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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마음의 고향

제 9 집 1.광명금강보계

마음의 고향 제 9 집


* 불기2537년(서기1993년)5월23일 광주금륜회에서 태안사 조실 석청화 큰스님을 증명 화상으로 모시고 보살계(菩薩戒) 수계식(受戒式)를 성대히 거행하였다. 이글은 큰스님께서 설하신 광명금강보계(光明金剛寶戒)법어입니다.


-. 광명금강보계 [1]

우리가 신앙하는 부처님은 가장 지혜로우시고, 가장 복이 많으시고, 가장 정당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가르침은 중생들이 복도 제일 많이 받고, 또 제일 슬기롭고 정당하게 살아가는 그런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나 위없는 행복을 바라지만 지혜나 정당성이 없으면 참다운 행복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항시 법회의 허두에서 삼보에 귀의한다는 의식을 합니다.

삼보 역시 방편적인 가르침으로 해서는 우리 참다운 궁극적인 지혜는 못됩니다.

방편을 떠난 참다운 지혜로운 그런 경계에서 보는 삼보는 어떠한 것인가?

삼보는 대체로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부처님이라 하는 불보(佛寶)와,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보(法寶)와,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서 행동하는 불자(佛子)가 삼보가 아니겠습니까.

세상에서 보배, 보배 하지만 다른 보배는 허망 무상한 것입니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실천 행동하는 우리 불자님들, 이와 같은 세 가지 보다 더 귀중한 보배는 이 세상에서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냥 소승적(小乘的)인 차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인 불조,

석가모니 부처님 가르침인 법보, 그 법보에 따라서 실천 행동하는 불자님들을 승보, 이와 같은 말씀이 됩니다.

그러나 대승적(大乘的)인 가르침은 소승적인 그런 가르침을 다 포함하면서

보다 더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우주 자체의 참다운 생명이 바로 부처 불(佛)자 보배 보(寶)자 불보입니다.

그리고 법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바로 우주의 법칙입니다. 우주의 법칙이 바로 법보입니다. 그러면 승보라는 것은 무엇일까? 승보 이것은 앞서 말씀과 같이 좁은 의미에서는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는 분만이 승보입니다만 궁극적인, 본질적인 의미의 승보는 바로 우주의 현상계 모두가 다 승보입니다. 왜 그럴 것인가? 조금 생각해 보십시다.

가사 별이나 달이나 해나 또 우리 인간이나 다른 동물이나 식물이나

또는 공간에 있는 공기라든지 이러한 것들도 우주의 법칙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지 우주의 법칙을 떠나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느 것도 우주에 있는 것은 두두물물(頭頭物物), 산하대지(山河大地), 산천초목(山川草木)모두가 다 우주의 법칙 따라서 움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앞서 말씀과 같이 천지우주의 어느 것도 모두가 다 본질적으로 볼 때는 사실은 승보에 다 해당합니다.

제가 이와 같이 철학적인 말씀을 왜 드리는가 하면은 부처님 법을 본질적으로 대승적으로 알지 않고서는 부처라는 뜻을 제대로 다 알 수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현대적인 인간의 고뇌를 다 제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병이 굉장히 무거운 병이기 때문에, 우리 심장에까지 침투해 있는 병이기 때문에 그런 소승적인 가르침으로는, 또 다른 종교의 가르침 그런 걸로 해서는 현대적인 인류의 무서운 병폐를 다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우주의 법칙 그대로 가장 궁극적인 동시에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진리에 따르는 그러한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현대인들의 고뇌를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은 좀 어렵더라도 사실은 각자가 다 꼭 불교 철학자가 되셔야 합니다.

잡다한 팔만장경의 불교경전을 다 읽으실 필요는 없습니다만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알아두셔야 현대를 살아가는데 오류를 범하지 않고 시행착오를 하지 않고서 바르게 우주의 법칙에 따라서 살 수가 있습니다.

우주 자체가 바로 부처님인 불보이고, 또 우주의 법칙이 바로 법보, 참다운 진리인 것이고, 또 우주의 모든 것은 진리에 따라서 운행되기 때문에 일체 존재 모두가 다 승보입니다.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우리가 실천 행동하는 계율이라든지 여러 가지 수행 방법은 마땅히 팔만사천의 법문 가운데에 다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에서도 특히 우주의 법칙 그대로 따르는 행위 이것이 바로 보살계(菩薩戒)입니다.

그냥 소승적인 그런 계율은 그대는 살생하지 말라. 훔치지 말라.

또는 삿된 음란한 짓을 말라. 이렇게 우리한테 금지하는 그러한 것으로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대승적인 가르침은 그렇지 않고서 표현은 엇비슷하더라도

근본 뜻은 보살계를 바로 불성계(佛性戒)라!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에서 오는 바로 거기에 따르는 계(戒)라는 말입니다.

불성은 바로 우주의 생명입니다.

따라서 보살계는 바로 불성계 우주의 도리를 그대로 따르는 계율입니다.

다시 바꿔서 말씀 드리면 광명금강보계(光明金剛寶戒)라!

나나 일체 존재의 근본 생명인 진여불성 자리 이것은 그냥 그렁저렁한 자리가 아니라 바로 생명의 빛입니다. 하나의 광명인 것입니다.

따라서 광명의 금강이라.

금강은 파괴할 수 없는 가장 견고 부동한 것이 금강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보살계라 하는 것은 어느 것도 다 그 속에 포함되어 있고,

동시에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어느 때나 파괴할 수 없는 영생불멸한 보계라,

보배로운 법칙 이것이 이제 이른바 금강계입니다. 보살계, 불성계입니다.

오늘 여러분들께서는 보살계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가르침은 그냥 금지적인 가르침만이 아니라,

반드시 부처님 가르침은 지혜가 앞서야 하는 것입니다.

지목행족(智目行足)이라!

어두운 길을 걸을 때에 등불이 밝아야 길을 잘 갈 수가 있듯이

우리가 지혜의 등불로 바르게 비추고 가야만이 행동도 바르게 하고,

우리 생활도 바르게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나 윤리 같은 것은 지혜는 잘 모른다 하더라도

바른 행동만 하면 된다. 이런 식이지만 부처님 가르침은 그렇지가 않는 것이고, 특히 앞서 말씀과 같이 보살계는 꼭 인생과 우주의 근본 도리에서 비추어 보고 불성에 따르는 행동이 되어야 비로소 참다운 보살계가 되는 것이고, 참다운 윤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남한테 베풀어라. 남을 용서해라. 또는 화해를 해라. 등 여러 가지 사회적인 덕목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누구나 베풀고 싶기도 하고, 베풀면 기분도 좋고, 남한테 칭찬도 받고 하겠지요. 또 화해를 하면 그만큼 자기 마음도 편하고 좋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것들이 옳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제대로 바르게 행동으로 옮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남한테 베푼다는 그것이 신념화가 미처 안 돼 있습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철학적인 뒷받침이 안 돼 있다는 것입니다.

참다운 윤리 도덕이라 하는 것은 하나의 당위(當爲)가 되어서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런 당위성(當爲性)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본질적인 깊은 철학이 없으면 그런 당위적인 꼭 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

보통은 이렇게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소승계는 그냥 무엇 무엇을 해라 하는 정도로 나오고, 또 기독교의 십계명이나 유교의 삼강오륜도 모두가 무엇은 하고 무엇은 하지 말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대승보살계(大乘菩薩戒) 이것은 우리가 갖추고 있는 진여불성자리, 우주의 생명자리, 우주의 생명은 바로 우주의 법칙인데, 우주의 법칙을 우리 인간 사회에 그대로 적용하는 이것이 보살계입니다.

 그렇다면 우주의 법칙은 어떠한 것인가?

우주의 법칙을 저는 법회 때마다 말씀을 드립니다만 그것은 '둘이 아닌 자리'입니다.

우주는 하나의 원융무애(圓融無碍)한 원만한 생명 자리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이 우주의 법칙에 대해서 우선 간략하나마 개념 정립을 안 하시면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보살계를 받으신 보람이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보살계는 지혜와 더불어서, 본질적인 반야지혜와 더불어서 있는 윤리 도덕입니다. 부처님의 참다운 지혜와 더불어서 있는 윤리 도덕이 보살계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지혜가 무엇인가? 이것을 먼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상대적인 것 밖에는 모르는 것이고 절대적인 경계를 미처 이해를 못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꼭 나나 너나 일체 존재라 하는 것은 모두가 다 본질적으로 하나의 생명입니다. '하나의 생명이다'하는 그 자리를 천 번 만 번 되 뇌여서 자기 신념(信念)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참다운 신앙심(信仰心)이 되고, 또 정견(正見)이라. 참다운 불교의 견해가 되는 것입니다.

바른 철학이 서지 않고서는 이렇게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자기를 온전히 지탱해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회에서 얼마나 많이 보고 있습니까.

매일 매일 우리가 신문지상과 같은 매스컴에서 나오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자기 철학이 없기 때문에 교육자나 또는 정치인이 그렇게 형편없이 죄를 범한단 말입니다. 이것은 다른 데가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른 철학이 없기 때문입니다.

칸트 철학을 알고, 니체나 헤겔 철학을 아는, 그런 철학적인 지식을 알고 모르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인 생명 자체의 도리를 훤히 아는 철학이 없기 때문입니다.


-. 광명금강보계(光明金剛寶戒) [2]

우리가 교육자를 두고 생각해 봅시다. 교육이라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인간성을 가르쳐야 하는 것인데 교육자 스스로가 바람직한 인간상이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바람직한 사람인가?

인간이라는 것은 대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인간의 삶의 뜻은 무엇인가? 이러한 것을 모르고서 바람직한 인간을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그렁저렁 살아갈 때가 절대로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근본 뿌리부터서 다시 반성하고 다시 자기비판을 하여서, 꼭 자기가 우주의 법칙인 우주의 궤도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인 참다운 지혜를 먼저 알고서 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면 말도 바르게 못하고, 행동도 바르게 못하고, 사고(思考)도 바른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바른 지혜 문제에 관해서는 우리 불자님들이 두고두고, 이것이나 저것이나 또는 나나 너나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이다. 미운 사람이나 고운 사람이나 더러운 것이나 또는 더럽지 아니한 것이나 또는 공기나 흙이나 자연이나 인간이나 또는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이다. 이 하나의 생명 자리를 신앙과 철학과 과학이 바탕이 되어서 당위적으로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억울하게도, 원통스럽게도 무지(無知), 무명(無明)에 가려서

잘못 살아서 '우리는 하나의 생명이다'라는 그걸 잘 못 느낍니다. 설사 잘 못 느끼더라도 이 세상에서 가장 거짓말을 아니 하시고 꼭 참 말씀만 하신 분이 부처님이기 때문에 부처님 말씀 따라서 하나의 생명 자리를 철저하게 믿으셔야 합니다.

공자나 예수나 마호메트나 소크라테스나 그분들의 가르침도 내내야 따지고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과 방향성은 똑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은 완벽한 성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부처님같이 철두철미하게, 어려운 말로 통념명변(通念明辯)이라, 명백히 진리 말씀을 다 못 했단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의 가르침도 생명이라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절대로 둘이 아니다 라고 하는 그러한 가르침들입니다.

제 아무리 자기를 핍박도 하고 자기한테 손해를 끼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생명과 마음도 내 생명과 마음과 하나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마음대로 훼손도 시키고, 마음대로 파괴도 하는 자연도 역시

근본 생명은 우리와 똑같이 하나의 생명입니다.

같은 것도 그냥 닮은 것이 아니라 불교 부처님 말씀대로 원융무애, 조금도 다름이 없는 하나의 생명입니다.

따라서 성인들은 그 하나의 자리, 생명이 나오기 이전의 자리, 현상적인 자연계나 우리 인간이 나오기 이전의 그 세계의 소식을 훤히 안단 말입니다. 근본 성품을 다 아시는 것입니다. 성인과 우리 중생과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하면은 우리 중생들은 현상적인 가짜 모습만 봅니다. 가상만 보고 있습니다. 성인들은 현상적인 것도 보지만은 현상을 이룩한 실상 근본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인이 미처 못되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는 모두가 다 지금 바로 보고 있지가 않습니다. 불교의 어려운 말로 해서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 우리 중생은 번뇌에 비추어서 봅니다. 번뇌에 가리어서 굴곡(屈曲)시켜서 지금 보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볼 때나 남편이 아내를 볼 때나 부모가 자식을 볼 때나 스승이 제자를 볼 때나 성자가, 아니 중생들인 한에는 모두가 다 왜곡(歪曲)시켜서 보는 것입니다.

바로 실상 그대로 못 보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자기 한계성을 먼저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한계를 느끼지 못하고 자기가 금생에 지은 업장에 가리운 관념으로, 업장에 가리운 자기 범부심으로 남을 질타도 하고, 책망도 하고, 미워도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어느 때나 자기비판, 자기 한계성을 분명히 느끼고서 그 자리로 부터 출발을 해야 합니다. 한계성을 느끼고 한계성을 초월하는 데에 가서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 있습니다.

내가 범부이니까, 내가 잘 못 보니까, 그 범부의 껍데기를 벗어나서 성자가 되어야 하겠다는 그러한 마음이 생기는 것이지, 자기가 금생에 무던히 잘 살았으니까 내가 보는 것은 대체로 옳다. 이렇게 되면 곤란합니다. 우리 종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설사 본사 주지가 되고, 큰스님이 되고 했다 하더라도, 그래도 역시 부처님의 지혜를 자기 지혜로 해서 부처님의 그런 영롱한 지혜로 비추어서 판단하고 말을 하고 해야지 그렇지 않고서 자기 이욕심(利慾心)에 가려서 말을 할 때는 그것은 제아무리 승복을 입었다 하더라도 참다운 승려라고는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자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은 과거에는 그냥 그렁저렁 자기가 배운 대로 행동을 하면서 내가 불교를 믿는다, 그렇게 설사 했다 하더라도 보살계를 받은 뒤에는 그래서는 아니 됩니다. 부처님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하고 부처님의 마음은 바로 우주의 법칙에 따르는 마음이기 때문에 그런 자리에서 말도 행동도 생각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면 그것은 굉장히 어려운 것이 아니냐?

특정한 사람들만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것이지 저마다 할 수가 없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어렵게들 생각을 하십니다. 그러나 사실은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 길만이 우리 인간을 행복으로 이끌어 가는 길입니다. 그 길만이 우리를 해탈로 이끌어 가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지금 해탈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율이라 하는 광명금강보계(光明金剛寶戒)를 받는 것입니다.

계율을 우리말로 풀이하면 청량(淸凉)이라. 어둡고 때 묻어서 그 끈끈하고 그 지저분한 마음을 아주 맑고 깨끗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계율은 그와 같이 흐리멍덩한 우리 마음을 본래 불심 자리인 청정(淸淨)한 마음으로 환원시키는 것입니다. 또 번뇌에 구속된 마음을 번뇌를 가닥가닥 풀어서 해탈의 경계로 인도하는 그런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계율은 해탈이라, 청량이라 그렇게 우리말로 풀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그러한 구속을 다 풀어서 위없는 행복으로 인도하는 그런 계율을 받습니다.


-. 광명금강보계(光明金剛寶戒) [3]


참회(懺悔)와 연비(燃臂)


오늘 산승은 본사석가모니 부처님을 대신해서 보살계를 설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보살계는 우주의 도리에 따르는 길인데 지금 우리 중생들은 우주의 도리에 따라서 생활을 못했습니다. 말도 자기 나름대로 금생에 배운 대로 느낀 대로 함부로 했습니다. 우리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사고방식도 내내야 자기가 금생에 버릇대로 자기가 배운 대로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먼저 이러한 잘못된 것들을 먼저 참회(懺悔)해서 참다운 우주의 법칙 자체인 부처님 법을 받으셔야 합니다. 참회하는 의미에서 먼저 연비를 하십시다.

연비라는 것은 과거의 허물을 다 불살라 버리고서 새로운 출발, 우리 중생들은 새로운 출발을 그때그때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고, 내일도 하고, 꼭 그렇게 하여야 합니다.

먼저 연비로 해서 자기 팔을 지지는 참회 의식으로 해서 과거에 지었던 모든 허물을 다 불태워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목탁 소리와 참회 진언 속에서 금륜회관 법당 안팎의 모든 불자님들께

일일이 태안사 대덕스님들이 20여 분간에 걸쳐서 연비를 봉행하시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부처님 법에 따라서 참회하는 연비를 하셨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서 우리가 이렇게 계율을 받을 때는 굉장히 지키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난해한 생각을 하십니다만 사실은 제일 쉬운 것입니다.

우리가 나쁜 버릇을 너무나 많이 붙여 놓았기 때문에 버릇을 가닥가닥 푸는 것이지 절대로 우리 인간을 구속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구속을 푸는 것이 바로 계율입니다. 이런 점을 아셔서 계율에 대해서 절대로 어려운 생각을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앞서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기본적인 지혜를 갖추고 있으면, 말하면 말도 지혜에 걸 맞는 도리에 맞는 말을 할 것이고, 행동도 마찬가지로 그러합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철학이 없어 놓으면 사사건건 다 비틀어져 갑니다.

생명이 본래로 하나이고, 본래 하나인 그 자리는 만 공덕(萬功德)을 다 갖춘 자리입니다.

우리 행복이 다른 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명의 근본인 마음의 본 고향(故鄕)을 알고 그 생명의 본 고향과 하나가 되는 것이 가장 위없는 행복인 것입니다.

성자(聖者)의 길은 다 그렇습니다. 천지 우주와 더불어서 둘이 아닌 자리, 그 자리와 하나가 되어 버려야 생의 헤아림이나 인생의 방황이 끝납니다. 우리 인생은 정말로 하나의 허무한 나그네 길입니다. 어쩌다가 인연 따라서 금생에 태어나서 가지가지 고초를 겪다가 또 역시 사라지고 맙니다. 사라지면 우리 몸뚱이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생명 자체는 본래로 죽음이 없는 바로 지혜 자체이고, 행복 자체인 것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들이 잘못 살아서 그 몸뚱이 때문에 몸뚱이의 노예가 되어서 몸뚱이 때문에 죄를 범합니다. 우리가 무지하기 때문에 몸뚱이 이것이 꼭 내 것이다 그러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그와 같이 무명심, 무지를 여의는 것에 있습니다.

무지를 여의는 지혜가 아니고서는 불법은 성립이 아니 됩니다.

무지를 여읜 참다운 지혜에서 본다면 모든 존재가 생명 자체인, 행복 자체인, 지혜 자체인, 하나의 생명으로 다 통일됩니다. 그 자리가 참다운 법신 부처님이고, 참다운 진리입니다.

따라서 여느 성인들도 참다운 나는 바로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요,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는 그 자리에다 항시 마음을 두고 그 자리의 도리에 비추어서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거니 자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불이익을 줄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몸뚱이 이것은 성자가 볼 때는 이것 때문에 죄를 범하고 고생을 받는 것이므로 이 몸뚱이 보고 원적이라. 원수 원(怨)자, 도적 적(賊) 원적이라 합니다. 다른 사람 미워할 것이 절대로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기 몸뚱이 때문에 죄를 범하니까 자기 몸뚱이가 사실은 가장 미운 대상인 것입니다.

또 적실한 몸뚱이 풀이를 공취(空聚)라. 우리 몸뚱이 보고 공취라. 빌공(空)자, 모을취(聚)자 공취라 합니다. 텅 빈 것이 모여 있다 하는 것입니다. 공취라는 이 소식도 깊이 느끼시기 바랍니다. 왜 공취라 했는가? 우리 세포가 연기법 따라서, 인과율(因果律) 따라서

잠시간 이와 같이 상을 지금 나투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세포는 무엇인가?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를 차근차근 분석해 들어가면 결국은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텅텅 비어 버리는 것입니다.

저희 법회 때마다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마는 이것은 우리가 공이라는 소식을 알기가 어려워서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 몸뚱이 금 쪽 같이 귀한 우리 몸뚱이가 왜 공이란 말인가?

그러나 공이란 소식을 모르면 바르게 행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누구라도 범부 중생에게는 자기 몸뚱이가 제일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몸뚱이 이것이 바로 공취란 말입니다.

텅 빈 것이 그대로 인연 따라서 잠시간 세포를 구성해서 이와 같이 모여 있

단 말입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성자의 지혜에 의해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물질이라는 것은 본래로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정밀한 실험과학인 현대 물리학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물질의 가장 궁극적인 미세한 알갱이가 전자(電子)나 양자(陽子)나 중성자(中性子)가 아니겠습니까.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물질의 가장 미세한 가장 작은 알갱이가 전자나 양자나 중성자란 말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더욱 미세한 초소립자(超素粒子)로 파괴시키면 결국은 에너지 기운만 남고 텅텅 비어 버리는 것입니다. 원자핵을 구성한 양자나 그 주위를 뱅뱅 도는 전자하고 부딪히면 텅텅 비어 버리는 것입니다. 텅텅 비어 버리고 단지 에너지 힘만 남는 것입니다.

물질이라는 것은 그와 같이 본래로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간성(空間性)도, 시간성(時間性)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잠시간 이렇게 진동(振動)하고 저렇게 진동하고 운동하고 그렇게 결합되어서 이와 같이 가상(假相) 헛된 그런 상만 보인단 말입니다.

과학적으로 보아도 금 쪽 같이 아끼는 내 몸뚱이가 그런 것입니다.

항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제로를, 영(零)을 몇 번 곱하나 더하나 영은 영 아닙니까.

그와 똑 같이 그런 공이 우주의 정기인 순수 에너지 공이 이렇게 운동하고 저렇게 진동하고 그래서 전자 같은 마이너스 에너지를 내나 또는 양자 같은 플러스 에너지를 내나 그것도 내내야 우리 물리학자들이 이렇게 저렇게 양자요, 전자요 이와 같이 이름을 붙인 것이지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전자고, 양자고, 산소고, 수소고 텅텅 비어 있습니다.

텅텅 비어 있는 것들이 모여서 이러한 모양을 지었기 때문에 부처님의 그 밝은 지혜 근본 성품 자리에서 보는 지혜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빌 공(空)자, 모을 취(聚)자 공이 모여 있습니다. 공취(空聚)라! 공이 모여 있는 것을 우리 중생은 겉만 보기 때문에, 상만 보기 때문에 이 몸뚱이를 금 쪽 같이 아낍니다. 거기에서 죄악이 생깁니다.

인류의 싸움이 어디가 있습니까? 가정의 불화, 단체의 불목 또는 국가 민족적인 여러 가지 갈등, 당과 당의 그런 분열 등이 어디가 원인이 있겠습니까?

모두가 다 자기 몸뚱이 때문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몸뚱이 때문에 집착하는 그것보고 원수 원적이라 합니다.

미운 사람이나 고운 사람이나 모두가 다 하나이 부처님 생명 위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다 그립고, 다 자기 몸을 남한테 바쳐도 아깝지 않고, 그러는 것입니다.

진리에만, 부처님한테만 내 몸 바쳐도 무방하겠지? 사랑하는 이에게는 내 몸을 바쳐도 무방하겠지? 그런 정도가 아니라 사실은 형상적인 의미에서 제일 미운 사람한테도 알고 보면

자기 몸뚱이 바쳐도 아까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자기나 남이나 생명의 근본은 똑 같기 때문입니다.

그 한용운(韓龍雲 : 1879∼1944) 스님의 '님의 침묵'가운데도 있지 않습니까.

"님만 님이 아니라 그리는 것은 다 님이다"라고.

그런데 그리는 것만이 님이 아니라 바로 보면 다 님이란 말입니다.

모두가 다. 어느 것이나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부처님이 아님이 없는 그런 자리에서는 우리가 가르고 그와 같이 구분해서 더 좋게 생각하고 더 나쁘게 생각하고 그럴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부처님의 지혜로 꼭 비추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남이 미울 때에 사회적인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서 반박하고 갈등하고 그럴 때에도 서로 죽이네, 살리네 할 때에도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그런 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분이 부처님 아닙니까. 부처님 지혜로 비추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그냥 술술 다 풀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근본적인 도리만 아신다고 할 때는 사실은 죽이지 말라, 훔치지 말라 할 필요도 없습니다. 벌써 근본적인 도리에 비추어 보면 나와 남이 둘이 아니거니 살생을 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훔치고 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보살계 의식(儀式)이니까. 부처님의 가르침 따라서 의식대로 다 하겠습니다.


-. 광명금강보계(光明金剛寶戒) [4]


십중계(十重戒)


<요령(搖鈴)>

제일(第一)은 살계(殺戒)라! 죽이지 말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희 불자들이여, 스스로 죽이거나, 남을 시켜서 죽이거나, 방편을 써서 죽이거나,

찬탄(讚嘆)하여 죽게 하거나, 죽이는 것을 보고 기뻐하거나, 주문으로 죽이는 이 모든 짓을 하지 말지니라. 죽이는 인(因)이나, 죽이는 연(緣)이나, 죽이는 법(法)이나, 죽이는 업(業)을 지어서 일체 생명이 있는 것을 짐직 죽이지 말아야 하느니라.

보살(菩薩)은 응당 상주하는 자비심(慈悲心)과 효순심(孝順心)을 일으켜

우주의 도리에 효순(孝順)해야 합니다. 우주의 도리에 따르는 효순심을 내여 방편으로 일체 중생을 구원해야 할 것임을 도리어 방자한 마음과 쾌(快)한 뜻으로 살생을 하는 자는 보살의 가장 무거운 죄이니라.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생명이 본래로 하나이거든 자기 생명, 남의 생명이 본래로 한계도 없는 것인데 우리 중생들이 자기 생명을 한계를 지어서 봅니다. 하나의 생명이 진여불성인 우주에는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바다에 바다물이 충만해 있듯이 우주에는 공간이나 어디에든 부처님의 진여불성이라 하는 우주의 정기가 충만해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자리에서 연기법 따라서 나 같은 상이 나고, 너 같은 상이 나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생명을 해치면 그때는 바로 자기 생명이 그만큼 거기에 상응된 훼손을 받는 것입니다. 물이나 흙이나 또는 자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의 생명에서 인연 따라 나온 자연이거니, 자연을 해치면 자기도 그와 동시에 그만큼 자기 생명도 훼손을 받습니다.

따라서 참말로 바른 불교, 철학, 부처님 가르침이 우리 마음에 있다고 생각할 때는 자연도 파괴도 못하고, 훼손도 못하고, 어느 것도 함부로 못하는 것입니다. 물도 함부로 오염 시킬 수가 없습니다.

금생에 명이 짧거나 병치레를 많이 하는 분들은 꼭 전생에 낚시질을 많이 했다든가 다른 생명을 해친 분들이 그렇습니다. 이 가운데서 낚시질을 여태까지 하셨던 분도 절대로 마시기 바랍니다. 낚시질 많이 하다 종당에 가서 말로가 좋지 않은 분들을 제가 여러 번 보았습니다.

인과라는 것은 조금도 차착(差着)이 없습니다. 꼭 그대로 받습니다.

생명이 본래 하나이거니 비록 미물이라 하더라도 자기 생명과 본래 둘이 아니거니, 다른 생명을 해치면 꼭 거기에 상응된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금생에 병치레를 많이 하는 분들도 이것도 다른 사람들을 절대로 원망해서는 아니 됩니다.

과거 전생에 꼭 자기가 다른 생명을 함부로 했던 것입니다.

인과라는 것은 꼭 그러는 것입니다. 가사 우리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그 자리에 쓰러진다 하더라도 그냥 우연은 절대로 없습니다.

꼭 자기 생명을 함부로 했기에 어느 고비에선가 그대로 받습니다.

저는 전번 몇 개월 전에 느꼈습니다만 어느 분이 어느 분을 무단히 때렸단 말입니다. 때려서 맞은 그분이 유혈이 낭자했습니다. 그런데 단 한 달도 미처 못 가서 때린 그분이 그에 상응된 상처를 입고서 유혈이 낭자하여 쓰러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중생의 눈에는 안보이지만은 천지 우주라는 것은 눈에 안 보이는 가운데도 나쁜 마음먹으면 나쁜 마음먹은 만큼 그때는 우리 잠재의식에 흔적을 둡니다.

우주에다 흔적을 두는 것입니다.

금생에 다른 생명을 함부로 하신 분들은 과거 전생에 지은 선근(善根)으로 해서 설사 금생에는 그렁저렁 넘기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죽은 뒤에는 틀림없이 그에 상응된 벌을 받는 것입니다.


<요령(搖鈴)>

제이(第二) 도계(盜戒)라! 훔치지 말라.

너희 불자들이여, 스스로 훔치거나, 남을 시켜서 훔치거나, 방편을 써서 훔치거나,

주문으로 훔치지 말지니, 훔치는 인과, 훔치는 연과, 훔치는 법과, 훔치는 업을 짓지 말지니라. 그리고 귀신의 것이거나 주인 있는 것이거나 도둑이 훔친 것이거나

일체의 재물을 바늘 하나 풀 한 포기라도 짐짓 훔치지 말지어라.

보살은 마땅히 진여불성(眞如佛性)에 효순(孝順)하는 마음과 자비심(慈悲心)을 내어 항상 모든 사람을 도와 복이 되고 즐거움이 되게 해야 할 것이거늘

도리어 남의 재물을 훔치는 것은 보살의 무거운 죄이니라.

정당한 수입이 아닌 것은 갖지 말라.

자기 몸도, 부처님의 지, 우주의 법칙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내 것이 아니거든 내 집이나 내 공장이나 내 돈이나 이러한 것들은

부처님 진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내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어렵더라도 보살계를 받으신 분들은 꼭 근본적으로 문제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자기 몸도 자기 것이 아닌데 그렇게 애쓰고 번, 땀 흘려서 번 자기 집도 원칙은 내 것 이라고 고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몸이 인연이 다해서 사라질 때에 집도 가지고 못가고 아무 것도 가지고 못가지 않습니까. 또 우리 목숨은 어느 때 죽음이 올지 모르는 것입니다. 순식간에 오지 않습니까. 인간의 목숨은 호흡지간이라.

한번 내쉬는 숨을 들어 마시지 못하면 죽음입니다. 들어 마신 숨을 내쉬지 못하면 죽음입니다. 자기한테는 그것이 안 온다. 그럴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어떻게 살았던가, 석가모니가 어떻게 살았던가, 각 성자들이 어떻게 살았던가,

참다운 수행자들이 어떻게 살았던가 말입니다.

저 신라(新羅)의 왕자로 태어나서 중국 가셔서 고생하신 무상대사(無相大師)는 어떻게 살았던가. 무상스님은 중국 촉(蜀)나라 산중에서 황토(黃土)흙으로 연명하시면서 공부를 하셨습니다. 성자(聖者)의 길이란 것이 그렇게 준엄한 길입니다.

성자라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 자기 편의를 위해서 아무것도 없어야 성인입니다.

그 분들은 자기를 자기로 안 보았습니다.

우리 재가 불자님들은 가정이 계시니까 이제 안정된 가정을 꾸려 가셔야 되겠지요.

마땅히 의식주(衣食住)를 무시를 못합니다.

그러나 의식주는 꼭 분수에 맞게 자기 정당한 대가로 해서 의식주를 만들어야 하지, 그렇지 않고 부당한 방법으로 얻었다고 생각할 때는

그러면 벌써 우주의 진리(眞理)를 범하는 것이요, 우주에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하루에 세끼를 먹고 자기 이웃 사람은 한 끼를 먹는다면

그대로 보아 넘긴다고 생각할 때는 그것도 우주의 도리에 배반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믿는 분들은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확실히 믿어야 참다운 정토(淨土)가 오는 것이지 말로만 정토가 오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절도 많고, 교회도 많고 거기에 따르는 신도도 많습니다. 그런데 왜 사회는 갈수록 어두운 사회가 될 것인가?

이것은 성자들의 가르침을 잘못 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예수가 자기 집이 있었습니까. 석가모니가 자기 집이 있었습니까.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께서는 나무 밑에서 성도(成道)하시고, 나무 밑에서 우주의 진리를 깨달으시고, 또한 나무 밑에서 열반(涅槃)에 드셨습니다. 부처님의 소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저까지도 다 포함해서 우리 불자들은 보다 자기비판을 준엄하니 해야 합니다.

설사 당장에 내일 죽는다 하더라도 이 몸뚱이의 노예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죽어도 손해가 조금도 없는 것입니다. 죽어도 죽지 않는 것입니다.

생명 자체는 영생(永生)하는 것이기 때문에 허망한 몸뚱이만 바꾸는 것이지

우리 생명은 죽자마자 몸뚱이 끝나자마자 일초의 시차도 없이 다시 새로운 몸을 받습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과거, 현재, 미래를 비추어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눈에는 아니 보이겠지요. 그러나 성자는 과거, 현재, 미래를 분명히 다 내다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성자의 지혜를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안 보인다 하더라도 믿는 것이 우리 신앙(信仰)입니다.

믿는다고 생각할 때에 현재의 자기 고통은 틀림없이 과거 전생에 지은 것입니다.

영남과 호남과의 갈등도 과거 신라, 백제 때의 싸움에 원인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세상의 온당하지 못한 것들은 어느 누구만의 허물이 아닙니다.

우리가 똑 같이 모두가 다 지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공업(共業)으로 해서 지었던 것입니다.

성자만이 책임이 없는 것이지 성자가 아닌 한 우리 중생들은

자기 몸을 자기라고 생각하고 그에 따라서 욕심을 내고, 그러한 우리 중생들만이 산다고 생각할 때에는 우리 중생들은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해서 다 공동의 책임이 있습니다. 직접, 간접의 차이는 있겠지요.

우리는 톨스토이, 소크라테스 또는 공자나 예수나 석가나 이러한 분들이 어떻게 살았던가?

이런 분들이 남의 죄를 다스릴 때 어떻게 다스렸던가? 이러한 것들을 꼭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분들이 우리의 스승입니다.

기분이나 감성적으로 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또 감성적으로 행동하는 그런 사람들의 말에 우리가 휩쓸릴 필요도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성자의 가르침만이 참다운 해결이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깊이 생각을 해보십시오.

우리 중생들 마음으로 또는 정치인들 마음으로 또는 젊은이들 마음으로

그런 식으로 했다가는 올바른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어떻게 했던가? 석가가 어떻게 했던가?

가장 지혜롭고 가장 바르게 사신 분들이 석가, 예수, 공자, 그분들 아닙니까.

그분들이 우리 스승입니다.

우리는 허두에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각자가 철인(哲人)이 되셔야 합니다.

철인이 돼야 참다운 어버이가 되고, 참다운 스승이 되고, 참다운 사회인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몸도 자기 것이 아니거니 정당한 대가가 아닌 것을 자기 것으로 하는 데서 오늘날 얼마나 사회가 혼란스럽습니까. 장군이 무엇을 하는 것이며, 정치가가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마땅히 장군이나 누구나가 다 꼭 기본적인 철학이 앞서야 합니다. 오늘날은 꼭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과거 소박한 때는 모르지만 현대같이 각 정보가 착종(錯綜)하고 혼란스러운 때는

부처님 가르침으로 해서 우리가 바르게 비추어 봐야지 그렇지 않고서는 장군도, 정치가도, 스승도, 어버이도 바르게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정당한 수입으로 갖지 않으면 복덕의 종자는 없습니다.

복덕의 종자를 없애는 부당한 수입을 가지면 금생에 다 내 보입니다.

인과정면(因果正面)이라. 바로 눈앞에 다 내보이는 것입니다.

행복으로 가는 길은 절대로 어려운 길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주의 도리에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성자를 우리 스승으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 광명금강보계(光明金剛寶戒) [5]


십중계(十重戒)


<요령(搖鈴)>

제삼(第三) 음계(淫戒)라! 삿된 음란한 행위를 하지 말라.

너희 불자가 스스로 음행 하거나, 사람을 가르쳐서 음행 하거나,

그리고 일체 연인과 짐짓 음행하지 말지어다.

음행의 인과, 음행의 연과, 음행의 법과, 음행의 업을 짓지 말지니라.

보살은 마땅히 효순심을 내어 일체 중생을 구원하고 제도하여

청정한 법을 일러 주어야 할 것이거늘 도리어 모든 사람들에게 음욕심을 일으켜 음란한 행위를 하는 자는 보살의 무거운 죄이니라.

자기 몸뚱이도 그와 같이 허망한 것이거늘 금생에 인연 따라서 내외간 만났으면 되는 것이지 내외간 만나서 같이 동지간이 되어서 더불어서 성불의 길로 가면 되는 것입니다.

자기 내외간이나 자기 자식이나 부모나 형제간이나 친척이나 친구나 모두에게 다 우리가 그 분들한테 가장 좋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가장 훌륭한 선물이 무엇인가?

부처님 가르침을 보다 더 명확히 알아서 더불어서 영생으로 가는 동반자가 되는 것입니다.

진심(瞋心)을 내는 순간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는 조화를 잃어버립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가 조화스럽게 되어야 병도 안 걸리고 혈액 순환도 좋을 것인데 성내는 순간 우리 세포가 조화를 상실해 버립니다.

따라서 암이라든지 에이즈나 그런 병도 모두가 다 정다웁게 살면 그렇게 안 되는 것입니다.

괜스레 우리가 필요 없이 성내고 자기 분수 넘게 욕심을 내곤 합니다.

저번 때 신문을 보니까 뉴욕에선가 동성연애 하는 그런 무리들이

30만 명이나 데모했다고 되어 있습디다. 그 선진국이라 하는 뉴욕에서 말입니다.

동성연애 하는 무리들이 시내를 다니면서 자기들의 결혼을 허락하라고

그러는 데모를 했단 말입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잘못 살면 짐승이나 똑 같습니다. 우리 본성은 부처이건만 우리 본래 생명은 틀림없이 부처이건만 잘못 살면 무명심에 가리우면 짐승과 똑 같습니다.

무슨 필요로 동성끼리 그와 같이 할 것입니까. 그러기에 무서운 에이즈 같은 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모두가 다 천벌입니다.


<요령(搖鈴)>

제사(第四) 망어계(妄語戒)라! 망령된 말을 하지 말라.

너희 불자들이여, 스스로 거짓말을 하건, 남을 시켜서 거짓말을 하거나,

방편으로 거짓말을 하지 말지니, 거짓말하는 인과, 거짓말하는 연이나,

거짓말하는 방법이나, 거짓말하는 업을 짓지 말지니라.

보지 못한 것을 보았다고 말하거나 본 것을 보지 못했다고 말하지 말 것이며,

몸과 마음으로 거짓말하지 말지니라.

보살은 항상 바른 말을 하고 바른 소견을 가져야 하며

또한 일체 중생들에게도 바른말과 바른 소견을 갖게 해야 할 것이거늘

도리어 다시 일체 중생들에게 삿된 말과 삿된 소견으로 삿된 업을 일으키게 한다면 이는 보살의 무거운 죄이니라.

거짓말이나 욕설이나 또는 이간하는 말이나 꾸며서 하는 말 등을 하지 말라.

이러한 짓을 하면 우리한테 있는 진실한 품성을 해치는 것입니다.

진실하고, 진실하고, 다시 진실해서 더할 수 없이 진실해야 하는 것인데,

불성이라 하는 우주의 성품은 조금도 오류도 없고 또는 위선도 없습니다.

그렇게 청정하고 진실한 자리인데 거짓말을 함부로 하면

우리 소중한 불성을 오염을 시키는 것입니다.

마땅히 자기 스스로 자기를 손해 보게 하는 그러한 짓을 마셔야 합니다.


<요령(搖鈴)>

제오(第五) 고주계(嘆酒戒)라! 술을 팔지 말라.

너희 불자들이여, 스스로 술을 팔거나 남을 시켜서 술을 팔거나,

술파는 인과 술파는 연과 술파는 법과 술파는 업을 짓지 말며

일체의 술을 팔지 말지니라. 술은 죄를 일이키는 인연이 되느니라.

보살은 마땅히 일체 중생들에게 밝고 통달한 지혜를 내게 할지언정

도리어 일체 중생들에게 전도된 거꾸로 된 마음을 내게 하는 자는

보살의 무거운 죄이니라.

우리 중생은 지금 전도몽상(顚倒夢想)에 걸려 있습니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전도몽상이 개인 이기심이나 집단 이기심, 그런 마음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자가 미처 되지 못했을 때는 나는 지금 전도몽상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남을 함부로 나무랄 수가 없는 일 아닙니까.

욕심을 지독하게 낸다고 생각할 때에 욕심내는 순간에 자기 몸의 세포가 순간에 조화를 잃어버립니다. 자기 마음을 반반하게 우리 마음을 불심 쪽으로 돌이켜서 회향을 시킨다고 생각할 적에 부조화스러운 우리 몸도 그냥 조화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건강과 우리 마음은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과거 전생에 자기 마음먹은 대로 자기 머리카락 색깔 자기 머리카락 수(數)가 다 그대로 규정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현재 마음먹은 대로 설사 과거 전생에 마음을 잘못 먹어서

금생에 몸을 잘못 받았다 하더라도 지금부터서 마음을 잘 먹으면 자기 몸도 바꿔지는 것입니다. 세포가 바꿔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유(神癒)라. 귀신 신(神)자, 병 나을 유(癒)자, 신앙의 힘으로 병을 치유한다는 말입니다. 신유란 인도(印度)에서부터 유포되었고 과거부터 내려온 것입니다.

우리 정신 수양으로 우리 몸을 맑게 한다는 말입니다.

약을 안 쓰고 또 물리적인 치료를 안 하고 정신 수양으로 몸의 병을 낫게 하는 것이 신유입니다.

우리는 이 몸뚱이가 우리 주인이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주인인 것이고, 전생에 우리 마음을 어떻게 썼는가에 따라서 이 몸 받았고, 과거에 그랬으니 미래에도 똑같이 현재 어떻게 마음을 쓰는가에 따라서 몸도 바꿔지고 내생(來生)을 규정한단 말입니다.

우리는 참회(懺悔)할 때 정말로 눈물로 참회를 해야 합니다. 정말로 참회할 때는 자기 눈에서 피눈물이 튀어나온다고 합니다. 과거 전생에 이 원수 같은 몸뚱이 때문에 얼마나 많은 죄를 범했던고 금생에 나와서도 잘못 생각하고 잘못 행동하고 잘못 말하고 얼마나 많은 죄를 범했던고 하고 말입니다.

이것이 내 생명을 위해서 무슨 필요가 있었던가? 이것으로 해서 우리 사회를 얼마나 오염을 시켰던가 말입니다. 공해(公害) 가운데서 우리가 잘못 먹은 마음, 악심(惡心) 또는 거 거치러운 말들, 거치러운 표정들 이러한 것이 가장 큰 공해입니다.

명랑하고 밝은 얼굴을 대해 보십시오. 우리 마음이 얼마나 편안한가 말입니다.

찌푸린 사람을 대해 보십시오. 우리도 찌푸려 옵니다.


<요령(搖鈴)>

제육(第六) 설사중과계(設四衆過戒)라!

사부대중(四部大衆)의 허물을 말하지 말며, 남을 시켜서 허물을 말하게 하지도 말라.

그리고 교단 안의 허물을 말하는 사람이 있거든 자비심으로 그들을 교화하여 대승법(大乘法)을 믿게 할지언정 도리어 교단 안의 허물을 스스로 들추어서 말하는 것은 보살의 무거운 죄이니라.

인생의 행복은 가장 쉬운 것입니다.

가장 쉬운 것인데 억울하게도 우리 중생들이 우주의 법도(法道)에 따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정다운 우주의 법에 따르는, 생명이 본래 둘이 아닌지라.

다른 사람한테 거짓말이나 욕설이나 이간하는 말이나 꾸며서 하는 위선적인 말이나 이런 말을 할 아무런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한테나 본래적인 자기로 돌아가서 본래의 불심으로 돌아가서

빨리 성불합시다. 하는 더불어서 성불하는 방향으로 개인의 의식을 바꿔야지

의식을 바꾸지 않고는 정토(淨土)가 아니 되는 것입니다.

정토는 무엇이 정토입니까? 집단적으로 정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 각자가 바꾸어져야 정토가 됩니다.


-. 광명금강보계(光明金剛寶戒) [6]


십중계(十重戒)


<요령(搖鈴)>

제팔(第八) 간석가훼계(卞惜加毁戒)라!

인색(吝嗇)하지 말며, 헐뜯지 말지어라.

너희 불자들이여, 스스로 인색하거나 남을 인색하도록 가르치지 말 것이며,

인색의 인과 인색의 연과 인색의 법과 인색의 업을 짓지 말지어라.

보살은 일체 가난한 사람이 와서 구걸하거든 그가 구하는 온갖 것을 주어야 할 것이거늘

보살이 나쁜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으로 돈 한 푼, 바늘 하나, 풀 한 줄기도 보시해 주지 아니하며, 법을 구하는 이에게 한 구절의 법문과 한 마디의 게송과 작은 법 하나도 가르쳐 주지 아니하고 도리어 나쁜 말로 욕설을 하는 것은 보살의 무거운 죄이니라.

마땅히 보시를 해야 할 것이거늘 도리어 인색해 가지고서 본래로 진리에서 보면 인색할 것도 없는데 잘못 생각해서 우리가 인색합니다.

여러분들이 다 아시지 않습니까. 도안보시(挑眼布施)라. 자기 눈알도 달라고 하면 빼서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눈알 빼서 줄 수 있는 그 마음이 보살심입니다.

보살계(菩薩戒)를 받을 때는 원칙은 대승계십인(大乘戒十人 : 할육식응割肉食鷹, 살신아호殺身餓虎, 작두사천作頭謝天, 절골출수折骨出髓, 도신천등挑身千燈, 도안보시挑眼布施, 박피사경剝皮寫經, 자심결지刺心決志, 소신공불燒身供佛, 자혈쇄지刺血灑地)이라. 열 가지 다짐을 받고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너무나 쉽게 받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도안보시(挑眼布施)라.

그대 눈을 누가 달라고 할 때 눈을 빼서 줄 수가 있는가, 없는가.

이렇게 다짐을 받습니다.

호랑이가 새끼를 많이 낳아서 굶주려서 무얼 먹고 싶어 할 때에

그대 몸을 회한(悔恨)이 없이, 즉 아낌없이 줄 수가 있는가?

줄 수가 있다고 해야 보살계를 받습니다.

절골출수(折骨出髓)라.

그대의 뼈를 분질러서 골수를 내서 남한테 줄 수가 있는가?

예! 그래야 보살계를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인생을 너무나 각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마십시오. 정말로 진정으로 나와 남이 둘이 아닙니다.

남을 행복스럽게 해주어야 자기가 행복스럽습니다.

우리 사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슬롯머신인가? 빠징꼬인가? 그런 걸 보십시오. 그런 것을 무엇 하려고 허락을 할 것인가?

그런 것을 구태여 허락을 해 놓고서, 많이 배웠다는 분들이 모인 국회에서

다 허락을 해 놓고서, 허락해 놓으면 일반인은 중생인지라 그런 사행심(射倖心)이나, 그런 요행을 다 바라고서 도박을 하겠지요.

그러한 것들이 모두가 거꾸로 보는 전도몽상(顚倒夢想) 때문에 허락도 하고

허락했다고 해서 그것을 하고 말입니다.

무슨 장군이나 무슨 의원이나 본래로 나쁜 분들은 아니지 않습니까.

나쁜 분이 아닌데 그런 여건이 그렇게 만들었단 말입니다.

그런 여건에 부딪히면 다른 사람들도 그와 유사한 허물을 범합니다.

우리 중생은 환경과 조건이 못미처서 그런 것이지 돈을 공으로 벌수가 있고, 권력을 휘두르면 벌수가 있고, 그런 경우가 되면 중생들은 대부분 죄를 범합니다.

우리는 엄격히 자기를 비판하고 사회의 모든 문제를 정말로 부처님 법에 맞게 꼭 우리가 다스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일 이외는 우리 민족을 위한 참다운 길이 못됩니다.

지금 서구 공동체를 보십시오.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열두 나라가 하나로 통합해서 공동체를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이른바 EC공동체 말입니다.

다른 나라끼리도 그와 같이 공동체를 만들어서 하나의 경제 블록을 만듭니다.

그런데 아시아는 어떠합니까. 이 원통한 동북아시아, 중국이나 한국이나 일본이나 뿔뿔이지 않습니까. 한국은 또 남북이 무엇입니까? 남북은 그만두고도 우리 남한은 또 어떻습니까?

남한 속에서도 서로 헐뜯고 그럽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자는 것입니까.

우리 남한이 하나가 되서 똘똘 뭉쳐도 어려울 때가 아닙니까.

자유경쟁 시대에서 우리는 보다 더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부처님 도리에 따른다고 생각할 때는 그냥 순식간에 화합되고, 순식간에 우리는 번영한 나라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행복 된 길로 가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길이 아닙니다.

그 못된 마음만 풀어버리면 됩니다. 못된 마음은 본래 자기 마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악마의 마음입니다. 자기 마음은 불심(佛心)입니다.


<요령(搖鈴)>

제구(第九) 진심불수회계(嗔心不受悔戒)라!

진심을 품고서 남의 허물을 용서 못하는 그런 죄를 범하지 말라.

너희 불자들이여, 보살은 마땅히 일체 중생들에게 착하게 대하여 다투는 일이 없게 하며,

항상 자비심과 효순심을 내야 할 것이거늘 도리어 일체 중생에게나 중생 아닌 물질에 대해서도 나쁜 말로 욕설을 하고 폭행과 구타를 하고도 마음속의 성을 풀지 아니하고, 또 설혹 그런 사람이 진실한 말로 참회하고 사과하여도 성내는 마음을 풀지 않는 자는 보살의 무거운 죄이니라.


<요령(搖鈴)>

제십(第十) 방삼보계(謗三寶戒)라!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를 비방하지 말지라.

너희 불자들이여, 자신이 삼보를 비방하거나 남을 시켜 비방하게 하지 말지어다.

보살은 한 마디라도 부처님을 비방하는 말을 듣거든 마치 삼백 대의 창검으로 자기의 심장을 찌르는 것처럼 여겨야 할 것이거늘 하물며 자기 입으로 비방하리요.

신심과 효순심을 내지 아니하고 도리어 악인과 사견인을 도와서 비방하는 것은 보살의 무거운 죄이니라.

사견(邪見)은 삿 된 견해입니다.

삿 된 견해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것은 서구적인 나와 남이 둘이다,

자연과 내가 따로 있다. 이러한 생각이라던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우리가 괴롭힌다든지, 다른 사람의 이익을 돌보지 않는다던가, 이러한 것은 모두가 삿된 견해입니다.

삿 된 견해를 도와서 비방하는 자는 보살의 무거운 죄입니다.

잘 배우는 모든 불자들이여, 보살의 열 가지 계목을 응당히 배워서

그 가운데에 낱낱이 티끌만큼도 범하지 말지니라.

만약 범하는 자는 현신(現身)에 보리심을 발하지 못할 것이며,

또한 국왕의 자리나 전륜왕(轉輪王)의 지위를 잃은 것이며,

비구, 비구니의 지위를 잃을 것이며, 십발취(十發聚), 십장양(十長養), 십금강(十金剛), 십지(十地)와 여러 가지 불성이 상주하는 묘과(妙果)를 모두 다 잃어버리고 삼악도에 떨어져서

- 지옥, 아귀, 축생의 그런 나쁜 갈래에 떨어져서 - 2겁, 또는 3겁을 지내도록 부모와 삼보의 이름도 듣지 못하리라. 이러한 까닭에 한 가지라도 범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그대들 일체 보살이 지금 배우며 당래에 배울 것이며 이미 배웠으니,

이와 같은 열 가지 부처님의 청정계율을 응당히 배워서 공경하는 마음으로 받들어 가질지어다. 팔만위의품(八萬威儀品)에 말씀하시기를 부처님께서 모든 보살들에게 고하여 말씀하시되, 이미 열 가지 무거운 계율을 설하였으니, 이제 마흔 여덟 가지 가벼운 계를 설하리라.


-. 광명금강보계(光明金剛寶戒) [7]


48경계(四十八輕戒)


다음에는 마흔 여덟 가지의 가벼운 계율을 설하겠습니다만

일일이 읽는 것을 생략하고 그 가운데 중요한 대목만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돌아가셔서 꼭 마흔 여덟 가지 가벼운 계율을 공경스럽게 받들어서 외우시기 바랍니다.

사실은 부처님 당시나 불교가 빛날 때는 한 달에 두 번씩 대중들이 모여서 이 열 가지 무거운 계와 48가지 가벼운 계를 스스로 반성하고 다시 마음에 익혀서 마음으로 다짐하는

이른바 포살(布薩)의식을 다 하는 것입니다.

허나 지금은 불법이 쇠(衰)해서 않습니다만 원칙은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보름날과 그믐날 부처님의 보살계, 즉 광명금강보계(光明金剛寶戒)를 외웁니다.

생명의 광명인 동시에 또는 금강같이 가장 위대한 우주의 법칙을

꼭 우리가 따라야 한다는 그런 의미에서 보름마다 보름과 그믐에 한번 씩 포살의식을 밟아서 꼭 스스로 읽고 다짐해서 우리 마음을 부처님 마음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제일(第一) 불경사우계(不敬師友戒)

너희 불자들이여, 응당히 먼저 보살계를 받을 지니라.

모든 선신들이 보살계 받은 자를 구호할 것이며, 모든 부처님께서도 환희 하시니라.

이미 계를 받았거든, 효순심(孝順心)과 공경심(恭敬心)을 가지고 상좌(上座)와 화상(和尙)과 아사리(阿寐梨)와 대덕(大德)과 동학(同學), 동견(洞見), 동행자(同行者)를 보거든 마땅히 일어나 맞이하여 예배하고 문신(問訊)해야 할 것이거늘, 보살이 도리어 교만한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 귀찮은 마음으로 공경하지 않는 자는 경구죄(輕垢罪)를 범하느니라.

제이(第二) 음주계(飮酒戒)

너희 불자들이여, 짐짓 술을 마시지 말지니라.

술에서 생기는 과실이 한량없나니 자기 손으로 술잔을 들어 다른 이에게 권하여 마시게 하고서도 5백세 동안 손 없는 과보를 받았거늘, 하물며 스스로 마시리요.

온갖 술을 마시지 말지니, 만약 짐짓 마시거나 다른 이이게 마시게 하는 자는 경구죄(輕垢罪)를 범하느니라.

제삼(第三) 식육계(食肉戒)

너희 불자들이여, 짐짓 고기를 먹지 말지니라. 고기를 먹는 자는 대자비 불성종자(佛性種子)가 끊어져서 일체 중생들이 보고는 도망하여 가느니라. 고기를 먹으면 한량없는 죄가 되나니, 만일 짐짓 먹는 자는 경구죄(輕垢罪)를 범하느니라.

고기를 먹지 마십시오. 재가 불자님들은 대체로 자시고 계시겠지요.

그러나 될수록 고기를 자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고기 장사를 하시는 분한테는 참 안 되는 말씀입니다만 설사 좀 구차할지라도 다른 장사를 하십시오. 이 고기라는 것이 앞서 제일 허두에 불살생(不殺生)이라. 죽이지 말라고 했지 않습니까. 고기를 먹는 자체가 벌써 죽이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짐승을 죽이는 것은 남이 죽이고 먹기는 자기가 먹고 그런다고 생각할 때에

도리어 얼마나 그 행동이 이기적이고, 그야말로 참 죄스럽고 잔인한 마음입니까.

짐승을 죽이는 어려운 것은 남한테 시켜 놓고서 자기는 그 성과만 따먹는단 말입니다.

마땅히 고기를 먹지 마십시오. 살로 안가고, 피로 안갑니다.

앞서 말씀과 같이 우리 생명이라는 것은 생명 자체, 우리 불성 자체가

바로 이것이 영생의 생명입니다. 30년, 50년 한계가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말입니다.

영생불멸한 생명인 것입니다.

따라서 정말로 생명 자체에 철저할 때는 100일 동안 아무 것도 안 먹어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명 자체에 철저하지 못하니까 괜스레 지래 겁나서 배고프고 하는 것이지 정말로 내 생명은 내 마음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그렇게 그렇게 사무치면 몇 십일 동안 안 먹어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몇 십일 동안 단식을 해도 무방하지 않습니까.

김영삼(金泳三)씨도 24일 동안 단식을 했습니다.

그분 그렇게 정력적으로 활동해서 대통령까지 되는 것을 보십시오.

24일 동안도 아무 것도 안 먹었으니 고기도 안 먹는다고 해서

그것이 별로 큰일이 아닙니다.

고기를 먹으면 우리한테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고기를 먹어 놓으면 돼지나 소나 닭이나 이들이 우리보다 업장이 무거운 것입니다.

생명자체는 다 똑같은 것인데 업장이 더 무겁기 때문에 개가 되고, 소가 되고 했습니다.

그런 그 죽은 썩은 세포가 보다 더 업장이 가벼운 우리 세포한테 들어온단 말입니다.

고기를 먹는 다는 것은 업장이 무거운 세포가 내 몸뚱이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 세포가 좋겠습니까?

우리 눈에는 안보이겠지요. 그러나 우리 피는 그만큼 오염이 됩니다.

성자의 피는 육근(六根)청정(淸淨)이라. 청정합니다만 범부의 피는 인간 정도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다 더 오염된 개, 소, 돼지의 세포가 우리 몸에 들어온단 말입니다.

훨씬 더 가속도로 우리 몸이 오염되는 것입니다. 당뇨병, 심장병, 또 무슨 병, 그런 병들은 다 그러리요마는 대체로 그런 것들을 많이 먹어서 그렇다는 것이 제 말씀이 아니라

현대 의학도(醫學徒)들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고기를 잡수시다가 안 잡수시기가 어려우시겠지요. 그러나 그런 것 참 별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50년 가까이도 한 점 안 먹고도 이렇게 살아 있지 않습니까.

정말로 우리 불자님들 고기라는 것이 모두가 다 이것이 과거 전생에 지금 개요, 소요, 돼지요, 그런 것이 다 과거 전생에 어느 생엔가 우리 부모였던 것입니다. 무수 만생 동안을 지내 오면서 지금 눈앞에 있는 짐승들이 우리하고 같은 겨레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선 생리학적으로 먹어도 살로도, 피로도 안 가는 것이고

동시에 우리 생리가 오염되고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정신적으로 과거 전생에 우리가 같은 겨레의 고기를 먹는단 말입니다.

세밀한 것은 여러분들이 그때그때 불경도 보시고 잘 아실 것입니다. 될수록 먹지 마십시오. 돈도 많이 들고, 그 아무런 얻은 것이 없습니다. 애들한테도 고기 없이 정말로 깨끗이 해서 먹여 보십시오. 나중에 고기를 주어도 도리어 못 먹습니다.

미국 사람들이나 서구 사람들 옆에 가 보십시오. 노린내가 풍기지 않습니까. 자기는 미처 몰라도 귀신들은 다 냄새를 맡는 것입니다. 옛날 고기 가지고 밤길을 가다가 도깨비를 만나서 크게 봉변을 당했다는 얘기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이 절대로 미신이 아닙니다. 나쁜 귀신들은 그 고기 썩은 냄새를 다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신(善神)들은 싫어합니다. 그러기에 고기 먹는 죄로 해서 나찰습기(羅刹習氣)라, 나쁜 귀신들이 우리에게 덤벼들고, 천성원리(天聖遠離)라, 착한 신들은 우리 옆에서 멀리 간단 말입니다. 또 학술불성(學術不成)이라. 마음 닦는 공부는 하기가 어렵고,

또 사타악도(死墮惡道)라, 죽어지면 악도에 떨어지고 그런 것이 명백히 부처님 계율에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곧이곧대로 믿어야 합니다.


-. 광명금강보계(光明金剛寶戒) [8]


48경계(四十八輕戒)


제사(第四) 식오신계(食五辛戒)

너희 불자들이여, 마늘이나 부추나 파나 달래나 흥거(興渠),

이 오신채(五辛菜)를 일체 음식에 넣어 먹지 말지니,

만약 짐짓 먹는 자는 경구죄(輕垢罪)를 범하느니라.

오신채까지 먹지 말라. 여기까지 말씀드리면 모두가 이렇게 스님이 되라는 말인가? 이렇게 생각을 하실 정도로 마음으로 저항을 느끼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성불을 할 사람들입니다. 성불하는 길이 우리가 가는 길 가운데서 가장 최고로 위대한 길이고, 우리를 최상의 행복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하신 것은 모든 걸 음식이나 다 우리를 성불의 길로 인도하는 가장 확실한 말씀입니다. 우리 몸도, 마음도 가장 가벼운 것이고,

우리 몸도 마음도 가장 건강하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고기 먹지 않는 것이 우리 건강을 위해서 도리어 제일 좋은 것입니다.

또는 파나 마늘이나 그런 냄새만 나는 것을 안 먹는 것이 사실은 우리 몸에도 가장 좋은 것입니다. 다행히 파, 마늘을 냄새가 나지 않게 조리해서 먹을 수가 있으면 그건 무방하겠지요. 그러나 냄새가 나는 채로 먹으면, 오신채를 먹으면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쁜 신들은 그런 냄새를 좋아합니다. 나쁜 신들은 그 냄새 맡고 좋아서 우리 주변에 덤벼 올 것이고, 좋은 선신들은 우리한테서 다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이 오염이 안 되고 청정한 마음이 되어야 부처님한테로 가까이 갈 것인데, 이러한 것들을 먹으면 우리 마음이 정화되는 정도가 그만큼 흐려지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그냥 공연히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부처님 말씀은 모두가 우리 중생의 허물을 벗겨서 성불의 길로 인도하는 말씀입니다.

몸도 마음도 가볍고, 남한테도 좋고, 파나 마늘이나 많이 자시고서 치아를 닦지 않고 남한테 말씀을 해 보십시오. 치약으로 몇 번이고 치아를 닦아도

파나 마늘을 많이 먹은 사람들은 그냥 냄새가 풍깁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가장 과학적입니다.

옛날 2500년 이전에나 있을 법한 것이지 지금 현대가 어느 시대라고 지킬 것인가?

파나, 마늘이 다 정력제가 아닌가?

그 알량한 스테미너 그것은 좋을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것이 별것이 아닙니다.

우리 불성의 힘은 불성의 에너지 이것은 무한의 에너지입니다.

따라서 불성의 힘을 자아내야지 우리 중생이 하찮은 파나 마늘이나 고기나

그러한 걸로 해서 에너지를 낸다고 할 때에 정말로 참 못난 짓입니다.

우리가 본래 갖추고 있는 불성은 무한의 에너지입니다.

원자력보다도 더 강한 무한의 에너지입니다.

가급적이면 마약이나 담배, 이것도 먹거나 피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려우시겠습니다만 이것이 우리 건강을 위해서나 누구를 위해서나 좋은 것이 아닙니다.

매서운 의지로 해서 그렇게 지키시기 바랍니다.

어느 통계를 보면 중국이나 저쪽 독일, 프랑스에서도 마리화나 같은 마약을 복용하는 젊은이들이 대략 15% 이상 된다고 듣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상당한 숫자가 마약을 복용하는 사람들이 있겠지요. 따라서 그런 짓은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무슨 필요로 합니까? 그런 짓이 버릇이 되면 습관성, 즉 습기라는 것이 무섭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잘못 버릇이 되면 버릇 따라서 우리가 따라 갑니다.

버릇을 고치는 것이 부처님 법 아니겠습니까. 꼭 주의 하셔서 필요 없는 것은, 성불에 필요 없는 것은 일도양단(一刀兩斷)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은 6재일(六齋日)을 가급적이면 지키시기 바랍니다.

한 달에 여섯 날인 6재일을 다 못 지키시면 한 달에 다만 이틀이라도, 하루라도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왜 그런가 하면 6재일을 지키시므로 해서 우리가 일상적인 생활로 해서 몰랐던 점을 6재일 날 참회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습니다.

하루 세끼 다 먹고 그것도 부족해서 간식도 하고, 이것저것 다 하지 않습니까.

헌데 재일 날은 하루에 한 끼만 먹는 것입니다. 하루 한 끼를 먹을 때는 조금 고통이 생기겠지요. 그러나 그 정도의 고통은 감내를 하셔야 합니다. 그러시면 평소에 간식도 먹고, 끌끌하고, 또는 변비증이 생기고 그러한 것도 정말로 여러분들께서 6재일을 꼭 지키시면

웬만한 변비증은 저절로 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우리 위장은 함부로 혹사해서 너무나 포만 되게 한 그것을

몇 일만에 한번 씩 한 끼씩 먹고 다른 부정한 것을 안 먹는 그걸로 해서

우리 위장을 청소를 시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것은 우주의 지혜입니다.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하면은 가장 건강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 마음이 부처님 마음같이, 거울같이 맑을 것인가?

이러한데다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6재일은 음력(陰曆)으로 8일, 14일, 15일, 23일, 29일, 30일입니다.

따라서 음력으로 해서 적은 달은 다섯 번 뿐입니다. 큰 달만 6일간입니다.

이것을 지키셔서 담배고, 술이고, 고기고 다 끊으셔야 합니다.

내외간도 이날은 청정하게 참 출가한 셈 치고서 지내야 합니다.

이성간의 음심이나 또는 물욕이나 잠욕이나 이러한 것은 우리 중생이 생사 윤회하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 하는 그런 삼계 가운데서도 가장 밑에 있는 욕계에 해당합니다. 사실은 별로 좋지 않은 그러한 욕심들 때문에 인간이 욕계에서 고(苦)를 받고 수십 만생을 윤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날만은 재가 불자라 하더라도 출가한 셈치고, 사실은 어느 누구나 다 출가하면 좋겠지요. 그러나 보통은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세속적인 가정을 두었다 하더라도 이 날만은 출가한 셈 치고서 지키셔야 합니다.

하루 한 끼 잡수시고 술도 안마시고 고기도 안 잡수시고

허튼 말씀도 안 하시고 그날만은, 기독교인들이 주일 그래서 주와 더불어서 온전히 주 하나님한테 귀의하는 날이 아닙니까. 본래는 그것이 부처님 법입니다.

다른 종교는 부처님한테서 배운 것을 가지고서 자기들 날로 하는데

우리 불교는 원래 불교의 재일인데도 우리가 그걸 지키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 부처님 날로 해서 그날만은 부처님과 더불어서 그날만은 꼭 지키셔야 한다는 그런 각오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면 그렁저렁 일상적인 방만한 허물을 범했다 하더라도 6재일을 지킴으로 해서 우리 생활이 다시 긴장이 되고 범했던 우리 허물이 소멸이 되고 다시 불심으로 새 출발하게 됩니다.

따라서 6재일(六齋日)은 새로 출발하는 날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한 달에 두 번 씩 불자(佛子)는 원칙으로 포살(布薩)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주의 도리에 입각한 앞서 말씀과 같이 광명금강보계(光明金剛寶戒)라.

우주의 도리에 입각하는 우주의 법칙에 따르는, 우주의 법칙을 인간의 윤리에 적용하는 그런 도리가 보살계인데 이 보살계를 꼭 한 달에 두 번 씩 다 읽고서 내가 이 계에 어긋남이 있는가, 없는가 이렇게 자기 스스로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므로 해서 우리를 부처님한테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게 하셔야 합니다.

나머지 계율(戒律)은 중복도 되고, 또 제가 이만큼 말씀드려도 보살(菩薩)의 열 가지 무거운 계(十重戒) 전체와 48 가벼운 계(四十八輕戒)의 중요한 점을 다 말씀 드린 것입니다.

오늘 이 보살계는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 도리이고 동시에 우주의 법칙이기 때문에 이 보살계는 인간이나 천상이나 또는 귀신)이나 신장이나 다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만이 받는 것이 아니라 보살계를 설(設)할 때는 욕계 천상도, 색계 천상도, 무색계 천상도 다 이 자리에 모이는 것입니다. 신장도, 귀신도 다 듣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받는 것은 그런 신장이나, 그런 선신들이 우리를 다 지키고, 우리를 가호(加護)하는 것입니다.

삼보(三寶)에 귀의(歸依)하면 삼보에 귀의하는 그것으로 해서 36부 신장이 우리를 지키시는 것입니다. 보살계를 받고 지니고 지키는 불자님들은 무수한 천상의 무수한 신장들이 가호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로 바르게 살고, 보살계를 잘 지키면 여러 가지 인간적인 행복은 물론, 무루(無漏)의 복(福)으로 해서 부처님의 무한한 가피력을 입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참다운 부처님의 지혜를 떠나서 하는 것은 모두가 때 묻은 행복입니다.

남한테 베풀어도 이것은 상(相)을 두고 하는 베풂이고, 또 좋은 일을 해도 진정한 해탈의 공부는 못됩니다. 그러나 반야지혜, 참다운 반야바라밀, 부처님의 지혜와 더불어서 우리가 행동을 하면 베풀면 베푸는 것마다 모두가 다 상이 없는 보시(布施)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우리를 성불의 길로 인도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지혜와 더불어서 있는 것입니다. 그 지혜는 무엇인가? 일체 중생이 나와 더불어서 절대로 둘이 아니다. 일원주의(一元主義), 또는 동일 철학입니다. 어느 철인도 모두가 다 동일 철학을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나와 남과, 자연과 내가, 부처와 둘이 아닌 원만한 생명이다.

이 자리를 알아야 이것이 부처님의 참다운 반야지혜가 됩니다. 이렇게 반야지혜를 바탕으로 해서 지켜야 보살계가 됩니다. 그냥 무엇무엇 지킨다. 그냥 무엇무엇 안한다. 그러한 것은

그냥 상대적인 것 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참다운 당위가 못 됩니다.

꼭 지켜야 한다하는 것은 나와 남이 둘이 아니므로 남을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이고, 나와 남이 둘이 아니므로 나만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이 있어서도 아니 되는 것이고, 나와 남이 둘이 아니므로 허투로 거짓말, 욕설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동물과 나와 둘이 아니기 때문에 고기를 먹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만 중생한테 이롭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냄새나는 음식을 먹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과 더불어서 계행을 지켜야 참다운 광명금강보계(光明金剛寶戒)입니다. 그래야 참다운 보살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상을 여의고서 마음을 훤히 열고서 닦아야 보살입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고, 천지와 나와 더불어서 하나이고, 나한테는 일체 공덕이 다 갖추고 있다. 이렇게 느끼고서 보살계를 지키셔야 합니다.

지금까지 지어 온 나쁜 그림자, 이것은 사실 자기 본래 마음이 아니고 껍질에 불과 합니다.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그림자는 그냥 순식간에 가시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림자만 벗겨 버리면 내 마음 이대로 만 공덕을 갖춘 부처의 마음입니다.

이렇게 열린 마음으로 어느 누구도 특별히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버이면 어버이 도리를 다 하더라도 꼭 자기 자식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아들만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다른 사람이 아들은 아무데나 떨어져도 무방하다.

이러한 것은 보살이 아닙니다. 보살은 앞서 말씀과 같이 대수고(代受苦)라.

남의 괴로움을 내가 대신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자식이나 남의 자식이나 다 똑같이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야 그래야 참다운 불자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자기 마음도 열리는 것입니다.

내 몸뚱이도 내 것이 아니고, 내 아들 몸뚱이가 왜 내 것일 것인가?

자기 아내 몸뚱이가 왜 내 것일 것인가?

다 인연 따라서 우주가 청정한 진여불성으로 충만한 것인데,

충만한 불성의 바다 위에서 연기법(緣起法)따라서 잠시간 바다위의 거품 모양으로 잠시간 모양을 나툰 것인데, 그 허깨비를 가지고서 이 몸뚱이 때문에 죄를 범해서 부처의 길로 가는 것을 막을 필요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부처님의 청정한 보계(寶戒), 상을 여읜 청정한 계율을 우리 불자님들은 꼭 지킬 수가 있는가? <일체 대중이 다함께> "예!"

부처님 계율은 우리를 꽁꽁 묶는 구속하는 그러한 계율이 아닙니다.

그러한 도덕이 아닙니다.

부처님 계율은 우리를 참다운 자유, 참다운 평등, 참다운 행복으로 인도하는

해방의 가르침입니다. 우리 생명이 다 할 때까지 능히 지킬 수가 있는가?

<일체 대중이 다함께> "예!"

그렁저렁 금생을 살면 다시 업장에 묶여서 다시 윤회하고 맙니다.

지옥도, 아귀도, 또는 아수라 세계도 분명히 있습니다.

따라서 금생에 바르게 살아야 할 것이거늘 금생에 잘못 살아서 내생에 다시 우리가 중생이 되고 또는 못된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금생에 성불 못하면 미래에 어느 생에 가서라도 꼭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금생뿐만 아니라 내생에 가서도 성불을 할 때까지 우리 불자들은 능히 지킬 수가 있겠는가?

<일체 대중이 다함께> "예!"

이상으로 산승(山僧)이 본사석가모니(本師釋迦牟尼) 부처님을 대신해서

부처님의 청정한 계율, 우주의 법도에 따르는 광명금강보계(光明金剛寶戒)를 설해 마칩니다.

우주는 바로 훤히 밝은 하나의 생명체입니다. 바로 아미타(阿彌陀) 부처님입니다.

다시는 파괴할 수 없는 금강보계(金剛寶戒)의 진리입니다.

이러한 보살계를 꼭 명심하셔서, 잘 지키셔서 금생에 위없는 행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산승(山僧)의 법문을 마칩니다.


나무석가모니불(南無釋迦牟尼佛)!

나무마하반야바라밀(南無摩訶般若波羅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