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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마음의 고향

제 11 집1.불성광명(佛性光明)과 빛고을(光州)

마음의 고향 제 11 집


* 불기2537년(서기1993년)8월15일 광주불교청년회 8.15특별 법회가 금륜회관에서 있었습니다 바쁘신가운데도 광주청년불자들을 위하여 초청에응하신 태안사조실 석 청화(釋淸華) 대화상께서 한 시간 반정도 고구정녕(苦口叮嚀) 설법하신 법어입니다.


-. 불성광명(佛性光明)과 빛고을(光州) [1]


계절이 아직도 삼복더위가 남아 있습니다.

이와 같이 더운 때에 더구나 우리 청년 불자님들의 뜨거운 열기와 더불어서

후끈후끈한 여기 금륜회 법당입니다만 저에게는 굉장히 서늘하게 느껴집니다. 자기 고향의 그늘은 그와 같이 신선하고 항시 서늘한 것을 아니 느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전남에서 태어나서 광주 사범을 나왔고 또 그래저래 헤매기도 하였고

안 다닌데 없이 한국의 절은 다 다녔습니다만 지금 고희(古稀)인데 다시 광주 전남 지방에 와서 머물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말씀을 지역적인 편파심에서 말씀드리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도 그 비류리(Virudhaka) 왕이 침범해 와서 석가족이 멸망할 때에, 백 번 청(請)도 했으나 비류리왕이 부처님 말씀을 한두 번 듣고서 회군해서 돌아갔습니다만 세 번째는 기어코 강인하게 쳐들어 와서 석가족을 멸망을 시켰습니다.

그 때 부처님께서 비류리왕을, 왕자의 군대를 막을 때에도 그 비류리왕의 나라 교살라(Kosala)국은 숲도 아주 좋고 시냇물도 아주 서늘하기도 하였으나,

석가족이 사는 그 가비라(Kapila) 땅은 숲도 없고 더구나 여러 가지로 황폐가 되니까 또 그만큼 숲도 모지라지고 했겠지요.

그런데도 석가모니께서는 그 비류리왕의 국토에 가서 머물지 않고서 그냥 석가족이 있는 황폐된 그 자리에서 머무르면서 그 때 비류리왕의 행군을 막았습니다.

그 때 비류리왕이 말에서 내려서 "세존이시여 저 숲도 좋은데 가셔서 계시지 않고서 어째서 이렇게 뙤약볕의 있는 데에 계십니까?" 하고 물으니까

그때에 "친족의 그늘은 나에게도 오히려 서늘하도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고향은 그와 같이 소중하기도 하고 항시 서늘한 것입니다.

오늘날은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 바와 같이 고도 산업사회(産業社會)입니다.

고도 산업사회라는 것은 참 말씀은 거창합니다. 그러나 고도산업사회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이 못 미칠 정도로 너무나 급변하게 모든 사회 현상이 변동하여 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의식이 거기에 따라가지를 잘 못합니다.

저 같은 사람도 벌써 구식 사람이 되어서 컴퓨터도 알고 싶지만 그 내용을 잘 모른단 말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일진월보(日進月步)하여 나날이 바꿔지고 변동이 되어 가고 진보가 되는 것인데 우리가 그것을 따라 잡기가 곤란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항시 현대인들은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를 못합니다.

따라서 현대를 가리켜서 불안(不安)의 시대라 하며, 우리는 실은 불안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보나 국가적인 차원으로 보나 모든 면에서 불안의 해소를 못시키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당면해 있는 문제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우리 불안의식을 해소시킬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따르는 여러 가지 대안이 많이 나와 있는 셈 아닙니까.

자본주의라든지 또는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여러 가지 것이 많이 나와 있단 말입니다.

또는 불안의식을 해소하려는 그런 의미에서 사실은 종교도 있는 것입니다.

철학이나 모든 인류 문화의 현상이라 하는 것이 인간의 불안 의식, 다시 바꿔서 말하면 인생고(人生苦)를 해결하는데 그런 문화 현상이나 학문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웬만한 것은 지금까지 다 시험을 거쳤습니다.

시험을 거치고도 그 시험을 거치는 도중에 붕괴되지 않고서 지금까지 오히려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

역시 우리가 생각할 때는 성자(聖者)의 길입니다.

성자의 길만이 2500년 전의 그때나 또는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그때의 가르침이 자취를 감추어 버리지 않고서 지금도 오히려 그런 것이 모두가 다 제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현대에 있어서,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고도산업사회라 하는 무서운 시대에 있어서 타락(墮落)도 하고 퇴폐(頹廢)도 하고, 또는 방향 감각도 미처 못가진체 헤매고 있는 이 시대에, 질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길은 어디가 있는가? 이런 문제의식을 우리가 가질 때는 역시 성자의 길 이외의 다른 길에서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공자의 길, 예수의 길 또는 석가의 길, 그런 길을 떠나서는 찾을 수가 없기 때문에 다 아시는 바와 같이 기독교나 불교나 유교나 그런 종교가 지금도 오히려 몇 억씩 또는 10억 이상씩 다 그렇게 신도를 보유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런 다른 종교하고 불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인가?

저 같은 불교인의 입장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른 가르침도 훌륭하기도 하지만, 우리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병리현상(病理現象)들을 치유한다고 생각 할 때는 다른 종교는 치유할 힘이 부족합니다.

덮어놓고 믿어 버리면 되겠습니다만 사실은 지금 현대인들은 지성적으로 상당히 발달되어 있으므로 덮어놓고 믿을만한 그런 소박한 사람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께서도 부모님들이 말씀하시거나 또는 다른 스승들이 말씀하시거나

그런 말씀들을 제대로 100% 수용을 안 하십니다.

그런 것은 무엇인가 하면 여러분들이 배운 것이 상당히 많단 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을 충분히 설득일 시키고 여러분들이 수긍도 할 수가 있는

그런 가르침은 무엇인가?

제가 생각할 때는 여러분들의 그런 지식 욕구나 합리적인 하나의 비전을

다른 가르침으로 해서는 충족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기독교나 유교나 다 성자의 가르침 아닙니까.

진리가 둘이 아니기 때문에 분명히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 가운데는 비과학적인 요소가 상당히 많습니다.

오늘날 예수가 나오고 공자가 나와서 한다면 그렇게 설법을 안했을 것인데

2500년 또는 1900년 전 옛날 그 당시 사회의 수준에 맞게 한 법문이기 때문에 현대적인 그런 의미에서는 굉장히 소박하고 또는 미심쩍은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부처님 가르침은 어떤 면으로 보나, 과학적으로 보거나, 철학적으로 보거나 또는 종교라 하는 종교 일반으로 보거나, 어떤 면으로 보거나, 조금도 흠집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고도 과학기술시대에 이런 때에 있어서는 사실은 제가 생각할 때에는 다른 종교는 현대인을 구제할만한 그런 힘을 벌써 잃어 버렸단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그러면 불교는 어떻게 해서 과학적인가,

불교가 어떻게 해서 가장 수승(殊勝)하고 가장 궁극적인 그런 철학일 것인가, 또 어떻게 해서 불교만이 가장 위대한 종교라고 하는 것인가, 이런 의단(疑端)을 여러분들께서 품을 것입니다.

과학의 원리라 하는 것은 이른바 인과율(因果律)이며 이 인과율을 떠나서는 과학은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은 철두철미 인과적입니다.

다만 인과뿐만 아니라 보다 더 광범위하여 이른바 인연법(因緣法)이란 말입니다. 어느 것도 두두물물(頭頭物物) 모두가 다, 우리 인생이나 자연계나 모두가 다 부처님의 인연법이라 하는 그 범주에 안 들어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일체 존재가 인연생(因緣生) 인연멸(因緣滅)이라, 인연 따라서 이루어지고 동시에 인연 따라서 멸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너무나 소박하지 않은가, 너무나 간단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 간단한 것 가운데 우주의 모든 섭리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인연법을 말씀을 드릴 때는 여러분들께서는 보통 방편적인 인연법과 부처님 법 그대로 에누리 없는 진실적인 인연법과의 차이와 한계를 느끼셔야 합니다.

그럼 방편적인 인연법은 어떤 것인가?

앞에서 제가 언급한 바와 같이 이것은 우리가 그냥 이것과 저것과 합해서 무엇이 된다, 인연 따라서 무엇이 이루어지고 인연 따라서 이제 소멸이 된다, 이런 정도의 말입니다.

상식적으로 보통 불교 인연법을 말하는 그런 정도, 이것은 방편적인 인연법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탐구력이 더 확실한 분들은 이것과 저것이 인연 따라서 무엇으로 이루어진다면 그 인(因)의 최초(最初)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렇게 이런 분야에 대해서 의심을 가질 수가 있지요.

최초의 원인은 무엇인가 말입니다. 칸트의 말로 하면 물 자체, 존재 자체는 무엇인가,

존재의 근원은 무엇인가, 이런 데까지 우리가 생각을 안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진실한 인연법 이것은 그러한 근본적인 본질 자체, 존재 자체를 밝히는 인연법입니다.

그러면 존재 자체를 불교 말로 하면 어떻게 말하는 것인가?

이것이 여러분들이 익히 아시는 바와 같이 진여불성입니다. 진여(眞如)라 하면은 진리이기 때문에 진여인 것이고, 또는 우주의 진리와 똑같기 때문에 진여인 것이고, 또 일체 우주의 생명자체(生命自體)이기 때문에 부처님 성품, 바로 불성(佛性)이란 말입니다.

그냥 이것저것이 그때그때 합해 가지고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진여불성이라 하는 우주의 참다운 실상(實相)이 있어 가지고서 실상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셔야 그래야 이제 상식적인 또는 방편적인 인연법이 아니라 방편을 떠나버린 진실한 인연법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대승적(大乘的)인 인연법이란 말입니다. 우리 젊은 불자님들은 그와 같이 인연법에 대해서 그렇게 진실적인 인연법을 확실히 파악해 두셔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불교의 모든 것이 불교 철학이나 불교의 종교적인 요소나 우리 실행적인 실천 문제나 모두가 다 인연법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연법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그 인연법을 단순히 소박한 인연법,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렇게 저렇게 합해서 무엇이 되고, 연이 다 하면 그때는 헤어지고 소멸이 된다는, 이런 정도로 해서는 깊은 철학이 될 수가 없고 또는 다른 철학 체계도 설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다른 종교나 다른 학설과의 차이도 제대로 설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꼭 말씀하시고자 하였던 인연법 이것은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주라 하는 것은 그 근본 원인이, 일체 존재의 근본 원인이 바로 진여불성이란 말입니다.

우주의 참다운 도리이기 때문에 진여, 진리라고 하는 것이고, 또는 그 자리가 바로 인생과 우주의 모든 존재의 근본 생명이기 때문에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이라 그러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여불성의 이 자리가 항상 그대로 영생불멸하게 항존(恒存)한다는 말입니다.


-. 불성광명(佛性光明)과 빛고을(光州) [2]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 불생불멸이라, 낳지 않고 죽지 않는다는 이런 도리도 방편적 인연법으로 해서는 그때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인연법으로 해서는 "아 모든 존재의 원인이, 바로 소멸이 없고 변동이 없는 진여불성이기 때문에 이 자리가 불생불멸이구나" 이렇게 알 수가 있겠지요.

요한복음서 8장을 보면 이런 대목이 있어서 저도 하도 불교하고 가깝고 좋은 대목이어서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바리세인(Pharisees)들이 하도 공격을 하고 또한 여러 가지로 시달림을 주니까 예수가 이제 바리세인들에게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사람들은 어두움 속에서 헤매지 않고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느니라!" 이런 말씀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르세인들이 이제 그에 대해서 예수한테 힐난을 하고 반문을 했단 말입니다.

당신은 당신 스스로를 당신이 빛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으니 그런 주장은 참다운 증명이 못된다고 이렇게 항의를 했습니다.

그때에 예수가 하는 말이 "바리세인 그대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

 또 그대들의 말은 그대들의 지은바 행위에 따라서 십인십색(十人十色)으로,

 김이라는 사람은 김이라는 주관에 따라서 말할 것이고 또 박이라는 사람도 자기 주관에 따라서 말할 것이고, 그대들은 그대들이 지은바 그런 행위에 따라서 판단도 하고 또는 여러 가지 말도 하고 하지만, 나는 내가 나 혼자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주(主) 하나님과 더불어서 내가 말도 하고 행동도 한다.

나는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고, 그리고 내 말이나 내 행동이나 이 모든 것은 내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적인 그 진리 자체를 행하고 있을 뿐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바로 진리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진리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엔가 인격적으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알고 있다면 누가 얘기하던지 간에 기독교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우주의 진리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성자라 하는 것은 그냥 자기 멋대로 자기가 금생(今生)에 배운 상대 유한적(相對有限的)인 지식을 가지고서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무가정(無假定)의 원리(原理)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 중생들이 가사, 백 사람들이 다 옳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진리가 아닐 때는 옳지가 않단 말입니다. 백 사람들이 반대하고 다만 한 사람만 옳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영원적인 진리와 더불어서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그 사람 견해가 옳은 것입니다.

가사 우리가 수학을 풀이한다면, 상당히 난해한 고등 수학을 중학생이나 또는 국민 학생이 풀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수학적으로 수련을 받은 고학력으로 올라간 사람들은 풀 수가 있겠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진리 이것은 그냥 누구나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알기는 어렵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은 이런 자리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이것은 부처님 가르침 이외에는 없습니다.

과거의 고대 그리스 철인들이나 로마 철인들이나 기타 동양(東洋) 철인들이나, 현대의 헤겔이나 니체나 쇼펜하우어나 키에르케고르나 이분들도 모두가 다 실존(實存)이 무엇인가, 인간의 참다운 생명이 무엇인가, 그것을 알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이 분들은 명확히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 그 사람은 기독교를 믿었기 때문에 인간의 실존은 무엇인가, 그 문제에 있어서 실존은 하나님과 더불어서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말은 무엇인가 하면은 참다운 실상, 낳지 않고 죽지 않는 영원적인 참다운 지혜는 하나님이라 하는 우주의 참다운 생명 자리, 거기까지 가야 비로소 알 수 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 것을 우리 부처님 가르침은 그야말로 명약관화(明若觀火)하게 분명히 다 말씀을 하였습니다.

낳지 않고 죽지 않고,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고, 또는 오염도 안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염도 안 되었으니 청정(淸淨)할 것조차 없는 이런 우주의 참다운 생명 자체, 아까 말씀드린 진여불성 자리에 대해서 명확히 우리가 확신이 없으면 불교인이 아닌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바로 그 자리가 참다운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같은 불교도 방편적인 불교는 현대를 구제할 수가 없습니다.

참다운 대승불교(大乘佛敎), 인생과 우주의 그 실상 자리인 실존을 분명히 밝혀야 대승불교인 것이며 대승불교만이 현대 사회가 가지고 있는 이른바 현대병을 고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현대병은 그야말로 그 고황(膏肓)에 나있는, 심장에 나있는 것인데 우리가 아스피린이나 그런 약 가지고서 심장병을 고칠 수가 있습니까.

그와 똑같이 현대병들은 굉장히 무거운 병들인데, 인생이 근본이 무엇인가, 생명의 근본이 무엇인가, 자연의 본질은 무엇인가, 또는 각 종교의 근본적인 것은 무엇인가, 이들을 못 밝히면 고칠 수 없는 것입니다.

총명한 여러분들은 지금 그런 문제까지도 의심합니다. 그런데 부모한테 효도해라, 무얼 해라, 나라에 봉사해라, 그런 정도로 일방적으로 지시해서는 지금 현대인들은 납득을 못합니다.

여러분들이 학교에서 배운 바 과학적인 근본 문제, 원소의 근본은 무엇인가?

원자는 무엇인가? 이런 문제까지도 해답을 할 수가 있어야 그래야 현대인들은 '아, 그렇구나. 틀림없이 부처님 말씀이 옳구나.' 이렇게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대병은 한말로 포괄해서 말씀드리면 결국은 철학의 빈곤(貧困)입니다. 다른 것도 모자라고, 정치적인 소양도 부족하고 또는 경제적인 여러 가지 원리에 대해서도 부족한 점들이 많이 있겠지요.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부족은 무엇인가. 이것은 철학의 빈곤입니다.

철학 그러면 굉장히 어려운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인생과 우주의 근본도리, 인생과 우주의 궁극적인 도리를 우리가 깨달아서 아는 것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이것만은 꼭 알아 버려야 할 것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진여불성이라 하는 우주의 실상 거기에서 인연법이 나왔습니다.

진여실상이 자기 자체의 연(緣) 따라서 만유(萬有)로 형성이 됩니다.

바닷물이 있을 때 바람 따라서 거품이 일어나고 천파만파가 일어난다고 합시다. 파도가 거칠거나 파도가 또는 별로 거칠지 않거나, 거품도 크고 적고 그런 것에 상관이 없이 어느 파도나 어느 거품이나 모두가 똑같은 물 아닙니까.

그와 똑같이 인생과 우주의 근본 생명 자리가 바로 진여불성이기 때문에 진여불성에서 나와 있는 모든 존재는 사실은 그대로 바로 진여불성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자칫 잘못 생각을 하면 진여불성은 근본이어서 부처님 성품(性品)같이 온전한 만덕을 다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사람이 되고 자연이 되고 하면은 그때는 왜곡(歪曲)되고 굴곡(屈曲)이 되어서 그때는 오염이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만 앞서 제가 비유를 든 바와 같이 물에서 파도가 쳐서 거품이 많이 생기고 파도가 천파만파 생긴다 하더라도 그 파도나 거품이 똑같이 다 물이란 말입니다.

그렇듯이 인생과 우주의 근본 생명자리인 진여불성이 어떻게 모양을 냈다 하더라도, 인연 따라서 어떻게 모양이 다르게 나타났다 하더라도 그런 것이 모두가 똑같이 진여불성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느끼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이렇게 바로 느껴야 우리 마음이 갈등이 해소가 됩니다.

이렇게 바로 느껴야 남하고도 참다운 화해(和解)를 합니다.

어느 누구나가 다 남하고 싸우기를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사랑하고 싶고 자비(慈悲)를 베풀고 싶고 또 원수와도 우리가 화해를 하고 싶고 하는 것이 우리 사람 마음입니다.


그러나 자기 철학적인 신념이 그렇게 안 되어 있으면 그렇게 안 됩니다.

우리는 소비에트 사회의 붕괴를 지금 보고 있고 그 지겨운 냉전이 지금 종식이 됐습니다. 왜 종식이 되었는가?

막스나 레닌도 보통 사람들은 아니란 말입니다. 다 재주가 있고 다 투철한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또 그분들도 인간을 압제하고 싶어 그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보다 더 공평하게 살기 위해서 보다 더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들의 뜻과는 반대로 결국은 그와 같이 74년 동안이나 압제하고 별별 숙청(肅淸)을 다 하고 무시무시한 여러 가지 정책을 다 썼지만 결국은 붕괴가 되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가 있는 것인가?

바른 철학이 없었습니다. 공산주의라 하는 것은 유물론 체계에 입각해 있단 말입니다. 여러분들도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유물론은 모든 존재의 근본이 물질이다 하는 그런 주의(主義) 아닙니까.

모든 존재의 근본이 물질이라고 생각할 때는 물질만 많이 생산하고 경제정의(經濟正義)라 하여 물질만이 균등(均等)하게 분배하면 되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하려고 해도 그렇게 안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 인간의 마음은 물질보다도 더 훨씬 고귀(高貴)하고 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사 어떤 경우에는 물질이 좀 부족하고 하더라도 행복을 느낄 수가 있고, 어느 경우에는 물질이 제아무리 풍요하다 하더라도 불행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의 본체가 바로 진여불성이라는 그러한 하나의 생명임을 알아야 합니다.

진여불성은 어디가 있고 어디가 없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태어나고 안 태어나고 와 상관없이, 천지 우주가 붕괴가 되고 붕괴가 안 되고 와는 상관이 없이, 언제나 우주에 영생불멸로 존재하는 생명 자체입니다.

법화경(法華經)을 보면은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만 한 생각이라도 우리 생명이 영생불멸한다는 이런 생각을 가질 때는, 이런 생각을 갖지 않고 애쓰고서 참선을 한다, 염불을 한다, 기도를 모신다, 이렇게 몇 십 년, 몇 백 년을 한다는 것보다도 더, 다만 순간 찰나라도

 내 생명이나 우주 생명이 본래로 영생불멸한다는 이 자리를 분명히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게 믿지 않고서 애쓰고 공부하고 보시도 하고 무엇도 하고 하는 것과  비교할 때는  그렇게 믿지 못하는 그것이 아무리 오랫동안 했다 하더라도, 잠시간 그렇게 바로 믿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

 천분지 일도 또 만분지일도 미치지 못한다." 이렇게 말씀한 법문이 있단 말입니다. 이러한 법문을 저도 처음 보았을 때는 의심을 했습니다.

왜 그러는 것인가?

그러나 우리 견해라 하는 것이, 우리 철학이라는 것이 바른 철학이 확립 될 때는 모든 행동은 거기에 다 연역(演繹)되어 갑니다. 자기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에, 설사 아버지가 현대 교육을 미처 못 받아서 이따금은 유치한 행동도 하시기도 하고, 필요 없는 술도 자시기도 하고 이러한 때에는 우리가 바른 철학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 아버지에 대해서 폭언도 할 수가 있고, 요즈음 같이 불효막심하니 그런 사람도 있을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저 아버지도 근본 마음은 진여불성이 아닌가, 바로 부처님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때는 그때는 아버지한테 어떤 경우도 함부로 할 수가 없습니다.

 

-. 불성광명(佛性光明)과 빛고을(光州) [3]


우리 불자님들은 지금 광주(光州)라 하는 유서 깊은 고장에 함께 살고 계시는 우리는 같은 형제간들입니다.

광주는 어느 지방보다도 시련을 많이 겪어 왔습니다. 그러나 시련 그것이 우리한테 절대로 손해가 아닙니다.

우리는 시련을 딛고서 틀림없이 이 빛나는 고을, 빛나는 고을이라고 이름 된 곳이 아마 한국에서도 여기 광주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정말로 빛나는 고을이 꼭 되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또는 부처님과 부처님 가르침과도 이 광주라는 이름 자체가 관계가 가장 깊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바로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이 바꿔서 말하면 무량광불이란 말입니다.

인생과 우주의 근본자리 부처님이 바로 무량광불이라, 한도 끝도 없는 광명의 생명이란 뜻입니다.

그와 같이 부처님과 가장 밀접한 바로 불법 자체의 이름을 광주의 이름으로 하고 있고 또 부처님의 육년 고행 같은 그런 무수한 시련을 거쳐 왔습니다.

부처님의 육년 고행(苦行)도 몇 번이나 목숨을 바칠까 말까 했을 때가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출가한 뒤에 발가바(Bhargava) 스승한테 가서 아주 지독한 고행을 다 했습니다.

일마일맥(一麻一麥)이라, 하루에 먹는 것이 피마주 한 톨하고 쌀 한 톨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그 고행이 절대로 무익(無益)한 고행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사람은 잘 못 알고 고행은 필요가 없다 하지만 부처님 고행이나 다른 사람의 고행이 절대로 무익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역시 요단강(Jordan river) 하반에서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이러한 것이 모두가 예수가 우주의 진리를 아는데 지극한 공헌을 다 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그러다가 아라라가란(Arala Kalama)을 방문해서

저 하늘에 올라가는 선정법(禪定法)도 배우고 또 우다카(UddakaRamaputta)라는  선정 닦는 사람한테 가서 그 때는 삼계 28천의 꼭대기 이른바 최상천(最上天)이라,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이라는 천상에 올라가는 선법도 배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도 하늘에 올라가는 법인 것이지 해탈(解脫)의 법은 아니다, 내가 우주의 주인이 되는 법이 아니다, 이렇기 때문에 나중에 다 뿌리치고서 자기 스스로 공부해서 바로 우주의 주인, 우주 자체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바로 우주 자체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배우지를 미처 못 하고 더러 나쁜 짓도 하고 또는 부정직한 짓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겉에 뜬 허망 무상한 그림자 같은 것이고,

우리 본마음은 석가모니와 더불어서 똑같은, 예수와 더불어서 똑같은 그런 마음입니다. 바로 하나님이고 부처님인 것입니다.

그러나 불안스러운 것은 이것은 현대만 불안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다만 현대는 너무 사람들이 필요 없는 것을 많이 안단 말입니다.

따라서 현대인들은 그 머리가 별로 신통치 않은 그런 개념들로 해서 꽉 차 있습니다. 그래서 조울증(躁鬱症), 신경쇠약 또는 필요 없는 긴장 때문에 우리가 고생을 합니다. 그러나 불안스러운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옛날 원시(原始) 공산시대(共産時代)나 또는 중세 암흑시대(暗黑時代)나 다 불안했던 것입니다.

그때도 역시 인간은 성자가 아니기 때문에 어느 사람이나 모두가 다 자기 인생을 잘 모릅니다.

인생이 무엇인가를 모를 때는 불안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불교의 근본 목적은 불안한 인생고를 떠나는 것입니다.

인생고를 떠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리 인생고는 어디서 나왔는가, 이러한 도리는 여러분들이 잘 아시겠지요.

사제법문(四諦法門)이라 하는 것은 대승(大乘)이나 소승(小乘)이나 불교를 통관하여 항시 불교 가르침의 핵심이 됩니다.

우리 인간이 무명심(無明心) 때문에, 우리 인간이 무지(無知) 때문에 말도 잘 못하고, 행동도 무지한 행동을 하고, 생각도 무지한 생각을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고생을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 근본이 이 무명이요, 무지(無知)입니다.

근본 무명 이것이 인생의 원인이니까 우리가 무명을 없애려고 생각할 때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참다운 철학이 있어야 하며, 참다운 철학은 바로 참다운 지혜입니다.

참다운 철학 없이는 인생의 무지를 뗄래야 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 아셨겠지만 지금 기독교의 행하여지는 도리로 해서는 그런 우리 근본 무명을 뗄 수 있는 가르침이 별로 없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이 상징(象徵)이나 비유(比諭)로나 그렇게 되어 버렸기 때문에 인생은 대체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가,

이런 문제도 하느님이 창조했다, 모두는 하느님의 섭리다, 이렇게 해버리면

우리 현대인들이 납득이 잘 되겠습니까.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앞에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연기법이라 하는, 일체 존재가 우리 중생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체 존재가 우리 중생으로서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으로부터 인연 따라서 되었단 말입니다.

이것은 철두철미 과학적입니다.

다만 현대 과학은 그것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 이것을 모른단 말입니다.

어렴풋이 에너지다, 에너지가 이제 적당히 인연 따라서 인과의 법칙 따라서

진동(振動)도 하고 또는 운동을 해서 모양이 나온 것이 물질이 아닌가?

사실은 물질이라 하는 것은 불교의 대승법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물질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젊은 불자님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여러분들이 빛나고 우리 광주가 정말로 명실상부한 빛의 고을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꼭 바른 철학을 아셔야 합니다. 꼭 바른 불교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아까 오면서 어느 불교 잡지를 보았습니다만 거기에서 보니까 "불교의 공(空)이라는 것은 우리 잘못된 의식이 공이라는 것이지  물질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말한 대목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계속 읽어보니까 그분의 견해는 물질은 분명히 있기는 있는 것인데

우리 인간이 그때그때 잘 못 생각을 해서 그렇다, 이렇게 생각을 한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대승 사상에서 본다면 물질이라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아닙니까.

화엄경(華嚴經)이나 대승경전(大乘經典)에서 일체유심조라, 모두가 다 마음으로 되었다,

이런 것은 절대로 방편(方便)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런 도리를 여러분들이 지금은 납득(納得)이 잘 안 가신다 하더라도 여러분들의 믿음으로 해서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믿고 나중에 여러분들이 공부해서 증명(證明)을 해야 합니다.

물질은 없는 것이요. 물질이 원래 공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야심경(般若心經)이 거짓말이 되겠지요. 색즉공(色卽空)이라, 색은 물질이 아닙니까.

그 반야 사상이 여러분들에게 납득이 안 가신다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공부를 해서 증명을 하셔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기도를 많이 모시고 참선을 많이 하신다고 생각할 때는 여러분 스스로 '아! 이러니까 공이구나.' 이런 때가 분명히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분별지혜로 해서는 꼭 자기가 보는 대로 이런 것이 지금 존재로 있단 말입니다.

금 쪽 같이 아까운 자기 몸뚱이도 분명히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밝은 지혜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과 더불어 하는 지혜, 우주의 불성과 더불어 하는 지혜, 그런 지혜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에게 보이듯이 물질이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다행히도 현대 물리학은 그걸 증명을 합니다.

저 미세한 소립자 단계에 가서는 무엇인가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가사 하나의 우주에 충만해 있는 그런 광립자(鑛粒子)같은 것도 역시 이것이 과연 입자인가 물질인가 하나의 파동인가? 이런 것은 지금 알 수가 없는 말입니다. 이른바 불확정성(不確定性)의 원리란 말입니다.

일체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가장 미세(微細)한 존재에 이르러서는 물질이 아닌가, 맞는가 지금 현대 물리학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A. Einstein)같은 분들은 물질이라 하는 것은 마음의 패턴이다. 물질은 우리 마음이, 마음이라 하는 우주의 순수한 존재가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모양을 낸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20세기 과학 문명이 가까스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제법(諸法)이 공이다, 색즉공(色卽空)이다, 이런 것을 지금 증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젊은 불자님들!

부처님 가르침은 그냥 안이하게 안락의자에 앉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성자이니까 인류의 스승이니까 거짓말이 없을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의 때 묻은 머리로 해서는 다 모두가 다 옳구나.

이렇게 수긍(首肯)이 안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닦아져서 우리 마음이 맑아 오면 그때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그렇구나, 그렇구나 하는 이른바 법희선열(法喜禪悅)이라! 그 부처님 법이 참말로 옳구나, 이 법을 위하여 내 목숨을 천만 개 바쳐도 무방하겠구나

하는 그런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 불성광명(佛性光明)과 빛고을(光州) [4]


세간적인 상대 유한적인 것에는 참다운 행복은 없습니다.

어느 누구나가 행복을 구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지 않겠습니까.

참다운 행복은 물질에서는 사실은 결코 찾을 수도 없고 도달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욕망과 불행을 더 가져옵니다. 무얼 많이 먹고 싶어서 무얼 잘 먹고 싶어서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어 보십시오.

돈 좀 벌려다가 지금 아 별이 세 개, 네 개씩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십시오. 물질이 있다는 그런 감각적인 철학, 그런데서 출발한 그런 정치나 경제나 어떠한 것이나 올바로 못갑니다.

원래 있는 것이 아닌데 있다고 잘 못 보았으니까 그런 것은 소비에트 붕괴와 같이 종당에 가서는 붕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기로(岐路)에 서 있습니다. 어떤 기로에 있는가 하면 우리가 정말로 바른 철학과, 석가모니나 공자나 예수나 그런 분들의 인생관으로 해서 우리가 새로 출발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의 타성에 따라서 아 내 몸뚱이도 있고 저것도 있고 모두가 본래가 다 물질뿐이다. 물질이 왕이다.

이와 같이 배금주의적인 이런 사상을 갖는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사회는 항시 불안스럽고 싸우고 갈등을 면치를 못합니다. 프랑스의 앙드레 지드라든지 영국의 칼라일이라든가 현대 사회에서 인류의 미래학적인 그런 귀중한 말씀을 하신 분들은 모두가 다 그런 것을 염려를 합니다.

우리는 지금 현재 누가 나쁘다, 좋다, 이런 것 때문에 우리 생명을 낭비할 때가 아닙니다. 우리 생명이 대체로 무엇인가, 우리 생명이 무엇이기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우리가 분명히 이런 좌표(座標)를 세워야 합니다.

이런 좌표를 못 세우면 광주(光州)도 빛을 못 내고 우리 개인도 빛을 못 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 금융실명제가 실시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얼마 안가서 토지공거래 가 되겠지요.

사회적은 그런 제도적인 것을 우리가 또 무시는 절대로 못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가지고서 우리 행복이 다 보장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의 필요조건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 행복을 위해서 우리 인간의 참다운 본위를 위해서 충분조건은 절대로 못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땅히 무슨 제도와 더불어서 우리 의식이 거기에 따라가야지 우리 의식이 못 따르면 그런 것은 자칫하면 반연(叛衍)되는 것이고 혼란이 오기가 쉽습니다. 그러면 어떤 의식이 필요한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석가모니가 말한 대로, 예수가 말한 대로의 그런 마음은 이것은 그 근본이 바로 진여불성이기 때문에, 근본이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만상(萬象)이, 일체 존재가 나오기 때문에 그 근본도 바로 부처님이고 근본도 진여불성이고, 또 물질이 아닌 진여불성에서 나왔기 때문에, 모양이야 사람같이 보이든 무엇같이 보이든 다 똑같은 진여불성이란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해하기기 곤란스러운 것이 무엇인가 하면은 내 근본 자리는 부처님 말씀으로 일체중생(一切衆生)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 모두가 다 불성이 있다고 했으니 이것은 진여불성이다, 이렇게 된다 하더라도,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나요, 너요, 도둑놈이요, 나쁜 놈이요, 이런 사람들은본래 나쁜 놈이 아닌가? 그러나 지금 나쁜 상(相)을 냈다 하더라도, 나쁜 상으로 우리한테 보였다 하더라도, 그 사람도 본질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똑같은 진여불성입니다.

똑같은 바로 부처님입니다.

이렇게 아는 것이 대승적인 해석입니다. 이렇게 아는 것이 자기와 남과의 갈등(葛藤), 일체 모든 것의 갈등, 경제나 정치나 모든 면의 갈등을 비로소 완전히 해소 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여러분들은 경험을 많이 하셨습니다.

가사 무슨 정책을 제대로 낸다, 그 정책 따라서 무슨 정당이 선다, 마땅히 그랬으면 그 정당을 위해서 모두를 다 바쳐야 하겠지요.

또는 정당을 구성한 사람들끼리 피차, 이따금은 기분 좋으면 포옹하고 악수하고 모두 그러겠지요. 그러나 어떤 경우에 자기 이해가 안 맞으면 그때는 그냥 조금도 미련이 없이 잔인하게 헤어져 버린단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무수히 보아 왔습니다.

이런 것이 모두가 다 어디서 오는 것인가?

상대적인 것, 유한적인 것에다 가치를 두고서 참다운 절대적인 생명 자체의 도리를 모르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이른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무명(無明)에서 옵니다.

그러면 인생과 우주의 참다운 근본 생명 자리인 진여불성은 어떠한 것인가?

이것에는 소극적인 풀이와 적극적인 풀이가 있습니다.

인생과 우주의 근본 도리를 소극적인 풀이로 볼 때는 모두가 다 무상(無常)이요 공(空)이요 무아(無我)인 것입니다.

존재라 하는 것은 어느 것이나 모두가 다 무상이 아닌 것이 없지 않습니까.

전변무상(轉變無常)이라. 어느 존재나 모두가 다 순간, 찰나도 머무름이 없이 변동해서 마지않습니다. 무상을 못 보면 그때는 불자가 못되는 것입니다.

세간적(世間的)으로 행복스러운 사람들은, 너무나 자기 주변 환경이 풍족한 사람들은 재산도 항시 있는 것 같고 감투도 항시 있는 것 같아서 무상을 잘 못 느낍니다.

그러나 실패도 해보고 배신도 당해보고, 자기 가족 가운데 누가 죽어도 보고

이렇게 해야 인생은 참 허망한 것이구나, 이렇게 무상을 느끼게 되고 더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그때는 자기라는 존재는 순간 찰나도 그대로 있지가 않는 것입니다.

무상이기 때문에 그때는 공인 것입니다.

어느 순간도 가만있지 않기 때문에 결국은 비었단 말입니다. 어느 순간도 가만있지 않거니, 조금도 머무름이 없이 변동하거니 그런 것 보고 있다고는 할 수가 없겠지요. 따라서 공이란 말입니다.

무상이고 공이거니 그런 것 보고 나라고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무아(無我)인 것입니다. 따라서 무상(無常), 공(空), 무아(無我)라, 거기다 하나를 더 보태서

그런 것에 집착하면 고(苦)란 말입니다.

무상하고 공인 것이고 무아인 것인데 나다, 내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데서

인생고가 있습니다.

고, 공, 무상, 무아라!

인생은 괴로운 것이고, 무상한 것이고, 또 공이고, 무아란 말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지금 한창 희망에 날뛰고 희망에 불타고 있는 것인데 공이다, 무상이다 하면 조금 거부 반응을 느끼실 것입니다만 그래도 여러분들이 지금 아셔야 합니다.

알지 못하면 여러분들의 인생을 지혜로 이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생과 우주의 근본도리를 적극적인 풀이로 보아서, 적극적으로 진여불성을 말할 때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이란 말입니다.

죽지 않고, 낳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고, 또는 일체 행복을 다 갖추고 있고,

또 일체 신통묘지(神通妙智)를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그와 동시에 조금도 번뇌가 없이 청정하단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근본 자리입니다.

우리 인생의 근본 자리를 우리가 소극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무상하고 또는 다 공이고 또 '나'라 할 것도 없고 '너'라 할 것도 없고 따라서 인생은 다 고(苦)뿐인 것이고 이렇게 보는 것이지만, 보다 적극적으로 이른바 대승적으로 -적극적이라는 것은 여기서는 대승적이라는 의미이며, 대승은 바로 부처님 사상을 에누리 없이 그대로 진실로 말한 것입니다. -

그렇게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른바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내 생명과 우주의 근본 생명이 영원히 변치 않고 상시 존재한다는, 우리 생명은 영생하는 것입니다.

어느 종교인도 영생의 생명에 대해서 흠모 추구(追求)하는 마음이 없으면 참다운 종교인이 못되는 것이고, 힘도 안 나오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그 자리는 안락무우(安樂無憂)라, 모든 행복이 다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생명의 근본 자리가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영생불멸한 생명 자체이고 또는 동시에 그 자리가 한도 끝도 없는 무궁한 행복을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또 그 자리에가 일체 능력이나 지혜나 자비나 행복이나 다 갖추어서 있단 말입니다.

그와 동시에 그 자리는 조금도 오염이 없는 흠의 흔적도 없는, 우주를 모두 다 알아 버리는 그런 경계인 것입니다.

우리가 생활 할 때 내 마음의 내 생명의 본체가 어떤 것이다, 내 생명의 본체는 기분도 좋고 공부를 하면 시원하겠구나, 이런 정도로 아는 것과 내 생명의 근본 이것은 일체 가능성을 다 갖춘 무한의 가능체(可能體), 불교 말로 하면 무한의 공덕장(功德藏), 한도 끝도 없는 공덕의 곳집이 그것이 우리 마음이다, 이렇게 알고서 공부도 하고 사업도 하고 하는 것과는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참선을 한다 하더라도 아! 내 마음이 앉아 있으면 순수해지겠구나, 내 마음이 긴장도 풀리겠구나, 이렇게 단순히 알고서 참선을 하는 것과 내 생명의 근본은 이것은, 내 생명과 우주 생명의 근본은 이것은 물질은 눈곱만큼도 없고 모두가 다 순수한 진여불성의 생명인데 이 자리는 지혜도 한도 끝도 없고, 자비도 한도 끝도 없고, 능력도 한도 끝도 없고, 행복이 충만해 있는 자리다, 이렇게 생각하고 참선을 하는 것과는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부처님 공부는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 불성광명(佛性光明)과 빛고을(光州) [5]


다시 바꿔서 말하면 마음을 열고 하는 공부가 부처님 공부입니다.

김 아무개, 박 아무개 하는 자기라 하는 그런 조그만 곳에 갇혀 있지 말고서

우리 마음이 본래로 천지 우주와 둘이 아닌 광대무변한 바로 진리 자체,

사랑 자체이기 때문에 그렇게 우리 마음을 그 자리에다 해방을 시켜 놓고서 하는 공부라는 것입니다.

단박에 해방은 안 되겠지요.

그러나 우선 관념만이라도 내가 지금 어두워서 내가 전생에나 금생에 업을 많이 지어서 못 느끼는 것이지 내 마음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부처님께서, 무수한 도인들이, 증명한 것이니까, 그와 같이 만 공덕을 갖추고 있는 것이 내 마음이다, 바로 그것이 나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내 몸이 지금 어디가 아프다, 내 몸이 지금 괴롭다.

이러한 것도 모두가 다 따지고 보면 우리 마음이 근본 마음자리에 가 있지 못하고서 우리 마음이 굴곡(屈曲)되고, 마음이 왜곡(歪曲)되고 우리 마음이 부질없는 미망(迷妄), 무지(無知) 때문에 우리 마음이 지금 어두워 있는 것입니다.

어느 철인이나 말하기를, 특히 플라톤(Platon)이나 그런 분들이 이제 말할 때도, 인생이라 하는 것은 좋은 쪽으로 보면 태양 같고 어두운 면으로 보면 동굴이라. 태양과 동굴의 비유란 말입니다.

위대한 분들은 모두가 다 태양같이 밝고 투명하지만 그 무지한 사람들은 항시 마음이 동굴 속에 있는 것같이 어둡단 말입니다.

그 밝은 쪽에 관하여서도 바른 철학, 바른 종교와 대조적으로 부처님 가르침은 어디만 밝고 어디만 밝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주가 그대로 훤히 밝은 것인데 어두움은 조금도 없는 것인데 우리 중생이 잘 못 느껴서 스스로 어둠을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할 것은 부처님의 밝은 광명 지혜로 해서 우리 어두움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자기라는 그런 어쭙잖은 잣대로 해서 문제를 풀려고 하시지 말고,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꼭 부처님의 잣대, 예수의 잣대, 예수의 견해로 해서 문제를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 문제나 사회문제나 정치문제나 다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분들만이 오류(誤謬)가 없습니다.

왜 그분들은 오류가 없는 것인가? 그분들은 우주의 진리를 바로 진리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그대로 지금 못 보는 것입니다. 못 보기 때문에 오류가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과거 위대한 철인들은 모두가 다 보다 확실하게 말하거나 보다 애매하게 말하거나 깨달음의 차이 때문에 그런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방향성(方向性)은 다 똑같습니다.

인류의 어두움을 몰아내서 참다운 광명 세계로 우리 인간을 이끌어 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야만이 참다운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지금 말씀드린 이런 말들을 마음에 두고서 다른 철학서(哲學書)를 보십시오.

모두가 다 그 협소하고 옹졸한 자기 마음을 떠나서 참다운 실상 자체, 인생의 본질로 가는 공부입니다.

따라서 그 전에는 우리 인간의 지혜 분별이 발달이 미처 못되어 가지고서 우리가 선택을 바로 못했지만 지금은 인류가 바른 시험을 다 해 보았던 것입니다.

자유민주주의도 사회주의도 공산주의도 우리가 다 해보았습니다. 기독교, 이슬람교, 도교, 다 보고 있단 말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많은 시험을 했으나 대체로 모두가 시행착오가 아닙니까. 괜히 우리 인간의 생명을 낭비를 했단 말입니다.

짧은 인생인데 몇 십 년씩이나 진리가 아닌 그런 무명으로 이루어진 이데올로기 그것 갖고서 우리 생명을 낭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지혜가 없다고 생각할 때는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무가정(無假定)의 원리, 무수한 성자들이 다 증명을 한 도리가 아닙니까.

따라서 우리는 지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러한 상대 유한적인 무지에 지금도 젖어서 그대로 갈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결연히 단호하게 일어서서 참다운 진리를 자기 인생의 근본 신념으로 하고 나아갈 것인가 하는 그런 기로에 있습니다.

어렵지만은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 인생과 우주의 본바탕을 투명하게 훤히 밝힌 가르침을 기료(祈療)로 하고서 거기에 입각한 생활을 하지 않을 때는 우리 인생의 말로(末路)는 뻔합니다.

또 죽이고 싸우고 또 갈등되고 하겠지요. 제동장치가 없는 기관차가 가다가 어디로 갈 것입니까?

레일을 이탈해서 틀림없이 그때는 파괴되고 탈선이 되고 진구렁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전철(前轍)을 밟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원수는 밖에가 있지 않습니다. 우리 원수는 바로 알지 못하는, 진리를 모르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그것 때문에, 진리를 모르는 무명 때문에 우리가 고생을 받는 지라, 우리 원수는 바로 무명 자체입니다.

옛날 철인들이 원수는 산에가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자기 마음에 있다 하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현대 젊은이들은 그런 생각을 100% 수용하기가 쉽지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깊이 사색(思索)도 하고 고뇌(苦惱)를 하시기 바랍니다.

과연 석가가 거짓말을 했던가, 예수가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서 흔연(欣然)히 자기 몸을 못 박혀서 죽도록 했던가 말입니다.

사실은 성자가 아니면 우리는 남을 심판(審判)할 권리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인생의 허물을 우리가 지금 똑같이 짓고 있습니다.

남을 미워도 하고 우리가 음식을 잘 못 먹기도 하고 부모한테 불효하고 말입니다.

우리 범부라 하는 것은 성자의 길로 오로지 나아가지 못할 바에는 모두가 지금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명이라 하는 가장 무서운 도둑놈, 무명이라 하는 그런 도둑놈 속에서 우리가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모험을 해서라도 그 무명에서 벗어나서 참다운 성자의 길로 꼭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생명의 낭비요, 또 그렇게 한다고 생각을 할 때에 생명을 낭비한다고 생각할 때는 부모한테나 나라한테나 인류한테나 다 우리가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생명의 근본이 바로 진여불성인지라, 진여불성과 더불어서 할 때만이 어느 분야에서나 우리는 어느 때나 가장 행복스러운 것입니다.

건강으로 보나 또는 어떤 면으로 보나, 일반 중생들한테 공경을 받는 정도로 보나 또는 부모한테 효도하는 것으로 보나 어떠한 것으로 보나 그렇게 진여불성과 더불어서, 진리와 더불어서 하는 생활이 가장 위대한 생활입니다.

지금 한국적인 상황을 보십시오.

교육계를 보나 어디를 보나 결국은 지금 다 암담(暗澹)하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문제들을 어떻게 풀 것인가? 정말로 교육자나 누구나 다 진여불성 자리에서 인생과 우주의 근본 자리에서 이런 문제를 푼다고 생각할 때는 진소위(眞所謂)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이라, 제 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반야바라밀의 참다운 진여로 푼다고 생각할 때는 마치 뜨거운 화로에다 한 줌 눈을 넣으면 순식간에 녹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르게 못 느끼니까 우선 자기 몸뚱이 생각하고 자기 가족 앞세우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바른 지혜로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내 가족 남의 가족이 별로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래서 함부로 자기 가족 남의 가족 뒤섞여서 하라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자기 가족한테 최선을 다 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집착해서 자기 가족 때문에 다른 가족을 해코지 하는 그런 행동을 안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본래로 자기 가정이나 남의 가정이나 나나 너나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의 생명이라는 말은 여기가 있고 저기가 있는데 이렇게 합해서 하나라는 그런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다른 사람 생명과 내 생명과 그저 빈틈도 없이 하나라는 말입니다.

천지 우주가 이것이나 저것이나 더불어서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지금 100명 넘어 되시는 이 금륜회 법당에서 산소나 수소나 질소가 거의 꽉 차 있습니다.

우리 몸도 역시 산소나 수소나 그런 원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꽉 차 있는 원소 또는 내 마음도 구성한 것이 원소라고 생각할 때에 그 정도의 차이뿐인 것이지 내내야 모두가 다 똑같은 원소란 말입니다.

그런데 진여불성(眞如佛性)은 무엇인가 하면 진여불성은 원소나 무엇이나 소립자(素粒子)거나 어떠한 것이건 간에 우주의 어떤 것이거나 간에, 그 근본 생명 자리가 진여불성이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여불성이 없는 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태양계나 은하계 어디에도 진여불성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진여불성은 우주에 꽉 차 있는 것인데 꽉 차 있는 부처님 자리로 부터서

인연 따라서 사람이 되고 무엇이 되고 합니다.

죽어지면 어디로 갈 것인가?

다시 진여불성으로 가는 것입니다.

진여불성으로 가지만 우리가 그 자리를 긍정(肯定)도 않고 그 자리에 가기 위해서 노력을 안 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 때는 다시 인간으로, 지옥(地獄)으로 뱅뱅 돈단 말입니다.

인생의 갈 길은 뻔 한 길입니다. 훤한 길이란 말입니다. 탄탄대로(坦坦大路)입니다.

그 대로(大路)로 가는 길목도 훤히 밝혀져 있는 것이고, 또는 거기에 갈 수 있는 안내자도 있는 것인데 우리 중생들은 그 타성에 젖어서 잘 못 배우고 잘 못 느끼고 그것에 젖어서 잘 못 가는 것입니다.


-. 불성광명(佛性光明)과 빛고을(光州) [6]


지금은 한 눈을 팔 때가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한국이 처해 있는 것이 지금 얼마나 어려운 때입니까. 이 남북한이 합해도 별것이 아닌 것인데 남북한도 합하지 못하고 항시 싸운단 말입니다.

또 그 뿐입니까? 같은 남한 내에서도 얼마나 많이 갈등지고 있습니까?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무엇인가? 내내야 하찮은 물질, 하찮은 감투…. 우리는 이웃나라 일본을 보십시다. 저는 일본에서 한 6년 동안 지냈습니다만 일본 사람들은 분명히 개인 대 개인으로 해서는 우리 한국인들보다는 머리가 둔합니다.

그러나 지금 그네들 문화를 보십시오. 그것은 오로지 제가 생각할 때는 부처님 혜택입니다. 부처님 은혜란 말입니다. 그네들은 식생활이나 무엇이나 보면 다 대체로 불교에서 하는 식입니다. 그네들의 성실과 예의바른 것도 다 부처님의 도리입니다.

동경은 지금 천만이 넘습니다만 동경의 밤하늘에는 지금도 십자가가 안 보인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나쁘다는 의미는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그만큼 우리 불교와 같은 보배를 제대로 지금 우리가 활용을 못하는 것입니다.

불교를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근본 도리, 근본 진여불성의 대승적인 도리, 우리 현대병을 낫게 하는 그런 도리에 입각해야지.

지금 현대병을 낫게 할 수 없는 그런 방편 도리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불교가 아니더라도 도교나 유교나 기독교나 방편 도리는 다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가 아니면 안 될 도리는 무엇인가 하면 일체가 모두가 다 산이나 내(川)나 물이나 모두가 다 진여불성뿐이고, 거기에서 인간이 태어나서 사는 것인데 우리 인간이 그 도리를 모르면은 멋대로 죄를 지어서 지옥으로, 아귀로, 축생으로, 뱅뱅 돈단 말입니다.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분명히 다 있는 것입니다.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과 더불어 살다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다시 말하면 진여불성인 자연에서 태어나 진여불성인 자연과 더불어서 진여불성으로 살다가 존재하다가 다시 진여불성인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즉 진여불성을 한시도 떠난 적이 없다.

자기 형제간기리 자기 국민들끼리 싸울 때가 절대로 아닙니다. 싸울만한 이유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영원적인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죽음도 없고 낳음도 없습니다. 우리 중생들이 겉만 보니까 거품 같은, 또는 그림자 같은 겉만 보니까 죽음이 있는 것이지 생명 자체로 볼 때는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 더하지 않고 덜하지 않고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죽음이 없단 말입니다.

반야심경 도리나 금강경 도리나 기타 불경의 도리는 다 같은 도리입니다.

그러나 그 같은 경전 내에도 중생들을 위해서 부처님께서 노파심에서 하신방편적인 말씀도 있고 그런가 하면 같은 경전 내에도 진실 된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방편은 버려버리고서 진실을 추슬러야 한단 말입니다.

현대는 그래야 하지 이렇게 바쁜 세상에서 방편까지 불교가 아닌 것도 있는 그런 도리까지 우리가 다 집어서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한테는 소중한 보배, 천지우주와 더불어서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배인

진여불성이 있습니다. 그 도리를 안 놓치고서 공부를 한다고 생각할 때는 수학을 하던 무엇을 하던 어떠한 분야로 나가거나 걸작을 다 냅니다.

과거에 우리가 예술가를 보나 과학자를 보나 위대한 사람들은 모두가 다 영원적인 차원, 일반 범소한 사람들이 넘어다보지 못하는 영원적인 차원, 그런 차원까지 마음을 두고 공부를 했던 것입니다.

지금 일본에서나 미국에서나 우리 한국도 일반 소장 학자들 가운데서 미래학(未來學)을 공부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는 모양입니다.

우리 젊은이들도 그 미래학적인 것에 관심을 두시고 참다웁게 미래학을 우리가 체계를 세운다고 생각할 때는 이것은 어느 학자가 되든지 간에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고는 안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들한테는 누구에게나 다 무한의 보고가 있습니다. 과학적인 면으로 보거나 또는 어떤 면으로 보거나 부처님이 가르침은 무한(無限)의 보고(寶庫)입니다.

그래서 어떤 공부를 하던지 간에 나한테는 무한의 가능이 있다, 나한테는 어떤 면으로 보나 원만무결(圓滿無缺)한 재주가 있다, 나한테는 모두를 다 용납하는 사랑이 있다, 이렇게 마음먹고 생활한다고 생각할 때는 여러분들의 생활은 훨썩 풍요하고 여러분들은 누구하고도 절대 갈등이 안 될 것입니다.

우리 남북통일도 역시 그냥 우리가 물리적으로 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합한다, 몇 단계로 합한다, 이렇게 되어도 우리 의식이 따라야지 우리 의식이 못 따르면 또 다시 싸웁니다.

의식개혁의 선구자가 되는 것은 우리 불자를 떠나서는 없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꼭 선구자적인 자부심을 가지셔야 합니다.

정말로 불교인 수도 그렇게 많지도 않은 불교인 또 불교인 가운데도 정말로 바르게, 방편을 떠나서 진실 되게 부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 것인가, 이렇게 생각할 때는 어떤 때는 정말로 한심스러운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광주에 이 빛나는 고을, 옛날 도인들은 그 지명을 지어도 그 허투로 안 짓습니다.

꼭 사실과 같은, 사실과 걸 맞는 이름을 짓는단 말입니다. 광주는 꼭 빛나리라고 생각합니다.

빛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으로 빛날 수가 없습니다. 재산으로 물질로 또는 공간적으로 빛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한분 한분이 부처님 가르침을 정말로 온전히 수용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여러분 스스로의 최상의 행복이 됩니다.

또 지금 그것이 시대가 바라는, 칸트가 바라고 니체가 바라고 럿셀이 바라고

또 무수한 성자들이 바랐던 것이 하나의 참된 바람의 세계입니다.

어떠한 분야로 보나 부처님 가르침대로 가야만이 정치나 경제나 복지나 어떤 면으로 보나 마찰이 없이 참이 됩니다.

이북도 또는 중공도 러시아도 어느 땐가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부처님의 방편이 아닌 온전한 참다운 가르침이 꼭 홍포가 되어서 그 사람들이 수용을 해야 합니다.

저도 미국에 가서 보니까 지금 미국 사람들에게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그네들한테 더 많은 돈도, 더 낳은 땅덩어리도 필요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 가르침이 그들한테 가장 필요한 보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미국에 들어가서 그네들을 교화시키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는 미국도 절대로 오래 못갑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참다운 과학인 동시에 인생과 우주의 가장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진리인 동시에 참다운 철학이고, 또는 영생불멸한 최상의 행복을 보장하는 참다운 종교입니다.

이런 가르침을 가지고서 우리가 헛되게 살 수가 없습니다. 제가 끝으로 한 말씀 더 드리면서 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자기 개인적인 문제나 가정적인 문제나 또는 국가 문제나 우리 광주 문제나 자기 개인적인 어줍된, 어중간한 그런 지혜로서 판단을 하지 말고서, 그런 잣대로 재지를 말고서, 석가나 예수나 공자나 그 분들의 잣대로 재가지고 해결을 봐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어느 문제나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이라, 뜨거운 화로에 한 줌의 눈을 집어넣듯이 문제가 그때는 문제가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염두에 두시고서 우리 청년 불자님들 꼭 여러분들도 빛나시고 여러분들의 힘으로 해서 우리 광주가 명실 공히 빛나는 고을이 될 수 있도록 끝까지 노력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산승의 말씀을 마칩니다.


 나무석가모니불(南無釋迦牟尼佛)!


 나무마하반야바라밀(南無摩訶般若波羅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