. 그런 냄새는 나찰들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학술불성(學術不成)이라, 따라서 마음 닦는 공부에는 해롭다는 말입니다. 일반적인 학술도 이루기 어렵고 더구나 순수하게 마음을 닦을 때는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생명동기(生命同己)라, 생명이 원래 나와 더불어서 둘이 아니니 어찌 다른 생명을 해칠 수가 있겠는가, 말입니다.


 천성원리(天聖遠離)라, 호법 신장은 멀리 떠나 버립니다. 고기를 먹으면 그 냄새 때문에 호법신장이 가까이 올 수가 없습니다.


 부정소출(不淨昕出)이라, 고기를 많이 먹으면 내장도 오염시키고 배설물도 냄새가 더욱 지독한 것입니다.

사타악도(死墮惡道)라, 죽어서는 마땅히 악도에 떨어지겠죠. 그러나 다른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들은 상쇄(相殺)가 되어서 악도에까지 안 떨어질 수도 있겠습니다.


  依語五過…正敎에 對하여 正解를 不得하면 五過를 生함.

 1. 不正信       2. 勇猛을 退함.  3.他人을 誑함. 

 4. 法을 誹謗함  5. 聖法을 輕히 함. (成實論)


 의어오과(依語五過)라, 이것은 정통조사(正統祖師)의 말씀이라든가 부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해서 허물을 범한다는 말입니다. 바른 가르침에 대하여 바른 해석을 얻지 못하면 다섯 가지 허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부정신(不正信)이라, 바른 해석을 못하면 바른 신앙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또는 용맹심을 후퇴시킵니다. 앞서도 말씀 드렸습니다마는 가령, 상락아정(常樂我淨)이나 오지여래(五智如來)의 법문도 불경에 분명히 있는 것인데, 그런 법문도 바르게 모르고서 '해탈하면 즐거움이 있고, 무엇을 좀 알고 상을 떠나는 것이겠지' 이런 모호한 정도로만 알아서는 신명을 걸고 용맹 정진할 결단이 서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행복과 지혜와 자비와 모두를 원만히 갖추고 모두를 다 알 수가 있고 할 수 있는 일체 신통묘지를 다 갖추게 된다, 이것이 다 내 원래 자성(自性)이다' 이렇게 안다면 적어도 우리 출가사문이 거기에 안 갈려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잘못 해석한다면 용맹을 퇴타(退墮)한다는 말입니다.


 또는 타인을 속이는 것입니다. 같은 계율 해석도 '대승계에서는 무방하지 않겠는가, 고기 먹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지 않은가' 이렇게 함부로 말을 하여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입니다.

 또 법을 비방하게 됩니다. 부처님 법은 거짓말이 없는 법이고 진실한 법인 것인데 잘 몰라서 자기 생각으로 합리화시키면 벌써 법을 비방하는 것입니다.

또는 성법(聖法)을 가볍게 하게 됩니다. 성인의 법은 거짓이 없고 진실한 위없는 법인데 불법(佛法)의 무량공덕을 말하지 않고 방편설법만 한다면 성법을 함부로 하여 성법(聖法)을 가벼이 하는 것입니다.


 2) 중후불식(中後不食)․오신불식(五辛不食)․식죽오리(食粥五利)


 中後不食…不過中食戒로서 여러 經典에 佛言 中後不食有五福을 說하였음.

 1. 少淫  2. 少睡  3. 得一心  4. 無下風  5. 身得安樂


그 다음에는 중후불식(中後不食)이라, 이것은 오후에 먹지 않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일종 한다고 하지만 저는 위선(僞善)적으로 가끔 간식도 하고 또 어디 가면, 대접한다고 하면 먹기도 합니다마는 제 마음의 원칙은 죽을 때까지 일종 한다고 단호히 정해져 있습니다. 또 일종을 하면 훨씬 더 몸이 가볍고 공부에도 크게 도움이 됩니다.


 중후불식이란 불과중식계(不過中食戒)라 합니다. 정오(正午)를 넘어서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 때나 한 때만 먹으면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부처님 계율은 꼭 정오 안에 먹으라는 것입니다.


 저는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 생각하면 할수록 사무치게 감사합니다. 아무 때나 한 때 먹으라고 할 수도 있는데 하필이면 꼭 오정 이전에 먹으라고 한 것은 태양이 남중(南中)할 때인 오정 때가 우리 생리 활동이 가장 왕성하고 따라서 소화기능도 제일 좋은 때이기 때문입니다. 밤에 간식하고 자면 소화가 잘 안 되는 것 보십시오. 부처님께서는 무불통지(無不通知)이십니다. 우리 심리나 생리나 다 알으신 것입니다. 합리화시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부처님은 그저 마음 닦는 법이나 알았지 무슨 생리를 알 것인가? 현대 생리학에서나 우리 몸에 대하서 과학적으로 확실히 아는 것이고 단백질이나 비타민 등 몇 칼로리를 먹어야 할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젊은 스님들 정말로 부처님 말씀을 보다 더 깊이 믿어야 합니다. 부처님은 우리 생리도 심리도 모두를 다 훤히 아시는 분입니다. 부처님의 지혜는 일체종지(一切種智) 아닙니까.


 중후불식, 오후불식을 한다면 다섯 가지 복을 얻는다고 합니다. 오복(五福)을 말입니다. 독신 수행자가 가장 무서운 것이 역시 음심(淫心) 아닙니까, 음심은 마지막까지 달라붙는 망념인 것입니다. 석가모니께서 수하 성도하실 때에 육년 고행을 통해서 그렇게 못 잡수시고 피골이 상접한 때에도, 성도하실 그 찰라도 일억팔천 마구니 가운데 삼천녀라, 그렇게 알량하게 예쁘게 생긴 것들이 와서 방해를 하였습니다. 우리가 별스럽게 자기 망념을 안간힘 쓰고 죽여도 그것들에게 넘어지고 넘어지고 합니다. 그런데 중후불식하면 소음(小淫)이라, 음심이 적고 또는 소수(小睡)라, 그 무서운 원수인 잠이 적어지고 득일심(得一心)이라,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쉽습니다.


 사실 우리가 세 끼를 먹는다면 먹는 사람들은 좋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준비하고 설거지 하는 것이 모두가 다 중생 빚입니다. 이 몸뚱이는 꼭 세 끼 먹어야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현대적인 배운 사람들은 더욱더 세 끼 다 먹으려하고 또 따뜻한 밥만 먹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부처님 제자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모두가 성불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우선 시간만 생각하더라도 장만하는 시간, 또 먹는 시간, 양치하는 시간 또 많이 먹으면 포행해 가지고 소화시키는 시간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낭비가 됩니까,


 무하풍(無下風)이라, 적게 먹으면 몸이 가뿐하고 방귀도 없습니다. 신득안락(身得安樂)이라, 몸이 항시 안락스럽다는 것입니다. 오후불식하는 스님들은 짐작이 되실 것입니다. 항시 몸이 가뿐한 것입니다. 일종을 해도 철저하지 못한 저 같은 사람이 창피를 무릅쓰고 부처님 말씀이기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五辛(五暈)…맵고 냄새가 강한 植物로서 고기와 같이 佛弟子가 먹지 않아야 할 냄새나고 매운 채소, 마늘〔大蒜〕․부초〔茗蔥〕․파〔慈蔥〕․달래〔蘭蔥〕․흥거(興渠…中國이나 우리나라에는 없음)


 ※ 是五種一切食中不得食 若故食 犯輕垢罪               - 梵綱經下 -

 ※ 諸衆生 求三摩提 當斷 世間五種辛菜 食時 發淫 生啖 增恚 如是 食辛之人 縱能宣說十二部經  十方  天仙  嫌其  臭穢 咸皆遠離                                                                          - 楞嚴經八 -


 오신채(五辛菜)에 대해서는 보통 '이것은 고기도 아닌데, 본래 불구부정(不垢不淨)인데 이런 것쯤 먹는 것이 대승불교 공부하는 사람한테 무슨 상관이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흔히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공부인에게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른바 우리가 호법선신(護法善神)들의 가피(加被)를 받고, 스스로 도를 증명하려면 꼭 필요한 것입니다. 망상이 일어나는 것은 사소한 것 때문이기도 하므로 기왕이면 부처님 말씀대로 망상의 계기가 될 수 있는 사소한 것들까지도 제거해야 됩니다. 그러한데서 오신채도 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신채는 맵고 냄새가 가장 강한 식물로서 고기와 같이 불제자가 먹지 말아야 할 매운 채소 즉 마늘, 부추, 파, 달래, 흥거인데 흥거는 중국이나 우리나라에는 없다고 합니다. 이것을 먹는 사람들은 잘 모르나 안 먹는 사람들이 먹는 사람 옆에 가면 굉장히 악취가 풍깁니다. 저는 행인지 불행인지 젊어서 일본에 가서 한동안 지냈는데 이따금 한국 김치가 먹고 싶어서 한국 식당에서(으레껏 마늘을 넣었겠지요) 식사를 하고 전차나 타면 옆 사람들이 굉장히 싫어하는 것입니다. 남이 싫어하면, 그 당시 부처님 법문을 잘 모르니까 다만 상식적으로 남이 싫어하고 또 악취를 풍기기 싫어서 안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인데 부처님 법문을 보니까 확실히 금기(禁忌)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땅히 우리는 이런 것도 주의를 해야 합니다.


 위에 든 '오신채는 모든 음식 가운데 먹어서 안 될 음식이다. 짐짓 우리가 먹는다면 이른바 범경구죄(犯輕垢罪)라, 가벼운 죄를 범한다'는 말씀이 범망경(梵綱經)에 있습니다. 범망경은 소승경전이 아니지 않습니까? 또는 능엄경(楞嚴經)에는 '모든 중생이 삼마제(三摩提)를 구할 때는 마땅히 세간의 오종 신채를 끊어라, 이것을 먹는다면 음탕한 마음이 더 생겨나고 또는 가래나 담이 더 많이 생기며 진심(瞋心)이 더 치성한다. 이와 같이 오신채를 먹는 사람이 비록 부처님의 경전인 12부경을 능히 통달해서 설한다 하더라도 시방에 있는 천상 선신들이 그 좋지 않은 냄새를 싫어하여 모두 다 멀리 떠나버린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경에 있는 말씀들은 범부들이 상식적으로 낸 말씀들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깊이 명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食粥五利…除飢․除渴․消宿食․大小便調適․除風患

 ※ 粥則見於手中文 齋則過午不食․禪洙의 常法에 朝는 粥을 먹음.


 그 다음에 식죽오리(食粥五利)라, 죽을 먹으면 다섯 가지 이익이 있다는 말입니다. 안 먹는 사람은 죽 먹기를, 죽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백장청규(百丈淸親)에도 오재조죽(午齋朝粥)이라, 점심 한 때 밥을 먹고 아침에는 죽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낮에 먹는 밥은 법식(法食)으로서, 재식(齋食)으로 먹고 아침에는 요기를 위해서 조금 죽을 먹는 것입니다. 죽을 먹으면 다섯 가지 이익이 있는데 제기(除飢)라, 우선 주림을 제거하고 제갈(除渴)이라, 갈증을 풀고 또는 소숙식(消宿食)이라, 숙식은 소화가 안 되어서 끌끌하니 체한 것을 말합니다. 이것도 해소를 시키고 또는 대소변 조적(大小便調適)이라, 대소변을 적당히 조화롭게 하고 제풍환(除風患)이라, 풍병을 제거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죽을 먹을 때는 새벽에 손에 들고 있는 경의 글자가 겨우 보일 정도인 때요, 점심때 한 끼 재식을 먹을 때는 오정을 지나면 먹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선림(禪洙) 즉 선원의 상법(常法)에 아침에는 죽을 먹는 것입니다.


 4. 계율(戒律)에 대한 성언(聖言)


 이제 계법(戒法)에 대한 불조(佛祖)의 경론(經論) 말씀 몇 가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우리 중생들 번뇌가 많지만 특히 음(淫), 노(怒), 치(痴)라, 곧 신역(新譯)으로 삼독심을 탐, 진, 치라 하지만 부처님 당시라든가 근본불교는 음, 노, 치라 하여 음심을 제일 먼저 말합니다. 어찌 그런고 하면 음심 때문에 우리가 삼계육도(三界六道)에 윤회하기 때문입니다. 음심이 아니면 삼계육도에 윤회할 까닭이 없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삼계육도를 벗어난다는 차원에서 본다면 음심이라는 것이 번뇌 가운데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말입니다.


  無量劫中 被淫怒痴 煩惱毒箭 受大苦切             - 涅槃經五 -


 우리가 무량겁중에 음, 노, 치의 번뇌의 독스러운 화살에 맞아가지고서 일체의 고액(苦厄)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런 삼독(三毒) 번뇌가 우리의 본능에 얼마나 깊게 뿌리박혀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열반경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는 '보살에는 두 종류의 파계가 있는데 음, 노, 치를 위시한 악업(惡業)을 지어서 그 악보(惡報)로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의 불선도(不善道)에 향(向)하는 것이고 또는 성문(聲聞)․벽지불지(僻支佛地)에 향함이다(智度論八十)' 보살의 파계는 삼독심이나 나쁜 악업으로도 물론 파계가 되겠지마는 성문승이나 벽지불승 등 소승 공부를 하는 것도 파계라고합니다. 원래 자타가 없는 근원적인 불교 사상을 떠나서 자기 공부만 알고 남을 무시하고 자기만 생각하는, 독선적인 개인 이기심이나 집단 이기심이나 그런 것도 파계입니다. 또 닦는다 하더라도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중생을 위해 바쳐야겠다는 서원(誓願)이 아니고 혼자만의 안락을 얻기 위해서 또는 자기를 과시하고 대접받기 위하여 파벌을 만든다, 또는 무슨 교주가 된다든가, 그런 생각들은 모두가 하나의 성문, 벽지불 생각입니다. 그것도 역시 보살의 파계가 된다는 말입니다. 지도론(智度論)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 사종삼마야계(四種三摩耶戒)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삼마(samya)는 본 서원(本誓願)이란 뜻입니다. 불타의 본 서원 즉 우주에 본래 갖추어 있는 도리라는 뜻입니다. 살(殺)․도(盜)․음(淫)․망(妾)의 사바라이(四波羅夷)란 단두(斷頭)라, 목을 끊는다는 말입니다. 세속적으로 말하면 사형선고죠, 4바라이란 목을 끊는 단두죄로 중계(重戒)인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4바라이를 범하면 참회해도 소용없고 금생에는 다시 출가사문이 못되고 승가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4바라이로서 제불불가월(諸佛不可越)의, 제불이 넘을 수 없는 다시 바꿀 수 없는 계법이므로 삼마야계라 한다' 고 합니다. 우주 자체내에 갖추고 있는 본래적인 도리이기 때문에 부처님도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이야 법 자체이기 때문에 바꿀 필요가 없겠지요, 대일경 구연품(大日經具緣品)에 있습니다.


 阿難 云何攝心 我名爲戒 若諸世界 六道衆生 其心 不淫則 不隨其生死相續 汝修三昧 本出塵勞 淫心不除 塵不可出 縱有多智 禪定現前 如不斷淫 必落魔道 上品魔王 中品魔民 下品魔女 彼等諸魔 亦有徒衆 各各自謂無上道 我滅度後 末法之中 多此魔民  熾盛世間 廣行貪淫 爲善

知識 令諸衆生 落愛見坑 失菩提路 汝敎世人 修三摩地 先斷心淫 是名如來 先佛世尊 第一決定 淸淨明誨 是故阿難 若未斷淫 修禪定者 如蒸砂石 欲其成飯 經百千劫 祗名熟砂 何以故 此非飯本 如我此說 名爲佛說 不如此說 卽波旬說                        - 楞嚴經六 -


 그 다음에는 능엄경에 있는 법문인데 부처님과 아난(阿難) 존자와 문법하고 대답하시는 구절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난아,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가? 아명위계(我名爲戒라, 내 가르침은 계가 된다' 부처님께서 마지막 설법도'계로써 스승을 삼아라' 하였습니다. '만약 모든 세계의 육도중생이 그 마음이 음탕한 것이 없으면 곧 생사상속(生死相續)에, 죽고 사는 윤회에 따르지 않는다' 음탕한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출생하게 되겠습니까. 응당 부모의. 음욕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천상도 욕계천의 아래 도리천까지는 인간과 똑같은 음욕으로 생사가 생기고 그 위에 올라갈수록 음욕이 차근차근 점차로 줄어지다가 색계에 올라갔을 때는 전적으로 음욕이 없으므로 남녀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출가사문이 비구나 비구니나 머리를 깎는 것은 외도와 구분을 하기 위해서도 그러지만 벌써 남녀를 초월해 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대들이 삼매를 닦는 것은 그 본뜻이 모든 번뇌를 떠남에 있다. 그러나 음심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번뇌에서 헤어날 수가 없다. 비록 지혜가 많이 있어 가지고 다소 선정이 현전하지마는, 여기서의 선정은 욕계정(欲界定)입니다. 색계정은 다시 말할 것도 없이 초월해 버리니까 상관이 없지만 비록 지혜가 있어가지고 명상도 좀 잘하고 무엇도 좀 알아맞히고 제법 도사짓도 할 수가 있는 욕계의 선정이 됐다 하더라도, 음욕을 끊지 않으면 반드시 마도(魔道)에 떨어지고 만다.


 우리는 이런 부처님의 말씀을 굉장히 주의해야 합니다. 부처님 말씀은 우주의 도리입니다. 우리가 재주가 있어 도사처럼 무엇을 좀 알고 어느 정도 삼매에 든다해도 색계 이상의 선정에 못 들어가면 욕계정(欲界定)에서는 결국 음탕한 마음을 아직 못 여읜 단계라 결국 마도에 떨어지고 만다는 말입니다. 마도에 떨어져서 상품(上品)은, 재주가 있고 영리한 부류들은 마왕도에서 대중을 이끌고, 사이비 교주가 되는 것입니다. 가까운 근래에 백백교(白白敎)라든가 또는 용화교(龍華敎) 교주가 있지 않습니까? 얼굴도 잘나고 그야말로 똑똑하고 정력도강하고 그러니까 어느 정도 삼매에 들고 아는 말도 도인과 같이 하겠지요. 그러나 음욕을 못 떼었으니까 나중에는 이상한 짓을 하다가 결국에는 매장 당하고 말았습니다.


.상품은 마왕이요 중품은 마민(魔民)이요, 하품은 마녀(魔女)가 되어, 상품은 똑똑하니까 우두머리가 되고 그 다음은 그 밑에 따라서 한 동아리가 되어 시중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여러 마구니들은 그에 따른 무리들이 있어서 저희끼리 동아리가 되어가지고, 과거 전생에도 모두 비슷한 짓을 했겠지요. 보통은 다 과거 숙세에 부류끼리 다시 만납니다. 그러니까 그런 마구니들도 자기 패거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한국의 종교만 보더라도 수백 개의 종파가 넘을 것입니다. 불교만 해도 40종파가 넘지 않습니까? 그런데 각기 종파마다 자기들이 최고로 옳다고 합니다.


 세존이 멸도 후 말법지중(末法之中)에서는, 말법은 부처님법이 점차로 흐려지는 것입니다. 정법(正法)인 때는 도인들이 많이 나와서 정말로 삼명육통도 하여서 누가 교만심을 낸다면 신통을 부려서 교만심을 조복(調伏)시키는데 지금이야 빈말로 밖에는 하지 못하니까 아만심이 있는 사람에게 말이 딸리면 도리어 당할 수밖에 없겠지요. 이런 많은 마구니들이 세간에 치성하게 번성해 있어서 마구니들이 번성하니까 널리 탐욕스럽고 음탕한 무리들이 선지식이라 하며, 내가 잘났다고 거드름을 피운다는 말입니다.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애욕의 구렁에 빠뜨린다, 자기만 빠지면 좋은데 자기 동아리들과 여러 다른 사람들도 빠뜨리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무상대도를 닦는 진리의 길을 잃어버린다, 여러 사람이 더불어서 잃어버리고 마는 셈이죠.


 '그대들은 세상 사람들한테 삼마지(三摩地)를 어떻게 닦으라고 가르칠 것인가? 먼저 음탕한 마음부터 끊어야 한다. 이러한 것은 과거 무수한 부처님들께서 말씀하신 제일 결정적인 청정하고 밝은 가르침이라, 이러한 고로 아난아, 만약 음탕한 마음을 아직 끊지 않고 선정을 닦는 사람들은 마치 모래를 삶아서 밥을 짓는 것이나 같다, 모래를 아무리 삶는다 하더라도 밥이 되겠습니까? 이 같은 것은 위선적인 것은 될는지 몰라도 마음은 맑아올 수 없는 것입니다. 백천겁을 경과하더라도 다만 뜨거운 모래만 되는 것이다. 어찌 그런고 하면 본래 그것이 모래이지 밥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이와 같이 말하는 법문들이, 즉 음욕을 끊으라는 것, 이것이 바로 불설이고 이와 같은 말이 아닌 것은 마왕 파순설이니라' 능엄경에 있는 말씀입니다.


 너무나 무서운 말씀들 아닙니까? 우리 중생들을 돌이켜 보면 어이가 없을 때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면은 누구나가 다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용수(龍樹) 보살은 제 2의 석가란 분 아닙니까? 용수 보살도 30세 전후는 외도신통을 배워서 같은 동아리들 넷이 궁중에 들어가 예쁜 궁녀들을 침범하고 신통으로 몸을 감추어 버리니까 누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왕은 궁녀들을 모아서 여러 가지로 경책하고 힘도 세고 칼을 잘 쓰는 역사(力士) 몇 십 명에게 명령만 하면 무엇이 보이든 안 보이든 칼을 휘저어라 하였습니다. 그때 이 네 사람들이 다시 궁중에 들어가서 궁녀들을 희롱하고 침범하려고 하는데 왕이 신호를 보내니까 역사들이 공간을 향해서 보이나 안 보이나 칼을 사방으로 휘둘러 세 사람은 칼에 맞아 죽었는데 용수는 왕의 뒤에 숨어서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그 뒤 곧바로 참회(懺晦)하고 부처님 법에 의지해서 출가해 제2의 석가란 성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용수 보살은 400세나 살았다고 합니다.


 그 당시 왕은 용수 보살한테 장수하는 비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 왕이 용수 보살한테 장수 비법을 배워서 너무 장수를 하니까, 태자가 왕위에 오르고 싶은데 그렇게 안 되는 것은 용수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용수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안 되니까 용수한테 간절히 제발 오래 살지 말고 죽어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그때 용수 보살은 용지(龍智)나 가나제바(迦那提努)에게 법을 이미 다 전수했고 인연이 다 했기 때문에 '이제 가야겠구나'하고 이른바 선탈(蟬脫)해서 이승의 인연을 마쳤습니다. 선탈이란 매미같이 허물만 두고 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용수보살 같은 분도 한때는 못된 짓을 하고 그랬는데 우리가 참회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은 어느 때나 늦지 않습니다. 100세가 되어도 늦지가 않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협존자(脇尊者)는 80세에 출가했습니다. 80세에 출가를 하니 늙은이가 의지할 데 없으니까 승가에 들어왔다고 주위에서는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내가 결정코 무상대도를 이루어 삼명육통을 통하고 팔만장경에 통달무애하지 않으면 절대로 내 몸의 옆구리를 자리에 대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고 공부를 하여서 3년안에 정말로 팔만장경에 통달무애하고 삼명육통을 다 통했다는 것입니다. 80세에도 그러는데 우리가 과거를 돌아다 봐서 다소 부끄럽다 하더라도 아무 때라도 참회를 하면 늦지가 않습니다.


 5. 성겁초(成劫初)의 인간(人間)


 성겁초(成劫初)의 인간(人間)이라, 우리 인간은 성겁초에 태어나 지금까지 인간 즉 동업중생(同業衆生)이 점차로 번성해온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성겁초에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기독교에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창조했다는 설도 불교적으로 조명한다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됩니다. 그런 것이 물론 상징(象徵)이지만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독교와 대화할 때에도 자기가 미처 이해가 안 된다고 해서 비과학적이라고 비방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들이 말씀드린 바와 같이 비유(醫喩)와 상징의 베일(Veil)만 벗겨버리면 내나 성자들이 말한 것은 부처님 가르침과 상통이 되는 점도 많습니다.

 공겁(空劫)이 지나고 성겁(成劫)이 되는데 그러면 텅텅 빈 공겁의 허무 가운데서 어떻게 성겁이 될 것인가? 앞으로 과학적인 우주 발생설도 말씀도 드리겠습니다마는 중생의 공업력(共業力)으로 천지 우주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중생의 업력으로 해서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텅텅 비어버린 허공세계인데 중생은 어디에 가 존재하고 있었을 것인가? 공겁이 되면 색(色) 곧, 물질적인 질료(質料)로 이루어진 중생들은 성불을 못하면 각기 행업(行業) 따라서 색계의 광음천(光音天) 이상이나 저 무색계로 올라가 버립니다. 따라서 이선천(二禪天) 이하에는 중생이 없는 것이지만 무색계(無色界)나 색계(色界)의 광음천(光音天) 이상에는 중생들이 있습니다. 그 중생들은 비록 천계(天界)에 있다 하더라도 아직 중생이니까, 중생이라는 것은 아직 아(我)가 있고 아가 있으니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의 분별이 있는 존재를 말합니다.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唯嫌簡擇)이니 단막증애면 통연명백(旦莫憎愛 洞然明白)이라 ' 지극한 도는 별로 어렵지 않는 것인데 오직 간택을 싫어한다는 말입니다. 다만 미워하고 또는 사랑하는 마음 즉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만 없다면 통연명백(洞然明白)이라는 말입니다. 신심명(信心銘:三祖 僧璨著)에 있는 법어입니다. 따라서 아직도 성불을 못했기 때문에 아직 높은 천상에 머물러 있으며 괴겁(壞劫)이 되어서 천지가 다 파괴되더라도 괴겁의 재해를 받지를 않으나 아직은 삼계내에 있는 중생이기 때문에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그 마음이 동력(動力)이 되어 순수한 우주의 기운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한 움직이는 기운이 바람이 되고 금색구름인 금장운(金藏雲)이 되어 인연따라 결합해서 우주가 구성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현대 물리학에서 우주의 장(場) 에너지가 그 진동 여하에 따라서 중성자(中性子)․양자(陽子)․전자(電子) 등의 소립자(素粒子)가 이루어지고 소립자 등의 결합 여하에 따라서 수소ㆍ산소 등 각 원소가 이루어져 물질계가 구성되는 원리와도 비슷한 도리입니다. 구사론(俱舍論)이나 기세경(起世經)같은 경을 보면 그렇게 세밀한 것은 아니지만 간단명료하게 중생의 공업력(共業力)으로 천지 우주가 구성된다고 하였습니다.


 成劫初期의 人間은 皆是 化生으로서 色界人과 如이 身에 光明이 有하고 모두 識食이나 後에, 地味가 生하여 味를 耽하기 때문에 地味가 便隱해서 다시 域度餠이 生함.


 성겁 초기의 인간은 다 화생(化生)입니다. 지금 우리 인간은 태생(胎生)이지만 음욕으로 생기지 않으니까 성겁초기의 인간은 화생입니다. 물론 음욕으로 생기지 않은 미물들인 화생도있습니다. 성겁 초기의 인간은 화생으로서 색계인(色界人)과 같이 몸에 광명이 있고 모두 식(識)을 음식으로 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음식 물질적인 분단식(分段食)이 필요가 없지요. 밥이나 물질적인 음식을 분단식이라 합니다. 본래 갖추고 있는 식(識) 자체가 불멸(不滅)의 생명이기 때문에 음식이 필요치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에 우주가 생겨나고 지미(地味) 곧 땅 맛이 생기고, 물질이 생기니까 땅 맛이 있겠지요. 아직은 중생이기 때문에 땅 맛이 있으니까 호기심으로 맛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맛을 탐하기 때문에 지미(地味)가 곧 숨어버리고 곧 다시 지피병(地皮餠)이 생깁니다.


 지피병이란, 땅 껍질에 떡 조각 같은 바위옷 같은 모양으로 덮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지금 말씀은 먼저 중생의 공업력으로 지구 덩어리나 삼천대천세계가 이루어진 다음 이야기 입니다. 괴겁이 지나 공겁이 되어 광음천 밑에 있는 초선천(初禪天)에나 그런 데는 수재(水災), 풍재(屈災), 화재(火災)로 없어져 버렸지마는 저 무색계나 광음천까지는 거기에 살만한 중생이 있는 것입니다. 색계 이상 올라가면 신통을 다하기 때문에 광음천인도 신통 자재하여 온 천지가 막힘없이 훤히 보인다는 것입니다.


 劫初 光音天人 相謂 我等欲至 閭浮提地 卽來下地 食地肥故 失神足 皆共號呪 自相謂言 我等窮厄 不能復還天上                                              -增一阿含經 -


                                    

 겁초에 광음천 천인들이 서로 말하기를 우리들이 저 아래에 땅덩어리가 생겼으니까 한번 살고 싶다고 원하는 마음이 통해서, 불성과 계합되어 버리면 다시 태어남을 바라지 않는 불원삼매(不願三昧)이지만 아직은 범부인지라 새로운 것이 보이면 호기심을 내어 저 아래 염부제(闊浮提) 즉 사바세계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서 바로 땅에 내려가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지미(地味)인 땅의 맛을 자꾸만 찍어 먹다가 신통을 잃어버립니다.


광음천 천인들은 몸뚱이가 전부 광명인데 사바세계의 상이 있는 물질을 먹으니까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몸이 오염(汚染)되는 것입니다. 태초에 우리 인간은 그와 같이 광명신(光明身)인데 이것 먹고 저것 먹고 자꾸만 먹다 보니까 차근차근 오염되어 광명은 다 잃어버리고, 처음에는 신족통(神足通)으로 몇 천리 몇 만리를 마음만 먹으면 갈 수가 있지만 오염된 몸이 무거우니까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슬프게 부르짖어 보지만 아무리 부르짖어 본들 이미 몸이 무거워졌는데 어떻게 광음천에 올라갈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서로 말하기를 '우리들은 액을 만나 궁해서 다시 천상에 올라갈 수가 없구나' 하고 한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와 같이 몸이 더럽게 오염되어서 도저히 천상에 올라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근본불교인 증일아함(增一阿含經)에 뚜렷이 있습니다.


 天地更始 盪盪空處 了無所有 亦無日月 地涌甘泉 味如蘇蜜 時光音諸天 或有福盡 來生 或樂觀新地 性多輕躁 以指嘗之 如是再三 轉得其味 食之不已 漸生島肌失天妙色 神足光明

                                                                                                     - 經律異相-


 천지가 맨 처음에 이루어질 때는 모두가 다 텅텅 빈 허공세계라, 바로 허공무일물(虛空無一物)입니다. 따라서 그때는 해나 달도 없습니다. 땅에서는 맛있는 것만 솟아 나오는데 마치 제호(醍鬪)같이 꿀맛보다 맛있는 것이기 때문에 광음천 하늘에 있는 복이 다한 중생들이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광음천에 있더라도 공부가 더 잘된 천인(天人)도 있고 못된 천상 인간도 있겠지요. 그런데 이미 복이 다하면 자꾸만 망상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염부제(闇浮提) 즉 사바세계가 생겨났다 하더라도 복이 다하지 않았으면 무슨 필요로 염부제에 올려고 하겠습니까만 망상이 나와서 그렇게 좋은 천상에 있기가 싫어진 것입니다. 박복(薄福)한 사람들이 부처님 법을 닦으라 해도 마다하지 않습니까? 계행을 철저히 지키면 꼭 성불한다고 해도 지키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복이 다하면 차츰 마음이 망상쪽으로 기우는 것입니다. 복이 다한 천인들이 염부제에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또는 새로운 땅에 호기심이 생겨 내려오는데 성품이 경망하고 진득하지 못하니까 새로운 것에 대해서 검토도 안 해보고 훌쩍 내려와 이것저것 맛보고 하겠지요. 자기 손으로 찍어 맛보는데 맛이 있으니까 두 번 세 번 자꾸만 찍어먹다 보니 그 맛에 맛 들어 버려서 먹는 것을 그치지 않고 먹다보니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점차로 거치러운 오염된 피부가 생기고 오염된 살이 생기고 뼈가 생겨서 결국은 광음천에 있던 광명신(光明身)도, 신통도 다 잃어버린다는 말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불교가 인본주의(人本主義)니까 우리인간이 천상천하에 가장 위대한 것이다고 합니다. 깨달아서 석가모니 부처님같이 되고 자성(自性: 佛性)을 깨달아야 위대한 것이지 그렇지 못하면 천상보다 못한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마땅히 꼭 성불한다는 기약이 있으니까 어느 천상에 대해서도 손색이 없는 중생이 아니겠습니까마는 그렇지 못 하면은 사실 천상보다 훨씬 더 못한 것입니다. 신통도 자비도 재주도 그만큼 못 부리는 것이고 안락도 그만 못한 것입니다.


 由漸耽味 地味便隱 從斯復有 地皮餠生 競耽食之            -俱舍論 -

 地皮餠…劫初에 地味가 隱한 後 地에 自生하여 人을 養하는 것.


 그래서 최초 인간이 맨 처음에 땅거죽에 있는 지미(地昧)를 맛 들여 탐착하니까 이내 숨어버립니다. 그것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중생이 탐착하면 결국은 좋은 것은 숨어버리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온 것이 조금 더 물질적인 농도가 더 강한 즉, 떡 같은 지피병이 자생적으로 나와서 인간들을 기른다는 것입니다.


 林藤…劫初人의 食物로서 地餠復隱하여 이때에 다시 林藤出現하 競耽食之함.                                                     -俱舍論 -


 또 이런 것을 점차로 탐욕심을 내어 더 먹다 보면 지피병이 나오고 그것도 먹다보면 그것도 숨어버리는데 그 뒤에 자생적으로 나온 것이 임등(林藤)이라, 이것은 먹을 수 있는 물질적인 것으로 지구상에 나타나 서로 피차 먹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기왕 이렇게 먹는 버릇을 붙였으니까 안 먹으면 허출하겠지요.


 香槄…香氣있는 米稻로서 劫初時에 林藤이 隱한 後 自然히 地上에서 生함.

 有非耕種 香槄自生 衆共取之 以充昕食                     - 俱舍論 -


 다시 임등이 숨어버린 뒤에 자연이 지상에 나온 것이 향도(香稻)라, 향기가 있는 벼로써 지금같이 씨앗을 뿌려서 이루어진 벼나 보리와 같은 것이 아니고 자생적으로 나온 것입니다.

이런 것을 중생들이 다 섭취해서 자기 배를 채운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은 구사론에 다 있는 법문입니다.


  林藤香稻轉次食之 身光漸滅 日月方現          - 寄歸博 -


 임등이나 또는 그 뒤에 나온 향기로운 벼나 굉장히 맛있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향도를 더욱더 안 쉬고 먹는다면 몸의 광명이 점차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많이 먹으면 먹을수록 몸 광명은 점차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 뒤에 어두컴컴하니까 해와 달이 나오게 된다고 합니다. 이런 것이 얼마나 현실하고 들어맞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100% 다 믿습니다. 우리가 어째서 일종해야 하는 것인가. 무엇 때문에 적게 먹어야 하는 가를 참고하여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겠지요 겁초 인간은 아무것도 안 먹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생명 자체인 식식(識食)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본래 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 모든 것이 결국 식(識) 아닙니까? 일체가 유심(一切唯心)이라, 일체 만법이 오직 마음뿐이라 본래로 물질이 아닙니다. 우리 정신은 내나 물질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죽어지면 몸뚱이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우리 생명 자체는 죽음이 없는 것입니다. 생명 자체는 불생불멸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밖에서 꼭 얼마만큼의 칼로리가 제공되어야 지탱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버릇 때문에 거기에 최면되어 버린 것이지 우리 식(識) 자체에, 우리 마음 자체에 불생불멸한 생명의 힘이 갖추어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생명을 부양(扶養)시키는 근본은 결국은 우리 생명 자체인 것입니다. 그래서 식식(識食)이라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촉식(觸食)이라, 우리가 좋은 영화나 좋은 예술품이라 명미(明媚)한 풍경을 본다면 밥이나 다른 간식은 잊어버릴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정도가 촉식입니다. 또는 염식(念食)이라, 가사 원력(願力)을 세운다든가 반가운 사람과 곧 만나야겠다는 기대가 있다든가 할 때는 음식이 별로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단식(分段食)이라, 밥이나 물질로 된 음식이 되겠지요. 따라서 분단식을 많이 먹으면 먹을수록 우리한테 있는 정기를 뽑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워낙 과거 전생부터서 업을 짓고 대대로 사람으로 전변(轉變)해 왔기 때문에 그런 버릇이 습(習)이 되어 우리가 금생에는 너무 안 먹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