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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마음의 고향

제 6 집 2.만선동귀(萬善同歸)

마음의 고향 제 6 집


* 불기2532년(1988년) 3월5일(토) 석 청화(釋 淸華) 큰스님께서 태안사 3년 결사 해제기념 회향법회를 광주 금륜회에서 봉행 설법하신 법어입니다.


-. 만선동귀(萬善同歸) [1]

사람의 버릇은 무서운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이와 같이 앉는 버릇은 많이 붙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앉아서 사흘이고 한 달이고 있으라고 하면 별로 어렵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높은 자리에 올라와서 무슨 말씀을 하라고 그러시면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광대(廣大)도 자주 무대(舞臺)에 올라가야 이제 신이 나듯이 우리 승려(僧侶)도 자주 설법(說法)을 하면 무난할 것인데 저와 같이 자주 올라가지 않는 사람은 참 어둔 합니다.

3년 동안 빚을 많이 지고 또는 중 생활을 40년 동안 했으니 40년 동안 사부대중한테 진 빚이 굉장히 막중합니다. 어떻게 갚아야 할 것인가? 벌써 아득해져 버려서 말문이 막힙니다.

그러나 무슨 말씀인가 해야 쓰겠지요. 3년 동안 과연 빚을 지면서 무엇을 얻었던가?

'그대가 3년 동안 공부한 것을 내놔봐라' 그러면 저는 내놓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초라한 몸뚱이 밖에는 지금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얻은 것은 무엇인가 하면 부처님 법(法)은 참 쉽구나, 부처님 법은 참 쉽다는 것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불교(佛敎)는 그야말로 한문(漢文)으로 되어 있고 법문(法門)도 8만4천 법문이라 그와 같이 많은 법문이 있고, 또 계행(戒行)도 지키려면 굉장히 어렵지 않는가. 이와 같이 자주 난색을 표합니다만 여태까지 공부한 걸로 해서 경험을 말씀드리면 불법은 굉장히 쉽습니다.

어째서 쉬운고 하면 천지우주(天地宇宙)의 법칙(法則)을 - 법이자연(法而自然)이라! -

천지우주 자연(自然)의 법(法)에 따르는 길입니다.

불법(佛法)이라 하는 것은 자연에 거슬러 가는 것이 아니라 천지우주의 법도(法道)에 따르는 길입니다. 인과(因果)에 따르는 길이고, 천지우주의 법규(法規)에 따르는 길입니다.

우리가 생활(生活)속에서 다 경험해 보신 분들은 아시지만 사실은 법도(法道)에 어긋나면 도리어 마음도 괴롭고, 따라서 마음도 몸도 둘이 아니기 때문에 몸도 괴로운 것입니다.

우선 우리가 간단히 계율(戒律)을 두고 생각을 해봅시다. 계행(戒行)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몸으로 바른 행동, 입으로 바른말하는 것이 바로 계행 아닙니까.

마음이 좋지 않을 때는 염불(念佛)도 하고 참선(參禪)도하는, 닦는 법(法)이 있겠습니다만

우선 몸으로 바른 행동, 입으로 바른말, 이것이 계행인데 몸으로 바른 행동(行動)을 못 추수리면 그냥 죄(罪)를 받습니다. 우리가 흔히 과보(果報)를 받는단 말입니다.

살생(殺生)하지 말라는 그 말을 어기고서 우리가 함부로 죽여 보십시오. 인정(人情)이 많은 사람은 사실 파리 한 마리만 죽여도 마음이 덜컥합니다. 하물며 거기다가 닭을 죽여서 먹고, 소를 죽이고 개를 죽이고 해보십시오. 지금은 마음이 표독스러워서 닭도 죽이고 개도 죽이고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정작 자신이 죽을 때는 닭 모가지, 소 모가지, 개 모가지가 와서 자기를 위협한다는 것입니다.

그 전에 장서(장서가)라는 소를 잡는 도아(屠兒)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소도 많이 잡고 여러 가지 짐승을 많이 잡았겠지요. 백정이니까 그렇게 어렴성 없이 무서움 없이 많이 죽였단 말입니다. 그가 죽는 순간 그 짐승들의 영혼이 무수히 이렇게 와서 호령도 하고 눈을 부릅뜨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무서운 가운데서도 죽음의 길에 이르는 찰나에도

역시 훌륭한 법사(法師)를 만나서 그런 사람도 제도(制度)를 받았습니다.

선인(善人)만 제도를 받는 것이 아니라 평생 동안 그런 소도 죽이고 말도 죽이고 하는 사람이라도 마지막 순간(瞬間)에 일념(一念) 참회(懺悔)를 해서 바른 마음을 돌이키면 그냥 제도를 받습니다. 불법(佛法)이 오직 쉬운 것입니까.

눈이 부십니다. 더구나 얼굴도 못난 사람을 자주 그러시면 제가 난처합니다.

(비디오 촬영 중에 하신 말씀)

계행(戒行)을 지키면 그와 같이 지키는 것이 안 지키는 것보다 훨씬 쉬운 것입니다.

살생(殺生) 안하는 것이 하기보다 쉽습니다. 훔치지 말라. 마음이 마비가 되어 버린 그런 저런 사람들은 훔치는 것을 쉽게 할는지 모르지만 정직(正直)한 사람은 자기 몸에다 칼을 대도 훔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훔치기보다 안 훔치기가 더 쉽습니다.

음란(淫亂)한 짓을 말라. 정조(貞操)가 굳은 분들이 자기 배필(配匹) 이외에 음란한 짓을 하겠습니까.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옛날 같은 그런 봉건주의(封建主義) 사회가 아니더라도 역시 바른 분들은 자기 배필 이외에 음란한 짓을 할 수가 없습니다.

거짓말, 욕정(欲情), 이간질하는 말, 꾸며서 하는 말 그런 말도 우리가 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계행(戒行)지키기는 굉장히 쉬운 것입니다. 계행 이것은 억지로 지켜라, 이러는 것이 아니라 불법(佛法)을 공부하려면 앞서 말씀같이 자연(自然)의 법도(法道)에 따르는 것이 불법인데, 우리 인간(人間)의 마음과 몸이 자연의 법도에 따르려면 응당 계행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살생(殺生)하지 말라. 부처님 법은 그냥 원리(原理)나 이치(理致)가 없이 무엇, 무엇 하지 말라 그런 법(法)은 없습니다. 다 원리가 있습니다.

즉 말하자면 근원적(根源的)으로 밑받침하는 도리(道理)가 있습니다.

어째서 죽여서는 안 되는고 하면 남 죽이면 그 사람이 나한테 와서 나중에라도 혼신(魂神) 즉 영혼(靈魂)이 보복한다는 그런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생명(生命)은 뿌리가 하나라는 생명은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 모든 천차만별(千差萬別)의 현상계(現象界)가 있다 하더라도 근본(根本)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통은 나는 불성(佛性)이 있다. 우리 마음의 근본(根本)은 불성(佛性)이다. 진여(眞如)다. 이와 같이 말은 하지만 내 불성 남의 불성 따로 있지가 않습니다. 모양은 차이(差異)가 있다 하더라도 불성이라는 그 점, 부처의 성품(性品)이라는 그 점은 똑 같습니다.

불성(佛性)은 사람한테 있으나, 개한테 있으나, 또는 하나의 먼지 속에 있으나 어떠한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불성은 똑 같습니다.

불성은 변(變)하지도 않고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습니다. 그러한 근본은 똑 같은 생명입니다. 불성 이것은 하나의 생명인 것입니다. 그냥 바싹 마른 그런 무미건조(無味乾燥)한 이치(理致)가 아니라, 불성(佛性)은 일체만유(一切萬有)를 창조(創造)도 하고, 일체만유를 섭리(攝理)하고 있는 그런 참다운 근본생명(根本生命), 이것이 불성(佛性) 입니다.

그와 같이 근본은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죽이면 그만큼 같은 생명을, 내 생명을 죽인 셈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나다, 이런 모양의 김(金) 아무개, 박(朴) 아무개, 이것이 나다 이렇게 말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나, 이것은 사실은 확실히 잘못 보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을 이렇게 확장을 시키고, 깊이 파고 들어가면 나와 남과 일체만유가 그때는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 박 이라는 사람도 그 뿌리는 하나, 김이라는 사람도 그 뿌리는 하나입니다. 동물(動物)도 식물(植物)도 무생물(無生物)도 모두가 근본 뿌리는 하나입니다.

저 같이 참선(參禪)하는 사람들은 하나의 문제(問題)만 골똘히 합니다. 좋다 궂다 밉다 음식이 맛있다 하는 생각을 그냥 다 버려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말을 하다가도 먼저 한 말을 금방 잊어버립니다. 상대(相對) 유한적(有限的)인 문제를 잊으려고 애쓰기 때문에,

오직 부처님한테만 지향(志向)하는 그 마음, 그 마음만 가지려고 애쓰기 때문에 이렇게 말을 하다가도 먼저 한 말을 잊어버린단 말입니다.

앞서 제가하던 말을 잊어 버려서 변명(辨明)하는 말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모든 생명이 하나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간에 모두가 하나로 다 들어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제 만선동귀(萬善同歸)라! 이런 말씀은 외워둡시다.

일만 만(萬)자, 착할 선(善)자, 한가지동(同)자, 돌아올 귀(歸)자입니다.

만(萬)가지 선(善)을 행(行)한다 하더라도 역시 하나로 들어간단 말입니다.

하나란 무엇인가? 이것은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법성(法性)이나 불성(佛性)이나 도(道)나 열반(涅槃)이나 극락(極樂)이나 또는 여래(如來)나 다 같은 뜻입니다.

우리 불교(佛敎)를 공부하신 분들은 이와 같이 다 모든 것이 표현(表現)은 다르다 하더라도

근본(根本)은 하나로 해서 통일(統一)을 시켜버리는 그런 슬기를 가져야 비로소 불교의 반야지혜(般若智慧), 참다운 불교의 지혜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뿔뿔이 흩어지면 불교가 아닙니다. 지금 불교도 종파(宗派)가 있고 뭣이 있곤 합니다만 그것은 다만 사람의 근기(根氣) 따라서 임시 간 그런 것이지 내내야 길은 하나입니다.

만선동귀(萬善同歸)라. 그러면 불교(佛敎)와 기독교(基督敎)는 차이(差異)가 있는 것인가?

불교의 선(善)이나 기독교의 선(善)이나 같습니다. 남한테 보시(布施)하면 우리 불교인들은 보시해도 좋고, 기독교인들은 보시(布施)해도 나쁜 것이 아니라 같단 말입니다.

다 같이 남한테 베풀고 그런 좋은 일은 다 같이 진리(眞理)로 들어갑니다. 진리를 북돋우고 빛내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종교에서 하는 것은 좋고 남의 종교에서 선행(善行)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말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결국은 다 똑 같이 모두가 진리로 들어가는 길이고 방편(方便)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하나의 차이(差異)는 있습니다.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하면

부처님 가르침은 모든 것을 근본(根本) 뿌리에서 봅니다. 어려운 말로는 근본체(根本體)에서 본단 말입니다. 불교를 공부하신 분들은 근본 뿌리인 체(體)라 몸체(體)자, 또는 현상적(現象的)인 것을 용(用)이라 쓸용(用)자, 체(體)와 용(用)이라. 또는 성(性)과 상(相)이라! 성품 성(性)자 서로 상(相)자, 근본 체(體)는 성(性)이라 하는 것이고, 또 용(用)을 상(相)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상체용(性相體用)이라! 이런 말은 꼭 외워두시기 바랍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불교는 눈에 보이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本質)을 중요시합니다. 사실은 본질을 모르면 불교가 못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남한테 돈 얼마를 보시(布施)한다 하더라도 그냥 체(體)를 미처 못 보고서 형식(形式)으로 구차하므로 드린다. 이 정도는 단지 현상적(現象的)인 보통 윤리(倫理)의 범주(範疇)를 못 벗어납니다. 참다운 불교의 입장은 못 되는 것입니다.

저 사람과 나와 원래(原來) 둘이 아니고, 저 사람 생명(生命)과 나의 생명이 원래 둘이 아니고, 천지우주(天地宇宙)와 나와 둘이 아니다. 그러한즉 말하자면 동체의식(同體意識) 말입니다. 일체의식(一切意識) 이것이 딱 되어 버리고서 남한테 베풀어야 진정한 불교의 베풂입니다. 진정(眞正)한 보시(布施)입니다. 남이라는 상(相)이 있고, 금전 얼마 전해 주었다. 그런 상이 있으면 벌써 현상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고 묶이는 것이지 참다운 불법에 입각한 보시는 못되는 것입니다. 이런데서 불교의 선행(善行)과 다른 종교와 또는 일반 윤리(倫理)와 차이가 있습니다.


-. 만선동귀(萬善同歸) [2]

저한테 주어진 시간(時間)이 한 시간 밖에 안 되어서 너무 장황하니 이런 말씀만 많이 해버리면 시간이 아깝습니다.

계율(戒律)도 역시 우리가 철저히 지킬 때는 - 살생(殺生) 안하면 자기 마음도 개운하고 한다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눈에 안 보이는 무한한 공덕이 있습니다.


우리는 앞서 법회(法會) 서두(序頭)에서 삼귀의(三歸依)를 외웠습니다. 부처님한테 귀의(歸依)하고, 부처님 법(法)에 귀의하고, 부처님 법을 독실히 지키는 우리 사부대중한테 귀의하고, 이와 같이 삼귀의를 했습니다. 삼귀의를 하면 어떠한 공덕(功德)이 있는가? 눈에 보이는 공덕도 많이 있지만 눈에 안 보이는 공덕도 있습니다.

지금 제가 앞서 불성(佛性)이다. 또는 법성(法性)이다. 그런 말을 했습니다마는 불성이나 법성 그런 것이 우리 형상(形象), 이런 상(相)이나 또는 용(用)을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 중생(衆生)은 겉만 보고 그 체(體)인 즉 말하자면 불성(佛性)을 못 본단 말입니다. 물론 우리를 떠나서 불성이 따로 있지는 않지만 우리 중생은 뿌리는 못보고 겉만 본단 말입니다.

여기 있는 유리컵도 역시 이것은 유리컵인데 유리컵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유리컵을 분석하고 분석하면 한 원소(元素)로 될 것입니다. 저 끝에 가서는 결국은 하나의 초소입자(超素粒子)가되어서 우리가 무엇인가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나중에 가서는 텅 비어서 하나의 장(場) 에너지(energy)뿐이다. 물질(物質)도 뭣도 아닌 즉 말하자면 열량(熱量)도 질량(質量)도 없는 무엇인가 되어 버린단 말입니다.

우주(宇宙)란 것은 즉 물리학자(物理學者)의 연구(硏究) 결과에 따르면 무엇인가 모르는 하나의 생명(生命)이 가득 차 있다고 합니다. 우주는 이른바 장 에너지입니다.

전자기(電磁氣)의 그런 힘을 갖는 하나의 장 에너지가 우주에 가득히 있습니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가 다 분석하고 분석하면 내내야 근본은 그와 같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그걸 못 보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 불성(佛性)은 그런 장(場) 에너지나 또는 무엇보다도 어떤 것보다도 가장 근원적(根源的)인 순수(純粹)한 생명(生命)입니다.

하나의 소립자(素粒子)나 양성자(陽性子)나 중성자(中性子)나 어떠한 것이나

근본 바탕은 불성(佛性)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불성(佛性) 바탕 위에서 불성이 어떻게 운동(運動)하는가 어떻게 진동(振動)하는가 그것 따라서 이제 무엇 되고 무엇 되고 합니다.

모두가 다 불성으로 되었거니 우리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 불성(佛性) 아닌 것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 중생(衆生)은 업장(業障)에 가려서 보는 것이 투철(透徹)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와 같이 본바탕,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용(用)만 보고 상(相)만 볼뿐, 체(體)나 근본성품(根本性品)은 못 봅니다.

성자(聖者)와 범부(凡夫)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성자는 그러한 체(體)와 성(性)을 보는 것이고, 우리 중생(衆生)은 상(相)과 용(用)만 현상(現象)만 보는 것입니다.

헌데 그 계율(戒律)을 지키는 것은 천지우주(天地宇宙)의 그런 체(體)를 말하자면 성품(性品)에 따르는 인간적(人間的)인 행동(行動) 이것이 계율(戒律)입니다. 불성이나 또는 법성이나 그런 우주의 성품에 따르는 인간적인 행위 인간적인 사회적인 행위가 이것이 계율입니다.

따라서 계율을 지키면 사람끼리 서로 사귀기가 좋고, 남한테 잘 보시(布施)도 하고 거짓말 않고 그러면 사이가 좋겠죠. 그런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본 성품에 따르기 때문에 그때는 우리 마음이 차근차근 정화(淨化)가되어서 그때는 본 성품 즉 불성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삼귀의(三歸依)는 어떠한 공덕(功德)이 있는가 하면, 앞서 말씀과 같이 부처님 믿고, 부처님 법(法)따르고, 우리가 같이 사부대중을 숭상하고, 그러면 그때는 우리 눈에 보이는 복도 많지만 안 보이는 복도 많습니다.

불교에서 보면 삼보(三寶)에 귀의(歸依)함으로 인해서 36부 신장(神將)이라, 신장 그러면 우리 눈에 안보이므로 감(感)이 잡히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신장들이 있는 것입니다.

산(山)도 또는 냇물(河)도 모두가 다 부처님 불성(佛性)으로부터 이루어졌습니다.

불성은 하나의 생명(生命)이거니, 산(山) 거기에도 생명이 담겨 있고, 물 가운데도 생명은 담겨있는 것이고, 하나의 티끌 가운데도 어디에나 생명이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산(山)에 담겨있는 생명이 산신(山神) 아닙니까. 물에 담겨있는 생명이 용왕(龍王)입니다. 나무에 담겨 있는 생명이 목신(木神)입니다. 이와 같은 몸뚱이에 담겨 있는 이것이 이제 나다 너다 하는 자기생명(自己生命) 즉 마음 아닙니까.

이와 같이 불성(佛性)이라 하는 것은 어디에 담겨 있다하더라도 불성 자체는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수분(水分)이란 것은 구름이 되나 또는 물방울이 되나 또는 수증기가 되나 똑같이 수소 둘 산소 하나 입니다. 그와 같은 이치(理致)로 해서 불성 이것은 원자(原子) 가운데 있으나 티끌 가운데 있으나 사람 가운데 있으나 어디에 있으나 똑 같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산이 있으면 산신이 있는 것이고, 나무가 있으면 목신(木神)이 있는 것이고, 또 우리 인간(人間) 보다도 더 정도가 높은 그런 천상(天上)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생은 못 봅니다. 못 보기 때문에 부인(否認)합니다.

불경(佛經)중에서 아함경(阿含經)이나 원시경전(原始經典)을 보면 그런 28천(天) 이나 또는 33천이나 천상세계(天上世界)를 말한 것이 비일비재(非一非再) 하지만 지금 사람들은 그렇게 안보이니까 부인을 합니다. 그것도 하나의 방편(方便)이겠지 합니다.

우리는 우리 인간(人間)의 안목(眼目)이 얼마나 제한(制限) 되어 있는가.

우리 제한된 안목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많이 배웠다 하더라도 인간의 그런 심식(心識), 인간의 그런 분별의식(分別意識)을 못 떠나면 근본(根本)을 모르는 것입니다.

성자(聖子)는 어떠한 존재(存在)인가하면 인간들이 분별시비(分別是非)하는 상대 유한적(相對有限的)인 의식(意識)을 떠나서 근본 모든 성품(性品)을 다 아는 지혜(智慧)를 갖추어야 성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자가 미처 못되면 현상 밖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안 보이는 것은 부인합니다. 부인하나 우리는 불교를 믿고 있기 때문에 안 보인다 하더라도 부처님 말씀 따라서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36부 신장(神將)이라, 천지 우주에는 무수(無數)한 신장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 수(數)보다 더 훨씬 헤아릴 수 없는 그런 신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천지 우주의 근본 진리(眞理)인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 법(法)을 믿고, 또는 부처님 법 따라서 여실히 행동하는 그런 분들은 숭앙(崇仰)하고 사귄다고 생각할 때는 36부 신장이 우리를 항상 지키고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이 몸뚱이가 가려서 인간의식(人間意識) 이외는 못 봅니다. 닦아서 성자가 되면 모르거니와 성자가 못되어 놓으면 이 몸 무명에 가려서 못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어서 귀신(鬼神)이 되면 그때는 별로 고급신(高級神)이 아니라 하더라도 몸뚱이가 없으므로 약간은 더 보인단 말입니다.

 따라서 의생신(意生身)이라. 뜻의(意)자 날생(生)자 몸신(身)자입니다. 이것도 역시 외워두면 좋습니다. 이것은 자기의 뜻대로 자기 마음대로 태어나는 것이 의생신입니다. 우리 몸뚱이가 한번 성형(成形)되어 놓으면 마음대로 못 태어나지만, 귀신만 되어도 이런 몸이 없으므로 귀신이 업장(業障)에 가려서 일체를 몰라서 그렇지 내가 어디 가고 싶다 그와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이 정말로 간절하면 거기에 금방 태어나옵니다.

귀신이 안 되고 참다운 보살(菩薩)이 되어서 보살지위(菩薩地位)에 오르면 그때는 이렇게 사람 몸이 있는 체로 수온수신(受蘊受身)이라, 자기 원대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귀신도 역시 미처 법이 안 높고 또는 번뇌(煩惱)는 우리 인간과 같이 그렇게 아직은 다 못 벗었다 하더라도, 몸이 없어놔서 의생신(意生身)이라, 자기 뜻대로 태어납니다.

36부 신장이 이제 삼보(三寶)만 지키면 우리들을 가호(加護)하고, 또는 다섯 가지 계(戒),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살생(殺生)하지 말라, 훔치지 말라, 또는 삿된 음란(淫亂)한 짓 하지 말라, 거짓말 욕설(辱說) 이간질하는 말 꾸며서 하는 말하지 말라, 술 먹지 말라,

이것이 오계(五戒) 아닙니까.

5계를 지키면 하나의 계마다, 살생이면 불살생계, 계(戒) 하나마다 5부신이 지켜서 5x5=25, 25선신(善神)들이 우리를 지켜줍니다.

부처님 말씀은 방편(方便)으로 그냥 거짓말을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인간은 우리가 눈에 안 보이는 것을 부인합니다마는 안 보이는 세계가 훨씬 더 광대무변(廣大無邊)한 것입니다. 세계(世界)는 우리 지구(地球)만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태양계(太陽系) 은하계 (銀河系)와 같은 그런 천체(天體)도 한도 끝도 없이 많습니다. 이른바 무변무량(無邊無量)이란 말입니다. 무변무량 그런 세계에서는 인간 존재(存在) 이외에도 모든 생명적(生命的)인 존재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삼보(三寶)에 귀의(歸依)하고, 오계(五戒)를 지키면 그걸로 해서 앞서 말씀과 같이 삼보로 해서 36부신장, 5계로 해서 25선신이 이렇게 우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지키고 있으니 계행 지키기가 쉽고, 이와 같이 가피(加被)가 있으니 쉽습니다.

따라서 불법(佛法) 밝히기가 참 쉽단 말입니다.


-. 만선동귀(萬善同歸) [3]

우리는 참선(參禪) 염불(念佛)하면 다 된다 이렇게 말합니다만

물론 안하는 것 보다야 낫습니다. 그것이 계행(戒行)을 지키는 바탕이 서야 그래야 잘 됩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계율(戒律), 이것은 모두가 다 우리 법성(法性)에 따르는 불성(佛性)에 따르는 하나의 행동이기 때문에 불성에 순종(順從)하는, 어려운 말로 하면 불성에 수순(隨順)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계행을 지키면 그냥 즉시에 그와 동시에 바로 우리 마음은 정화(淨化)되어 옵니다. 분명히 마음과 몸은 둘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衆生)은 마음을 못 보니까 이제 몸만 있다.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하지마는

사실 몸이라는 것은 마음의 그런 생명(生命)의 체(體)위에서 이루어지는, 마음을 핵(核)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세포(細胞)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선 계행 지키기가 쉽다하는 그런 관념(觀念)을 명확히 가져야 합니다.

그런 계행 지키면 그냥 즉시에 그와 같이 무수한 신장이 우리를 돕고 동시에 우리 마음은 그만큼 불성(佛性)과 우리 본래성품(本來性品)에로 접근되어 갑니다.

일거양득(一擧兩得)인 것입니다. 허나 계행을 지키고, 남에게 얼마간 보시(布施)한다 하더라도 근본을 모르면 별로 공덕(功德)이 크지 않습니다.

이른바 불교(佛敎) 말로 하면 상(相)이 있는 상을 못 떠나는 그런 선행(善行)은 공덕이 적습니다. 불교 이것은 참다운 것은 상을 떠나서 있는 것입니다. 즉 말하자면 내가 뭘 했다 하는 나와 남을 구분(區分)하는 상을 못 떠나면 참다운 선행이 못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것은 성불(成佛)하는 일도 못되는 것이고, 또는 극락(極樂)가는 씨앗도 못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행(善行)은 선행이기 때문에 그만큼 복(福)이 되어서 이제 죽어지면 다시 부자로 태어나고 또는 벼슬도 오르곤 합니다.

그러나 해탈(解脫)의 길! 영생(永生)으로 가는 길은 그렇게 상을 두면 도움을 별로 못 보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근본을 보는 것인가?

근본을 보는 것은 참 쉬운 것입니다. 계행 지키기도 쉽고, 술 먹기보다 안 먹기가 더 쉽고,

죽이기보다도 안 죽이는 것이 더 쉽듯이 우리가 근본을 안보는 것보다 역시 근본을 보는 것이 훨씬 쉬운 것입니다. 근본을 봐 놓으면 삶의 길이 별로 막히지가 않습니다.

앞서 어느 처소(處所)에서 저한테 '우리 인생(人生)이 어디로 가는지 잘 모르고 삽니다.

인생의 가치(價値)가 무엇인지 모르고 삽니다.' 이와 같이 점잖은 분이 호소를 했단 말입니다. 내 생명(生命)의 뿌리는 대체로 무엇인가? 내가 지금 서있는 자리는 어떠한 자리인가?

불교에서 부처님 말씀이나 도인(道人)들 말씀에 조고각하(照顧脚下)라! 비칠 조(照)자 돌아볼 고(顧)자 발각(脚)자 아래 하(下)자,

발 뿌리를 보라, 발 뿌리를 보란 말은 "내가 무엇인가 알아라" 그 말과 같겠지요.

'나'라는 존재(存在)가 어떤 존재냐는 말입니다.

사회적(社會的)으로 역사적(歷史的)으로 어떠한 존재인가?

지금 어떠한 입장인가? ‘이것이 조고각하라 '이 발 뿌리를 보라' 그런 의미입니다.

너의 생명의 뿌리가 무엇이며 내 생명은 어디로 가는 것인가?

바쁘기도 하고 짝 없이 소란스럽습니다마는 이걸 모르면 근본을 모르고 말겠지요.

사회(社會)가 혼란스러운 것은 여러 가지 원인(原因)이 많이 있고, 가지가지 이유(理由)가 있겠지요. 정부(政府)가 잘못도 하고 누가 잘못도 하고 정치인(政治人)의 허물도 있고,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잘못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 중생들이 자기 발 뿌리를 잘 못 본단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자기근본(自己根本)을 모른단 말입니다.

자기 근본이 내내야 불성(佛性), 도(道), 진여(眞如), 열반(涅槃), 극락(極樂), 여래(如來), 이렇게 표현되는 이것이 우리 근본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이것을 모르면 항시 헤매는 것이고 자기 개인(個人)도 불안스럽고 가정(家庭)도 불안스럽고 사회(社會)나 나라도 바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根本)에 입각하면 가장 쉬운 것입니다. 별로 어렵지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근본을 볼 것인가? 근본을 보는 것도 어려우면 우리가 갈 수가 없겠지요?

우리가 전문적(專門的)인 스님들만 하고 일반 사람들이 못하면 그것도 별로 가치(價値)가없습니다. 그러나 근본을 보는 것도 굉장히 쉽단 말입니다. 참선(參禪) 염불(念佛)이 근본을 보는 길입니다. 참선하고 염불을 하는 것이 근본을 보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을 어떻게 하는 것인가?

우리 마음이 좋다 궂다, 밉다 예쁘다, 이와 같이 흩어지면 우리 마음도 괴롭습니다.

우리 마음이 복잡해 보십시오. 산란스러우면 결국은 마음이 괴롭고 동시에 몸도 아프단 말입니다. 마음이 가지런히 하나로 딱 모아지면 마치 잠자는 잔잔한 파도(波濤) 모양으로 됩니다.

아! 그전에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원교대사(원교大師)에게 - 원교대사는 국사의 법우(法友)인데 - 자기 법우한테 한 말이 있단 말입니다. '그대 마음을 산심(散心)에서 정심(定心)으로 돌이켜라!' 그대 마음을 산심에서 정심으로 돌이켜서 마치 잔 푸른 파도 모양으로

잔잔한 마음을 만들어라. 그러면 만상(萬象)의 진(眞)모습은 참모습은 거기에 비춰올 것이다. 이와 같이 말씀했단 말입니다.

그 분 뿐만 아니라, 어떤 누구나 도인(道人)들은 보통 그와 비슷한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 마음이 산란스러우면 마음이 내내야 흩어져서 산심(散心)아닙니까.

안정(安定)된 고요한 그때는 이제 선정(禪定)에 들어간 정심(定心)입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는 산심 정심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분별시비(分別是非)하는 흩어진 마음이 산심인 것이고, 우리 마음이 그런 어지러움을 거두어서 하나로 딱 모아지는 마음,

이 마음이 정심입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면 그때는 눈도 밝아지고 머리도 시원합니다. 사실 굉장히 좋은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익혀지고 익혀지면 결국은 부처님한테 걸음걸음 다가간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때는 우리 근본을 보는 것입니다.

불교를 믿든 안 믿든 간에 우리 인간이라는 것은 본래종자(本來種子)가 불성(佛性)입니다.

그리고 잘나나 못나나 사람이나 개나 돼지나 다 근본 종자는 불성입니다. 근본 종자는 불성이기 때문에 우리가 종당(終當)에 가는 길도 불성까지 가버려야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고향(故鄕)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고향은 내내야 불성인 것입니다.

따라서 불성까지 못 가면 결국은 몇 만 생(生)을 그때는 우리가 헤맨단 말입니다.

그래서 법화경(法華經)에 보면 우리 인간을 가리켜서 면전궁자(面前窮子)라, 마치 갈 길도 모르고 자기 집도 없이 그저 항시 비렁뱅이로 헤매는 그런 거지와 같단 말입니다.

고대광실(高臺廣室) 높은 집이 있고 제아무리 지위(地位)가 높다 하더라도

근본을 모르는 사람은 앞서 비렁뱅이와 똑 같습니다.

어디로 갈 곳을 모른단 말입니다. 그런 것을 몰라버리면 결국 죽어지면 자기 업장(業障)에 그때는 구속(拘束)되어서 자기 지은 대로 자기 몸을 받고 만단 말입니다.

기세경(起世經)이란, 일어날 기(起)자 일어날 세(世)자 기세경이란 경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어지면 염라대왕(閻羅大王)이 아주 자비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그 죽어서 온 영혼(靈魂)한테 '그대가 내가 보낸 세 사람의 천사(天使)를 보았는가?'

이렇게 묻는단 말입니다.

그때 염라대왕이 하는 말은 '내가 보낸 천사는 다름이 아니라 그대의 노병사(老病死), 그대의 늙음과 병과 죽음, 이와 같은 세 사람의 천사를 못 보았는가?'

우리 사람들이 한번 태어나면 병 안 들고, 늙지 않고, 죽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연륜(年輪)을 그냥 먹는 것이 되서는 안 됩니다. 주름살이 하나 늘어나면 하나 늘은 만큼 성숙해야 합니다. 있는 것은 반드시 멸하는 것이고,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이라, 모두가 다 무상(無常)한 것인데 우리는 가히 늙어갈 때 아파올 때 우리가 반성(反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경각심(警覺心)을 일으키므로 그것이 결국은 우리의 귀중한 스승이란 말입니다. 우리의 천사(天使)입니다.

우리한테 인생을 바로 가라. 인생의 근본을 찾아라. 이와 같이 우리를 경각(警覺)시키는 천사가 이것이 이제 죽음이요 이것이 이제 늙음이요 병인데 그걸 못 본단 말입니다.


-. 만선동귀(萬善同歸) [4]

앞서 말씀과 같이 우리가 근본을 보는 것이 이것이 참선(參禪) 염불(念佛) 아닙니까.

참선을 어떻게 하는가 하면 산란심(散亂心) 산란스러운 마음을 거두어서 고요한 마음으로 돌이킨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마음을 먹지만 산란심을 우리가 멈추려고 마음먹으면 더욱 일어납니다. 자기가 의식적으로 산란심을 멈추려고 애쓰면 더욱 일어나서 멈출 수가 없기 때문에 그 방편(方便)으로 이제 화두(話頭)를 들어라, 염불(念佛)을 하라,

또는 주문(呪文)을 외워라 합니다.


화두나 또는 염불이나 주문이나 모두가 다 그것대로 가치가 있습니다마는 따지고 보면 결국은 우리 중생을 산란심(散亂心)으로 부터 해탈(解脫)로 가는 즉 말하자면 하나의 안내인입니다.

저희들이 이렇게 참선을 해보면, 화두를 들고서 이제 가만히 공부해 보면 말입니다.

선방(禪房)에 가만있으면 맨 처음은 자꾸만 생각이 한없이 많이 나옵니다.

금생(今生)에 지은 여러 가지 경험도 많이 있고 전생(前生)에도 많이 있고, 금생에 배우고 또는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이것이 모두가 다 잠재의식(潛在意識)에 꽉 들어 있단 말입니다. 이것들이 가만히 좌선하고 있으면 자꾸 나옵니다. 우리가 행동하면 그때는 안 나오지만 가만히 있으면 더욱 더 발동(發動)해서 맘속에서 나온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것들을 우리가 싸워서 이기기 위해서 앞서 말씀과 같이 화두를 들고서 우리가 염불도 하고 또는 주문도 외웁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하루 하면 하루 한만큼 이틀 하면 이틀 한만큼 그때는 산란스러운 마음이 잠잠해 집니다.

맨 처음에는 열이 올라와서 뜨겁고 하다가도 차근차근 그때는 정화가 되면

몸도 시원하고 가슴도 시원합니다. 나중에는 마치 하늘로 떠오르는 그런 기분도 생깁니다.

극락세계(極樂世界)에 대해서 풀이한 법문을 보면 - 극락세계 중생의 몸은 어떤 몸인고 하면 무극허무신(無極虛無身)이라! 없을무(無)자, 다할극(極)자, 빌허(虛)자, 없을무(無)자, 몸신(身)자입니다. 무슨 물질(物質)이나 무슨 질료(質料)가 없이 텅 비워있단 말입니다.

극락세계에 있는 중생은 그와 같이 어디에 물질적(物質的)인 그런 어떤 질료가 없이 텅 비워있습니다.

 그러면 극락(極樂)은 우리가 죽어서 저만큼 올라가야만 극락이 있는 것인가? 공부를 하다보면 그렇지 않다고 느껴지거든요. 어떻게 느껴지는가?

방금 제 말씀과 같이 참선이나 염불이나 주문이나 애쓰고 하여튼 하다보면

차근차근 그때는 가슴도 맑아지고 눈도 맑아지고 머리도 시원합니다.

잠도 끊어지고 그야말로 무슨 음식(飮食)도 생각이 안 나고 말입니다.

그래서 끄트머리까지는 다 못 갔다 하더라도 이렇게 되면 결국 텅 비워버렸겠구나,

도인(道人)들은 그야말로 참 텅 빈 분이 아닙니까.

마음이 텅 비어서 우주(宇宙)와 하나가 되어버립니다.

몸도 그때는 그야말로 자기 몸이란 생각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몸과 마음이 텅 비어서 내 것이란 마음이 없습니다.

우주와 내가 둘이 아니구나. 그리고 보면 결국은 무극허무지신(無極虛無之身)이라.

극락(極樂)에 애쓰고 안 가도 이 자리가 바로 극락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깨닫고 못 깨닫고, 우리 마음이나 몸이 정화가 되고 안 되고, 그 차이 뿐인 것이지 멀고 가까이 있는 그런 차이가 아닙니다. 이럴 때의 행복(幸福)이나 그런 기분(氣分)은 뭐로 비교하겠습니까. 오직 하면 부처님을 환희광불(歡喜光佛)이라! 환희는 기쁨 아닙니까.

부처님은 환희광불이라, 기쁨으로 행복으로 충만(充滿)해 있습니다. 부처님이라는 것은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다만 중생(衆生)이 잘 못 가서 천지(天地) 우주(宇宙)의 진리(眞理)에 어긋난 짓을 하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가 고생을 받는 것이지

결국 도리(道理)만 맞추어서 계행(戒行)지키고 참선(參禪)하고, 염불(念佛)하면 차근차근 가벼워 옵니다. 가벼워서 그때는 살아있는 이대로 이 자리에 선체로 텅 비어서 우주와 나와 하나가 되어서 무극허무지신 또는 극락세계(極樂世界)가 정말로 되어 버립니다.

우리 중생은 정유리무(情有理無)라!

뜻 정(情)자, 있을 유(有)자, 다스릴 리(理)자, 없을 무(無)자입니다.

우리 범부(凡夫)의 뜻에는 있지만은, 이무(理無)라 근본적인 불성 원리(原理)에는 없습니다.

가사 불성(佛性)이나 진여(眞如)나 여래(如來)나 그런 것은 우리 중생을 떠나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중생은 그 근본을 모른단 말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정유리무라, 우리 중생이 아는 것은 우리가 보는 이것 밖에는 모르는 것이고 근본 이(理)을 모릅니다.

우리는 그와 같이 우리가 아는 것에 대해서 금생(今生)동안에 많이 배우기도 하고 경험(經驗)도 하고 그런 아주 그야말로 훌륭한 경륜(經綸)을 쌓고 높은 지위(地位)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망령(妄靈)된 의식(意識) 범부식(凡夫識)이 딱 끊어져서, 본래 불성심(佛性心)이 계발(啓發)이 못되면 아는 것이 그때는 정유리무(情有理無)입니다.

우리 범부의 망정(妄情)으로 아는 것뿐이지 결국은 원리(原理)를 모릅니다.

원리에 가서는 하나가 되기 때문에 원리를 모를 때는 내 것 네 것 또는 내 당(黨) 네 당 내 의견(意見) 네 의견, 그때는 우리가 안착(安着)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이 우리 불가(佛家) 뿐만 아니라 어떠한 사회(社會)에나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여러 가지 무슨 운동(運動)도 있고 별스러운 캠페인도 있곤 합니다만 결국은 근원적(根源的)인 해결은 역시 우리 중생(衆生)이 - 근본적인 원리(原理)가 내내야 진여불성(眞如佛性) 아닙니까.- 진여불성 여기까지 갈려고 애쓰고, 여기까지 가버려야 해결되는 것이지 그렇기 전에는 인류사회(人類社會)의 해악(害惡)은 영원히 면할 수가 없습니다.

시간이 자꾸만 가므로 말을 더욱 간추려서 하고자 합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견해는 모두가 다 고공무상무아(苦空無常無我)라!

모두가 다 허무하고 또는 텅 빈 것입니다. 예쁘다 밉다, 좋다 궂다, 내 얼굴이다 네 얼굴이다 하지만 결국은 우리 중생이 보아서 나다 너다 예쁘다 밉다 하는 것이지 근본 이(理) 에서 보면 그런 것이 없습니다.

일체만유(一切萬有)가 원소(元素)로 되었거니 원소 차원(次元)에서 보면 그때는 원소뿐입니다. 일체만유가 그보다 더 미세한 소립자(素粒子)로 되었거니 소립자에서 보면 그때는 모두가 다 천지우주(天地宇宙)가 소립자뿐입니다. 즉 공무변처(空無邊處)라! 공무변처에 있는 그런 중생이 본다면 천지 우주는 텅텅 비워져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보실 때는 천지우주가 모두가 불성(佛性) 뿐인 것입니다. 부처님이 보는 견해가 모든 번뇌(煩惱)를 다 떼어버리고서 참다운 실상(實相)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가상(假相) 밖에는 못 보는 것입니다. 즉 말하자면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정유리무(情有理無)라,

우리 중생의 망정에서 나다 너다 밉다 곱다 하는 것이지 우리 중생은 바로 못 봅니다.

우리 불교 신앙(信仰)은 어떤 것인가? 내가 지금 보는 것은 허망(虛妄)된 것이고 부처님이 보는 견해가 옳다. 이렇게 믿어야 그래야 불교의 옳은 신앙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견해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현상계(現象界) 이것은 다 모두가 무상(無常)합니다. 항상(恒常)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상(無常) 그러면 슬프다 하고서 염세적(厭世的)인 그런 말씀들을 많이 합니다마는 무상 이것은 염세적인 그런 무상이 아니라,

우주(宇宙)의 실상(實相)이 바로 무상(無常)이란 말입니다. 어떠한 생명이 있는 것은 다만 한시도 1초의 몇 백만 분의 1에도 머물지가 않습니다. 있는 모든 것은 과정(過程)에 불과합니다. 시시각각으로 변동(變動)만이 있는 것입니다.

무상(無常) 이것은 불교 말로 하면 불교 의미로 하면 일기무상(一期無常)이라!

사람같이 이렇게 한평생 앉아 있다가 살다가 가는 것 이것이 일기무상이라,

또는 찰나무상(刹那無常)이라 찰나 찰나도 우리 생명(生命)이 머물지가 않습니다.

찰나 찰나에 우리가 변화(變化)하는 것인데 다만 변(變)하는 그것이 계속(繼續)되기 때문에 내가 있다 네가 있다 그럽니다.

영사막(映寫幕)에 비친 하나의 모습을 보십시오.

필름(film)이 이렇게 계속해서 운동하므로 이렇게 이어지는 것이지 필름이 가만히 정지해 있으면 그때는 아무것도 안됩니다. 인간(人間) 역시 하나의 세포(細胞)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나라는 이런 모양이 느껴지는 것이지 움직이는 그것만 생각할 때는 그때는 하나의 과정(過程) 뿐인 것이지 실체(實體)가 아니란 말입니다.

가상(假相)이요. 이것이 과정에 불과한 것인데 우리 중생은 이렇게 계속하는 이것만 보고 그 본질(本質)은 못 보므로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내 몸이라고 해서 귀엽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원소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아무리 미인(美人)도 뻥뻥 구멍 뚫린 하나의 곰보로 보인단 말입니다. 얼망이 같이 보이는 이것이 하나의 우리 몸뚱이 세포(細胞)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몸 가운데도 털구멍이 8만 4천이라, 아마 현미경(顯微鏡)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털구멍도 그야말로 참 굉장히 크게 보일 것입니다. 그런 굉장히 크게 보이는 구멍이 얼굴에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미인(美人)인가 아닌가 말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도 인간(人間)이라고 하는 제한(制限)된 안목(眼目)으로 보는 것이므로 이제 밉다 곱다 사람이다 하는 것입니다. 찰나, 찰나 순간순간 우리 생명(生命)은 차근차근 죽어지고 다시 태어나오곤 합니다. 세포(細胞)가 말입니다.

다만 계속해서 운동(運動)하기 때문에 이것이 일정한 것이 있다는 것인데, 일정한 한동안도 역시 생명이 50년 몇 십 년 살 때뿐인 것이지 죽어지면 무엇이 남습니까?

따라서 무상(無常)이다. 일기무상(一期無常)이다. 한 평생 동안 이것도 역시 무상이고, 한 평생이 아니라 순간순간 찰나찰나 이것도 무상입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할 때는 '나'라고 고집(固執)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겉만 보고 과정(過程)을 못 보므로 우리가 모른 것이지 이런 과정을 찰나, 찰나 변(變)하는 것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나'라고 고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무상(無常)이요. 또는 공(空)이요. 찰나, 찰나 변(變)하기 때문에 그 존재(存在)는 어떠한 순간(瞬間)도 어느 공간(空間)동안에도 일정한 모습이 없습니다.

과거(過去)는 벌써 변(變)해버려서 과거에 있던 내 몸은 지금 벌써 모양도 없고, 현재(現在)는 순간순간 찰나찰나 무상하기 때문에 변화 그것뿐이고, 미래(未來) 역시 아직은 오지도 않았습니다. 과거는 변해버려서 사멸(死滅)되어서 죽어서 없어져버렸고, 현재는 순간도 변함없이 그때는 움직이고 있고, 미래는 아직 안 오고, 어디 가서 어떤 물건이 공간성(空間性)을 띌 수가 있습니까.

사람뿐만 아니라 어떤 것이나 모두가 다 각원소로 구성되어 있거니 어떤 것도 원소 활동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순간순간 변하고 있습니다. 변하는 이것은 어떠한 순간도 일정한 모습으로 해서 공간성(空間性)을 띌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바로 보면 모든 것은 결국은 무상(無常)인 동시에 공(空)인 것입니다. 불교(佛敎)의 무상(無常) 공(空) 이것은 다만 허무(虛無)한 가운데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물리학적(物理學的)인 객관적(客觀的)으로 엄격히 볼 때에 사실은 모두는 찰나적으로 무상인 것이고 모두는 텅 빈 것입니다. 그러기에 무상(無常)하며 텅 빈 것이기에 '나'라고 고집(固執)할 것이 없습니다. 고공무상무아(苦空無常無我)라!

이와 같이 다 무상하고 '나'라고 고집(固執)할 것이 없고 텅 빈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고통(苦痛)뿐입니다.

우리 중생은 이것을 모르기에 고집한데서 고통이 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중생이 무상하고 또는 텅 비고 '나'라는 것을 잡을 수가 없고, 이렇게 허상(虛像)이기 때문에 이런 것을 이제 잡으려고 들면 결국 고통이 온단 말입니다. 잡았다 해도 허상이기 때문에 잡히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안 늙을 수가 없고, 안 죽을 수가 없고, 헤어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고생뿐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 인간이 고생뿐이고 허망하고 또는 무상하고 그렇다면 결국 사람은 살 필요가 없습니다. 죽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무상관(無常觀)이라, 허망(虛妄)하다 또는 허무(虛無)하다

이런 공부만한 사람들은 몇 십 명 집단적으로 죽어버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텅 비고 무상(無常)하고 다 무아(無我)고 내가 없고 하는 것은 이것은 다만 하나의 소승적(小乘的)인, 차원(次元)이 낮은 공부입니다.


-. 만선동귀(萬善同歸) [5]

참다운 불법(佛法)의 대요는 이러한 무상하고 또는 텅 비고 또는 내가 없고,

이런 걸 떠나서 영생적(永生的)인 영생하는 그런 생명(生命)이 있단 말입니다.

모양이사 몇 천 번 바꾸거나 말거나 영생(永生)의 생명(生命)이 있습니다.

이것 보고 항상 상(常)자 상(常)그럽니다. 항시 존재(存在)합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상주부동(常住不動)이라 이와 같이 항시 존재하고, 또는 낙(樂)이라 즐거울 락(樂)자 영원(永遠)한 행복(幸福)이 거기에 항시 있습니다.

앞서 제가 말씀드린 환희장불(歡喜藏佛)이라! 환희심(歡喜心)이 충만(充滿)한 행복(幸福)이 항시 있습니다. 변함도 없고 또는 대아(大我)라 그러나 우리같이 하나의 제한(制限)된 '나'가 아니라 천지우주(天地宇宙)를 집으로 하는 '참나'가 있습니다.

천지우주를 집으로 하는 ‘참나’를 잡아놓고 생각 할 때는 너도 역시 내 안에 들어 있고, 모두가 그때는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조(馬祖)스님한테 어느 분이 가서 '어떠한 것이 부처의 참다운 도리(道理)입니까?' 물으니 일구흡진서강수(一口吸盡西江水)하라! 즉, 한 입으로 양자강(揚子江) 물을 다 들어 마셔라, 한 입으로 양자강 물을 다 들이키면 그때 말을 해주리라.

양자강이 얼마나 큽니까? 양자강 물을 한 입에 들이킬 수가 있습니까?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면 그 사람 포부가 나나 내 가족(家族)이나 재산(財産)이나 그런 사사로운 문제가 아니라 천지우주를 몽땅 삼킨다는 말입니다. 우주(宇宙)를 집으로 할 만한, 우주를 나로 할 만한 그런 기개(氣慨)를 가져야 만이 비로소 참다운 도리(道理)를 안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이와 같이 왜소(矮小)하다 하더라도

닦아보면 우리 마음은 갑(甲)한테 있는 마음, 너한테 있는 마음, 석가모니한테 있는 마음, 예수한테 있는 마음, 똑 같은 마음입니다. 석가모니나 예수나 공자나 그 분들은 마음을 확장시켜서 바로 우주(宇宙)가되어 버렸단 말입니다.

어떠한 마음이나 본바탕은 다 우주와 하나가 된 것인데 우리 중생이 다만 그걸 못 느낍니다. 느끼게 하는 것이 앞서 말씀과 같이 참선(參禪) 염불(念佛)입니다.

염불(念佛)도 하다보면 결국은 마음이 차근차근 그때는 넓어 갑니다.

몸도 가벼워 오고 마음이 넓어지면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닌지라 따라서 몸도 가벼워집니다.

저 두순(杜順)스님, 두순 스님하면 저 중국 순(舜)나라 때 분인데, 그분은 화엄종(華嚴宗) 초조 법사입니다. 그분은 염력(念力)이 법력(法力)이 어떻게 강(强)한지라,

그 부처님 도리(道理)에 아주 알맞은 그런 무상법문(無上法門)을 하시니까

무상법문을 듣고서 동시(同時)에 그 스님 염력(念力) 기운(氣運) 따라서

아픈 사람이 절로 나아버린단 말입니다.

물론 인연(因緣)따라서 한계(限界)가 있겠습니다마는 사실 아픈 것도 우리 마음이 핵(核)이고 몸은 거기에 덮어있는 세포(細胞)에 불과하기 때문에 마음 핵심(核心)만 딱 본질(本質)로 나가면 그때는 그냥 웬만한 몸의 갈등은 잡히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무슨 장담한 말도 아닙니다마는 - 저는 지금 부처님 경지(境地)를 갈려면 천리만리(千里萬里)라 한도 끝도 없습니다. - 그래도 역시 내가 몇 년 동안 아프지 않아야 쓰겠구나, 제가 묵언(默言)을 3년 지키기로 맹세했습니다.

역시 말대로 하면 그 3년 동안 제가 감기도 다 안 들었습니다.

이번 3년 결사(結社)동안 사부대중의 힘으로 제가 나기는 낳습니다마는

제 스스로도 역시 이 동안 아프지 않아야 쓰겠구나, 내가 아프면 3년 결사가 깨지겠구나.

'부처님이시여 부사의한 가피를 드리우셔서 제가 3년 동안 아프지 않고 대중을 뒷바라지하게 해주십시오!' 제가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대체 아프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이와 같이 마음과 몸은 둘이 아닙니다.

저같이 이렇게 추하고 못난 사람이 말입니다.

제가 그런 소원(訴願)을 안 세웠더라면 결국은 몇 번이나 감기에 콜록콜록했을 것입니다.

마음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즉 앞서 제 말씀과 같이 대아(大我)라는 아(我)가 들어 있고, 또는 청정(淸淨)하고 조금도 번뇌가 없는 정(淨)이 들어 있고, 우리 불성(佛性)에 들어 있는 참다운 성(性) 공덕(功德)은 상(常)이라 하는 영생(永生)하는 것이고, 또 낙(樂)이라 하는 영원히 안락(安樂)하고 행복스러운 것이고, 또는 대아(大我)라 하는 일체공덕을 다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이와 같이 못난 것이 아닙니다. 겉만 못난 것이지 겉에야 어디 병신이건 말건 마음은 내내야 석가모니와 똑 같은 것입니다. 불교(佛敎)는 이걸 믿는 것입니다.

불교(佛敎)는 이걸 믿고서 그와 같이 광대무변(廣大無邊)한 불성공덕(佛性功德)을 자아내서 우리 스스로 그와 같이 영원한 행복(幸福)을 누리는 것이 불교입니다.

과학적(科學的)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도 앞서 말씀과 같이 무상(無常)하고 공(空)입니다.

또는 '나'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엄밀하게 과학으로 보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세포로 구성되어 있거니 이것이 무슨'나'입니까. 이것이 시시각각으로 다만 몇 초 동안이라도 머물지도 않는 이것이 어떻게 '나'입니까.

내 세포가 다만 일순간도 머물지가 않습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어두워서 변하는 과정을 모른단 말입니다. 이런 것은 참다운 '나'가 못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한테 들어 있는 내 생명의 핵심인 마음 이것은 죽지가 않습니다.

다만 그때그때 행동을 잘못해서 오염(汚染)만 됐을 뿐이지 죽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 주인공(主人公)은 마음입니다. 마음 잘못 쓰므로 사회가 혼란스럽고 나라도 어둡고 자기 개인도 항시 골골하고 항시 마음이 어두운 것입니다.

우리 지금 불교도 18종파나 있고 불교 아니더라도 그냥 거리에 나가면 그야말로 십자가 숲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나라는 대체 어디로 가야 될 것인가?

우리 불교인(佛敎人)도 마땅히 필경 돌아가야 할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더디 가나 늦게 가나 우리가 부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가 못되어서 몇 만생 헤매더라도 역시 부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천지우주가 다 불에 불타 버릴 때는 그때까지는 역시 미처 못 가고 있으면 그 불에 타서 우리가 죽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 몸을 생각을 말고, 자기 가정을 가족을 생각하지 말라는 그런 말씀은 아닙니다. 생각을 애쓰고 한다 하더라도 근본 본질에 비추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천지 우주가 오직 하나 인지라, 아들도 역시 나하고 원래는 하나이구나, 미워도 역시 원래는 하나이구나, 미워도 하나이구나 하면 그때는 벌써 미운 마음이 그만만큼 가십니다.

미운 마음이 다는 없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당히 제감(除減)이 됩니다.

화두(話頭)만 좋아하는 분들 - 화두는 내내야 우리가 큰스님한테 성불(成佛)하는 법(法)으로 해서 받는 그런 문제(問題)가 화두 아닙니까. 어느 분들은 화두만 꼭 해야만 참선(參禪)이다. 염불(念佛)은 큰 공부가 아니다. 이와 같이 말씀한 분도 있습니다.

불상(佛像)을 집에 모신 어떤 보살(菩薩)님은 얌전히 이렇게 모습이 되신 분이고,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님을 애쓰고 하루에 만 번 이 만 번 해 가지고 이십 년간 하신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스님 네 법문을 듣고서 염불(念佛) 그것은 방편법문(方便法門)인 것이고

화두(話頭)를 해야만 참 성불(成佛)을 하는 것이므로 화두를 하십시오.

그래서 그 분도 기왕이면 성불하는데 화두를 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여태까지 행습(行習)이 되어서 염불을 하면 개운하고 몸도 그냥 날을 것 같고, 그와 같이 쾌적하단 말입니다.

그런데 억지로 화두를 했습니다. 결국 아파버렸습니다.

또한 그 반대로 염불 좋아하는 사람들은, 화두해서 몸도 개운하고 벌써 공부가 상당히 됐는데 화두 그것은 괜히 망상(妄想)만 생기고 안 된다. 염불을 해야 한다. 지지리 자기 생리(生理)에도 배이고 심리(心理)에도 배인 화두를 그만두고서 염불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결국은 무리가 생겨서 그때도 역시 병나고 만단 말입니다.

어느 분들은 역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애쓰고 하신 분한테 기왕이면 아미타불(阿彌陀佛)로 하십시오. 몇 년이나 관세음보살 하신분이 아미타불 하기가 쉽겠습니까.

그렇게 서툴게 생각하고 그렇게 원리(原理)을 모른단 말입니다.

그러나 아까 제 말씀과 같이 관세음보살을 하나 아미타불을 하나 또는 하나님을 부르나 무엇을 부르던 간에 내내야 근본 불성(佛性)은 똑같습니다. 근본 불성 이것은 어디가 있으나 하나의 불성입니다. 나한테 있으나 너한테 있으나 또는 다시 바꿔서 말하면 천지우주는 불성 위에서 인연법칙(因緣法則) 따라서 이렇게 되고 저렇게 되고 했을 뿐입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는 불성(佛性)으로 꽉 차 있습니다. 관음보살 하면 불성이 더 줄어지고 아미타불하면 더 늘어나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불성 공덕(功德)이 한없이 많아놔서 불성공덕은 단 하나의 개념(槪念)으로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자비심(慈悲心) 많은 면으로 봐서는 그때는 관세음보살. 지혜(智慧) 많은 걸로 봐서는 문수보살(文殊菩薩),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그와 같이 그때그때 공덕 따라서, 무량공덕(無量功德)인지라 한 마디로 표현을 못하므로 공덕 따라서 이름이 붙여진 것이지 결국 둘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설사 부른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불성에 입각하면 좋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에게 이제 하나님 부르지 말고 부처님 부르십시오. 몇 십년동안 '오, 주여!'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을 고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내용만 부처님은 나한테도 있고 또는 우주(宇宙) 어디에도 있고, 이른바 무소부재(無所不在)라! 어디에나 항시 계신다. 이와 같이 마음 내용만 개념 내용만 바꾸어지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 불러도 됩니다. 이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에 화두(話頭) 좋아한 사람은 화두를 하시는 것이고, 또는 염불(念佛) 좋아하는 사람은 염불하시는 것이고, 어떻게 하던지 간에 그때는 내내야 자기 생리나 자기 심리에 맞게 시리, 우리 마음에 걸음걸음 불성에 접근되면 좋은 것입니다. 


-. 만선동귀(萬善同歸) [6]

부처님을 인격(人格)으로 구하고 싶은 사람들은 그때는 부처님 이름이 좋겠고, 부처님을 하나의 회의적(懷疑的)인 방법으로 구하는 사람은 그때는 화두가 좋습니다.

그런 부처님의 생명(生命) 그대로, 생명의 리듬(rhythm) 그대로 즉, 말하자면 '옴마니 반메흠' 이것은 부처님 생명을 그대로 표현하는 한 가지 리듬인 것입니다.

한번 하면 한번 한만큼 우리 업장(業障)이 녹아지고 불심(佛心)이 깊어집니다.

'옴마니 반메흠'을 우리말로 풀이하면 그 뜻이 하도 심심미묘(甚深微妙)해서 어떻게 할 수가 없으나 ‘금색광명(金色光明)이 찬란한 연화대(蓮華臺) 위에 있는 마니보주(磨尼寶珠)라.'

이렇게 표현도 하고, 또는 가장 간추리면 '아미타불(阿彌陀佛)'로도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 다만 음률(音律)로 표현하면 그때는 '옴~마니 반메흠~'하는 것이고, 또는 어의(語意)로 표현하면 그때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또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입니다.

그러기에 '옴마니 반메흠'을 '관세음보살님의 본심(本心) 미묘진언(微妙眞言)'이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리듬으로 해서 생명 자체를 표현할 때는 '옴마니 반메흠'이고, 어의(語意) 로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입니다.

불교(佛敎)는 결국은 모두가 다 원통불교(圓通佛敎)입니다.

화엄경(華嚴經)이나 무슨 경(經)이나 그와 같이 진리(眞理)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호랭개교'를 부른다 하더라도 그것은 허물이 아닙니다. 다만 그 사람의 마음이 불심에만 입각하면 됩니다. 애쓰고 부른 사람들은 고치려고 하면 고칠 수가 없습니다.

괜히 갈등만 조성하고 맙니다. 다 회통(回通)하고 있는 그와 같이 모두가 체(體)로 해서 아까 말씀마따나 만선동귀(萬善同歸)라! 염불(念佛)을 하나 주문(呪文)을 하나 화두(話頭)를 외이나 하나님을 부르나 결국은 모두가 다 만선(萬善)이 동귀(同歸)라,

그런 만선이 하나의 길로 하나의 법성(法性)의 길로 귀일(歸一)하고 마는 것입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는 바로 부처님이기 때문에 부처님은 모든 중생(衆生)이 다 성불(成佛)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모든 중생이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가 결국은 되는 것이다' 하시고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저 극락세계(極樂世界)에서 우리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허나 인력(引力) 기운(氣運)으로 해서 일반 물질(物質)도 인력으로 해서 다 중심(中心)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부처님이라 하는 우리가 필경 돌아가야 할 구심점(求心点) 이것이 없으면 결국은 우리가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취할 수 없습니다.

불교(佛敎)를 믿든 안 믿든지 간에, 불성(佛性)이나 법성(法性)이나 진여(眞如)나 그런 말로 표현하든 않든 지간에, 모두는 내내야 하나의 진리(眞理)로 다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못 들어가면 결국 고생하고, 우주(宇宙)의 도리(道理)에 안 맞으면 거기서 우리가 벌(罰)을 받는 것입니다. 계행(戒行)지키고 참선(參禪) 염불(念佛)하고 그때는 우리가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합니다. 정말로 계행 지키고 참선을 하나, 화두를 드나, 또는 염불하나 이것은 원래 둘이 아닙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근본(根本)을 못보고 형식(形式)만 보고서 둘이다 셋이다 넷이다 구분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결국 싸우고 말지요.


원통불교(圓通佛敎) 회통불교(會通佛敎) 이것은 부처님의 본뜻인 것입니다.

불교가 천파만파로 구분했다 하더라도 결국은 본체(本體)은 하나입니다.

하나로 뭉치기 위해서는 우선 공부하는 분들이 공부하는 자기 취향 따라서

어떻게 하던지 간에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옴마니 반메흠'을 부르든지 간에 우리 근본 본체자리 근본 성품자리 이 자리에 마음을 둬야 합니다.

그리해 보면 이 자리에 마음을 두기 쉬운 것이고, 부처님 외우는 것이 보통 하기가 제일 쉽습니다. 부처님 법문은 난행문(亂行門) 이행문(易行門)이라!

어려운 문과 쉬운 문이 있습니다만 가장 쉽고도 공덕이 많은 문은 해보면 역시 부처님을 - 어떤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 그 사람 이미지(image)가 떠오르듯이 - 부처님도 부처님 이름을 부르면, 부처님은 체(體)구나, 근본(根本)이구나, 이와 같이 그런 영상(映像)이 떠오른단 말입니다.

따라서 어려운 것은 어려운 대로 해서 또 개성이 맞는 분이 한다 하더라도 쉬우면서 공덕(功德)이 많은 쉬울 이(易)자, 행할 행(行)자, 문문(門)자 이행문(易行門). 어려울 난(難)자, 난행문(難行門)이라. 난행문은 한가하고 그런 사람들이 특수하니 할망정 한가하지 않는 우리 재가(在家) 불자님 들은 쉬우면서 공덕이 많은 문 즉, 말하면 이행문으로 공부할 때 역시 부처님 이름을 외이는 염불(念佛)이 제일 쉽습니다.

우리 마음이 불성(佛性)만 안 여의면 그때는 바로 염불(念佛)이 참선(參禪)이 됩니다.

참선은 이것은 부처님 마음이요, 또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선시불심(禪是佛心)이요. 교시불어(敎是佛語)라!

참선(參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님의 말이요, 계행(戒行) 이것은 부처님의 행동(行動) 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행(行)이 계행(戒行)이고, 부처님의 말이 부처님의 경전(經典)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마음이 참선이기 때문에, 마음이 불심(佛心)만 안 여의면 우리가 염불(念佛)을 하나 주문(呪文)을 하나 화두(話頭)를 하나 모두가 참선(參禪)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원통불교(圓通佛敎)라 하는, 나아가서는 그야말로 참 원통종교(圓通宗敎)라 하는, 우리 대(代)에는 못 본다 하더라도 우리 인간(人間)은 그런 역사적(歷史的) 필연(必然)으로 해서 꼭 하나의 종교(宗敎)가되고 마는 것입니다. 내내야 다 불성(佛性)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뿌리치고 돌아온 고향(故鄕)도 역시 불성(佛性)인 것이고 돌아갈 고향(故鄕)도 역시 불성(佛性)입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무수한 보살(菩薩)들은 우리가 성불(成佛)하기를 지금 고대하고 기다리고 있고 우리가 성불하기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각 성인(聖人)들은 물론 기독교(基督敎)의 목사(牧師), 천주교(天主敎)의 신부(神父) 또는 불교(佛敎)의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또는 마호메트의 여러 성직자(聖職者), 이들 모든 성직자는 모두가 다 각도는 좀 다르다 하더라도 내내야 모두가 성불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루바삐 조금도 치우침 없이 천지우주(天地宇宙)가 오직 불성(佛性)임을, 불성 이것은 청정광명(淸淨光明)이라, 우리 중생(衆生)에는 안 보인다 하더라도 도인은 분명히 보는 청정광명인 것입니다. 청정광명인 그런 생명(生命)이 불성(佛性)인 것입니다.

어떠한 원소(元素)에나 어디에나 다 있는 그런 청정광명(淸淨光明) 생명(生命) 이것은 불성(佛性)인 것입니다. 불성(佛性) 이것은 영생(永生) 합니다.

따라서 염불(念佛)을 하고 또는 참선(參禪)을 하고 화두(話頭)를 외이고 한다 하더라도,

이름만 외워도 좋습니다만 기왕이면 그와 같이 모든 생명(生命)의 뿌리는 다 불성(佛性)이구나, 이와 같이 믿고서 불성의 그런 [생명(生命)의 광명(光明)]을 우리가 상상(想像)하면서 하면 훨씬 더 공덕이 많습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업장(業障)이 정화(淨化)됨에 따라서 불성광명(佛性光明)이 자기한테 걸은 걸음 접근되는 것입니다.

정말로 불성광명이 우리에게 접근이 된다고 할 때는 그때는 마치 아사세왕이 자기 아버지인 부왕(父王)을 죽이고, 자기 어머니를 유해하고 나라를 빼앗아서 그만 온몸에 부스럼이 생겨서 별별스러운 좋은 약으로 치료를 했지만 낫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을 흠모 추구하고 자기가 조금 정화(淨化)가 돼서 부처님의 그런 광명(光明)을 딱 그때는 봤단 말입니다. 부처님의 무량광명(無量光明)을 보는 순간 자기의 그런 몸에 있는 불치(不治)의 부스럼이 낫아 버렸단 말입니다.

기도(祈禱) 모신 분들은 그러한 영험담(靈驗談)을 그런 영험스런 경험을 많이 맛보는 것입니다. 우리한테 있는 불성기운(佛性氣運)은 한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아는(知) 것도 한도 끝도 없고 지혜(智慧)도 한도 끝도 없습니다. 제가 항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무수한 정보(情報), 무수한 가능성(可能性)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록 지금 부자(富者)라 하더라도 권력(權力)이 높다 하더라도 그런 것은 부처님의 지혜로 볼 때는 모두가 다 하나의 갈 길을 몰라서 헤매는 비렁뱅이나 같은 것입니다.

오직 부처님 길을 가는 것만이 그 길만이 인간(人間)의 허무(虛無)한 무상(無常)을 초월(超越)하고 영생(永生)의 행복(幸福)을 무한의 가능(可能)을 계발(啓發)하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생활(現實生活)이 제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우리는 분명히 지향(志向)해 갈 우리가 돌아갈 고향(故鄕)을 우리는 압니다. 불교(佛敎)를 모를 때는 고향(故鄕) 길을 모르는 나그네 같지만, 이제 우리는 고향(故鄕) 길을 압니다.

어떻게 가야 할 것인가?

먼저 청정(淸淨)한 계율(戒律)을 지키고, 철저한 계행(戒行)을 지켜야만 이, 계행은 천지우주(天地宇宙)의 불성(佛性)에 따르는 행동(行動)이기 때문에 계행(戒行) 지켜야만 불성(佛性)에 접근이 됩니다.

계행(戒行)을 지키면서 참선(參禪) 염불(念佛)을 해서 꼭 금생(今生)에 모든 번뇌(煩惱)를 녹이고서 금생에 훨훨 벗어버리는 아까 제가 말씀 드린 무극허무신(無極虛無身)이라!

몸이 있더라도 우리 몸뚱이가 하늘에 있는가? 어디에가 있는가? 내 마음이 한번 이 몸 이대로 하늘로 올라가라하면 하늘로 올라가 버릴 수 있는 그렇게 행복스러운 그렇게 참답게 깨닫는 분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말씀 마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