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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마음의 고향

제 10 집 2. 일상삼매 일행삼매(一相三昧 一行三昧)

마음의 고향 제 10 집


바른 인식론(認識論),바른 수행론(修行論),바른 증명론(證明論)

* 불기2537년(서기1993년)8월1일 태안사 정기법회 및 하계 용맹정진 회향 법회에서 석 청화 큰스님께서 800여명 4부 대중에게 설법하신 법어입니다.


-. 일상삼매 일행삼매(一相三昧 一行三昧) [1]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는데 있어서는 세 가지 문제를 깊이 관심을 두고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어떻게 부처님 법을 인식해야 할 것인가,

이른바 인식론적인 문제입니다.

부처님 법을 지금 철학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어떻게 인식을 하여야 할 것인가, 그 인식론적인 문제가 바로 먼저 확립이 되어야 하는 것인바. 바른 인식을 못하면 바른 수행도 제대로 닦을 수가 없는 것이고, 또 부처님 가르침은 꼭 증명까지 가야 하는 것인데, 증명하여야 한다는 그런 증명 문제도 온전히 증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3가지 차원은 먼저 바른 인식론(認識論) 문제, 그 다음은 닦는 문제, 어떻게 닦아야 할 것인가, 이른바 바른 수행론(修行論)입니다.

그 다음은 어떻게 증명을 해야 할 것인가, 그 증명론(證明論)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은 왜 그런가 하면 불교의 목적은 대체로 다들 아시는 바와 같이 해탈이라 하는 구경적인 깨달음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마땅히 거기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바른 인식, 바른 수행, 바른 증명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번에 우리 재가 불자님들이 4박 5일 동안 공부하신 것도 그냥 이치를 알고 만다는 그런 것 같으면 강의만 주로 하고 말았겠습니다만 그렇지 않고서 꼭 정말로 우리가 수행해서 닦고, 증명한다 하는 그런 필수적인 문제 때문에

우리가 특히 어제 밤은 철야정진을 하고서 공부를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불교의 깨달음도 그냥 이치로 깨닫는, 지견(知見)으로 깨닫는 풀 해(解)자, 깨달을 오(悟)자, 해오(解悟) 단계가 있는 것이고, 또 우리가 이치를 앞세우기는 앞세우지만 먼저 증명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그러한 이른바 증할 증(證)자, 깨달을 오(悟)자, 증오(證悟)까지 가야 우리가 참다운 깨달음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근대나 중세의 우리 불교사를 보고 다른 종교의 역사를 본다 하더라도

이런 해오와 증오 문제, 이치 지견으로 아는 해오(解悟)와 실질적으로 우리 업장이 다 녹아져서 증명하는 증오(證悟)의 그러한 한계가 모호하기 때문에 상당히 필요 없는 논쟁도 많이 생기고 또는 증상만(增上慢)이 생겨 가지고서 자기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깨달았다고 하는 그런 좋지 않은 폐단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선 인식론적으로 어떠한 것이 바른 지견인가?

바른 지견이 확립되지 않으면 사실은 바른 수행이 못 됩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실험한다 하더라도 실험에 따르는 바른 이론 체계가 확립이 되어야 바른 실험이 되는 것이지 바른 이론 체계 없이 바른 실험이 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더구나 우리가 생명을 걸고 닦는 수행 문제라 하는 것은 꼭 바른 견해, 바른 수행이 앞서야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것이 바른 견해인가?

바른 견해가 확립이 못되면 우리 수행도 헛된 낭비를 많이 합니다. 고생 안 할 것도 고생하는 것이고, 또 분별시비를 안 할 것도 공연히 쓸데없이 그런 분별시비를 많이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하는 분들은, 특히 부처님이라 하는, 진여불성이라 하는 생명의 실상을 스스로가 꼭 증명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애써서 바른 지견, 이른바 이치로라도 바른 깨달음, 바른 해오(解悟)를 먼저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중국 당나라 때나 송나라 때의 불교사나 선교사를 보면, 어느 스님이 선지식(善知識)한테 가서 문법(問法)을 하여서 계합(契合)된, 그런 걸 맞는 해답에 따라서 그냥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대오철저(大悟徹底)라, 한 마디에 깨달아 버렸다거나, 또는 당하(當下)에 성불(成佛)이라, 그냥 곧 그 자리에서 부처가 되어 버렸다, 이런 여러 가지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 마디에 깨달아 버렸다는 이런 분들도 그 뒤에 어떻게 했는가를 더듬어 보면 그냥 공부를 안 한 것이 아니라,

한 마디에 깨달아 버렸다 하신 분들도 두고두고 공부를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생각할 때는 한 마디에 깨달아 버렸다는 깨달음 그것이 가장 끄트머리 이른바 완전무결한 깨달음이 못 되고서 어느 단계의 깨달음이기 때문에 나중에 공부를 더 해서 그 다음에야 위대한 성자가 되고 한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깨닫는가? 깨닫는 정도가 무엇인가?

이것은 우리가 굉장히 주의를 가지고서 점검을 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 일본의 임제종(臨濟宗)의 중흥조라 하는 백은혜학(白隱慧鶴) 선사, 그 분이 하신 말씀 가운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대오십팔번(大悟十八番)이라, 큰 깨달음은 18번이나 있고, 소오부지수(小悟不知數)라, 작은 깨달음은 부지기수(不知其數)라, 그 숫자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많단 말입니다.

그 중흥조라 하는 어른인데 그러신 분이 그와 같은 말씀을 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후학들로 해서는 굉장히 혼란을 느낍니다.

깨달음이 대관절 어떤 것이기에 그렇게 큰 깨달음이 18번이고, 작은 깨달음은 무수히 많단 말인가?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은 불교가 다른 종교와 같이 단순 소박하면 공부하기가 쉽습니다만 그 8만 4천의 법문이 있는 것이고, 거기다가 또 선지식들이 자기 나름대로 말씀을 하여 놓고, 그리고 그 깨달음의 내용이 그냥 조금 기분이 좋아가지고 무얼 좀 아는 정도 그런 정도의 깨달음에 그쳐 버리면 모르려니와 정말로 일체종지(一切種智)라, 다시 말씀드리면 본체적(本體的)인 문제나 현상적(現象的)인 문제나 모두를 다 통틀어서 아는 지혜라는, 그런 일체종지를 다 안다고 생각할 때는 사실은 오랫동안 수련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말로 해서는 가령 무아(無我)라, 내가 없다, 그런 말도 말로 해서는 누구나가 쉽게 할 수가 있습니다.

또는 무소유(無所有)라, 본래 소유가 없다, 이런 말도 말로 해서는 누구나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그 뜻을 알듯 한 분들도 역시 어느 경계에 부딪히면 그렇게 되지가 않습니다. 그것이 왜 그러한 것인가?

이치로는 안다 하더라도, 이른바 분별지혜(分別智慧)로는 안다 하더라도 참다웁게 증명(證明)을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꼭 증명이 따라야 합니다. 증명이 따라야 앞에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참다운 깨달음, 참다운 성자(聖者)의 영역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성자라 하는 것은 이른바 정성리생(正性離生)이라, 중생의 경계를 떠난 바른 성품의 자리를 말합니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 중생의 삶은 사실 참다운 삶이 못 됩니다.

우리 중생은 바르게 보는 그런 삶이 못 됩니다. 예를 들면 검은 것보고 희다고 하는 것이고, 또 바른 것을 보고 구부러졌다고 하는 것이고,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모두가 다 개시 허망이라, 이것이나 저것이나 사실은 다 꿈같은 것이고, 또 가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허망한 것을 가지고 서로 우김질 하고 서로 다툰다고 생각할 때는 개인(個人) 대(對) 개인 문제라든지, 또는 단체 간의 문제라든지, 또 각 종단(宗團)의 문제라든지, 그런 분별이나 갈등을 도저히 해소를 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가 증명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해석하고 느끼는 것은 자기가 배운 대로 들은 대로 해석을 하니까 각기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참말로 옳은 깨달음은 응당 다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까 말씀드린 정성리생(正性離生)이라, 바를 정(正)자, 성품 성(性)자, 떠날 리(離)자, 날 생(生)자입니다. 그 뜻은 우리 중생의 경계를 떠나서 참다운 바른 불성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그와 같이 우리 중생 차원을, 우리 범부 중생의 영역을 떠나서 참다운 성자의 경계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자의 경계에 들어가려면 그냥 이치로만은 안 된다는 말입니다.

삼업청정(三業淸淨)이라, 우리의 업장(業障)이 녹아야 하는 것이고, 또 업장을 녹이기 위해서는 그냥 쉽게 녹일 수가 없는 것이고, 물론 자기가 지은 바 업장이 가벼운 분은 쉽게 녹일 것이고, 무거운 분은 더디게 녹이게 할 것입니다만 어쨌든 우리가 이치로 아는 것은 순간 동안에 알 수가 있지만 정말로 우리가 증명을 해서 우리 생리(生理)가 정화(淨化)가 되고 우리 업장이 녹아 가지고 증명해서 안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러한 증명의 문제가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공부를 하셔야 그때그때 퇴굴심(退屈心)이 안 나오게 되지만, 또는 우리가 경계에 부딪혀서 기분이 나쁠 때에는, 나는 공부를 웬만히 했는데 내 행동이 이것밖에는 아닐까 하고 자기 스스로 좌절을 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40년 50년 몇 십 년 동안 공부했다 하더라도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정성리생(正性離生)이라, 참말로 우리 공부가 진여불성 자리에 온전히 계합이 되었으면 모르겠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다고 생각할 때는 범부분상에서는 어느 누구나가 다 심란할 정도로 어떤 경우는 허물을 범합니다.


-. 일상삼매 일행삼매(一相三昧 一行三昧) [2]


그러면 우선 우리가 이론적으로, 이른바 인식론적으로 어떻게 알아야 할 것인가?

특히 참선 공부를 바로 모르면, 정견(正見)을 바로 못 세우면,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서 조금도 방편이 없는 참다운 진실 법문을 바로 모르면 참선이 못되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한 시간 동안을 앉는다 하더라도 그냥 덮어 놓고서 가부좌를 하고 앉았으면 머리가 맑아진다는 이런 것이 아닙니다.

이번에 오셔서 공부를 하신 분들은 대체로 자기가 그때그때 선지식들이나

또는 아시는 스님 네한테 자기 수행하는 공부 방법을 들어서 다 알고서 오신 분들이라고 생각을 합니다만 더러는 그런 사전 준비가 없이 그냥 참선을 하면 좋다, 참선을 하면 건강에 좋다,

참선하면 머리가 맑아진다, 이런 정도로만 알고 와서 앉는 분들은 사실은 참선 공부를 하고 갔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참선 공부는 선행적으로 바른 견해가 앞서야 하는 것입니다. 바른 견해는 어떤 견해를 가리키는 것인가?

이것은 그 전에도 가끔 말씀을 했습니다만 불이법문(不二法門)이라, 모두가 다 둘이 아닌 법문이란 말입니다.

세상만사를 자기 생각이라든지 자기 몸뚱이라든지 어떤 것이나 모두가 다 하나의 것으로 통일을 시켜 버려야 합니다.

이것 보고 이른바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일체 분별 시비라든지 모든 존재를 눈에 보이는 것이나 안 보이는 것이나 모두를 다 하나의 체계로 딱 통합을 시켜버려야 한단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 분별 시비를 잠재울 수가 없습니다. 증명은 미처 못 했다 하더라도 우선 우리가 이론적인 지견이나마 부처님 가르침을 따라서 우리 마음이 통일되어 버려야 쓸데없는 부질없는 갈등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령 호흡법을 한다 하더라도 단전호흡은 그도 상당히 좋은 공부법이 아닙니까만 단전호흡을 한다 하더라도 그냥 호흡만을 애쓰고 합니다만 애쓰고 하다가는 보통은 이득보다는 나중에 가서는 위(胃)가 확장되고 또는 병(病)이 생기는 분이 더 많단 말입니다.

그런 것도 바른 지견이 없이 그냥 덮어놓고서 소박하게 공부하는데서 그렇게 됩니다. 가사 우리가 염불을 한다 하더라도 염불도 참선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참다운 염불의 도리를 알아야지 그걸 모르고서 그냥 염불만 한단 말입니다. 염불하면 신장(神將)이나 부처님의 가피가 있겠지, 그리고 끝에 가서는 깨닫겠지 하고서... 물론 애쓰고 하다보면 안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참선 공부는 못되는 것입니다.

참선 공부가 되기 위해서는 꼭 바른 지견, 이른바 부처님 팔정도 가운데서 정견(正見)이 없이는 참선이 못되는 것입니다.

다시 바꿔서 말씀드리면 반야지혜가 전제가 되어야 그래야 참선이 됩니다.

다른 공부와 참선 공부와는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 말씀을 불교 술어로 하면 선오후수(先悟後修)라, 먼저 이치로 깨닫고 닦아야 그래야 이른바 참선 공부란 말입니다.

이런 도리는 꼭 잘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참선은 누구나 그냥 아무렇게나 앉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또 우리가 생각할 것은 무엇인가 하면 모든 것이, 나나 너나 모든 존재가 다 하나의 도리로 통일이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도 그 사람의 업장 따라서 느끼는 정도가 천차만별입니다.

그냥 어렴풋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으니까 모두가 다 하나의 도리이겠지, 이렇게 아시는 분도 있고, 또는 기도를 많이 모시고 참선을 좀 해서 상당히 맑은 분들은 이것은 여실하게 모두가 다 하나이겠구나, 이렇게 더 깊이 느낀단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 근기 따라서 여러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와 같이 수련대회를 입제(立制)하고 공부를 하는 것은 우리 근기를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른바 수련대회라는 그런 말씀도 붙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의 근기가 아직은 낮아 가지고서 가사 부처님의 그런 심수 오묘한 그런 가르침을 듣는다 하더라도 확실하게 신심(信心)이 안 간단 말입니다. 신심이 안가면 따라서 우리 행동도 거기에 따르지를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닷새고 며칠일이고 이렇게 오로지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자기의 망심(妄心)은 줄어들고 동시에 자기 맑은 정심(淨心)은 점차로 더 증가 되어 갑니다.

아무튼 이렇게 증명하는 것이 우리 수행자들이 할 일인데, 사실 지금 저 같은 사람도 증명을 온전히 했다고 생각한다면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은 비도 멈추게 할 수가 있는 것인데, 제 공부가 너무나 미숙하니까 아무런 그런 초인적(超人的)인 힘을 못 냅니다.

저도 참 부끄럽게 생각을 합니다.

<엄청난 비가 쏟아져서 보제루 밖, 법당 앞의 의자에 앉아 계시던 대중들이

 비를 피해서 이동하는 바람에 잠시 주위가 산만하였다. 아마 최근 몇 년간에 이렇게 많은 신도님들이 모이신 적은 거의 없었을 정도로 많은 신도님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이셔서 성황을 이루었다. 보제루 법당 큰방 천불전 종무소가 거의 신도님들로 가득 메워졌을 정도로 줄잡아 800여명은 넘었다.>

부처님 법 가운데는 정말로 해탈(解脫)했다고 생각할 때는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도 충분히 비를 멈추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가 다 하나의 도리다, 하나의 진리다, 이렇게 알면서 거기에 곁들어서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면은 하나의 진리일 뿐만 아니라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의 진리인데, 그 가운데는 이렇게 비가 오는 날, 비를 멈추게 할 수 있는 힘도 있고 또 어떠한 힘도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한테 갖추어져 있는 그런 큰 덕이 나 아(我)자, 큰 덕(德)자 아덕(我德)이라, 열반사덕(涅槃四德) 가운데 아덕입니다. 아덕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하면은, 정말로 진여불성을 원만히 증명한 사람은 우리 몸을 동시에 우주에 가득 차게 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또는 우리 몸을 몇 천개 몇 만개로 동시에 나투게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행(飛行)도 마음대로 할 수가 있는 것이고, 또는 작은 것을 크게 할 수도 있는 것이고, 이와 같이 일체 신통묘지(神通妙智)를 갖추고 있는 이것이 이른바 아덕입니다.

내가 갖추고 있는 무한한 공덕(功德)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두가 다 하나의 도리다, 이렇게 앎과 동시에 또 그 하나의 도리 가운데는 일체 만 가지 덕을 다 갖추고 있다, 여기까지 알아 버려야 이제 참선 공부하는데 있어서 기본적인 준비가 됩니다.

기본적인 견해가 됩니다.

이렇게 알아야지 그렇지 않고 자기 스스로 자기 불성에 한계를 딱 세워서, 내가 설사 해탈을 한다 하더라도 나는 아는 것이나 좀 알지 내가 무슨 신통을, 신통은 외도나 하는 것이지 그런 것은 나한테는 무관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한테 갖추고 있는 무한의 덕성(德性)을 우리가 그만큼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한테 갖추고 있는 무한성(無限性), 무한의 공덕을 분명히 느끼고 확신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러한 아덕(我德)을 다 증명하셔서 우리한테 여러 가지로 부사의(不思議)한 공덕(功德)을 보이신 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영험력(靈驗力)으로 보나 또는 그 도인들의 행적으로 보나 부사의한 공덕이 상당히 많은 것입니다.

가사 우리 한국에도 저 강원도 건봉사에서 공부하시다 가신 신라 경덕왕 때 발징화상(發徵和尙 : ? - 796), 그 분은 30년 동안 오로지 공부만 했단 말입니다.

미타만일회(彌陀萬日會)를 설치하여 지성으로 염불수행만을 30년 동안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른바 만일(萬日)이지요. 그래서 만일회(萬日會)라고도 합니다. 만일 동안이나 염불 공부를 오로지 했습니다.

30년 동안 공부한 끝에 회향 때는 도반 가운데서 31명이 그냥 육신등공(肉身登空)이라, 자기 육신 그대로 하늘로 올라가 버렸단 말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을 드리면 어느 분들은 이것은 동화(童話)와 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이것이 어떻게 사실일 것인가 하겠지만, 저는 절대로 동화와 같은 그런 공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은 가끔 제가 말씀을 드립니다만 사실은 우리 몸이라 하는 것은 본래로 무게가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심신불이(心身不二)라, 우리 몸과 마음은 절대로 하나입니다.

하나인데 우리 마음이 온전히 반야의 지혜에 철저하다고 생각할 때는, 반야의 지혜를 깨달아서 온전히 우리가 반야의 지혜와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할 때는 사실은 우리 몸의 무게를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경전에 보면 우리한테서 욕심의 뿌리만 뽑히면, 욕심의 뿌리가 온전히 잔뿌리까지 뽑혀버리면 그때는 자기 마음먹기에 따라서 자기 발로 하늘로 올라 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한테 갖추고 있는 자성공덕(自性功德)은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그런 공덕을 믿어야 하는 것인데 보통은 잘 믿지를 않고, 또한 근래에 와서는 그런 공덕을 우리한테 내 보이는 분이 별로 없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지를 않는 것이지만 그러나 공부를 하는 우리 수행자들은 꼭 자기 스스로 못한다고 해서 그래서 부처님의 그런 진여공덕을 절대로 제한하여 과소평가를 하여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계신다 하더라도 이 자리에 계시는 여러분들이 정말로 부처님한테 갖춘 즉 내 맘에 갖추어진, 진여불성 공덕을 확신한다면 그것을 발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내 마음이 바로 부처고 부처가 바로 내 마음입니다. 그리고 내 마음과 내 몸은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과거 전생에 업장 따라서 이와 같은 몸이 지금 생겼습니다.

업장의 바람 따라서 업풍(業風) 따라서 이렇게 몸이 태어났기 때문에 업장이 녹아져서 정말로 본래적인 부처의 자리로 우리 마음이 돌아간다고 생각할 때는 진여불성에 갖추어진 무한의 공덕을 우리가 발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치에 맞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과거 무수한 도인들이 다 증명을 했던 것입니다.


-. 일상삼매 일행삼매(一相三昧 一行三昧) [3]


중국 당나라 때 등은봉(鄧隱峰)이라는 스님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순수한 참선승인데 신통 지혜를 부린 분입니다. 한 번은 만행을 좀 하다가 저 오대산에 들어가려고 산 어귀에 들어섰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때 마침 정부군하고 반역군하고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 비참한 꼴을 차마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걸 어떻게 해야 싸움을 말릴 것인가?

그렇게 서로 적대시해서 죽이고 죽고 싸우는 판에 말로 해서 되겠습니까.

말로 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 주장자(狏杖子)를 하늘로 휙 던졌단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 자기 몸을 하늘로 솟구쳐서 주장자 위에 올라타고서 싸우는 전쟁터를 몇 십 번을 돌았습니다. 아무리 싸우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웬 사람이 그야말로 지팡이를 타고서 공중을 빙빙 돌아다니니까 참 이상하겠지요.

그래서 공중 위에서 '제법무상(諸法無常)이라', '모두는 다 허망(虛妄)한 것이다. 미움도 허망하고, 사랑도 허망하고, 그대들 몸도 허망하고, 또 권력도 허망하고, 권력이나 재산이나 미움이나 사랑이나 모두가 다 허망하다'는 그런 법문을 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비로소 그 사람들이 양편 다 그 기묘한 신통묘지(神通妙智)를 보고서 감동을 느끼고서 싸움을 멈추었단 말입니다.

이러한 사례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하는데 삼종시도(三種示導)라 하여서 세 가지 차원으로 구분해서 말씀했습니다.

맨 처음에는 교계시도(敎誡示導)라 해서 가르침을 말로 설법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통으로 해서 잘 못 알아듣는다거나 또는 근기가 안 맞아서 잘 납득이 안 간다거나 그런 경우는 부처님께서 타심통(他心通)으로 해서 그 사람의 근기를 꿰뚫어 본단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보는 그런 신통이 타심통입니다. 꿰뚫어 봐서 그 사람 근기에 딱 알맞은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심시도(記心示導)라 합니다.

저는 이따금 정도에 맞지 않는 말씀을 하기 때문에 비판도 많이 받습니다만

그것은 제 공부가 부족하니까 할 수가 없는 것이고, 아무튼 그런 타심통으로 해서 그 사람 근기에 맞추어서 딱 알맞은 법문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 사람의 업장이 많아서 못 알아들을 때에는, 가사 교만심(驕慢心)이 많은 사람들이 아예 들으려고도 안하여 버리는 그런 때에는 부처님께서는 신변시도(神變示導)라, 신통을 나투어서 그 듣는 청중들의 교만심을 끊어 버린단 말입니다.

그냥 빈 말로 하면 제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업장이 무거운 사람들은 별로 감동을 못 느낍니다.

그러나 정말로 공중에다 자기 몸을 솟구쳐서 비행자재를 하고, 또는 광명을 나투어서 훤히 우주를 비춘다거나 이러한 경우는 아무리 업장이 무거운 사람들도 관심을 가지고 감격스럽게 들을 수가 있겠지요.

이것을 가리켜서 신변시도(神變示導)라 합니다.

이와 같이 세 가지 차원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는 교계시도(敎誡示導)라 설법(說法)으로 말로 하시고, 그 다음은 기심시도(記心示導)라 타심통(他心通)으로 해서 그 사람 근기를 보아서 거기에 걸맞게 제도를 하시고, 그래도 안 될 때는 신변시도(神變示導)라 신통묘지(神通妙智)로 해서 그 위력(威力)을 나투어서 교만심을 조복(調伏)한 뒤에 법문을 하신단 말입니다.

부처님 법은 이와 같이 심심미묘(甚深微妙)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참선 공부는 그냥 고달프기만 하고, 조금 무언가 알둥말둥 하다 말아버리는 그런 정도가 절대로 아니라 정말로 깨달아서 온전히 자기가 범부의 생을 떠나 참다운 성자의 영역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할 때는, 그 때는 천지 우주가 자기가 되어 버립니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하니 시방세계시전신(十方世界是全身)이라!

백척간두에서 모름지기 우리가 더 나아간다고 할 때에는 -시방세계시전신이라- 시방 세계 모두가 다 한 몸이 되고 모두가 다 부처가 되어 버린단 말입니다.

이런 도리를 여러분들은 환희심(歡喜心)을 가지고 깊이깊이 느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부처님의 공덕을 믿어야지 부처님 공덕을 잘 믿지 않으면 공부가 팍팍하기도 하고 또는 공부가 빨리 성취가 된 사람들은 모르지만 업장이 무거워서 몇 십 년 잘 안 되는 사람들은 중간에 하다 그만 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스님 네도 보면 한 40이나 50이나 되도록 그와 같이 참선방에 왔다 갔다 하다가 별로 신통한 재미를 못 보면 그때는 그만 두어 버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업장이 무거운 분들은 그냥 쉽게 몇 년 동안에 공부를 다 마칠 수가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업장이 무겁다 하더라도 우리가 한 시간 동안 참선하면 한 시간 동안 한 만큼 우리 잠재의식(潛在意識)에다 공부의 흔적(痕迹)을 다 두는 것입니다. 공부의 종자(種子)를 다 심는 것입니다.

따라서 조금 안된다고 하더라도 너무 실망을 절대로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모르지만 자기가 공부를 한만큼 이른바 훈수(勳修)라, 더울 훈(熏)자, 닦을 수(修)자, 우리 마음에다가 공부를 한 만큼 공부의 기운을 다 심는 것입니다.

지금 4박 5일 동안 공부하신 분들은 그와 같이 마음에다가 공부한 품질을 다 심어 놓고, 공부한 그런 선근(善根) 종자, 맑은 종자를 다 심어 놓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는 그런 종자를 더욱 더 북돋우고 가꾸고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정말로 우리 범부를 초월해서 성자 된다는 것은 사실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느긋한 마음으로 단단히 각오를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과거 전생에 우리가 얼마나 업장을 많이 지었던가, 금생에는 얼마나 무거운 업장을 지었던가를 생각하여 봅시다.

중국에 여정(如淨:1163 - 1228)스님이 계셨는데, 이 분은 일본 불교에서 참선으로 가장 위대하다는 도원(道元:1200 - 1253)선사의 스승입니다.

그 당시 제방에서는 모두 위대한 도인이라고 숭앙을 한 분인데 이 분이 임종 때 어떻게 말씀을 했는가 하면은, 망단반야(妄斷般若)하니 죄범미천(罪犯彌天)이라, 내가 반야(般若)의 도리를 망령스럽게 했으니 죄(罪)가 어떻게 많든지 찰 미(彌)자, 하늘 천(天)자, 하늘에 꽉 차 있단 말입니다.

내가 반야를 잘 못 말해서 내가 망령스럽게 한 망언(妄言)은 죄가 하늘에 꽉 차 있다는 것입니다.

선지식(善知識)이라고 말을 듣는 분들도 이와 같이 자기 참회(懺悔)를 했습니다.

이런 정도로 하신 분이 위대한 선지식 가운데는 한두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 같은 아직 성자의 경계에 제대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따지고 보면 정말로 어떻게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하늘에 사무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에 사무치게 충만했다고 볼 수가 있겠지요.

그와 같이 우리는 자기 스스로 그런 엄격한 참회를 꼭 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생활하고 말하고 하는 것이 모두가 다 범부분상(凡夫疜想)에서는 이와 같이 망념(妄念) 투성인 것이고, 또 우리가 보는 견해도 역시 바르게 못 보기 때문에 그때그때 엉뚱한 판단도 하고, 그렇게 엉뚱한 판단을 할 때는 우리 주변도 그만큼 오염(汚染)을 시키는 것이고 남한테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점에서 우리가 닦기는 닦아야 하는 것인데, 닦을 때는 먼저 꼭 바른 이해, 바른 가치관으로 해서 닦아야 합니다.

모든 존재가 오직 하나의 생명이다.

이것을 증명할 때는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이  때는 우리가 어록을 보면 구구순숙(久久純熟)이라, 오랜 동안 우리가 공부하는 경계를 익히고 익히다 보면 그때는 자연내외(自然內外)라, 자연히 우리 마음이나 몸이나 모두가 다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하나로 딱 뭉쳐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경계를 가리켜서 부처님 말씀으로 신심탈락(身心脫落)이라 이렇게 말을 합니다. 몸 신(身)자, 마음 심(心)자, 벗을 탈(脫)자, 떨어질 락(落)자입니다.

이 말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자기 몸뚱이가 자기 것 같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자기 몸뚱이가 어디가 있는지 모를 정도로 텅 비어 버린다는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가운데 아직은 신심탈락을 경험하신 분들은 별로 많지가 않으시겠지요.

신심탈락을 경험해서 정말로 자기 몸뚱이가 텅텅 비어 버리는 경험을 하여야 비로소 이러니까 정말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구나, 이렇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을 미처 못 하신 분들은 부처님들이나 도인들이 말씀을 했으니까 본래 무아는 무아이겠지, 내가 분명히 없기는 없겠지, 그렇게 느끼기는 어렴풋이 느끼나 이것이 실감으로 오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구순숙(久久純熟)이라, 오랫동안 앉고 정진하고 참선하고 기도하고 이렇게 하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몸도 마음도 가벼워 가다가 나중에는 신심탈락이라, 우리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면서 어디가 있는가 없는가 모를 정도로 텅 비어 버립니다.

여기 까기 가 버려야 부처님의 무량 공덕도 내가 아직은 다 행사를 못할 지라도, 내가 아직은 수용은 못할 지라도, 정말로 신통도 있겠구나, 이렇게 느끼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에게서 무엇인가 이상의 힘을 느껴버려야, 정말로 위대한 도인들은 이런 정도가 아니라 무량(無量)한 신통(神通)을 하겠구나, 이렇게 느끼는 것이지 자기 공부가 안되어서 항시 자기 한계밖에는 사용을 못하면 그때는 깊은 신심(信心)이 못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될 수록 인연(因緣)을 잘 다스려서 공부를 지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단계가 이른바 불교 술어로 해서 사선근(四善根)이라 합니다.

넉 사(四)자, 착할 선(善)자, 뿌리 근(根)자입니다. 사선근이라는 술어를 잘 외워 두시고 어렴풋이나마 사선근을 알아두시면 자기 스스로 공부하실 때 정말로 필요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런 것을 모르면 내가 공부를 무던히 했는데, 또 내가 공부할 때 재미를 좀 보는데, 내 공부가 얼마만큼 나아갔는지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엉뚱하게 판단을 그릇되게 합니다.

그러면 괜스레 망언을 하는 것이고, 또 아주 재미있는 경계가 오면 도인의 경계도 이런 것이구나, 이렇게 느껴가지고 가짜 도인 행세를 합니다.

공부가 안되고서 되었다고 한다거나, 성자가 아니면서 성자라고 한다거나, 또는 어느 경계를 증명하지 못하고 증명했다는, 이것 보고 대망언(大妄言)이라, 또는 증상만(增上慢)이라, 망언도 보통 망언이 아니라 큰 망언이란 말입니다.

증상만은 못 증명하고 증명을 했다, 또는 성자가 아니면서 성자라, 이와 같이 이른바 참칭(僭稱)을 한단 말입니다.

이런 분들은 큰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큰 죄로 보아서 제가 오전에 보살계(菩薩戒) 십중금계(十重禁戒)라, 열 가지 무거운 계(戒) 가운데 망어계(妄語戒)를 말씀했는데 보통 거짓말은 큰 죄에는 해당이 안 되어도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못 닦고서 닦았다, 도인이 아니고서 도인이다, 이런 때 있어서는 대망언이 되어서 그때는 승려 같으면 승려 지위를 빼앗기고 쫓겨나야 하는 것입니다.

또는 공부를 해도 공부가 성취가 안 됩니다.

성인한테 거짓말을 하고, 닦는 경계에 대해서 거짓말을 하여 버렸으니 공부를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런 교만심(驕慢心)이 굉장히 무서운 것입니다.

 

-. 일상삼매 일행삼매(一相三昧 一行三昧) [4]


따라서 사선근(四善根 : 四加行) 법문을 알아야 하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알아야 하는 것인데 사선근은 어떤 것인가 하면 우리가 공부해 나아가면 맨 처음에 우리 마음과 몸이 점차로 가벼워져서 시원스럽단 말입니다.

몸도 시원하고 가슴도 시원하고 눈도 시원하고 그리고 별로 피로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보고 불교 술어로 따뜻할 난(煖)자, 난법(煖法)이라 합니다. 사실은 사오년 동안 공부했다 하더라도 난법상도 못 나온 분도 있습니다.

이것은 저마다 곧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또 한 십년 공부했다 하더라도 선방에 들어가면 그냥 꾸벅꾸벅 혼침(昏沈)에 들어가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사실은 제일 밑의 선근인 난법상의 경계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바른 견해를 가지고 계행을 지키고 바르게 닦는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 몸도 마음도 시원해서 웬만한 피로는 모르는 정도가 되어야 사선근 가운데 제일 밑에 있는 난법상이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한단 말입니다.

난법상이 나올 때는 마치 자기 몸이 이제 전류에 감전된 것같이 쩌릿쩌릿 하기도 하고 또 머리 뒤통수도 시원스럽기도 하고 또 자기 눈도 시원스러워서 혼침이 붙어 있지를 못합니다.

이렇게 되다가 그런 시원스러운 기운이 더한단 말입니다.

더 기분이 좋고 얼마든지 앉을 기분입니다. 다리가 저려서 아프다가도 이런 난법상이 나온 뒤에는 사르르 풀려 갑니다. 분명히 사르르 풀려 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공부를 안 쉬고 더욱 나아가면 그 때는 자기 눈앞에 부연(浮煙)이 달 같은 것이 나온단 말입니다. 나오기도 하고 안 나오기도 하는 것이지만 잘 안 나왔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미처 자기가 관심을 안 두었겠지요.

분명히 우리 업장이 녹아지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달 같은 것이 부연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또 공부를 안 쉬고 나아가면 그 때는 그것이 차근차근 커졌다 줄어졌다 합니다. 이른바 광협자재(廣狹自在)라. 이것은 제 말씀이 아니라 불경 가운데 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몸과 마음의 시원스러운 정도가 더한 경계를 이마 정(頂)자, 법 법(法)자, 정법(頂法)이라 합니다.

이 정법 단계만 되어도 별로 후퇴가 없습니다. 온전히 후퇴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별로 후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법상을 한 번 얻은 사람들은 금생에 몸을 마친다 하더라도

삼악도(三惡道)에는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에는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법상에서 자기 앞에 부연(浮煙)한 그런 희끄무레한 달 같은 것이 커지고 작아지고 이런 것을 경험한 분이 안 쉬고 공부를 더욱 더 용맹 정진해 간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그러한 것이 더욱 더 커지고 작아지고 해서 그 달 같은 것이 더 선명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참을 인(忍)자, 이른바 인법(忍法)상이라 합니다.

인법상을 얻으면 이때는 금생에 공부할 때도 설사 인법상을 그만두고 그렁저렁 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자기가 나쁜 짓을 도저히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은 한 번 선근이 자기 몸에 딱 박혀 버렸단 말입니다.

자기 마음에 선근의 종자가 많이 심어져 있어서 그렇게 나쁜 짓을 할래야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냥 반성이 되고 참회를 해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을 인(忍)자 인법상이고, 이런 단계에서 공부를 안 쉬고 공부를 더욱 더 정진해 간다고 생각할 때는 그 다음은 세제일법(世第一法)이라.

인간 세(世), 차례 제(第), 한 일(一), 법 법(法)자입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제일 높은 것이란 뜻입니다. 다시 바꿔서 말씀드리면 우리 범부 단계에서는 가장 높은 단계라는 것입니다.

성자는 미처 못되었지만 범부 단계에서는 벌써 시원스러운 난법상을 지내고,

또 거기다가 조금 더 나아가서 시원스러운 기(氣)가 더하고 앞에 가서 달 같은 것이 보일둥 말둥 하는 정법(頂法)상을 지내고, 또 거기서 공부를 더해 들어가면 그냥 그러한 달같이 밝은 것이 더 커지고 작아지고 이렇게 자재(自在)로 해가다가, 정말로 달 같은 것이 빛을 발휘해서 빛나는 금색광명(金色光明)으로 바뀌어질 때, 이것 보고 세제일법(世第一法)이라, 우리 범부지(凡夫地)에서는 제일 높은 간계라고 합니다.

이렇게 공부가 되어 가다가 이런 단계에서도 견성오도(見性悟道)가 바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 근기 따라서 바로 된 분도 있겠지만 또는 방금 제가 말씀드린 세제일법이 되었다 하더라도 업장이 무거운 사람들은 몇 년도 걸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자리에서도 공부를 안 쉬고 더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공부하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을 해도 안 되고 너무 어렵게 생각을 해도 안 됩니다.

너무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은 무슨 말씀인가 하면 우리 범부가 과거 숙세(宿世)에 지어 내려온 구생기(俱生起) 번뇌(煩惱)라 하는 것과 또 금생에 잘 못 배우고 잘 못 느끼고 잘 못 버릇을 붙인 그런 금생의 분별기(分別起) 번뇌(煩惱)라 하는 이런 번뇌가 우리에게는 지금 굉장히 무거운 셈입니다.

공부해 보시면 짐작할 문제이겠지만 참선을 십 몇 년 세월을 했다 하더라도

나한테 번뇌가 아무것도 없을 것인가,

자기 스스로 반조(返照)해 보면 그렇지가 않단 말입니다.

성자가 미처 못된 단계에서는 진여불성 자리를 온전히 현관(現觀)하지 못하여, 온전히 체험하지 못했을 때는 항시 그때그때 정도만 좀 적은 것이지 분별 시비가 안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는 굉장히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까.

그러나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본래 이 마음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이 마음 몇 단계 떠나서 부처가 아니라 이 마음 그대로 부처란 말입니다.

이 마음 바로 부처인데 다만 나쁜 버릇에 딱 젖어 있어서 그 버릇이 좀처럼 떼어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쉽다고 하면은 이 마음 바로 부처기 때문에 이 마음 떠나서 부처가 아니라, 비록 내가 못된 짓도 많이 하고 망상도 많이 했다 하더라도 이 마음의 성품이 바로 부처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00%로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좋다, 궂다, 밉다, 예쁘다 하는 이런 것은 모두가 다 꿈같구나, 이런 것이 아무런 필요도 없구나, 이렇게 분명히 느끼고서 나한테는 틀림없이 무한의 불성 공덕을 원만히 갖추고 있다. 이렇게 100% 느낀다고 생각할 때는 정말로 꼭 그대로 순식간에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 공부는 앞서도 누누이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한테 갖추어져 있는 그런 자성 공덕에 대한 투철한 인식(認識), 즉 모든 것이 본래로 오직 하나의 생명이다, 이런 것을 천번 만번 되 뇌이고 확신을 해야 합니다.

이런 것이 이른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의 지혜(智慧)입니다. 우리가 생각한 것은 다 빈 것이고 껍데기인 것이고, 다 꿈같은 것이고 참말로 진여불성의 그런 성품에 있어서는 일체 존재가 모두가 다 하나이다, 이렇게 느끼고 다시 느끼고 이런 자리를 지속시켜야 그래야 참다운 공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달마 스님께서 하신 법문 가운데서 중요한 핵심이 무엇인가 하면은 이입행입(理入行入)이라, 다스릴 리(理)자, 행할 행(行)자, 들 입(入)자, 수행에 들어간다, 먼저 원리(原理)로 들어간 다음에 그 원리에 입각해서 실천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꼭 그리해야 하는 것이지 원리에 대한 바른 인식도 없이 그냥 바로 닦아서는 우리 생명을 낭비하면서도 합니다. 공부가 잘 될 수가 없습니다.

과거 전생에 닦은 사람들은 더러 많이 나아진 이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은 굉장히 힘을 낭비하고 상기(上氣)가 되어서 그때그때 고생을 호소합니다. 따라서 분명히 먼저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식론(認識論)적으로 바른 인식을 해야 합니다.

이입행입(理入行入)이라. 먼저 분명히 바른 인식을 이론적인 체계를 다 세워 놓고서 그때그때 이론적인 체계에 맞게 공부를 해야 생명의 낭비를 않고서 공부가 속 빠른 것입니다.

달마 스님, 2조 혜가(慧可) 스님, 3조 승찬(僧瓚) 스님, 그 분들의 어록(語錄)도 간간히 있지만 아주 빈약합니다.

내용이 빈약한 것이 아니라 이른바 그 양(量)이 빈약합니다. 그러나 4조 도신(道信) 스님의 어록은 상당히 양이 많습니다. 그 대요를 보면 이입행입(理入行入)이란 이입(二入)의 도리와 똑 같은 내용이 다만 표현을 달리했습니다.

우리가 공부할 때는 문수반야경(文殊般若經)에 있는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를 닦으라고 하였다는 말입니다.

4조 도신 스님의 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에 보면 있습니다.

5조 홍인(弘忍) 스님도 그랬습니다. 또 6조 혜능(慧能) 스님은 단경 부촉품(付囑品)에서 그대들 일반 중생들이 부처님의 일체종지(一切種智)을 얻으려고 하면 마땅히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를 닦아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따라서 이번에 우리 공부하신 분들은 제가 지금 말씀 한 것이 어렵기는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 정도는 외워 두셔야 나중에 공부를 하실 때에 주저하지 않고 또 헛된 힘을 낭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앞서 이입행입을 말씀 드렸지만 이입(理入)은 다스릴 리(理)자, 들 입(入)자, 이치(理致)로 해서 먼저 알아 놓고 하는 것, 그 다음에는 이치를 알아 놓은 뒤에 이치에 입각해서 우리가 실천하는 행위를 한단 말입니다. 실천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입(行入)입니다. 그와 의미가 비슷하게 일상삼매(一相三昧)라, 이것은 일체 존재가 모두가 다 하나의 도리, 상(相)이 둘이나 셋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一相)이라. 하나의 상, 하나의 실상(實相)이라, 천지우주(天地宇宙)는 하나의 실상(實相)인 것입니다.

하나의 실상인 도리를 우리가 느끼고 납득하는 것이 바로 일상삼매입니다.

나를 보나 너를 보나 또는 산을 보나 물을 보나 또는 미움을 보나 무엇을 보나 모두가 다 진여불성, 이것도 역시 제법의 실상이구나, 이와 같이 일체 존재를 불성으로 보고 실상으로 본단 말입니다.

그 다음 일행삼매(一行三昧)라.

일행삼매는 무엇인가 하면 일상삼매, 즉 우주를 하나로 보는 그런 경계를 우리가 지속적으로 나간단 말입니다.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공부해 나아가는 것을 가리켜서 일행삼매라고 합니다.

이것을 더 간추리면 정혜쌍수(定慧雙修)라,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같이 아울러서 닦는 것입니다. 또 정혜균등(定慧均等)이라, 선정과 지혜가 균등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도리가 우리 공부인 한테는 굉장히 중요한 도리입니다.

정말로 우리가 생명을 걸고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런 정혜균등이라, 정혜쌍수라, 이런 도리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정(定)과 혜(慧)가, -정(定) 이것은 선정(禪定)을 말하기 때문에 일행삼매(一行三昧)에 해당하고, 또 혜(慧) 이것은 참다운 지혜(智慧), 즉 반야지혜(般若智慧)를 말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천지가 오직 하나의 도리이다. 그래서 일상삼매(一相三昧)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이런 것이 같이 가지런히 갖추어져야 우리 마음의 번뇌가 빨리 녹아집니다. 그건 왜 그러는 것인가?

왜 그런가 하면 우리 마음의 본심(本心)은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다 같이 아울러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은 본래적으로 정과 혜를 원래 갖추고 있습니다. 지혜만 있고서 선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지혜도 원만히 또는 선정도 원만히 갖추고 있기 때문에 지혜만 닦고 선정이 없으면 공부가 잘 계합이 안 됩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래 우리 마음자리, 불성자리가 지혜와 자비가 또 지혜와 선정이 온전히 갖추고 있어서 우리 공부하는 것도 거기에 걸맞게 균등히 나아가야 계합이 되는 것입니다.


-. 일상삼매 일행삼매(一相三昧 一行三昧) [5]


그러면 정작 진실로 공부할 때는 어떻게 해야 일상삼매와 일행삼매가 될 것인가? 이것이 또 문제가 되겠지요.

여러분들이 조금 지루하셔도 지금 비가 이렇게 많이 오므로 비가 개고 길가에 빗물이 좀 내려가야 가시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높은 소리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앞이 안보일 정도로 소나기가 퍼부어서 법당 앞마당이 물바다가 되었다.

 빗소리에 큰스님의 음성은 더욱 커지기만 하였습니다.)

아무튼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공부인 들한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 공부가 치우침이 없이 반반하게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반하게 못 나아가면 우리 몸도 그때는 괴롭습니다.

몸과 마음이 절대로 둘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이 반반하면 몸도 개운하여 좋고, 몸도 아주 유쾌합니다. 정과 혜가 쌍수가 되어서 정과 혜가 일상삼매와 일행삼매가 같이 가지런히 나아갈 때는 그때는 항시 몸도 마음도 가볍고 하늘에 뜬 기분입니다.

아! 내 몸이 지금 내 발이 지금 땅에 디뎌 있는 것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가볍단 말입니다.

정말로 한 치도 틀림없이 몸과 마음은 하나입니다.

우리 마음 따라서 몸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가 되어야 하겠지요.


화두(話頭)는 어디서 나왔는가?

화두는 가사 무(無)자 화두 같으면 그 가운데 우주가 몽땅 들어가야 합니다.

우주가 오직 무자 화두뿐이란 말입니다.

화두가 나올 때는 부처가 무엇인가?

부처가 둘이나 셋이나 있습니까?

오직 하나의 부처인데 바로 우주가 부처인데 다만 부처의 공덕이 무량공덕(無量功德)이기 때문에 무슨 부처 무슨 부처 하는 것이지 부처가 여러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부처의 자리는 무한공덕이기 때문에 동시에 무수한 몸을 나투고 계십니다.

앞서 제가 말한 나 아(我)자, 큰 덕(德)자, 나한테 갖추고 있는 덕, 나한테 갖추고 있는 아덕(我德)이나 부처의 만공덕(萬功德)이나 똑같습니다.

따라서 부처는 바로 오직 우주의 생명 전부를 말하는 것인데, 오직 하나의 생명인데, 그 자리는 바로 무한한 공덕이기 때문에 부처 같은 몸을 수 천 개 수 만개도 한 번에 나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두라는 것은 부처가 무엇인가?

또 달마스님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인가?

또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가?

이런데 따라서 화두가 나왔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부처란 것이 무엇인가?

본래면목이나 부처나 같은 뜻 아닙니까.

그래서 오직 그 화두, 오직 부처가 무엇인가의 해답으로 나온 것이 화두이기 때문에 바로 부처를 의미합니다. 무(無)자나 이뭣고나 다 그렇습니다. 모두가 다 부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화두 그 가운데 나까지도, 너까지도 우주가 몽땅 다 들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화두만 참구하는 것입니다.

화두만을 참구하면 화두가 더 높아지고, 또 더 귀한 것이 되겠습니까?

화두가 더 높을 것이 없단 말입니다. 모두가 높고 낮고, 범부고 성인이고 그 자리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염불(念佛)은 무엇인가?

염불은 생각 념(念)자, 부처 불(佛)자 문자 그대로 우리가 부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처가 무엇인가?

부처가 어디 밖에 따로 있는 것인가?

제가 누누이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우주의 생명이 바로 부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란 말 가운데는 모두가 다 들어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는 화두도 일체가 다 들어 있는 생명 자체이고, 부처도 모두가 다 들어 있는 생명 자체이고, 이렇게 생각할 때는 표현만 다른 것이지 결국은 둘이 아닙니다. 둘이 아닌데 사람들이 굳이 둘이라고 생각을 한단 말입니다.

둘이 아니기 때문에 운서주굉(雲捿狲宏 : 1536 - 1615) 스님이나 서산(西山 : 1520 - 1604) 스님이나 보조(普照 : 1158 - 1210) 스님이나 다 같다고 말씀했습니다.

다만 근기에 따라서 그때그때 우리가 참선을 하면 되는 것이고, 또는 화두도 했다가 염불도 했다가 해도 그때는 -이렇게 이해하고 확신을 할 때는- 무방합니다. 같다고 생각하면 그때는 무방합니다.

그러나 같지 않다고 생각하면 그때는 문제가 되겠지요.

그럼 부처는 무엇인가?

부처는 지금까지 누누이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로 생명의 본체, 바로 우주의 생명인데, 그러면 우주의 생명은 어떻게 생긴 것인가? 우리 중생이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라는 것은 본래적으로 자취가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름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중생이 볼 수가 없습니다. 다만 생명으로 해서 모든 생명의 본질이 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다만 그 자리는 그냥 생명이 아니라 모든 능력을 갖춘 하나의 광명(光明)입니다. 광명도 태양같이 그런 눈부신 광명이 아니라 물질이 아닌 생명의 광명입니다.

우리는 이 광명이라는 것을 깊이깊이 생각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지금 물질도 바로 광명인 것입니다. 전자(電子)나 양성자(陽性子)나 중성자(中性子)나 모두가 다 방사광선(放射光線)입니다.

또 지금 물질을 분석 하고 분석하고 해서 가장 작게 한 것이 이른바 광자(光子)라, 빛 광(光)자 광자란 말입니다.

물질을 분석하고 분석해서 더 분석할 수 없는 가장 미세한, 물질인가 아닌가도 모를 정도 말입니다.

이른바 공간성도 없는 그런 것이 광자(光子)인데, 왜 광자가 되었는가? 바로 그것이 빛이니까 광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물리학적으로 본다 하더라도 우주는 지금 광명(光明)이 꽉 차 있는 것입니다. 지금 물리학자는 아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보고 안보고 상관없이 가장 정밀한 물리학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 우주는 지금 내 몸 가운데나 흙 가운데나 똥 가운데나 금(金) 가운데나 모두가 다 그야말로 광명이 지금 꽉 차 있는 것입니다.

그 광자 이것은 진동(振動)도 없고, 또 이것은 공간성(空間性)이 없습니다.

질량도 영입니다. 질량이 영이고 진동이 없으니 물질인가 물질이 아닌가 알 수 없는 정도입니다.

화엄경(華嚴經)을 보나 법화경(法華經)을 보나 여러분들이 잘 봐 보십시오.

그 광명이란 말씀이 얼마나 많은가.

부처님의 입에서 나오는 광명이 삼천대선세계를 돌아서 우주를 다 비추고서

나중에는 그냥 부처님의 정수리로 쑥 들어간다,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광명이 1만 8천세계를 다 비춘다. 이것이 바로 우주를 다 비춘다는 뜻입니다. 우리 생명의 근본은 바로 우리 인간이 알 수 없는 부처님의 진여불성의 광명인 것입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있는 것이 아니라 만공덕(萬功德)을 갖춘 빛입니다.

그런 것이기 때문에 거기서 원자력(原子力)이 나오고 여러 가지 것이 다 나온단 말입니다.수소폭탄이 나오는 그런 것이라든지 또 그 무시무시한 힘들이 모두가 다 그 가운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닦고 닦아서 우리 스스로가 마음의 근본 자리인 부처가 된다고 생각할 때에 숙명통(宿命通)이라, 과거를 다 훤히 보고, 또 천안통(天眼通)이라, 미래를 다 훤히 보고, 타심통(他心通)이라, 남의 마음을 다 훤히 보고, 또 신여의통(身如意通)이라,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있고, 또 천이통(天耳通)이라, 우주의 음성을 다 알고 다 해석할 수가 있고, 또 누진통(漏盡通)이라, 모든 번뇌를 따 끊어 버리고 영생해탈(永生解脫)의 길로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신통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삼명육통(三明六通) 이것은 우리 자성공덕(自性功德)입니다.

아함경(阿含經)과 같은 근본 경전을 보십시오.

이런 구절이 수십 수백 군데 있습니다.


-. 일상삼매 일행삼매(一相三昧 一行三昧) [6]


우리 마음은 그와 같이 위대한 것입니다.

그냥 이치로 알고 말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닦아서 증명하면 우리 마음은 그렇게 위대한 것입니다.

그렇게 위대한 것이 우리 병(病) 하나, 암(癌)이나 무엇이나 그런 병 하나 고칠 수가 없겠습니까.

그런 암 균(癌菌)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암 균도 역시 파고 들어가 보면 끄트머리는 내내야 다 광명(光明)입니다.

암 균이나 폐 균이나 에이즈 균이나 모두가 다 끄트머리는 내내야 다 그야말로 광명입니다.

우주의 광명 기운이 이렇게 저렇게 악연 따라서 암 균이 되고 에이즈 균이 되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진여불성 자리, 우리 마음이 우주의 가장 기본적인 근본 성품 자리인 진여불성만을 생각할 때는 그 진여불성으로 그때그때 조건 따라서 된 암 균이나 에이즈 균이나 소멸이 안 되겠습니까.

그러기에 인도의 신지학(神智學)이라, 우리 정신 수양으로 해서 우리 몸의 병을 낫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그렇게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같이 좁은 마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위대한 마음 가지고서 남들이 나한테 배신을 했다, 남들이 내 험담을 했다, 또는 자기가 사업에 실패했다, 이런 것 가지고 울고불고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도 진여불성 차원에서 보면 우리한테는 손해가 없습니다.

자빠지나 넘어지나 진여불성은 그대로 여여 합니다.


그러기에 나옹(懶翁) 대사 게송을 보면 일조홀득정진낙(一朝忽得情塵落)하니 하루아침에 문득 우리 망정(妄情)이 끊어져 버리니, 도용횡염상불리(倒用橫拈常不離)라. 누어서 잡으나 옆으로 잡으나 부처님의 그런 광명이 조금도 떠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한 번 우리 망정만 끊어지면 자빠지나 넘어지나 부처님을 안 떠납니다.

우리한테는 조금도 손해가 없습니다. 금생에 이 몸을 버리든지 말든지 진여불성 자리, 진여불성이 무슨 죽고 살고 더하고 덜하고가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불생불멸(不生不滅)이요,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고 또는 주검도 없고 남도 없고 이러한 것이 우리 근본 생명입니다.

이 자리에다 마음을 두고 화두면 화두, 염불이면 염불, 주문이면 주문, 이렇게 공부를 한다고 생각할 때에는 화두하면 화두선(話頭禪), 염불하면 염불선(念佛禪), 주문하면 주문선(呪文禪)이 다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자기 종파(宗派)만 옳다, 자기 하는 식만 옳다, 이러할 때가 아닙니다. 오직 부처님 가르침인 진여불성으로 해서 우주가 하나의 진리로 지금 다 통합이 될 때란 말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시대적 추세입니다.

지금 정치적인 의미에서도 냉전 시대가 끝나고 하나가 되어 가는데 하물며 진리의 큰 집인 종교가 이렇게 저렇게 내 것이요 네 것이요 내 방법이요 네 방법이요 이래 가지고서 다툼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굉장히 생명의 낭비이고 소모전이고 어리석은 짓입니다.

진리가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린 이런 것을 염두에 두시고서 바이블을 보십시오.

요한복음서에 나는 생명이오, 나는 길이요, 나는 빛이다, 기독교가 그래도 진리를 어느 만큼은 말했으니까 천구백년동안 지속을 하고 18억 인구가 믿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진리가 아니면 그렇게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부처님 가르침은 완벽하므로 완벽하게 유도를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지 그냥 덮어놓고 자기 것이 아니라고 배제하면 그것은 벌써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은 진리는 하나입니다. 지금은 우리 마음을 열고서 공부할 때입니다.

참선 공부는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내 공부, 네 공부, 내 종파, 네 종파, 내 문중, 네 문중, 지금은 그런 때가 아닙니다. 마음을 열어서 오직 하나의 진리, 조금도 흠축(欠縮)이 없고 흠절이 없는 그런 진여불성 자리, 우주의 참다운 생명자리, 거기에다 죽으나 사나 우리 마음을 딱 붙여야 합니다. 이것 보고 이른바 일상삼매(一相三昧)라 하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서 우리가 지속을 시키는 것을 일행삼매(一行三昧)라 합니다.

그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는 염염상속(念念相續)으로 우리는 한 걸음 한걸음 부처가 되어 갑니다. 그런 것을 조사 어록에 보면 진여삼매(眞如三昧)라 하며 그렇게 해서 우리가 공부를 한다고 생각할 때는 공부함에 따라서 무량의 부처님과 무량 제불(諸佛)을 다 볼 수가 있고, 무량의 공덕을 다 성취 한다 이랬단 말입니다.

주문을 공부하나, 또는 기독교적인 공부 방식이 좋아서 그 쪽에다 인연을 갖은 사람들은 오! 주여, 하느님! 해도 무방한 것입니다.

부르는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 마음 내용이 진여불성에다 우리 마음을 딱 머물게 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것도 역시 충분한 조금도 빗나가지 않는 일상삼매입니다.

구태여 다른 종교의 하는 방법이나 그런 표현 방법을 우리가 바꿀 필요가 없이 다만 내용만 부처님 법으로 보완만 시키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설사 기독교를 믿는 딸이나 아들이 있다 하더라도 덮어놓고 너 나가지 말라, 너 교회 나가지 말라 할 것이 아니라,

그네들 하느님을 부처님의 법신불(法身佛) 쪽으로 참다운 부처님 쪽으로 보다 더 넓게, 깊게 이해를 시키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아가야 이제 거부반응을 느끼지 않고서 하나의 화목스러운 가정이 되겠지요.

아무튼 제 말씀이 너무 장황하여 졌습니다.

다만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먼저 인식론적으로 바로 인식하고, 바른 정견(正見) 밑에서 닦아야 그래야 참다운 참선(參禪)이 됩니다.

제 말씀이 잘 납득이 안 되면 이른바 8정도 법문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정견(正見)이라 먼저 바른 견해와, 정사유(正思惟)라, 바른 견해를 가지고서 생각 생각을 더하고, 정어(正語)라, 진리에 입각해서 바른 정견으로 말도 하고, 또는 정업(正業)이라, 바른 정견으로 우리 업을 몸으로 행동하고, 정명(正命)이라, 바른 견해로 해서 생활도 하고, 또는 정념(正念)이라, 바른 견해로 사무쳐 생각하고, 그렇게 하다가 정정(正定)이라, 참다운 삼매에 들어간단 말입니다.

참다운 삼매에 들어가면 그때는 정말로 견성(見性)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그렇게도 우리가 감격할 정도로 체계적입니다.

따라서 꼭 정견, 바른 견해로 해서, 바른 견해는 일상삼매(一相三昧)라 모두가 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오직 하나의 진리라.

이 자리를 견지(堅持)하셔서 어느 때나 행주좌와(行住坐臥), 걸음걸음, 가나 머무나, 앉으나 누워서나, 꼭 가부좌를 안 틀어도 무방합니다.

누워서나 앉아서나 남하고 말할 때나 이 사람 말이자 저 사람 말이나 모두가 다 본래 진여불성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수행자(修行者)입니다.

헌데 공부를 10년 20년 하여 놓고서, 미운 사람은 미운대로 좋은 사람은 좋은 대로 이렇게 생각을 한다고 할 때는 참 한심스럽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한심스러운 불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설사 우리가 온전히 증명을 못했다 하더라도 부처님 말씀은 오로지 다 사실인 것이니까.

어떤 경우도 자기를 책망하고, 하나로 못 보는 것은 자기 잘못이니까 자기를 책망하고서 공부해 나아가시면 공부에 손해가 없이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신심탈락(身心脫落)이라, 자기 몸도 마음도 찌꺼기가 다 떨어져서 정말로 부담 없이, 실패 하거나 누구한테 배신을 당하거나 자기가 외롭거나 그런 것에 상관없이 항시 행복스러운 가벼운 마음으로 공부하시고, 금생(今生)을 안락스러운 극락세계(極樂世界)로 이끄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제 말씀을 마칩니다. 부지런히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나무석가모니불(南無釋迦牟尼佛)!


나무마하반야바라밀(南無摩訶般若波羅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