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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마음의 고향

제 10 집. 1.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마음의 고향 제 10 집


* 불기2537년(서기1993년)7월28일부터 8월1일까지 4박5일간 곡성 태안사에서 금륜회 하계 용맹정진을 20여명의 재가 불자님들과 함께 묵언 참선위주로 실시하였습니다 본 법문은 입제식에서 석 청화(釋淸華)큰스님께서 설하신 귀중한 법어(法語)입니다. 


-.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1]


우리 인생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른바 화택고해(火宅苦海)라. 번뇌(煩惱)의 불이 타고 있는 고생의 바다인지라 여러 가지 복잡한 일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 가운데는 자질구레해서 우리가 하지 않아도 될 만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꼭 해야 될 여러 가지 의무적인 일도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가장 큰 일이 오늘 여러분들께서 공부하시고자 하는 참선(參禪) 공부입니다.

우리가 깊이 느끼지 못할 때는 그냥 놓쳐 버리고, 또 심각하게 느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만 깊이 생각하면 '인생의 참다운 뜻이 무엇인가?' 하는 그러한 본질적인 도리를 생각할 때는 오늘 이와 같이 참선 공부하는 일이 가장 큰 일입니다.

그래서 이것 보고 일대사(一大事)라,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이 참선 공부하는 일이 바로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입니다.

무량 세 동안에 우리가 윤회(輪廻)도 많이 하고 그때그때 윤회 과정에서 가지가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오늘날도 고생 중에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인생을 볼 때는 꼭 인생은 본질적으로 고생(苦生)이다. 이러한 도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부처님 말씀에도 일체개고(一切皆苦)라, 모두가 다 고생뿐이란 말입니다.

인생은 그렁저렁 편안히 살다 가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는 시행착오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 그대로, 고생을 고생 그대로, 바로 수용을 해야 합니다.

과거 전생에 지은바 업장(業障) 따라서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도 고생 아니겠습니까. 어머님도 고생이고 본인도 고생입니다.

어머님의 태중에 10개월 동안이나 그렇게 숨어사는 그때도 굉장히 고생스럽습니다. 어머니가 음식을 조금만 잘 못 먹어도 태아는 고생합니다.

낳을 때도 고생, 성장할 때도 고생, 병들어 아파서 고생, 늙어지면 힘이 없어 고생, 그러다 이제 결국은 죽습니다. 죽음도 고생입니다.

이번 해남의 아시아나 항공기의 추락 사고를 보십시오. 66명이나 죽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생사가 순간입니다.

죽음과 삶의 갈림길이라는 것이 그렇게 뚜렷하게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느 때 자기한테 닥쳐올지 모릅니다.

그런 인생 고해 가운데서 하고 많은 일들 가운데서 참선 공부 이것이 이른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

가장 큰 일 가운데서도 가장 큰 일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바로 천지 우주의 법칙이며 도리입니다.

따라서 누구나 다 따라야 하고, 또 부처님 팔만사천의 법문이 다 그렇지만

우리가 법문을 듣고 아는 것에 그쳐 버리면 그것은 자기 보배가 온전히 못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우리가 배워가는 단계에 따라서 신해행증(信解行證)이라, 먼저 믿어야 합니다.

부처님 경지를 알 수 없는 것이므로 먼저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선 다 알고 믿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장 정직하신 분이며 인간과 천상과 우주의 스승이 바로 부처님인지라, 부처님 말씀을 일단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도 덮어놓고 믿기만 하면 자기 힘이 못 됩니다.

따라서 그 다음에는 우리가 체계 있게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理解)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믿고 해석하여 아는 것에 그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가 바로 부처가 되는 가르침입니다.

'너희들이 그냥 내 말 듣고서 믿고 아는 것으로 전부다'. 이러한 말씀이 아니란 말입니다.

'믿고 이치를 보다 깊이 생각해서 꼭 실천해서 나와 같은 부처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말씀이란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성자(聖者)가 되는 가르침입니다.

불교라는 것은 그냥 세간적인 그렁저렁한 행복을 우리한테 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 보다 깊게 보다 차원이 높게 인식을 하셔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세간적인 세속적인 행복을 위한 가르침은 아닙니다.

물론 부처님 가르침은 세속적인 행복을 결코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세속적인 행복은 사실은 허망한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허망한 것과 허망하지 않은 것을 분명히 구분합니다.

원래 진리는 모두가 하나이건만 우리 중생들이 일체 존재의 근본 성품을 모르고 그렁저렁 세간적인 편의(便宜)라든지 저속한 행복이라든지 그러한 것만을 바라기 쉽지만, 그러한 유루복(有漏福)을 떠난 참다운 생명 자체, 여러 가지 번뇌를 떠나고 인생고를 떠난 참다운 불멸의 행복, 다시 변동 없는 행복을 추구하는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참다운 가르침입니다.

불교의 근본적인 목적은 보통 안락스러운 것이나 또는 편안한 것을 추구하는 가르침이 아니고 우리 중생으로 하여금 저마다 열반락(涅槃樂)을 얻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열반락이라는 것을 대체로 아시는 분은 아십니다만 이것은 변동이 없는, 생사가 없는 영생의 행복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열반락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우리 마음도 바꿔지고 우리 생리도 몸뚱이도 바꿔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흐리터분한 피가 맑은 피로 바꿔져야 하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환골탈태(換骨奪胎)란 말입니다.

마음도 몸도 바꿔져야 그래야 앞서 말씀한 열반락, 즉 불멸(不滅)의 행복을 자기가 얻을 수가 있습니다.

아는 지식으로 해서는 모르는 것 보다는 낮다 하더라도 그걸로 해서는 우리의 인생고(人生苦)를 못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고 가운데서 가장 심각한 고(苦)가 역시 죽는 고통 아닙니까.

죽음의 두려움이 있는 한에는 아직 범부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완전히 떠나 버려야 그래야 성인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없애 버려야 참다운 행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비록 지금 우리 눈앞에는 여러 가지 생활고(生活苦), 사회고(社會苦)가 있습니다. 가지가지의 고난이 많이 있습니다만 사실 그러한 고난은 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과거 전생에 우리가 여러 가지 업(業), 선업(善業)도 짓고 악업(惡業)도 지었습니다.

전생에 악업을 많이 지었으면 그 때는 인과필연(因果必然)으로 꼭 우리가 그에 상응한 고통을 받습니다. 불교의 가르침 가운데서 초보적인 가르침이 이제 인과응보(因果應報)가 아니겠습니까.

인과법(因果法)을 무시하면 부처님 법이 아닙니다. 우리가 복을 못 지었으면 복을 못 받습니다. 그러면 고(苦)밖에는 못 받습니다.

그러나 복을 지었으면 꼭 거기에 상응한 과보로 해서 안락(安樂)을 받습니다. 과거에 지어서 금생에 받고 또 금생에 지어서 앞으로 받는 것입니다.

설사 과거 전생에 숙명적(宿命的)으로 잘 못 지어서 금생에 고생을 받는다 하더라도 금생에 심기일전(心機一轉)해서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을 하면 그냥 즉시에 우리 운명은 바꿔지는 것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불교는 숙명론(宿命論)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불법은 절대로 숙명론이 아닙니다.과거에 지어서 현재에 받는 것은 우리가 인연(因緣)의 제한을 받지만 금생에 자기가 하기에 따라서는 하늘 아래서나 하늘 위에서나 가장 존귀한 부처도 될 수가 있습니다.

가장 존귀한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인데 다른 것들은 문제시 할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의 소중한 법이라 하더라도 일단은 많이 듣고, 바르게 해석해서 바르게 알고, 알았으면 바로 실천궁행(實踐躬行)이라, 우리 몸과 마음을 바르게 닦아서 증명(證明)을 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바른 행이 있어야 참다운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사대 차원의 가르침, 신해행증(信解行證), 이것은 먼저 바르게 믿고 해석해서 이해하고 알고 행하고 그래서 증명을 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우리 세간적인 인생고를 떠나서 참다운 영생의 안락을 성취할 수가 있습니다.

영생의 안락은 열반락(涅槃樂)입니다.

번뇌가 다 가셔버린 참다운 행복 이것이 열반락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가르침은 가난한 이웃을 도와주는 그러한 것도 좋고, 또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훨씬 더 차원이 높습니다.

설사 배가 고프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의 번뇌를 녹여서 영생해탈의 열반의 길로 자기도 가고 남도 이끄는 이것이 무상대도입니다.

그러기에 석가모니 부처님도 80평생 거러지 생활을 하셨지 않습니까.

옷이나 음식이나 또는 잘 사는 것이나 권속이 많은 것이나 지위가 높은 것이나 이러한 것에 목적이 있었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께서 당신 몸소 그와 같이 평생 거러지 생활을 하셨을 리가 만무하지 않습니까.

또 그 뒤를 따라가신 무수한 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쿼바디스 도미네'라는 영화를 보셨겠지요.

베드로가 로마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뜻에 따라서 전도를 할 때입니다.

그 로마가 워낙 기독교에 대해서 박해가 심하므로 배길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로마를 탈출했습니다.

로마를 밤에 탈출해서 새벽녘에 ‘아티안’ 가도인가 하는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 때 마침 해가 솟아올랐습니다.

해가 솟아오르는 아침의 서광(瑞光) 가운데 훤히 예수님이 보인단 말입니다.

그 서광 가운데서 예수가 뚜벅뚜벅 걸어오신단 말입니다.

예수님을 베드로가 너무나 진실하게 믿으니까 환상적인 착각도 있을는지 모르지만 성자의 길이란 그와 같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자기 분신(分身)을 낼 수가 있습니다.

한 번 성자가 되면 삼매(三昧)의 힘으로 자기 분신을 내는 것입니다.

자기 분신을 열 사람 천 사람 우주에 가득하게도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그와 같이 위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그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주여!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이것이 쿠오바디스 도미네 아닙니까.” 그래서 다시 회심(回心)해서 그렇게 박해가 심한 로마로 다시 되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전도하다가 순교를 당하지 않았습니까.

진리라 하는 것은 그렇게 숭고한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구할 때에 너무나 안락의자에 앉아서 구하는 식으로 그렇게 편하게 구하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어떠한 도인들이나 한 고비씩을 넘을 때는 자기 신명을 다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대사일번(大死一番) 대확현정(大廓顯正)이라.

큰 대(大)자, 죽을 사(死)자, 크게 한 번 죽어야, 대확현정이라. 그래야 크게 이른바 부활적(復活的)으로 사는 것입니다.

 

-.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2]


여러분들께서는 이렇게 비장한 각오로 해서 오늘 공부하려고 오셨습니다.

꼭 증명(證明)하기 위해서 공부를 하여야 하는데,

증명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기도(祈禱)를 모시는 것이나, 또는 우리가 불경(佛經)을 외우는 것이나

다 증명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참선 공부는 가장 압축된 이른바 지름길로 가는,

내 본심(本心)을 깨닫고 참다운 부처한테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우리가 성자가 되고 부처가 되기 위한 지름길이 참선 공부입니다.

여러 법사님들께서 훌륭한 법문도 계시겠지만 주로 참선 공부가 주장이 됩니다.

따라서 참선 공부에 관해서 제가 몇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앞으로 법사님들이 말씀을 하시겠지만 제가 윤곽만은 말씀을 드려야 할 성 싶어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참선(參禪)!

이것은 앞서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중생 몸을 바꿔서 성자의 몸이 되는 성인(聖人)이 되는 지름길입니다.

성자가 누구나 저마다 다 될 것인가?

나 같은 사람이 또는 가정주부가 어떻게 성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자기 비하(卑下)를 절대로 마십시오.

어떠한 누구도 성자가 될 수 있는 힘은 다 갖추고 있습니다.

또 어떤 누구나 다 성자가 꼭 되어야 합니다.

성자가 안 되면 어떠할 것인가? 성자가 안 되면 속물이란 말입니다.

성자가 못되면 자기 평생 소중한 인생을 시행착오만 하다 가기가 쉽습니다.

제 아무리 자기 지위가 높고 고관(高官)이 되었다 하더라도 성자의 길로 나아가는 그러한 쪽으로 자기 인생의 길을, 방향을 바로잡지 않고서는 허튼 일을 많이 합니다. 바로 모르고, 바로 좀 안다 하더라도 알둥말둥 한, 자기 실천(實踐)으로 해서 자증(自證)을 못한 그런 간혜지(幹慧智), 그런 바싹 마른 지혜로 해서는 항시 시행착오만 따를 뿐입니다.

참선 공부를 해서 정말로 우리 마음의 본 성품 자리, 이른바 불성 자리를 깨달으면 그때는 참다운 지혜가 나옵니다.

그때는 무루지(無漏智)라, 때 묻지 않은 참다운 지혜가 되는 것인데,

그렇지 못하면 아무리 경(經)을 많이 보았다 하더라도 그러한 지혜는 간혜지(幹慧智)라, 바싹 마른 지혜, 즉 중생의 상대 유한적(相對有限的)인 개념지혜(槪念智慧)밖에는 안 됩니다.

개념지혜로 해서는 경계(境界)에 부딪히면 망상(妄想)이 나옵니다.

가르침에는 분명히 무아(無我)라, 내가 없다고 했지만 내가 없다는 것을 실천적으로 증명을 못하는 한에는, 경계에 부딪히면, 또 자기한테 좋게 하면 기분이 좋고 자기한테 싫게 하면 그만큼 우리가 저항을 느낍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자의 길로 나아가지 않고서는 금생에 내내야 살아보아도 인생을 낭비하기 일쑤입니다. 또 금생은 몇 십 년 동안 번쩍하면 지나가고 맙니다.

저 같은 사람도 벌써 고희(古稀)입니다만 한 20대가 어제 같습니다.

지나고 보면 몇 십 년 세월이 순간 찰나입니다.

이 동안에 한 일이 무엇인가?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온전히 공부한 것을 빼놓고는 사실은 다 헛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윽고 또 죽어야 하겠지요.

불이 타는데 나무가 다 사라지면 그때는 불도 꺼지겠지요.

나무가 다 타버리면 불도 꺼지듯이 금생에 인연이 다하면 죽기 싫어도 죽고 맙니다. 참 허망한 것입니다. 또 그 다음은 어디로 갈 것인가? 닦은 대로 갑니다. 생명 자체는 절대로 죽음이 없습니다.

닦은 대로 가는데 어떻게 갈 것인가? 자기가 지은 업(業)에 꽁꽁 묶여서 갑니다. 성자가 되어서 생사를 초월하는 공부를 했으면 모르거니와 승복을 입고 제 아무리 승려 생활을 많이 했다 하더라도 업장을 못 떼어버리면 자유스럽게 자기 자유의사로 못 갑니다. 업장에 꽁꽁 구속되어 가는 것입니다.

사람보다 업장이 더 가벼운 천상에 있다가도 잘 못 살면 지옥도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성자가 되는 길이 인연을 벗어나는 길입니다. 업장의 구속을 벗어나는 길입니다.

그 길을 분명히 알고서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라,

몇 천생 동안 헤매다가 금생에 어쩌다가 부처님의 법 만나서 인생고를 떠나고, 또 인연의 사슬, 인연의 쇠사슬을 벗어나는 공부인데, 그런 공부라는 것을 듣고도 안한다고 한다면 자기 인생에 있어서 그와 같이 큰 손해는 없습니다.

이 짧은 동안이지만 생각을 다 놓아 버리시고 참선하실 때는 다른 허튼 생각을 다 놓아 버려야 합니다.

도방하(都放下)라, 모두 도(都)자, 놓을 방(放)자, 아래 하(下)자, 모두를 다 놓아 버린다는 말입니다.

심지어는 자기 몸뚱이까지도 자기 마음으로 놓아버려야 합니다.

조금 무엇을 더 먹든지 덜 먹던지 그러한 것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더 먹어서 좋은 것도 아닌 것이고, 따라서 자기 몸뚱이까지도 놓아 버리는 그런 마음으로 공부를 해야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공부가 성자의 길로 가까워집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참선 공부를 한다 하더라도 자기 기분(氣分)도 못 놓고,

또 먹는 음식도 생각하고, 미운 사람 생각하고, 좋아하는 사람 생각하고,

그랬다가는 애쓰고 참선한다고 가부좌(跏趺坐) 틀고 고생고생 하여 보았자

소무공덕(所無功德)이라, 얻는 것이 없습니다.

참선 공부 이것은 외도(外道)꾼들이 하는 참선 비슷한 것도 있습니다.

또 소승(小乘)들이 하는 그런 참선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지금 정다웁게 정법(正法)으로 하는 대승(大乘) 불자들입니다. 꼭 대승 불자들이 되셔야 합니다.

그러면 외도꾼들이 하는, 즉 불교가 아닌 다른 공부에서 하는 그런 참선은 어떤 것인가? 이것 보고 불교적인 술어로 해서 외도선(外道禪)이라 합니다.

이것은 인과(因果)도 모르고, 또 인과를 부정하고, 세간적인 이익을 바라는 것입니다. 내가 참선을 하면 내 몸이 좋아지겠지, 내 머리가 좋아지겠지,

다른 사람이 나를 좋게 보겠지, 내가 차력(借力)을 좀 해서 기운이 훨씬 더 초인적인 힘을 내겠지, 내 눈이 밝아서 천안통을 하겠지, 이렇게 세간의 유위법적(有爲法的)인 때 묻은 것을 바라고 합니다.

또 참선을 하면 머리도 시원하고, 가슴도 시원하고 좋다더라, 이와 같이 무슨 맛을 생각한단 말입니다. 재미스러운 맛을 위해서 합니다.

세간적인 그런 때 묻은 해탈의 공부가 아니라 세간적인 상대(相對) 유한적(有限的)인 어떠한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든지,

또는 자기 재미를 위해서 하는 것이라든지 이러한 것은 외도꾼들의 공부입니다. 그 '마인드 컨트럴(mind control)'이나, 기(氣)나, 지금 이상스럽게 하는 그런 것들은 사실은 외도들의 공부입니다.

그 다음에 소승선(小乘禪)이라.

그러면 소승 참선은 어떠한 것인가? 같은 불법도 근기(根氣)가 낮은 소승이 있고, 근기가 온전히 부처님 법을 백퍼센트 그대로 가감 없이 수용하는 대승(大乘)이 있습니다.

소승에서 하는 선(禪)은 어떤 것인가?

이것은 자기 몸뚱이나 자기 마음 이것은 오온(五蘊)이 가화합 되어 있다고 아공(我空)을 느끼고, 해탈을 위해서 닦는 선입니다.

자기 몸뚱이 색신(色身)은 지수화풍(地水火風),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질소나

이러한 것들이 적당히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지고, 자기 마음도 역시 감각적으로 감수(感受)하고 상상(想像)하고 의혹(疑惑)하고, 또 분별시비는 이러한 수상행식(受想行識) 사온(四溫)이 모여서 되었는데,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인연 따라서 잠시간 머물므로 허망하지 않은가.

자기 몸뚱이가 고유하게 과거 전생에 있었다가 이대로 나온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것저것 각 요소가 모여서 내 몸이 되었단 말입니다.

따라서 이들 요소가 흩어지면 내 몸은 흔적도 없습니다.

인연생(因緣生)이라, 인연 따라서 잠시간 결합된 것입니다. 내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소승도 미처 못된 우둔한 사람들은 소승도 미쳐 못된 내 견해가 옳다, 내가 생각한 것 외에는 내가 수용할 수가 없다고 우둔한 사람일수록 고집(固執)이 더 강합니다.

자기 생각이라 하는 것은 자기 번뇌(煩惱)에 여과(濾過) 되어서 자기 번뇌에 굴곡(屈曲) 되어서 온 것이지 그것이 참다운 무가정(無假定)의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내 생각도 하나의 허망 무상한 개념 활동이고, 내 몸도 허망 무상하다,

이와 같이 자기 스스로 자기 허망 무상한 것을 알고 닦는 선 이것을 소승선(小乘禪)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소승은 자신에 대해서 허망 무상한 것은 안다 하더라도, 다이아몬드는 무엇이고 금은 무엇이고 또 하늘에 있는 저 별들은 무엇이고, 내 몸뚱이가 산소나 수소나 탄소로 되었다고 하면 산소나 수소는 무엇이고, 우리 마음의 본바탕은 무엇인가,

이러한 근본적인 것은 본래 모른단 말입니다.

소승 차원에서는 모든 존재 모든 법의 그런 실상을 모른단 말입니다.

사람의 본질은 대체로 어떤 것인가?

무상(無常)이라고 하면 무상의 근본은 무엇인가?

공기(空氣)의 근본은 무엇인가?

또 물질(物質)의 근본은 무엇인가?

이러한 것을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안심(安心)이 안 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참다운 참선 이것은 이른바 대승선(大乘禪)이라, 더 구체적으로 구분하면 최상승선(最上乘禪) 법도 있습니다만 세 가지 구분만 여러분들께서는 아시면 되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른 견해를 갖지 못하고 삿된 견해로 해서

다만 그런 유위적인 편의(便宜)나 상대 유한적인 이익이나 세간적인 그런 속된 생각을 못 떨쳐버리고서 하는 명상법(冥想法)이나 그런 것은 모두가 다 외도선입니다.

조금 더 나아가서 자기 몸이나 자기 마음 이것은 무상한 것이다,

허망 무상하다, 이런 정도로 알고 하는 것은 소승선이고, 지금 여러분들은 외도선, 소승선을 떠나서 대승선을 하고자 이렇게들 오셨습니다.

대승선은 부처님 가르침을 에누리 없이 다 수용을 해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무엇인가 하면 내 마음이 지금 '나'라고 하는 이런 업장의 몸에 갇혀 있지만 내 마음은 본래는 청정무구(淸淨無垢)하다, 조금도 때가 없어 칭정하다는 것입니다.


내 본래 마음이 청정무구하다, 이렇게 알지 못하면 참다운 불자가 못됩니다.

나는 별로 배우지도 않았는데 나는 거짓말도 많이 했는데 나는 더러는 파계(破戒)를 많이 했는데, 우리는 그렇게 했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내 마음은 본래청정(本來淸淨)이라, 과거에 어떻게 지냈던 이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나한테 갖추고 있는 것은 내가 금생에 태어나서 제 아무리 못된 일을 많이 했다 하더라도 내가 갖추고 있는 본래의 마음은 조금도 오염(汚染)이 안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래 청정이라, 모두가 본래 청정합니다.

또는 내가 설사 금생에 인연이 다해서 목숨을 마친다 하더라도 내생(來生)까지 가더라도 역시 금생에 잘 못 살아서 내생에 지옥을 간다 하더라도 본래 청정한 그 마음은 조금도 변질이 없습니다.

변동이 없습니다.


-.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3]


그러면 본래 청정은 어떠한 것인가?

다만 텅텅 비어서 때가 묻지 않은 것에 그치지 않고, 본래 청정하므로 석가모니 마음이나 달마 스님 마음이나 서산 스님 마음이나 내 마음이나 똑 같단 말입니다.

부처님 마음이 훤히 맑기만 하고 아무것도 없는 마음은 아니지 않습니까.

본래 청정하므로 그 마음 가운데는 일체 공덕이 원만히 갖추고 있습니다.

내가 비록 아무것도 아니 배웠다 하더라도 또 어린 동자라 하더라도

그 마음 가운데는 석가모니와 똑같은 만 공덕(萬功德)을 원만히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마음이 바로 부처입니다.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내 마음은 그와 같이 조금도 때 묻지 않은 청정한 것인데, 그 청정한 가운데는 무한의 공덕을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그 마음자리는 내 몸뚱이에 제한된 것이 아니라 우주와 더불어서 무량무변(無量無邊)한 것입니다.

또한 동시에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낳지 않고 죽지 않고 영생(永生)합니다. 또 그 자리는 인연의 구속을 받지 않습니다.

우주가 인연이 다 해서 텅텅 비어지는, 파괴(破壞)가 되어 버리는 그런 때가 온다 하더라도 그 청정무구한 그 마음자리는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이렇게 자기 마음을 믿는 것, 이것이 참다운 대승신앙(大乘信仰)입니다.

내 마음도 그렇고, 저 사람 마음도 그렇고, 내 마음도 역시 끝도 갓도 없이 우주에 언제나 어디에나 충만해 있고, 이렇게 생각하면 내 마음이 다 차 버렸으니까 다른 사람 마음은 찰 틈이 없겠지만, 마음은 물질이 아닌지라 내 마음이나 저 사람 마음이나 모두 마음이 똑 같이 우주에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나다, 너다, 밉다, 곱다 하는 분별 망상하는 그 마음 이것은

거품 같은 메아리 같은 마음입니다. 이것은 사실 실존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참다운 마음은 그와 같이 물질이 아니고, 거품 같은 것이 아니고, 메아리 같은 것이 아니고, 이것은 실존적인 우주의 실상인지라 모든 존재의 마음 이것은 똑같은 것입니다.

자기를 너무나 사랑하고 자기를 너무나 아끼고 이런 사람들은 소중한 내 마음과 저 미운 사람 마음과 같다고 생각할 때는 좀 섭섭하겠지요.

부처님 가르침은 절대로 공평무사(公平無私)한 것입니다. 다른 동물의 마음도 똑같습니다.

다른 식물에의 마음도 똑같습니다. 어떠한 것이나 생명 자체로 들어갈 때는 똑같아 버립니다. 이런 소식을 알고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고, 이러한 도리를 알고 참선 공부를 해야 참다운 참선입니다.

이런 도리를 모르면 참다운 참선이 못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외도선(外道禪)은 무슨 재미나 생각하고, 편리나 생각하고, 자기 건강이나 생각합니다. 전혀 필요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것만 생각하는 것은 참다운 참선은 못됩니다.

참다운 참선은 앞서 말씀드린 세간적인 외도선이나 소승선의 그런 공덕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무량(無量)한 공덕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세간적인 공덕은 참다운 참선 가운데 다 포함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참선할 때에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고, 또 염불선(念佛禪)도 하고, 염불 화두도 합니다.

훤히 밝은 마음자리는 끝도 갓도 없이 우주에 충만한 것이므로 그 가운데는 석가모니나 예수가 갖춘 무한의 공덕도 다 들어 있습니다.

그 공덕은 이루 다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공덕을 다 말할 수가 없으므로 간추려서 삼명육통(三明六通)이라 이릅니다.

삼명육통은 무엇인가 하면 자기의 지난 과거를, 무시이래(無始以來)로 끝도 갓도 없는 과거를 훤히 알고, 다른 사람 과거도 알고, 미래도 훤히 알고, 또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을 훤히 느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를 아는 것이 숙명통(宿命通)이요,

미래를 알고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을 알고 통달하는 것이 이른바 천안통(天眼通)이요, 또 일체 존재에 대한 모든 번뇌를 끊어 버리고 진여불성을 증명하여 부사의(不思議)한 능력을 갖춘 누진통(漏盡通), 이러한 것들을 자유자재로 할 수가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자기 몸을 마음대로 하고, 남의 마음도 헤아리고, 이런 등등 무한의 능력이 우리 마음에는 온전히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것 보고 좀 어려운 말로 하면 무루공덕(無漏功德)이 원만구족(圓滿具足)이라, 때 묻지 않은 일체 공덕을 원만히 갖추고 있습니다.

일체 중생의 근본 마음 가운데는 무루공덕이 원만구족 되어 있습니다.

어느 성자의 말씀에나 이런 말씀이 다 있습니다.

지금 잘 못 알고 있는 사람들은 신통(神通)은 외도(外道)들이나 하는 것이지

정도(正道)에는 신통이 없다, 이렇게 말합니다만 이것은 부처님을 모독하는 말입니다. 외도인들도 신통을 합니다. 그러나 외도인들은 바른 견해가 없습니다.

번뇌를 미처 떼 내지 못했기 때문에 '나'라는 아상(我相)을 못 떠나 있습니다. 외도는 재주는 제법 부리지만 나라는 아상을 못 떠나 있으므로 그 재주는 한계가 있습니다.

또 재주로 자기 욕심을 부립니다. 욕심을 내면 신통은 어디 간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당한 성자(聖者)의 신통은 자기라는 아상이 없기 때문에 신통은 조금도 줄어듦이 없습니다. 그러한 것이 자기한테 갖추고 있습니다.

성인들뿐만 아니라 우리한테 갖추고 있는 불성, 이른바 그 자리가 진여불성입니다. 나한테 있는 것도 진여불성, 저 사람한테나 누구한테나 있는 근본 성품은 진여불성입니다.

나무한테나 어디에나 언제나 불성은 우주에 가득 차 있고 사실은 우주는 진여불성뿐인 것입니다.

사람이요, 하늘에 있는 별이요, 식물이요, 동물이요, 이러한 것들은 진여불성 위에 인연 따라서 잠시간 가짜 모양을 나툰 거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중생들이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다 진여불성 위에 인연 따라서 잠시 같이 이루어진 그림자와 같은 것입니다. 꼭 이렇게 알아야 됩니다.

참다운 진여불성 자리를 알고 느끼면 인류는 전쟁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겉에 뜬 가상만 보고서 '그 가상이 참말로 있다' 이렇게 보니까

그것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서 싸운단 말입니다.

가상에 집착하는 한에는 자기 마음도 불안의식을 영구히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항시 불안스럽습니다. 우리 마음의 본 성품이 진여불성이고, 그 진여불성 자리는 만 공덕이 원만히 갖추어져 있으므로 진여불성까지 우리가 이르지 못하면 항시 마음은, 모든 것을 다 추구하는 마음이 가시지 않습니다.

백억 대 부자나 천억 대 부자나 불안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절대로 만족이 없습니다. 진여불성이 우리 마음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만 공덕을 갖춘 진여불성이 되어 버려야 그래야 비로소 안심입명(安心立命)이 됩니다. 거기까지 못 갈 때는 항시 마음이 불안스럽습니다.

<대중 가운데서 불쑥 질문이 있었습니다.>

“큰스님 진여불성(眞如佛性)이 무엇입니까? ”

“아! 예! 예! 그러십니까? ”

진여불성!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진여(眞如)라는 것은 참 진(眞)자, 같을 여(如)자, 바로 진리(眞理)라는 뜻입니다. 우주의 본 성품과 조금도 차이가 없는 바로 진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다만 이치(理致)에만 그치지 않고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 즉 부처님 그러는 것입니다.

어느 분들은 불성 그러면 이것은 하나의 이치(理致)가 아닌가,

하나의 도리(道理)가 아닌가, 이렇게만 생각을 합니다만 우주의 도리인 동시에 우주의 법칙인 동시에 생명인 것입니다.

진여(眞如) 이것은 진리를 말합니다.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완벽한 진리가 진여입니다. 진여불성 그러면 '바로 진리의 생명'이란 뜻입니다.

우리 마음은 바로 진리의 생명입니다.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 왔던지 간에 진리의 생명 자리는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참선 공부는 그 자리를 문제시 합니다.

화두를 들 때도 우리가 그 자리를 추켜들어야 합니다. 그 자리를 떠나 버리면 참선이 못됩니다.

따라서 그 자리를 안 놓치고 붙들고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 자리를 놓치지 않고 붙들고 있으려면 우리 인간이 보는 것은 다 허망하다, 제법(諸法)이 공(空)이다, 이렇게 우리가 분명히 이해하고 느껴야 진여불성 자리를 놓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양을 보면 모양에 집착을 합니다. 좋다, 궂다, 싫다, 귀엽다 또는 있다, 없다 하는 그런 상 때문에 우리 마음은 항시 동요하고 맙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이 지금 이대로 해서는, 인간이라 하는 업식으로 보아서는, 모두가 이렇게 형상이 있게 보인단 말입니다.

나도 있고 너도 있고 다 있게 보입니다.

그러나 중생이 보는 것을 그대로 사실로 있다고 생각할 때는,부처님 말씀에 의지하면 모두가 다 허망 무상한 것인데,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 같은 것인데, 우리가 그렇게 이해를 못하고, 보는 대로 내 몸뚱이도 이대로 있고, 내 소유고 이렇게 생각하는 이런 생각으로 해서는 참다운 참선은 못하는 것입니다.

다만 모습만 참선같이 앉아서 하는 것이지, 정말로 몸과 마음이 온전히 혼연일체가 되어서 참선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진여불성 자리에 딱 못 박혀 있어서 진여 불성 자리를 여의지 않아야 참다운 참선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가 어려우니까 먼저 선행적으로 익혀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내 몸뚱이 이것도 텅 비어 있다, 또는 내 환경도 다 이것은 텅텅 비어 있다, 다만 진여불성이 인연 따라서 메아리같이

- 산에 가서 소리를 지르면 메아리가 울려오지 않습니까. 메아리가 흔적이 있습니까. -

메아리가 흔적이 없듯이 인연 따라서 업(業)의 바람 따라서 잠시간 나와 같은 모양이 나왔고 너와 같은 모양들이 나왔단 말입니다.

다른 물질도 모두가 다 그런 것입니다.


-.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4]


현대 물리학적으로 말하면 천지우주는 에너지뿐인데 그 에너지가 적당히 인과(因果)의 법칙 따라서 진동(振動)하고 운동(運動)을 해서 모양을 낸단 말입니다. 이른바 현대 물리학이나 양자역학(量子力學)이나 부처님 가르침이나 비슷비슷합니다.

다만 참다운 도리의 근본은 무엇인가? 참다운 실상은 무엇인가?

현대 물리학은 아직 그것을 모릅니다만 우선 현상적인 풀이는 현대 물리학이나 불교나 같습니다. 현대 물리학도 역시 물질이 아닌 우주의 정기(精氣)인 에너지가 인과의 법칙 따라서 사람 같은 가상(假相)을 내고 산(山)같은 가상을 내고 가짜로 모두를 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가짜로 잠시간 모양을 냈기 때문에 어느 순간도 고유하게 머물지를 못합니다.

이른바 변화무쌍한 것입니다.


더 어려운 말로 하면 전변무상(轉變無常)이라, 모양이라 하는 것은 모두가 다 변화 무상한 것입니다. 순간순간 바꿔진단 말입니다.

그러는 것을 우리 중생이 과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미처 모르고서 내 몸은 이대로 있다, 이것은 내 것이다, 이러는 것이지 정말로 우리가 바로 보면 이 몸뚱이 이것이 어쩌다가 인연 따라서 모양을 이와 같이 나툰 것이지 내 것도 아니고 네 것도 아닌 것입니다.

좀 어려우시겠지요. 여태까지 집안 살림하시고 여기 오신 것도 우리 집안이 더욱 행복스러워지기를 바라는 원력으로 다 오셨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한테 이것도 저것도 다 허망하고 아무것도 없다. 이래 버리면 참 허무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진리라 하는 것은 어느 누구만 진리를 따라서 가고 보통 사람들은 그냥 그렁저렁 몰라도 무방하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관세음보살을 한 번 외운다 하더라도 관세음보살의 뜻을 대승적으로 바르게 알고 하는 것과 또는 바르게 모르고서 방편적으로 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관세음보살을 외우나 화두를 참구하나 바르게 할 때는 그것이 우리를 해탈의 길로 인도합니다.

우리를 성불로 인도하지만 그냥 맹목적으로 할 때는, 즉 염불하면 나한테 복이 많이 온다, 이렇게 생각하고 할 때는 조그만 한 선근(善根)은 되어도 그것이 해탈로 우리 중생의 때 묻은 몸을 성자의 길로 인도하는 그런 것은 못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공부를 안 했으면 모르거니와, 했다고 생각할 때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일체 것을 사실 그대로 보는 견해를 가져야 합니다.

자기라는 것이 제 아무리 소중하다 하더라도 인연 따라서 과거 전생에 지은 업의 바람 따라서 잠시간 이와 같이 각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모여서 가상만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자꾸만 생각을 하면 내 몸에 대한 애착이 줄어듭니다.

그러나 내 몸은 내 것이고 그것이 '나'라고 한다면 자기 몸에 대한 애착을 못 버립니다. 내내야 죄악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몸 때문에 나옵니다.

자기 몸하고 가까운 인연 때문에 나옵니다.

따라서 자기 몸에 대한 애착을 못 뿌리치면 자기 가정도 평화롭지 못하고

사회도 마찬가지고 더구나 대승(大乘) 공부는 어림도 없습니다.

대승 공부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도방하(都放下)라, 자기 몸뚱이가지도 몽땅 버릴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몽땅 버려버리면 몽땅 손해가 아닌가?

절대로 몽당 손해가 아니라 그야말로 몽땅 다 얻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인생고를 떠나서 추구하는 행복을 틀림없이, 확실히 우리가 받는 공부입니다.

그런 가운데도 무한의 행복을 받는 공부입니다. 참선 공부는 그래서 여러분들께서 지금 자기의 관념 생각으로는 그렇게 못 느낀다 하더라도 거짓말을 절대로 안하신 부처님과 부처님 뒤에도 무수한 성인들이 다 증명한 가르침임을 알아야 합니다.

꼭 내 몸뚱이 이것이 거품 같은 것이다. 거품 같아서 순간순간 주름살도 더해지고 순간순간 그것이 차근차근 마멸되어 갑니다.

이렇게 느끼시고서 자기가 지금 집을 떠나 여기 와 있지만 4박 5일 동안 공부하는데 내 집안에 무슨 큰일이나 없지 않을까?

집안에 누군가 아프기도 하고 하는 것도 큰일입니다만 제가 허두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러한 것은 참다운 큰일은 못됩니다.

참다운 큰일은 우리한테 있는 그런 번뇌를 녹여서 자기한테 있는 번뇌의 불을 꺼서 참다운 성자의 길로 가는 것이 가장 큰일입니다.

따라서 자기한테 있는 욕심의 뿌리, 자기한테 있는 뿔룩거리는 진심(嗔心:성내는 마음)의 그런 뿌리, 이런 뿌리를 뺀다고 생각할 적에 그보다 더 큰일은 없습니다.

따라서 집안에 설사 무슨 미련이 좀 있다 하더라도 기왕 공부를 하러 오셨으니 꼭 이 기간을 잘 이용하셔서 손해가 없도록 공부하시기를 바랍니다.

역시 참선 이것은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의 대승 도리를 조금도 안 떠나야 합니다. 안 떠나기 위해서 화두가 있고 염불이 있습니다.

어떠한 화두나 다 보면 부처님 도리를 꼭 잡으라고 화두가 있습니다. 덮어놓고 의심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다 허망하게 다 비어 있고, 그 대신 우주에는 부처님의 그런 광명, 진여불성의 생명이 충만 되어 있다,

화장실 가운데나 냄새가 지독한 가운데나 또 흙 속에나 공기 속에나 어디에나 진여불성으로 충만하여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하여야 그래야 대승적인 생각입니다.

이렇게 꼭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기 위해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도 부릅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님은 저만큼 멀리 극락세계에 계신다.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자리는 물론 언제 어디에나, 어느 순간에나 어느 티끌 속에나 바로 보면

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님이 계시고, 바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님인 것입니다.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모두가 다 부처님이란 뜻입니다. 염불을 하는 것은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밖에서 부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것이나 모두가 부처 아닌 것이 없음을 우리가 다시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번뇌에 가려서 안 보이므로 그 총명하신, 모든 존재를 바로 보신 부처님의 지혜, 반야지혜(般若智慧)로 우리가 재차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우리가 잘 못 보는 것을 제거하고서 참다운 부처님 지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내 몸뚱이 가운데도 또는 공기 가운데도 부처님의 진여불성,부처님의 생명의 빛은 훤히 밝아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부처님 광명을 보는 듯이 부처님 명호를 부르셔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맑아지면 분명히 부처님의 광명은 눈앞에 정말로 실존하므로

참으로 볼 수밖에는 없습니다.

우리 중생의 흐리멍덩한 업식이 우리 생명을 위해서는 아무 필요도 없는

부질없는 생각을 많이 하기 때문에 그런 불성광명을 못 보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얼마나 오랫동안 무명과 무지(無智)에 가렸던가.

성인들이 공부할 때는 자기 마음이 번뇌의 때 묻은 생활을 하였던 것을 통탄하고, 땅을 치고 통탄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부질없이 망상을 했던가? 그렇게 하다가 공부를 바로 해서 어느 날 자기 번뇌가 녹아서 정말로 부처님 광명이 훤히 나올 때는 제 아무리 점잔하고 근엄한 분도 너울너울 춤을 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억제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행복보다도 제일 큰 행복이 열반제일락(涅槃第一樂)입니다.

우리 번뇌의 마음을 없애고서 참다운 마음을 찾는 행복같이 큰 일이 없습니다. 그것은 어느 누구한테도 나라를 위해서 제일가는 애국자요, 집안 어른으로서도 가장 수승한 길이요, 어머니로 해서도 가장 수승한 길입니다.

세계는 이러한 성자가 한 분이라도 더 나오셔야 합니다.

우리 인류는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많이 했습니다. 이것저것 다 하여 보아도 별로 소용이 없단 말입니다. 모두가 다 끝에 가서는 고생뿐입니다.

공산주의도 그렇게 애써 보았지만 나중에 나온 결과가 무엇입니까?

자본주의도 지금 이대로 가다가는 차근차근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지고 또는 노사문제, 즉 부자 계급과 무산계급과의 싸움뿐입니다.

이것도 부처님 진리에 비추어서 바르게 수정을 해야지 이대로 가다가는 이것도 역시 파멸뿐입니다.

우리 인류가 가지가지의 인간의 지혜를 짜내서 하여 보았지만 모두가 다 실패를 했습니다. 그러나 실패를 했으므로 지금 사람들은 상당히 많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위대한 과학자나 그런 분들은 역시 무어라 해도 석가나 예수나 공자나 그런 분들의 가르침대로 나아가야 되겠구나,

그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다시 바꿔서 말하면 지금까지 우리 인간의 행로는

인생의 바른 궤도(軌道)를 떠나 있다가 바야흐로 이제야 바른 궤도,천연, 자연의, 우주의 도리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참선을 하고자 하는 것은 정통(正統)으로 우주의 참다운 도리에 들어와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정진 가운데는 보통 정진(精進)도 있고 - 보통 정진은 잠도 자고 먹을 것도 먹고 쉬기고 하고 하는 정진입니다. - 

그 다음 차원은 가행정진(加行精進)이라,

자기 힘을 상당히 애써서 자기 힘을 몹시 긴장을 시킨 가운데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음식도 가려서 먹고, 잠도 조금 덜 자고, 하여튼 긴장할 대로 긴장을 해서

허튼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이렇게 애써서 하는 정진을 가행정진이라 합니다. 정진을 좀 더 가속도로 한단 말입니다. 지금 말로는 가속도 정진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하시다가 보다 차원 높은 정진은 용맹정진이라. 용맹정진 이것은 자기 몸뚱이를 몽땅 바치고 하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 죽을 테면 죽어라고 그렇기 때문에 잠도 안자고 배긴단 말입니다.

원칙은 용맹정진을 할 때는 하루에 한 끼만 먹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하기가 어려워서 먹기는 제대로 다 먹습니다만 잠은 안자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하시는 것은 지금 보통 정진과 가행정진과 이렇게 하여가다가 끝에 가서 용맹정진이 있습니다.

용맹정진까지 꼭 하셔서 용맹정진을 마친 다음에는 누구한테서 꾸어 온 것도 아니고 자기한테 갖추고 있는 진여불성 자리, 우주에 다시없는 그런 보배의 자리를 증명하시기 바랍니다.

그 자리보고 마니보주(摩尼寶珠)라고 합니다.

일체의 신통(神通), 공덕(功德), 자비(慈悲), 지혜(智慧)가 다 나오는 보배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은 신통, 지혜, 자비, 행복이 다 들어 있는 보배입니다.

염불하고 참선하고 하는 것이 모두가 다 이러한 보배에 우리가 가까이 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배우신 대로 관세음보살을 여태까지 하여 왔으면 관세음보살을,밖으로만 구하지 말고, 천지우주가 다 관세음보살 부처님 한 분뿐이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서 관세음보살님을 속으로 외우시면서 참선을 하시고 또 나무아미타불, 아미타불을 하신 분들은 밖에서 구하지 마시고 천지 우주 모두가 다 아미타 부처님뿐이구나! 어떻게 하시든지 간에 화두를 하시는 분도 마찬가지고 천지 우주가 부처님 아닌 것은 조금도 없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서 그 자기가 외우고 있는 화두나 또는 염불을 놓치지 말고 생각 생각을 지속을 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에 번뇌가 싹트지 않고서 우리 마음이 걸음걸음 진여불성 자리, 우리 본래의 마음자리에 가까워집니다.

꼭 지속을 시켜야 됩니다.

누가 얘기를 한다 하더라도 별로 신통한 이야기가 아니면 그냥 손을 저어들고 대꾸를 안 하시면 되겠지요.

그러나 생활상 필요한 것은 조금 말씀하시는 경우가 있겠지요. 말을 하면 말로 해서 우리 생각이 헷갈려 버립니다.

부처님만 생각하는 우리 마음의 고향 길, 가장 행복스러운 길, 그 길로 가는 그 자리만 생각하는, 그 생각 외에는 다른 생각은 말아야 합니다.

적어도 그런 생각을 일주일 쯤 하여야, 안자고 안 눕고 일주일 쯤 하여야 자기 본성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이번에 4박 5일 동안에 익혀 두셨다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일주일 동안이나 자기 신명을 다 바치고,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몸뚱이 어차피 죽을 몸뚱이, 비행기 타다가 죽을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뚱이 한 번 다 바치고 그렇게 공부를 하셔서 자기 보배를 꼭 얻으시기 바랍니다. 이 동안에 화합한 가운데 절대로 우리에게 소중한 시간이므로 누구하고 다투지 마시고 다 양보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승가(僧家)는 화합하는 것이 또 으뜸입니다.

나와 남이 둘이 없거니 자기 기분 때문에 남하고 속상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 모두가 허망한 것입니다.

꼭 그동안에 법사 스님들의 가르침을 잘 받들어서 계율(戒律)을 지키시면서

손해 없이 지속적으로 부처님 자리, - 부처님은 어디에는 계시고 어디에 아니 계신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우주에 언제나 어디에나 계시는 훤히 밝은 생명의 빛입니다. - 그 자리를 놓치지 않고서 공부하셔서 꼭 보람 있는 참선 공부를 성취하시기를 거듭 간절히 바라면서 말씀을 마칩니다.

 

나무석가모니불(南無釋迦牟尼佛)!


나무마하반야바라밀(南無摩訶般若波羅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