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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마음의 고향

제 5 집 1.피안(彼岸)의 길

마음의 고향 제 5 집


* 불기 2536년(1992년) 9월6일 석 청화(釋 淸華)스님께서 태안사 정기법회에서 설법하신 법어입니다


-. 피안(彼岸)의 길 [1]


늦더위가 아직도 가시지 않고 기승을 부립니다만 하늘거리는 코스모스는 벌써 가을입니다.

우리는 어제도 인생(人生)의 길을 걸었고 오늘도 어김없이 인생의 길을 걷고 있고 내일도 인생의 길을 걸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러할 것인가?

부처님의 법문(法門) 가운데 중요한 물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습마물(什徼物)이 임마래(恁徼來)오.

이것은 중국 송(宋) 나라 때의 속음인데

이 뜻은 "무엇이 이렇게 있는가?" "무엇이 이렇게 왔는가?" 이런 뜻입니다.

다시 부언해서 말씀드리면 "‘나’라는 것은 대체로 무엇이며 지금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 것인가?" 그런 뜻입니다. 내가 대체로 무엇인가 하는 그런 해답이 내려지면

응당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그런 우리 삶의 의미(意味)도 거기에서 밝혀질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어제까지는 내가 인생의 의미대로 바르게 살았던가?

오늘은 바르게 살고 있는 것인가?

내일도 또 오늘 같은 연속이 아니고 보다 진일보(進一步)한 바른 삶이 될 것인가?

이러한 문제(問題)는 우리한테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보통 그러한 근본적인 문제를 외면하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을 믿는 것은 그러한 근본적인 문제를 우리 문제로 제기하고 그런 문제에 대해서 바른 해답을 내리기 위해서 우리가 종교(宗敎)를 갖고 철학(哲學)을 배우고 하는 것입니다.

불교(佛敎)는 물론 다른 종교도 역시 진리(眞理)를 모르고 헤매는 미혹된 이쪽에서 진리를 깨달아서 자기 마음의 실상(實相)과 우주의 본래 참다운 모습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서 그러한 실상의 저쪽으로 인도하는 가르침입니다.

 본래의 뜻으로는 이쪽이나 저쪽의 한계(限界)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선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미혹된 경계를 이쪽이라고 한다면,

깨달은 경계는 저쪽이겠지요.

불교의 차안(此岸), 피안(彼岸)이라. 이 쪽 언덕과 인생고해(人生苦海)를 건너서 저 쪽 언덕, 인생고해 이쪽은 우리 중생(衆生)이 번뇌(煩惱)를 짓고, 그런 번뇌의 행동으로 해서 악업(惡業)을 짓고, 그렇게 하므로 고통을 받고, 이러한 것이 우리가 사는 이 쪽 세계입니다.

 우리가 지금 사는 세간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이쪽만 가지면 사실은 인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다행히도 성자(聖者)들의 가르침 따라서 고해중생(苦海衆生)의 이쪽을 떠나서 저쪽으로 건너갑니다. 깨달음의 피안(彼岸)으로 건너갑니다.

안락(安樂)의 저 언덕으로 갑니다. 이러한데서 각 종교의 목적이나 인생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衆生)을 보면 그냥 이쪽에서 무엇인가 살기 위해서, 또는 이쪽을 출발해서 가기는 가는데 고해에서 생노병사(生老病死)를 위주로 한 그 모든 헝클어진, 그러한 어려운 문제가 많이 있는, 또 파도(波濤)가 솟구치는 인생고해(人生苦海)에서 대부분 사람들은 거기에 빠져버립니다. 인생 고해에 한발 내딛자마자 바로 그곳에 빠져버립니다.

다시 쉬운 말로 하면 그냥 속물(俗物)이 돼서 그 곳에서 점벙거리고 맙니다. 우리가 인생을 통관(洞觀)하면 많은 사람들이 인생 고해를 건너서 참다운 깨달음의 저쪽 피안(彼岸)으로 가지 못하고서 그냥 고해(苦海)에서 잠기고 맙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 조금 더 수승한 사람들은 총명하기도 하고 또는 불교 말로 업장(業障)이 가벼운 사람들은 물에 빠져 있지만 고개를 들어서 한 번 사방을 관망(觀望)합니다. 과연 내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인가?

내가 지금 물에 잠겨 있는데 이대로 잠겨만 있어야 되겠는가?

이렇게 지금 고개를 들고 사방을 관찰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적어도 인생을 탐구(探究)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방을 설혹 관찰한다 하더라도 그 물결을 헤치고 앞으로 나가기가 어렵습니다.

용기(勇氣)가 부족해서 사방을 볼뿐이지 바로 물을 건너가는 그런 실천에 옮기지를 못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의지(意志)가 빈약해서 그저 이치(理致)로 해서는 꼭 내가 저쪽으로 건너가 우리 그러한 중생들의 어리석음을 떠나 참다운 깨달음의 저쪽으로 가야 하겠구나.

이러한 뜻은 있다 하더라도 실천에 옮기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총명하고 또 용기도 있어서 사방을 관찰한 다음에 저쪽으로 가는 것이 옳은 길이구나. 이렇게 자기 목표를 바로 정해서 뚜벅뚜벅 물속에서 걸어서 건너갑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수행자(修行者)입니다. 여기 계시는 여러분 모두가 그러한 분들입니다.

우리 인생(人生)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이 옳은 것인가? 옳은 길을 선택하셔서 깨달음을 성취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성자들의 가르침이 정당한 것이다. 이렇게 분명히 느끼고

또 그러한 옳은 길을 선택한 다음에 실천으로 여러분들은 분명히 옮기고 계십니다.

이러한 우리 불자님들은 지금 인생 고해를 건너가는 도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고해를 건너가는 일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파도가 치고 또는 폭풍우가 일고, 이러한 인생 고해이기 때문에 우리가 애쓰고 간다 하더라도 어느 때 다시 그 성난 파도에 휩쓸려 버릴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의지가 강건(强健)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러한 파도에 휩쓸려서 한 번 바다에 잠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칠전팔기(七顚八起)라. 한 번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고, 그렇게 용기를 내어서 끝끝내 가는, 내 생명(生命)이 다 한다 하더라도 한사코 가야한다는

이러한 분들이 바로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 그러한 분들입니다.

성문이나 연각이나 그러한 분들은 몇 번 넘어지고 다시 물장을 쓰고 잠긴다 하더라도 굴하지 않고 가는 분들입니다. 확신이 강하기 때문에 가는 길은 '이 길밖에는 없다' 이렇게 확신이 강한데서 그런 분들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더욱 더 강한 분들은 자기 자신만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손을 잡고 건너 주어야 하겠다. 이러한 분들은 이른바 보살(菩薩)입니다.

이러한 것은 제가 지어낸 비유(譬喩)가 아니라 부처님 경전(經典)을 보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고해(苦海)이고, 이쪽 언덕은 고생만 받는 사바세계(娑婆世界), 중생세계(衆生世界)이고, 고해를 건너서 저쪽 영생행복(永生幸福)의 극락세계(極樂世界) 피안(彼岸)으로 가는 것을 이렇게 부처님 경전에서 비유했습니다. 우리는 자기 스스로를 한 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지금 어느 만큼 가 있는 것인가?

우리는 우리가 가고 있는 저쪽 피안에 안 가고도 배길 수가 있으면, 안가고도 무방하면 별로 노력할 필요가 없겠습니다만 그러나 안 가고는 못 배기는 것이 우리 중생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개미 쳇바퀴 돌듯이 뱅뱅 도는 윤회(輪廻)라 하는 그러한 것을 너무나 쉽게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참다운 지혜(智慧), 참다운 해탈(解脫)의 지혜,

반야(般若)의 지혜를 모르는 사람들은 사실은 지금 인간(人間)으로 살아 있다 하더라도 윤회의 허무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저것이 좋지 않다. 내 것이 좋다. 이렇게 자기의 이욕(利慾)을 위해서 자기 능력을 소모하는 분들은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윤회(輪廻)라 하는 뱅뱅 도는 업(業)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은 우리가 하는 행동 가운데 좋은 행동이거나 나쁜 행동이나

모두가 우리 마음에다 훈습(薰習)이라, 우리 마음에다 흔적(痕迹)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의식적(無意識的)으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우리 관념적(觀念的)으로 남을 미워도 하고,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많은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한 번 생각했던 것, 우리 행동으로 표현했던 것, 우리 언어로 말한 것, 모두가 그대로 흔적을 남기고 절대로 소멸이 안 됩니다.

우리 잠재의식(潛在意識)에다가 눈에 안 보이는 물질이 아닌 우리 의식(意識)에다 흔적을 다 둡니다. 그것이 훈습(薰習)이라. 훈더울 훈(薰)자, 익힐 습(習)자, 훈습을 둡니다.

더 쉬운 말로 하면 우리 의식에다 종자(種子)를 딱 심어둡니다.

종자를 심어두면 그러한 종자들이 쌓이고 쌓이면 그런 종자의 무게에 따라서 우리가 죽은 뒤에도 거기에 걸 맞는 그러한 과보(果報)를 받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금생(今生)에도 우리 마음에다 부정적(否定的)인 그러한 종자를 많이 심어 놓으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부당한 사람들, 다른 사람도 똑같이 나쁜 종자를 심기도 하고

좋은 종자를 심기도 하겠지요. 그런데 나쁜 종자를 많이 심은 사람들하고 가까워집니다.

더 쉬운 말로하면 생명(生命) 파장(波長)이 거의 맞단 말입니다. 업장이 무거운 사람들은 무거운 사람들끼리 죄가 가벼운 사람들은 가벼운 사람들끼리 유유상종(類類相從)으로 가까워집니다.

또 그뿐만 아니라 우리 중생(衆生)들은 눈에 안 보이는 세계(世界) 즉 신장세계(神將世界) 팔부신장(八部神將)이라,

천상인간(天上人間)들이라든가 또는 용(龍)이라든가,

용도 그렇게 구불구불하고 징그러운 용이 아닙니다. 우주(宇宙)의 물 기운(氣運), 우주의 물 기운은 바로 용(龍)인 것입니다. 우주의 그러한 물의 정기(精氣) 그러한 것도 우리 주변에는 다 있는 것입니다. 또 그 외에도 가지가지의 차원(次元) 따라서 업장(業障)이 무겁고 가벼운 신(神)들이 굉장히 많은 것입니다. 우리 중생(衆生)들은 그러한 것들이 잘 안 보이지만 느껴야 합니다. 왜 느껴야 하는가 하면 우리 행동(行動) 하나하나를 천상(天上) 사람들

또는 용(龍)들 그런 신장(神將)들이 우리 행동을 다 감시(監視)를 하기 때문입니다.

감시를 한다고 하면 기분이 사납겠지만 그런 신장들은 마음이 총명(聰明)해서 그냥 가만히 있어도 우리 행동을 다 본단 말입니다.

자기 혼자 그 두께가 몇 미터나 되는 철갑(鐵匣)으로 된 그런 독방(獨房)안에 혼자 있다 하더라도 신장들은 그 철갑을 뚫고 보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감마선, 베타선, 알파선 그런 방사선(放射線)도 웬만한 두께는 뚫고 보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물며 신장 눈들은 그러한 물질적인 한계를 두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디가 있던지 간에 그러한 신들은 우리 행동을 다 뚜렷이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리에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비록 인간의 눈에 그러한 신장들이 안 보인다 하더라도 “신장(神將)들이 분명히 있다” 이렇게 느껴야 합니다. 이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뚜렷이 보는 성자(聖者)가 말씀 하신 것입니다.

천사(天使)도 분명히 있는 것이고 다 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정도에 따라서 우리가 선량(善良)하면 선량한 신들이 지키는 것이고, 우리가 부당하면 우리의 부당한 파장(波長) 따라서 선량한 신들은 우리한테 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몸에서 나뿐 냄새가 풍기면 좋은 향내만 맡는 그런 좋은 사람들은 우리한테 올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와 똑같이 신장이라는 것은 높은 신장들은 모두가 다 깨끗하고 청정한 냄새만 맡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행동이 선량할 때는 자신도 모르게 우리한테서 향기가 풍깁니다. 우리는 우리 행동을 하실 때에 그러한 것을 느끼셔야 합니다. 내가 한마디의 말을 거칠게 하면 바로 나한데서 나뿐 냄새가 풍기는 것입니다.

사람끼리는 미처 모른다 하더라도 귀신(鬼神)들은 바로 느낍니다 사람끼리도 나쁜 사람 즉 업장(業障)이 무거운 사람 옆에 가면 어쩐지 기분 사납단 말입니다 또한 불안(不安)을 느낌니다.

-. 피안(彼岸)의 길 [2]


그러나 마음이 차분하고 또 표정이 온화(溫和)하고 또 '어떠한 경우도 저 사람을 해치지 않겠다.' 이러한 자비심(慈悲心)을 품은 사람 옆에 가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마음이 편안(便安)합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님의 그 손 부림 가운데서 손을 이렇게 척 드시고서 중생(衆生)들한테 비추십니다. 이것이 무외시인(無畏施印)이라.

관세음보살님 모습을 보면 이렇게 손을 들고 우리 중생들에게 손바닥을 보이시는 모습이 있습니다. 이것 보고 무외시인이라, 없을 무(無)자 두려울 외(畏)자, 베풀 시(施)자,

우리 중생에게 절대로 두려움이 없다. 우리 중생의 공포심(恐怖心)을 모조리 없애는 그러한 손의 모습이 이러한 모습입니다. 우리한테 무슨 무기가 있다거나 흉기가 있으면 상대를 해칠 마음은 없지만 우리한테 무기가 있다는 것을 상대가 안다면 그냥 두려움을 품고 가까이 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떠한 경우도 그대를 해치지 않는다.

관세음 보살님의 모습은 어떠한 경우도, 설사 내 목숨을 그대가 빼앗는다 하더라도 나는 그대를 헤치지 않는다. 이것이 관세음보살님의 무외시인(無畏施印)입니다.

따라서 우리 수행자(修行者)는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저 사람이 잘 못 맘을 먹고 내 따귀를 때리던가 말든가 그러한 것도 문제시 할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앞서 말씀과 같이 우리는 지금 길을 가고 있습니다. 길을 가는 것도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인생고해(人生苦海)를 건너고 있습니다. 인생고해를 어떻게 건너야 할 것인가?

인생고해를 건너지 못하면 사바세계(娑婆世界)의 그러한 고생 바다에서

뱅뱅 도는 신세(身世)밖에는 안 됩니다. 그렇게 돌아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나한테는 좋은 아내가 있고, 나한테는 훌륭한 재산(財産)이 있고, 나한테는 무던한 그런 지위(地位)도 있고, 이런 좋은 세상(世上)에서 그대로 살아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것들이 오랫동안 안 간단 말입니다. 갑자기 자기 남편이나 아내가 교통사고 만나서 죽어보십시오. 그때는 자기 스스로가 마음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연약한 사람들은 같이 죽기도 하겠지요. 같이 못 죽는다 하더라도 평생 동안 자기 배우자를 흠모하고 추모하느라고 불행에 빠지고 맙니다.

이것은 특별한 예가 아니라 어떠한 누구나 그러한 고비를 다 겪습니다.

자기 아들이 먼저 간다든가 딸이 먼저 간다든가 또는 죽어서 이별(離別)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서로 인연(因緣)이 다 해서 생이별(生離別)을 한다든가 이러한 경우가 누구나 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고해(人生苦海)라 하는 것은 좀 잘 된다 하더라도 별 볼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볼일이 없는 가운데서 최선(最善)으로 사는 길,

이것이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 인생(人生)을 그러한 허망무상(虛妄無常)한 것에 얽매이지 않게 하고 우리 인생을 참다운 행복(幸福)으로 인도하는 것이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석가(釋迦)나 예수나 공자(孔子)나 노자(老子)나 그러한 분들의 가르침입니다.

그러한 가르침은 무슨 보수를 받고서 우리한테 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다 하더라도 더러는 우리가 보살(菩薩)이나 성자(聖者)를 해코지해서 순교(殉敎)도 시킵니다. 그래도 그 분들은 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 분들이 보는 것은 명백하게 봅니다. 우리 중생들은 명백하게 못 봅니다.

우리는 지금 수행자(修行者)로 해서 길을 가는 불자(佛子)들입니다.

명백히 볼 수 있는 바른 철학적(哲學的)인 견해(見解)가 우리한테는 꼭 필요합니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부족한 것은 물질도 부족하고 자비(慈悲)도 부족하고 다른 부족한 것들이 많이 있지만 가장 부족한 것은 참다운 지혜(智慧)가 부족합니다.

우리 마음이라 하는 것은 복덕(福德) 방망이나 똑같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마음보고 여의주(如意珠)라 합니다. 여의보주(如意寶珠)라 합니다. 여의주란 우리 중생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모든 것이 다 나오는 우리 소원(所願)대로 다 나오는 것이 여의주(如意珠)입니다. 금(金)도 은(銀)도 다이아몬드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도 집도 재물(才物)도 또는 권리(權利)도 다 나오는 그러한 보배가 여의보주(如意寶珠)입니다.

우리 마음은 그러한 여의보주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그 많은 것들이 다 나오는 자비 행복도 다 완벽하게 갖추고 있고 다 들어 있는 여의보주, 또 그것이 저 밖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마음인 그 여의보주, 그 소중한 보배는 구하려고 아니하고 별로 신통치 않는 것만 구하려고 합니다.

그런 보배 가운데서 감투를 구한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감투가 귀중하지 않는가.

감투 이것은 귀(貴)와 부(富)를 한 번에 우리에게 주는 것이 아닌가.

설사 어느 한 동안 감투가 우리한테 부귀(富貴)를 준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이 보다 큰 보배를 훨씬 더 크게 잃어버립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감투를 쓰고서 아만심(我慢心)을 부리고 제법 내가 잘났다 내가 많이 안다 이렇게 교만심(驕慢心)을 부리면, 그 사람은 별 것도 아닌 감투 때문에 소중한 보배를 잃어버립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에게 굉장히 큰 손실(損失)입니다. 우리 인생이 짧지 않습니까. 에누리 없이 애쓰고 온전히 살아도 몇 십 년 아닙니까.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자는 동안, 노는 동안, 텔레비전 보는 동안 다 제(除)하면 정작으로 정미(精米)로 우리가 사는 인생은 정말 몇 년일까? 인생은 정말로 총총히 걸어가는 나그네 길입니다. 참 총총한 길입니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더욱 더 허무(虛無)합니다.

제 아무리 아끼고 아낀다 하더라도 결국은 지금 이 여름이 가지 않습니까.

4월 보름날 결제하고 여름동안 우리 참선(參禪) 수행자는 공부하고서 이 동안은 여름인지라 지리 합니다. 지리한 때는 빨리 7월 백중(伯仲)이 와서 해제가 됐으면 합니다.

해제가 되면 훨훨 걸망지고 나가야 하겠다. 이런 7월 백중도 벌써 다 지나가서 추석이 앞에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은 그와 같이 요술(妖術) 방망이인 동시에 일체 것이 다 들어 있는 여의보주(如意寶珠), 인도(印度) 말로 하면 마니보주(摩尼寶珠)라 합니다.

마니보주는 물질이 아닙니다. 물질이 아닌 영롱무이(玲瓏無二)한 것인데

그 가운데는 일체의 지혜(智慧), 공덕(功德)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한 것이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법(法)은 그런 여의보주(如意寶珠), 그런 보배 가운데서 우리가 가장 좋은 것을 추슬러야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을 구하지 못하면 자기 인생은 손해입니다.

지지리 자기 가운데 들어 있는 보배인데, 그 보배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은 그만 두고서 허접 쓰레기를 우리가 구하고 그것을 얻는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인생의 낭비입니다.

여의보주(如意寶珠)가 바로 이것이 앞서 언급한 우리 인생의 참 지혜(智慧)입니다.

참 지혜인 동시에 바른 철학(哲學), 바른 가치관, 바른 정견(正見)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다행히 좋은 스승도 만나고 부처님 공부를 제법 많이 해서

여의보주 가운데서 반야지혜(般若智慧)를 얻었다. 나한테는 부처님의 지혜(智慧) 가운데서 가장 수승한 부처님의 대승지혜(大乘智慧)가 갖추어 있다.

이렇게 우리가 느꼈다 하더라도 그러한 것이 개념적인 지식(知識)만으로는 우리한테 참다운 힘이 못됩니다.

우리 보통 분들은 게을러서 개념적인 지식만 알고 불교를 다 알았다. 불교는 제법(諸法)이 공(空) 아닌가. 불교는 중도(中道)가 아닌가. 일체 만법은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의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아닌가. 이러한 정도는 이것저것 비교해서 연구도 하고 부처님 법문을 많이들은 분들은 대체로 짐작은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 생명하고 딱 일치가 되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냥 지혜로만 아는 이것보고 불교말로 하면 간혜지(乾慧地)입니다.

마른 간(幹)자, 지혜 혜(慧)자, 땅 지(地)입니다. 바싹 마른 지혜입니다. 알기는 무던히 많이 알지만 그것이 실지로 혼연일체(渾然一體)로 하나가 못 되었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거기에서 어떤 커다란 행복(幸福)이라든가 충족감은 없습니다.

오늘 법회(法會)는 굉장히 중요한 법회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러한 법회가 그렇게 많은 날을 두고서 되풀이가 많이 안 됩니다.

물론 저 같은 사람 말씀이 아니더라도 여러분들께서 들으실 기회가 많이 계시겠지만, 우리는 간혜지를 떠나서 바싹 마른 지혜를 떠나서 참다운 지혜, 우리 생명과 혼연일체가 되는 그러한 지혜를 어떻게 얻어야 할 것인가?

그러한 것에 관해서 오늘 법회동안에 확신을 가지시도록 제가 당부를 드립니다.


-. 피안(彼岸)의 길 [3]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지금 인생고해(人生苦海)를 건너가는 중인데 조금 물결이 치고 파도가 심하면, 아! 나는 건너갈 힘이 없겠구나.

저곳까지 건너가지 않더라도 그냥 이 자리에서 이대로 지내도 무방하겠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주저앉아 버립니다.

지혜로 해서 좀 안다 하더라도 저 피안(彼岸)으로 건너가면 틀림없이 무한의 행복이 있는데 그러한 행복보다는 우선 건너가는 고생이 심하므로 여기에서 그렁저렁 해야 되겠다.

그러하면 이제 결국은 성자(聖者)의 길을 못가고 맙니다. 우리한테는 분명히 누구나가 건너갈 힘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자빠지고 넘어지고 엎어지고 한다 하더라도 결국 가면 누구나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용기(勇氣)가 없고 확신(確信)이 부족하면 못갑니다.


부처님 경전(經典)에 심불상속고(心不相續故) 부득결정신심(不得決定信心)이라.

이것을 풀이하면 우리가 -부처님은 바로 내 생명(生命)의 본바탕인 동시에

우주의 실상(實相), 우주의 진리(眞理)가 부처님 아닙니까.-

그러한 부처님한테 지향하는 부처님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 상속(相續)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금생에 잘 못 배우고 잘 못 느끼고 잘 못 생각한 그것들이 하나의 습관(習慣)이 되어서 우리 마음에는 딱 지금 배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슨 좋은 생각을 좀 갖는다 하더라도 그와 같이 좋은 생각만을 갖는 그걸로 해서는 그것이 우리 가슴에 자리를 잡지를 못합니다. 따라서 그 좋은 생각 모두가 다 본 바탕에서는 다 부처구나. 내 마음의 바탕에서는 부처님 광명(光明)이 천지(天地)를 두루한

그런 빛으로 해서 훤히 빛나 있구나. 이렇게 느낀다 하더라도 그 느낌 그것을 지속을 시켜야 하는 것인데, 우리가 바쁘다. 또는 어머니의 구실을 해야 한다. 또는 아내의 구실을 해야 한다. 자기 직업이나 일상사 때문에 부처님한테 지향하는 우리 마음을 우리가 지속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지속을 시킬 수가 없기 때문에 내내야 이제 범부(凡夫)로 해서 속물(俗物)로 해서 일상성(日常性)에 매몰되어서 거기에서 그쳐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하면 부득결정신(不得決定信)이라. 꼭 반드시 옳다. 결정코 옳다. 그러한 확신이 안섭니다. 자기 마음에 가서 앞서 제 말씀과 같이 부처님을 지향하는 청정한 그런 종자(種子)가 차근차근 많이 심어져서 부당한 종자보다 훨씬 더 우세하게 우리 마음을 지배하면 될 것인데, 하다 말다 하다 말다 하면 우리 마음에 들어 있는 기성적(旣成的)인 이미 뿌리내린 그런 부정적(否定的)인 종자 그러한 종자를 나중에 들어간 부처님을 생각하는 청정한 종자가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렁저렁 하다 말다 말아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고해(苦海)를 건너갈 수가 없습니다.

인생에 태어난 이것은 우리가 인생고해(人生苦海)를 건너가서 피안(彼岸)으로 가는 것이 인생으로 태어난 최대의 목표입니다.

결혼을 설사 못 했다 하더라도 손해 볼 것이 없습니다. 금생에 아무런 감투도 못써도 손해 볼 것이 없습니다.

자기 재산이 아무것도 없이 누더기 한 벌로 해서 평생을 산다 하더라도 손해 볼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인생으로 태어난 것은 얼마만큼 자기 보배를, 자기 생명의 본바탕을 -우리 생명의 본바탕은 바로 부처님입니다.

마니보주(摩尼寶珠) 가운데 여의보주(如意寶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일체 존재의 근본 성품을 밝힌 그런 지혜(智慧)입니다. 이 지혜만 우리 것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더라도 아무 손해가 없습니다.

염불상속고 부득결정신이라.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하는 참다운 우주의 도리를 생각하는 그 마음이 상속되지 않으면 결정신앙(決定信仰)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결정신앙을 가져야 참다운 수행자입니다.

참다운 불자입니다. 우리 인생이 아직도 멀었다고 너무나 미루지 마십시오.

생명이라 하는 것은 노소(老少)가 부정입니다. 젊다고 늦게 가고 늙었다고 빨리 가는 것만은 아닙니다. 어느 때 갈는지 모릅니다. 호흡지간(呼吸之間)이라. 숨 한 번 내 쉰 숨을 못 들이면 주검입니다.

하늘에서 유성(流星)이 떠돌다가 어느 날 우리 집 지붕을 뚫고 덜어져서 나를 죽일지 모르는 것이고, 또는 비행기가 날다가 운수 사납게 어느 때 와서 내 머리 위에서 추락해서

죽을지 모릅니다. 콜레라, 요즈음 에이즈, 이러한 병들이 어느 때에 우리한테 올는지 모릅니다. 나한테는 그런 것이 안 오겠지. 그렇게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우리 무상한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절대로 내가 아직은 사십(四十)인데, 내가 삼십(三十)인데 그렇게 자기 인생을 여유 있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기에 부처님 말씀으로 진리를 한 번 알아버린 사람들은 여구두연(如救頭燃)이라, 같을 여(如)자, 머리 두(頭)자, 불탈 연(燃)자,

우리 머리에 불이 붙었다고 하면 그보다 더 급한 것이 있겠습니까.

우리 머리에 불이 붙었으면 그보다 더 급한 것은 없습니다.

그렇게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우리가 부처님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진리를 참다웁게 아는 분이 하시는 공부의 태도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그렇게 보통은 안합니다. 그 세속적인 일 다 하고서 마치 하잘 것도 없는 액세서리 이런 정도로 우리 신앙을 생각합니다. 이래서는 정말로 애석하고도 정말로 크게 애석한 일입니다. 부처님이나 무수한 도인들이 우리한테 그렇게 고구정녕(苦口煗娡)으로 우리한테 타이르신 말씀 아니겠습니까. 그 분들이 우리한테 보인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가 우리한테 보인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으려고 생각했으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습니다.

짐짓 일부러 갔습니다. 어떠한 위대한 성인(聖人)도 모두가 다 자기가 순교(殉敎)를 피하려면 피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총명한 분들이 자신의 목숨 하나 피하지 못하겠습니까.

다만 중생 때문에 짐짓 일부러 갔단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한테 끼쳐 준 것이 오늘날 불교(佛敎)요, 기독교(基督敎)요,

유교(儒敎)요, 도교(道敎)요,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이고 합니다.

그러한 가르침은 모두가 다 생명의 가르침입니다. 우리 생명을 헛되게 살지 않고서 정말로 만란(萬亂)을 배제해서 꼭 그길로 가라고 우리를 채찍질하는 가르침입니다.

황벽대사(黃蘗大師)는 나이 70된 편모, 자기 어머니를 뿌리치고 승려가 되었습니다.

의지할 데 없는 70된 노모(老母)를 뿌리치고 승려가 되었다고 하면 굉장히 잔인하고 부도덕하고 불효막심하겠지요. 그러나 절대로 불효가 아닙니다. 왜 불효가 아닐 것인가?

만약 황벽대사가 승려가 되어서 그렁저렁 살았으면 대역 막심한 불효자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공부를 잘해서 성자가 되었으면 그 이상의 효도는 없습니다.

왜냐 하면 금생의 목숨은 허망한 것입니다. 어머님 목숨이 길어야 10년 20년 더 사시겠지요. 그러나 그 어머님의 몸뚱이를 위해서 10년, 20년 봉사하고 봉양을 좀 하는 것보다는

어머님의 참다운 생명을 위해서 영생(永生)의 길로 인도한다고 보면 그것은 비교할 수 없는 큰 효성(孝誠)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부모님을 다 뿌리치고 자기 가정을 다 뿌리치고 무책임한 그런 행동을 하라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그 어떠한 것이 귀중한가. 그런 비중 관계를 말씀 드릴뿐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진리의 길로 가는 것이 그 어느 것 보다도 가장 급하고 가장 소중한 문제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기 머리위에 붙은 불을 끄듯이, 또 여거정석(如去頂石)이라. 자기 이마 위에 돌이 놓여 있으면 제일 먼저 그것을 치워야 하겠지요. 같을 여(如)자, 갈 거(去)자, 이마 정(頂)자. 우리 이마 위에 돌을 빨리 치우듯이 그렇게 우리 공부는 급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인생고해를 건너가서 저쪽 피안, 영생 행복의 피안으로 건너가기는 절대로 멀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까지도 공부를 다 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정말로 순수(純粹)하니 구할 때는 절대로 먼 길이 아니라는 확신(確信)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누구나 똑 같습니다.

나는 공부를 별로 안했는데 나는 인간성이 별로 안 좋아서 죄를 많이 범했는데 나 같은 사람은 도저히 안 되겠지. 이러한 마음은 눈곱만큼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부처님 성품(性品)은 설사 내가 금생에 나와서 살인죄를 몇 십번 되풀이해서 범했다 하더라도 부처님 성품은 조금도 오염이 안 됩니다. 부처님 성품은 물질이 아닙니다.

물질이 아닌 것은 오염을 받지 않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앙굴마라(鴦掘摩羅),

앙굴마라는 외도의 자기 스승의 가르침 따라서 99인의 사람을 죽인 분입니다.

외도의 자기 스승이 그대가 정말로 신통자재(神通自在)하는 부처님 법을 얻기 위해서는 사람을 하나 죽여서 그 사람 손가락 하나 자르고 또 한 사람 죽여서 손가락 자르고 이렇게 손가락 백 개로 목걸이를 해라.

 그러면 그대가 무상대도(無上大道)를 통해서 신통자재를 다 한다. 그러하니까 그 고지식한 사람이 정말로 아흔 아홉 사람을 죽였습니다.

결국 사람들이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앙굴마라는 굉장한 장사였습니다.

따라서 그 사람이 무서워서 그 사람이 지나가는 거리에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자(母子)의 정은 지극한 정이기 때문에 자기 어머니께서는

"아 저놈이 저러다간 굶어 죽겠구나!"

자기 어머니가 공양(供養)을 들고서 자기 아들한테 간단 말입니다.

그렇게 흉악무도한 아들이지만

어머니는 모정으로 해서 아들에게 밥을 주려고 가까이 갑니다.

사람을 99인을 죽였으니 사람이 환장이 안 되겠습니까.

사람을 99명을 죽였으니 눈이 바로 설 수 있겠습니까.

자기 어머니가 어머니로 안 보입니다. 그래서 그 욕심만 생겨서 내가 빨리 도통해서 그래서 신통자재해서 많은 사람을 내가 지배하고 내가 한없는 행복을 느껴야 하겠구나.

이러한 탐욕심(貪慾心) 때문에 눈이 가려서 마음이 어두워서 자기 소중한 어머니가 어머니로 안보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칼로 치려고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멀리 계셨지만 부처님의 신통자재하는 그러한 묘지(妙智)로 해서 바로 그 앙굴마라 앞에 부처님이 나투셨습니다.

장사 같은 그 사람이 칼을 내려쳤지만 우주를 움직이는 부처님의 힘에 당하겠습니까.

앙굴마라의 그 칼을 든 팔이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앙굴마라가 부처님 제도를 받고 승려가 되었습니다. 승려가 되어서 오래지 않아서 자신의 모든 죄를 참회(懺悔)하고 어떻게 지독하니 공부를 했던가,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성취했습니다. 아라한과는 성자의 지위입니다. 99인을 죽인 그 사람이 공부를 해서 성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사바세계(娑婆世界), 인간 가운데 그 보다 더 악독한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따라서 그 사람도 역시 99인을 죽였다 하더라도 상대 유한적인 그런 문제는 우리 근본적인 절대적인 물질이 아닌 시간성도 공간성도 없는 우리 소중한 진여불성(眞如佛性)을 오염 시킬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경우도 절대로 비관할 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한탄스러운 것은 소중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았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염염상속(念念相續)으로 상속을 못시킨단 말입니다. 밥 먹을 때 끊어지고 누구하고 이야기 할 때 끊어지고 텔레비전 볼 때 끊어지고 다 끊어져 버립니다. 정말로 우리 생명은 무상(無常)합니다.

무상이라 하는 것은 덧이 없다. 다만 찰나도 믿을 것이 없는 것이 무상입니다.

사람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도 우리 범부의 마음은 조건부(條件附)입니다. 자기한테 좀 좋게 하니까 나한테 좋게 하는 것이지, 조금만 기분 나쁘게 해보십시오. 내외간에도 아무리 사랑한다 하더라도 남편이나 아내나 마음에서 그 시기심이 나도록 까지 해보십시오. 그냥 돌아서 버립니다. 우리 중생 마음은 애정(愛情)이나 우정(友情)이나

절대로 절대적(絶對的)인 애정도 우정도 없습니다. 모두가 조건부입니다.

따라서 참말로 애정, 참말로 우정 같은 것은 성자만이 변동이 없습니다.

성자(聖者)한테는 욕을 하던 칼을 겨누어서 목을 찌르건 성자의 마음은 변동이 없습니다.

성자라 하더라도 자기 목을 찌르는데 왜 변동이 없을 것인가? 성자는 이 몸뚱이를 우리 중생 같이 소중하게 안봅니다.

이따위 몸뚱이 있으나 없으나 무방하단 말입니다. 몇 십 년밖에 못 쓰는 이 몸뚱이가 없어진다 하더라도 곧 죽어 없어진다 하더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중생이 생각하기를 소중한 이 몸뚱이가 다시는 생기지 않는다. 사실은 그러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죽자마자 그 순간 몸 받습니다. 바로 순간 몸 받습니다. 우리가 바로 살았으면 지금까지 쓰던 몸보다도 더 훨씬 좋은 몸을 받습니다. 


-. 피안(彼岸)의 길 [4]


좀 더우시더라도 참으시고 제 말씀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 계시는 처소로 저 천리만리 먼 길에서 부처님 소문을 듣고서 부처님을 뵈러 오는 두 수행자가 있었습니다. 오는 도중에 두 수행자가 천리 길을 물어 물어서 부처님을 뵈러 온단 말입니다. 그 도중에 사막도 있고, 인도에는 데칸고원과 같은 험난한 곳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데를 거쳐서 오는 것이므로, 더구나 지금같이 교통수단이 좋을 때도 아니므로, 도보로만 사뭇 걸어오기 때문에 굶기도 하고 물이 동나서 갈증 때문에 갈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때 다행히 사막의 어느 만큼 가니까 풀숲이 있는데 그 속에 조그마한 웅덩이가 보인단 말입니다.

그 웅덩이에는 피라미 같은 작은 고기들이 헤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 웅덩이의 물이 한 움큼도 안 되었는데 그 기분 같으면 죽도록 갈증이 심하므로 한 입에 그 물을 다 들이 키고 싶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웅덩이에 있는 피라미 같은 고기들은 응당 죽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두 수행자 가운데 한 수행자는 내가 저 물을 마시면

살아서 그렇게 소중한 부처님한테 가서 내 생명보다 더 소중한 부처님을 만나 뵐 것인데 내가 이 물을 안 먹고 죽으면 그 소중한 부처님을 만나 뵙지 못하지 않는가?

이렇게 해서 한 수행자는 간절히 그 물을 먹고 싶고,

또 한 수행자는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생명은 다 같은 것인데 내가 저 물을 먹어버리고 저 피라미들을 죽게 할 것인가? 이렇게 회의를 품었습니다. 그래서 저 물을 절대로 내가 죽더라도 먹을 수가 없다. 그 수행자는 그 물을 마시지 않고 정말로 목이 말라서 몇 걸음 못가서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 물을 마신 또 다른 수행자는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부처님 회상(會上)에 가서 부처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부처님을 만나 뵙고 그 부처님의 감로법문(甘露法門)을 들을 때에 "나는 가까스로 살아와서 부처님 법문을 듣는데 그렇게 성실(成實)하고 자비(慈悲)스러운 내 도반(道伴)은 불행히도 부처님의 감로법문을 듣지 못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할 때 도저히 눈물이 나와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처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서 "그대는 내 말을 듣고서 왜 그토록 슬퍼하는가?"

부처님께서 미소를 띠우면서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전후 사정을 다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무량지혜(無量智慧)를 분명히 알고 믿어야 합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해서 왔는가. 저 사람의 벗이 어떻게 죽었는가.

부처님은 다 알으신단 말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는 다 아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우리 불성(佛性) 자리를 아! 기분이 좀 좋겠지. 우리가 불성을 깨달으면 좀 상쾌하겠지. 그러한 정도의 자리가 절대로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전후(前後) 사정을 다 아시므로 방긋이 미소를 띠우면서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비구가 눈물을 거두면서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실은 저의 벗이 같이 오다가 저는 그 물을 마시고서 가까스로 부처님을 뵙고 청량법문(淸凉法門)을 듣는데, 제 벗은 그 곳에서 물을 마시지 않고서 그냥 쓰러져 버렸기 때문에

부처님의 소중한 생명(生命)의 가르침을 듣지 못해서 슬퍼서 그러합니다. 그러하니까 부처님께서 그대 벗은 죽자마자 도리천(宧利天)에 태어나서 지금 내 뒤에서 그대를 보고 참 성실한 친구이구나. 이렇게 찬탄하는 마음으로 내 법문을 듣고 있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만 전부라고 절대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철갑(鐵甲) 속에 들어 있다 하더라도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몇 미터 두께의 철갑 속에 들어 있다 하더라도 우리 행동 다 보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못 보니까 내가 아무렇게나 해야 쓰겠지.

소인들은 보통 남이 보지 않을 때에 아무렇게나 행동합니다.

그러나 남이 안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영통(靈通)한 그런 분들은 - 가사 신장(神將)이 미국(美國) 가서 있다 하더라도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하시는 것을 다 보는 것입니다.

신장의 눈은 물질계(物質界)의 한계(限界)라는 것은 아무런 장애(障碍)가 되지 않습니다.

왜 그러는 것인가?

우리 불자님들 이 소식도 저한테 여러 번 들으셨지만 제가 다시 또 말씀 드립니다.

물질이라 하는 것은 본래로 없단 말입니다. 아! 공간성도 시간성도 있는,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자연계가 모두가 다 물질이 아닌가? 지구 덩어리도 또는 삼천 대천 세계,

또 지구의 60억 인구도 은하계도 모두가 물질이 아닌가? 그런 물질이 부처님 법으로 보면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도리를 모르면 소승(小乘)이고, 이러한 도리를 알아야 대승(大乘)입니다. 기왕이면 다 대승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대승이 되어야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성난 파도가 솟구치는 생사고해를 건널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생사고해에서 다시 함몰되고 맙니다.

우리 중생이 이것이 물질이다 하지만 그렇게 물질이 실존적으로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내 마음으로 내가 좋다고 느끼는 그 감각(感覺)이 본래 자취가 없지 않습니까.

또는 내가 상상(想像)하는 개념들이 자취가 없지 않습니까.

내가 의욕(意慾)하는 내 의지가 어디 눈에 보입니까.

내가 좋다, 궂다, 분별시비(分別是非)하는 그러한 우리 의식이 어디가 존재합니까.

이러한 것들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중생들이 명명백백(明明白白)으로 이것은 산소(酸素)다, 이것은 질소(窒素)다, 이것은 분자(分子)다, 이것은 세포(細胞)다, 이것은 내 몸이다. 라고 하는 이러한 것들이 본질에서, 본바탕에서 보면 있지가 않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있지가 않으면 이러한 것들은 무엇인가? 저 산골짜기의 메아리가 있지 않듯이, 그림자가 실재가 아니듯이, 물속에 비치는 달그림자가 실재가 아니듯이, 물질 이것은 하나의 우리 염(念), 마음의 파도에 불과한 것입니다. 에너지가 바로 우주의 정기(精氣) 아닙니까. 우주의 정기 이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시간성(時間性), 공간성(空間性)이 없으므로 물질(物質)이 아닙니다.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제 아무리 어렵더라도 이 소식을 되 뇌이고 되 뇌이고 해야 이 몸뚱이 어느 순간 부처님한테 다 바치든가 말든가

또 남을 위해서 이 몸뚱이 바쳐도 아무런 회한(悔恨)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내 몸뚱이가 실제로 있다. 내 재산 이것이 꼭 내 소유이다. 이 감투가 내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한에는 참다운 지혜, 참다운 자비, 참다운 사랑, 참다운 우정은 못 나옵니다.

에너지의 파동이 이렇게 진동해서 전자(電子)가 되고, 저렇게 진동해서 양자(陽子)가 되고 도 그래서 중성자(中性子)가 되고 이러한 것들이 결합해서 산소(酸素)가 되고, 수소(水素)가 되고 세포(細胞)가 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지 실존적(實存的)으로 그러한 파동이 머물러 있지가 않습니다. 그러한 파동만이 있는 것이지 그것이 물질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不確定性)의 원리라,

저 미세한데 가서는 무엇이라고 확정을 지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리학(物理學)의 증명(證明)입니다.

소립자(素粒子)와 같은 저 미세한데 가서는 어떻게 정의를 내릴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 운동량(運動量)을 정확히 측정하려고 하면 그 위치(位置)를 알 수 없는 것이고, 그 반대로 위치를 정확히 측정하려고 하면 그 운동량이 불확정적입니다.

또 그 언저리에 가서는 시간성도 공간성도 어떻게 측정할 수가 없습니다.

또는 입자(粒子)인가 파동(波動)인가 하는 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이러한 것을 명백히 우리한테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 모두는 색(色)인 물질이나 소리나 냄새나 맛이나 촉감이나 이러한 것은 모두가 다 이것은 불성(佛性)의 진여법성(眞如法性)의, 진여불성(眞如佛性)의 하나의 형상화(形象化)이다.

진여불성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억울하게도 그림자를 보고서 사실이라고 보고, 우리 중생은 실지 성품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렇다는 것을 알아야 부처님 제자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모든 것은 그림자입니다. 우리 중생이 있지도 않은 것을 보고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싸움이 생기고 몇 천 번 싸워 이겨 봐도

우리한테는 아무 소득이 안 됩니다. 결국은 공멸(共滅)이라, 같이 망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가 속물근성(俗物根性), 눈에 보이는 허망한 것만 집착(執着)하고 살면

우리 지구상에 전쟁은 영원히 끝이 없습니다. 우리가 절을 가지고 있으면서 부처님 법을 포교한다 하더라도 내 신도(信徒), 네 신도, 저 사람은 내 절의 신도가 아닌데, 이러한 식으로 생각해서는 화합을 못합니다. 우리는 부처님 법을 실상대로 껍질에 걸리지 말고 알맹이대로 믿어야 합니다. 알맹이대로 믿어야 하루 닦으면 닦은 만큼 자기 마음이 차근차근 정화(淨化)가 되어 갑니다. 그렇게 닦아야 어느 누구하고도 다 화합(和合)을 합니다.

필요하면 자기 몸뚱이도 줄 수가 있는데 누구하고 화합을 못하겠습니까.

그렇게 살아가면 자기 몸에 대해서 별로 부담을 못 느낍니다.

이 몸뚱이 오늘 죽어도 무방, 내일 죽어도 무방할 것이 아닌가.

꼭 녹용이나 인삼을 먹여야 할 것인가? 이러한 것을 먹는다고 꼭 오래 사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과거 전생에 얼마만큼 바르게 살았는가. 금생에 얼마만큼 바로 살았는가.

내가 바로만 살았다고 생각할 때는 천지신명(天地神明)이 우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땅도 지키고 나무도 지키고 나무와 내가 둘이 아니고 자연과 내가 둘이 아니고 천지 우주와 내가 둘이 아니거든 내가 바로만 살면 나무도 숲도 개도 범도 사자도 모두가 다 나를 지키는 것입니다. 범이나 사자나 개나 그러한 짐승들이 무슨 이성적(理性的)인 뜻이 있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을 마십시오.

우리는 절에 가면 산신탱화(山神幀畵)를 보시지 않습니까. 산신님이 그 영악스러운 범의 머리를 어루만지는 것을 보십시오. 마치 고양이같이 산신님 앞에서 부드럽게 다소곳이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산신(山神)은 무엇인가? 산신 이것은 부처님의 정기가 산에가 있으면 산신입니다.

부처님의 정기가 물에가 있으면 용왕(龍王)입니다. 그러면 부처님 정기가 백두산이나 지리산이나 그러한 큰 산에만 있는 것인가? 부처님 정기는 그러한 큰 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그마한 손톱 위에 놓을 만큼 작은 흙더미 가운데도 부처님 정기는 충만해 있습니다.

무장무애(無障無楝)라, 부처님 정기는 조금도 대소의 한계가 없습니다.

유한상대(有限相對)의 물질계에 크고 작고 많고 적고의 한계가 있는 것이지,

부처님 세계에서는 크고 작고 또는 많고 적다는 한계가 없습니다.

따라서 나한테 있는 부처님 정기나 - 나한테 있는 정기는 내 마음입니다. - 물에 있는 부처님 정기인 용왕이나 산에 있는 부처님 정기인 그런 산신이나 또는 별에 있는 부처님 정기인 묘견보살(妙見菩薩)이나 모두가 다 똑같은 하나의 정기(精氣)입니다. 한계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부처님한테 가는 길 외에 우리가 가야할 다른 선택의 길은 없습니다.

다른 선택의 길은 다 윤회(輪廻)의 길입니다. 뱅뱅 돕니다.

우리는 정말로 부처님 가르침을 결정신심(決定信心)으로 결정코 받아 들여야 합니다.

결정코 믿기 위해서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면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면 나무아미타불,

무(無)자 화두면 무자 화두,

옴마니반메훔이면 옴마니반메훔,

자기가 하는 공부를, 자기 집에서 공부하는 그 순간뿐만 아니라,

입으로는 밥을 먹어도 속으로는 부처님의 공부가 그대로 흘러 있단 말입니다.

잠을 잘 때도 우리가 부처님을 흠모추구(欽慕追求)하고

부처님한테 지향하는 마음이 그대로 흘러 있단 말입니다.


-. 피안(彼岸)의 길 [5]


흘러가는 물도랑을 왼쪽으로 내면 물이 왼쪽으로 흘러가고 물도랑을 오른쪽으로 치면 오른쪽으로 흘러가지 않습니까. 그와 똑같이 우리가 잠자기 전에 텔레비전이나 보고 재미스러운 그것만 생각하면 꿈속에서도 그러한 것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부처님을 생각하고서 잠이 들면 우리가 꿈속에서도 내내 부처님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잠을 자면서도 공부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공부하기가 이렇게 참 쉬운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꿈도 가볍고 잠을 깬 다음에는 몸도 굉장히 가볍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살기가 쉬운 것인데 자꾸만 자기가 지어서 어려운 쪽으로만 갑니다.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 공부를 계속적으로 하면, 지속적으로 하면, 염염상속(念念相續)을 하면, 그 때는 우리 마음이 차근차근 부정적인 업장(業障)의 씨앗보다는 선업(善業)의 종자가 차근차근 더 맑아집니다. 선업의 종자가 나쁜 업장의 종자보다 비중(比重)이 더 많으면

결정신심(決定信心)이라. 우리 공부가 이제는 후퇴(後退)가 안 됩니다.

우리 잠재의식에 그런 선업의 종자가 악업의 종자보다 더 많으면 그때는 우리 공부에 후퇴가 없습니다. 그러나 보통은 우리가 조금 더 노력하면 선업의 종자가 많았다가,

또 함부로 게으름 부리면 적었다가, 이렇게 시소게임같이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따라서 결정신심으로 해서 기어코 내가 해내겠다. 이렇게 제가 말씀드려도 실감이 잘 안가시겠지요. 참선(參禪)을 해도 참선 그것이 쉬운 것이 아니지 않은가, 꽤 어렵고, 염불(念佛)을 하거나 기도(祈禱)를 모셔도, 삼일이나 일주일 동안이나 모시면 굉장히 어렵지 않겠는가.

이렇게들 생각합니다만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어렵지 않으나 무슨 일이나 한 고비가 있지 않습니까. 한 고비를 올라갈 때는 좀 어려워도 고비만 올라서면 그때는 내리막길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고비까지 못갑니다.


잠이 쏟아지게 오고 그렇게 망상(妄想)도 많이 나오고 몸도 괴롭고 다리가 쑤시고

어깨가 저리고 이러한 때가 누구나 다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몸뚱이 죽어도 별 것이 아니다. 이 몸뚱이에 대한 애착만 놓아버리면 빨리 고비가 옵니다. 빨리 고비를 넘습니다. 그러나 자기 몸뚱이 애착을 못 놓으면 공부를 좀 한다 하더라도 고비를 못 넘고 맙니다. 고비를 못 넘으면 자기 몸뚱이가 항시 천근만근 무겁단 말입니다.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천지우주에 물질은 눈곱만큼도 없고 다 모두가 불심(佛心), 부처 마음이란 말입니다. 순수 에너지, 우주의 정기, 불심, 부처 이것만이 우주에는 존재하고 다른 것은 모두가 다 우주 에너지인 불심이 어떻게 진동하는가, 어떻게 운동하는가, 어떻게 결합되는가, 그것에 따라서 상(相)만 보입니다. 우리 중생(衆生)은 상(相)만 보고 진정한 불심(佛心)은 못 봅니다. 따라서 내가 보는 것은 좋든 궂든 이것은 다 실재가 아닌,

물위에 비치는 달그림자, 또는 산골짜기에서 울리는 메아리, 또는 형체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그림자, 이렇게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부처님 법을 믿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물질은 조금도 없기 때문에 내 소중한 몸뚱이도 물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내 소중한 몸뚱이가 물질이 아니거니 물질이 아닌 자기 몸이 무슨 무게가 있습니까.

몸이 무게가 없습니다. 산길을 몇 십리나 올라가면 피로하시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그러한 때는 부처님 법을 반조(返照)해서 한 번 생각하십시오.

내가 지금 분명히 다리가 아프고 무거운데 본래에서 보면 이 몸뚱이가 없지 않은가, 공이지 않은가, 공이므로 무게가 없지 않은가, 무게만 없을 뿐만 아니라 맛도 촉감도 없지 않은가,

촉감도 없을 때는 아픈 것도 없지 않은가. 아픈 것도 무게도 맛도 모두가 다 본래는 없습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 도리를 다 아사지 않습니까.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이라.

색이나 소리나 냄새나 맛이나 촉감이나 또는 우리 의식이나 모두가 텅 비었단 말입니다.

이 무게가 없는 것을 우리 나쁜 습관 때문에 삼독심(三毒心)을 못 떠나버린

우리 잘 못된 그런 무지(無知) 때문에 이 몸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 순간부터 차근차근 무게가 생깁니다.

돌이켜 보면 생각이 무슨 무게가 있겠습니까. 중생의 마음은 애착을 품을수록 무게는 더 무거워집니다. 애착을 품을수록 조금만 아파도 그냥 아픈 것을 잘 못 참습니다.

이 몸뚱이 내 것도 아닌데 죽든가 말든가 이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영양소를 많이 안 먹여도 살아가고 몸이 가볍게 지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몸뚱이의 노예가 되어서 살 필요가 없습니다. 금(金), 은(銀), 다이아몬드로 우리 몸을 장식할 필요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차라리 몽땅 놓아서 남한테 베풀면 그것이 공덕(功德)이 됩니다.

정말로 우리가 바로 살아야 합니다. 부처님 제자라는 것은 그냥 말로만 듣고 그렁저렁 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태국(泰國)의 잠롱 시장 보십시오. 얼마나 좋습니까. 적게 먹고 적게 쓰고 많이 벌어서 남한테 베풀고 이렇게 되어야 참다운 불자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재가불자(在家佛子)입니다. 내가 있는 절이 설사 아무도 오지 않아서 지붕에 비가 새어서

하는 수 없이 그 집이 쓰러지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기왕이면 쓰러지지 않고 좋은 전당이 되면 좋겠지요. 그러나 내가 전생에 복(福)을 못 지어서 나한테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서

내가 사는 절이 지금 곧 쓰러진다. 그런다 하더라도 그 밑에서 도인(道人)이 나오면 됩니다.

천막을 치고 있다 하더라도 무수한 불자가 모여서 바른 부처님 공부를 하면 됩니다.

그러나 가급적이면 무리 없이 정다웁게 해서 장엄스러운 전당이 있으면 좋겠지요.

그러나 절대로 부처님 법도를 떠나서 해서는 안 됩니다.

나와 남이 둘이 없고 모든 중생이 다 본래로 부처님이라,

99인까지 죽인 사람도 부처님께서는 조금도 차별 없이 대했습니다.

그것이 불심입니다. 우리는 관세음보살님이 손을 척 들고서 어떠한 중생이나 나는 헤치지 않는다. 그대가 총으로 나를 쏜다 하더라도 나는 그대를 헤치지 않는다.

이것이 관음보살의 무외시인(無畏施印)입니다. 없을 무(無)자, 두려울 외(畏)자, 베풀 시(施)자, 그대는 나한테 조금도 두려움을 갖지 말아라.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그렇게 안 됩니다.

조건부로 저 사람이 나한테 좋게 할 때 미소를 띠우지만 한번만 욕하면 그냥 소리를 높입니다. 우리가 부처님한테 나아가는 길, 이것은 세상에 더없는 행복 된 길입니다.

모두를 다 바쳐도 이것은 조금도 후회가 안 되는 길입니다. 그러면 내 아들이 못살지 않는가, 또는 무엇이 못되지 않는가, 절대로 못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부모가 부처님 길을 바로 간다면 자기 아들한테 여태까지 밥을 세끼를 주다가

한 끼만 주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공덕이 못되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더 큰 공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누구한테나 어느 친구한테나 남편한테나 아내한테나 자기 제자한테나 모든 누구한테나 부처님 법으로 인도하는 것 외에 보다 더 큰 베풀음은 없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먼저 정다웁게 법(法)답게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결정신심이 딱 되어서 후퇴가 없는 신심, 후퇴가 없는 신심은 우리 의식 가운데에 나쁜 업보다는 좋은 업이 보다 비중이 더 많은 때에 후퇴가 없습니다. 반반(半半)이면 그때는 위험하겠지요. 그리고 우리 마음에 있는 업(業)의 종자가 더 많고 그 반대로 해탈(解脫)의 종자가 더 적을 때는 항시 우리는 불안스럽고 후퇴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단히 공부해서 상속적으로 - 지금 이 말씀을 들으실 때도 여러분들 마음을 훤히 밝은 조금도 일그러짐이 없는낳지 않고 죽지 않는 그 부처님의 그 광명의 자리, 그 자리에 마음을 두고 들으십시오. - 누구한테 가서 부처님 경론을 듣는다 하더라도

여러분들 스스로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을 보신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성품자리에 가 있으면서 법문을 보고 듣는다면 아! 그렇구나, 그냥 납득이 되십니다.


-. 피안(彼岸)의 길 [6]


우리 근본 성품은 앞서 말씀과 같이 한도 끝도 없는 보배입니다.

여의보주(如意寶珠)라! 모든 보배가 다 나오는 보배중의 보배가 우리 마음입니다.

천지를 다 얻는다 하더라도 이 보배를 놓치면 우리한테는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 보배가 꼭 옳다고 믿는 그 마음, 그 마음이 우리 불자인데 거기까지 되었다 하더라도 아직은 간혜지(乾慧地)라. 바싹 마른 지혜입니다. 바싹 마른 지혜는 우리를 생사해탈(生死解脫)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인생고해(人生苦海)를 건너갈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건너갈 것인가? - 저희들이 혹시 다시 못 만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여러분들께서 기억을 확실히 하시기 위해서 말씀드립니다. - 별시(別時) 공부라!

우리 공부하는 방법을 안다 하더라도 하루나 이틀이나 사흘이나 일주일이나

한 달이나 또는 몇 달씩이나 이렇게 지속적으로 공부하는 기회를 가지셔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의 지혜가 바싹 마른 간혜지가 되지 않고 참다운 진지(眞智)라, 참다운 지혜가 됩니다. 우리 성자가 아닌 지혜는 모두가 바싹 마른 지혜입니다.

바싹 마른 지혜로는 우리를 참다웁게 해탈 시킬 수가 없습니다.

참다운 행복을 보장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참다운 해탈만이 진정한 자유(自由)요. 진정한 행복(幸福)입니다. 진정한 영생(永生)입니다. 따라서 여기에 가기 위해서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떠한 공부 방법이 되었던 우리가 하는 공부를

‘오, 주여!' '하나님이여!' 그것도 좋습니다. 내내야 어느 것이나 표현은 상관이 없고

그 내용의 알맹이가 모두가 다 내 생명(生命)의 본체(本體)인 동시에 우주(宇宙)의 본체(本體), 그 자리에다 우리 마음을 두고 공부 하신다면 이름은 어떻게 부르나 상관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 자리를 사흘이고 나흘이고 한 달이고 그렇게 지속적으로 공부를 하셔야

그래야 우리 마음이 부정적인 업보다도 긍정적인 선업의 힘이 차근차근 강해집니다.

그렇게 되는 것인데, 그렇지 못하고서 그냥 일상적으로 매몰되어서 앞서 말씀드린 충실한 아내, 충실한 남편, 충실한 어버이, 다 이렇게만 되면 그만 아닌가, 아들한테 우리가 잘할 때도 부처님 자리를 안 떠나야 합니다. 남편한테 잘 할 때도 부처님 자리를 안 떠나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공부가 손해를 보지 않습니다. 상대 유한적인 것에 휘말려버리면

제 아무리 인간적인 의미에서 아들한테 딸한테 아내한테 잘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해탈의 공부는 못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한테든지 우리가 인간인지라 다 잘해야 하겠지요. 좋은 아내, 좋은 남편, 좋은 부모가 꼭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냥 상대적인 효성(孝誠) 또는 상대적인 자비(慈悲) 이러한 것은 참다운 사랑, 차다운 효성, 차다운 자비가 못됩니다. 우리 마음이 진여불성(眞如佛性)에 머물러 있으면서 해야 참다운 효성이고 참다운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참다운 우정입니다.

이렇게 하는 공부를 별시 공부라, 다를 별(別)자, 때 시(時)자입니다.

사흘이나 일주일이나 한 달이나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우리 출가한 스님 네들은 기도를 모시고 불사(佛事)를 많이 하시지 않습니까.

자기 소원은 커다란 집을 지어서 모든 중생들을 공부하게끔 하고 싶다.

이렇게 소원을 세우지만 소원이사 누구나 세울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그 소원이 성취가 되기 위해서는 쉽지가 않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기도를 잘 모시고 참선을 많이 해서 우리 마음이 불심하고 거리가 가까워져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불심하고 거리가 가까워지고 또 우리 정성이 산에 있는 산신, 물에 있는 용왕 또는 흙에 있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의 영험스런 기운 또 천지우주는 부처님 기운으로 되어 있으므로 우리가 부처님 공부를 하면 나무나 흙이나 모두가 다 우리가 하는 행동에 감동(感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 불사가 다 잘 됩니다.

이렇게 해서 별시공부, 사흘이고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정말로 인생이 급합니다.

어언 간에 가버립니다. 올해는 그렇게 할 수가 없고 명년(明年)되면 아들도 딸도 여의고

일주일이나 공부해야지, 이렇게 생각을 마십시오. 사람은 허망하지 않습니까.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가장 중요한 것이 머리 위에 붙은 불을 끄듯이 자기가 지금 좋은 집에 못살아도 손해가 없습니다. 그런 것이 무슨 문제입니까.

우리 마음이 얼마만큼 부처님한테 가까이 접근 했는가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와 같이 해서 우리 마음이 부처님과 가까이 되면 부처님은 분명히 우주에 가득 찬 광명(光明)입니다. 부처님은 지혜와 행복과 자비와 일체 공덕을 갖춘 광명입니다.

그러한 광명을 그런 보배를 우리가 순간순간 보십니다. 그런 가시적인 눈부신 광명이 아니라 청정광명(淸淨光明)이라. 어디에 걸림이 없고 산에도 걸림이 없고, 천지우주의 어느 별에도 걸림이 없고 우주에 무장무애라 우중 걸림이 없는 그런 광명을 우리가 순간순간 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광명을 못 보았으면 우리 공부가 아직까지 번뇌(煩惱)가 그만큼 남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마음은 원래 광명입니다. 우주의 순수 에너지는 원래 광명인 것입니다.

전자나 양자나 또는 광자(光子)나 모두가 다 방사광선(放射光線)입니다.

일체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이른바 전자기(電磁氣), 그것이 광명 즉 빛입니다.

그런 빛이 물리학적으로 볼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인 빛이 우리가 공부를 하면 우리의 청정한 안목으로 해서 우리한테 비추어 옵니다. 그러한 빛의 일부가 흐릿하나마 우리한테 비추고 있는 것이 우리 눈 아닙니까. 여러분 지금 반짝반짝 빛나는 여러분들의 눈이 모두가 다 부처님의 광명이 제한 된 채로 비추어 옵니다.

일주일동안이나 또는  며칠 동안 참선을 하고 염불이나 기도를 모시면서 거울을 놓고 자기 눈을 보십시오. 어린애 눈같이 맑게 비춰 옵니다. 우리 생명은 바로 빛입니다.

그러한 빛을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속적으로 별시수행(別時修行)으로

사흘이나 일주일이나 한 달이나 이렇게 하시면 꼭 보시는 것입니다.

꼭 그 빛을 보신 다음에는 공부에 후퇴가 없습니다.

정말로 부처님 공부는 거짓이 없구나. 빛을 볼 때는 자기 몸이 조금도 무게가 없이 환희용약(歡喜踊躍)이라. 그러한 빛을 볼 때는 그… 하니 환희용약이라.

마치 뛰놀 듯이 감격(感激)과 행복(幸福)을 느낍니다.

자기 몸뚱이 홀연히 순교(殉敎)도 하고, 그런 사람들은 그와 같은 광명(光明)을 나름대로 조금씩 경험한 사람들이므로 그렇게 순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광명이 공부가 차근차근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더욱 더 광범위하게 빛나서 드디어는 우주 전부가 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우주의 두두물물(頭頭物物), 우주 만상의 모두가 다 광명으로 빛나버린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주는 광명의 세계가 됩니다.

극락세계(極樂世界)는 바로 광명의 세계입니다.

화장세계(華藏世界)라, 극락세계라, 광명세계(光明世界)라 모두가 하나의 뜻입니다.

하나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꼭 부처님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이것은 생명의 가르침입니다.

다시 우리가 반항(反抗)할 수 없는, 다시 아니 갈 수 없는, 우리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오직 외길 청정(淸淨)한 길입니다. 이 길도 그렁저렁 가서는 소중한 보배를 얻지를 못합니다. 내 생명의 참다운 자리, 참 진(眞)자, 나 아(我)자 진아(眞我), 큰 대(大)자, 나 아(我)자 대아(大我), 참다운 자기 본래면목(本來面目), 그 자리가 바로 참다운 자기 주체(主體)입니다. 그 자리를 안 떠나고 말하고 행동하고 또는 정치를 하고 그래야 주체성(主體性)을 안 떠나고 한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우리 마음, 본래 부처, 우리 마음은 거리낌이 조금도 없습니다.

물질이라는 것은 원래 아무것도 없이 모두가 다 불심(佛心)으로 충만(充滿)해 있습니다.

성자(聖者)의 눈으로 보면 오직 불심만이 우주에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잘 못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그림자나 가짜만 보는 것입니다. 꼭 자기한테 맞는 수행법(修行法)을 골라서 꼭 사흘이나 일주일이나 한 달이나 별시수행(別時修行)을 하십시오.

 별시수행으로 해서 공부하는 것은 제아무리 바쁜 사람이라 하더라도 가장 소중한 일을 선행적으로 하시는 것이 됩니다.

지금 주부로서 자기소임을 다 하시면서 충분히 공부하실 수가 있습니다.

자기 직장이 있다 하더라도 연가(年暇)를 내 가지고서 어디 가서

일주일이나 한 달이나 공부해도 좋습니다.

어떻든 간에 별시수행(別時修行)으로 내 생명의 본바탕인 동시에

모든 생명의 본바탕인 이런 광명을 본다면

자기 좋고 자기 동생 좋고 집안 좋고 사회 좋고 다 좋은 것입니다.

어느 회사에 그러한 사람이 한 분만 있다 하더라도 그 회사의 보배입니다.

꼭 이렇게 하셔서 금생(今生)에 누구한테 꾸어 온 것도 아닌, 돈 투자해서 우리가 찾는 것도 아닌, 가장 기분 좋게 하는 공부, 이러한 공부로 해서 누구나가 좋아하는 그런 공부, 이러한 공부로 해서 금생에 꼭 광명(光明)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광명(光明)을 보셔서 영생(永生)의 행복(幸福)을 누리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석가모니불(南無釋迦牟尼佛)!

나무마하반야바라밀(南無摩訶般若波羅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