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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마음의 고향

제 9 집. 가사불사(袈裟佛事)의 인연공덕(因緣功德)

마음의 고향 제 9 집


* 불기2532년(서기1988년)5월1일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인 곡성 동리산 태안사에서 석 청화(釋華) 큰스님을 모시고 가사불사(袈裟佛事)회향 및 정기법회를 봉행 하였습니다. 이때 큰스님께서 설법하신 귀중한 법어입니다


-. 가사불사(袈裟佛事)의 인연공덕(因緣功德) [1]


이제 5월의 춘풍은 아늑하기도 하고 참으로 평온한 느낌을 줍니다.

이러한 평온한 5월 달의 훈풍을 타고서 지금 태안사(泰安寺) 동리산(桐裏山)은 새로운 신록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이러한 옷이 얼마 안가서는 다시 짙어져서 보다 더 녹음(綠陰)이 무르익어 올 것이고, 온갖 여름이 가면 그러한 녹음 또한 가을의 조락(凋落)으로 바뀌고 맙니다.

또 얼마 안가서는 차갑고 앙상한 나무 가지들만 남겨 줍니다.

이와 같이 사계절을 통해서 그때그때 대자연은 계절이 옷을 갈아입습니다.

이러한 옷은 계절 따라서 또는 상황 따라서 머물지 않고 계절이 옷을 갈아입습니다.

우리 중생의 옷도 역시 지금은 사람이 되어서 이러한 사람 모양의 옷을 입었습니다.

그 위에다 여러 가지 가지각색의 옷을 입었습니다마는 이러한 옷도 상주불변(常住不變)의 그러한 옷은 아닙니다.

그때그때 경우에 따라서 인연 따라서 바꾸어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조건이나 상황을 떠나서 영원히 변치 않는 그런 옷이 있습니다.

산도 역시 봄에는 신록, 여름에는 녹음이 짙어 가고, 가을에 잎이 떨어지고,

또는 겨울에 나목(裸木)이 된다 하더라도 산이라 하는 자체는 변동이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사람 역시 비록 중생일 때는 업장 따라서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의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마는 항시 인간의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의 인연이 다해서 죽어지면 그때는 자기 업장 따라서 다른 옷을 입는 것입니다.

욕심이 너무나 많아서 탐욕심을 너무 많이 부리면 아귀의 세계에 가서

아귀라 하는 귀신의 옷을 입습니다.

또는 더 악독해서 무자비한 짓을 많이 하면 그런 우리 식(識)은, 영혼은

지옥에 들어가서 지옥의 옷을 입습니다.

어리석기는 하지만 조금 더 나아져서 별로 나쁘지 않은 경우는

그때는 업장이 맑아져서 금생에 죽어지면 축생계에 가서 돼지나 소나 그런 옷을 입습니다.

또 사람보다 더 착한 행동을 해서 보통은 마음이 삼매에 잠겨서 마음이 고요하면 그런 우리 의식은 천상계에 태어나서 천상의 옷을 입습니다.

또 더 나아가서 보다 공부를 하여 가지고 삼매, 즉 바른 정견(正見)에 입각한 삼매에 들면 그때는 성문승(聲門乘)이나 연각승(緣覺乘)이나 또는 보살승(菩薩乘)이라 하는 성자(聖者)의 - 구경적(究境的)인 성자(聖者)는 못됩니다마는 - 옷을 입습니다.

이와 같이 지옥으로부터 차근차근 자기의 업장 따라서 달리 옷을 입습니다.

그렇게 달리 옷을 입지만은 영원히 변치 않는 한 가지 핵심이 있습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한 가지 핵심의 그 옷이 무엇인가?

이것이 우리 불성이고 불심입니다. 성품으로 말하면 불성이고, 마음으로 말하면 불심입니다.

이것을 인격으로 표현한 것이 부처님 아니겠습니까.

부처님이라 하는 그런 경계에서는 아무리 옷이 사람으로, 일반 축생으로

또는 지옥으로 그 겉의 모습은 바뀌어진다 하더라도 알맹이 핵심은 변함이 없습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여러 가지 종교도 많이 있고 교리도 많이 있습니다마는

이러한 변동에 따라서 같이 변하지 않는 참다운 모든 존재의 중심,

모든 그런 종교의 근본, 본질, 본바탕, 이러한 것은 석가모니부처님 가르침밖에는 없습니다.

우리 불교인들은 분명히 느끼셔야 하겠습니다.

생사윤회에서 우리가 이것 되고, 저것 되고 또는 어떤 경우에 처한다 하더라도 변함이 없는 참다운 생명뿐입니다.

불성을 바로 의식하고, 불성을 깨닫는 그런 공부는 부처님 가르침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가르침은 천상천하에 가장 비교할 수 없는

천상천하의 무여불(無餘佛)입니다.

여기 모이신 우리 불자님들은 이와 같이 천상천하에 비교할 수 없는 그런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인연을 짓는 것입니다. 이러한 천상천하에 변치 않는 영원한 참다운 생명,

참다운 부처님이 즉 법신 부처님입니다.

이러한 법신 부처님을 상징하고, 법신 부처님을 의미하는 참다운 옷, 가장 최상의 옷, 이것이 오늘 우리가 불사를 회향하는 바로 가사(袈裟)입니다.

비록 가사(袈裟) 이것은 천으로 만들고, 또는 색도 여러 가지 색으로 해서 만들고 있습니다마는 가사 이것은 모양은 그와 같다 하더라도 가사의 상징적인 뜻은 제가 앞서 말씀한 대로 영원히 변치 않는 불성, 불법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소중한 불법을 의미하는 가사불사(袈裟佛事)를 회향(回向)하는 것입니다.

가사는 이와 같이 부처님 또는 불법을 의미하는 그러한 소중한 뜻이 있기 때문에 가사에 따른 공덕이 굉장히 많습니다.

참다운 공덕은 상(相)을 떠나서, 유루적(有漏的)인 상(相)을 떠나서

무루적(無漏的)인 무위법(無爲法)의 그러한 경계에가 있는 것이 참다운 불성이고 참다운 불법의 의미입니다. 불교는 상(相)도, 체(體)도 둘이 아닙니다. 현상과 본체가 둘이 아닙니다.

비록 본체에 있어서 불성은 그와 같이 광대무변하고, 영생불멸한 뜻이 있지만 또는 그러한 본체가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화현(化現)되는, 본체가 현상화 되는 그런 것도 무시하지 아니합니다.

사람으로 이루어지고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짐승이 되고, 뭐가 된다 하더라도 불성은 변함이 없습니다.

불성은 변함이 없기 때문에 인간도 중요하지만 일반 축생이나

또는 기타 식물이나 어떤 것이나 모두가 다 소중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가장 소중한 것의 상징은 즉 법의(法衣) 이것이 가사(袈裟)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가사는 도복(道服)이라. 진리를 깨닫는 법의(法衣)라 해서 도복이라. 또한 가사는 자비법의(慈悲法衣)라고도 합니다.

또 가사는 계법의(戒法衣)라, 또는 가사는 인욕법의(忍辱法衣)라,

즉 그와 같이 가사에 깃들인 공덕이 한도 끝도 없이 많기 때문에 자비(慈悲)나, 계(戒)나 인욕(忍辱)이나 이러한 부처님의 모든 육바라밀(六波羅蜜)의 공덕을 원만히 갖추어 있는 그런 법의(法衣)이기 때문에 가사는 무상복전의(無上福田衣)입니다. 위없는 복반(福田)의 그런 옷인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와 같이 위(上)없는 복밭의 옷을 짓는 불사에 같이 동참하신 것입니다.

부처님 경전에 보면 가사불사(袈裟佛事)에 동참하면 몸이 아프다 하더라도

공경스럽게 일심 동참하면 몸 아픈 것이 풀리는 것이고,

또 우리가 잘못 지어서 금생의 여러 가지 일이 막힌다 하더라도

가사불사(袈裟佛事)를 공경스럽게, 여법하게 한다면 그것도 풀리는 것입니다.

옛날 중국 원국(元國)의 대신인 정승 한 분이 - 그 사람이 아주 바른 사람인데 - 참소를 당해서 역적으로 몰렸습니다.

역적으로 몰려서 사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끌려가는데 그 때 마침 그 집안에서 집안사람들이 가사불사(袈裟佛事)를 그야말로 공경스럽게, 정성껏 동참했단 말입니다. 형장에 끌려가서 망나니가 그런 무서운 칼을 휘둘렀단 말입니다. 목을 쳤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 칼이 두 동강이로 딱 갈라집니다.

두 번째 쳐도 역시 칼이 부러지고 맙니다.

세 번째 쳐도 역시 칼이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그것을 보고 있던 임금이 이런 괘씸한 일이 있는가?

저 놈이 무슨 요술을 부려서 그러는가?

그래서 그때 임금이 손수 자기 칼을 빼어 들고 목을 베었단 말입니다.

그러나 역시 임금의 그런 보검도 똑같이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기적적인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은 현상을 떠나서 심심오묘(甚深奧妙)한 부사의(不思議)한 공덕이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사무치게 믿지 못하기 때문에 정성스럽게 동참을 못했기 때문에 별로 큰 덕을 못 이루는 것이지 참으로 사무치면 그와 같이 부사의한 복을 준단 말입니다.

용(龍)은 중생의 어두운 눈으로는 안보입니다마는

신장(神將)들이나 천신(天神)의 눈으로는 다 볼 수가 있는데,

실은 용은 가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분명히 존재하는 축생계의 용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경전에 용두기무(龍頭起舞)라! 용도 가사의 한 조각을 얻으면 축생계를 면해서 천상에 갈 수 있는 복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또 우각일촉(牛角一觸)이라! 소 우(牛)자, 뿔 각(角)자입니다.

소뿔이 어쩌다가 가사에 부딪히면 잠깐 스쳐만 가도 소도 역시 축생계를 면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공덕의 힘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렇게 가사에 따르는 공덕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가사는 우리 중생을 우리 중생의 본바탕인 성불의 길로 이끄는 도복(道服)이고, 해탈의 법의(法衣)이기 때문에 이렇게 가사에 따르는 공덕이 많은 것입니다.

가사는 부처님의 청정무구한 그런 진리를 상징하고 또 동시에 가사를 입으면 우리가 가장 빠르게 해탈의 길로 부처님의 곁으로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사에 따르는 그런 공덕이 무궁무진한 것입니다.

따라서 비록 모양은 이와 같이 가사를 입었다 하더라도 해탈의 길을 바로 못가면 다시 바꿔서 말하면 성불의 길에 바로 가지 못하면 그때는 가치가 없습니다.

상대유한적인 가치는 있다 하더라도 참다운 무루(無漏)의 가치는 없습니다.

가사 공덕의 가장 큰 가치는 상(相)에 따르는 공덕보다도 - 그것은 태양 빛에 비해 반딧불과 같이 미미한 것이고 - 참다운 가치는 이것은 무루법(無漏法)입니다.

해탈의 법, 무루법에 가는데 있어서 가사 공덕의 소중함이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우리가 가장 빨리 성불할 것인가? 이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가사에 따르는 그런 상(相), 유루법(有漏法)적인 공덕만 바라면 가사 불사의 공덕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사불사(袈裟佛事)를 함으로써 그런 유루적(有漏的)인 재수도 좋고,

또는 병도 낳고 여러 가지 복도 받지만 아울러서 보다 근원적인 우주 성불의 법, 본래 참다운 내가 되고, 참다운 해탈이 되고, - 사실은 우리 법이라 하는 것은 세간적인 유위법(有爲法)이나 무루법(無漏法)이나 간에 모든 것은 다 우리의 자성(自性)입니다. - 우리의 불성(佛性)을 밝히는 데에 가장 큰 공덕이 있습니다.

세간이 혼란스럽고 살기가 각박하므로 보통은 다 우선 유위법(有爲法)인 현상적(現象的)인 문제가 잘 되고, 재수가 풀리고, 집안이 잘 되고 하는 이런 것만 바라고 불교를 믿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유위적인 상(相)적인 행복의 그런 범주에서만 구하면 제대로 못 봅니다. 재수도 좋고 또는 건강도 풀리고 이러한 상대 유한적인 복도 역시 중요하지만

보다 깊은, 보다 많은 복을 얻기 위해서는 근원적인 해탈로 가는 길을 닦아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유위법적인 유한상대 세간적인 복도 더 많이 얻을 수가 있습니다.


-. 가사불사(袈裟佛事)의 인연공덕(因緣功德) [2]


어떻게 하면 우리는 빨리 해탈의 길로 갈 것인가?

여기에 모이신 불자님들은 해탈의 길로 가기 위해서 여러모로 인연 따라서

공부를 많이 하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법은 누가 말한다 하더라도, 어린애가 말한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법은 항시 새롭고 눈물겨울 정도로 감사합니다.

저 같은 사람은 가사(袈裟)를 40년 이상을 입었으나 가사를 입을 때마다 눈물겹도록 감사의 합장을 드립니다. 그것은 가사가 오직 제가 말씀 드린바 우리 범부를 떠나서 해탈의 길로 인도하고 해탈을 상징하는 불법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 그지없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소란스럽습니다.

어째서 소란스러운 것인가? 그것을 분명히 알고 인간의 존재가 무엇인가?

또는 진리의 본바탕이 무엇인가? 인간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하는 이런 문제, 그리고 과학이란 대체로 어떤 것인가? 우리 몸뚱이는 어떤 것인가?

또 물질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항시 쓰고 있는 마음은 어떤 것인가? 하는

이런 것을 분명히 알면 그렇게들 소란스럽지가 않을 것입니다.

가사 마음이라는 문제를 하나 두고서도 굉장히 구구각색으로 이론이 있습니다. 마음은 하나의 의식에 불과하다, 의식보다 더 깊을 때는 잠재의식에 불과하다.

이렇게 해서 어느 정도는 알지만 그런 잠재의식 보다 더 깊은 것은 무엇인가? 우리 의식에 가장 근본은 무엇인가? 이러한 우리 마음을 파고 들어가서 마음의 근원적인 도리, 이것을 물어서 확답을 얻는 사람은 적어도 부처님 법을 믿는 사람 외에는 없습니다.

부처님 법을 믿는 사람도 역시 그냥 피상적으로 믿는 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불교를 믿는 분도 법에 맞게 행해상응(行解相應)이라.

바른 생각과 행동이 같아야 할 것인데 보통 그렇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바른 견해를 세우지 않으면 바로 못살아 갑니다.

즉, 말하자면 혼란스러운 것은 우리나라나 또는 세계가 바른 사상이

확립이 안 돼 있기 때문입니다. 바른 사상이 확립되었다면 인간은 언제나 화평이 넘치는 화장세계(華藏世界)가 되었을 것입니다.

바른 사상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항시 갈등과 분열과 반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른 사상, 바른 견해는 무엇인가?

대체로 윤곽은 아시지만 이러한 기회를 통해서 저와 더불어 재인식하시길 바랍니다.

바른 견해는 어떤 견해인가?

우리 중생의 제한된 안목에서는 천차만별로, 자타(自他)가 있고, 시비(是非)가 있고, 여러 가지 그러한 구분이 있다 하더라도 바로 보면 천지우주는 오직 하나의 진리로 귀일(歸一)되는 것입니다.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 모든 법(法)이 천차만별로 구분이 있다 하더라도

오직 근원 바탕은 하나뿐입니다. 근원이 하나 인줄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그 하나가 되는 것이 나중에 우리가 죽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분별된 이대로 하나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걸 알아야 합니다.

보통은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 하면 나중에 죽어서 저 몇 억년 뒤에 하나가 된다.

이렇게 생각 한 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일반 범부의 견해입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또는 여러 가지 중생의 천차만별로 무수(無數) 만인의

그런 중생이 있다 하더라도 지금 이대로 지금 분별된 체로 이대로 하나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은 이 분별만 보고서 하나인 것을 못 봅니다.

물위에 뜬 파도나 거품만 보고 물 자체는 못 봅니다.

성자라는 것은 그러한 것을 봄과 동시에 그런 근본바탕을 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저 사람 강(姜)씨다, 또는 김(金)씨다, 잘났다, 못났다, 남녀다, 여(與)다, 야(野)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범부가 보는 즉 아상이나 인상이나 중생상이나 또는 수자상이나

상을 여의지 못하고 보는 것에 불과합니다. 상을 여의고 보면 그때는 무두가 다 하나로 보입니다. 하나로 어떻게 보일 것인가? 모두가 그때는 불성으로 보입니다. 불성이 인연 따라서, 조건 따라서 이렇게 되고, 저렇게 되고는 했습니다. 그 차이뿐입니다. 산이 되었거나 냇물이 되었거나 또는 하나의 원자가 되었거나 간에 근본실상, 근본실성은 역시 불성뿐입니다.

천지우주는 불성뿐입니다.

그런 불성이 가지가지의 인연 따라서 이와 같이 만다라화(曼陀羅華) 바로 훌륭한 여러분들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을 제가 이렇게 뵌다고 생각할 때는 그야말로 과거 전생에 무수 생(無數生) 동안에 부처님 법을 만나기 위한 그런 선근(善根)을 쌓으신 것입니다.

선근을 안 쌓았으면 부처님 가르침 같은 무상대도(無上大道)를 금생에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우리의 제한된 안목에서는 사실은 사람의 허물을 쓰고 있습니다. 사람의 허물을 쓰고 있던 개의 허물을 쓰고 있던 간에 내내야 우리의 본바탕은 똑같은 불성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비록 지옥 들어가서 그 지옥의 그런 모진 세계의 껍질을 쓰고 있다 하더라도 내내야 알맹이는 불성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은 탐욕심이나 또는 분노심이나 그런 것에 가려서 껍질만 보고서 알맹이를 못 봅니다.

석가모니나 예수나 또는 공자나 그런 성자들은 알맹이를 보는 것입니다.

성자는 번뇌가 없기 때문에 분명히 모든 존재의 실상을 봅니다.

우리 중생은 실존을 못 보는 우리는 하나의 꿈을 꾸고 있습니다.

즉 말하자면 번뇌에 가린 소경인 것입니다.

비록 그 사람이 제아무리 학식이 많고 지위가 높고 또는 웅변이 그야말로 무생물(無生物)인 돌이나 하늘에 있는 꽃이 감흥(感興)을 해서 고개를 끄덕끄덕할 정도로 말을 잘 한다 하더라도 그런 것으로 해서는 불성을 못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성을 못 보기 때문에 제아무리 웅변을 잘하고, 야당(野黨)이나 여당(與黨)이나 여러 가지 그런 훌륭한 말씀을 많이 하지만 그분들이 부처님을 믿고 참다운 성자가 못되는 한에는 우주만유(宇宙萬有)의 참다운 본바탕인 진리는 못 보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인가 하는 자기 스스로의 참 자기는 못 보는 것입니다.

그런 못 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사회는 혼란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 플라톤도 말을 했습니다만 참다운 성자가 사실은 정치인 되고, 참다운 성자가 정치를 해야 만이 인류 사회는 비로소 참다운 평화스러운 평등과 자유를 보장하는 그런 세계가 온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범부의 경우에는 - 범부라 하는 것은 마음을 비웠다 또는 무엇을 비웠다 하지만 언제나 자기 몸뚱이에 걸리고 맙니다.

자기 껍데기에서 걸리고 또는 자기 권속에 걸리고 맙니다.

상대 유한적인 여러 가지 물질에 걸려 있습니다. 그런 제한된 견해로 해서는 참다운 진리를 모를 뿐만 아니라 남을 이끌 자격도 사실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정말로 이상적인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로 닦고 바로 믿어서 우리가 보다 더 많은 수의 성자가 많이 나오고 말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성자가 되고, 우리가 성자가 못되는 한에는 우리 본바탕이 바로 성불이기 때문에 우리 본 생명이 부처님이기 때문에 부처님까지 우리가 못 갈 때는 우리는 몇 만생이나 껍질만 쓰고 헤매는 것입니다.

지옥의 껍질을 썼다가 또는 축생의 껍질을 썼다가 사람의 껍질을 썼다가 말입니다. 그와 같이 껍질만 쓰고 우리는 텀벙거리는 것입니다.

잘 닦아서 성자가 되어야 만이 비로소 껍질을 벗고서 알맹이 그대로 부처님 그대로 우리가 자기의 생명의 본 목적과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주라 하는 것은 내내야 모두가 다 성불의 길로 지금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불의 길을 가는 것은 사실은 우주의 목적에 따른 것이고 우주의 도리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보다 더 자기의 본 생명을 깨달은 것인가?

우리 마음은 지금 사람이 되어서 사람의 정도로 오염이 되어서 사람의 껍질을 쓰고 있으나 우리 마음의 불성은 조금도 때 묻지가 않았습니다. 우리 가사(袈裟)를 또한 연화복(蓮華服)이라, 연꽃 연자, 꽃 화자, 연화복이라고도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진리는 마치 연꽃 모양으로 진흙탕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진흙에나 흐린 물에 물들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중생의 불성, 마음도 역시 사람이 되나 구름이 되나

또는 지옥을 가나 축생이 되나 우리 불성의 차원은 조금도 물들지 않습니다.

마치 바닷물이 바람 따라서 파도가 높이 일어나고 낮게 일어나서

거품이 되고 또는 파도가 되나 즉 물 기운은 조금도 변치가 않듯이

우리 사람도 역시 그런 불성 기운이 인간이 되 든 무엇이 되 든 간에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 중생은 잘 안보입니다만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본 성품(性品)은 조금도 변동이 없이 여여한 불성 그대로 찬란한 성품 뿐 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중생은 미쳐 자기가 안 보인다 하더라도 성자의 가르침 따라서 성자의 흠축이 없는, 조금도 흠이 없는 교훈 따라서 바로 보면, 바로 있는 것은 모두가 다 불성뿐이구나. 그와 같이 느껴야 됩니다. 이러한 느낌을 갖는 것이 가장 소중합니다.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하고, 주문도 외우고 여러 가지 공부가 많이 있습니다만, 이런 공부가 사실은 모두가 다 불성이 되고자 해서, 빨리 하나가 되고자 해서 하는 공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우리가 인식적으로 모두가 다 불성뿐이다.

이와 같이 느끼는 것이 선행적으로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만이 비로소 이른바 선오후수(先悟後修)입니다.

옛날 미련한 때는 애써 닦아 가지고 나중에 겨우 알음알이를 얻지만 지금은 총명한 때라서 그럴 때가 아닙니다. 또는 지금은 다들 너무나 바삐 돌아갑니다. 외도(外道)도 많고, 잡설도 많고, 여러 가지 주의, 사상이 많아 놔서 우리는 바쁘고 너무나 복잡해서 바른 견해를 못 가지면 사실은 단 한 걸음도 바로 못 갑니다.



-. 가사불사(袈裟佛事)의 인연공덕(因緣功德) [3]


사회가 얼마나 혼란스럽습니까.

우선 신문만 보십시오. 신문이 두 장만 나오더라도 복잡한데 지금은 신문이 석장, 넉장이 나옵니다. 그것을 그냥 좀 보려고 할 때 얼마나 우리 마음이 혼란스럽겠습니까.

이와 같이 이런 것, 저런 것, 하여튼 복잡한 때라 우리 마음이 바른 정견(正見)이 딱 정립 안 되면 바로 못 갑니다.

바른 아버지도 못되고, 바른 어머니도 못되고, 바른 아들도 못됩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함부로 한다, 또는 우리 부모님들이 부모 구실을 못한다,

이와 같이 말씀을 많이 합니다마는 모두가 다 바른 정견(正見)이 못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단 우리 수행자뿐만 아니라 어떤 누구든지 간에

현대와 같이 고도로 발달된 이런 시대에는 과연 모든 근원이 무엇인가?

물질의 근원이란 무엇인가?

이런 근원적인 문제를 몰라 버리면 방황하여 헤매게 됩니다.

인간이 있고, 원자가 있고, 무엇이 이고 간에 근원적인 순수 에너지 이것은 바로 불성이다 하는 바른 견해가 앞서야 합니다. 불성은 앞서 말씀과 같이 인격적으로 표현하면 부처님입니다. 마음으로 표현하면 불심입니다. 불심, 불성, 부처님, 똑같은 뜻입니다.

따라서 모두는 사실은 불성뿐입니다. 불심뿐입니다.

불심뿐이기 때문에 화엄경에서 일체유심조라! 모두가 다 마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다 마음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 불법을 이해 못하는 분들은 도저히 감이 안 잡힙니다. 분명히 물질적인 내가 있는 것이고, 나무가 있고, 새가 있고, 여러 가지 원소가 있고 하거니 어떻게 마음 뿐 일 것인가? 불법을 너무 깊이 못 믿으면 '일체유심조'라 하는 '모두가 마음이다'란 말을 못 믿습니다. 그러나 틀림없이 조금도 흠축이 없이 모두가 다 마음 뿐 입니다. 불심뿐입니다. 불심 뿐 인 것을 확실히 믿으면 우리가 욕심을 내겠습니까?

모두가 다 불심뿐이라고 확실히 믿으면 우리가 권력에 탐을 내겠습니까?

불교를 믿는 다는 분도 여러 가지 과오를 많이 짓고 쇠고랑을 찹니다.

그런 것은 사실은 겉만 믿습니다.

겉만 형상을 믿고 현상을 집착하는 것은 불교를 믿는 태도가 아닙니다.

특히 나이 많이 자신 보살님들 잘 보십시오. 현상을 믿는, 자기 몸뚱이, 내 남편 몸뚱이, 내 아내 몸뚱이 또는 많은 돈, 좋은 집, 이러한 현상을 믿는 분은 참다운 불교인이 못됩니다.

형상 이것은 결국 허물어지고 맙니다. 이것은 무상하고 허무한 것입니다.

염라대왕은 사람이 죽어지면 끌려온 사람한테,

공부를 많이 하신 사람은 염라대왕이 안중에도 없는 것이고, 보이지도 않는 것입니다만 공부를 못한 분에게는 염라대왕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육도경계(六道境界) -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 -를 못 벗어나면 염라대왕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어서 염라대왕한테 끌려갔단 말입니다. 끌려온 중생한테 염라대왕이 하는 말이 '그대가 살아생전에 내가 보낸 세 사람의 천사를 보았는가?" 이렇게 물었단 말입니다.

무릎을 꿇고서 죄의 심판을 받는 영가 중생이 못 봤다고 대답을 한단 말입니다. 내가 보낸 천사는 노(老)가, 병(病)가, 사(死)가니라.

늙음이라 하는 천사, 늙은 사람들이나 자기 늙음 그것이고,

또 한 천사는 자기가 아프기도 하고 남이 아픈 것도 보는 그런 병이라는 천사, 또 한 천사는 죽어서 가는 주검이라는 천사,

노, 병, 사 이것이 내가 보낸 세분의 천사이니라. 이와 같이 말씀을 했단 말입니다.

사실은 우리 중생은 어느 누구나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천지우주의 정칙(正則)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은 보통 다 이런 천사를 못 봅니다.

늙어 가는 것이 얼마나 허무합니까?

저 같은 사람도 환갑, 진갑을 넘었습니다마는 젊은 때가 어제와 같습니다.

젊어서 파릇파릇 중 될 때가 어제 같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온갖 황혼 길입니다. 또 아프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몸이 건강하여 자기는 아프지 않더라도 자기 주변 사람이 아프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누가 안 죽습니까? 머리가 영리한 사람들은 이것 보고서 집착을 별로 안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늙어 가서 죽거니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과연 내 몸뚱이가 소중한 것인가? 또 재산이 소중한가? 권력이 그렇게들 소중한가 말입니다. 이런 것은 소중한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선재대장부(善哉大丈夫) 능요세무상(能了世無常)이라!

착하도다 대장부여, 능히 세상의 무상함을 깨달았으며, 대장부(大丈夫)라 하는 것은 기운이 세어서 장부가 아닙니다. 대장부라 하는 것은 무상을 느껴야 만이, 일체만법이 허망무상한 것을 느껴야 만이 대장부입니다.

비록 지위는 어떤 지위에 있더라도 무상을 못 느끼면 대장부가 못 되고 그 사람이 인간적인 참다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무상을 참다웁게 느끼면 그때는 저절로 마음도 비워지고

남한테 궂은 말도 못하는 것입니다. 탐욕도 못 부리는 것입니다. 우선 앞서 말씀과 같이 바른 견해를 가져야 하는데 우리 범부들은 독심에 가려 있습니다. 어두운 탐욕심에 가리고, 또 분노하는 진심에 가리고, 어리석은 치심에 가린 그런 삼독심에 가려 있습니다.

범부인 한에는 독스러운 독심이 다 있습니다. 가장 억울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범부를 벗어나 성자가 못되는 일이 가장 억울한 것입니다. 어째서 우리는 성자가 못되는 것인가? 제 방금 말씀과 같이 삼독심에 가려서 못된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이 할 일 가운데서 제일 중요한 급선무는 무엇인가 하면

우리 원수인 삼독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불교 의식을 밤마다 합니다.

그렇게 해서 더러는 병이 낫는 보살님들을 보시고서 여기 오셔서 불교 의식을 하려고, 또 기도를 하시려고 들 많이 오십니다마는 제가 병을 낫게 하는 기술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다. 마음이 주인이고 몸은 그 종에 불과하다. 몸은 사실은 텅 빈 공취(空聚)라, 빌 공자, 모을 취자, 공취다. 잘 기억하십시오.

우리 몸이라는 것은 공취입니다. 공 기운이 모여 있습니다.

물질이 아닌 마음기운, 물질이 아닌 에너지 기운이 모여서 진동하는 현상을 몸뚱이라 합니다. 우리 마음의 업장에 알맞게 몸을 받습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사람 정도로 우리가 업장이 무거우면 그때는 사람으로 화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잠시간 인연 따라서 모였다가 흩어지고 맙니다.

황야(荒野)에 집을 지으면 집을 지을 때는 없었던 집이 생기지만은

또 뜯어버리면 텅 비어 원래 그대로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 몸도 역시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를 비롯한 각 원소가 업장 따라서 끌어 모아서 그것으로 만듭니다.

죽어지면 어디가 무엇이 남습니까?

내 것도, 네 것도 아닌 것을 우리는 집착합니다.

자기 손이 소중해서 손을 가꾸고 반지를 끼고 별 짓 다 합니다 만은

생각해 보면 사실은 텅텅 비어 있습니다.

반지도 자기 손가락도 아끼는 자기 몸매도 간 곳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비록 삼독심에 가려서 안 보인다 하더라도

천지우주는 오직 모두가 불성뿐이다. 바로 보면 다 부처님뿐이다.

이와 같이 바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서 그 다음에는 우리 행위가 달라져야 합니다.

마음이 맑아지면 몸도 맑은 것이고, 또는 그 반대로 우리 몸이 청정하면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도 따라서 청정해 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행(戒行)을 지켜야 합니다.

계행을. 계율(戒律)을 안 지키면, 계율이 없으면 살생도 하고, 또는 훔치기도 하고, 또는 삿된 음란한 짓도 하기도 하고, 이와 같이 상대 유한적(相對有限的)인 것에 끌려서 우리 마음을 움직이다 보면 그때는 우리 마음은 안정이 안 됩니다.

안정이 안 되면 우리 마음의 근본번뇌를 못 녹입니다.

즉, 말하자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탐욕심이나 분노나 또는 성내는 마음이나

이런 마음을 못 녹입니다. 못 녹이면 그때는 이제 우리 불성을 못 봅니다.

본래는 부처이건만 부처가 못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른 견해와 바른 법으로 우리 행위를 다뤄야 합니다. 말을 급하게 하면 따라서 우리 마음도 그냥 파동을 일으킵니다.

파동을 일으킨 마음으로 해서는 우리 번뇌가 더욱 치성을 돼서 근본 불성을 못 봅니다.

마음이 명경지수(明鏡止水)라. 본래 여러분들 마음은 명경지수와 같습니다.

밝을 명자, 거울 경자, 그칠 지자, 물 수자, 여러분 마음은 지금 밝은 거울과 같이 티끌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은 지금 명경지수와 같이 맑지를 못합니다.

조금 기분이 나쁘면 그냥 순식간에 악을 뻗칩니다. 이런 파동 치는 마음에서는 우리 번뇌가 녹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의 근본성품 불성을 볼 수가 없습니다.

행동을 우리가 주의하고, 말도 부드럽게 하고, 그렇게 하려면

먼저 선행적으로 앞서 말씀과 같이 바른 견해가 딱 앞장서야 합니다.

나와 남이 둘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마음의 파동은 그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없고, 남이 없고, 좋은 것이 없고, 궂은 것이 없고, 천지우주가 내내야 다 불성뿐이다.

이와 같이 자주 느끼고 자기 마음을 달래고 하는데서 우리 마음의 파동이 잔잔해 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업장을 녹이고 우리 마음의 파동을 자게 하는 이러한 수행법, 이것이 참선이고, 염불이고, 주문인 것입니다.

지금은 어느 분들이 꼭 자기 하는 방식만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저 티베트 사람들은 '옴마니 반메훔'만 합니다. 그러나 옴마니반메훔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것은 사도(邪道)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티베트의 고승(高僧)들이나 티베트 불교는 다 사도입니까?

또 염불만을 많이 하는 사람은 염불이 가장 수승한 것이고 딴 것은 하면 안 된다.

이런 논법은 지금 같은 시대에는 통용 될 때가 아닙니다.

원효대사(元曉大師)나 대각국사(大覺國師)나 또는 보조국사(普照國師)나

정통적(正統的)인 그런 위대한 분들은 모두가 다 그러기에 회통불교(會通佛敎)를 하셨습니다. 천지우주가 오직 불성뿐인데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하겠습니까.

부처님 말씀, 도인들 말씀은 모두가 다 불성으로 가는 길입니다.

다만 어떻게 하는 것이 자기한테 보다 빨리 그런 번뇌를 녹일 것인가?

자기 원수인 그런 탐욕심을 버리고, 또는 진심, 성내는 분노심을 버리고

어리석은 무명심을 버릴 것인가?

어떤 방법, 즉 방편이 보다 더 빨리 효과적으로 삼독심을 버리는 그런 행법일 것인가?

이것이 문제인 것이지 어느 것만 옳다고 고집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나 도인들이 말씀하신 행법은 모두가 다 성불의 길입니다.


-. 가사불사(袈裟佛事)의 인연공덕(因緣功德) [4]


산에 올라가는 데 남(南)으로만 갈 수가 있습니까?

동쪽이나 서쪽이나 북쪽이나 모두가 다 산에 올라가는 길이 있습니다.

다만 좀 더 나은 길이 있겠지요.

사람의 근기 따라서 나은 길, 또는 더 험한 길 그런 차이는 있습니다.

우리 재가 불자님들이 가장 하기가 쉬운 것은 역시 부처님의 이름을 외우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우리가 말로 해도 안보이므로 못 본다 말입니다.

내 본성, 천지우주의 본성 모두가 사실은 부처님이건만 우리 중생은 그걸 못 봅니다.

중생의 눈에는 안보이겠기에 그저 이름이라도 외우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서 그때는 부처님의 그런 영상이 차근차근 우리 마음에 흔적을 둡니다. 우리 사람끼리도 그 사람 이름을 외워 보십시오. 그 사람의 영상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하물며 부처님 이름은 명호부사의(名號不思議)라. 부처님 이름 이것은 부처님 공덕을 표하는 그런 부사의한 명호입니다.

가사 관세음보살은 부처님의 자비로운 자비의 교훈을 그린 하나의 표상이고, 상징이고, 그런 의미이고, 또 지장보살은 부처님 가운데서 우리 중생의 영혼을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그런 의미를 담아서 지은 명호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은 부처님의 모든 공덕의 이름을 통 털어서, 총칭해서 부른 명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옴마니반메훔' 이것은 관세음보살본심미묘진언(觀世音菩薩本心微妙眞言)이라는 의미가 있듯이 부처님의 순수한 에너지, 부처님의 생명을 하나의 음율(音律), 리듬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게 자꾸만 외우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업장이 녹아지고 따라서 부처님에게로 가까워집니다.

우리는 지금 현대와 같이 이렇게 복잡한 때는 비록 불교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바른 견해를 가져서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불성이거니 이와 같이 딱 믿는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말이 아니더라도,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나, '오! 주여!'나 무엇을 하더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은 그런 때입니다.

우리가 지금 15만 이상 기독교인을 다 외도로 몰아 세워서 우리가 배척 할 수가 있습니까?

알라신을 믿는 이슬람인도 10억 인구가 되는데 우리가 배격 하겠습니까?

단 문제는 알맹이 본바탕만 옳으면 이름이야 어떻게 부르나 무방한 것입니다.

지금은 그러한 때입니다.

화두를 의심하더라도 이른바 자기 본분사 제일의제(第一義諦)를 분명히 우리가 구해야 합니다. 무(無)자 화두를 한다 하더라도 자기 본분사 제일의제(第一義諦)를 분명히 못 들면 그때는 참선이 못 되는 것입니다. 오, 주여! 하나님, 한다 하더라도 역시 그 사람 마음이 불심에서 떠나지 않고 하나님이라 하는 개념 내용이 불심에 가까울 때는 바로 참선입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주문을 하실 분은 주문을 하시고, 또 염불을 하실 분은 염불을 하시고, 화두를 하실 분은 화두를 하십시오. 다만 그것이 자기 근기에 맞으면 좋습니다.

요는 어떤 것이 문젠고 하면 그렇게 우리 마음이 본체 성(本體性)을 안 떠날 정도로 계속해서 염염상속(念念相續)하면 됩니다.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길을 가나 또는 밥을 먹으나 이야기 하나 우리 마음이 우리의 본 성품, 우리 본래생명인 그런 불성에서 안 떠나야 합니다. 그렇게 안 떠나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화두를 들고, 염불도, 주문도 외우는 것입니다. 불심에서 우리 마음이 떠나버리면 그때는 우리가 상(相)에 얽매이고 맙니다.

다시 되풀이해서 말씀드립니다.

천지우주는 일상(一相)이라, 불성일상(佛性一相), 한 일자, 서로 상자입니다.

불성일상(佛性一相)입니다. 이상, 삼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천지우주는 불성, 오직 일상(一相)입니다. 천지우주는 불성뿐이다. 삼매도 일상삼매(一相三昧)라. 천주우주는 불성 뿐 이다.

이렇게 하면 삼매가 이른바 일상삼매입니다.

육조단경(六組檀經)에 보면 부축품에, 무슨 경전이나 간에 부축품은 그 경전의 결론입니다.

육조스님의 말씀에 '그대들이 만약 부처님의 일체종지(一切種智)를 - 일체종지는 모든 공덕을 두루 갖춘 지혜입니다. - 부처님의 모든 공덕을 갖춘 일체종지를 얻으려고 하면은 마땅히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를 참구(參究)하라'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일상삼매(一相三昧)란 무엇인가 하면은 지금 제가 말씀마따나 천지우주가 불성뿐이다. 조금도 딴 것이 없다 말입니다.

이렇게 돼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일상삼매입니다.

이렇게 되고 이렇게 느꼈다 하더라도 우리 중생은 범부이생(凡夫異生)이라

우리 중생은 법성(法性)을 못 보아서 - 법성을 못 본 사람들은

법문(法門)에도 자꾸만 자기 고집만 부립니다. 자기 것만 옳다고 합니다. 남의 공부를 도저히 이해 못합니다. 법성(法性)을 본 사람들은 그때는 천지우주가 법성이거니 그때는 고집이고 뭐고 그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선 우리 불자가 공부한 그런 선행적인 조건에 의해서

일상삼매(一相三昧), 천지우주가 불성뿐이다. 하는 그런 견해가 굉장히 필요한 것입니다.

그 견해를 딱 못 세우면 그때는 참다운 공부가 못됩니다.

참다운 법에 입각한 선오후수(先悟後修)가 못되는 것입니다.

선오후수(先悟後修)는 이것은 불교의 대강령(大綱領)이고, 요체(要諦)입니다.

미개(未開)한 때는 먼저 잘 닦아 가지고 나중에 깨닫지만 지금 현대는 비록 우리가 증명(證明)을 못 했다 하더라도 우선 해오(解悟)로 해서 이론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 따라서 천지우주 일체가 불성이구나 하고 자꾸만 관조(觀照)하고 느껴야 합니다.

이렇게 느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냥 좋은 사람 보면 좋아하고 나쁜 사람 보면 싫고 다투곤 합니다. 즉, 말하자면 일상삼매(一相三昧)가 못 된다 말입니다.

일시적으로만 되는 것이지 그런 마음이 계속해서 못 지속시킵니다.

그렇기에 일행삼매(一行三昧)라. 염염상속(念念相續)으로 앞생각, 뒷생각, 가운데 생각, 나요, 너요, 예쁘다, 밉다, 좋다, 궂다 고 하는 생각이 못 끼어들게 상속(相續) 지속하여야 됩니다.

이것이 한 일(一)자, 행할 행(行)자 일행삼매(一行三昧)입니다.

이러한 일상삼매를 일행삼매로 해서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업장이 녹아지고, 자기 본래면목인 불성을 봅니다. 이렇게 공부하는 것입니다. 세상 참 쉬운 것입니다.

천지우주의 도리인 동시에 우리가 제일하기 쉬운 것이 참선입니다.

육조혜능(六祖慧能) 스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들이 만약 부처님의 모든 공덕을 갖춘 일체종지를 얻으려고 한다면 마땅히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참구할 지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화두나 염불이나 주문이나 간에 모두가 다 일상삼매, 일행삼매를 우리가 얻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오로지 안 쉬고 가야 합니다.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본래 자기가 보리(菩提) 부처님인지라 부처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정말로 쉬운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사(袈裟)를 입는 것은 이러한 일상삼매, 일행삼매에 들어서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대도(大道)를 상락아정(常樂我淨) 영생해탈(永生解脫)의 길을 가기 위함입니다. 우리 스님들은 이와 같이 가사(袈裟)를 입고 있으니 그만큼 우리 마음이 산란스럽지 않습니다.

아직 이런 소중한 법의(法衣)를 못 입을 때는 자꾸만 딴 생각이 납니다.

그렇기에 차별이 없고 영원히 변동이 없는 그러한 부처님의 영생의 지혜를 상징하는 가사(袈裟), 이 소중한 해탈복(解脫服), 무상복전의(無上福田衣), 위없는 복밭의 옷, 이것을 우리의 출가사문(出家沙門)은 금생뿐만이 아니라 몇 생을 통해서 한사코 입겠다는 그런 굳은 맹세가 필요합니다.

비록 우리 재가 불자님들도 이러한 가사를 금생에는 안 입으셨다 하더라도

입고 안 입는 이것은 상 아닙니까. 여러분들께서는 가사를 안 입었더라도

마음에다 자비, 지혜, 여러 가지 공덕, 인욕, 이러한 육바라밀(六波羅蜜)의 공덕을 여러분의 마음에 담으시면 여러분의 마음이 바로 가사(袈裟)를 입은 것과 같습니다.

참다운 가사를 입은 것입니다.

오늘 가사불사(袈裟佛事)에 참여하신 재가 불자님들은 물론 우리 출가 수행자는 마땅히 금생뿐만이 아니라 세세생생(世世生生) 가사(袈裟)를 한사코 입으셔서 성불할 때까지 놓치지 않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재가 불자님들은 마음의 가사를 입으셔서 탐욕심 부리지 말고, 성내지 말고, 어리석은 마음 내지 말고, 즉 삼독심을 내지 말고서 금생에 성불을 하셔서 무상의 행복을 이루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말씀 마칩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관세음보살(南無觀世音菩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