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3.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마음의 고향

제 7 집 2.동체대비(同體大悲)

마음의 고향 제 7 집


-. 동체대비(同體大悲) [1]

   (미주 불자를 위한 설법 초안)

* 석 청화(釋 淸華) 큰스님께서는 여섯 분의 원로스님과 함께 미주한국불교 사상 처음으로 LA근교 미주금강선원에서 임신(壬申)년 동안거를 결재 용맹정진을 하시고 약 5개월 만에 귀국하시였습니다. 동부지역 순회 법회시 보스톤 범어사에서  설법하신 본 내용은 이미 녹취되어 “미주현대불교”12월호에 “부처님의 가르침은 생명의 원리”라는 제목으로 개재되었습니다 금번 “마음의 고향”미주특집에서는 큰스님의 설법 “초안”을 그대로 옮겨 실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대단히 고생이 많으셨을 것입니다.

정든 고향땅에서도 살림을 꾸리고 살아나가기가 무척 힘 드는 것인데,

멀리 이역만리 생소한 타국에 오셔서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굴욕적이 수모도 많았을 것인데, 언어의 장벽을 비롯한 수많은 역경을 극복하시고 더욱이 선구자적인 우리 스님들과 더불어 부처님 모시는 훌륭한 전당까지 이룩하신데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와 찬탄의 합장을 드립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어느 누구나 다 최선의 행복을 추구하여 마지않는 것인데,

여러분들께서 생소한 타국에 와서 애써 고생하시는 것도 보다 나은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불안한 마음이 없어야 할 것인데, 우리 범부 중생들은 항시 불안한 가운데 조바심하고 고민하면서 가지가지의 불행을 겪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비롯한 과거 많은 성현들이나 모든 철학의 가르침들이 다 한 결같이 우리 인간의 불안의식을 해소하고 인생고를 구제하는데 근본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혼란하고 착잡한 현대 사회에서 바른 가치관을 확립하여

불안한 마음을 없애고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하는 가장 분명하고 투철한 가르침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부처님의 가르침밖에 없다고 단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생활하시는 이 미국은 기독교 나라나 마찬가지입니다만

한국에서 건너오시는 분들이 살아갈 방편 따라 많이들 기독교에 귀의하는 추세인데, 그런 어려운 여건 속에서 여러분들께서 의연하게 불법을 지켜 오신데 대하여 참으로 장하시고 대견스런 일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미국에는 처음이고 온지도 며칠 안 되어서 미국의 복잡한 사정과 어두운 면을 잘 모릅니다. 다만 매스컴을 통하여 그런대로 짐작할 정도이고 아직은 긍정적인 좋은 면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광막한 사막을 개척하여 거대한 도시를 건설한 나성지방,

뉴욕의 어마어마하고 정교하게 건립된 고층빌딩의 숲들을 대할 때 압도당할 정도로 위압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장엄하고 신비로운 나이아가라 폭포, 광활하고 풍요한 미국의 대지에서 과연, 미국의 에너지가 이렇듯 웅대하였기에 세계 최강국이 될 수 있었구나 하고 새삼 감탄을 하였습니다.

사실 외형적인 면만으로 봐서는 부존자원이 너무나 빈약하고 아직도 남북분단의 비극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도저히 따라 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몸 생김새도 우리보다 훨씬 훤칠하게 잘 나 보이고 생활 정도도 몇 갑절 월등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만약 불교를 믿지 않았더라면 좌절감 때문에 미국에서 단 며칠간도 견디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만 다행히도 천상천하에 위없는 삼보(三寶)인 불교를 믿었기에 조금도 열등감이 없이 한국인의 긍지와 사명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물질문명이라 하는 것이 제 아무리 고도로 발달한다 할지라도 도덕과 종교, 철학 등 정신적인 면을 소홀히 하고 다만 현상적인 문제, 곧 세속적이고 물량적인 현실문제에만 치우칠 때는 그 물질문명 자체의 가는 길이 절대로 순탄할 수가 없을 뿐 아니라 필경에는 퇴폐 타락하여 멸망을 초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을 두고 재물과 영토의 쟁탈을 위하여 반목과 분열과 전쟁과 멸망으로 얼룩진 처참한 인류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 아닙니까.

옛날 영화를 자랑하던 이집트 문명도, 그리스나 로마 문명도 오래가지 못했고, 일차대전, 이차대전도 20세기에 와서 피비린 냉전도 다 같이 상처만 입고 허무하게 끝나지 않았습니까.

역사 이래 우리 인간은 인생의 가치와 자기 삶에 대한 향방을 모르기 때문에 원시공산시대도 거치고 중세 암흑시대도 경험하고 자본주의시대, 공산주의시대 등 수많은 경험과 시련을 겪어 왔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실패로 끝나지 않았습니까.

특히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시정하고 척결하는 명분으로 혁명을 일으킨 것인데 그 종주국인 소련에서 74년간이나 통제하고 탄압하고 하여 별 짓을 다 했지만 결국 지탱하지 못하고 추악하게 붕괴된 것을 보십시오.

그렇다면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를 대신하는 가장 현명한 최선의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적어도 온전한 대안이 될 수는 없습니다. 자본주의가 자유 민주와 시장경제 등 좋은 점도 많으나 결국 자본증식과 물량위주로 치닫게 되어 필경 심각한 계급분열과 부정부패한 사회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이란 한 세상 살다 가는 무상한 나그네길인데 "우리는 대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그리고 우리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현재 우리 인간은 물질과 형식의 노예가 되어 그물에 걸린 고기나 새장에 갇힌 새와도 같이 지향할 바른 길을 모르고 스스로 자기가 만든 무지의 질곡에 묶이어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 기독교인구가 17억쯤 되고 이슬람교도도 10억쯤이나 된다고 합니다.

다른 종교인까지 합하면 아마 종교인구만도 40억 정도나 되겠지요.

그런데도 오히려 인류의 평화와 행복은 머나먼 지평선 너머 아득하기만 하고 갈등과 전쟁과 각종 범죄는 줄어들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심각한 근원적인 병폐와 불행들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것은 오로지 자기 스스로와 일체만유의 생명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무지 무명에 그 근원이 있는 것입니다.

고도로 발달한 현대의 첨단과학도 물질의 근원은 무엇이고 인간의 마음은 무엇이며 물질과 마음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심각한 한계에 부딪히고 인간의 마음은 갈수록 삭막한 불안과 좌절을 절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가장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떠나서 다른 데서는 찾을 길이 없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불교를 믿는 자랑과 보람과 한없는 환희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개인적인 구제나 사회적인 구원이나 어떠한 어려운 문제이든 간에 그 근원적인 해결은 일체 생명의 실상을 밝힌 부처님 가르침인 반야바라밀

곧 중도실상(中道實相)의 지혜만이 능히 감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째서 이러한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주만유의 일체존재를 모조리 한결같은 일미평등(一味平等)한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견해로는 하나님은 저편에 있고 나는 여기에 따로 있다고 하며,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도 서로 뿔뿔이 대립적으로 존재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다 이원적이고 상대적인 가르침입니다. 물론 예수나 마호메트나 그분들도 성인들이라 그 분들의 근본 뜻은 모든 존재를 하나의 유기적인 생명체로 깨달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적어도 현행 기독교도, 이슬람교도들의 신앙과 인생관은 이원적인 상대성을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불교인들은 먼저 우리의 신앙 대상인 부처님에 대하여 방편설이 아닌 대승적인 명확한 개념정리를 해야 합니다. 우주의 생명 자체인 부처님을 법신(法身), 보신(保身), 화신(化身)의 삼신으로 구분하여 설명하는데, 법신 부처님은 바로 인생과 우주의 생명의 실상자체를 의미하고, 보신부처님은 법신 부처님에 갖추어진 성품 내용인 자비, 지혜, 행복, 능력 등이

원만 무결한 공덕을 의미하고, 화신 부처님은 법신에 보신공덕을 갖춘 부처님이 인연 따라 형상화되는 모든 존재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한 우리 인간이나, 일체 동물, 식물, 해와 달과 별들, 우주의 모든 존재들은 다 한 결같이 화신 부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 부처, 저 부처로 분할 할 수 없는 원융무애(圓融無碍)한 동일한 생명체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인데 방편으로 중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법신, 보신, 화신 등 삼신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삼신일불(三身一佛)이라 하며, 이러한 진여불성이 인연 따라 우주만유의 삼라만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진여연기(眞如緣起) 또는 법계연기(法界緣起)라 하고 줄여서는 연기법(緣起法)이라고 합니다.

진여불성인 부처님은 더하고 덜함이 없고 생(生)하고 멸(滅)함이 없으며, 시간, 공간과 인과율을 초월한 생명자체이기 때문에, 인연 따라 이루어지는 일체만유도 또한 동일한 부처님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주에는 진여불성 곧 부처님일 뿐 다른 존재는 없습니다.

그리고 불성이나 불심이나 법성(法性)이나 법계(法界)나 다 같은 부처님을 의미합니다.

가사 물질의 원자를 구성한 전자 또는 양자 중성자 등도 그것들이 어느 공간 속에 고정되어 있는 고유한 존재는 아니고 순수 에너지라 할 수 있는 진여불성이 인연 따라 진동하여

마이너스 성품을 띌 때는 전자라 하고 플러스 성품을 가질 때는 양자이고 중성(中性)인 경우에는 물리학자들이 중성자라고 이름 지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결합하여 산소나 수소 등의 각각 원소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따라서 원소들이 인연 따라 결합하여 세포를 이루고 사람 몸뚱이가 되었던, 하늘에 별이 되었건, 공기가 되었건 현상만 변했을 뿐, 에너지 자체는 조금도 변질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순수에너지 차원에서 볼 것 같으면 천지는 나와 더불어 뿌리가 같고 만물은 나와 더불어 하나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령 자기를 냉혹하게 배신한 사람이 있다면 그를 당장에 때려죽이고 싶도록 미워질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 사람도 자기 업에 따라 허망한 가상(假相)으로는 미운 짓을 했지만은

실상(實相)인 진여불성의 입장에서는 불구부정(不垢不淨)하여 조금도 오염되지 않는 나와 더불어 동일한 하나의 생명이 아닌가라고 통찰할 때는 불현듯 미운 마음이 가시게 되는 것입니다.

백인이나 흑인이나 황인종간의 인종적인 해묵은 갈등도 또는 국제간의 분쟁이나 어떠한 대인 관계의 불화나 다 근본성품자리에서는 동일한 생명이라는 동체대비(同體大悲)로 달관할 때에만이 비로소 근원적인 해결책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연과 인간과의 문제, 곧 나무와 흙이나 물, 공기 등도 다 근본적으로 유기적인 동일한 생명체입니다. 같은 생명체이기에 자연을 훼손하면 바로 보복을 받게 되고 자연을 존중하고 보호하면 그만큼 우리가 혜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 사회의 심각한 자연공해의 환경오염 문제나, 노사 간의 갈등이나 단체 간의 괴리나 가정의 불화 등

우리 사회의 어떠한 어려운 문제라도 부처님의 가르침 앞에서는 마치 눈송이가 화로 안에서 즉시 녹아버리듯이 이른바 홍로점설(紅爐點雪)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동체대비(同體大悲) [2]

이렇듯 유물주의와 형식주의에 병든 현대사회는 불교와 같이 일체만유가 동일율(同一律)의 동일 생명체임을 철저히 규명한 가르침만이 진정한 구제의 등불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불교인들은 선택된 선량(選良)들입니다.

여러분들이 불교를 공부해 나가면 공부할수록 더욱 절실하게 불교인의 긍지와 은혜를 절감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현재의 자기 입장이 못나고 가난하고 학식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본질적으로는 추호도 흠축(欠縮)이 없는 부처님인 것입니다.

부처란 지혜나 자비나 행복이나 능력이나 모든 공덕을 원만히 갖추고 있는 생명의 광명(光明)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본래가 바로 부처님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광명이기 때문에 상대적인 재물이나 명예나 이성간의 애욕 등 그 무엇으로도 불안한 인간의 마음을 충족하게 채워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인간은 생명의 고향인 부처님을 지향하여 부처님이 되고자 노력하고 정진할 때만이 비로소 진정한 평안과 환희와 영생의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바로 우주 자체입니다. 따라서 봄이 가서 여름이 오고 가을이 저물어 겨울이 찾아오는 것도 모두가 다 우주 스스로의 법칙과 도리, 곧 부처님의 근본 서원에 따라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자연이나 인간이나 본래가 같은 생명의 부처이고, 일체 모든 형상도 또한 부처님의 행위인데, 다만 우리 중생들이 번뇌에 가리어 근본 성품을 깨닫지 못하고 겉에 뜬 허망한 가상(假相)만 보는 것이며, 성자(聖者)들은 무지와 번뇌를 여의고 여실히 근본성품을 깨달아서 무명 번뇌에 헤매는 중생들을 구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누구나가 다 본래가 부처이니 더디고 빠른 차이는 있을지라도 한결같이 성불을 지향하지 않을 수 없으며, 우주 자체의 본원(本願), 곧 근본서원이 바로 법회 때마다 서원하여 외우는 이른바 사홍서원(四弘誓願)인 "중생무변서원도, 번뇌무진서원단, 법문무량서원학,

불도무상서원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이 허망한 현상인 가상(假相)과 허구적인 개념인 가명(假名)에 집착하고 물질의 노예가 되어 진리를 믿지 않고 게으름을 부린다면 금생에도 부처가 되지 못할 뿐 아니라 몇 천만 생을 더 윤회하면서 생사고해를 거듭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기독교계의 일부에서 요란하게 떠들어 대고 있는 "시한부 종말론"같은 것은 진리를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번뇌 망상으로서 결국 눈 먼 소경이 여러 소경들을 이끌고 지척거리다가 다 함께 허방에 빠지고 말듯이 종말론자 그네들 스스로가 시한부 종말의 비참한 운명을 면할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일체 중생을 평등한 사랑으로 영생의 고향에 인도하려는 예수의 거룩한 가르침과도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것입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 우리 몸뚱이나 일체 존재 색(色)의 성품이 바로 진여불성 공(空)이요, 진여불성 공(空)이 인연 따라 형상화되는 것이 바로 일체 존재 색(色)입니다.

그리고 허망한 가상(假相)과 가명(假名)을 여읜 공(空)의 실체가 바로 진여불성인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몸뚱이에 대하여 너무 집착을 마십시오.

이 몸뚱이는 과거 전생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미래 내생에도 이대로 있을 것도 아니며, 현세에도 시시각각으로 신진 대사하여 마지않는 전변무상(轉變無常)한 허망한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생들은 자기 몸뚱이를 금덩이보다도 더 소중히 생각하여 지나치게 아끼고 보살피는 이 몸뚱이 때문에 남과 다투고 죽이고 죽고 울고 웃고 하는 그 몸 자체가 일초전의 몸과 일초 후의 몸이 같지가 않습니다.

어느 순간도 같은 모습으로 동일한 공간에 존재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 몸이나 모든 존재 그대로 공(空)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한 바와 같이 물질이 아닌 에너지가 그 진동 여하에 따라서 전자, 양자 등이 되고 그것들이 결합하여 산소, 수소 등 각각 원소가 되고 다시 그것들이 결합하여 우리 몸을 비롯한 모든 존재가 있게 되는 것인데, 결국 영을 몇 천 번 보내거나 곱해도 영은 영일 수밖에 없듯이, 공(空 : 에너지)의 결합체인 이 몸뚱이가 절대로 내 것이라고 고집할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는 바로 그대로 공(空)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금강경'에도 "일체 유위법(有爲法)은 꿈이요 허깨비요 거품이요 그림자와 같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 인생의 지상명제는 나와 남이 다 함께 부처가 되는 자기 성불과 중생제도를 위하여 허망한 몸뚱이일망정 합리적으로 잘 관리하고 어느 때 어디서나 성불의 필수요건인 윤리도덕 곧 계율의 생활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중생들과 성인들과의 차이는 성인들은 일체 생명의 실상인 동일한 진여불성을 깨닫고 바로 그 자리에 입각하여 생활하기 때문에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의 진정한 계율과 윤리 도덕에 합당하며, 범부 중생들은 근본 성품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일체 모든 현상에 집착하여 무절제한 파계(破戒)와 업(業 : Karma)을 짓고 한량없는 고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공자나 노자나 예수나 마호메트 등의 성현들도 비록 석가모니와 같은 완벽한 깨달음을 성취했다고는 못할지라도 다 한 결같이 허망 무상한 환상들에 집착하지 말고 영생불멸한 근본 성품에 돌아가라는 가르침은 동일합니다.

따라서 다른 종교인들이 불교를 비방한다면, 그것은 바로 그네들 스스로의 교조(敎祖)와 교리에 위배되는 이율배반(二律背反)의 무지한 소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현실생활이 각박하고 어수선하여 금생에 당장에 빨리 견성 오도하여 성자(聖者)까지는 못 된다 할지라도, 우선 이치와 도리만으로 라도 우주 만유가 바로 동일한 생명인 진여불성이구나… 바로 통찰하면 모두가 한결같은 부처님뿐인데…

이렇게 느끼고 이해하기만 하여도 우리 몸과 마음도 한결 가뿐해지고 밝아져서 이내 성불의 대도(大道)를 지향하게 되며, 불보살들과 호법선신들이 우리를 가호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여불성인 생명의 공덕을 자비나 지혜나 행복이나 능력 등 모든 것이 원만하게 갖추어진 부사의한 보배로운 생명자체이기 때문에 우리의 신행(信行)과 정진으로 우리 마음이 정화되어 진여불성과 가까워질수록 우리의 능력과 행복은 더욱 더 증진 발전되는 것입니다.

우주의 본질인 진여불성은 우주에 충만한 생명의 광명입니다.

우주 그대로 빛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자연적으로 우리의 몸도 마음도 밝아지고 우리를 속박한 어두운 그림자는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저 부처님 뒤에 모신 장엄한 후불탱화를 보십시오.

부처님께서 나투신 광명으로 천지우주를 두루 충만하게 비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부처님의 한량없고 영원한 생명의 광명을 상징하고 있는 법계만다라(法界曼茶羅)인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모시든지, 경전을 일심으로 독송하든지, 참선을 열심히 하시는 분들은 그 공부정도에 따라서 부처님의 광명을 맑게 혹은 적게 느끼기도 하고 실제로 증험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시든, 아미타불을 염하시든, 또는 무(無)자나 이뭣고 화두를 참구(參究) 하시든지 또는 경을 독송하시든지 다 한 결같이 우리 스스로 부처님으로 돌아가는 소중한 성불의 수행방법인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중생들은 생명의 근본 고향인 진여불성으로 돌아가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급박한 일은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 많은 성현들이 그 길을 위하여 자기 재물을 모조리 바치기도 하고, 젊음을 미련 없이 불사르고 출가하기도 하였으며, 일찍이 신라의 법흥왕과 진흥왕과 같이 내외분이 다 함께 왕위를 버리고 승려가 되기도 하였고, 더러는 소중한 생명까지도 아무런 주저 없이 던지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훌륭한 아버지, 어머니가 되고 좋은 아내와 남편이 되고 또는 위대한 스승이나 정당한 민주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부처님 가르침을 떠나서는 그 갸륵한 뜻을 이룰 수가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동일한 우주의 생명이기 때문에 여러분들께서 아미타불을 외우든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이나 하나님이나 알라신을 외우든지 다 같은 부처님 자리입니다.

다만 부처님의 공덕이 무량무변하기 때문에 자비로운 쪽으로 이름 지어 관세음보살, 지혜로운 면으로는 대세지보살이나 문수보살, 지옥중생을 구제하고 영혼을 다스리는 방면의 이름으로는 지장보살, 기독교 쪽으로는 하나님, 이슬람교 쪽으로는 알라신, 그리고 부처님의 총 대명사인 아미타불입니다.

만약 소박하고 천박한 생각으로 이 부처님, 저 부처님, 이 보살, 저 보살

뿔뿔이 따로따로 존재한다고 하면 그것은 미개한 시대의 다신교(多神敎) 신앙이지 가장 보편적이며 궁극적인 가르침인 불교는 아닙니다.

불보살이나 선지식들의 가르침은 옳은 것이니, 자기가 선택한 공부방법대로 일심정념(一心正念)으로 정진해 나가면 날로 번뇌는 가벼워지고 공덕은 쌓이게 되어 몸도 마음도 갈수록 맑고 밝아지며 마침내 오랜 과거세로부터 익혀온 습관성을 모조리 소멸하고 근본성품인 진여불성을 깨달은 성자가 되는 것입니다.

혹 장사나 사업하시는 분들이 불교신앙에 몰두하게 되면 손해가 많다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모든 사람들을 차별 없이, 다 부처님같이 상대한다면 대인관계가 한결 좋아져서 고객도 더 많아질 것이고, 자기 마음도 점점 밝아져서 매사에 사리판단도 정확해질 것이니, 어떤 면에서나 훨씬 능률적이고 창조적인 생활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가령 정치인이 되어 정적들과 심각한 정책대결 등 몹시 불편한 입장에 처하게 될 때에도 상대되는 사람 자체를 미워할 수가 없으니, 정치생활이 한결 순탄하고 합리적으로 잘 풀리게 될 것이며, 기타 어떤 분야에서나 다 참다운 신앙생활로 말미암아 보다 유연한 타협과 화해의 혜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유교나 도교나 다 위대한 성자들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그 표현방법과 그 교리 내용이 다소 깊고 옅은 차이는 있을지라도 생명의 고향인 진여불성(부처님 또는 하나님)을 지향하여 윤리 도덕을 실천하는 점에서는 동일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불교와 같이 인생과 우주의 본질과 생명의 실상을 여실히 밝히지는 못했기 때문에 현대와 같이 모든 주의, 주장이 얽히고설키고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진 역사적 위기에 처해 있는 지극히 복잡하고 어려운 시대에는 다른 종교와 같은 단순 소박한 가르침만으로는 겹겹으로 얽혀 있는 질곡을 헤치고 진정한 이상세계 창조의 기능을 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불교와 같이 가장 합리적인 과학인 동시에 가장 궁극적인 철학이며 생사해탈과 일체만덕을 원만히 성취하는 가장 심오한 종교만이 쌓이고 쌓인 인류사회의 병폐를 치유하는 유일한 복음이 되고 최상의 구세주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앞으로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인류 문화가 날로 성숙하게 되면

다른 모든 가르침들도 필연적으로 우주 자체의 도리인 부처님의 가르침 안으로 흡수 동화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오늘날과 같이 복잡하고 다난한 시대 상황에서 천행히도 불교를 선택하게 된 것은 참으로 축복된 가장 정당한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앞으로 우리의 노력정진에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생명의 실상을 깨달아 위없는 생사해탈의 지혜인 반야바라밀을 성취하고 만중생과 더불어 영생의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지리한 시간 경청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나무석가모니불(南無釋迦牟尼佛)!

나무마하반야바라밀(南無摩訶般若波羅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