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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마음의 고향

제 4 집 2. 반야(般若)와 정견(正見)

마음의 고향 제 4 집


* 불기2536년(서기1992년) 8월 30일 태안사 석 청화(釋 淸華)큰스님께서 광주 청년 불자회 초청 특별법회(금륜회관)에서 설하신 법어입니다.

 

-. 반야(般若)와 정견(正見) [1]

산승(山僧)이 법회(法會)를 하는 경우 보통 우리 보살(菩薩)님들이 3분의 2쯤 되십니다.

우리 거사(居士)님들이나 특히 젊은 불자님들은 별로 없으신데 오늘은 주로 젊은 불자님들이 이렇게 훨씬 더 많으므로 마음도 이제 보람을 느끼고 우리 불교(佛敎)의 전망에 대해서도 마음 든든하게 생각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심수오묘(深秀奧妙)해서 한 말로 말씀드리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소승(小乘)도 있고, 대승(大乘)도 있고, 또는 우리 중생(衆生)이 보는 차원(次元)에서 현교(顯敎)도 있고, 우리 중생이 볼 수 없는 차원의 밀교(密敎)도 있습니다.

이러한 소승과 대승과의 관계, 현교와 밀교와의 관계, 그러한 것을 우리가 바르게 알려고 할 때는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 젊은 불자님들은 기초 교육이 튼튼한 분들이기 때문에 이런 문제 같은 것도 염두에 두고서 앞으로 정진(精進)을 하시면 잘 하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불교는 심종(心宗)이라, 마음심(心)자 마루종(宗)자, 우리 불교를 심종이라 합니다.

이렇게 제가 말씀드리면 물질(物質)도 있고, 눈에 보이는 모두가 다 현상적(現象的)인 두두물물(頭頭物物)이 존재하고 있는 것인데, 불교는 어째서 마음뿐인 종교인가,

왜 마음의 종교라고만 하는가, 이렇게 거부반응을 느끼시기도 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중요한 문제를 우리 젊은 불자님들은 꼭 극복하셔야 합니다. 왜 불교는 하필이면 물질도 있고, 두두물물 모든 현상이 다 있는 것인데 심종(心宗)이라고만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명확한 견해(見解)를 가지셔야 합니다.

그래야 이른바 반야사상(般若思想)이라, 반야의 지혜(智慧)가 나옵니다.

사실 마음뿐이기 때문에 심종 그러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 드려도 내 몸도 있고 귀중한 내 가족도 있고 하는데, 왜 마음뿐인가? 그렇더라도 사실은 마음뿐입니다.

어째서 마음뿐인가? 부처님의 사상에서 볼 때 절대물질(絶對物質)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간성(時間性)도, 공간성(空間性)도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질이 분명히 내 눈앞에 있고, 물질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공간성이 있으므로 존재가 있고, 또 시간도 있을 것인데, 왜 그러는 것인가? 그 해답(解答)은 인연생(因緣生)이기 때문에, 인연(因緣)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졌기 때문에 시간성과 공간성이 없는 것입니다. 시간성과 공간성이 없기 때문에 물질이 없습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졌다. 이 말은 모두가 조건부(條件附)라,

인연 떠나서는 어느 것도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불교의 기초를 다 아시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말씀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만

우선 자기(自己)라는 존재(存在)를 본다 하더라도 오온(五蘊)의 가화합(假和合)입니다.

오온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 아닙니까. 오온이 잠시간 가짜로 화합되었단 말입니다. 색은 이것은 물질이므로 산소, 수소, 질소 등 그런 각각의 원소의 결합체가 되겠지요. 수(受)와 상(想)과 행(行)과 식(識)은 이것들은 우리 관념(觀念)의 활동입니다.

내 몸뚱이를 비롯한 일체 물질과 또는 우리가 감수(感受)하고, 의혹(疑惑)하고, 분별시비(分別是非)하는 우리 정신활동(精神活動), 이러한 것이 본래에 없습니다.

본래에 있다고 한다면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는 말이 그때는 거짓말이 되겠지요. 분석(分析)한 뒤에 공(空)이 아니라, 내 몸 구성(構成) 이대로 즉 공(卽空)이라!

바로 공(空)입니다. 어느 사람들은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색즉공(色卽空) 할 때에 색(色)은, 물질(物質)은 분석하면 공이 되지 않는가, 물질이라는 것은 끝에 가서 에너지가 되는 것이므로 공이지 않는가, 이런 식으로 분석적(分析的)으로 해석학적(解釋學的)으로 생각합니다만

반야심경의 즉 공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즉 공(卽空)은 색 이대로 공이다. 물질 이대로 공입니다. 내 몸뚱이 이대로 공입니다. 다이아몬드 그대로 공입니다. 그것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연생(因緣生)이기 때문에 공입니다. 다이아몬드라 하더라도 내내야 탄소(炭素)의 결정체(結晶體)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아끼는 금(金)이라 하더라도 귀에다 붙이고 목에 거는 금(金), 그것도 내내야 한 종류의 원소(元素)의 결합체입니다. 더 추궁해서 들어가면 각 원소라는 것은

결국 원자핵(原子核)과 그 주위를 회전하고 있는 전자(電子)가 몇 개 있는가,

양성자(陽性子), 중성자(中性子)가 몇 개 있는가, 거기에 따라서 각 원소의 구분이 있습니다.

따라서 양성자, 중성자, 전자 등 그런 소립자(素粒子)들을 떠나서 다른 것은 없습니다.

저는 법문(法門)을 할 때마다 서투른 물리학(物理學) 풀이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은 그 공(空)이라는 것을 알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空)만 알아 버리면 사실은 불교는 참다웁게 대승(大乘)으로 입문(入門)이 되는 것입니다.

공을 모르면 대승이 못되는 것입니다. 반야지혜(般若智慧)가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서 대승이 되고 못되고 하는 것입니다. 반야지혜가 있어야 대승이 됩니다.

대승이 되어야 참다운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할 수 있는 부처님 법문입니다.

즉 방편설(方便設)을 떠난 진실(眞實)한 법문이 됩니다. 따라서 어렵더라도 과학적(科學的)으로 또는 다른 방법으로라도 이것저것 모두를 거기에다 유추해서 인용하고 원용해 가지고서 공 도리(空道理)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저 같은 사람도 토굴(土窟) 생활을 무던히 했습니다. 한번은 백장암(百丈菴) 저 위쪽 1000미터 이상 되는 고지(高地)에다 조그마한 토굴을 마련해서 한 철을 지냈습니다.

삼동이 임박해서야 아무런 준비도 없이 겨우 들어갔습니다. 방은 사방 일곱 자, 협소한 방인데도 추운 겨울에 따습게 하려면 장작이 하루에 여남은 개비는 들어가야 따스워지는데 나무 준비를 안했습니다. 그래서 장작을 절약하기 위해서 하루에 세 개비씩 땠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음을 못 통하면 방에서 죽도록 까지 나오지 않으려고 지붕도 천년만년 간다는 굴피참나무 껍질로 이었습니다. 참나무 껍질도 부족해서 촘촘히 올리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해 비가 억수로 쏟아져 그 사이로 빗물이 세어 들어와도

우산이 없어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 방바닥에는 물이 벙벙하고, 할 수 없이 나무토막을 놓고서 그 위에 앉아서 그 물을 퍼내면서..., 그 빗물을 비웠습니다.


그때는 생식(生食)을 했습니다. 지리산 쪽이기 때문에 이곳보다 훨씬 추운 지방이라

계곡 물이 전부 얼어 붙어버렸습니다. 생식을 하므로 따스운 물은 필요 없으나, 그러나 찬물마저 얼어붙어서 물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얼음을 깨고서 양재기에다 얼음을 넣고 불을 때서 녹여서 물을 좀 마셨습니다.

생식도 콩가루나 깻가루를 섞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쌀만 담그어 그냥 먹었습니다.

찬 물에다 쌀만 담그어서 먹었으니 소화가 잘 될 수가 있겠습니까. 설사도 하고 여간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무아(無我)라 하는,"내가 없다"하는 소식이 잘 실감이 안 간단 말입니다.

그러한 가운데도 미운 사람 밉고, 고운사람 곱단 말입니다.

나한테 좋게 한 사람은 분명히 보고도 싶고, 나한테 짓궂게 군사람들은 또 밉단 말입니다.

내가 보란 듯이 무얼 좀 해야 하겠구나. 그런 관념(觀念)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것저것 다 버리고 이 목숨 다 바치겠다는 그런 각오로 들어갔지만은 그런 속에서도 나라는 관념을 떨치기가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모두가 비었다'는 금강경(金剛經)도 수 백 번 읽기도 했고, 반야심경(般若心經)이사 중 되어서 12년 되었으니 몇 천 번은 읽었겠지요.

그래도 제법공(諸法空) 도리가 와 닿지가 않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불자님들한테 모두가 공이다. 본래가 공이다. 본래가 마음뿐이다. 이런 말씀을 드릴 때도, 아! 저 양반들이 지금 알아먹을 것인가?


-. 반야(般若)와 정견(正見) [2]

그러나 여러분 세대는 지극히 총명한 세대입니다.

다행히도 그 물리학적으로 물질 자체가 종당(終當)에 가서는 에너지가 되어버린다. 이런 소식을 다 증명(證明)합니다. 이러한 때이므로 즉공(卽空)이라! 만사(萬事)가 모두 다 공(空)이라는 것을 알 듯 말 듯 할 때입니다.


우리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봅시다. 부처님 49년 설법(說法)에서 아함경(阿含經)을 12년 동안 설법하셨습니다.

아함경은 부처님의 근본교리(根本敎理)입니다.

아함경 대요는 선(善)도 있고, 악(惡)도 있고,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즉 우리 유루지(有漏智)의 차원, 우리 중생의 상식(常識) 차원에서 설해 있는 가르침이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때가지의 가르침은 이른바 유교(有敎)라, 있을 유(有)자 유교입니다.

있고 없고 하는 것을 중심으로 해서 설했습니다. 중생의 일상적인 상식 차원에서 하신 법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본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보신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안보입니다. 모두가 다 비었다. 모두가 다 마음뿐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셔도

중생이 잘 못 알아먹습니다. 2천 5백 년 전, 그때 물리학이 있습니까, 무엇이 있습니까.

그래서 12년 동안이나 우리 중생들의 마음을 순숙(純熟)이라, 훈련을 시킵니다.

여러분들이 공부를 해보시면 짐작이 되십니다만 가사 우리가 업장(業障)이 많아 그 욕심(慾心)이 많고 자기밖에는 몰라도 백일(百日)이나 몇 백일이나 애쓰고 기도(祈禱)를 모셔보면

차근차근 자기라는 아(我)가 떨어집니다. 차근차근 자기라는 모서리가 무디어 집니다.

그래서 공부가 순숙되면 그 때는 아(我)라는 것이 몽땅 빠져버립니다.

부처님께서 12년 동안이나 있다 없다 하는 그런 소식을 말씀을 하셨고,

열 두해동안 우리 중생 마음을 훈련시킨 다음에 이만큼 되면 공 도리를 말하면 알아듣겠구나. 업장(業障)이 가벼워지므로 알아듣습니다. 같은 법문도 업장이 무거운 때 듣는 것과

기도나 참선을 해서 업장이 가벼운 때 듣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참선도 한 철 공부 할 때, 두 철 공부할 때 다르고, 같은 반야심경 풀이도 똑 같은 사람이 하더라도 다릅니다.

12년 지난 다음에 반야경(般若經) 공(空)도리를 22년 동안-부처님 설법 가운데 가장 고구정녕(苦口煗娡)하게 22년 동안-반야 공 도리를 말씀 하셨습니다. 모두가 공이다. 사실 이 몸뚱이 이것이 어떻게 있습니까. 여러분들 12인연법(十二因緣法)도 다 배우셨지요. 과거 전생(前生)의 무명(無明)으로 해서, 무명 그것은 지금 무슨 자취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명은 우리 의식(意識)에 있는 번뇌(煩惱)입니다. 무명은 사물을 바르게 못 보는 것입니다.

검으면 검다고 보고, 희면 희다고 보아야 하는 것인데 그렇게 못 보는 이것이 무명입니다.

성자(聖者)만이 무명이 없습니다. 성자는 사물을 사실 그대로 봅니다. 이른바 실상(實相)을 봅니다. 우리 중생은 가상(假相)밖에는 못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과거 무명 때문에 행(行)이 있습니다. 우리 부모님도 무명 때문에 음욕(淫慾)의 행이 있었기에, 그리고 부동(浮動)하는 그런 영(靈)도 그런 식(識)도 역시 무명식(無明識)이기 때문에 부모님의 연(緣) 따라서 거기에 끌려갑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태(胎)속에 안착해서 커 나왔습니다. 이렇게 소중한 몸뚱이입니다만 과거 전생에 이와 똑같은 몸뚱이는 없었지 않습니까. 과거 전생에는 없었습니다. 한동안 살다가 교통사고 만나서 죽든 또는 80세에 죽든 어떻게 죽든 결국은 죽는 것인데 죽은 다음에는 이런 몸뚱이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금생(今生)에 몇 십 년 동안 모양이 이렇게 존재합니다. 그러면 모양 그것은 실존(實存)인가. 잠시간 금생에 존재하는 모양 이것도 실존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관념(觀念)이, 우리 중생 인간 차원으로 보기 때문에 저 사람은 저렇게 잘 생겼다. 그러나 잘생긴 사람 못생긴 사람 일초의 몇 억분의 일도 역시 같은 모습이 아니지 않습니까. 물리학적으로 보더라도 일초의 몇 억분의 일도 역시 그 찰나(刹那) 한순간도 같은 모습이 아닙니다. 10년간이나 20년간이나 있다가 만나면 젊은 사람이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지만 보통 매일 매일 만나서는 잘 모릅니다. 분명히 변화하는 것인데 잘 모른단 말입니다. 일초 전과 일초후의 우리 몸뚱이가 같지 않습니다.

신진대사(新陳代謝)로 보더라도 일초 전과 일초 후의 우리 몸이 같지가 않습니다.

이런 것을 자기라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일초전의 자기와 일초후의 자기, 또 일초의 몇 억분지 일의 전(前)의 자기와 후(後)의 자기가 같지 않은데 우리가 같은 모습으로 존재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철저하게 과학적입니다. 어느 순간도 같은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무아(無我)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무아(無我)이지만 나를 구성하는 산소가 있고 수소가 있지 않은가?

또는 산소나 수소를 구성한 양자나 전자나 중성자가 있지 않는가? 그런 것은 또 가장 미세한 소립자(素粒子)로 쪼개지지만 그러나 그것도 역시 종당(終當)에 가서는 염파(念波)라,

마음의 파동(波動)에 불과한 것입니다. 마음의 파동에 불과합니다.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나 그런 것이 모두가 다 마음의 파동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주간(宇宙間)에 있는 어떠한 존재 물질도 태양계(太陽系)나 은하계(銀河系)나 그러한 존재도 모두가 다 마음의 파동에 불과합니다.

마음의 파동은 왜 일어나는 것인가? 마음의 파동은 좋아(貪)하고, 싫어(嗔)하는 그 마음(痴)에서 무명심(無明心)에서 일어납니다. 무명(無明)으로 해서, 무명이란 우리가 사태(事態)를 잘 못 보는 것입니다. 바로 보면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인데 일심진여(一心眞如)인데, 오직 청정무비(淸淨無比)한 마음뿐인 것인데 우리가 잘못 보므로 거기에서 이제 아(我)가 생기는 것이고, 아(我)가 생기면 나한테 좋으면 탐심(貪心), 나한테 싫으면 진심(嗔心)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무명심(無明心), 좋아하고 싫어하는 그 마음이 파동을 일으켜서 그 파동이 전자(電子) 되고 양성자(陽性子)가가 되고 중성자(中性子)가 되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전기(電氣)가 되고 자기(磁氣)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보면 모두가 본래는 마음뿐입니다.

마음이 파동을 일으켜서 전자(電子)가 되고 무엇이 된다 하더라도 마음 자체는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금(金)으로 안경테를 만드나 금으로 시계 줄을 만드나 금의 순수도(純粹度)는 조금도 변질이 없듯이 진여불성(眞如佛性), 일심진여(一心眞如)의 그 마음자리가 이렇게 변동하고 저렇게 변동해서 사람 같은 모양이 되나 별 같은 모양이 되나 또는 금 같은 모양이 되나 '일심진여'라는 그 마음의 순수도는 조금도 변질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생사(生死)를 초월(超越)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나 조금도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주(宇宙)는 한 말로 말씀드리면 모두가 다 어제도 오늘도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이렇게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야 비로소 반야(般若)의 도리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보는 것은 다들 비어 있습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 한 권만 가지고도, 반야심경 한편만 가지고도 성불(成佛)이 되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 있지 않습니까.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이라! 우리가 생각하는 꿈같은 견해, 우리가 지금 잠꼬대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바로 못 보는 것입니다.

우리 젊은 불자님들이 불교운동(佛敎運動)하는 것은 굉장히 갸륵합니다. 갸륵하지만 정견(正見)에 입각해야 합니다. 팔정도(八正道) 가운데 정견이 허두입니다. 정견(正見)이 바로 서야 정사유(正思惟) 바른 사고, 정어(正語) 바른 말, 정업(正業) 바른 생활 바른 행동,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을 하는 것입니다.

정견(正見)이 바로 못서면 전부가 빗나가고 맙니다. 윗 단추 하나 잘 못 끼우면 그 밑의 전체가 잘 못 끼워지듯이 그와 똑 같습니다.

정견(正見)은 무엇인가? 정견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 있어야 정견입니다.

사제법문(四諦法門)도 정견(正見)입니다. 사성제(四聖諦)는 고, 집, 멸, 도(苦集滅道)이지요.

고집멸의 멸(滅)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멸(滅) 그것은 바로 불성(佛性)입니다.

불성 즉 진여불성(眞如佛性) 그것만이 사실인 것이고, 그것만이 검은 것을 검게 본다는 것이고, 흰 것은 희게 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그렇게 안 보인단 말입니다.

왜 안 보이는 것인가? 무명심(無明心) 때문입니다.


-. 반야(般若)와 정견(正見) [3]

지금 냉방시설도 안되어서 이처럼 더운데 장황하게 말씀 드리면

모처럼 기회이나 여러분들이 좀 난감하시겠지요.

그래서 이제 제 말씀을 될수록 간추려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아무튼 우리는 정견(正見)을 가지고서 정견(正見)대로 행동(行動)하고

또는 정견(正見)에 입각해서 우리가 증명(證明)을 해야 합니다.

교행증(敎行證)이라! 교(敎)만 있고서 행(行)이 없으면, 증(證)은 고사하고

수행(修行)이 못 따르면, 그때는 말법(末法)인 것입니다.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이란 그런 법을 다 말하지 않습니까.

그 해석을 여러 가지로 하고 있으나, 그래도 전통적인 해석은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법은 꼭 정견(正見), 바른 이해와 바른 가르침과 거기에 따르는 바른 수행(修行)과 또 거기에서 바른 증명(證明)이,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인데 그래야 정법입니다.

부처님 당시는 분명히 그렇게 했습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고, 부처님과 과거 전생(前生)에 인연(因緣)이 깊은 훌륭한 도인(道人)들이 많이 나오셨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부처님 같이 신통자재(神通自在)를 갖추어 타심통(他心通)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딱 알맞은 법문을 하신다고 하면 깨달은 도인이 많이 나올 것인데 그럴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석존(釋尊)이 가신 뒤에는 또 상법 천년이라,

증명(證明)을 못하고서 마음으로 도인이 되어서-더러는 있다 하더라도-많이 깨닫지 못하고서 그냥 가르침만 있고 행만 있단 말입니다.

오늘날 불교는 어떠한가? 오늘날 불교는 교(敎)와 수행(修行)과 증(證), 이 세 가지 가운데서 행(行)도, 증(證)도 별로 없이 않습니까. 행(行)도 증(證)도 별로 없고 교(敎)만 있습니다.

교(敎)도 바로 모르고서 반야사상(般若思想)도 미처 모르고서 불법(佛法)을 안다고 합니다.

무아(無我)의 증명(證明)은 고사하고, 무아(無我)의 도리(道理)도 모른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는 분명히 말법(末法)입니다. 말법으로 해서는 생사(生死)를 못 건너는 것입니다. 불교(佛敎)의 마지막 구제(救濟)는 내내야 생사해탈(生死解脫) 아닙니까.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사회에 봉사하고 다 좋습니다. 다 좋으나 불법이 불법인 점은,

불법이 불법인 그런 소이(所以)는 어데 있는가 하면, 우리가 우주(宇宙)를 본단 말입니다.

내 생명(生命)의 본질(本質)을 안단 말입니다. 내 생명의 본질을 알고 모든 중생(衆生)과 더불어 우리 생명의 본질을 깨닫는단 말입니다.

설사 우리가 못 살아서 하루에 한 끼만 먹어도 좋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으로 기왕 태어났으면 내 생명의 본질을 알고, 우주만유(宇宙萬有)의 본바탕을 알아 모든 중생과 더불어 그렇게 되도록 한단 말입니다. 그것이 불법입니다. 마땅히 우리가 하는 불교운동은 정법시대로 우리가 가져와야 합니다.또는 정법시대가 안되면 행복(幸福)은 없습니다.

우리 단체의 행복도 없습니다. 바른 부모도 못되고 바른 스승도 못됩니다.

바른 정치인도 못됩니다. '나'라는 인간이 무엇인가, 자기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가를 모른단 말입니다. 인간은 대체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런 의미도 모른단 말입니다. 또는 감투는 무엇인가, 내 몸뚱이는 무엇인가,

이런 것을 바로 알지 못하고서는 바른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은 명명백백(明明白白)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알아야 합니다.

제법공(諸法空) 도리, 오온개공(五蘊皆空)의 도리 즉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이라.

모양도 공이요, 소리도 공이요, 향기도 공이요, 맛도 공이요, 촉감도 공이요,

다 공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것은 우리 업장(業障)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명(無明)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못 느끼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정말로 기도(祈禱),

정말로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명상(暝想)도 하고, 참선(參禪)도 하고 하면 틀림없이 그때는 그야말로 텅텅 비어 오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가 비어 옵니다. 내 몸뚱이 오십 몇 키로, 육십 몇 키로 된다고 하지만 무게가 본래 있지가 않습니다.

 저 자기권(磁氣圈)에 올라가면 거의 무게가 제로(Zero)입니다. 위로 올라 갈수록 가볍습니다. 이 대륙권(大陸圈) 내에서만 몇 십 키로 하는 것이지

본래 고유한 무게가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이것은 물리학적인 사실이 아닙니까.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을 간단히 말씀 드리면, 있을 유(有)자 유교(有敎)라, 상식(常識)차원에서 하는 부처님 가르침도 있고, 또 만법(萬法)이 모두 비었다 하는 빌 공(空)자 공교(空敎)라, 다 비었다는 가르침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비었다고 하면 그것은 결국 이유(離有)이지요. 허무(虛無)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잘 못 보아서 허망한 것이지, 본래 참말로 있는 것은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따라서 우주라는 것은 진여불성 뿐입니다.

우주가 진여불성 뿐이라고 이와 같이 실상(實相)을 파악하는 가르침 이것이 중도교(中道敎)입니다. 이것과 저것과의 중간(中間)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주라는 것은 중도(中道)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주라는 것은 진여불성만 존재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상식적인 차원을 넘어야 합니다. 상식을 못 벗어나면 속물(俗物)입니다.

불교운동을 한다 하더라도 상식을 못 넘으면 그것은 속화운동(俗化運動)입니다.

불교를 속화(俗化)시키면 안 됩니다. 응당 대중화(大衆化)를 시킨다 하더라도 속화해서는 안 됩니다. 꼭 반야사상(般若思想)을 기조(基調)로 해야 합니다. 반야사상은 모든 철학(哲學)의 기조가 되어 있습니다. 무철학(無哲學)이라. 어려운 말로하면 무(無)의 자각적(自覺的) 한정(限定)이라. 모두가 원래 없던 것인데 인연(因緣) 따라서 이렇게 보인단 말입니다.

이렇게 상(相)만 보이는 것입니다.

나라는 상(相), 너라는 상(相), 밉다는 상(相), 곱다는 상(相), 그런 상(相)만 있을 뿐입니다.

상(相), 그것은 본래(本來) 공(空)입니다. 즉 공(卽空)입니다.

분석 한 뒤에 공이 아닙니다. 이대로 공인 것을 성자(聖者)는 분명히 명명백백(明明白白) 공(空)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衆生)은 명명백백 있다고 봅니다.

이것이 전도몽상(顚倒夢想)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중생이 거꾸로 보는 것입니다.

전도몽상을 타파하는 것이 반야(般若)가 아니겠습니까.

전도몽상을 타파하셔서 꼭 행(行)과 증(證)을 갖추어서 정법(正法)이 되어야 합니다.

정법이 되어야 남북통일(南北統一)도 그런 본질적인 의미에서 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공산주의가 무너졌으니 앞으로 자본주의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자유민주주의가 앞으로는 승리해야 할 것이 아닌가. 자유민주주의도 얼마나 흠이 많습니까. 공산주의의 대안이 아니란 말입니다. 무슨 이데올로기나 모두가 다 중생들이 이렇게 얽어매고 저렇게 얽어서 만든 것은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것입니다. 오직 부처님 가르침,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부처님 가르침만이 참다운 기본적인 해결책입니다.

부처님 공부는 출가(出家)한 스님들은 제법 할 수가 있지만 재가불자(在家佛子)는 하기가 어렵지 않은가. 절대로 그렇지가 않는 것입니다. 부처님 공부를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지금 별로 못 배우고 업장이 많아서 인생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도 역시 과거 전생에 무던히 오계(五戒)정도는 지켜서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우리는 석가모니(釋迦牟尼)와 더불어 나와 조금도 본 성품은 차이가 없습니다. 또는 내 앞에 있는 독사(毒蛇)같이 징그러운 것도 역시 본 성품은 석가모니와 더불어 조금도 호리불차(豪釐不差)의 차이가 없습니다. 상(相)만 차이가 있는 것이지 차이가 없습니다. 남을 죽인 강도(强盜)도 역시 겉만 어쩌다가 인연 따라서 강도짓을 한 것이지

그 사람도 우리와 더불어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한테 가서 "상대편이 잘못할 경우 일곱 번 쯤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 이렇게 질문했단 말입니다. 그 때 예수 말씀이 "일곱 번씩 일곱 번도 더 용서해라"

반야(般若)를 모르는 사람들은 남을 용서 못합니다. 반야를 모르는 사람들은 한번 미운 사람은 절대로 밉다고만 생각합니다. 우리의 번뇌(煩惱)가 멸(滅)해서 실상을 바로 보면

분명히 청정무비(淸淨無比)한 부처님의 광명(光明)으로 누구나 빛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흐리멍덩한 눈으로는 바로 못 보기 때문에 미운 사람 밉게 보이고 좋은 사람 좋게 보입니다. 따라서 죄(罪)는 어디가 있는가? 죄는 밉게 보는 '나'한테가 있습니다.

왜 남을 용서 못합니까?


-. 반야(般若)와 정견(正見) [4]


동체대비(同體大悲)라고 우리가 말은 다 하지 않습니까. 동체대비라는 말이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동체(同體)라는 말은 본질에서는 모두가 다 부처라는 뜻입니다.

본 성품에서는 부처라는 뜻입니다. 본 성품에서는 다 부처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대비(大悲)라 합니다. 그냥 약삭빠른 인정이 아닙니다.

팔정도(八正道)의 정견(正見)은 방금 제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우주(宇宙)의 모두가 두두물물(頭頭物物) 자타시비(自他是非)없이 일여평등(一如平等)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진여불성 아님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정견(正見)이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사유(正思惟)라, 이렇게 생각하는 견해에서 말한다고 생각할 때에 남 듣기 싫은 말 하겠습니까. 누구한테 베풀어라, 말 바르게 해라, 남을 용서하라, 우리가 정견만 굳건히 갖는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동적으로 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약명요심(若明了心)하면 만행구비(萬行具備)라. 만약 그대가 자기 마음의 본체(本體)를 깨닫는 다고 생각할 때는 만덕(萬德)이 다 갖추어 온단 말입니다.

고기 잡는 그물코가 천 코 만 코 있다 하더라도 양쪽 걸이를 쭉 잡아당기면 모두 코가 따라 오듯이 우리가 내 마음이 무엇인가, 우주(宇宙)라는 것은 모두가 다 청정무비(淸淨無比)한 마음뿐이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저절로 모두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思想) 밑에서 화두(話頭)를 들고 염불(念佛)을 하고, 주문(呪文)을 해야

참다운 염불이고, 참다운 화두입니다. 어느 사람들은 참선(參禪) 그러면 화두만 의심(疑心)하면 참선이고, 화두를 의심하지 않으면 참선이 아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께서 그런 말씀을 했습니까. 달마(達磨)스님께서 그런 말씀을 했습니까?

화두 아니면 참선이 아니라는 소리는 이것은 중국(中國)에서도 저 북송(北宋)때에 임제(臨濟) 일파(一派)에서 한 것이고, 또 우리나라에서는 이조(李朝) 오백년 동안 불교가 중국에서 청신(淸新)한 그런 기풍이 못 들어 올 때에 그러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오히려 화두 의심하면 참선인 것이고, 화두 의심 안하면 참선이 아니다. 이런 것은 전도몽상(顚倒夢想)입니다. 법집(法執)입니다.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

부처님 법문(法門)은 주문으로 가는 문이나, 염불로 가는 문이나, 경(經)을 보는 문이나, 복숭아 꽃 보고 깨닫고, 길 가다가 맑은 물을 보고 깨닫곤 합니다. 그런데 염불이 참선이 아니고 경론(經論)이 참선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우리 마음이 상대 유한적인 상에 걸리지 않고서 앞서 말씀과 같이 정견을 갖는다고 생각할 때는 어떠한 공부나 다 참선입니다.

하나님 부르나, 알라신을 부르나 다 참선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종교는 앞으로 틀림없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진리(眞理)가 하나인데 종교가 하나가 안 될 수가 있습니까?

기독교 성경이나, 알라신의 코란이나 여러분들이 허심탄회(虛心坦懷)한 마음으로 보시면,

다시 바꿔서 말씀 드리면 불교의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로 조명(照明)한다고 생각할 때에 모두가 다 진리입니다. 마음을 활짝 열 때입니다. 재가불자(在家佛子)나 출가불자(出家佛子)나 마음을 열 때입니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마음을 연다는 것은 상(相)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상(我相), '나'라는 상, 인상(人相), '너'라는 상, 수자상(壽者相), 시간이 짧고 길고 내 생명(生命)이 짧고 길고, 또 중생상(衆生相), 나는 사람이고 저것은 개다, 저것은 풀이다, 저것은 자연이다, 이와 같이 구분하는 이런 상(相)이 없어야 합니다.

상(相)을 떠나면 자연히 공해(公害)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물 한 방울도 우리가 오염(汚染)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땅도 살아 있고, 돌멩이 하나도 모두가 다 살아 있습니다.

중중무진(重重無盡)이라, 법계(法界)라는 것은 모두가 다 부처님의 광명(光明)으로 충만(充滿)해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생명(生命)입니다.

요즈음 한마음 운동(運動), 한 몸 운동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가톨릭에서 한마음 운동을 합니다만 그네들은 아직 한마음을 모릅니다. 오랫동안 앞으로 두고두고 우리 불교인들이 제도(濟度)를 해야 한마음을 알 것입니다. 한 몸, 한 마음은 불교의 대승(大乘)밖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가 진소위(眞所謂), 참말로 한 몸 운동, 한마음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네들은 기껏해야 사람과 사람끼리만 한 몸으로 압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천지 우주가 한 몸이란 말씀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참선 공부하기가 참 쉬운 것입니다. 천지우주의 도리에 따라서 하므로 쉽습니다. 부처님의 본원(本願)이라, 우주(宇宙)는 우주 자체에 목적(目的)이 있습니다. 어떤 목적인가 하면은 우리 중생들이 모두가 다 부처가 되게끔 하는 원(願)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홍서원(四弘誓願)을 외우지 않습니까?

모든 중생이 다 부처가 되게 하소서!

모든 중생이 무량법문(無量法門)을 다 알게 하소서!

그런 것이 우주의 뜻입니다. 우주의 목적입니다. 그것 보고 부처님의 본원이라 합니다.

우주는 바로 부처님입니다. 부처님 본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싫든 좋든 간에 불교를 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현대과학을 안 믿을 수가 없듯이 불교는 진리(眞理)이기 때문에 싫든 좋든 간에,미련한 사람들은 불교를 더디 믿겠지요. 금생에 못 믿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총명한 사람들은 금생에 믿고 닦아서 성불하실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우주의 도리에 따라서 있습니다. 절대로 과학적(科學的)이고 절대로 철학적(哲學的)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대로 따르면 굉장히 쉬운 것입니다.

음식도 적게 먹으면 그렇게 좋고 말입니다. 또는 절약도 낭비 않고서 과소비 않고서 절약하면 그렇게 좋단 말입니다. 자기도 가볍고 생활도 좋고 남도 숭상하고 고기도 먹는 것보다도 아니 먹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고기 안 먹는 사람이 고기 먹어 보십시오. 얼마나 느끼한가 말입니다. 그런 것 많이 먹고서 헛살 이 붙어 보았자 그것은 우리 생명에 아무런 보탬이 안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 모두가 다 우주의 도리에 따르는 것입니다.

개나 소나 돼지나 우리가 먹는 고기도 역시 우리와 생명이 같단 말입니다. 우리가 먹으므로 해서 더 많이 죽여야 하겠지요. 우리가 많이 먹으므로 외국에서 수입을 해야 하겠지요.

내가먹은 고기 한 점이 과거 어느 생(生)에 부모님 살(肉)일수가 있습니다. 또는 개나 소나 돼지나 그런 것은 우리보다 더 업장(業障)이 무겁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과거세(過去世)에 오계(五戒)를 못 지켜서 사람이 못되었습니다. 업장이 무거운 그놈의 세포가 나한테 온다고 생각할 때에 내 몸 세포가 오염이 안 되겠습니까? 오염되기 때문에 그런 것을 많이 먹어 놓으면 현대 문명병(文明病)에 걸리기 마련입니다.

우리 신앙(信仰)이라 하는 것은 철저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매서운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대중화(大衆化) 시키는 것이 불법(佛法)이다.' 이런 식으로 믿어서는 앞서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말법(末法)이라하는 상식차원(常識次元), 속물차원(俗物次元)에서 못 벗어납니다.

그러면 남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파스칼'인가도 말했듯이, '세계(世界)를 움직이려면 자기(自己)를 먼저 움직여야 한다.'

자기(自己)부터서 부처님의 정견(正見)을 바로 세워두고 바른 수행(修行)으로 해서 우리가 증명(證明)을 해야 합니다. 증명만 해버리면 그때는 우리가 별로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벌써 향기(香氣)가 풍깁니다. 우리한테 사향(麝香)을 가지고 있으면 사향 같은 아주 향내가 훈감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향(思鄕)을 갖는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몸에다 구태여 향(香)을 안 바르고 치장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절로 향기가 풍겨 나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 법을 믿고 법대로 수행하는 것보고, 향광장엄(香光莊嚴 : 念佛三昧)이라 합니다. 부처님 이름 한번 외우고, 우리가 화두도 한번 참구(參究)하고 말입니다.

한 번 한 만큼 우리한테는 우리 생명(生命)에 향기(香氣)가 그만큼 플러스가 됩니다.

치장하지 않더라도 그만큼 빛나는 것입니다. 부처님 후광(後光)을 보십시오.

본래(本來)로 우리한테는 그런 광명(光明)이 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잘 못 살아서 그런 후광을 인멸시키는 것입니다.


-. 반야(般若)와 정견(正見) [5]


우리는 다른 선택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외길로 천지우주의 진리인 부처님 길을 따라가는 그 길 외에 다른 선택이 없습니다. 다른 선택은 우리가 궤도(軌道)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한테는 불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苦)의 인(因)을 지었기 때문에 고를 받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고의 인을 안 지었다고 생각하면 과거 전생에 탐심(貪心)도 없고, 진심(嗔心)도 없고, 무명(無明)도 없다고 생각 할 때에 인간으로 나올 필요가 없습니다. 극락(極樂)에서 영생(永生)을 구가(謳歌)합니다.

우리는 바꿔져야 합니다.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고, 부처님 법으로 바꿔져야 합니다.

영생의 길로 걸음걸음 나아가야 합니다.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이뭣고 화두나, 무자 화두나 모두가 다 성불(成佛)의 공부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 드린 정견(正見), 정견과 더불어서, 정견을 확고부동하게 마음에 두고서 해야 참선입니다. 그러면 다 참선입니다.

아버지를 부르나, 어머니를 부르나, 어떻게 부르나, 이름을 안 부르고 명상(暝想)을 하나, 그냥 호흡법(呼吸法)을 하나, 호흡법도 그냥 호흡만 해서는 참선이 못되는 것입니다.

정견과 더불어서 해야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정견을 한사코 가지고서 거기에 따르는 수행 -거기에 따르는 수행은 부처님 계행(戒行)을 지켜야 합니다.-정말로 적게 먹고, 적게 쓰셔야 합니다. 적게 먹고 적게 쓰는 것이 나그네 길에서 우리를 가볍게 하고, 공부를 쉽게 하는 것입니다.

태국(泰國) '잠롱' 시장, 그의 가르침을 알지 않습니까?

재가불자는 적어도 ‘잠롱’시장 정도는 해야 합니다. 적게 먹고, 적게 쓰고, 부지런히 벌어서 남한테 베푼다. 그 정도는 되어야 재가불자의 본분입니다. 한 달에 -음력으로 8월 14일, 15일, 29일, 30일-육재일(六齋日)이 있는데 육재일 정도는 꼭 출가 수행자같이 적게 먹고, 적게 쓰고, 청정한 생활을 하십시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오늘 내일 다르고 차근차근 맑아져야 합니다.

이 가운데 미니스커트를 입은 분이 있으면 대단히 죄만스럽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번에 수원(水原)가서 어느 신도(信徒)님이 구경을 시켜 주어서 자연 민속촌(民俗村) 구경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일본(日本)사람이 굉장히 많이 왔습니다.

관광객 가운데 그들이 3분의 2쯤 되었습니다. 그날 우리 노덕(老德)스님들도 동행 했습니다만, 일본의 어느 여자학교에서 온 여학생들이 유니폼을 입었는데 그렇게 선량(善良)하게 보인단 말입니다. 그 선생님들도 일률적으로 유니폼을 다 입었습니다. 그 여인들의 치마는 무릎 아래로 쑥 내려갔습니다. 미니 입은 사람이 한 분도 안보인단 말입니다.

그렇게 미니스커트 입은 것이 더 예쁘게 보이겠습니까? 저 같은 구닥다리는 도저히 이해를 못합니다. 그것이 무슨 필요인가. 건강에 좋은 것인가. 다른 사람이 더 예쁘게 볼 것인가.

우리네 어머니나 아버지들 좀 반성(反省)을 해야 합니다. 딸이나 누가 그러면 엄격하게 꾸중을 하셔야 합니다. 한 더위에도 우리 보십시오. 이렇게 다리도 묶고 있지 않습니까?

불교는 그렁저렁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생활을 부처님 법에 맞추어야 합니다.

가장 검소한 것이 부처님 생활입니다.

그러나 부끄러운 것은 우리 절(寺)도 낭비를 많이 합니다. 낭비를 많이 하므로 앞으로는 더욱더 검소하게 우리가 생활을 해야 합니다. 저희들 출가 불자나, 재가불자나 정말로 부처님 법대로 따르셔서 제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꼭 말법(末法)을 떠나고 상법(像法)을 떠나고

-정법(正法)이 아니고서는 우리나라도 절대로 훌륭한 나라가 못됩니다. 세계평화(世界平和)도 절대로 안 옵니다. 진리(眞理)와 더불어서 만이 참다운 자유(自由), 참다운 평등(平等),

참다운 해탈(解脫)이 있습니다.

부처님 교법(敎法)에 따라서 바른 수행(修行), 바른 수행에 따라서 증명(證明)을 꼭 하시기를 바랍니다. 증명해 들어가면 그렇게 몸도 마음도 가벼운 것입니다. 계행(戒行) 지키기가 제일 쉬운 것입니다. 욕도 하기보다 않기가 더 쉽지 않습니까? 담배도 피우기보다 안 피우기가 더 쉽습니다. 술도 먹기보다 안 먹기가 더 쉽지 않습니까?

매서운 결단(決斷)을 하십시오. 그래서 부처님 법(法) 아닌 것은 내가 단연코 안한다.

'하이데거'말과 같이 "철학(哲學)은 결단의 가르침입니다." 종교는 더욱 그러는 것입니다.

종교를 믿음으로써 우리가 바꿔져야 합니다. 범부(凡夫)가 바꿔져서 성자(聖者)가 되는 것이 종교(宗敎)입니다.

이런 정법(正法)의 방향으로 불교(佛敎)를 전환(轉換)시켜서 나가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산승(山僧)의 말씀을 마칩니다.


나무석가모니불(南無釋迦牟尼佛)!

나무마하반야바라밀(南無摩訶般若波羅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