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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마음의 고향

제 7 집 1.깨달음과 닦음

마음의 고향 제 7 집


* 태안사 석 청화(釋 淸華) 큰스님과 미주현대불교 편집인 김형근씨와의 특별대담 내용을 미주현대불교(제33호,불기2537년1월호)에서 그대로 옮겼습니다.

장소: 미주 금강선원

일시: 불기2536.11.23

대담: 미주현대불교 편집인 김형근


-. 깨달음과 닦음 [1]

김 : 불교란 무엇이며 불교의 목적이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스님 : 인생에 있어서 고(苦)를 떠난다는 것은

다만 불교뿐만 아니라 어떤 종교나 철학이나 마찬가지가 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정신문화나 물질문명 모두가 다 인생고를 떠나서

안락한 행복을 추구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안락한 참다운 행복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말로 완벽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 인류는 그간 역사를 통하여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것은 결국 우리에게 유익한 것도 있었지만 오류도 많았습니다.

세계에는 불교인을 포함하여 기독교인, 이슬람교도 등 종교를 가진 사람이 수 십 억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현대과학문명이라는 것은 인간생활을 위하여 물질문명의 풍요를 가져왔지만

또한 인간성의 상실을 초래했습니다. 인생고를 떠나는데 있어서 불교가 가장 합리적이고 보편적이며 궁극적인 가르침이라 단정할 수 있습니다.

인생고라는 것은 사제법문에도 있는 바와 같이 무지, 무명 때문에 근원이 되었습니다.

무지, 무명 때문에 우주의 진리를 바로 못보고 가상만 보고 느낍니다.

우리가 무명심 즉 근본무명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필연적으로 업이 거기에 따르는 것이고, 업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필연적으로 고가 거기에 따르는 것입니다.

흑업고라! 번뇌가 있고 번뇌에 따라 업이 있고 업에 따라서 과보가 있고

이것은 불교의 공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12연기법에도 있는 바와 같이

무명이 있기 때문에 무명을 떠나기 위해 바른 지혜가 필요하겠지요.

그러기에 4제 8정도의 처음이 정견이라!

무명의 반대가 정견 아닙니까. 바른 인생관, 바른 가치관, 바른 철학 다 같은 뜻입니다.

무명으로 인한 진리에 맞지 않는 업으로 우리가 고를 받았으니까

행복을 위해서는 바른 가치관을 확립한다고 생각할 때 행동도 거기에 따르겠지요.

따라서 바른 가치관, 바른 인생관으로 말미암아 바른 행동을 하는 것이

8정도에 다 들어 있습니다.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생활, 바른 정진 이렇게 해서 일념으로 일념으로 바른 정진하면 바른 삼매에 들 수 있습니다.

바른 삼매에 들면 나쁜 습기를 닦아서 없애고 그렇게 되면 참다운 우리 성품을 증득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바른 정견입니다. 그러면 바른 정견이란 무엇인가?

바른 정견을 세울 때 우리 불교인들이 거기에서 많은 혼돈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불교교리가 매우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소승, 대승, 현고, 밀교, 유교(有敎), 공교(空敎)… 이래서 길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학 적으로도 공부를 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 모두가 깨달음에서 온 것이고 깨닫기 위해서 온 것이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습니다. 참선만 주장하는 사람들은 무시하기 쉽지만 우리가 교학을 알고서 바로 확립한 뒤에는 모르겠지만 미처 교학체계도 없고, 부처님의 가르침의 한계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것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일대시교의 갈래를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일반대중한테는 어려운 법문을 할 수 없었습니다.

초기에는 결국 우리 중생에 맞추어서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선·악도 있다고

상대유한적인 입장에서 이른바 유교(有敎)의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청정한 반야 지혜로 볼 때는 우리 중생의 있다는 것이 사실로는 있지 않습니다. 고통이라는 것도 중생차원에서 고통인 것이지 부처가 볼 때는 고통이 없습니다.

밉다, 사랑한다 하는 것도 우리 중생차원에서 그런 것입니다.

선악도, 시비도, 자타도 없는 이유는 우주가 연기법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주가 연기법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내 몸이나 두두물물(頭頭物物) 모두가 인연법으로 구성 안 된 것이 없습니다. 인연 따라 잠시 된 것이기 때문에 고유한 무엇이 없습니다. 인연법으로 보면 잠시 상을 낸 것도 그 상이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도 찰나도 머물지 않습니다. 이른바 헤라클레토스가 말한 "만물은 유전한다."나 그리이스 철인들 주장도 다 부처님 말씀과 같습니다.

또 플라톤 현상론이나 소크라테스 주장이나 모두가 다 부처님 말씀과 비슷비슷합니다.

물론 깊이가 불교보다는 못하지만. 연기법이란 부처님이 깨달은 법인데

이 연기법으로 볼 것 같으면 제법(諸法)이 공(空)입니다.

일체 만법이 실제로 있지 않습니다. 제법 가운데는 나도 들어 있는데 사실은 나도 없습니다.

내가 분명히 존재하는데 왜 내가 없을 것인가? 우리가 보통 속인 차원에서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소중한 내가 없으면 살맛도 없는 것이고, 세상에 좋다, 싫다 차별이 있으니까

좋으면 취하고 싫으면 버리는 것인데 그것이 없으면 무슨 살맛이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엄격히 연기법으로 보면 모두 다 인연 따라 잠시 상만 보인 것이지 실제 고정된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어떠한 존재나 어느 시간, 공간에 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없는 것인가?

아무것도 없으면 불교가 허무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공 집(空執)에 빠져도 안 되며 공 집은 부처님 법을 굉장히 허물어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상은 수미산같이 산더미처럼 낸다 하더라도 공 집을 내지 말라고 일렀습니다. 공에 착(着)하면 부처님 말씀도 아무 필요 없습니다. 불교에서 공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가상은 있으나 고정된 형태로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공교(空敎)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부처님께서 우리 중생들한테 바른 정견으로 가르친 것이 중도입니다.

시공의 제한도 받지 않고 참말로 있는 것이 부처님입니다.

불성이라고도 하며 중도라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유교(有敎)나 제법(諸法)이 공(空)이라는 공교(空敎)가 아니라 실상은 중도(中道)입니다. 따라서 팔정도 가운데서 정견이라 하면 바로 이 중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있다 없다 상대유한적인 차원에서는 내가 있고 내 것이 있습니다.

또한 물질이 있고 상대적인 대상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를 위해서 상대방이 희생돼도 무방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있다고 생각할 때는 잘 입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주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보면 다른 나와 충돌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자연문제도 인간이 여기 있고 자연은 저기에 상대적으로 있다고 볼 때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자연을 아무렇게나 정복해도 무방하겠지요.

따라서 유교(有敎)의 차원에서 모든 문제를 볼 것 같으면 과학도 유교, 예수의 근본 뜻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이 되지만 현행의 기독교도 유교입니다.

공자의 유교(儒敎)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성자들의 근본 가르침은 중도실상에서 본 것이라고 해야 하겠지요. 중도실상의 안목을 가지고 바른 생활을 해야만 바른 깨달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견해를 옳다고 믿어도 일반 사람들은 습기 때문에 잘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 - 닦음이 필요합니다. 정진을 하고 선정에 들어가 습기를 잘 녹여야 견성불성이 되는 것입니다.


김 : 미국에는 세계 각국의 불교가 다 들어와 있습니다.

세계 불교에서 한국불교의 특징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스님 : 한국불교가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은 앞으로 인류사회를 구제하는데 있어서

가장 선구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경우 불교, 유교의 선달국인데 공산정권 때문에 제대로 계승되지 못하고 중단되었습니다.

또 중국민족도 과장이 많은 사람들인데 무슨 종파가 생겨나면 그것만 옳다고 합니다.

선·교종도 원래 둘이 아닌 것인데 선·교로 나뉘어져 서로 피차간 비방하고 헐뜯고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불법이 바로 서지 못했습니다. 일본의 경우에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80% 정도가 불교인이고 불교가 거의 생활화 되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일본 문화가 지금 부흥한 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그들의 의식에 잠재해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일본인 자체가 마음을 활짝 열지는 못했지만. 일본의 종파불교는 한국불교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아주 심각합니다. 일본 선방을 예로 들어도 임제종, 조동종, 황벽종 등이 있어

참선이 여러 갈래이고 자기들 식 아니면 성불을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지금 일본 국력과 문화를 배경으로 하여 미국에서 많은 세력을 확보했을 것입니다.

절도 크고 내용도 충실해 보이고 신도도 많겠지요.

티베트는 달라이 라마 이런 분들이 미국에서 환영을 받고 세력을 편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티베트 민족 전체가 오로지 불법에 귀의하기 때문에 그네들의 부처님에 대한 청결하고 순수한 마음, 검소한 생활은 우리가 못 따라 갑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태도 면에서 한국 스님들보다 숭앙이 가기도 하겠지요. 그리고 달라이 라마 같은 분은 어려서부터 이른바 린 폰체 아닙니까?

어려서부터 엄선한 가운데서 선근이 깊고 과거 도인의 후손들을 골라서 승왕으로 교육을 시킵니다. 순수하고 선근이 좋은 사람들은 철저하게 교육을 시키니 그 정도 되면 사람이 순수하기가 이를 데 없겠지요.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면 공산주의 세계에서 압박을 받고 거기에서 망명을 했다고 생각할 때 마땅히 자유세계 모두가 공명과 동정을 하겠지요.

또 그네들의 경건한 모습, 순수한 모습을 보고 숭앙할 것이고 동시에 세계적인 분위기가 망명객인 승왕이라는 위상 때문에 응당 깊은 동정과 관심이 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네들이 갖고 있는 법은 무엇인가? 대승권이기는 하나 그 수행면에서는 한국같이 철두철미하게 회통적으로 닦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네들의 성불하는 법은 '옴마니반메훔'일색입니다. 다분히 밀교적인 분위기가 풍깁니다.

그러나 아까 내가 말한바와 같이 유교(有敎), 공교(空敎) 중도교(中道敎)같은 정밀한 체계가 있어야 이 첨단 과학 세계를 지도할 수 있지 신비적인 밀교 가지고는 제대로 안됩니다.

순수한 것은 따라야 하겠지만 밀교적인 분위기 가지고는 고도로 다원화된 세계를 지도할 수 없습니다. 다원적이고 복잡한 세계에서는 유교, 공교, 중도교 이 세 차원을 다 포용해서

그때그때 중도교적인 관점에서 알맞게 적용해야 합니다.

동남아불교 - 버마, 라오스, 태국, 스리랑카 등은 승려 행으로서는 철저합니다.

그러나 계행에 있어 육식을 함부로 하는 것은 우리가 본받을 것이 아닙니다.

수행방법에 있어서 그들은 점차 올라가는 이른바 점수행법만 취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돈오(頓悟)적인 행법을 안취합니다.

우리가 아직 도인이 안 되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문득 깨달아 본래 부처다 이렇게 믿어야 하는데 그네들은 그것을 안 믿는 것은 아니겠지만 현행의 행법을 보면 돈오적인 행법은 취하지 않고 점수에 관한 것만 취합니다. 비파사나만 보더라도 굉장히 번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적인 추세를 감안하면 그러한 방법으로는 불교 자체의 통일도 이룰 수 없을 뿐 아니라 과학과 다른 종교를 설득시킬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미국 사회는 과학문명이 극도로 발달된 사회 아닙니까. 적어도 에너지의 실상을 말할 수 있는 그런 가르침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미국 사람을 우리가 제대로 제도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절대로 합리적인 과학주의가 되어야 합니다. 그와 같은 차원에서 볼 때 한국불교는 지금 현재의 여러모로 복잡하지만 원효, 의상, 대각, 보조, 의천, 태고, 나옹, 기화, 서산, 초의선사 등을 거치면서 흐름이 회통 적입니다.

중도실상에 입각하여야 회통이 됩니다.

한국불교도 이 전통적인 회통불교를 부르짖지 않고서는 발전할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한국불교 스스로가 다시 본연의 정통의 자세를 찾아야 합니다.

불법 스스로가 회통이고 원통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라는 것이 회통이 안 되면 진리가 될 수 없겠지요.


-. 깨달음과 닦음 [2]

김 : 그런 원리와 전통이 스님도 말씀하신대로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서양은 그렇다 치더라도 훌륭한 불교사상의 전통이 있는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불교 권 국가에서도 이혼문제, 환경문제, 전쟁문제 등이 심각한 상태입니다.

이러한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스님 : 환경문제도 물질문명의 소산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문제는 심각한 문제로 떠오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계승하였는데 이같이 못살고 분열이 있는 것은 어찌된 것이냐고 물으면 그 답은 명백합니다.

우리 불교인들이 불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해서 그렇다고 봐야합니다.

바른 정견이 있다고 할 때는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바른 정견이 설사 있다 하더라도 나쁜 습관 때문에 거기에 딱 구속되어 버리거나 또는 경계에 부딪히면 나쁜 일도 하고 분열도 됩니다.

불교를 믿는다고 해도 유교(有敎)나 공교(空敎) 차원에서 믿었겠지요.

말 한 마디라도 정당하게 중도차원에서 해야 합니다.

삼강오륜도 나올 때는 참다운 진리에서 나왔겠지요.

무슨 사상이든지 굳어버리면 사회의 질곡이 되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불교도 굳어버리면 질곡이 되어 발전이 못되기 때문에

마땅히 무엇이든 찰나찰나 중도의 상상에서 봐야 합니다.


김 : [선문정로]가 출판된 이후 [깨달음과 닦음]에 관한 문제가

한국불교의 중심문제의 하나로 부각되었습니다.

여기에 관한 책도 몇 권 나왔고 불교계 차원에서 볼 때 대규모 학술토론회도 몇 번 있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 종교학회 연례 세미나의 한국분과에서 [돈오돈수(頓悟頓修) 돈오점수(頓悟漸修)]가 주제로 채택되어 대 토론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관해서 스님께서도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성철 스님의 보조스님 돈오점수 비판에 대한 스님의 견해, 그리고 돈오점수(頓悟漸修) 돈오돈수(頓悟頓修)에 대한 스님의 견해를 들려주십시오.


스님 :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에 관한 논쟁은 선(禪)과 교(敎)의 논쟁과도 관계가 있는 그 뿌리가 매우 깊습니다. 일찍이 중국의 [마하연나 스님]과 인도의 [카마라실라 스님]이 티벳의 랏사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는데 끝내 양편이 자기편이 이겼다고 주장을 했다고 합니다.

보조 스님이 떠난 지 거의 800년이 지났는데 그 동안 선과 교를 일치한 회통불교의 분위기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직 돈오점수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한 분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현재 조계종에서 오랫동안 종정을 지내시고 선지식으로 추앙받는 성철스님이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설을 그의 선문정로에서 옳지 않다고 비판을 했습니다. 저는 전문 학자가 아닌 참선수자이기 때문에 교학적인 분석에는 능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그런 복잡 미묘한 논쟁에는 끼어들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먼 길에 일부러 찾아오신 성의를 무실할 수도 없기 때문에 혹 공부하시는 불자님들에게 참고라도 되실까 하여 저의 소견을 말씀드립니다.

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보조스님에 대해서는 비단 한국불교사상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대 선각자로서 오랫동안 추앙을 받아 왔다는데 문제의 중요성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성철스님에 대하여는 개인적으로 우리 종단의 종정스님으로서 후학의 입장에서 깊은 존경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단의 상징인 종정스님의 위상에 다소라도 누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염려스런 마음에서 몇 마디 사견(私見)을 말씀드립니다.

문제의 초점인 성철스님이 지적한바 보조 스님의 돈오점수설이 과연 옳지 않은 것인가?

제가 알기로는 돈오점수설은 이미 육조스님의 돈오돈수설을 수용한 불교 일반의 수승론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돈오돈수라는 개념은 성철스님이 맨 처음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고 육조단경, 돈점품에 이미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돈오점수라는 개념도 중국 당나라 때 화엄종 4대 종사인 징관스님이

비로소 사용했다고 하나 종밀스님이나 화엄경을 비롯한 대승경론의 뜻이

대체로 돈오점수의 사상으로 일관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돈오돈수설은 어떠한가?

저는 돈오돈수도 깨달은 뒤의 닦음을 무시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옳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육조스님의 돈오돈수설도 옳고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설도

또한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위의 두 법문이 표현은 차이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 근본 취지는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단경의 돈점품에 나오는 돈오돈수설이 깨달은 뒤에 닦을 필요가 없다는 돈수가 아니라 깨달아서 자타시비의 차별이나 높고 낮고 깊고 옅은 등의 분별심은 끊어졌으나 아직 번뇌의 습기(習氣)는 남아있기 때문에 이른바 시비분별에 집착하지 않는 무념수행(無念修行) 곧 무염오수행(無染汚修行)이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돈오돈수라고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단경을 정독하면 그런 뜻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데 특히 단경의 부촉품에 그대들이 만약 일체 종지를 성취하고자 하면 모름지기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성취해야 하느니라… 등을 참고하든지 전등록 제5장 남악회양장에 보면 육조스님이 남악회양스님의 깨달음을 인가할 때도 깨달은 뒤에도 닦고 증(證)함이 없지 않으나 무염오수행 곧 무념수행이어야 한다고 고구정녕이 역설하였습니다.


그리고 깨달음이 해오(解悟)가 됐든 증오(證悟)가 됐든 간에 지극히 수승한 근기가 아닌 보통 근기로는 깨달음이 바로 구경각인 묘각성불의 자리에 이르지는 못하기 때문에 견도(見道) 이전의 해오(解悟)에도 사선근의 깊고 옅음이 있고, 견도 이후의 증오에도 보살 10지 등의 심천(深淺)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깨달은 뒤에도 착실히 닦아야 한다는 돈오점수설이 오류일 수가 없습니다. 대소경론에서 묘각성불의 일체공덕을 간략으로만 살펴봐도

삼명육통(三明六通)과 불가사의한 무량공덕을 원만히 성취한다고 하였는데

석존 이후 오랜 불교사상에 과연 얼마만의 선지식들이 이러한 원만성불의 자리를 얻을 수가 있었을 것인가…

우리 불자들은 매양 겸허한 마음으로 선지식들의 가르침에 따르되

그때그때 인연에 따른 표현과 말에 걸리지 말고 그 깊은 의미를 바로 알아서 일심정념으로 공부하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바꿔 말하면 육조스님의 돈오돈수설이나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설이나

또는 성철스님의 돈오돈수설이나 다 같이 중생교화의 배경과 인연이 다를 것이므로 그이들의 표현방법과 그에 따른 함축된 의미도 다소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 한 결같이 미혹한 중생들이 미처 증득(證得)하지 못하고

증득했다고 하고 철저히 깨닫지 못하고서 깨달았다고 하는 이른바 증상만(增上慢)을 경책하며 올바르고 철저한 수행과 깨달음을 위한 노파심절한 근본정신은 충분히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좋은 보약도 잘 못 쓰면 병을 더하게 하는 것이니 많은 선지식들의 가르침을 귀감으로 할지언정 거기에 걸리거나 구속을 받지 말고 철저한 고증과 투철한 자기수행의 점검으로 원만 무결한 깨달음을 성취해야 할 것입니다.

김 : 그러면 의미로 볼 때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는 같은 의미입니까?


스님 : 돈오점수나 돈오돈수나 같은 의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보조국사와 같은 대천재적 선지식이 돈오돈수란 뜻을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의미로 봐서는 같다고 생각이 됩니다.

다만 육조대사가 깨달음 다음에 왜 돈수라고 했을 것인가?

이것은 의심이 되겠지요. 돈오돈수의 뜻은 돈점품, 부촉품, 남악회양대사와 육조대사가 거량한 것 등을 통해서 살펴보면 한 번 돈오했다고 했을 때 돈오, 그것이 성불(成佛)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른바 삼명육통과 일체종지를 갖춘 깨달음이 못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단박 깨달았다고 해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그것과 같겠습니까?

따라서 돈오돈수는 일체구경각 즉 묘각이 아닙니다.

원만 무결한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에 돈수라고 수(修)자를 붙인 것이지

오(悟) 다음에 닦음이 없으면 수는 왜 붙입니까?

마땅히 돈수라고 할 때는 수가 있으니까 수를 붙였겠지요.

다만 그 수는 자타시비, 고하계급을 가리는 수가 아니라 무념수행(無念修行)입니다.

무념수행이란 자타시비, 고하계급을 가리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래 깨달음이란 자타시비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해오가 되었던 증오가 되었던 돈오가 되어버리면

비록 구경각까지는 가지 못했다 하더라도 자타시비나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때는 점차로 올라가고 높고 낮고 하는 마음이 있으면 안 됩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회향선사가 육조대사한테 인가 받을 때 육조대사가 "닦음과 증득이 있는 것인가?"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회양대사가 "닦음과 증득이 없지 않으나 차별과 시비를 두지 않고 상에 걸리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육조스님께서 "염오하지 않는 수행은 모든 부처가 보호하고 생각하는 바요,

그대 그렇고 나 또한 그렇다"고 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점수라 해도 하등 오류가 안 되는 것인데 다만 사람들이 나와 네가 있고, 고하계급이 있다는 등의 상을 둘까봐 노파심에서 돈수라 했다고 봐야 합니다. 더구나 보조는 화엄학에 투철한 분인데 그 분이 본래시불(本來是佛)을 모르고 묘각을 모르겠습니까?

보조의 돈오점수는 깨달은 뒤에 묘각성불에 이르기까지의 습기를 착실히 닦아야 하기 때문에 점수라고 한 것입니다.

돈오돈수라는 언어도 육조가 쓴 말인데 오류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이 말을 성철스님은 "돈오돈수는 성불이다. 성불은 수가 있을 수 없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성철스님 주장대로 성불만 오(悟)다 라고 한다면

점수뿐만 아니라 돈수라는 사족을 붙일 필요도 없습니다.

김 : 스님께서도 『정통선의 향훈』을 통해 말씀하셨지만

수행이 부족한 분들의 도인 행사는 우리 불교계의 큰 문제입니다.

그런데 돈오점수가 이 거짓 도인행세의 이론적 뒷받침을 하는 폐단이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스님 :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돈오점수 때문에 미증을 증으로 하고 미오를 오로 했다는

증상만(增上慢)의 도인이 나온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보조국사가 완전한 깨달음을 무시했다면 모르거니와

완벽한 성불을 목적으로 하고 돈오점수를 주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돈오점수를 주장했기 때문에 깨달음을 함부로 했다는 것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도리어 성불만이 깨달음이고 다른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석가모니 부처님 다음에 성불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성불이라는 것도 우리가 불경을 보면 삼명육통과 일체종지와 만 공덕을 갖춘 것인데 삼명육통과 만 공덕을 갖춘 분은 누구누구인가 생각할 때는 의단이 갑니다.

보조국사가 성불을 무시했으면 모르거니와 그것을 전제로 해서 돈오점수를 말했기 때문에 돈오점수가 거짓도인 행세의 이론적 뒷받침이 될 수 있다는 그 지적은 정확하다고 볼 수 없고 반대로 돈오점수를 말해야 섣부른 도인이 못나옵니다.

그리고 아함경 등 경전에도 아라한들에게도 깨달음의 깊음과 옅음의 심천이 있다고 했고

그런 깨달음의 심천을 알아두어야 내 공부는 이만치다 라고 점검할 수가 있겠지요.

완전원만한 성불만이 깨달음이 아니라 깊고 옅음이 있다는 것이 전통적인 해석이고 번뇌와 습기를 소멸하는 수행의 도리가 또한 그러합니다.

깨달음은 아까 말한 바와 같이 단계가 많은 것인데 본래 부처님의 경계에서는 하나이지만 중생의 수행해 가는 데는 깊고 옅은 단계가 많습니다.

다만 그런 단계도 본래는 공(空)이기 때문에 집착 말고 걸리지 말라는 것이지 단계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조는 돈오점수라 했고 육조스님 당시에는 사람들이 교학 적으로 너무 걸려 있으니까 교학에 걸리지 말라는 뜻으로 돈오돈수라 했습니다. 도인들은 그때그때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말씀을 하시니까

후대에 우리가 섣불리 비판하기 어렵습니다.


-. 깨달음과 닦음 [3]

김 : 현대는 과학발달에 힘입어 물질문명의 풍요를 즐기고 있지만

범죄문제, 환경문제, 교통문제 등이 만연돼 있습니다.

그리고 불교는 생명의 사상인데 현재의 시류는 비생명 쪽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21세기를 맞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점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스님을 통해 듣고 싶습니다.


스님 : 서구적인 사고방식은 종교나 과학이나 거의 다 이원적이고 상대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상으로서 자연을 상대할 때는 정복의 대상밖에는 안되겠지요.

자본주의 모순도, 이것을 해결하려는 공산주의 모순도 다 이원적이고 대립적인 그릇된 생명 관에서 옵니다. 이분법은 진리의 본궤도에서 이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역사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전쟁, 환경문제 등으로 우리 인간이 받는 고난도 대체로 상대적인 서구적 가치관에서 온 것이므로 불교의 바른 정견인 생명이 동일성을 언론을 통해, 교육을 통해, 또는 선지자를 통해 가르쳐야 합니다. 이 외에 다른 대안은 절대로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언론인이 되어 세간적인 문제를 다룬다고 해도 항시 정견에 따르는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어떠한 사회적인 문제, 죄악, 모순, 불행도 부처님의 정견 곧 반야바라밀로 통찰할 때는 풀리지 않는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김 : 지난 해 10월 [대중불교] 표지인물로 염불선 운동을 펴는 현장스님이 나왔더군요.

현장스님은 여기에서 염불선에 대하여 청화스님께 많은 감화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정통선의 향훈"에서도 스님께서는 염불선을 많이 말씀하셨고,

염불과 염불선의 차이를 강조하셨습니다.

이러한 일로 해서 스님께서는 일각에서 외도라고 비방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통불교의 중흥을 주장하시는 스님이신데 염불선이 한국불교의 전통 속에서 강한 흐름이 있었나요?

 

스님 :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염불선을 주장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그것도 하나의 선법이라는 것이지요.

화두도 하나의 선법이고, 염불선도 하나의 선법이지 그것이 다는 아닙니다.

그렇게 봐야 옳고 회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여불성 자리에 우리의 마음을 두고 진여불성이 바로 우리 마음이라는 생각을 여의지 않고 하는 공부는 다 옳습니다.

그런데 그런 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관을 하면 관법외도, 염불하면 염불외도라 합니다.

그러나 설사 우리가 화두를 한다 할지라도 화두 자체가 원래 나올 때 불심(佛心) -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문제로 해서 나왔기 때문에 화두 하는 자세가 불심에 마음을 두고 불심을 참구(參究)해야 화두가 되지 그냥 '이뭣고' 해서 의심만 한다고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염불도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이 부처고 천지우주가 본래로 부처가 아닌 것이 없다.

이러한 자세로 염불해야 염불선입니다.

또 이러한 자세로 화두하면 화두선이고 주문하면 주문선입니다.

이와 같이 진여불성을 여의지 않고 하나님을 참구하면 하나님선이 되겠지요.

근본성품을 여의지 않고 하는 공부는 다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정통선의 향훈'으로 말씀하면 제가 부끄럽습니다. 이 책은 제가 내려고 한 책이 아닙니다.

내지 말라고 했는데 주위 사람들이 냈습니다.

좀 더 다듬어서 나왔어야 하는데 불만스러운 점이 많습니다.

김 : 그러세요. 그 책으로 봐서는 그렇게 느껴집니다.


스님 : 제 스스로는 염불선을 합니다.

주장이라는 것은 그것만이 옳다는 것인데 저는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주는 하나의 생명이고 인격입니다. 부처님은 내 몸에도 가득 차 있고, 우주 공간 어디에나 충만해 있는데 부처님을 생명자체라고 인격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원리로만 추구한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처에 대하여 마치 그리운 고향과 마음의 임을 흠모하는 것과 같은 간절한 마음과 사무치는 마음은 우리 마음을 정화시키고 비약시킵니다.

불경에 보면 그런 대목들이 많이 있습니다.

참다운 임은 바로 부처님이 아닙니까.

따라서 경전에도 염불왕생원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부처님을 흠모하고 추구하면 그것만으로도 우리 마음은 맑아지고 안온한 충족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생명으로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염불이 나에게는 적당한 수행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름만 외고 하는 것은 방편이 되겠습니다.

이런저런 수행법이 모두 다 같은 목적이기 때문에 회통이 됩니다.

원효나 보조나 이런 분들은 모든 수행법에 대해서 좋고 나쁘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현장스님은 원래 신학도 하신 분인데 아주 순수한 분입니다. 염불 쪽에 비중을 두니까

남이 생각할 때는 현장스님이 염불선만 주장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장스님과 저는 염불선만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김 : 원효스님이 대중 속으로 들어가 '나무아미타불' 하고 염불을 하며

대중 속으로 들어가 부처님 법을 많이 폈고,

또 한국불교에 정토신앙적인 요소가 얼마나 많습니까?

보조스님등도 염불에 대해서 언급을 많이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선방에서 염불 운운하는 것에 대해 문제시하는 곳이 많다고 하더군요.


스님 : 신앙을 생활과 생명으로 취급하는 것은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그래야 신앙이 힘이 생깁니다. 원효는 염불에 치우친 사람이 절대 아닙니다.

일반 대중에게는 염불이 하기도 쉽고 공부의 힘을 얻기도 쉬운 것입니다.

보조국사도 염불요문 등에서 참 염불은 선과 일치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런 도인들은 어느 행법에 대해 옳다, 그르다 하지 않았습니다.


김 : 스님께서는 미국이 초행이지만 뉴욕을 중심으로 동부를 보셨고,

나성지역에서 안거중입니다.

그동안 미국에 대한 느낌과 미주한국불교계에 대한 인상과

바람 등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스님 : 저는 우선 모두에게 감사하고 장하게 느껴집니다.

미국사회는 활기에 넘치고 미국인들은 인상도 밝고 해서

우리보다 업장이 가볍지 않나 하고 느낄 정도입니다.

서구적인 사고방식인 이원적인 삿된 가치관만 지양되면

우리 한국보다 더 열성적으로 불교가 퍼질 것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퇴폐적인 면도 많겠지요.

이런 면은 불교인들이 앞장서서 앞으로 좋은 방향으로 이끌면 될 것입니다.

한국불교에 대해서는 저는 굉장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숭산, 법안, 도안 스님 등과 그 외에 많은 스님들과 박성배 교수 등 그 외에도 한국불교를 위해 멀리 미국에까지 오셔서 애쓰는 분들이 고맙게 느껴지고 원력보살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생제도는 나가서 행동으로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주는 하나의 부처이기 때문에 선방에 들어앉아 참선을 하든, 자기 직장에서 일을 하든, 우리 마음이 근본성품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을 여의지 않고 최선을 다하면 다 한 결같이 중생제도가 되는 것입니다.


김 : 특별히 시간을 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