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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청화 큰스님 서적/5. 원통불법의 요체

제2절 바라밀(波羅蜜)과 수릉엄삼매(首楞嚴三昧)

               2절 바라밀(波羅蜜)과 수릉엄삼매(首楞嚴三昧)


 1. 십바라밀(十波羅蜜)과 보살십지(菩薩十地)


 가끔 그때그때 언급을 했습니다만 공부해가는 과정 즉, 위차(位次)를 가장 권위 있게 다룬 가르침이 보살십지(菩薩十地)입니다. 십지에 대해서는 연각십지나 또는 성문십지 등 여러가지가 있고, 다 소중한 것이지마는 가장 권위있는 전거(典據)로 삼을 법문은 화엄경에 있는 보살십지입니다.


 보살초지에 올라갈 때는 앞서 살펴본 사선근(四禪根:四加行)을 이미 닦은 정도로서 설사, 난법(煖法) 등 4선근의 법상(法相)은 모른다 하더라도 선근이 쌓여서 마음의 번뇌가 사라져 가면 마음이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이 맑고 고요하게 되어야 하는데 더욱 정진하여 범부(凡夫)의 이생성(異生性)을 초월하고 불성(佛性)을 견성하는 보살초지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十波羅蜜과 菩薩十地

 初엔 菩薩이 이미 貪心 三分二를 除하고 見惑을 破할새 비로소 聖性을 得하야 我․法 二空의 理를 證하고 大歡喜를 生하니 歡喜地요 同時에 一切를 救護하야 써 無住相의 布施를 行하고 此에 基하야 涅槃岸에 到할새 檀波羅蜜을 成就함이오


 二엔 殘餘一分의 貪心을 除함에 따라 일찍이 見惑에 基하였던 思惑을 除하는 同時에 戒波羅蜜을 成就할새 毁犯의 垢를 離한 身으로 하야금 思念이 淸淨하니 離垢地요


 三엔 嗔心을 抑制하고 忍辱波羅蜜을 成就하야 써 諦察法忍을 得하니 智慧가 顯發할새 發光地요


 四엔 精進波羅蜜을 成就하니 慧性으로 하야금 熾盛케 할새 焰慧地요


 五엔 嗔心의 根本이 除去되는 同時에 禪定波羅蜜을 成就하고 理事를 契合하야 써 眞俗二智의 相應을 成功함에 따라 塵沙惑을 除하게 되니 極難勝地요


 六엔 何等의 貪嗔 二心이 已盡함에 따라 慧波羅蜜을 成就하니 最勝智를 發하야 染淨이 無한 一眞法界의 行相이 現前할새 現前地요


 七엔 貪嗔已盡에 따라 一分의 痴心이 除去되니 大悲心을 發하야 方便波羅蜜을 成就하고 二乘의 自度를 遠離할새 遠行地요


 八엔 이미 二乘을 遠離하고 菩薩의 大願을 發한지라 此地에사 願波羅蜜을 成就하고 無相觀을 作하야 任運無功用을 相續할 뿐이니 不動地요

九엔 力波羅蜜을 成就하고 十力을 具足하야 써 一切處에서 可度와 不可度를 知하야 能히 說法할새 善慧地요.


 十엔 障道無明의 根本을 斷盡하고 受用法樂智와 成熱有情智로써 智波羅蜜을 成就할새 無邊의 功德을 具足하야 無邊의 功德水를 出生함이 大雲이 淸淨의 衆水를 生함과 如함일새 法雲地니

 後의 四波羅蜜이란 第六을 開하야 十地에 配對한 者니라


 처음에는 보살이 이미 탐심(貪心)의 3분의 2를 제하고 견혹(見感)을 파할새, 견혹은 견해에 따른 번뇌요, 견도후(見道後)에 닦는 번뇌 습기(習氣)는 수혹(修惑) 또는 사혹(思惑)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견도전(見道前)의 범부지에서는 수행(修行)이라 하고 견도 후에 비로소 참다운 수도(修道)가 되는 것입니다.

 비로소 성인(聖人)의 성품을 얻어서, 진여불성을 현관(現觀)하여 즉, 불성과 계합하여 아(我) 법(法)이 공(空)한 도리를 증명하고, 내가 있다는 실아(實我)와 또는 법이 있다는 실법(實法) 즉, 금이요 다이아몬드요 또는 나요 너요 이런 것은 본래 실제에서 있지가 않다는 실법이 공한 도리를 증명한다는 말입니다.


 대환희를 생(生)하니 환희지(歡喜地)요, 우리가 근본 성품을 깨닫고 우주와 하나로 되어버리면 한량없는 기쁨을 느끼게 되어 환희용약하니 환희지입니다.

 동시에 일체를 구호하여, 본래 천지 우주와 하나가 되어버렸으니 나무도 내 몸이요 자기 원수도 내 몸이요 모두가 하나가 되어 자비심이 저절로 나오는 이른바 동체대비(同體大悲)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주상(無住相)의 보시를 행하고, 자타가 없거니 상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것에 근거해서 열반안(涅槃岸)에 이를새, 해탈의 언덕에 이른다는 뜻으로서 모든 번뇌와 일체 만사에 걸리지 않는 깨달음의 경계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단(檀)바라밀을, 보시바라밀을 바로 성취한다. 그전에는 보시하기 싫어도 체면 때문에 주기도 하고 위선을 여읠 수가 없었으나 나와 남이 본래 둘이 아니니 상(相)이 없는 무주상(無住相)의 보시를 행한다는 것입니다.


 제2에는 나머지 일분의 탐심을 제(除)함에 따라, 보살 초지에서는 3분의 2를 제거했지요. 따라서 보살 초지에서 견성오도를 했다하더라도 어떤 경계에 부딪치면 번뇌를 일으킬 때도 있으나 파계(破戒)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2지(二地)에서는 나머지 3분의 1의 탐심의 뿌리까지를 뽑는 것입니다. 저번에 소승4과 중 수다원(須陀洹:豫流果)과 다음의 사다함(斯陀含)과까지도 탐심을 다 끊어버리지 못하고 약간 남아있기 때문에 일래과(一來果)라, 욕계에 한번 와서 공부해 가지고 성취한다고 하였습니다.


 일찍이 견혹(見惑)에 근거했던 사혹(思惑:修惑)을 제(除)하는 동시에, 사혹 즉 수혹이 분별에 근거해 있던 것이므로 이치만 통해버리면 과거 습기는 남아있을 망정 다시 새삼스럽게 번뇌를 일으킬 필요는 없겠지요. 계(戒)바라밀을 성취할새, 이미 범한 허물이라도 여윈 몸으로 하여금 사념(思念)이 청정하니 이구지(離垢地)요, 파계한 허물은 보살2지가 되어야 비로소 가시게 됩니다. 사혹을 제(除)하여 우리 생각에 있는 습기까지도 어느 정도 끊어버려야 과거에 지었던 파계의 허물, 이미 지었던 번뇌의 때를 벗어나는 경계라는 말입니다.


 제3에는 진심(嗔心)을 억제하고, 진심이 뿌리가 더 깊습니다. 탐심을 다 끊어버렸다 하더라도 물론 미세한 것이지만 진심의 습기는 아직 남아있는 것입니다. 인욕(忍辱)바라밀을 성취하여서 체찰법인(諦察法忍)을 얻으니, 모든 것을 뚜렷이 본래대로 여법히 통찰할 수 있는 것을 얻어서 지혜가 현발(顯發)할새 발광지(發光地)요, 우리가 천안통 같은 신통을 하려면 적어도 발광지까지 정진해야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참선 수자가 되면 한사코 발광지까지는 밀어붙여야겠지요. 우리 자성이 본래 광명인데 본전은 좀 찾아야만 합니다.


 제4에는 정진(精進)바라밀을 성취하니 혜성(慧性)으로 하여금 치성케 할새 염혜지(焰慧地)요, 더욱더 지혜가 현발한다는 말입니다.


 제5에는 진심(嗔心)의 근본이 제거되는 동시에, 품위가 있고 자비심이 좀 있다 하여도 기분이 사나울 때는 찌푸리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참선을 오래 했다는 수행자도 기분이 언짢으면 불현듯 진심(嗔心)이 나오는 것인데, 진심의 근본이 제거되어야 선정(禪定) 바라밀을 성취하는 것이며, 진정한 선정이 된다면 마땅히 진심으로 동하는 마음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5지에서 비로소 선정 바라밀을, 참다운 깊은 선정을 성취한다는 말입니다. 리사(理事)를 계합(契合)하여서, 원리나 현상이나 상대나 절대나 모든 상대관념을 다 비워버리고 걸림 없는 하나로 된다는 말입니다. 앞에는 약간 어렴풋이 계합하였지만 이제는 온전히 계합이 되어서 진속이지(眞俗二智)의 상응(相應)을 성공함에 따라 진사혹(塵沙惑)을, 항하사같은번뇌를 다 제거하게 되니 지극히 극복하기 어려운 극난승지(極難勝地)를 성취하게 됩니다.

제6에는 하등의, 이렇다 저렇다 할 탐심 진심이 이미 끊어짐에 따라 혜(慧)바라밀을 성취하니 최승지(最勝智)를 발하여 염정(染淨)이, 염오되고 또는 청정함이 없는 일진법계(一眞法界)의 행상(行相)이 현전(現前)할새 현전지(現前地)요, 6지에 이르러야 삼천대천세계를 앉아서 훤히 볼 수 있는 경계가 됩니다. 마치 손바닥에다 암마라(Amra 과일 이름)과를 하나 놓고 보는 것과 같이 삼천 세계를 확연히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현전하므로 모든 현상을 다 통달하는 경지라는 말입니다.


 제7은 탐․진이 이미 끊어짐에 따라 남아있던 일분의 치심이 제거되니, 물론 미세한 무명심은 아직도 남아 있겠습니다마는 대비심(大悲心)을 발하여 방편(方便)바라밀을 성취하고, 부처님께서 경을 설하실 때 그 심심미묘한 방편을 보십시오. 진정한 방편 지혜는 모든 탐진치 삼독심이 끊어져야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승(二乘)의 자도(自度)를 원리(遠離)할새, 성문이나 연각의 자기 스스로만을 제도하는 그런 옹졸한 경계를 떠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원행지(遠行地)요.


 8지에는 이미 이승(二乘) 곧 성문(聲聞)․ 연각(緣覺)을 멀리 여의고 보살의 대원을 발한지라 차지(此地)에서 원(願)바라밀을 성취하고 무상관(無相觀)을 작(作)하여 임운무공용(任運無功用)을 상속할 뿐이니 부동지(不動地)요, 그때는 아무런 것도 자기가 지어서 할 필요가 없이 신통도 마음대로 하고 모두가 다 마음먹는 대로 되어버린다는 말입니다.


 9에는 역(力)바라밀을 성취하고 십력(十力)을 구족하여서 일체처에서 가도(可度)와 불가도(不可度)를 다 알아서 능히 설법할새 선혜지(善慧地)요.


 10에는 장도(障道)무명의, 자성(自性)을 가리운 근본 무명의 근본을 다 끊어버리고서 수용법락지(受用法樂智) 곧, 모든 영원한 안락, 극락세계를 다 수용할 지혜와 성숙유정지(成熟有情智) 곧 모든 유정을 성숙시키는 지혜로써 지(智)바라밀을 성취할새 무변(無邊)의 공덕을 갖추어서 무변의 공덕수를 출생하니 대운(大雲)이 청정한 진여불성의 물을 생(生)함과 같을새 법운지(法雲地)니, 후의 4바라밀이란 제6을 개(開)하여서, 곧 제6반야바라밀을 부연하여 십지(十地)에 배대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수행 정진할 때는 여러 가지 경전이나 조사(祖師) 스님 어록도 많이 있는데 특히 화엄경 10지 법문을 소홀히 하면 공부 경계를 자기 나름대로 그릇 해석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공부하는 과정이나 차서를 참고할 때는 꼭 화엄경 같은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 점검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2. 반야심경(般若心經)의 독해(讀解)


 반야심경을 모르는 불자가 재가(在家)나 출가(出家)나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스님 네들이야 더 말할 것 없이 숙달하신 내용이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해설할 필요도 없겠으나 금타 스님의 심경(心經) 번역은 누구나가 꼭 살펴볼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한국이나 중국, 일본을 통해서 반야심경의 번역이나 주석이 100종이 훨씬 넘는다고 합니다. 그런 가운데 훌륭한 강백(講伯)이 해설했다는 것도 상당한 오류가 있습니다. 곧, 반야사상의 당체즉공(當體卽空)의 도리를 제대로 설파를 못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꼭 참선만 해서 깨달은 것이 아니라 부처님 법문은 대도무문(大道無門)이기 때문에 경을 볼 때나 또는 기도나 주문이나 염불이나 우리 마음 자세가 본체인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를 안 여읜다면 모두가 다 참다운 공부가 되고 바로 참선과 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경을 보아도 정말로 진지한 마음으로 본다면 간경자 혜안통투(看經者慧限通透)라, 혜안이 통해서 공부가 성취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참선 수행자라 하더라도 경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선방에 들어가서 결제하면 볼 필요는 없습니다만 그러나 해제한 뒤에는 조사어록이라든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중요한 경전을 보는 것은 크게 조도(助道)가 됩니다. 게으름부리다가도 법문 말씀 한마디에 뜨끔하니 심기일전해서 마음에 사무친 경책을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般若波羅蜜多心經의 讀解


(心經은) 本師 釋迦牟尼佛께서 舍利子에 對하신 修道法門이니라

經文만의 素讀이 一이오

 二에 懸吐의 音讀과

 三에 訓讀이라

 四에 略解의 解諦만으로 了知하고

 五에 第二(懸吐의 音讀)와 第四(略解의 解讀)로 竝譏하다가

 六에 第三(訓讀)과 第四(解讀)로 合讀하니

 七에 意讀만으로 終하야

 八에 이를 悉皆 義釋할지라

 九에 觀解로 照了하고

 十에 黙照할새

 如實信의 信滿으로써 法에 住하야 如實解의 解滿으로써 實行하고 如實修行의 行滿으로써 實證하되 身證心悟의 證滿으로 成彿할진져


 반야바라밀다 심경의 독해(讀解)라

 심경은 본사 석가모니불께서 사리불(舍利弗)에 대하신 수도 법문입니다. 경문만 한번 읽고 다음에는 보다 세밀히 읽기 위해서 토를 붙여서 음독(音讀)하고 다음에는 새기면서 읽고 다음에는 조금 더 풀이해서 뜻을 헤아리고 제5에는 현토(懸吐)의 음독과 제4의 약해(略解)의 해독(解讀)도 아울러서 읽어가다가 제6에는 훈독(訓讀)과 제4의 해독을 같이 아울러서 읽어가게 되면 점차로 뜻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제7에는 읽지도 않고 뜻만 살피고서, 우리가 경을 볼 때도 소리를 안 내고 가만히 참선하는 자세로 비추어 볼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8은 모두를 다 뜻만으로 해석하고 9에는 관해(觀解)로 비추어 보고 제10에는 묵조(黙照)해서 비추어 본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읽다보면 결국은 독서백번(讀書百番) 의자통(意自通)이라, 스스로 통한다고 하듯이 처음에는 건성이라 하더라도 자꾸만 읽어가다 보면 성인의 말씀이기 때문에 또는 우리 마음이 본래 불성(佛性)이기 때문에 점차로 자기 마음이 밝아져 불성과 걸맞은 여법한 믿음이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여실(如實)한 신(信)의 신만(信滿) 곧, 여실한 믿음이 원만해진다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별로 깊지 않은 옅은 믿음이겠습니다만, 제법이 공(諸法空)한 도리를 직설로 설파한 법문은 착실하게 보면 볼수록 더욱더 공(空)에 사무치게 되어 신앙심을 깊게 해줍니다.

 법에 주(住)하여 여법한 해석이 원만해지므로써 여실(如實)한 수행이 되고 여실한 수행이 원만하므로써 실증(實證)하는 것이니 우리 몸으로 증(證)하고 마음으로 깨닫는 신증심오(身證心悟)는 원래 둘이 아닙니다. 마땅히 참다운 깨달음은 마음도 깨닫고 몸도 아울러 증명이 되어서 우리 몸도 속화된, 물질화된 소조사대(所造四大)가 순수한 4대인 능조사대(能造四大)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소위 환골탈태(換骨奪胎)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생리와 심리가 바꿔진다는 말입니다. 증만(證滿) 곧 원만한 증득(證得)으로 성불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般若心經의 略解

序分 第一


(心經 현토)

 

三身(삼신) 四智(사지)에 萬德(만덕)을 具備(구비)한 一大人(일대인)의 大自在境(대자재경)을

 

觀自在(관자재)의 菩薩(보살)이

觀察(관찰)하는 菩薩(보살)이

行深般若波羅密多(행심반야바라밀다)

深密(심밀)의 正智(정지)로써 彼岸(피안)에 到(도)하는 法(법)을 修行(수행)할

 

時(시)에

時(시)에

照見五蘊皆空(조견오온개공)하야

먼저 妄情(망정)으로 임의 分別(분별)하든 色法(색법)인 色蘊(색온)과 心法(심법)인 受想行識(수상행식)의 四溫(사온)은 일즉히 假相假行(가상가행)으로서 名相(명상)이 本(본) 空(공)일새 五蘊(오온)의 皆空(개공)함을 照見(조견)하야

 

度一切苦厄(도일체고액)이니

生老病死(생노병사)의 四苦(사고)를 主(주)로 한 一切苦厄(일체고액)의 苦海(고해)를 渡(도) 하나니

 

  

 반야심경의 약해(略解)를 보겠습니다.

 어떤 경전이나 서분(序分)이 있고 정종분(正宗分)이 있고 유통분(流通分)이 있습니다. 서분은 서론이요. 본론이 정종분이고 결론은 유통분인 것입니다.


 서분이라, 관자재(觀自在)의 보살이; 삼신사지(三身四智)에 모든 공덕을 구비한 일대인(一大人)의 대자재경(大自在境)을 관찰하는 보살이, 관자재보살은 관세음보살과 같은데 이렇게 깊은 뜻이 있습니다. 관자재보살을 풀이하면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의 삼신(三身)과 본래 진여불성에 갖추어 있는 지혜인 성소작지(成所作智) 묘관찰지(妙觀察智) 대원경지(大圖鏡智) 평등성지(平等性智)의 무량한 지혜와 만덕을 갖추어 있는 경계를 다 관찰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주 전체의 성품과 현상을 조금도 빠짐없이 갖추어 볼 수 있는 보살이 이른바 관세음보살이라는 말입니다. 보살이란 진리를 여법이 통찰하고 행하는 이를 말합니다.


 다음에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심밀(深密)의, 깊고 비밀스러운 바른 지혜로써 피안(彼岸)에, 해탈의 언덕에 이르는 법을 수행할 때에,


 조견오온 개공하야; 먼저 망정(妾情)으로 이미 분별하던 색법인 색온(色蘊)과 심법인 수상행식의 사온(四蘊)은 일찍이 가상가명(假相假名)으로서, 참다운 상도 아니고 참다운 이름도 아닌 명과 상이 원래 공할새 오온이 다 공임을 비추어 봐서도 일체고액이니, 생로병사를 주로 하는 일체고액의 고해를 제도하나니



正宗分 第二(정종분 제이)

舍利子(사리자)야 色不異空(색불이공)이요 空不異色(공불이색)일새 色卽是空(색즉시공)이오 공즉시색(공즉시색)이라 受想行識(수상행식)도 亦復如是(역부여시)니 舍利子(사리자)야 是諸法空(시제법공)의 相(상)이

舍利子(사리자)야 色(색)이란 空性(공성)의 如如相(여여상)으로서 色體(색체)가 別有(별유)함이 않이오 空體(공체)의 幻華(환화)일새 色(색)이 空(공)과 不異(불이)하고 空(공)이 色(색)과 不異(불이)하야 空(공) 그대로 色(색)이오 色(색) 그대로 空(공)이라 四溫(사온 : 受想行識(수상행식))도 또한 그러하니 舍利子(사리자)야 이러한 五蘊(오온 : 色受想行識)의 諸法(제법)이 本空(본공)한 實相(실상)은

 

不生不滅(불생불멸)이며

元來(원래) 生(생)하였음이 아니니 滅(멸)하지 못하고

不垢不淨(불구부정)이며

染垢(염구)하지 않았으니 洗淨(세정)하지 못하고

不增不減(부증불감)일새

欠縮(흠축)없이 圓滿(원만)하니 增減(증감)하지 못할지라

是故(시고)로 空中(공중)에 無色(무색)이라 無受想行識(무수상행식)이니

그럼으로 諸法空(제법공)의 實相(실상)엔 色(색)이란 假相(가상)도 無(무)하고 受想行識(수상행식)이란 假名(가명)도 無(무)하야 無明(무명)이란 假相假名(가상가명)의 總代名詞(총대명사)로서 根本無明(근본무명 : 無受想行識(무수상행식))이 無(무)하니

 

無眼耳鼻舌身意(무안이비설신의)요

六根(육근 : 眼耳鼻舌身意(안이비설신의))도 無(무)하고

無色聲香味觸法(무색성향미촉법)이오

枝末無明(지말무명 : 六根(육근))이 無(무)하니 六塵(육진 : 色聲香味觸法(색성향미촉법))도 無(무)하며

 

無眼界(무안계)요 乃至(내지) 無意識界(무의식계)일새

이미 根塵(근진 : 六根六塵(육근육진))이 無(무)하니 前五識(전오식)의 所智境界(소지경계 : 眼識界․耳識界․鼻識界․舌識界․身識界(안식계․이식계․비식계․설식계․신식계))도 無(무)하며

 

無無明(무무명)이라 亦無無明盡이며

無明(무명)이란 都是本無(도시본무)할새 無明(무명)의 盡(진)할 것도 無(무)하며

 

乃至無老死(내지무노사)라 亦無老死盡(역무노사진)이며

따라서 行(행)․識(식)․名色(명색)․六處(육처)․觸(촉)․受(수)․愛(애)․取(취)․有(유)․生(생)도 無(무)할새 乃至(내지) 老死(노사)의 盡(진)할 것도 無(무)하며

 

無苦集滅道(무고집멸도)

이와 같이 三世(삼세)의 苦果(고과)와 그 集因(집인)을 밝히신 十二支(십이지)의 因緣法(인연법)이란 곧 五蘊法(오온법)에 基(기)한 者(자)로서 實相(실상)에 本無(본무)할새 修道證滅(수도증멸)할 것도 無(무)하니

 

無智(무지)라 亦無得(역무득)하야 以無所得(이무소득)일새 故(고)로

已上(이상) 五蘊法(오온법)의 凡夫智(범부지)와 十二因緣法(십이인연법)의 緣覺智(연각지)와 四諦法(사제법)의 聲聞智(성문지) 等(등) 一切(일체) 有爲法(유위법)의 有漏智(유루지)란 夢幻泡影(몽환포영)을 計執(계집)함과 如(여)하야 皆是(개시) 虛妄(허망)일새 一切有漏(일체유루)의 智(지)가 無(무)하고 따라서 有漏(유루)의 得(득)도 無(무)하며 生死有漏(생사유루)를 得(득)할 바가 無(무)함으로

 

菩提薩埵(보리살타)는

諸相(제상)의 無明雲(무명운)을 開(개)하고 非相(비상)의 佛性日(불성일)을 見(견)하는 開士(개사)는

 

依般若波羅密多(반야바라밀다)니 故(고)로

無爲法(무위법)의 無漏智(무루지)로써 涅槃岸(열반안)에 到(도)하는 法(법)에 依(의)함으로

 


心無罣碍(심무괘애)요 無罣碍故(무괘애고)로 無有恐怖(무유공포)라 遠離顚倒夢想(원리전도몽상)하고 究竟涅槃(구경열반)하나니

心(심)에 有漏(유루)의 罣碍(괘애)가 無(무)하고 罣碍(괘애)가 無(무)함으로 無明心(무명심)의 極端(극단)인 死厄(사액)의 恐怖(공포)가 無(무)해짐에 따라 一切(일체)의 顚倒夢想(전도몽상)을 遠離(원리)하고 涅槃(열반)에 究竟(구경)하나니

 

三世諸佛(삼세제불)도 依般若波羅密多故(의반야바라밀다고)로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득아누다라삼먁삼보리)시니라

三世諸佛(삼세제불)도 如此(여차) 修行(수행)하야 無上菩提(무상보리)를 證得(증득)하시나니라



 본론인 정종분(正宗分)에,

 사리자야 색불이공이오 공불이색일새 색즉시공이오 공즉시색이라; 사리자야 색(色)이란 공성(空性)의 여여상(如如相)으로서, 색이 원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 공성 그대로 인연 따라 그림자 같은 상을 내었다는 말입니다. 즉 어느 상이라도 진리에 맞는 여법한 상입니다. 색이란 그 성품이 공(空)이라는 것이지 없던 것이 나오고 진리에 안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슨 색이든지, 무슨 물질이나 모두가 다 본체에서 본다면 진여의 여법한 현상이라는 말입니다. 색체가 따로 있음이 아니요, 공체에서 피어나오는 허깨비 꽃, 허망한 그림자일새, 색과 공이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아서 공 그대로 색이요 색 그대로 공이라, 분석한 뒤의 공이 아니라 바로 색즉공 입니다. 색 그대로 공이요 또는 공 그대로 색입니다. 진여불성이 어떻게 바꾸어진다 하더라도 변질이 되거나 변동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꿈같은 허환상(虛幻相)이 상만 나툴 뿐이기에 바로 즉공입니다. 물리학자처럼 분자를 원자로 분석하듯이 분석한 뒤의 공은 석공(析空)이고 반야심경의 공은 즉공(卽空)인 것입니다.


 수상행식도 역부여시니; 4온도 또한 그러하니 수와 상, 행, 식도 역시 그와 같이 공이라는 말입니다.


 사리자야 시제법공의 상이; 사리자야 이러한 색․수․상․행․식 오온의 제법이 본래 공한 실상(實相)은,


불생불멸이며 불구부정이며 부증불감일새; 원래 생하였음이 아니니 멸하지 못하고, (보통은 생도 아니요 멸도 아니요 라고 번역합니다만 이런 풀이가 금타 스님의 독특한 풀이입니다.) 실상(實相)에서 통찰할 때는 원래 생겨나지 않았으니 멸할 것도 없고, 염구(染垢)되지 않았으니, 원래 오염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오염되게 보는 것은 우리 중생이 잘못 보는 것입니다. 세정(洗淨)하지 못하고, 다시 씻을 필요가 없고, 흠축없이 원만하니 증감하지 못할지라, 아무 흠절이 없이 원만 무결하니 새삼 더하고 덜고 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시고로 공중에 무색이라 무수상행식이니; 그러므로 제법공의 실상은 색이란 가상(假相)도 무(無)하고 또는 수상행식이란 가명(假名)도 무하여 무명(無明)이란 가상가명의 총 대명사로서 근본무명이 무하니, 그 무명이란 것은 결국 가상을 실상으로 보고 가명을 실제로 생각하는 데서 생기지 않습니까. 무명의 시초도 제법의 상을 여실하게 보지 못해서 무명이 나오는 것입니다.


 무안이비설신의요 무색성향미촉법이요; 안이비설신의 6근(根)도 무하고 지말무명인 6근이 무하니 또 6진(塵)인 색성향미촉법도 무하며, 무안계요 내지 무의식계일새; 이미 6근과 6진이 무하니 전5식의 소지경계(所智境界) 즉 안식계․이식계․비식계․설식계․신식계도 무하고 능지(能智)의, 능히 분별하는 의식계도 무하며,


 무무명이라 역무무명진이며; 무명이란 도시 본래 없을새 무명을 다할 것도 없으며, 무무명 역무무명진의 풀이를 잘 새기십시요. 무명이란 본래 없으니 무명을 없앨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무명이 있어야 무명을 여읠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내지무노사 역무노사진이며; 따라서 행․식․명색․육처․촉․수․애․취․유․생도 무할새, 반야심경에서 무명이나 내지 무노사는 십이인연법을 인용한 것입니다. 원래 무명이 없거니 무명에서 파생되는 행이나 식이나 다 응당 없고 따라서 늙어서 죽는 것도 결국은 없다는 말입니다. 노사를 다할 것도 없다, 즉 노사가 없다고 하면 끊을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원래 무명이 없기 때문에 무명에서 파생된 십이인연법(十二國緣法)의 십일지(十一支)가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무고집멸도니; 무고집멸도는 상당히 세밀히 풀이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삼세의 고과(苦果) 곧 삼악도(三惡道)나 우리 중생이 윤회하는 육도(六道)는 고의 과보입니다. 과거세에 지은 무명과 삼독심에서 업을 지은 고의 과라는 뜻입니다. 그 집인(集因)을 밝히신 십이지의 인연법이란 곧, 5온법에 근거한 것으로서 원래 실상에는 없을새 수도증멸(修道證滅)할 것도 없다. 우리가 공을 미처 모를 때 이렇게 저렇게 분별하는 것이지 제법공의 경계 곧 색도 공이요 또는 우리 마음 우리 관념도 공이요 모두 공이라는 도리를 안다면 사제(四諦)법문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고나 집이나 또는 멸이나 도나 모두가 다 색(色)이 있고 심(心)도 있는 데서 나온 것이지 색심(色心)이 공하다면 이런 것이 어디에 붙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지라 역무득하야 이무소득일새 고로; 이상 5온법의 범부지(凡夫智)와 십이인연법의 연각지(緣覺智)와 사제법의 성문지(聲聞智) 등 일체유위법의 유루지(有漏智)란, 물론 부처님쩨서 아함경에서 오온법이나 십이인연법을 말씀하신 법문이 유루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표면에 나타난 문자로서는 색심(色心)을 설하고 본래 자성자리를 분명히 말씀한 것이 아니기에 아직 방편설이 되겠지요. 몽환포영 곧 꿈이나 허깨비나 또는 거품이나 그림자같이 허망한 것들을 집착함과 같이 모두가 한결같이 허망하니, 일체 유루(有漏)의 지(智)가 무하고 따라서 유루의 득(得)도 무하며 생사유루(生死有漏)를 득할 바 없으므로, 이무소득고 즉 아무런 소득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무엇이 잘 되었다, 잘났다, 또 무엇이든 많이 안다, 이런 것도 결국은 때 묻은 번뇌의 득이므로 얻을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생사윤회할 까닭이 없다는 뜻입니다.


 보리살타는 의반야바라밀다니 고로; 모든 상의 무명운(無明雲)을 걷고서 상이 아닌 불성일(佛性日)을 견(見)하는 개사(開士)는, 개사는 살타보살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반야심경을 여실히 아는 정도가 되면 벌써 보살지위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공을 알면 대승초입(大乘初入)이라, 대승에 입문하는 것이므로 반야를 모르면 대승이 못되는 것입니다. 무위법(無爲法)의 무루지로써 열반안에 이르는 법에 의하므로,


심무괘애요 무괘애고로 무유공포라 원리전도몽상하고 군경 열반하나니; 마음에 유루의 괘애(罣碍)가, 유루의 그림자나 거리낌이 없고 괘애가 없으므로 무명심의 극단인 죽음의 공포가 없어짐에 따라 일체의 전도몽상을 멀리 여의고 열반의 구경각(究竟覺)을 성취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 범부심은 잠재의식이나 현재의식이나 간에 모두가 다 죽음의 공포를 면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할 때는 응당 죽음의 공포는 따르겠지요. 마음에 아직 번뇌가 남아있는 거리낌이 없어지고 또는 그런 거리낌이 없으므로 무명심의 극단인 죽음의 공포가 없어짐에 따라 일체의 거꾸로 보는 전도몽상을 멀리 여의고 열반을 구경(究竟)한다는 말입니다.


 삼세제불도 의반야바라밀다고로 득 아뇩다라 삼막삼보리시니라; 삼세제불도 이와 같이 수행하여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증득하시나니라, 삼세제불도 반야바라밀를 수행하셨습니다. 따라서 오온이 개공한 반야의 지혜를 떠나서 성불할 수 없는 것입니다.



流通分 第三(유통분 제삼)


故知(고지)하라 般若波羅密多(반야바라밀다)가 是大神呪(시대신주)며

 

故(고)로 알아라 般若波羅密多(반야바라밀다)가 究竟覺(구경각)까지 成就(성취)하는 妙不可思議(묘불가사의)의 大總相法門(대총상법문)이며

 

是大明呪(시대명주)며

 

根塵識(근진식)의 諸惑(제혹)을 斷(단)하고 寂滅(적멸)을 證(증)하니 度無極(도무극)의 三明(삼명)과 六通(육통)이 生(생)하는 大方便(대방편)이며

 

是無上呪(시무상주)며

 

八萬藏經(팔만장경)을 讀破(독파)하고 七千百公案(칠천백공안)을 立證(입증)함보다 勝(승)한 法(법)이며

 

是無等等呪(시무등등주)니

 

最上無比(최상무비)의 摠持(총지)니

能除一切苦(능제일체고)요

 

以上(이상) 그대로의 解義修行(해의수행)이 堅固(견고)하면 多羅尼神通藏(다라니신통장)에 住(주)할새 諸魔(제마)가 不侵(불침)이오

 

眞實不虛(진실불허)라

 

一切(일체)의 虛妄相(허망상)을 離(이)한 實相(실상)의 智慧(지혜)라

 

故(고)로 說般若波羅密多呪(설반야바라밀다주)일새

 

故(고)로 이의 實相智(실상지)인 般若(반야)로써 到彼岸(도피안)하는 約法(약법)을 重說(중설)할새

卽說呪曰(즉설주왈)

 

곧 般若波羅密多(반야바라밀다)의 話頭(화두)요 公案(공안)이라 이를 더욱 短縮(단축)하여 總括(총괄)하면

 

揭諦揭諦波羅揭諦波羅僧揭諦菩提沙婆訶(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보디사바하)

 

揭諦揭諦波羅揭諦波羅僧揭諦菩提沙婆訶(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모디사바하)라시니 般若波羅密多呪(반야바라밀다주) 그대로 般若波羅密多(반야바라밀다)의 因(인)이 되고 果(과)가 됨을 了知(요지)할지니라

 


 유통분 (流通分) 이 라.

 고지하라 반야바라밀다가 시대신주며 시대명주며 시무상주며 시무등등주니; 고로 알아라 반야바라밀다가 구경각까지 성취하는 묘불가사의(妙不可思議)의 대총상 법문이며 6근 6진 6식의 제혹(諸惑)을 단하고 적멸을, 해탈을 증하니, 도무극(度無極) 곧 다시 더 높은 곳이 없는 가장 수승한 삼명(三明:天眼通․宿命通․漏盡通)과 육통(六通:三明에 神足通․他心通․天耳通을 합한 神通)이 생하는 대방편이며 팔만대장경을 독파하고 1700공안(公案)을 입증함보다 수승한 법이며 최상무비(最上無比)의 총지(總持)니,


능제일체고요 진실불허라; 이상 그대로의 뜻을 알고서 수행이 견고하면은 다라니신통장 곧 일체재앙을 없애고 모든 공덕을 갖추는 법인 다라니신통장에 머물게 되니 모든 마구니가 침범할 수 없고 일체허망상을 떠난 실상(實相)의 지혜입니다.

 고로 반야바라밀다주(般若波羅蜜多呪)를 설(說)할새 곧,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디사바하라 한다. 이 주문은 실상지(實相智)인 반야로써 도피안(到彼岸)하는 압축된 간략한 법문으로서 곧 반야바라밀다의 화두(話頭)요 공안이 되니 반야바라밀다주 그대로 인(因)이 되고 과(果)가 됨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음은 금타 스님이 주를 붙인 것입니다.


 蓋明心而 見性이오 見性而 悟道일새 先修後悟란 修는 迷修요 先悟後修란 修는 悟修니 修法에 있언 講經이나 誦呪나 參禪이나 觀法이나 그의 方法은 多少 差異가 有하지만 迷․悟의 境은 一也요 證이란 身證이며 悟란 心悟일새 身證心悟를 證悟라 云하나니라


 대저 마음 밝힘이 견성이요, 견성이 바로 오도일새 먼저 닦고 뒤에 깨닫는 선수후오(先修後悟)란 미혹된 수행법이요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선오후수(先悟徨修)란 참다운 수행법인 오수(悟修)이니, 수법에 있어서 경을 보는 것이나 또는 송주나 참선이나 관법이나 그 방법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천수경으로 깨달으나 염불하고 깨달으나 화두로 깨달으나, 깨달은 경계는 둘이 아니요, 증(證)이란 몸으로 증하는 것이요 오(悟)란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니 신증심오( 身證心悟)를 증오(證悟)라 합니다.


  3. 수릉엄삼매(首楞嚴三昧)


 1) 삼매도(三昧圖)


 이 금강심론은 제가 허두에도 말씀 드렸습니다마는 굉장히 중요한 논서(論書)입니다. 나중에 참고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이 가운데에 해탈십육지(解脫十六地)도 있고 또는 수릉엄삼매도가 있습니다. 이 그림을 보면 무엇이 무엇인지 어리둥절하겠지요.


 저는 처음에 백양사(白羊寺) 운문암(雲門庵)으로 출가를 했습니다. 운문암에 가서 보니까 큰방에 이 삼매도가 부착되어 있는데 불교입문 정도는 알고서 출가를 했지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알 수는 없지마는 과거 숙세(宿世)의 인연이었던지 그것이 아주 귀중한 보배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착한 것을 제가 뗄 수는 없고 또 그 때는 대중이 다 분산되어 버려서 누구한테 물어 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때는 6․25사변 훨썩 전이기 때문에 산중에는 빨치산이 있어서 국군하고 싸우기도 하고 참 험악한 때입니다. 깊은 산중이라 먹을 것도 부족하고 또 조금만 의심쩍으면 끌려가서 문초를 받기도 하기 때문에 스님 네가 오래 살지 않았습니다.


 또한 운문암 가풍은 참선만 시키지, 밤에는 절대로 불을 못 켭니다. 그때, 그런 깊은 산중 절에는 초도 없고 석유 호롱불 밖에 없었는데 더러 초가 있을 때는 부처님 앞에만 간단히 잠시간만 밝힙니다. 또 사시(巳時)마지를 올리고서 하루 한 때만 먹기 때문에 사시에 부처님한테 마지 올릴 때만 촛불을 좀 켜고 조석예불은 어두운 법당에서 죽비로 딱딱 치고 예불을 모십니다.

 그런 때에 저는 거기서 공양주도 지내고 부목(負木)도 하려니까 너무나 고되기도 해서 '안 되겠구나. 다른 데에 가서 공부를 해야겠구나' 하는 마음이 생겨서 다른 데로 갈려고 마음먹었는데 이 수릉엄삼매도가 욕심나서 갈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떼어갈 수는 없고 할 수 없이, 아직 행자인지라 협착하고 누추한 뒷방에서 밤에 호롱불을 켜놓고서, 그것도 밖에 비치면은 어른 스님들한테 꾸중을 들으니까 해어진 모포로 창을 가리고서 삼매도를 베꼈습니다.

 나중에는 금타 스님께서 직접으로 그려서 복사한 수릉엄삼매도 3장을 가지고 나오기도 했습니다마는 저로 해서는 아주 인연 깊은 수릉엄삼매도 입니다.


 삼매는 무량 삼매이지만 보통 108삼매로 구분합니다. 백팔삼매 가운데서 가장 최고의 삼매가 수릉엄삼매입니다.

 이 수릉엄삼매는 바로 일체 번뇌를 모조리 없애는 멸진정(滅盡定)을 성취해야 얻을 수 있는 삼매인 것입니다. 수릉엄삼매는 다른 이름으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라, 또는 금강삼매(金剛三昧) 곧 어떤 번뇌로도 파괴될 수가 없고 우주 만유의 근본 성품인 금강불성을 훤히 깨달아 일체종지(一切種智)를 다 얻는 삼매이며, 또는 사자후삼매(獅子吼三昧)라, 사자의 포효가 뭇 짐승들을 조복 받듯이 이 보다도 더 깊은 삼매는 없다는 말입니다. 또는 바로 불성(佛性)이라, 수릉엄삼매란 바로 불성을 말합니다. 불성자리를 조금도 흠절이 없이 훤히 투철하게 깨닫는 삼매가 수릉엄삼매인 것입니다.

 우리는 금생에 꼭 수릉엄삼매에 들어야 하겠습니다. 불경에 보면 수릉엄삼매에 들 때는 마치 삼천대천세계를 자기 손바닥 안에 놓고 소상히 볼 수 있는 부사의한 지혜가 성취된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지혜가 분명히 본래로 갖추어 있는 것입니다.


  


 2) 삼매도결 (三昧圖訣)


 금타 스님께서는 수릉엄삼매도결을 상편만 저술하시고 오십세에 세연(世緣)을 마쳤습니다. 그래서 하편은 후래인들이 수릉엄삼매를 성취하여 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首楞嚴三昧圖訣 上篇

 本訣은 心으로 爲宗일새 空으로 爲體요 性相으로 爲用이라 此에 基하야 圖示한 首楞嚴三昧의 境界圖를 了解케 함인져.


 본결(本訣)은 마음으로 종(宗)을 삼을새 공(空)'으로 체(體)를 삼고 성상(性相)으로 용(用)을 삼는데 이에 근거하여 도시(圖示)한 수릉엄삼매의 경계도를 깨달아 알게 하기 위한다는 의미입니다.


 수릉엄삼매에 들어서 우주를 관찰할 때 우주의 모든 일진법계(一眞法界) 현상을 이렇게 도시(圖示)한 것입니다. 따라서 수릉엄삼매도를 보려면 이 수릉엄삼매도결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수릉엄삼매도에는 팔만사천 부처님 법문 가운데 중요한 법문들이 발췌되어 도식화(圖式化)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 가운데에 있는 아미타불은 바로 대일여래(大日如來)로서 법신, 보신, 화신의 삼신일불(三身一佛)이요, 바로 자성미타(自性彌陀)라고 하는 자성(自性)의 명호(名號)입니다. 극락세계 교주인 아미타불이란 뜻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성이 바로 아미타불이고 우주의 실상이 바로 극락이므로 부처와 중생과 제법이 본래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릉엄삼매도를 간략히 말하면 불성도(佛性圖) 자성도(自性圖)인 것입니다. 삼매도의 한가운데 불위(佛位)로 향해서 닦아 올라가는 것입니다. 본래는 심천(深淺) 상하(上下)도 없지만 중생 경계에서 중생을 성불로 유도하는 면에서 바깥의 낮은 데에서부터 차근차근 깊이 닦아 들어가는 법의 심천 한계를 표시하였습니다.


 3계(三界) 28천(二十八天)이라든가 또는 지․수․화․풍․공 등 불교 우주관이 다 들어 있습니다. 이른바 물리학적인 표현을 구태여 쓴다면 지․수․화․풍․공 5대(五大)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고 이것을 생명적으로, 인격적으로 표현하면 오지여래(五智如來)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있는 네모(□)는 지(地)를 의미하고 원(○)은 수(水)를, 삼각(△)은 화(火)를, 반원(♡)은 풍(風)을, 그리고 가운데 향공상(Ɵ)은 또 점()으로서 공(空)을 상징합니다. 불교의 체계는 모두가 정밀하고 엄정한 체계입니다. 헛되고 모호한 것이 없습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사제(圖諦)법문도 얼마나 철학적이고 논리적입니까. 12인연법도 호리도 군더더기가 없는 바로 우주의 도리로 천지 우주의 운행(運行)과 윤회(輪廻)하는 법도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래쪽은 현대 물리학과 불교의 분석적인 법상과 대비해서 표시한 것입니다. 적어도 석존(釋尊)이후에 물리학과 불교의 해석학적인 교리와 대비해서 말씀한 분은 금타 스님이 처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점선과 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직선은 지혜〔智:金剛界〕를 의미하고 점선은 리(理:胎藏界)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정(定)이나 혜(慧)나, 지혜(智慧)나 리(理)나, 지(止)나 관(觀)이나 모두가 다 심심미묘한 공덕으로서 본래 우주 본체에 갖추어 있는 것입니다. 리(理)는 그 공덕으로 말하면 우주 만법을 섭인(攝引)하는 인력(引力)이요 자비(慈悲)입니다. 자비와 지혜는 본원적으로 우주에 갖추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자비심을 못 낸다든가 반야 지혜가 없다면 공부가 안되겠지요. 따라서 리(理)와 지(智)가 이렇게 서로 서로 상즉상입(相卽相入)하는 원융무애한 관계를 리지불이(理智不二)라 합니다.


여러 가지로 구분하는 것은 우리 중생들이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분별 지혜로 구분한 것이지 원융무애인 경계이기 때문에 리(理) 따로 있고 지(智) 따로 있는 것이 아니요 리와 지가 원래 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런 도리는 자세히 설명하기도 어렵고 너무 번쇄하게 설명하게 되면 분별 갈등이 되기 쉽습니다.

 다음은 불조(佛祖)의 명구문(名句文)을 해설하도록 하겠습니다.

上編序分의 名句文

「諸行」二字는 名이오「諸行無常」四字는 句며「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十六字는 文일새 自性의 體를 詮함이 名이오 義를 顯함이 句며 體用齋示의 文字가 文이니 本編은 首楞嚴三昧圖에 擧示한 佛祖의 若干 名句를 原文 或은 簒文으로써 引證하야 本訣의 序分에 代함이니라.


 상편 서분의 명구문이라,

 명구문(名句文)이란 것은 불경의 술어로서 명(名)과 구(句)와 문(文)으로 구성된 문장으로서 요즈음 말하는 문학적, 문법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경문(經文)을 말합니다.

 재행(諸行) 두 글자는 명(名)이요, 재행무상 네 글자는 구(句)며 재행무상 시생멸법 생명멸이 적멸위락 16자는 문(文)으로서 자성(自性)의 체(體)를 전(詮)하여 나타냄이 명(名)이요, 뜻을 나타냄이 구(句)며, 체와 용을 아울러서 보이는 문장이 문(文)이니, 본편은 수릉엄삼매도에 거시(擧示)한 불조(佛祖)의 약간 명구를 원문 혹은 찬문 곧 약간 풀이한 말씀으로써 인증(引證)하여 본결의 서분에 대함이니라,

 따라서 금강심론에 있는 법문들은 불조의 경론(經論)에서 많은 인용을 한 것입니다.


  首楞嚴

 「首楞嚴三昧經」 中에 「菩薩이 得 首楞嚴三昧하면 能以三千大千世界로 入芥子中하야 令諸山河日月星宿로 悉現케 하되 如故而不迫逃하야 示諸衆生하나니 首楞嚴三昧의 不可思議勢力이 如是라」시고「智度論」四十七에 「首楞嚴三昧者는 素言 健相이니 分別知諸三昧行相多少淺深함이 如大將知諸兵力多少라」하고「復次 菩薩이 得此三昧하면 諸煩惱魔及魔人이 無能壞者하나니 譬如 轉輪聖王主兵寶將의 所往至處에 無熊壞伏」이랐으며 「玄應音義」 二十三에 「首楞伽摩는 此云健行定이오 亦言 健相인 바 舊云首楞嚴也」랐고 「涅槃經」 二十七에「首楞嚴者는 名 一切事竟이니 嚴者는 名堅이라 一切畢竟而得堅固함을 名首楞嚴일새 以是故로 言首楞嚴定이며 名爲佛性이니 首楞嚴三昧者-有五 種名하야 一者 首楞嚴三昧요 二者 般若波羅蜜이오 三者 金剛三昧요 四者 獅子吼三昧요 五者 佛性이라 隨其所作處處에 得名이라」시니 首楞嚴이란 新云 首楞伽摩로서 健相이라 健行이라 一切事竟이라 譯한 佛所得의 三昧名인 바 健相이란 佛德이 堅固하사 諸魔가 能壞치 못 함일새요 健行이란 諸佛修行이 如金剛般若行임으로 써요 一切事竟이란 佛德의 究竟을 云함이니

 換言하면 一實相인 一相이오 一相인 健相일새 곧 首楞嚴이란 먼저 觀念的 一相三昧로써 健相인 實相을 見證하고 健行인 般若一行으로써 理事를 契合하되 如金剛의 堅固를 得하야 卽理卽事인 一切事에 通達究竟함이니라


 수릉엄삼매경에 '보살이 수릉엄삼매를 얻으면 능히 삼천대천세계가 개자(芥子)씨 가운데에 들어가서 모든 산하 일월성수로 다 나타나게 한다'함은 한도 끝도 없이 넓은 삼천대천세계가 개자씨 가운데 들어가서 산이나 내나 해나 달이나 별이나 모두를 다 나타낸다는 말입니다. '여고이 불박책(如故而不迫逃)이라' 이전에 있는 산이나 시냇물이나 또는 무엇이나 조금도 좁혀지지 않고서 '모든 중생에게 보이나니' 작은 것, 큰 것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중생의 차별 견해에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문제입니다. 이렇게 삼천대천세계를 아주 작다고 할 수 있는 개자씨 안에 들어가게 해서 능히 해나 달을 이전과 조금도 차이 없이, 줄이지 않고서 모든 중생에게 보이나니 '수릉엄삼매의 불가사의 세력이 이와 같도다' 하였습니다.


 생명의 실상인 진여불성은 대소(大小)나 높낮이의 차이나 또는 있다 없다는 상이나 모든 상을 다 떠났기에 들어가고 안 들어가고 또는 많다 적다 크다 작다 하는 구분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도론(智度論) 47에 수릉엄삼매자는 진언(秦言)으로 건상(建相)이니' 건상이란 다시 파괴할 수 없는 상이란 뜻으로 상을 떠난 실상을 말한 셈입니다. '모든 삼매의 행상을 알고 많고 적음과 깊고'옅은 것을 분별해서 다 아는 것이 마치 대장이 병력의 수를 아는 것과 같다'고 하였고 '또한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모든 번뇌마라든가 마군이가 능히 파괴할 수 없나니 마치 전륜성왕이' 전륜성왕은 마군이를 척파하고 선법을 지키는 왕으로 왕 가운데 가장 신성한 왕을 말합니다. '모든 병졸이나 장군들이 이르는 곳에, 마군이나 또는 번뇌가 덤빌 수가 없듯이 수릉엄삼매를 얻는다면 모든 마장이 능히 파괴할 수가 없다' 고 하였고


 현응음의(玄應音義) 23에 '수릉가마(首楞伽摩 Suramgama))는 건행정(健行定)이라, 이것도 역시 파괴할 수 없는 정(定)이요, 삼매며 다시 말하기를 건상(建相)인 바, 파괴할 수 없는 실상인 바 이전'경에서 말한 것은 수릉엄이니라' 하였고 또는 열반경 27에 '수릉엄자는 명일체사경(名一體事竟)이니' 모두를 다 할 수 있는 일체종지를 성취한다는 말입니다. '엄(嚴)이란 이름하여 견(堅)이라, 일체필경이라 모두를 다 마쳐서 견고부동함을 수릉엄이라고 이름할새 이런 고로 수릉엄정이라 말하며' 수릉엄은 가장 참된 건상 건행이란 뜻입니다. 파괴없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파괴할 수 없는 가장 깊고 견고한 삼매라는 말입니다. '또 바로 불성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수릉엄삼매는 다섯 종류의 이름이 있어서 하나는 수릉엄삼매요, 둘은 반야바라밀이요, 셋에는 금강삼매요, 넷에는 사자후삼매요, 사자가 백수의 왕이므로 삼매 가운데 왕이라는 뜻입니다. 다섯에는 불성이라, 그때그때 경우에 따라서 이름을 붙였다' 하였으니,


 수릉엄이란 수릉가마로서 건상이라, 바로 실상이라 건행이라, 여법한 삼매요 행위라 일체사경이라, 모든 일체 종지를 다 성취했다, 이렇게 번역하는데 부처님께서 얻는 삼매명인 바, 건상이란 불덕(佛德)이 견고하여 제마(諸魔)가 능히 파괴치 못 함일새요, 건행이란 제불(諸佛)의 수행이 금강반야행임과 같음으로 써요, 파괴할 수 없는 반야행이라는 말입니다. 반야는제법공의 지혜인데 파괴하려야 어떻게 파괴할 수 있겠습니까.


일체사경이란 불덕(佛德)의 구경(究境)을 말함이니, (여기까지는 각 경론을 의지했고 다음은 저자의 말이 됩니다. ) 바꾸어서 말하면 일실상(一實相)인 일상(一相)이요 (실상이 둘이나 셋이나 있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일상이란 것도 단순한 하나의 상(相)이 아니라 상대를 여읜 절대적(絶對的)인 실상입니다) 일상은 건상일새(여법한 상일새) 곧 수릉엄이란 먼저 관념적 일상삼매(一相三昧)로써 (우리가 아직 범부지 인지라 처음에는 관념적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존재의 실상을 깨닫고 우리의 마음이 불성과 온전히 결합되었다면 모르거니와 아직 그렇지 못한 중생 경계에서는 우선 관념적으로 부처님 말씀에 의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건상인 실상을 견증(見證)하고 또는 건행인 반야일행(般若一行)으로써 (건상과 건행인 여법한 수행은 바로 반야일행입니다. 제법공 도리를 놓치지 않는 수행이 이른바 반야일행이라는 말입니다. )


이와같이 리사(理事)를 계합하되 여금강(如金剛)의 견고를 득하여(금강의 견고함과 같음을 얻어서) 즉리즉사(卽理卽事)라 (리가 바로 사인) 일체사에 통달 구경함이니라, (일체 만사에 원만히 통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