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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청화 큰스님 서적/5. 원통불법의 요체

제3절 현상(現象)과 본체(本體)

            제3절  현상(現象)과 본체(本體)


 1. 물질(物質)과 에너지(Energy)


 오늘은 과학 얘기를 하겠습니다. 저는 과학에는 문외한이기 때문에 피상적인 상식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현대가 과학 만능시대이고 또한 현대 과학에서 부처님 말씀을 증명하는 학설이 나와 있고 그 내용이 우리가 수행정진 하는데도 조도(助道)가 될까 하여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통념으로는 절대 물질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산소나 수소나 그런 각 원소가 변치 않고 고유하게 그대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 상식적인 생각입니다. 특히 고전 물리학, 뉴우턴(Newton, Isaac 1643~1727)이나 또는 데카르트(Descartes,Rene 1596~1650)의 고전 물리학은 절대 물질, 절대 시간, 절대 공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런 정도의 과학 같으면 우리 마음공부에는 아무런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현대 물리학은 절대 시간, 절대 공간, 절대 물질이 없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제행무상(諸行無常) 또는 제법무아(諸法無我) 이른바 제법공(諸法空)의 반야(般若)도리를 현대과학은 증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양자역학(量子力學)이나 또는 아인슈타인(Einstein, Albert 1879~1955)의 상대성 원리(相對性原理) 등은 모든 것이 상대적으로 있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고유하게 있지 않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현대인으로서 제법공(諸法空)의 도리라든가 제법무상을 못 느끼는 것은 현대 과학도 모르는 소치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대 물리학, 현대 역학 이런 것을 대강이라도 윤곽을 살펴본다면 우리한테 가장 지겨운 번뇌인 제법(諸法)이 있다는 분별심, 우리한테 가장 무서운 병인 내가 있고 일체 만물이 우리가 지각하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유병(有病)을 최파(擺破)하는데 조도(助道)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서 물리학적인 지식을 윤곽적인 것 밖에는 잘 모르면서도 감히 중요한 것을 간추려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과학을 말하니까 괜히 필요 없이 이것저것을 번쇄하게 얘기한다는 생각을 가질 분도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특히 현대 물리학은 앞으로 두고두고 우리 수행인에게도 지극히 긴요한 상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런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아마 마지막이 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세기 종교 개혁자인 마르틴 루터(Luther,Martin 1483~1546)는 설법단(설교단)에 올라가면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이윽고 말을 꺼냈다고 합니다. 마르틴 루터 정도가 되면 우리가 말하는 법신불을 미처 깨닫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업장이 가벼워서 어렴풋이는 진여불성의 도리를 음미하고 느꼈을 것입니다. 다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못 만나서 마음이 확철대오로 온전히 트이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요한복음서에도 '나는 진리요 길이요 빛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틀림없이 루터는 설교하기에 앞서 눈을 감고서 진리에 대해서 조금도 빗나가지 않아야겠다는 서원을 하였을 것입니다.


 제가 과학을 말씀드리는 것은 여담이나 같은 것이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중노릇을 바르게 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일반 세속 사람들이나 또는 재가불자들은 우리출가사문들이 중노릇을 잘못한다고 지적도 많이 하고 규탄도 합니다. 우리 출가사문이 이렇게 모여서 공부하는 자리가 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는 더러 있다하더라도 우리 스스로 반성을 촉구하는 자리는 별로 없기 때문에 소중한 시간이라서 그때그때 마음 일어나는 대로 말씀을 드립니다마는 과연 그와 같이 지적 당한대로 우리가 지금 중노릇을 잘못하고 있는 것인가?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사, 우리가 도반을 사귀는 문제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 아닙니까? 삼종(三種) 선지식(善知識)이라, 선지식도 세 부류가 있는데 법으로 인도하는 교수(敎授)선지식, 또는 같이 절차탁마하는 동행(同行)선지식, 그리고 공부하는데 여러 가지 자료라든가 물질적으로 도와주며 외호하는 외호(外護)선지식입니다. 우리는 도반을 삼을 때 잘 생각해야 합니다. 스승이야 큰스님이 많이 계시니까 그때그때 법을 물으면 되는 것이고 또는 어차피 우리는 누군가가 베풀어주어도 살고 주지 않아도 아쉬운 대로 지낼 수 있으니까 외호문제는 별 문제가 아니겠지요.


 신라 때 무상(無相 680~756) 대사는 왕자로서 중국에 들어가 선지식을 만나 수행법을 간택하고 티벳트(Tibet)와 접경지로서 굉장히 교통 사납고 살기 어려운 험난한 지방인 사천성(四川省) 산중에서 공부하였는데 식량이 떨어지면 황토 흙을 주워 먹을 정도로 고행을 했습니다. 쌀이나 보리에만 불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황토 흙도 불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정말로 바른 마음, 사무친 마음으로 공부한다면 황토를 먹더라도 배탈도 안 나는 것입니다. 또는 의복도 남루한 채로 어떻게 검소한 생활이었던지 산에 왔던 포수들이 짐승인줄 알고 활을 겨누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두타행(頭陀行)을 한 스님으로서 마조(馬視道一 709~788) 대사의 스승이었다고 전해올 정도로 위대한 분이어서 지금 무상대사에 대해서 학자들 사이에는 아주 큰 관심사가 되고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벗을 사귈 때, 벗을 잘 골라야 합니다. 자기만 생각하는 욕심이 많고 또는 다른 벗과 친하면 시기심도 품는 벗도 있습니다. 성실하고 겸손하여 올바른 정견(正見)을 가지고 모든 것을 소중히 하고 검소하게 지내며 또한 인연이 다하여 헤어진다 해도 미련도 원망도 없이 순결한 마음을 갖는 도반이 아니면 조도(助道)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길을 갈 때에도 자기와 같은 정도가 되거나 나아야지 자기보다 못한 사람은 결국은 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짐이 될 벗을 사귈 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내일 죽을지 모레 죽을지 모르는 인생 아닙니까? 지금은 대형 사고도 많은 세상이어서 어느 때에 갈지 모르는 무상한 인생에, 우리가 제도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또는 충고를 정당히 하더라도 바른 길로 나아갈 수 없는, 법에 어긋나는 사람들과 어울려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여법(如法)하지 못한 일에는 함께 하지 말고 엄연히 끊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젯밤에도 게송에서 보았습니다마는 우리는 무상복전(無上福田)인 가사를 입고 있는 몸입니다. 위없는 무상복전이 된다는 것은 모든 상을 여의고서 모든 중생에게 아낌없이 바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만 갖는다면 누구에게나 지탄받을 만한 까닭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몸뚱이는 공부하는데 소중한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원수집이요 바로 원적(怨敵)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자기 공부를 바른길로, 부처님 경계로 이끄는데 조도가 되는 유익한 벗, 동행선지식을 사귀어야 할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그런 벗이 될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벗 가운데도 삼거(三擧)에 해당하는 사람은 함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계율상 삼거는 사바라이죄(四波羅夷罪)를 파계한 벗에 대해서 '그대가 지금 잘못됐다. 참회해야 한다'고 해도인정을 안 하는 사람입니다. 또는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합리화 시켜서 충고를 안 듣던가 충고를 수용하더라도 나중에 조금도' 참회하는 빛이 없이 또다시 저지르는 사람입니다. 또는 음욕은 도에 방해가 안 된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말을 하는 도반들은 삼거라고 해서 드러내어 지적하고 상대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살생이나 투도나 또는 사음이나 또는 미처 못 증(證)하고 증했다고 아만심을 내는 경우에 잘못된 것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다거나, 인정을 하고도 참회하여 고치지 않는다거나 또는 그런 짓을 해도 무방하다고 하면 상대를 말고서 아예 사귀지 말아야 합니다. 마땅히 우리는 벗 사귈 때에 참으로 주의해야 합니다.


 팔만사천 번뇌가 있지만 그 근본은 탐․ 진․ 치․ 만․ 의(貪․嗔․痴․慢․疑)입니다. 탐진치 삼독심과 아울러 만심과 의심입니다. 만심은 자기 정도 이상으로 뽐내는 교만심입니다. 만심이 있으면 부처님 법문도 안 들어갑니다. 일지반해 반가통(一知半解半可通)이라, 통하지 못하고서도, 조금 아름아름 하고 근본을 확실히 모르고서 조금 알아 놓으면 자꾸만 자기 지견(知見)만 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심이 있는 사람들은 부처님 법이나 또는 성자의 법을 인증을 잘 안 합니다. 만심이 있어 자기가 생각한 것이 더 옳다고 해서 성자를 의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탐ㆍ 진ㆍ 치ㆍ 만ㆍ 의, 근본 번뇌입니다. 마땅히 근본 번뇌만은 준엄한 반야의 칼로 베어야 합니다.


 1) 물리학(物理學)의 발전(發展)


 과학에 있어서 권위 있는 학설을 인용하여 소개하겠습니다.


 物質과 에너지(energy)

物質과 에너지는 對立되는 것이라는 古典物理的인 생각(뉴우턴Newton, Isaac)은 아인슈타인(Einstein, Albert)의 相對性 理論으로써 物質과 에너지는 하나의 場의 兩面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粒子나 波動이 古典物理學에서는 아주 다른 對立된 것으로 생각되어 왔는데 事實은 電子가 그 測定手段 如何에 따라 波動이나 粒子로 나타남을 알게 되었다.


 고전 물리학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절대 물질, 절대 시간, 절대 공간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 물질과 에너지(energy)가 대립된다고 생각하는 뉴우턴적인 고전 물리학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써 물질과 에너지는 하나의 장(場 field)의 양면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는 입자(粒子)나 파동(波動)이 고전 물리학에서는 아주 다른 대립된 것으로 생각되어 왔는데 사실은 전자(電子)같은 소립자(素粒子)는 그 측정수단 여하에 따라서 파동이나 입자로 나타남을 알게 된 것입니다.


 전자(電子) 등의 소립자는 고유한 존재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장(場) 에너지가 진동하는 양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물질의 근본요소가 되어 있는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질소나 또는' 라듐(radium)이나 그런 것을 물질의 원소(元素)라 하는데, 물질의 각 원소도 고유하게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인가?

 대체로 물리학을 배워서 알겠지만 배울 때뿐이지 우리가 현실적으로 부딪치는 것이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물질이 그대로 실제로 있어 보이니까 다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가사, 수소는 물이나 지구 덩어리나 우리 몸뚱이나 어디에나 안 들어 있는 데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한 수소도 고유한 수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양성자(陽性子)를 중심핵(中心核)으로 해서 전자 하나가 도는 것입니다. 원자핵을 중심으로 전자 두 개가 돌면 헬륨(helium)이고 진자가 여섯 개가 돌면 탄소입니다.

 그런 때는 전자만 수가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원자핵(양성자)도 전자수와 똑같이 더해집니다. 또 대부분 다 중성자도 같은 수가 핵 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기를 갖는 양성자와 중성을 갖는 중성자가 항시 같은 수로 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수가 많아짐에 따라서, 산소, 수소, 질소, 탄소 등의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플루토늄(plutonium)은 전자가 242개가, 라듐(radium)은 226개의 전자가 원자핵의 주위를 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파괴하기가 쉽겠지요.


 따라서 그와 같이 고유한 산소고 수소고 그런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다 양성자나 중성자나 또는 전자나 그런 것이 어떻게 모여 있는가, 그 모여 있는 결합 여하에 따라 산소나수소 등 원소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성자나 또는 중성자나 또는 전자는 무엇인가? 그런데 소립자를 측정하려해도 정확히 측정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가사, 운동량(運動量)을 측정하려면 위치(位置)를 잴 수 없고 위치를 정확히 재려고 할 때는 운동을 하는 진동량(振動量)을 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데서 이른바 불확정성(不確定性) 원리라, 확정한다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물질이란 궁극적으로 끄트머리에 가면 확실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질의 근본 장(場)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입자(粒子)요,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가장 미세한 소립자(素粒子)는 무엇인가? 이것이 파동(波動)인가? 입자(粒子)인가? 모두가 저 궁극에 가면 결국은 다 빛인데 그 빛이 입자(알갱이)인가? 또는 파동으로 연결되어 있는가? 그것은, 정밀을 자랑하는 현대 물리학도 모르는 것입니다. 모든 물질이나 빛이 입자임과 동시에 파동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현대 물리학의 불확정성 원리입니다. 확실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물질은 궁극에는 전기도 없고 또는 질량(質量)도 없고 따라서 공간성이 없는, 결국 물질은 비물질(非物質)인 에너지만 남게 됩니다.


 現代物理學은 아인슈타인이 光速不變性을 公理로 하여 相對性理論을 發展시켰으며 이 相對性理論과 量子物理學을 두 기둥으로 하여 發展한 것이다.


 그 다음에 현대 물리학은 아인슈타인이 광속불변성(光速不變性)을 공리(公理)로 하였는데 즉, 일초(一秒) 동안에 30만km 광속도는 변할 수가 없다는 광속불변성을 공리(公理)로 하여 상대성이론을 발전시켰으며 이 상대성이론과 양자물리학을 두 기둥으로 하여 발전된 것이 현대 물리학입니다.


 따라서 고전 물리학과 현대 물리학의 차이는 무엇인고 하면, 고전 물리학은 뉴우턴이나 또는 맥스웰(Maxwell 1831~1879)등에 의해 창도되었는데 이것은 절대 시간도, 절대 공간도 있고 절대 물질도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 물리학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물리학의 두 학설을 기둥으로 하여 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절대 시간도 없고 절대 공간도 없고 절대 물질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물질이란 결국 비물질인 에너지의 운동양상에 불과한 것이며 따라서 고유한 물질이 없거니, 공간성도 시간성도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양자(量予)물리학의 양자(量子)는 물질량의 최소 단위라는 뜻이고 양자(陽子) 곧 양성자(陽性子)는 양(+) 전기를 가진 소립자로 중성자와 함께 원자핵의 구성 요소입니다. 따라서 양자물리학은 모든 물질을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가장 미세한 알갱이, 물질인가 물질이 아닌가 알 수 없는 불가시적(不可視的)인 그 자리, 그런 것을 문제로 해서 이루어진 물리학이 양자물리학입니다.


 이와 같이 현대 물리학의 중요한 계기인 '모든 존재는 상대다' 하는 상대성 원리는 따지고 보면 불교의 연기법(緣起法)의 부분적인 해석입니다. 인연 따라서 이것이 있으니까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는 연기법의 사상과 상대성의 이론과는 서로 상응되는 도리입니다. 이러한 상대성 이론과 양자물리학을 기둥으로 이루어진 현대 물리학이 어떤 것이라는 개념을 알아두는 것은 굉장히 필요합니다. 이것은 절대시간도 없고 절대 공간도 없고 절대 물질도 없다는 것이니 바로 제법(諸法)이 공(空)하다는 도리와 같습니다.


 따라서 내 수명(壽命)이 50세다 또는 몇 세다 하는 것은 상식적 분야인 것이지 현대 물리학적으로 본다면 이 몸뚱이도 고유한 물질이 아닌 허무한 현상이니, 인간 수명이 몇 년이라는 이른바 불법(佛法)의 수자상(壽者相)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현재도 없다 하는 삼세심불가득(三世心不可得)의 부처님 말씀들을 다행히도 현대 물리학이 점차로 밝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불교인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장차 어떻게 태어나든 다른 종교를 믿든 간에 종당(從當)에는 어느 누구나 불자가 안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대 물리학이라든가 현대 철학인 실존철학이라든가 모든 분야에서 인간의 지혜는 날로 불교와 가까워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술이나 문학이나 어떤 분야에서나 모두가 다 근본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생명의 실상을 밝히는 부처님 사상으로까지 들어가지 않으면 참다운 것이 못됩니다. 그것은 진․선․미(眞善美)의 근본성품이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이기 때문입니다. 상대성을 초월한 영원한 피안(彼岸)의 세계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과 수행(修行)이 없이 참다운 창조적인 걸작이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2) 물질의 형성(形成)과 기본 구조(構造)


 物質의 形成은 電荷의 結合作用에 不過하며 電荷는 接着劑와 같은 作用을 한다. 陰電荷와 陽電荷는 서로 結合하며 같은 電荷는 서로 반발 分離한다.


 그 다음에 물질의 형성은 전하(電荷) 곧 음(-) 전하와 양(+)전하의 결합 작용에 불과하며 따라서 원자핵은 양(+)전하인 것이고 그 밖에를 도는 전자는 음(-)전하입니다. 따라서 음(-),양(+)이 어떻게 결합되었는가에 따라서 산소, 수소 등 물질의 원소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전하는 마치 접착제와 같은 작용을 합니다. 음전하와 양전하는 서로서로 이끌고 결합하며 같은 전하인 음(-)끼리 또는 양(+)끼리는 서로 반발하고 분리합니다.


 現代物理學이 物質의 基本 構造를 탐구한 結果 허망하게도 物質이란 本來부터 存在하지 않으며 다만 場(電磁氣場)만이 實在한다는 結論에 도달하였다. 場만이 根本的인 物理的 實體이며 素粒子는 場의 局部的인 凝結體에 不過하다. 場은 空間 어느 곳에나 存在하는 連續體이다. 光速이 秒速 30만km이니 지극히 작은 粒子라도 그 안에는 엄청난 큰 에너지가 농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라늄 原子核을 中性子로 쏘아 分裂시키면 폭발하는 것이 原子彈이며 水素原子核의 融合에서 나오는 偉力이 水素폭탄이다.


 그 다음에 현대물리학이 물질의 기본 구조를 탐구한 결과 허망하게도 물질이란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전자기(電磁氣)가 충만한 장(場)만이 실재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주에 있는 가장 미세한 알갱이가 어디서 나왔는고 하면 전자기를 띠고 있는 하나의 근본 바탕 즉, 장(場)인 근본 바탕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근본 바탕에서 인연 따라서 이렇게 뛰고 저렇게 뛰는 것이 즉 말하자면 전자고 양자고 한다는 말입니다. 전문적인 얘기는 될수록 피하겠습니다만 이런 정도는 꼭 알아두어야 합니다.

 우주란 것은 전자기장(電磁氣場), 곧 전기(-)와 자기(+)를 띤 무엇인가가 우주에 충만해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무한의 에너지를 갖춘 빛이 우주에는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기분 나쁘다 좋다 하는 사소한 마음만 품어도 우리 몸을 구성한 전자나 양자의 구조가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분 나쁠 때 음식을 먹으면 소화가 잘 안되고 기분 좋을 때에 먹으면 소화가 잘 되지 않습니까?

 우리 생각 하나하나가 우리 몸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역으로 우리 몸을 함부로 행동해 버리면 그만치 마음도 오염되는 것입니다. 근본 성품은 오염이 안 되지만 무명(無明)에 따른 행위로 어둡고 흐린 업(業)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런 전자기장(場)만이 근본적인 물리적 실체이며, 진정한 만유(萬有)의 실상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이지만 우선 물리학적으로는 전자기장이 물리적 실체라고 알뿐입니다. 공간성을 초월한 형이상(形而上)적인 물(物) 자체를 밝히지 못하는데 물리학의 한계가 있습니다. 가장 작은 알갱이인 소립자는 장(場)의 국부적인 응결, 장이 엉겨서 모인 것에 불과하고 장(場)은 공간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연속체라는 것입니다.


 불성(佛性)이 삼천대천세계에 없는 데가 없이, 삼천대천세계가 바로 불성으로 되었듯이 장도 역시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는데 사실은 장(場)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대류권(對流圈)은 물론이고 성층권(成層圈)에 올라가도 장은 있고 온도권(溫度圈), 전리권(電離圈), 자기권(磁氣圈)에 올라가도 장은 있다는 말입니다. 어느 곳이나 장은 꽉 차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전자기장이 모든 물질과 공간에 충만해 있다는 이런 이론만 가지고도 '부처님의 진여불성이 천지 우주에 충만해 있다. 또는 비로자나불이 광명변조(光明遍照)라, 우주에 진여불성의 광명이 두루 해 있다' 이런 법문들을 현대 과학에서도 하나하나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 안 하면 결국은 과학도에게 점차로 뒤지고 맙니다. 저는 아인슈타인과 어느 저명한 신학자와 대담하는 기록을 보았는데 아인슈타인의 말이 신학자의 말보다 종교 철학적으로 한결 더 깊게 생각되기도 하였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조명하니까 그렇게 생각이 되었겠지요.


 광속(光速)은 빛의 속도인데 초속 30만km. 일초 동안에 30만km 속도니까 얼마나 엄청난 에너지입니까?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런 빛의 알갱이 하나 속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 이른바 일초 동안 30만km가는 힘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 한 티끌 가운데 시방세계 모든 힘이 다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어디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는 그런 힘이 꽉 차 있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입자라도 그 안에는 엄청난 큰 에너지가 농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라늄(uranium 電子 238개) 원자핵을 중성자로 쏘아 분열시키면 폭발하는 것이 바로 원자탄이며, 그렇게 무서운 원자력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 하면 원자력도 역시 내나 불성(佛性)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또 수소(hydrogen)원자핵의 융합에서 나오는 위력이 수소폭탄입니다. 따라서 진여불성이 소중한 것을 잘 모르니까, 그런 것을 만들어서 사람도 살생하고 무서운 무기가 되지 않습니까? 마땅히 우리가 할 수 있는 지상명령은 '오직 진여불성을 깨닫는 길 뿐이다' 이렇게만 알아도 얼마나 큰 공덕이겠습니까?


 에너지는 곧 粒子이며 또한 場이며, 場이 곧 空이다. 空은 粒子가 生成 消滅의 律動을 끊임없이 계속하고 있는 살아있는 能力인 生命의 장(場)이다. 그러므로 現代 物理學은 色은 곧 空이며 眞空妙有라는 生命에 한 걸음 더 다가선 셈이다.


 또한, 에너지는 곧 입자이며, 또한 장(場)이며, 장은 곧 공(空)이라는 것입니다. 물질로서의 질량(質量)이 없다면 바로 공 아닙니까? 질량이 있다고 해야 공간성이 있고 또 시간성이 있는 물질인데 시간성, 공간성이 없다면 결국은 공일 수밖에 없습니다. 공(空)은 입자가 이루어지고 또는 소멸되는 율동을 끊임없이 계속하고 있는, 살아있는 능력인 생명의 장(場)인 것입니다. 공은 다만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무량한 에너지가 충만해 있는 공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 (+) 에너지가 부처님의 생명관(生命觀)으로 풀이하면 자비와 지혜입니다. 또 이것이 바로 지(止)요 관(觀)이요, 정(定)이요 혜(慧)인 것입니다. 우주에는 이와 같이 근원적으로 음, 양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비와 지혜를 구한다면 우리 마음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저절로 진여법성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대 물리학은 색은 곧 공이며,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생명에 한 걸음 더 다가선 셈입니다.


 3) 우주시대(宇宙時代)의 종교(宗敎)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요, 과학 없는 종교는 맹인(盲人)이다 ' 아인슈타인의 말입니다. 우리가 종교를 믿더라도 합리적인 도리에 입각하여 믿어야 하지, 불합리한데도 분별없이 전통적인 권위나 인습적인 법집(法執)을 답습한다면 참다운 종교가 못됩니다. 맹신(盲信)에 불과합니다. 아집(我執), 법집을 여의는 것이 참다운 과학이요 진정한 종교입니다. 이런 과학정신이 기본이 되어서 현대 물리학이 나온 것 아닙니까?


 따라서, 종교 없는 과학이란 것은 무엇인고 하면 근본 생명 없는, 뿌리 없는 과학에 불과 합니다. 과학의 근원에 있는 참되고 영원하고 모든 능력과 공덕을 다 갖추고 있는 생명의 실상, 이것이 인생과 우주의 근본이라고 믿고 과학을 해야 하는 것인데 그렇지 못하고 산소나 수소나 이런 입자(粒子)가 근본이요, 물질이 근본이다고 생각하는 유물적인 사고방식으로 과학을 한다면 결국 절름발이요 참다운 과학이 못되는 것입니다.


 또 아인슈타인은 '우주적 종교성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종교는 불교다. 또한 현대 과학이 결(缺)하고 있는 것을 메워 주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불교다 '고 말하였습니다. 역시 아인슈타인은 불교를 진정으로 아는 분입니다.

 아무튼 위대한 천재들은 불교를 믿는다는 말을 직접으로 표현하지는 않으나 불교 진리에 가까운 말들을 합니다. 가끔 인용한 바와 같이 소크라테스(Socrates 410~399 B.C.)나 또는 플라톤(Platon 427~347 B.C.)이나 또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B.C.)나 말입니다. 칸트(Kant 1724~1804)나 니이체(Nietsche)나 쇼펜하우어(Schopenhauer)나 또는 그리스 철인들 모두가 다 우리 불교의 조명으로 본다면 모두 훌륭한 철인(哲人)입니다.


 따라서 그런 불교의 지혜로 기독교도 이슬람도 통찰한다면 다 화해롭게 수용이 되는 것입니다. 다만 그네들이 아직 미흡한 점을 일깨워 훤히 트인 해탈의 자리를 우리가 앞으로 가르쳐야겠지요. 앞으로 몇 백 년 뒤가 될는지는 몰라도 본래가 진여불성이기 때문에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불교에 흡수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물질은 최초에는 방사선(放射線) 형태 즉 광량자(光量子) 곧 광자(光子)' 라고 합니다. 물질은 어느 물질이나 궁극적으로 광량자라고 생각할 때 모두가 다 빛이라는 말은 틀림이 없는 진실입니다. 따라서 '내 몸뚱이나 돌멩이나 똥이나 다 부처다' 라는 말은 똥이나 그 무엇이나 본질적으로는 빛이라는 말입니다. 생명의 실상인 아미타불은 무량광불(無量光佛)이요, 법신불(法身佛)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은 대일여래(大日如來)이자 광명변조(光明遍照)입니다.


 또한 신과학사상(新科學思想)에서는 물질은 곧 의식(意識)이므로 물질을 바로 생명이라고 합니다. 우리네 민속에서 우리 어머니나 할머니들이 산에 가면 바위나 큰 나무에다도 합장배례하고 당산(堂山)을 받들고 하는 것도 역시 우리가 그것으로 집착해 버리니까 나쁜 것이지 일체 만유를 생명으로 받드는 자세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산신(山神)숭배다 용왕(龍王)숭배다 하는 등은 무속(巫俗)이요, 미신(迷信)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산을 구성한 진여불성이 산신이요 물로 표현된 진여불성이 용왕이라고 진여(眞如)의 도리에 따라 이해한다면 허물이 될 것이 없습니다.


 물질은 곧, 의식이요 생명이므로 지구(地球)도 태양(太陽)도 다 같은 생명이며 태양은 관음보살(觀音菩薩) 화신(化身)이요 또, 대세지(大勢至) 보살과 문수(文殊) 보살은 지혜의 화신입니다. 또 지구는 이대로 바로 지장(地藏) 보살입니다.

 우리는 이제 부처님의 광대무변한 가르침을 조그만한 자기 생각으로 좁혀서는 안 됩니다. 원융무애한 생명을 구분 짓고 가로막는 망념(妄念)을 털어버려야 합니다. 삼천대천(三千大千)세계가 바로 부처님이거니 5척(五尺) 남짓한 이 몸뚱이에 들어있는 의식만 생명이 아니라 산하대지 두두물물이 한결같이 다 생명입니다. 우리 마음이 못 열리어서 나로 보이고 너로 보이고 남으로 보이고, 그 무엇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신심(信心)은 마음을 활짝 열고 천지와 나와 둘이 아니고 너와 나가 둘이 아니고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니라는 반야 지혜를 믿는 것입니다.


 哲學을 經으로 하고 科學을 緯로 하여 새로운 宇宙時代의 宗敎가되어야 한다.


철학을 경(經)으로 하고 과학을 위(緯)로 하여, 경과 위는 날과 씨 아닙니까. 이와 같이 철학과 과학이 보완하고 조화하여 새로운 우주 시대의 종교가 반드시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光子(光量子 light quantum photon)는 아인슈타인 주장으로 電磁氣場을 量子化해서 얻어지는 質量 제로(0)의 粒子이며 스핀(spin 旋回)1을 갖는다.


 광자(光子)는 광량자(光量子)를 말하는 것인데 아인슈타인이 맨 처음에 주장을 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주는 근본 바탕이 물리적으로 본다면 전자기장(電子氣場)을 양자화(最子化)해서,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자리에서 얻어지는 질량은 제로(0)의 입자요. 또 이것은 한 바퀴 도는 진동을 합니다.


 벌써 광량자 자리에 가서는 질량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물질인가 물질이 아닌가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물질이라는 것은 결국은 본질적으로는 다 비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한번 동(動)하면은, 한번 분별심 내면은, 거기에 상응하여 바로 소립자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중생의 공업력(共業力)으로 우주가 구성이 된다는 말입니다. 무(無)에서 유(有)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이 좋다, 궂다, 사랑한다, 미워한다 하는 마음들이 동력(動力)이 되어 우주의 장(場) 에너지를 충동하면 소립자가 이루어지고 인간의 염력(念力)은 또한 소립자들의 구조를 바꾸기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양 자체가 바로 색즉공(色卽空)입니다. 본래 물질이 아닌 것이 빙빙 돌고 결합하여 모양같이 보인다고 근본적으로 물질이 아닌 것이 물질로 되겠습니까? 제로(0)를 몇 번 보태고 곱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제로는 제로인 것입니다. 그림자를 천만번 포갠다 하더라도 그림자는 그림자 아닙니까? 불성(佛性)이 다이아몬드가 된다 하더라도 불성은 불성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말하는 '부처가 보면 다 부처고, 개가 보면 개고, 사람이 보면 중생이라'는 말들이 다 이치에 합당한 말들입니다.


  近代의 機械論的 宇宙觀은 데카르트, 뉴우턴 등의 이른바 近代的思考는 神이 太初에 宇宙의 物質 粒子를 創造하여 不變의 法則으로 運動하고 있으며 절대 時間, 절대 空間, 절대 物質 등이 存在한다고함.

 現代 物理學은 20世紀에 나타난 量子力學과 아인슈타인의 相對性原理와 하이젠베르그의 不確定性 原理 등을 골격으로 하여 이루어졌다고 함.


 근대의 데카르트나 뉴우턴 등의 기계론적 우주관, 다시 말하자면 하나의 공식적인 우주관 이른바 근대적 사고(思考)는 신(神)이(자기네들이 잘 모르니까 모르는 것은 신이라고 했겠지요.) 태초에 우주의 물질 입자를 창조하여 불변의 법칙으로 운동하고 있으며 절대 시간, 절대 공간, 절대 물질 등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 근대적 사고방식, 기계론적 우주관입니다.

 이런 우주관은 한낱 상식에 불과하니까 우리는 이런 오류는 떠나야 합니다. 물론 이것도 역시 중세기보다는 더 앞서 있어서 그 당시로는 참신한 과학이 되었겠지요.

 현대 물리학은 20세기에 나타난 양자역학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와 또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 등을 골격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내용은 지금까지 대강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2. 불교의 우주론(字宙論)


 佛敎字宙論

1. 成劫…有情의 共業增上力으로 말미암아 空間에 微細한 金色風(金藏雲)을 일으켜 차례로  風輪․ 水輪․ 金輪을 生하며 처음 一增減劫 동안에 初禪天으로부터 地獄界에 이르기까지 次第로 成立하고 後의 十九增減劫에 光音天으로부터 有情이 次第로 降生하여 無間地獄에 一人의 有情이 生함을 最後로 함. 卽 器世間 및 有情世間이 成立한다. 合하여 二十增減劫  동   안임.


2. 任劫…器世間과 有情世間이 安穩하게 存在하는 時로서 二十增減劫을 經過함.


3. 壞劫…亦是 二十增減劫  동안이다. 그 中 初의 十九增減劫 동안에 初禪天에서 地獄에 이르는 모든 有情은 各其 業因에 따라 二禪 以上에 나아가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않음을 有情世間壞라함.

  마지막 一增減劫에 일곱해〔칠태양〕가 나타나 火災를 일으켜 먼저 地獄에서부터 初禪天 까지를 태워버리고 다음 水災를 일으켜 二禪天 以下를 떠내려 보내고 다음 風災를 일으켜  三禪 以下를 흩어 없앤다.〔飄散〕  


4, 空劫…世界가 온전히 虛空無一物이 되어 다시 다음 成劫에 이르기까지의 二十增減劫안을 말함,                    

                 - 起世經․智度論․俱舍論 -


 그러면 우리 불교의 우주관(宇宙觀)은 어떤 것인가?

 불교의 우주관을 대강 검토해 보도록 합시다. 불교 우주관은 우주가 이루어지는 성겁(成劫과 또는 우주에 모든 중생들이 존재하는 주겁(住)과 또는 허물어져 파괴되는 괴겁(壞劫)과 제로가 되어 텅텅 비어버리는 공겁(空劫)과 다시금 성겁이 되는 이른바 영겁순환(永却循環)이요, 영겁 동안 사건(四劫)이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겁은 어떻게 되었는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유정의 공업증상력(共業增上力)이라, 모든 중생들의 공동의 업력인 공업(共業)이 점차 증가되는 힘으로 말미암아 공간에 미세한 금색 바람을 일으켜, 금색 바람을 금장운(金藏雲)이라고 합니다. 즉 금색광명을 띈 구름이란 뜻입니다. 차례로 풍륜(風輪) 또는 수륜(水輪) 또는 금륜(金輪)을 생(生)하여 처음 일증감겁(一增減劫), (수명이 팔만 사천세(八萬四千歲)부터서 100년 만에 한 살씩 나이가 줄어서 10세에 이르는 동안을 감겁(減劫)이라고 하고 그 반대로 10세로부터 100년에 한 살씩 더 늘어 팔만 사천세에 이르는 동안을 증겁(增劫)이라 합니다. 일증감겁은 그와 같이 감겁과 증겁을 합한 기간입니다.) 이런 기간에 초선천(初禪天)으로 부터 지옥계에 이르기까지 차제(次弟)로 성립됩니다. 지옥(地獄) 등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공겁 때는 모두가 다 없던 것이 점차로 중생의 좋다 싫다 하는 등의 업력 따라서 환경, 지구, 하늘의 별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더 오랫동안인 19증감겁 동안에 색계(色界) 이선천(二禪天) 중의 제 3천인 광음천(光音天)으로부터 유정(有情)이 차제로 강생(降生)합니다. 광음천은 광명으로 이루어진 색계(色界)입니다. 광음천에는 말도 필요 없이 생각만하면 입에서 광명이 나와서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서 통할 수 있는 하늘이라고 합니다. 광음천으로 부터서 유정이 차례로 아래로 내려와서 음식을 찍어 먹고 하는 것은 어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무간지옥에 한 사람의 유정이 생겨남을 최후로 기세간계(器世間界) 즉 우주와 유정세간(有情世間)이 성립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성겁에는 겨우 유정이 오직 한 사람이 나온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복(福)이 다 되어서 또는 성품이 경망스러워서 새로운 것을 바라고 유정이 내려 왔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주겁(住劫)이라. 기세간(器世間)은 불교 술어로서 형식적인, 물질적인 우주를 말합니다. 또 유정세간(有情世間)은 우리 인간이나 천인(天人)이나 유정 곧 의식이 있는 존재들입니다. 주겁은 기세간과 유정세간이 안온하게 존재하는 때로서 20증감겁을 경과한다고 합니다. 처음 성겁(成劫)도 일증감겁(一增減劫) 동안에 형식적인 지구나 천체 등 우주가 이루어지고 나머지 19증감겁 동안에 유정이 이루어지므로 합하면 20증감겁입니다.

그 다음에 괴겁(壞劫)인데 파괴될 때의 말입니다. 현대 물리학도 장차 우리 지구나 각 천체가 파괴되어 가는 것을 추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국의 호킹(Stephen Hawking) 박사 같은 분들은 우주가 이루어져서 완전히 파괴될 때까지 100억년 정도라고 계산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역시 천재이기 때문에 물리학자에 지나지 않지마는 부처님 말씀과 상당히 가까운 말이 많이 있습니다. 천재란 마음이 여느 사람들보다 한결 맑아서 불심(佛心)에 가까운 사람들이라 불교를 안 믿는다 하더라도 그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에 가까워지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천재란 쇼펜하우어 말이 아니라도 기억력이 좋아서 많이 아는 것이 천재가 아니라 우리 마음이 얼마만치 본질적인 진리에 가까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출가사문들은 이미 천재의 범주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괴겁(壞劫)도 역시 20증감겁 동안인데 처음 19증감겁 동안에 초선천(初禪天)에서 지옥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정은 각기 자기가 지은 바 업력(業力)에 따라서 2선천 이상에 나아가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않음을 유정세간괴(有情世間壞)라, 유정세간이 다 허물어진다고 합니다. 지금 기독교에서 이른바 시한부 종말론(終末論)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앞으로 곧 종말이 온다고 그것을 믿고서 떠들어대고 하니 참으로 딱한 사람들 아닙니까? 우리는 부처님을 믿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스러운가를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호킹 박사도 100억 년이라니까 아직은 멀었고 부처님 말씀은 방금 말씀한 바와 같이 20증감겁 동안에 파괴된다는 것인데 또 파괴되려고 할 때는 사람과 함께 마구 다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지 우주는 진여불성의 대자비(大慈悲)로 뭉쳐 있는 완벽한 생명체입니다. 부처님은 대자대비(大慈大悲)가 근본이기 때문에 초선천에서 지옥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정은 각기 자기지은 바 업에 따라서 2선천 이상으로 간 뒤에야 점차로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을 그대로 태운 채로 무너져버리면 불성(佛性)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자비하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진여불성을 지향하여 점차로 정화(淨化)되어 가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가 출가사문과 부처님 제자가 되겠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이 선택받았다고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초선천에서 지옥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정은 각기 자기가 지은 업력 따라서 더디 가고 빨리 가고 하는데 2선천 이상을 올라간 뒤에야 비로소 모든 유정세간이 파괴된다고 하니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이선천(二禪天) 이상으로 승천(昇天)하고 나서 파괴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자비로운 도리입니까? 우주의 도리는 그러한 자비가 근본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마지막 일증감겁(一增減劫)에 일곱 해〔太陽〕가 나타나서 화재(火災)를 일으켜 먼저 지옥에서부터 초선천까지 태워버리고 다음에 수재(水災)를 일으켜 2선천 이하를 떠내려 보내고 다음 풍재(風災)를 일으켜 3선천 이하를 불어 없앤다고, 경에는 표산(飄散)이라는 말로 쓰여 있습니다.


 공겁(空劫)이라, 세계가 온전히 허공무일물(虛空無一物)이 되어서 다시 다음 성겁(成劫)에 이르기까지 또 역시 20증감겁 동안을 요합니다. 그래서 성․주․괴․공 4겁을 합하여 80증감겁이 소요됩니다. 이러한 우주론은 기세경(起世經)이나 용수 보살 지도론(智度論)이나 또는 구사론(俱舍論)에 있습니다.


 3. 색(色:物質)의 근본 구조(根本構造)


 불교의 교리에서 나온 물질의 구조를 알아보겠습니다. 현대 물리학에서 물질의 가장 미세한 소립자인 광량자(光量子)의 본질이 불교에서 물질의 근본으로 삼는 금진(金塵)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金塵의 構造…宇宙의 本質인 物心一如의 心體에는 本來로 地․水․火․風 四大의 四性과 四相이 갖추어 있는데 그 四性과 四相이 和融하여 一極微를 이루어 서로 分離할 수 없으므로 八事俱生하여 隨一不滅이라 稱한다.

 이 極微를 四方․上下의 六方과 中心의 七徵가 合成되어 처음으로 天眼所見의 阿縟色이 되는데 바로 金塵이다.

 이 金塵은 天眼과 輪王眼과 佛果를 得한 菩薩眼에만 見得할 수 있다. 金塵 곧 一阿縟色은 金中에서 往來하여도 無障 無碍하며 百四十의 事體功德을 갖추고 있다. 또한 圓常하여 다시 生滅이 없고 空劫 時에는 離散하여 空中에 浮遊하나 體法은 恒有하며 그 作用에 있어서 生滅 無常하다.             

        -大日經疏一․俱舍論光記․勝論-


 우주의 본질인 물심일여(物心一如)의 심체(心體)에는 지․수․화․풍(地水火風) 4대(大)의 네 가지 성품과 사상(四相)이 본래로 갖추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주의 본체에 있는 근본적인 본 성품을 생각해야 합니다. 근본 성품에는 지수화풍 4대를 비롯한 일체 만덕이 본래로 원만히 갖추어 있습니다. 그 성품은 인연 따라서 상(相)으로 나오는데 지수화풍 4대의 4성(性)과 4상(相)이 서로 원융무애하여, 거리낌 없이 섞이어서 일극미(一極微)를 이루어 서로 분리할 수 없으므로 팔사구생 (八事俱生)한다는 것입니다.


 팔사구생이란 구사론 등에 나오는 말로 여덟 가지 기운이 한 번에 화융(和融)하게 뭉쳐서 나온다는 말입니다. 팔사구생의 여덟 가지란 앞에 든 지수화풍 4대의 네 가지 성품과 4대의 상인 네 가지 상이 함께 어울려서 나오므로 팔사구생입니다. 그래서 수일불멸(隨一不滅)이라, 뭉쳐진 그 하나가 멸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방(四方)과 상하(上下)의 육방(六方)과 가운데 중심(中心)을 합하면 일곱 군데인데 불교에서는 일체가 역동적인 생명력이므로 사방과 상하 그리고 중심의 7이란 수치를 생명 활동의중요한 수치로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일극미(一極微)인, 물질도 아닌 하나의 기운, 에너지가 사방 상하 중심의 칠미(七微) 합성이 되어 처음으로 천안소견(天眼所見)이라, 중생의 오욕의 때 묻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천안통으로 볼 수 있는 아누(Anu阿耨)색이 되는데 이것이 바로 금진(金塵)이라고 합니다.


 아누다라삼먁삼보리에서도 나오는 그런 개념 하나 하나가 모두가 다 의미 심중합니다. 우리 인간이 알고 있는 원자핵이나 그런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보다 더 훨씬 더 저편에  있는 즉 생명 에너지의 근본 구성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금진인 것입니다.


 이 금진은 천안(天眼)과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안목과 또는 견성오도(見性悟道)해서 삼매에 들어가 불과(佛果)를 얻은 보살의 눈에만 견득(見得)이라, 보아서 얻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벌써 견성오도를 확실히 했다면 금진인 한량없는 금색광명을 훤히 현관(現觀)이라, 현전(現前)하게 체험하게 되겠습니다.

 금진 곧 일아누색(一阿縟色)은 금(金) 가운데서 왕래하여도 무장무애하여 거리낌이 없으며 140의 사체공덕(事體功德)을 갖추고 있다 합니다. 불성공덕(佛性功德)은 무량공덕이나 편의에 따라서 법수로서 140의 공덕으로 구분하여 일일이 말씀한 법문이 불경에 나와 있습니다. 티끌만도 못하고 원자핵보다 한결 근원적인 미세한 에너지로 응집된 그 가운데에 벌써140의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다 갖추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미진중 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는 말씀이 성립되지 않겠습니까.


 또한 원만하고 항상하여 다시 생멸이 없고 공겁(空劫)시에도 금진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공중에 흩어져 있기는 하지만 체(體)는 소멸이 안 되어 체법(體法)은 항유(洹有)하며 그 작용에 있어서는 생멸무상(生滅無常)입니다.

 또는 유식론(唯識論)에는 일체 현상을 아뢰야식(阿賴耶識) 종자의 변현(變現)이라고 합니다. 모두가 다 유식(唯識)이라, 만법이 유식이요, 일체가 유심조(唯心造)라는 사상에서 본다면 물질은 체(體)가 있는 것이 아니며 금진도 또한 마음의 묘유(妙有) 현상이니 물질의 체성(體性)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금진은 금강(金剛) 또는 금륜(金輪)이라고도 하며 묘유(妙有)의 본질이라는 말입니다.


 4. 물질(物質)의 분석(分析)․석공관(析空觀)

物質의 分析(析空觀)

物體

欲界塵

 隙遊塵(成分)

 牛毛塵(分子)

 羊毛塵(元素)

 兎毛塵(電子)

 水塵(陽核)

 金塵(核의本質)

色界塵

 微(識粒)

無色界塵

 極微(色究竟)

 隣虛(染心根)


불교에서 구사론 등 근본 론장(論藏) 가운데 석공관(析空觀)이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이 공(空)을 느끼기가 어려운 것이니까 색(물질)을 분석하는 방편을 써서 공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물체를 분석하여 우선 극유진(隙遊塵)이라 하는데, 날씨가 좋을 때 문틈으로 태양 광선이 비춰오는 것을 보면 그 광선속에 헤아릴 수 없는 티끌이 떠 놀고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 정도의 작은 것을 말합니다. 현대적인 말로 표현한다면 물질의 성분(成分)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다 더 미세한 것이 우모진(牛毛塵)입니다. 마치 소터럭 끄트머리같은 그 정도로 작다는 말입니다. 이런 말은 그와 꼭 같다는 것이 아니고 옛날 사람이 비유로 표현한 것입니다. 현대적인 술어로는 분자(分子) 정도가 되고 더 작은 것은 양모진(羊毛塵)으로 양털 끄트머리 정도로 눈에 안 보이는 원소(元素) 정도입니다. 그 다음에 토모진(兎毛塵)으로 토끼털 끄트머리 정도로 전자(電子) 정도에 비유됩니다. 그 다음은 수진(水塵)으로 양성자(陽性子), 중성자(中性子) 정도이고, 앞에서 말한 금진(金塵)은 원자핵(原子核)의 본질 (本質)을 의미합니다.

이런 불교적인 분석은 옛날에 도인들이 중생들이 물질에 대해서 너무 집착을 하니까 '분석하면 모든 존재들이 다 허망하게 비어버린다'고 하기 위한 법문을 시설하여 이른바 석공관(析空觀)이라, 물질을 분석해서 공으로 돌아가는 관법(觀法)을 제시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금진(金塵)은 미(微)로 구성되고, 미는 극미(極微)로 구성되고, 극미는 인허(隣虛)라는 공간성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는 기운으로 구성되었다고 분석을 했습니다.


 따라서, 금진은 핵의 본질이지요. 미는 식의 알갱이〔識粒〕요, 또는 극미는 색구경(色究竟) 즉 색의 가장 끄트머리고 인허(隣虛)는 염심근(染心根)이라, 우리 마음이 오염되어 있는 가장 시초인 것입니다.


 물체에서 수진(水塵)까지는, 욕계에 있는 티끌, 욕계진(浴界塵)이라 하고 또 금진은 광명체 즉 광명이 본질이기 때문에 이것은 색계진(色界塵)이라 하고 또 우리 의식의 헤아림의 흔적들은 무색계진(無色界塵)이니까 내나 우리의 식(識)도 물질화 될 수가 있고 물질도 결국은 식이고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地ㆍ 水ㆍ 火 ㆍ風 四大의 構造

                                   

                                  同性相引…水    

             左旋塵…水塵(陽子)   異性相斥…地


   金塵

             右旋塵…火塵(電子)  同性相斥…火

                                 異性相引…風



 앞에서 물질의 구조 같은 것은 대강 살펴본 셈입니다만 불교에서 말하는 지․수․화․풍 4대(四大)가 어떻게 구성이 되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순수한 우주의 기운인 금진(金塵)이 좌선(左旋) 곧 좌편으로 진동하면 수진(水塵)이 되고 우편으로 진동하면 화진(火塵)이 된다는 것입니다. 화진은 현대적으로 대비해서 말하면 전자(電子)고 수진은 이른바 양자(陽子)가 되는 것입니다. 원자핵 즉 양성자 중성자는 불교에서 말하면 수진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자라든가 또는 이 양성자 중성자가 어떻게 나왔는가 하는 원리를 현대 물리학자들은 거의 비슷하게 말을 합니다. 가사 라듐(radium)을 분석하면 전자의 흐름은 오른쪽으로 구부러지고 양성자의 흐름은 왼쪽으로 굽어지고 또는 감마(ganlma : r )선은 구부러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어렴풋이나마 현대 물리학에서도 좌선(左旋)과 우선(右旋)의 도리를 말합니다.

  불교 가르침 가운데서 금진이란 말은 원래 있으나 좌선진, 우선진이나 수진은 양자와 같고 화진은 전자와 같다는 이런 말씀을 한 것은 금타 스님이 처음입니다. 현대에 태어난 분이기 때문에 현대 물리학과 대비 회통(會通)을 시킨다는 의미에서 필수적으로 밝혀야겠지요.


 아무튼, 우리 마음의 싫어하는 기운은 금진을 오른쪽으로 돌려서 전자를 창조한다고 할 수 있고 또 좋아하는 마음은 그 반대로 금진을 왼쪽으로 돌려서 양성자 등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주에너지인 금진(金塵)은 우리 심리 여하에 따라서 전자화(電子化)되고 양자화(陽子化)되어 형상화되는 것입니다.

 저명한 의학자들 말도 성을 내면 몸에 해로운 요소인 아드레날린(adrenalin)이 더 증가되고, 웃고 기분 좋으면 우리를 건강하게 해주는 엔돌핀(endorphines)이 생긴다고 합니다. 그런 것이 모두가 다 부처님 원리에서 본다면 수긍이 가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성겁 초기(成劫初期)에 광음천(光音天)이라든가 더 위의 무색계(無色界)에 있는 중생들이 좋다 궂다 하는 분별이 시초 동력(動力)이 되는 이른바 중생들의 공업력(共業力)이 쌓이고 모이니까 전자가 되고 양자가 되어 우주를 구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것들이 생명이니까 의당 역동성(力動性)이 있어야겠지요. 따라서 양자인 수진은 같은 성질끼리는 서로 이끌고 또 다른 성질과는 서로 배척하는데 수진 즉 양자에 있어서 같은 성질끼리 이끈 것은 수(水)라고 하고 다른 성질을 배척하는 것은 지(地)라고 합니다. 가사, 중성자와 양성자가 서로 어우러져서 원자핵이 되는 것도 서로 이끌어서 된 것입니다. 또 우편으로 도는 금진인 화진(火塵) 즉 전자는 성질이 수진(水塵)과는 반대로 동성끼리는 서로 배척하고 또는 이성끼리는 서로 이끄는데 동성끼리 서로 배척하는 것은 화(火)라고 하고 이성끼리 이끄는 것은 풍(風) 이라고 합니다.


 지수화풍 사대(四大)가 이렇게 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수화풍 사대가 어디서 나왔는가? 하는 것도 역시 금타 스님이 처음으로 발설을 했습니다. 옛날에야 이렇게 할 필요가 없었겠지요.

 물질이란 그 근본이 어떻게 나왔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 불교인들이 꼭 풀어야 할 문제입니다. 세속인인 물리학자들이 푸는 우주의 근본 문제를 풀지 못하면 그마만치 불교를 불신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그들이 아는 것보다도 훨씬 더 앞서서 이끌어야 할 과제가 현대 불교가 당면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또한 물질의 근원이 본래 공(空)하다는 도리를 분별 지혜인 간혜(乾慧)로라도 알고 있으면 우리들의 상(相)을 여의는 데도 크게 조도(助道)가 될 것입니다.



5. 삼천대천세계 (三千大千世界)


 三千大千 世界

 o 一小世界…須彌山을 中心으로 七山八海를 交互로 두루고 鐵圍山을 外廓으로 한 世界를    말함.

 1, 小千世界…一小世界를 千合함을 말함.

 2. 中千世界…小千世界를 千合함을 말함.

 3. 大千世界…中千世界를 千合함을 말함.

  모두 合하여 大千世界의 數量은 十憶世界이다. (一小世界×1000=小千世界, 小千世界×      1000=中干世界=1000000, 中千世界×1000=大千世界 즉 1000000×1000=1000000000=10憶世界   가 三千大千世界임.

 ※ 이 三千大千世界는 第四禪天과 같으며 成도 壞도 同時임.

      

-智度論․佛地論 -


 불교 우주관은 생성소멸(生成消滅)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성겁, 주겁, 괴겁, 공겁입니다만 천체가 얼마나 큰가 하는 공간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삼천대천(三千大千) 세계입니다.

 불교에서 한 세계를 일소세계(一小世界)라 하는데 이는 태양계를 중심으로 하는 한 세계를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일소세계란 수미산(須彌山 Sameru-pawata)을 중심으로7산(山) 8해(海)를 교호(交互)로 번갈아 두루고 철위산(鐵圍山 Cakravada)을 가장 밖에 있는 외곽으로 한 세계를 말합니다. 그래서 구산팔해(九山八海) 즉, 아홉 산과 여덟 바다인데 그 이름이 다 있습니다. 수릉엄삼매도에 보면 같이 번갈아 둘러 이루어지는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말씀은 그 당시에는 세밀한 분석이 필요 없고 다만 어떻게 중생들이 망상을 안 내고 성불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말씀을 했습니다. 부처님이 아시는 그대로 말해서는 중생들이 알 수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세계가 어떻게 생겼는가? 나는 대체로 어디서 태어났는가? 물질의 근본은 무엇인가? 그런 의문은 그 당시 미개한 때에는 품을 수가 없었겠지요. 따라서 그때그때 대응해서만 말씀을 했던 것입니다.


 현대 천문학에서도 태양계(太陽界) 밖에 은하계(銀河界)가 또 끝없이 많이 전개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태양계를 중심으로 여러 유성이 도는 한 단위의 세계 즉 일소세계(一小世界)를 천개 합한 것이 소천세계(小千世界)요, 이 소천세계를 다시 천개 합해서 중천(中千)세계고 중천세계가 천개 합해서 대천(大千)세계입니다. 그러니까 한 세계의 천개에 천배가 십만이고 다시 천배가 십억이 됩니다. 그래서 대천세계는 수치로 보면 십억 세계인데 소천 중천 대천으로 합해서 말하면 천이 세 번 있으므로 삼천대천(三千大干) 세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삼천대천 세계는 이른바 사선천(四禪天)과 같으며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시기도 똑같이 합니다. 4선천은 물질세계를 다 통합한 세계인 것입니다.

 무색계는 의식만 있으니까 물질세계의 공간적인 의미가 없겠지요. 공간도 실존적인 고유한 공간이 아니라 다만 상(相)을 나툰 거품 같고 안개 같은 허망상만 있는 공간입니다. 내 몸뚱이도 거품 같고 안개 같은 것인데 우리가 있다고 집착하듯이 삼천대천세계 4선천도 또한 본질적으로는 그림자 같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6. 수묘게 (數妙偈)


  數妙渴

一是不空萬法起焉    滿十俱空非空而空

二假相應非本非迹    三法輾轉因果同時

本具四大居常五位    四大互因二八成實

七依一實六輪常轉    二四三三互爲因果

五位三法含藏一實    九果八因包和常住

胎藏十六隨緣比周    一地三水五火七風

三五爲本一七示迹   七三滿數五一過半

滿者欲平過半生   離垢一地十五金剛   

等體金塵遍滿十方    一切萬有駱器分資

雖現此身內外正依    地水火風四界攝持

金塵合空性相難分    細根鹿境隱顯左右

金塵一七便成水塵    三七陰火五七陽性

七七起風又七化土    地塵五分四水一火

左轉水地引同斥異    右轉風火引異斥同

地下風動水貪火嗔    緣起若存緣滅若亡

隱性顯相二名一實    欲隱無內欲顯無外


 수묘게(數妙偈)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이것은 수치에 묘한 진리가 포함돼 있다는, 말하자면 수(數)자체가 바로 우주에 있는 생명의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철학자로서는 그리스의 피타고라스(Pythagoras)가 수(數)가 생명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하였다는데 주역(周易)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주는 바로 수(數)로 구성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소리나 또는 사이클(cycle) 즉 단파, 장파 같은 주파수(周波數)등 어떻게 진동하는가? 하는 것이 모두 수입니다. 우리는 수라는 것에 신비로운 영감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가사, 현대는 기술 문명, 기술의 싸움이라고 하는데 기술이란 것이 모두가 다 수에서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학을 못하면 물리학을 못하는 것 아닙니까. 또 철학을 할 때도 수학은 항시 기본이 됩니다.


 수묘게(數妙偈)는 하나부터 열까지 그 수(數)의 원리를 풀이한 것입니다.

 일시불공 만법기언(一是不空萬法起焉), 하나〔一〕이것은 공(空)이 아니어서 만법이 일어나나,

 만십구공 비공이공(滿十俱空非空而空)이라, 만수(滿數)인 십(十)이 되면 공이 되는데 공이 아니면서 바로 공이 되는 것이다. 즉 본래 공이 아닌 존재가 어느 한계에 이르러 만수(滿數)가 갖추어지면 공으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성겁이 되고 주겁이 되고 괴겁 동안에는 (-), (+)가 차이가 있으니까 활동이 되는 것이지 합해져 버리면, 다 차버리면 공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움직이는 싸이클이 완전히 (-), (+)가 동등이 되어서 합(合)해져버리면 공겁이 되는 것입니다.


 이가상웅 비본비적(二假相應非本非迹)이라, 공과 공이 아닌 것 즉 공(空)도 유(有)도 가(假)인데 두(二) 가(假)가 서로 같이 응하면서 결국은 근본도 아니고 결과도 아니다. 이 말은 공이 근본이 되거나 또는 유가 근본이 되는 것도 아니고 색(色:有) 즉 공(空)이요 공즉색이니 서로 같이 겸해있다는 말입니다. 인연에 따르면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은 인연이 소멸되면 공이 되는 것입니다.


 삼법전전 인과동시(三法輾轉因果同時)라, 혹(惑)업(業)고(苦)를 삼법(三法)이라 합니다. 혹은 번뇌요, 업은 번뇌 따라서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으로 짓는 행위요, 업으로 받는 과가 고(苦)입니다. 번뇌에서 업을 짓고 고를 받는 3법이 전전(輾轉)이라, 구르고 굴러서 같이 인이 되고 또는 과가 된다는 말입니다. 가사, 우리가 누구를 미운 사람이라고 할 때는 그 미운 생각이 혹이고, 미운 이를 비방하거나 때리는 행위 등이 업이며 그 업으로 인하여 받는 보복 등이 고(苦)입니다. 그러한 번뇌와 업은 또한 우리 잠재의식에다 미운 종자를 심는 것입니다. 양자역학의 도리로 본다면 밉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생리에 전자를 더 증가를 시키고 좋다고 생각하면 양자를 증가를 시키는 것입니다. 욕심이나 진심(嗔心)을 많이 내면 낼수록 더욱 더 증가되다가 욕심이나 진심(嗔心)이나 굳어지면 응어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성을 많이 내고 욕심을 많이 내면 결국은 응어리가 생겨 몸의 조화가 깨져서 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암(癌) 등도 역시 욕심이나 진심이 모이고 모여서 응어리진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본구사대(本具四大) 거상오위(居常五位)라, 본래 지․수․화․풍 4대가 근본 성품(불성)에 갖추어 있고 일체 만법을 5위(位)로 포괄하는데 그 5위도 또한 근본 성품에 온전히 갖추어 있다는 것입니다. 5위는 근본 불교의 법상(法相)풀이로서 색법(色法)․심법(心法)․심소유법(心所有法)․심부상응법(心不相應法)․무위법 (無爲法)입니다.


 사대호인(四大互因) 이팔성실(二八成實)이라, 지수화풍 사대가 서로 이끌어서 2×8=16, 16의 도리로 실상(實相) 세계가 이루어지도다. 16의 수치(數値)는 1지(地) 3수(水) 5화(火) 7풍(風)을 합하여 16이 되는데 밀교(密敎)에서 원만무진(圓滿無盡)을 의미합니다.


 칠의일실(七依一實) 육륜상전(六輪常轉)이라, 순수한 일금진(一金塵)이  제7식〔末那識〕또는 7풍에 의지하여 육도중생으로 항시 윤회한다는 말입니다. 본래는 순수 생명인 금진자리인데 제7 말나식〔末那識〕인 망식(妄識)에 의하여 지옥․아귀․축생․ 아수라․인간․ 천상 등 6도(六途)를 끊임없이 윤회하는 것입니다.


 이사삼삼 호위인과(二四三三互爲因果)라, 2×4=8의 팔식(八識)과 3×3=9의 9식(九識)이라, 9식은 청정식(淸淨識)으로 근본 바탕인 진여불성이고 8식은 아뢰야식(阿賴耶識)으로서 일체 유정(有情)의 근본심식(根本心識)을 말하는데 이 8식과 9식이 서로 인이 되고 과가 된다는 뜻입니다.


 오위삼법 함장일실(五位三法含藏一實)이라, 아까 말한 심법․색법․심소유법․심부상응법․무위법의 5위(五位)와 혹업고(惑業苦)의 3법(三法)이 돌고 돈다 하더라도 일실(一實)인 청정 한 금강불성은 다 언제나 갖추어 있다는 뜻입니다.


 구과팔인 포화상주(九果八因包和常住)라, 청정식인 9식은 과(果)이고 8식인 아뢰야식은 일체 업(業)을 갈무리하는 장식(藏識)인 인(因)인데 항시 서로 포함하여 조화롭게 존재한다는뜻입니다.


 태장십륙 수연비주(胎藏十六隨緣比周)라, 태장계는 16수로 되어 있다는 말인데 16수는 1지(地)․ 3수(水)․5화(火)․ 7풍(風)의 수를 합하면 16이 됩니다. 이런 법수(法數)는 여기서 설명을 다할 수는 없고 하여튼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공덕수(功德數)가 16입니다. 태장계란 밀교(密敎)에서 말하는 원리의 세계입니다. 생명의 본체인 성품 공덕이 인연 따라 두루 미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일지삼수 오화칠풍(一地三水 五火七風)이라, 생명적인 수치 곧 태장계 수치로 봐서 1은 지(地)에 해당하고 3은 수(水)에 해당하고 5는 화(火)에 해당하고 7은 풍(風)에 해당합니다.


 삼오위본 일칠시적(三五爲本一七示迹)이라, 3인 수(水)와 5인 화(火)가 근본이 되고 1인 지(地)와 7인 풍(風)이 자취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칠삼만수 오일과반(七三滿數五一過半)이라, 7인 풍과 3인 수(水)가 합하면 만수인 10이고 또는 5인 화(火)와 1인 지(地)가 합하면 6이 되니 반(半)을 넘는다는 뜻입니다.


 만자욕평 과반생의(滿者欲平過半生歪)라, 7과 3이 합해진 만수(滿數)는 가만히 있으려고 하지만 5와 1인 즉 화(火)와 지(地)가 6이 되어서 반수를 넘으니까 삐뚜름하게 반발한다는 뜻입니다. 마이너스(-) 프러스(+)가, 음양이 같으면 역동적(力動的)인 성겁(成劫)이 안 되나 우주 에너지가 똑같지가 않으니까 움직이고 결합하고 하여 성겁(成劫)이 되는 것입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와 같이 똑같지 않으니까 사람으로 나와서 우리가 있는 것이지 같았으면 항시 공겁에 머물러 인간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리구일지 십오금강(離垢一地十五金剛)이라, 1인 지(地)에서 모든 번뇌를 여의면 15금강이라, 15야(夜) 만월같이 일체 공덕을 갖춘 훤히 트인 금강세계가 된다. 그래서 태장계 16공덕 은 변함이 없습니다.

등체금진 변만시방(等體金塵遍滿十方)이라, 우주와 같은 체성(體性)인 금진이 온 세계에 편만해 있으니 우주가 바로 금진 세계입니다.


 일체만유 수기분자(一切萬有隨器分資)라, 일체 만유는 각기 그릇 따라서 곧 업(業) 따라서 공덕을 달리 받고 있습니다.


 수현차신 내외정의(雖現此身內外正依)라, 비록 이 몸을 나투어도 정신과 육체, 성품과 환경을 다 갖추었으며


 지수화풍 사계섭지(地水火風四界攝持)라, 우주란 것은 지와 수와 화와 풍과 이런 것이 서로 어우러져서 구성이 되었다.


금진합공 성상리분(金虜合空性相離分)이라, 금진은 본래 허공과 합해 있으니 성품과 상(相)을 나누기 어렵다.


 세근추경 은현좌우(細根鹿境隱顯左右)라, 세근은 성품으로 있는 능조사대(能造四大)에 해당하는 것이고 추경은 현상으로 나툰 소조사대(所造四大)인데 능조사대와 소조사대가 서로 인연 따라 나타났다 숨었다 자유자재로 한다는 뜻입니다. 상(相)과 성품이 본래 둘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지 않겠습니까? 중생이란 업력으로 상(相)이 나타나는 것이고 업력이 다하면 성품으로 숨어지는 것입니다.


 금진일칠 변성수진(金塵一七便成水塵)이라, 1금진이 7풍(七風)으로 동(動)하면 수진(水塵)이 되고


 삼칠음화 오칠양성(三七陰火五七陽性)이라, 3수(三水)가 7풍(七風)으로 동(動)하면 음화(陰火)요 5화(五火)가 7풍(七風)으로 동(動)하면 양성(陽性)이다.


 칠칠기풍 우칠화토(七七起風又七化土)라, 7풍(七風)이 7풍을 만나면 더욱 풍(風)이 세고 다시 7풍(七風)을 더하면 토(土)가 된다.


 지진오분 사수일화(地塵五分四水一火)라, 토(土)를 구성한 지진(地塵)을 분석해 본다면 5분지 4가 수(水)가 되고 5분지 1이 화(火)가 된다.


 좌전수지 인동척이(左轉水地引同斥異)라, 금진(金塵)이 좌편으로 진동하면 수(水)와 지(地)가 되는데 같은 것은 서로 이끌어 수(水)가 되고 다른 것은 배척하여 지(地)가 되며,


 우전풍화 인이척동(右轉風火引異斥同)이라, 금진(金塵)이 오른편으로 돌면 풍(風)과 화(火)가 되는데 다른 것은 이끌어 풍(風)이 되고 같은 것은

배척하여 화(火)가 된다.

지하풍동 수탐화진(地下風動水貪火嗔)이라, 지진(地塵)경계에 수(水)가 동하면 탐(貪)이 되고 화(火)가 동하면 진(瞋)이된다.


 연기약존 연멸약망(緣起若存緣滅若亡)이라, 인연이 있으면 존재하는 것 같고 인연이 멸(滅)하면 없는 것 같으니 실제로

멸하는 실멸(實滅)이 아니고 실재로 있는 실유(實有)가 아니다.


 은성현상 이명일실(隱性顯相二名一實)이라, 숨어 있는 성품과 나타난 현상이 이름만 둘이지 본래로는 하나인 실상(實相)이다.


 욕은무내 욕현무외(欲隱無內欲顯無外)라, 숨고자 해도 안이 없고 나타나고자 해도 밖이 없거니 본래 진리란 상하 내외가 없는 원만구족(圓滿具足)한 진여실상(眞如實相)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수묘게를 저자로부터 설명들은 일이 없기 때문에 산승의 해설이 미흡한 데가 많을 것입니다.



 7. 열반진색(溫槃眞色)


 溫槃眞色

∘涅槃은 色․聲․香․味․觸․生․住․壞․男․女의 十相이 無함.

∘色是無常이나 因滅是色하여 獲得解脫常住色           - 涅槃經 -

∘如來藏中 性色眞空 性空眞色 淸淨本然 周遍法界       - 楞嚴經 -

∘一毛孔中에 無量佛刹이 莊嚴淸淨하여 曠然安立이라    - 華嚴經 -

∘刹刹塵塵이 俱說俱聽하여 說聽을 同時하니 妙哉라 此境이여  - 四明敎行錄 -

∘妙色湛然常安住 不移生老病死遷                       - 名義集 -


 우리는 색(色)이라 하면 색즉공(色卽空)인 허망한 색이 아닌가? 이렇게만 생각하고 진색 (眞色) 또는 묘색 (妙色)을 보통 무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색즉공 제법공하는 그러한 색과 묘색과 진색은 경을 보면 엄연히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진공묘유(眞空妙有)는 공(空)의 실체로 나타나는 실존적인 실상(實相)의 색 곧, 진색(眞色)이요 묘색(妙色)인데 이것을 부정하면 대승불법(大乘佛法)이 성립이 안 되는 것입니다.


 열반(涅槃)은 색․성․향․미․촉․생(生) 주(住)․괴(壞)․남(男)․여(女)의 십상(十相)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열반은 무상(無相)이라, 상을 여읜 영생(永生)의 자리요 번뇌가 멸해 버린 자리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열반은 현상적이고 물질적인 색이나, 소리나, 향기나, 맛이나, 촉감이나, 또는 우주가 생기고 사람이 생기고 무엇이 생겼다는 생상(生相)이나, 또는 머물러 산다는 그런 머무름〔住〕이나, 머물다가 다시 파괴되는 괴상(壞相)이나, 또는 남자다, 여자다, 하는 상(相)도 열반경계에는 없는 것입니다. 남, 여가 뚜렷이 구분이 있는 것은 욕계의 범주내에서 뿐입니다. 욕계를 떠나면 벌써 남, 여의 상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상(十相)이 없는 것이 열반상이라는 말입니다.


 열반경에서는 '색시무상(色是無常)이나' 물질적인 색은 덧없지마는, '인멸시색(因滅是色)하여' 이 무상한 색이 멸함으로 말미암아 '획득해탈상주색(獲得解脫常住色)이라' 변함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모든 번뇌를 해탈한 진실한 색(色) 곧 무량무변한 청정광명을 얻을 수 있다는 법문입니다. 현대 물리학에서 증명하는 바와 같이 저 물질의 끄트머리, 물질의 근원에는 광명만 남습니다. 따라서 일체의 존재란 것은 사실은 광명 위에 이루어진 광명의 파동입니다. 색이 비록 무상하나 이 무상한 색(色)이 멸함으로 말미암아서 해탈상주색 즉 성․주․괴․공에도 상관없고 또는 생․주 이․멸에 상관없고, 인간의 생․로․병․사에도 상관이 없이 항시 영원히 머무는 해탈상주색인 묘색, 진색인 무량광명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능엄경에는 '여래장중(如來藏中)에 성색진공(性色眞空)이요 성공진색(性空眞色)이라' 무량공덕을 갖춘 불성(佛性) 성품의 묘색(妙色)은 바로 진공이요 여래장중에는 성품 곧 본체가 비어 있는 공(空)한 자리가 그대로 실상인 진색(眞色)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정본연 주변법계(淸淨本然周遍法界)라' 본래 청정한 진여 불성이 우주에 두루해 있는 것입니다.


 화엄경에는 '일모공중(一毛空中)에 무량불찰(無量佛刹)이' 미소(微少)한 터럭 구멍 속에 한량없는 부처님의 나라가, '장엄청정(莊嚴淸淨)하여 광연안립(曠然安立)이라' 장엄하고 청정하게 조금도 줄어지지 않고 그대로 광활하게 보존돼 있다는 법문인데 능엄경, 화엄경, 유마경 등에 있는 법문입니다.

 상대를 초월한 세계에는 크다, 작다, 많다, 적다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이라, 하나가 일체요 일체가 하나입니다. 삼천대천세계가 즉 나요, 내가 즉 삼천대천세계이고, 하나의 티끌이 삼천대천세계요, 삼천대천세계가 바로 한 티끌입니다. 이런 심심미묘한 가운데서는 하나의 터럭 구멍 가운데 무량불찰(無量佛刹)이, 삼천대천세계가 장엄 청정히 들어 있지마는 그것이 조금도 축소도 안 되고 그대로라는 말입니다.


 '진진찰찰(塵塵刹刹)이 구설구청(俱說俱聽)하여' 우주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 땅이나 저 땅이나, 적광토나 사바세계나 극락세계나, 또는 이것이나 저것이나 일체 모두가 다 함께 설법하고 함께 듣는다는 말입니다.


 저 영국의 18세기 시인 월리암 블레이크(Blake, William 17571827) 시(詩)에도 모래알 한 톨에서 우주를 보고 장미꽃에서 천지조화를 본다는 시 구절이 있지 않습니까마는 도인이 아니더라도 위대한 시인은 이와 같이 신비한 우주의 조화를 느낍니다. 어느 국토 어느 나라, 사바세계나 극락정토나, 또는 나무나 풀 한 포기를 보더라도 그렇게 범연히 보아 넘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바로 보면은 모두가 진여불성 아님이 없기 때문에 서로서로 설법하고 설법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본래로 유기적(有機的)인 원융무애한 생명체입니다.

자연을 훼손하지 말라고 여러 모로 캠페인을 하는 것은 좋으나 철학적으로 모든 .존재의 동일(同一)한 생명관을 가르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대책입니다. 중국의 황하(黃河)를 저 하류(下流)에서 제 아무리 맑히려 해도 맑힐 수가 있겠습니까? 저 황토층에서 황토가 내려오니 상류(上流)를 맑혀야 하는데 무슨 일이나 근원을 맑히는 데는 철학적 종교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근본 원리를 파악해 버리면 저절로 자연 훼손을 하지 말라고 안 해도 일체가 동일한 생명이라고 생각할 때 어떻게 함부로 파괴하겠습니까? 지금 사회 운동권에서 고생하는 분들은 더러는 헛고생, 서투른 짓을 많이 합니다.


 찰찰진진 두두물물이 모두가 서로 설법하고 서로 듣고 있습니다. 풀도 설법하고, 풀도 듣고 있고 돌멩이 하나도 설법하고 같이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청(說聽)을 동시(同時)하니' 먼저고 나중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동시에 설법(說法)하고 청법(聽法)한다는 말입니다. '묘재(妙哉)라 차경(此境)이여!' 이 경계가 얼마나 신묘한 것인고! 이 게송은 사명(四明 知禮~宋時代) 존자라고 하는 분의 게송입니다. 천태교의 위대한 분이라서 존자라고까지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묘색잠연 상안주(妙色湛然常安住)하여' 묘색이 고요하고 맑게 항시 안주한다는 말인데 신묘한 진공묘유의 색, 청정미묘한 생명의 광명이 항시 안주해서 '불이생로병사천(不移生老病死遷)이라' 생로병사에 따라서 옳기지 않는다. 생로병사야 있든 말든 일체 차별 경계를 초월하여 영원불멸하게 빛나는 청정광불(淸淨光佛) 바로 아미타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