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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마음의 고향

제 4 집 3.일여평등(一如平等)

마음의 고향 제 4 집


* 불기2536년(서기1992년) 9월 5일 광주 금륜회의 미타회 창립기념 법회(금륜회관)에서 석 청화(釋 淸華)큰스님께서 설하신 법어입니다.


-. 일여평등(一如平等) [1]


오늘 미타회(彌陀會)에 와서 제가 말씀 드리게 된 것을

충심(忠心)으로 의미 깊게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숙어(熟語)도 많고, 또 학문적인 술어(述語)도 많고,

그러한 개념적(槪念的)인 표현(表現)이 많이 있습니다만,

아미타불(阿彌陀佛)과 같이 우리한테 심심미묘(甚深微妙)한 감동을 주는 말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다양(多樣)한 문화권(文化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다양한 것을 우리가 어떻게 소화를 해야 할 것인가? 예술(藝術)은 예술대로, 문학(文學)은 문학대로, 과학(科學)은 과학대로, 저마다 인간(人間)의 어려운 문제를 밝히고 있고, 인간의 행복(幸福)이 무엇인가? 하는 그런 문제를 말씀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어떻게 관계(關係)지어지는가? 또는 그런 모든 다양한 문화현상(文化現象)을 어떻게 우리가 통합(統合)을 시킬 것인가? 그러한 문제는 불안(不安)한 시대에 사는 우리들로 해서는 지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은 우리 마음이 이래저래 헛갈리고 있어 놓으면 우리 마음이 안정(安定)이 안 됩니다. 우리 마음이 안정이 안 되어서 불안한 상태로 해서는 우리 마음의 행복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인생고(人生苦)나 생노병사(生老病死)만 두고 본다 하더라도 얼마나 어렵습니까. 행복은 느끼자마자 금방 불행이 닥쳐옵니다. 그렇게 행복스러운 사람이 갑자기 가족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그런 것을 우리가 수 없이 보지 않습니까.

그 외에도 생각지도 않은 그런 불행한 일들이 우리한테 닥쳐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러한 문제도 우리 중생들이 극복하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그 문학이고, 예술이고, 과학이고, 기타 무슨 주의 주장, 이러한 것들이 그야말로 그 헝클어진 실타래 같이 얽히고설키어 있는 것이 우리 현실(現實)아닙니까.

따라서 이런 때에 있어서는 이 모든 것을 용광로(鎔鑛爐)에다 집어넣고서

완전히 용해를 시켜서 하나의 생명체(生命體)로 해결을 해버려야,

그래야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불안의식(不安意識)을 해소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법(法) 자체에는 모든 법(法), 모든 종교(宗敎), 모든 철학(哲學), 모든 과학(科學)등 모든 것이 부처님 법(法)에는 다 들어 있습니다. 완벽하게 들어 있습니다.

가끔 말씀 드린 기억이 있습니다만 부처님의 연기법(緣起法)이라 하는 것은 가장 철저한 과학(科學)입니다. 또 그와 동시에 연기법의 근본(根本)은 무엇인가?

인연(因緣)따라서 이루어졌다가 인연 따라서 소멸(消滅)이 된다하는 인연법(因緣法)의 근원(根源)은 도 무엇인가? 인연법의 근원은 이것은 바로 법성(法性)이고, 법계(法界)고, 진여(眞如)고, 불성(佛性)입니다. 따라서 인연법의 근본을 이렇게 철저하게 해답을 내리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밖에는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 인생(人生)이나 모든 우주(宇宙)존재의 근본이 무엇인가? 근본 실상(實相)은 무엇인가? 이러한 것을 불교는 해결하고 있습니다.

철학(哲學)은 인생과 우주의 궁극적인 진리(眞理)가 무엇인가?

이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철학의 근본 목표(目標)가 되지 않습니까.

헌데 어느 철학도 그러한 것에 관해서 완벽한 해답은 못 내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부처님 가르침에서는 분명하게 모든 중생(衆生)들 모든 존재(存在)가 인연(因緣)따라서 이뤄졌다가 인연 따라서 소멸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생명(生命)의 본질 우주의 근본 요인(要因), 이것이 바로 법계(法界)고 법성(法性)이고 도(道)고 불심(佛心)이고 부처(佛)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제 아무리 철학적(哲學的)으로 궁극적인 진리를 알고, 또 과학적(科學的)으로 이론적(理論的)인, 합리적(合理的)인 체계를 세운다 하더라도 '내 행복은 무엇안가?' 내 마음이 불안(不安)스러운데, 어떻게 하면 행복(幸福)할 것인가?

이러한 때는 우리가 정말로 행복의 당체(當體)하고 하나가 되지 않고는 행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앞서 말씀 같이 모든 존재의 근본이 '부처다, 불성이다' 이렇게 말은 한다 하더라도

불성(佛性)은 저기에 있고, 나는 여기에 있고, 나하고 불성하고 이처럼 대립적(對立的)으로 있다고 생각할 때는 '모든 것의 근본은 불성이다' 이렇게 알고 있다 하더라도 불성에 갖추고 있는 무한의 공덕(功德)이 우리 것으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인생(人生)과 우주(宇宙)의 근본 본질(本質)자리, 근본 생명(生命)자리가 불성(佛性)인데, 불성공덕(佛性功德)이 그렁저렁한 공덕 같으면 우리한테 그것이 별로 요긴할 것이 없겠지요.

그러나 불성 자체는 우리 생명이 그 곳에서 이루어지고 또 그 곳으로 돌아가고, 그와 동시에 불성 가운데는 지혜(智慧), 자비(慈悲), 공덕(功德), 능력(能力)이 원만히 갖추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한사코 그 자리로 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생명이나 모든 생명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이 바로 본질적인 근본이기 때문에 우리가 더디 가고 빨리 가고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좋든 싫든 불성(佛性) 부처님이 될 수밖에는 없습니다.

자신이 지은바 행위(行爲)에 따라서 몇 천 번 윤회(輪廻)를 되풀이해서

지옥(地獄)이나 아귀(餓鬼)나 축생(畜生)이나 그런 데로 굴러 떨어진다 하더라도 본래 성품(性品)은 바로 부처님이기 때문에, 불성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우주의 도리(道理)에 따라서 지금 불성 쪽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주의 모든 존재는 불성 쪽으로 궤도(軌道)를 지금 달리고 있습니다.

그러한 불성(佛性), 그러한 부처님의 이름이 너무나 많단 말입니다.

하도 많기 때문에 불교 말고도 다른 일들이 복잡한데, 지지리 애쓰고 부처님 법 가운데 들어 와서도 너무나도 복잡하므로 어떻게 공부를 하여야 할 것인가 망설입니다.

화두(話頭)를 의심해서 성불(成佛)한다, 또 염불(念佛)을 해서 성불한다, 또는 주문(呪文)을 외워서도 성불한다고 합니다. 또는 기도(祈禱)를 많이 모셔야 복(福)을 많이 받는다.

그런 등등으로 해서 우리가 부처님 품안에 들어와서도 굉장히 복잡합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보살님만 두고 본다 하더라도

지혜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문수보살(文殊菩薩)님의 기도를 모시는 것이고, 또 마장(魔障)이 없이 빨리 통해 버리고 싶은 사람들은 나한도량(羅漢道場)에 가서 나한(羅漢)기도를 모신다고 합니다. 또 영혼(靈魂)들을 천도 할 때는 지장(地藏)기도를 많이들 모십니다.

어느 분들은 하루에도 지장경(地藏經)을 몇 독(讀)씩 하고, 또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좋아서 믿고 있는 사람들한테 관음보살(觀音菩薩)이 더 좋으니 그것 그만두고서 관세음보살님을 믿으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분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모르지만 스님 네나 또는 공부를 많이 하신 거사님들이 그런 말씀을 할 때는 마음으로 의심을 품습니다. 지지리 몇 년씩, 몇 십 년씩 했는데 그 공부를 그만두고 다른 쪽으로 이름을 바꿔야 한단 말입니다.

이런 사례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보살, 부처도 석가여래불(釋迦如來佛),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 치성광여래불(熾盛光如來佛) 굉장히 많지 않습니까. 부처님 명호(名號)도 팔만 사천은 다 못되지만 부처님 불명경(佛名經) 보면 부처님 명호만 해도 몇 만(萬)이 됩니다. 옛날 저희들이 처음 중 될 때는 그 예불(禮佛)을 모실 때 부처님 앞에 꿇어앉아서 부처님 이름만 외워도 무슨 보살(菩薩), 무슨 불(佛), 몇 십분 씩 외웁니다.

지금은 그런 형식이 차근차근 간소하게 줄어 졌습니다만 이렇게 되면 불교가 굉장히 복잡한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런저런 모든 부처님, 모든 보살님 이름을 두루뭉실로 하나로 묶어버린 이른바 총 대명사(代名詞)가 아미타불(阿彌陀佛)입니다.

본사(本師)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 아미타불(阿彌陀佛)입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또 간추리면 그때는 미타(彌陀)라고 합니다. 따라서 미타란 아미타의 간추린 부처님 명호입니다. 부처님께 귀의한다. 우리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의지한다.

그렇게 할 때는 나무(南無)를 붙여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 되지 않습니까.

나무아미타불이라 하나, 아미타라고 하나, 미타라고 하나

똑 같은 뜻이라는 것을 알아 두시기 바랍니다.


-. 일여평등(一如平等) [2]


불법(佛法)은 우리가 이론적(理論的)으로 체계(體系)가 서지 않으면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이렇게 불안한 시대에 갈래가 너무나 많아서 어디로 갈 것인가? 우리가 방황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있어서는 꼭 먼저 바른 견해로 해서 확고부동(確固不動)한 그런 부처님 체계, 이른바 바른 철학(哲學)이 서야 합니다. 현대(現代)에 있어서 우리가 무엇이 부족하다, 학문이 부족하다, 아직은 선진국(先進國)이 못되었기 때문에 물질이 부족하다, 기술도 부족하다, 이렇게 부족한 것을 많이 나열 시킵니다만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게 부족한 것은 철학의 빈곤(貧困)입니다. 바른 가치관(價値觀)의 확립이 안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초등학교에서 어린애들을 가르친다 하더라도 그 스승 되는 분이 사람이라는 것이 대체로 무엇인가? 우리 인간성(人間性)은 무엇인가? 그것을 알아야 그 학생들을 바른 인간으로 지도(指導)할 수가 있겠지요. 바른 인간이 무엇인가, 인간은 대체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인간이 시초(始初)는 어떤 것이고, 인간은 어디로 갈 것인가?

아무리 어린애를 가르치는 스승이라 하더라도 이런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물며 중학교로 올라가고 고등학교로 올라 갈수록 비판적(批判的)인 안목(眼目)이 생기고,

그러한 연령층(年齡層)에서는 더욱 의심(疑心)도 많이 갖습니다.

기독교(基督敎)가 무엇인가, 이슬람교가 무엇인가, 유교(儒敎)는 무엇인가,

벌써 중학생 때부터 그런 의단(疑團)을 갖습니다. 하나님이 더 옳은가? 부처님이 더 옳은가? 이러한 애들한테 명확히 바른 길을 가르쳐 주지 못하면 스승도 숭배를 못 받습니다.

자기 부모님한테도 이러한 문제의식(問題意識)을 가지고 물어보기도 하겠지요.

부모님도 이러한 문제를 해결시켜주지 못하면 우리 부모님도 별 볼일이 없구나. 이와 같이 자기 부모님한테도 불신(不信)을 갖습니다. 그런데 대학 쯤 올라가면 더욱 그럽니다.

요즈음 대학교의 졸업식(卒業式)을 보면 그 총장님이 그렇게 역설하고,

교수님들이 그렇게 단합된 모습을 보이도록 종용을 하는데도

졸업식에도 참여하지 않는 졸업생들이 굉장히 많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스승을 스승답게 숭배하면 그렇게 되겠습니까.

이러한 것은 모두가 다 방금 제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스승으로 해서 인생은 대체로 어떤 것인가, 인생은 대체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러한 것을 분명히 우리한테 제시를 해 주고, 바른 철학을 우리한테 가르쳐 주고, 또 스승도 거기에 따라서 바르게 행동하고,

이렇게 하면 '나를 숭배하라', '나를 따르라' 그렇게 안한다 하더라도 아니 따를 수가 없습니다. 합리적(合理的)으로 그 길이 옳다고 생각할 때는 적어도 대학생 정도 되면 아니 따를 수 없습니다. 그 헝클어진 실타래 같이 얽히고설킨 것이 현대사회(現代社會)인데 그 불안(不安)한 원인(原因)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 불안(不安)하게 얽히고설킨 것을 풀어 가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이고 참다운 철학입니다.

참다운 철학은 불교에서만 있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도 어렴풋이 말씀은 했으나

불교와 같이 명명백백(明明白白)하게 분명하게 말씀한 것은 부처님 가르침밖에는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면 우리는 지금 거창한 철학 같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우선 잘 살아야 하겠고, 우선 장사가 잘 되는 일, 아픔 사람이 낫는 일, 또 자녀들이 좋은 학교에 들어가는 일, 이러한 일들이 가장 초미의 급한 일들인데 그렇게 저 멀리 있는 철학이나 종교는 말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비근한 문제, 우리가 우선 복(福)을 더 받고, 우리 몸도 편하고, 집안도 편하고, 이렇게 하려면 근원적(根源的)인 뿌리부터서 다스려 놓아야 다른 가지나 이파리, 그런 작은 문제들이 술술 풀립니다. 지금은 근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여야 할 그런 때입니다.

바른 국민이 되어야 한다. 남한테 베풀어주고, 남한테 덕(德)을 보이고,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지금 사회가 바로 설 수가 없다. 자기도 항시 괴롭다.

따라서 자기가 사회에 꼭 바른 공헌(貢獻)을 하고, 자식한테 대우를 받고, 친구들한테 대우를 받고, 아내한테 남편한테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또는 국가(國家)적으로도 서로 신뢰(信賴)하는 국가가 되어야 하겠다. 이렇게 하고자 할 때 그냥 덮어 놓고서 '뿌리'도 모르면서 복(福)을 많이 짓고, 기도(祈禱)를 많이 모신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꼭 지금 현대는 신앙(信仰)도 바른 철학과 더불어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참다운 신앙이 못되는 것입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은 부처님의 총(總) 대명사(代名詞)입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은 본사(本師) 아미타불이라!

모든 부처님 이름이 많이 있으나 모두가 다 아미타불로 귀일(歸一)이 됩니다.

아미타불은 다시 더 부언(附言)해서 말씀을 드리면 부처님의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을 다 종합적으로 통합(統合)한 이름입니다. 아미타(阿彌陀)의 아(阿)는 화신을 의미하고, 미(彌)는 보신을 의미하고, 타(陀)는 법신을 의미합니다.

법신, 보신, 화신의 뜻을 잘 모르시는 분은 이 정도는 꼭 알아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기독교도 하나님이 있고, 성령(聖靈)이 있고, 또는 하나님 아들인 예수가 있지 않습니까. 이른바 삼위일체(三位一體)라,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도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이나 우리 불교의 법신, 보신, 화신이나 거의 비슷비슷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법신, 보신, 화신 사상이 보다 더 확실하고 명백한 진리(眞理)입니다.

기독교의 삼위일체도 부처님의 법신(法身)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기독교 성전(聖典) 가운데서 진리(眞理)라고 주장하는 것은 대체로 부처님 경전(經典)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진리 가운데 방편(方便)을 떠난 참다운 도리(道理)는 기독교 성경 가운데 다 들어 있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천지우주와 나는 따로 있다' 우리가 소박하게 생각할 때는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연(自然)은 저기가 있고, 나는 여기가 있다. 우리가 자연은 마음대로 이용해도 좋다.

나무도 마음대로 베어서 집을 지으면 될 것 아닌가. 흙도 우리가 마음대로 파헤치고 비료나 농약을 잔뜩 많이 주어서 수확 많이 내면 될 것이 아닌가. 물 저것도 마음대로 써도 무방하지 않은가. '하이타이'고 무엇이고 우리가 마음대로 사용해서 하천으로 흘러내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자연 그것은 죽은 것이므로, 우리 생명(生命)과는 상관이 없으므로 우리 마음대로 해도 무방하다. 이런 사고방식이 서양(西洋)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모든 문제를 둘로 봅니다. 하나님은 저기 높은 곳에 있고, 나는 여기 낮은 곳에 있고, 너는 너고 나는 나라고 봅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똑바로 알아버리면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 건강하고도 굉장히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 건강이라는 것이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보통은 욕심(慾心)을 지나치게 많이 부리고, 또는 필요 없이 성질(嗔心)을 냅니다. 성을 낼만한 이유가 있어가지고 성을 내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보면 아무런 까닭 없이 성을 냅니다.

내가 저 사람은 밉다라고 했을 때 그 밉다는 마음의 자취가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도 자기 아내와 남편은 좋아할 것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밉다, 곱다 하는 것도 모두가 다 인연(因緣)에 따르는 조건부(條件附)에 불과한 것이지 사실은 그러한 것들이 허망(虛妄)한 것입니다.

우리 중생(衆生)이나 자연(自然)이나, 나나 너나 이런 것은 모두가 다 하나입니다.

'하나'이므로 일여평등(一如平等)이라. 모두가 다 평등(平等)한 것입니다. 이런 말이 어렵다고 생각해서는 소중하게 우리가 사람 몸 받고 태어나서 그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핵심(核心)을 모르고 금생(今生)에 그렁저렁 눈에 보이는 현상적인 상(相)에만 걸려서 그렇게 고생(苦生)하다 소중한 인생(人生)을 다 보내버립니다. 정말로 사람 몸 받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어쩌다가 그래도 과거 전생(前生)에 우리가 무던히 살았기에 사람 몸을 받았습니다.

개나 소는 우리가 잡아먹어도 무방하지 않는가. 개나 소나 그런 것도 겉만 그러한 모양인 것이고, 우리 사람도 역시 겉만 사람 모양을 쓰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 잘못 살아서 지금 개나 소나 닭의 탈을 쓰고 있는 것이지 우리가 근본(根本)에서 생각하면 모두가 같습니다. 똑 같은 것입니다.

우리 사람도 금생(今生)에 잘못 살면 내생(來生)에 개나 소나 돼지가 분명히 됩니다.

부처님 경전에 보십시오. 자기 집 개 한 마리가 전생(前生)의 자기 아버지가 와 있단 말입니다. 부처님과 같은 성자(聖者)의 눈으로 보면 자기 집에서 기르고 있는 고양이 한 마리, 개 한 마리, 자기가 지금 맛있게 먹고 있는 닭다리 하나가 과거 전생에 어버이요,

자기 친구요,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인과(因果)의 도리(道理)를 절대로 무시하지 마십시오.

눈에 보이는 세계만 긍정(肯定)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은 다 방편설(方便設)에 불과하지 않는 것인가. 부처님 말씀은 그와 같은 방편설은 없습니다. 인과필연(因果必然)이라! 그것은 조금도 거짓이 없습니다. 다만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모두가 다 가릴 것이 없이 본래에는 허망무상(虛妄無常)한 것이다. 본래에는 공(空)이다. 이렇다고 해서 개나 소나 돼지하고 나하고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현상적인 모든 것이, 나무 하나, 풀 한 포기 모두 나하고 관계가 있습니다. 제법공(諸法空) 도리, 근원적인 도리에서 보면 우리 중생 차원에서 보는 나요, 너요, 어버이요, 누구요, 이런 관계가 다 허망무상한 것입니다. 그러나 현상적인 차원에서 보면 소중한 부모, 소중한 아내, 소중한 남편, 소중한 친구입니다.


-. 일여평등(一如平等) [3]


자연(自然)과 나와 둘이 아닌 일여평등(一如平等)이라.

일여평등이라는 말을 잘 외우십시오. 한일(一)자, 같을 여(如)자, 다 하나로 평등(平等)하다는 말입니다. 바다에서 그 바람 따라서 천파만파(千波萬波) 파도(波濤)가 일어나도 다 똑 같은 물입니다. 물이 100도에서 비등(沸騰)이 돼서 수증기(水蒸氣)가 되고, 또는 응고(凝固)가 되어서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서 내려오나, 또는 0도 이하에서 얼어서 고체(固體)가 되어도 내내야 수분(水分)은 수분입니다. 그와 똑 같이 부처님이라 하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하는 우주(宇宙)의 정기(精氣), 우주의 순수(純粹) 에너지 불성(佛性)이나 다 같은 뜻입니다.

우리가 그런 말 가지고 시비(是非)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튼 공간성(空間性)과 시간성(時間性)을 떠난 우주의 본 생명(生命), 우주의 실상(實相), 이 자리가 바로 부처이고, 순수 에너지고, 우주의 정기입니다. 이런 우주의 정기가 인연 따라서 이렇게 되고, 저렇게 되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주의 정기 그 자리는 조금도 변질(變質)이 없습니다. 모양만 바꿔지는 것이지 변질이 없습니다. 이러한 도리(道理)를 알아야, 그래야 인연(因緣)을 안다고, 인과(因果)의 도리를 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진여연기(眞如緣起)라, 또는 법계연기(法界緣起)입니다. 불성(佛性), 법성(法性)이 바로 진리(眞理)이기 때문에 참진(眞)자, 같을 여(如)자 진여(眞如)라 합니다.

불성(佛性), 법성(法性), 부처님(佛), 아미타(阿彌陀), 미타(彌陀), 진여(眞如) 똑 같은 뜻입니다. 그런 불성, 그런 진여가 우주의 기운(氣運)입니다. 그런데 그 기운을 우리 중생은 그 애꿎은 탐욕심(貪慾心), 아무 쓸 데 없는 그 성내는 마음 그러한 것으로 오염 시킵니다.

부처님 사상으로 보면 이 세상에 성낼 거리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공연히 성질을 내서 자기 가슴도 상(傷)하고, 자기 몸 상(傷)하고, 옆에 사람도 상(傷)하게 합니다.

또 우주(宇宙)를 오염(汚染)시킵니다. 그러한 것이 우리 안목(眼目)을 가려서 우리 눈이 흐리멍덩합니다. 우리가 성날 때 거울을 놓고서 자기 눈을 좀 보십시오. 욕심(慾心) 부릴 때 자기 눈을 좀 보십시오. 분명히 흐리멍덩합니다. 흐리멍덩해서 우리 중생들은 모든 것의 본바탕인 성품(性品)을 못 봅니다. 허망(虛妄)한 겉모양만 봅니다. 실지로 있지도 않은 꿈같은, 또는 메아리 같은 그런 것을 보고 사실대로 생각하고, 성내고, 남 미워하고, 탐욕심을 내곤 합니다.

기독교(基督敎)나 불교(佛敎)나 간에 우리가 바르게 공부하려면 먼저 참회(懺悔)를 해야 합니다. 나는 공부를 무던히 했는데 나는 제법 양심적(良心的)으로 살았는데 내가 무슨 참회를 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가 범부중생(凡夫衆生)인 한에는 다 참회를 해야 합니다. 나다, 너다 구분하는 그 자체가 죄(罪)입니다. 성자(聖者)가 보면 나와 남이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예수가 원수를 사랑하라. 예수가 원수를 원수같이 보면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겠습니까. 원수 같이 미우면 어떻게 사랑 하겠습니까. 원수가 본래 없기 때문에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원수가 본래 없거니 누구를 보나-당장에 자기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라 하더라도-사랑해야 합니다.

다만 인연(因緣)이 그 겉에 뜬 가상(假想)이 인연 따라서 우리가 잘 못 지어서 그 사람이 내 아버지를 죽였겠지요. 어떠한 것도 우연(偶然)은 없습니다. 우리가 딱 지어서 받습니다.

우리는 좀 애매하게 당하면 그때그때 억울한 것을 호소도 하고, 남한테 보복(報復)을 하려고 합니다마는 어떠한 억울한 일도 우리가 다 지어서 받습니다.

그것은 분명한 인과(因果)의 사실입니다. 금생(今生)에는 비록 애매하다 하더라도 과거 전생(前生)으로 올라가고 또 무수만생(無數萬生)까지 올라가서 생각하면 어느 땐가 우리가 함부로 한참 커나가는 감을 뚝 따기도 하고, 또는 한참 잘 무성하게 자라는 풀도 칼이나 낫으로 쓱싹 베어내기도 하고, 나무도 함부로 베기도 하고, 나무와 나와, 풀과 나와, 물과 나와, 다 둘이 아닌 하나의 생명입니다.

우주(宇宙)는 하나의 생명(生命)입니다. 하나의 생명 위에서 지구(地球) 덩어리가 생기고 달(月)이 생기고, 별(星)이 생기고 풀이 생기고 '나'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앞서 제가 말씀드린 불교의 궁극적인 인생관(人生觀), 철학관(哲學觀)은 무엇인가 하면은

천지우주(天地宇宙)가 일여평등(一如平等)입니다. '일여평등'이라는 말을 꼭 새기십시오.

그래야 미타회(彌陀會)에서 자기도 공부하고, 만중생(萬衆生)을 부처님이 되게끔 하는

그러한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이름과 내용이 걸 맞는 참다운 회(會)가 됩니다.

미타회가 사회사업(社會事業)을 많이 한다. 다 좋습니다. 그러나 사회사업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사업은 무엇인가? 그것은 내 스스로 부처님을 바로 믿고 내 스스로 부처님이 되어 가면서 만 중생과 더불어서 만 중생을 부처님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되도록 하려면 그 사람한테 나쁜 말을 해서도 안 되는 것이고, 자기만 부자가 되고 남이야 어떻게 살던 말든 그렇게 해도 아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른 가르침을 믿도록 하려면 그 사람한테 무엇인가 그 사람 마음을 내키게 해야 합니다. 베풀어 주고, 말도 부드럽게 하고, 겸허하게 대해서 아상(我相)도 안 부리고, 고압적으로 누굴 대해 보십시오.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우리 사람들은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어떠한 누구나 자기가 제일(第一)입니다. 아무리 못난 사람도 자기가 제일입니다. 따라서 자기가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다 부처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강도나 제 아무리 악독한 사람이라도 부처가 되고 싶은 마음은 다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본 성품이 부처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차근차근 부처가 되어 갑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천지우주의 만물(萬物)이 모두가 다 차근차근 부처가 되어 갑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본원(本願)이라. 근본(本)자, 원할(願)자입니다. 부처님은 본원(本願), 근본(根本) 원(願)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바로 우주의 생명(生命)이 부처인데 근본 원이 있단 말입니다. 그 원(願)이 무슨 원(願)인가? 인간(人間)이, 동물(動物)이, 식물(植物)이, 광물(鑛物)이 즉, 만 중생(衆生)이 모두 다 자신이 부처가 되고, 또 만 중생을 부처가 되도록 하고 싶은 원(願)이 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 법문(法門)이 끝도 갓도 없지만 모든 부처님 법문을 다 배워서 깨닫도록 하는 원(願), 그렇게 해서 종당에는 다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한테서 와서 다시 부처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본래가 부처입니다. 그러나 삼독심(三毒心)에 가린 무지(無知)한 마음, 무명심(無明心) 때문에 허망한 모양에 집착하여 실상(實相) 그대로 못 봅니다.

우리가 성인(聖人)같이 무지한 마음이 없으면 다 부처로 보입니다. 앞서 말씀같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인 우주의 정기(精氣)가 운동(運動)해서 우주의 정기가 진동(振動)해서 이렇게 저렇게 모양을 내는 것이 우리가 보는 사람이요, 무엇이요 하는 것들입니다.

이 가운데는 물리학(物理學)을 공부하신 교수님들도 계시고, 또 고등학교 이상 나오신 분들이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면 충분히 이해를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어떠한 것이나 몸뚱이나, 소중히 여기는 금(金)이나, 은(銀)이나 말입니다.

모두가 다 본래는 금이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본래는 이런 몸이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부모님한테 의지해 태어날 때는 우리가 흔적이나 있었습니까.

흔적도 없는 그것이 어쩌다가 부모님이 연(緣)을 만나서 영양을 섭취해서 이와 같은 몸이 되었습니다. 죽은 다음에 이와 같은 몸이 흔적이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공(空)에서 흔적도 없이 나왔습니다.

현대 천체물리학에서 본다면 텅텅 빈자리에서 우주(宇宙)가 이루어집니다.

텅텅 빈자리에서 어떻게 우주가 이루어지는가? 이것도 역시 텅텅 빈 그 자리이지만 우주의 순수한 정기, 순수한 에너지는 물질세계가 텅텅 비어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에너지 불멸(不滅)이라, 우주의 본래 정기는 우주가 파괴(破壞)가 되든 말든 나 같은 몸뚱이 있든 없든 우주의 정기는 조금도 소멸이 없습니다.

낳지 않고 죽지 않고, 더하지 않고 덜하지 않고, 모두가 반야심경(般若心經) 도리 아닙니까.

우주 정기(精氣)인 부처님 기운은 낳지 않고 죽지 않고, 더하지 않고 덜하지 않습니다.

본래 오염되지도 않았으니 또 다시 청정할 것도 없습니다.

이런 것이 우주의 도리입니다. 이러한 것이 인연(因緣)따라서 우리가 미워도 하고, 좋아도 하고, 그런 것이 우주를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미워하는 순간 자기 몸의 세포가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먹은 그대로 우리 몸에 반영이 됩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가만히 명상(暝想)하면서 우리 마음을 가라앉히면 우리 뇌파(腦波)도 차근차근 진동이 고요해집니다. 우리가 산란심(散亂心)을 일으켜서 남 미워하고, 너무 좋아하고, 집착하고 그러면 우리 뇌파도 차근차근 진동 사이클이 더 급해집니다. 크게 성내 보십시오.

노여움이 극에 달하면 그때는 혈압(血壓)이 올라가서 쓰러집니다.

우리 마음의 본 성품(性品)이 바로 부처입니다. 우리 마음의 주인공(主人公)이 부처입니다.

우리 마음이 바로 주인공입니다. 마음 이것은 우주에 가득 찬 생명의 기운입니다.

우리는 부디 내 마음 따로 있고, 네 마음 따로 있고,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잘못 보아서 내 마음은 지금 내 몸뚱이에 들어 있겠지, 이것이 중생의 생각입니다.

마음이 물질과 같이 어디에가 들어 있고 안 들어 있고 하겠습니까.

마음은 어디에가 들어 있고 안 들어 있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 전부가 마음인데 그 마음 위에 인연 따라서 이렇게 몸뚱이가 되어 놓으면 우리가 잘 못 생각해서 이 몸이 나다, 저 사람은 내 남편이다,

저 사람은 내 아내다, 이렇게 집착(執着)이 됩니다. 내 남편만 중요하고, 내 아내만 중요하면 신부(神父)가 되고, 비구(比丘)가 되고, 비구니(比丘尼)가 되겠습니까.

물론 세속적(世俗的)인 차원에서 남편도 중요하고, 아내도 중요하고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중요한 것은 상대적(相對的)인 차원입니다. 


-. 일여평등(一如平等) [4]


제가 이런 말씀 드리면 저 분은 항상 원론적(原論的)인 그런 어려운 말씀만 하지 우리와 가까운 비근한 생활 말씀은 별로 안한다. 그러나 제 마음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우선 우리 생활이 불안하지 않고, 우리 몸이 편안하고, 우리 가정이 편안하고, 부부(夫婦)도 보다 화합(和合)하기 위해서 이러한 말씀들을 드리는 것입니다.

아무튼 아미타불(阿彌陀佛) 이것은 우주(宇宙)의 대명사(代名詞)입니다.

동시에 나의 참 이름입니다. 김 아무개, 박 아무개, 그것은 이 몸뚱이 따라서

그때그때 가짜로 지어놓은 가명(假名)에 불과합니다.

가명(假名)에 속지를 마십시오. 내 참 이름, 내 생명(生命)의 이름인 동시에 우주의 이름은

바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아미타불(阿彌陀佛), 미타(彌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 아미타(阿彌陀)에게로 빨리 가고, 또 만 중생을 아미타 부처님 자리로 가게끔 할 것인가, 학문(學問)을 많이 배우고 여러 가지 공부를 많이 해야만 하는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때, 욱면비(郁面婢), 이름이 욱면(郁面)이고 여자 종 비(婢)인데, 욱면비는 아간(俄間)이라는 높은 벼슬, 즉 정승(政丞)정도 되는 벼슬아치 아간귀진(阿干貴珍)이라는 집에서 사는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과거 전생에 업장(業障)이 가벼운 사람이었나 봅니다. 아간귀진 주인 집 옆에 미타사(彌陀寺)라는 절이 있었습니다.

자기 안주인이 미타사(彌陀寺)에 다니면서 불공(佛供)을 열심히 하고 불교를 믿는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보니 자기도 불심(佛心)이 발동 되었습니다. 과거 전생에 업장이 무거운 사람들은 남이 바로 믿는 것을 보아도 그냥 범연히 넘깁니다마는 과거 전생에 업장이 가벼운 분들은 남이 믿는 것만 보아도 그냥 자기도 모르게 감격(感激)을 느낍니다.

부처님 말씀 한마디만 들어도 감격을 합니다.

그래서 욱면비는 자기 주인 따라서 자기 주인 마나님이 부처님 앞에 가서 기도(祈禱)를 드리면 그 뒤에 서서 시중을 들면서 같이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주인이 보니까 그 여종이 자기보다 더 신앙심(信仰心)이 독실하게 보인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 여종이 자기 주인을 모시고 다닐 때뿐만 아니라 틈만 생기면 미타사에 가서 기도를 드린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주인이 괘씸하게 생각해서 ‘저 놈이 집안일은 등한히 하고서 절에만 가는구나' 그래서 일을 잔뜩 시켰습니다.

하루에 벼를 두 섬씩 디딜방아로 찧도록 했단 말입니다. 아직 나이도 많지 않은 욱면 종이 자기 몸무게가 별로 무겁지 않으므로 자기 등에다 돌을 짊어지고 땀을 흠뻑 흐르면서 디딜방아로 해서 벼 두 섬을 혼자서 다 찧는단 말입니다.

다 찧어 놓고서 단박에 옷 갈아입고서 다시 미타사(彌陀寺) 절에 가서 염불(念佛)을 했습니다. 절 마당의 양쪽에 말뚝을 박고 줄을 걸어놓고 자기 손바닥을 꿰어 그 줄에 매어놓고 왔다 갔다 하면서 잠 잘 줄도 모르면서 9년간 염불(念佛)만 했습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염불을 그렇게 열심히 침식(寢食)을 잃을 정도로 그와 같이 열심히 했단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어떻게 그렇게 할 것인가?

두 섬의 벼를 어떻게 찧을 것인가? 그렇게 찧어 놓고서 몸의 피로도 못 느끼고 절에 가서 염불을 할 것인가? 의심을 품을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 인간의 본래 성품은 부처님입니다. 부처님 자리는 무한(無限)의 공덕(功德)을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말로 사무치게 믿으면 천지우주에는 자기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눈으로 안 보이는 귀신(鬼神)도, 신장(神將)도, 부처님 기운(氣運)도 꽉 차 있습니다. 하나의 풀 가운데도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기운이 다 들어 있습니다.

하나의 흙 가운데도 다 들어 있습니다.

쌀 한 톨 가운데도, 벼 가운데도 부처님의 기운이 다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정말로 사무치게 방아를 찧는다고 생각 할 때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보살이 돕고, 부처님이 돕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은 신비로운 것이다. 지금 과학적(科學的)인 시대에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할 것인가? 절대로 그렇게 생각 마십시오. 지금 과학이 신통(神通)을 얼마나 많이 합니까.

컴퓨터나 레이더나 우리가 그런 것을 보면 신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과학이 신통을 다 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순수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 불성(佛性)자리로 우리 마음이 다가서면 정말로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도 몸은 피로하지 않겠는가? 몸 피로한 것도 그것은 별것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정말로 나만 생각하고, 자기 권속(眷屬)만 생각하고, 명예(名譽)만 생각하고, 그런 마음으로 해서는 초인적(超人的)인 힘이 못 나옵니다. 하기는 욕심(慾心)만 내도 평소의 자기 이상의 힘은 나올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욕심을 떠나버린 무아(無我)의 그 자리에서 내는 힘은 정말로 한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信仰)의 힘을 그냥 무엇을 많이 외우고, 또는 불사(佛事)를 많이 하고, 이러한 것만 신앙의 보람이라고 생각을 마십시오.

그런 것도 다 공덕(功德)이 큽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만큼 사무치게 진여불성 쪽으로 부처님과 가까이 될 것인가. 내가 본래 부처인데 사람 몸 이대로 중생 이대로 그렁저렁 살다가 간다고 생각할 때에 얼마나 억울한 짓입니까. 부처가 되려면 될 수가 있는 것인데, 부처님 말씀대로 그대로만 따르면 몸도 마음도 편하면서 남한테 숭배를 받으면서 될 수가 있는 것인데, 그렁저렁 산다고 생각할 때에 그와 같이 큰 손해는 없습니다.

운면비, 그 여자종은 그렇게 해서 9년 세월 동안 밥을 먹으나 어디 가서 일을 하나 부처님 생각이 조금도 안 떠났습니다. 부처님 공부하시는 분들이 부처님께 지향(志向)하는 마음이,

부처님께 지향하는 마음은 바로 내 생명(生命), 내가 되어지는 마음입니다.

또는 거기에서 얻는 행복(幸福)은 한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환희용약(歡喜踊躍)이라!

불경(佛經)을 보시면 뛰놀 듯이 행복(幸福)스럽다. 이것이 환희용약입니다.

환희용약이라는 것을 여러분들도 다 보셨습니다. 정말로 바로 믿고 우리가 정화(淨化)가 되면 항시 자기 몸뚱이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은 우리 본 성품인 진여불성은 본래로 그런 힘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행복(幸福)도, 능력(能力)도, 지혜(智慧)도 온전히 다 갖추고 있습니다.

예수가 학자(學者)가 아니지 않습니까.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이 학자가 아닙니다.

오직 자기가 본래로 타고나온 그 마음 깨달았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절대로 우리 본 인간성(人間性)을 과소평가(過小評價)해서는 아니 됩니다.

나는 지금 나이가 60이나 먹었는데 내 나이는 70이 넘어서 80이 가까운데 나야 이제 공부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자식들이 주는 그런 여러 가지 차담(茶啖)이나 받아서 잘 먹고 잘 살면 그만 아닌가. 늙어서 많이 먹으면 소화도 안 되고 해롭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들 적게 자시고, 알맞게 자셔야 피가 맑습니다. 피가 맑아야, 그래야 비대하지도 않고 혈압도 높아지지 않습니다. 우리 부처님의 기운을 절대로 과소평가를 마십시오.

그렇게 해서 9년 되는 어느 날 욱면비 여자 종은 그냥 하늘로 육신등공(肉身登空)이라!

자기 몸체로 하늘로 올라가서 극락세계(極樂世界)로 가버렸습니다.

이러한 말씀도 미신(迷信)이나 신화(神話)같이 생각되시겠지요. 저는 조금도 의심을 않습니다. 우리 몸무게가 60킬로인데 어떻게 하늘로 뜰 것인가?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우리 욕심의 뿌리가 완전히 뽑힌다' 이러할 때는

우리 몸의 무게는 없습니다. 우리 몸뚱이 이것은 욕심(慾心)과 진심(嗔心)의 뭉치입니다.

욕망(慾望)된 어리석은 마음과 분노(憤怒)하는 어리석은 마음과 이러한 독(毒)스러운 마음이 뭉쳐서 지금 내 몸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었다 하더라도 내 본 바탕은 부처입니다.

금(金)으로 해서 어떻게 무엇을 만들든, 필요 없는 귀걸이를 만들든, 금이라는 본질은 조금도 변질이 없지 않습니까. 그와 똑 같이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는 우리가 욕심(慾心)을 부리고 진심(嗔心)을 부리고 치심(痴心)을 부린다 하더라도 조금도 오염(汚染)은 안 됩니다.

다만 우리 마음을 잠시간 가리었을 뿐입니다.

9년 동안 그렇게 주야불식(晝夜不息)하고 쉬지 않고 사무친 마음으로 해서, 그래서 하늘로 올라가서 극락세계(極樂世界), 인생(人生)의 본 고향(故鄕)으로 가버렸습니다.

우리 고향은 어느 누구나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극락세계란 삼독심(三毒心)이 가신 세계입니다. 삼독심만 없으면 탐욕심이나 분노하는 마음이나 어리석은 마음이나 그러한 마음이 없이 정말로 부드럽고 말입니다. 누구한테나 머리를 굽히고, 모든 사람을 부처같이 알고,

개나 소나 돼지나 모든 동물을 다 부처같이 알고, 이러한 사람들은 그냥 자기 얼굴도 훤히 빛나옵니다. 그래서 우리 몸뚱이도 녹용이나 인삼이나 그러한 것을 안 먹는다 하더라도

몸도 가뿐하고 부담이 없습니다.

신라(新羅)때 이야기를 하나 더 하겠습니다.

발징화상(發徵和尙 : ? ∼ 796)도 경덕왕(景德王)때 강원도 건봉사 스님입니다.

지금도 건봉사 자취가 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왜 하는가 하면

앞으로 미타회(彌陀會)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

그 방향을 설정하는데 참고하시기 위해서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요즈음 가톨릭에서 한 몸 운동, 한 마음 운동을 합니다만 그네들은 한마음을 모릅니다.

그네들은 한 몸도 모릅니다. 그저 우리가 차별이 없이 평화스럽게 잘 지내자.

이렇게 한 몸, 한마음 그러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한 몸, 한마음을 알 수가 없습니다. 앞서 제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은 천지우주, 즉 사람 뿐만이 아니라 다른 동물이나 자연이나 모두가 다 일여평등(一如平等)이라. 하나의 불성으로 같이 뭉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연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흙한테 함부로 해도 벌을 받습니다. 물 가운데도, 흙 가운데도, 나무 가운데도 부처님 기운이 충만해 있습니다.

부처님 기운은 흙이 되고, 사람이 되고, 무엇이 되었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순수 에너지는 조금도 훼손이 없습니다.

그 발징화상은 자기 도반(道伴)들과 더불어서 재가불자, 출가불자 합해서 미타만일회(彌陀萬日會)를 설치하여 지성으로 염불수행(念佛修行)을 하였습니다.

지금 태안사(泰安寺)에 가면 옛날 만일회(萬日會) 간판(看板)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천날(千日) 공부하기도 어렵고, 천날 기도하기도 어려운 것인데 만날(萬日)을 -만날은 삼십년(三十年) 세월입니다.- 옛날의 큰 본 찰에 가면 만일동안 기도를 모시는 그런 만일회가 있었습니다. 만일회는 만날 아미타불(阿彌陀佛) 기도를 모시는 것입니다.

만일회는 삼십년 세월입니다. 삼십년 세월동안 그 재가불자, 출가불자 합해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염불 수행을 했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은 우주의 이름인 동시에 바로 부처님, 하나님이 거기에 다 들어 있습니다. 내 이름인 동시에 바로 우주의 이름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을 삼십 년 동안 해가지고서 회향(回向)때 도반 31명과 더불어서 공중으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지금 여러분들뿐만 아니라 우리 젊은 승려들도 이런 말씀을 하면 그것은 옛날이야기 아닌가 의심을 합니다. 부처님 법은 부사의(不思議)한 것입니다.

그렇게 이론적(理論的)으로 바싹바싹 마른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바싹바싹 마른 지혜(智慧)보고는 간혜지(乾慧智)라, 마를 간(乾)자 간혜지입니다.

부처님 법은 간혜지가 아닙니다. 닦을 때는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해서 참선(參禪)을 하든

또는 염불(念佛)을 화두로 해서 참선을 하든 또는 가만히 명상(暝想)을 하든 아무튼 우리 마음이 조금도 상(相)이 아닌 우주에 충만해 있는 부처님한테 우리 마음이 항상 가 있다고 생각할 때는 화두를 의심해도 좋고, 나무아미타불을 불러도 좋고, 관세음보살을 불러도 내내야 그 자리입니다. 보살님들 이름이나 부처님 이름은 다 그 하나의 자리에서 나왔습니다.

진여불성 자리에서 보살님 이름이 나오고, 보살님 자비(慈悲)가 나오고 지혜(智慧)가 나오고 다 나왔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부르든 간에 그 자리에다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 일여평등(一如平等) [5]


우리 근본 주체(主體)는 바로 불성입니다.

요즈음 주체성이 없다 하지만 우리 중생들 마음이 불성에 가 있지 않으면 어느 누구나가 제아무리 바른말 하고, 별소리를 한다 하더라도 주체성이 없는 것입니다. 나라도 주체가 없다. 이것도 역시 그 나라 자체가 참다운 진리 본질적인 우주의 원리인 진여불성(眞如佛性)에다, 부처님에다, 하느님에다 기본을 두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을 진여불성(眞如佛性)에 두어야 합니다. 부처님에다 우리 마음을 안두는 것은 모두 다 허망 무상한 것입니다.

실다운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렇게 부처님한테 마음을 두면 학문을 배우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염불 한번 하면 한만큼 정화가 됩니다.

그렇게 되어서 드디어는 발징화상의 도반 31명같이 정말로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른 깨달음을 얻어서 부처가 됩니다.

오늘 우리 미타회(彌陀會) 회원들도 다른 절 신도(信徒) 또는 금륜회(金輪會) 이회의 신도라 하더라도 조금도 차별시비(差別是非)없이 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 우리 금륜회 미타회라 하더라도 또 다른 절에서 회(會)가 있으면 같이 가셔서 동참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 절만 생각한다, 내 회만 생각한다, 이것은 참다운 불법의 도리가 아닙니다.

내 절만 생각해야지 남의 절 생각하면 어떻게 유지가 될 것인가.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마음을 열고, 마음을 연다는 것은 나와 남의 벽을 허물어뜨리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 자체가 나와 남의 벽이 없습니다. 자연과 나와 벽이 없습니다. 따라서 나와 남의 벽을 허물고서 사심(私心)없이 우리가 무슨 수행(修行)을 할 때는 다 잘됩니다.

우리들이 하는 회가 잘 안 된다. 장애가 있다. 이러한 때는 나와 남의 벽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나와 남의 벽을 두고서는 잘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사람의 조작하는 힘으로 해서는 잠시간 잘 될는지 모르지만 오래는 못갑니다. 그러나 미타회원 스스로가 서로 어떠한 경우든지 양보하고, 다 우리가 부처인데 우리는 선구적(先驅的)으로 먼저 부처가 되어야 하겠다.

우리부터서 부처님 행동을 바르게 해야 하겠다. 어떻게 바르게 할 것인가?

바른 가치관(價値觀), 바른 철학(哲學)으로 해서 우리 미타회 회원도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이고, 일체중생이 무두가 다 하나의 생명이다. 이렇게 알고 정당한, 적당한 원심(願心)을 가지고, 또 어떠한 경우든지 진심(嗔心)을 내지 말고 이렇게 해야 참다운 진소위(眞所謂)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 하는 부처님의 총 대명사를 이름으로 하는 명실상부(名實相符)한 그러한 회(會)가 됩니다.

명호(名號) 부사의(不思議)입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이 그렇게 소중합니다.

꼭 제 욕심 같으면 모든 보살, 부처님 명호가 다 소중하지만 그냥 아미타불(阿彌陀佛), 하나로만 합해서 '아미타불'만 외웠으면 하겠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버릇이 그렇게 안 되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라고 해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 있는 것이고, 또 관음보살(觀音菩薩)을 했으면 또 '관음보살'만 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외우든, 관세음보살을 외우든

그런 자리는 원융무애(圓融無碍)하게 모두가 하나다 이렇게 알아야 합니다. 관음(觀音) 따로 있고, 지장(地藏) 따로 있고, 이렇게 생각하면 부처님의 도리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부처님의 도리는 우주를 하나로 봅니다. 우리 불자님들 잘 새기십시오. 기독교나 다른 종교는 다른 과학이나 모두를 하나로 안봅니다. 현대는 물리학도 에너지라는 하나로 통일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대상과 나와 둘이 아니라 천지우주(天地宇宙)는 하나인 것입니다.

하나의 생명(生命)으로 뭉쳐있는 것인데 우리가 어리석어서 잘 못 봅니다.

우리 마음이 어리석음이 없고, 탐욕심과 진심이 없으면 분명히 하나로 보여야 합니다.

성인(聖人)들은 하나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못 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무시합니다.

부처님 공부를 해 가면 해 갈수록 사람이 차근차근 모서리가 떨어집니다.

유연선심(柔軟善心)이라. 부드러워지고, 모서리가 떨어져 갑니다.

사람들이 다 불쌍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이 훤히 열려 가면 자기 몸이 아팠던 사람도 마음을 여는 그 순간 우리 몸도 웬만한 것은 다 풀립니다. 과거 전생에 업장(業障)이 많아서 두텁게 깔려 있으면 쉽지가 않지만, 그렇더라도 우리 업장을 녹이는 일이 우리 몸이나 집안에 있는 액운(厄運)이나 그런 것을 풀어 가는데 더 가까운 길은 없습니다. 집안에 있는 액운도 역시 과거 전생의 우리들의 그런 업장이 뭉친 것입니다. 인과응보(因果應報)라, 다 우리가 지어서 받습니다. 어느 것도 인과응보에서 벗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어느 것도 부처님 법을 벗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도 허물을 자기한테로 돌려야 합니다.

단체간(團體間)이나, 어느 지방(地方)이나, 우리 지방은 무던한데 괜스레 딴 사람들이 우리한테 불행을 주고, 우리를 핍박하고 하지 않는가, 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유사이래(有史以來) 구백(九百)번 이상 외침을 받고 있습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도 엄청난 핍박을 받았지만 얼마 못가서 다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임진왜란 때 그와 같이 비참한 유린을 당하고서 각성을 했더라면 다시 병자호란 때 또 당했겠습니까? 모두가 다 우리가 지어서 받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이 자업자득(自業自得), 다 그렇습니다. 이렇다고 생각하면 남을 원망(怨望)하시지 말고, 우선 나부터가 몸이 아파도 나 참회(懺悔)하고, 남들이 나한테 배신(背信)해도 참회하고, 가까운 사람이 이별(離別)해서 간다 하더라도 참회하고, 이렇게 해야 업장이 녹아집니다.

이렇게 하셔서 정말로 명실상부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한 번 외우면 외운 만큼 업장이 녹습니다. 그냥 이름만 불러도 이름 자체에 있어서 어느 귀신이나, 어느 신장이나 나무아미타불을 가장 숭배합니다. 바로 우주의 이름이기 때문에 우주 에너지의 우주음(宇宙音)이기 때문에 ‘옴마니반메훔'이나 또는 진언(眞言)이나 또는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그런 의미에서 우주의 음(音)입니다. 우주음(宇宙音)이기 때문에 우주의 순수 생명을 음으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한번 외우면 외운 만큼 우리 업장도 녹아지고 또한 동시에 신장들도 다 굽어보는 것입니다.

정말로 부처님의 신비로운 힘을 믿으십시오. 부처님은 무한의 힘입니다.

지금 과학이 그런 무한의 힘을 차근차근 증명해 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믿고서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밥을 먹을 때나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그 나무아미타불을 끊어지지 않게 외우십시오. 금생에는 그렁저렁 아무것도 못 깨닫고 죽는다 하더라도 죽을 때는 금생 내내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하신 분은

이 몸뚱이 버릴 때는 번연히 깨달아서 나무아미타불 몇 마디에 극락세계로 가시는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들은 이 세상 사바세계(娑婆世界)가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이고, 또는 동시에 달세계가 따로 있고 별세계가 따로 있고

또는 태양세계가 따로 있듯이 성자들만 사시는 그런 광명세계(光名世界)가 또 따로 있습니다. 이것은 정거천(淨居天)이라. 맑을 정(淨)자, 살 거(居)자, 성자만 사는 천상(天上)이 따로 있습니다. 그런 세계에 분명히 태어납니다. 천상도 삼계(三界) 28천(天) 천상세계가 다 있습니다. 우리 영혼(靈魂)이 얼마만큼 정화(淨化)가 되었는가. 우리 마음이 얼마만큼 순화 되었는가. 거기에 따라서 업장이 무거우면 저 아래 천상에, 업장이 가벼우면 높은 천상에 태어납니다. 분명히 그러한 천상 세계가 있습니다.

극락세계는 그냥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좋은 일 하라고 방편으로 하신 법문이 아닌가.

지옥도 없는 것인데, 아! 눈을 씻고 봐도 지옥이 안보이지 않는가?

그러나 지옥도 분명히 있습니다. 귀신세계도 분명히 있듯이, 또는 돼지나 소나 축생도 분명히 있듯이, 사람도 분명히 있듯이, 그렇지만 제법공(諸法空) 도리에서 보면 인간도 공(空)이고, 나도 공이고, 다 공이란 말입니다. 밝은 안목에서 보면 다 '에너지'의 파동(波動)뿐인 것인지, 에너지의 결합이 사람 같은 모양을 하고, 금 같은 모양을 한 것이지 본래로 사람이 있고, 본래로 금이 있지 않단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미타회(彌陀會) 회원들 정말로 몇 백 명이 아니라 우리 한국 불교인들 전부가 금륜회원이 되고, 미타회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미타불을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그 아미타불, 우주의 대명사, 나의 참 이름인 동시에 우주의 대명사 또는 극락세계의 교주 그런 이름을 가지고 나아간다고 생각할 때는 꼭 거기에 걸 맞는 행동을 하셔야지 그렇지 않고 미타회원들이 나와 남을 가리고서 남을 차별한다거나 또는 괜스레 수입만 생각해서 무얼 억지로 하려고 하면 이렇게는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순리(順理)에 따라서 우리가 바로만 살면 부처님이 굽어보고 신장(神將)님이 굽어보고 다 지키시는 것입니다. 사람 마음도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저절로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바로만 살면 다 우리를 숭배하고, 다 우리를 아끼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는 것은 다시 말하면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우주에 가득찬 광명의 부처란 뜻입니다.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 생명(生命)이 멸하지 않는 영생해탈의 길,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영원히 죽지 않고 영원히 영생하는 부처란 뜻입니다.

청정광불(淸淨光佛)이라! 조금도 오염이나 번뇌도 없는 그런 부처님입니다.

청정광불 무대광불(無對光佛), 상대가 없이 우주에 끝도 갓도 없이 충만(充滿)해 있습니다.

우주라는 것은 본래 끝도 갓도 없습니다.

끝도 갓도 없는 세계에 가득 차 있는 것이 부처님의 광명(光明)입니다.

우리 몸은 이대로 부처님 광명이 충만해 있습니다.

아미타(阿彌陀) 부처님을 한번 부르면 부른 만큼 우리 몸도 마음도 정화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꼭 금생에, 우리가 본래로 갖추고 있는, 누구한테 빌려와서 심어놓은 것도 아니나 본래 갖추고 있는 불성입니다. 우리 마음만 잘 먹으면 부처가 되어갑니다.

좋은 아버지, 좋은 스승, 좋은 회사사장이 됩니다.

어떠한 의미로 보나 진리를 떠나서는 참다웁게 못되는 것입니다.

아미타불 진여불성 안에서 꼭 무한의 행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미타회(彌陀會) 법문(法門)을 마칩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석가모니불(南無釋迦牟尼佛)!

나무마하반야바라밀(南無摩訶般若波羅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