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시절 우연히 손에 잡힌 「자비관」(고요한소리 출판) 소책자, 자비관 수행은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권한 수행이며 당신께서도 자비관 수행을 하시였다고 합니다. 매일 새벽기도에 독송하는 부처님 육성이라는 『자비경』은 짧은 경전이지만 경(經)속에는 계・정・혜 삼학이 들어있고 일상, 일행삼매도 있습니다.
처음 시작 할 적에는 책에 나온 그대로 시작하였고 세월이 흘러 숙달(熟達)하다 보니 나 나름대로 정리하여 하고 있습니다. 큰 맥락은 같더라도 “일체중생이 고통을 여의고 행복하십시오” 하는 사유(思惟)가 익다[熟]보니 “일체중생의 고통을 제가 다 거두어 주겠습니다.” 원력으로 바뀐 것입니다. 또 익어가다 보니 마음의 팔과 손이 나와서 대상을 보듬어 안아주면서 자비관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행방법은 공장에서 찍어 나오는 제품처럼 다 똑같을 수가 없습니다. 각각의 인연과 업이 하늘과 땅인데 똑같은 방법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며, 유능한 선생님이 아이의 재능(才能)을 키워주듯이 참 선지식은 제자의 인연 수행법을 키워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가까이 있는 힘들고 고통 받는 중생들로 시작하여 저 멀리 있는 중생들로 확대해 가며 마지막은 가슴을 열고 마음의 팔과 손으로 감싸 안으며 들숨에 “일체중생의 고통을 다 거두어 주겠습니다.” 날숨에 “끝없는 마음의 빛 자비심을 온 누리에 방사하는 것입니다.” 한 단계 더 들어가면 묵묵히 마음의 빛만 방사하게 되고....
염불과 자비관은 둘이 아니며 마음의 빛, “나무아미타불”을 고성염불에 실어서 온 우주를 방사하면서 나무아미타불이 온 우주를 채우고 저 깊숙이 땅속까지 미치도록 하는 것입니다. 어느 분은 순수정토염불이 아니면 외도라고 하시는 분도 계신데 염불에는 실상염불도 있고 정토염불도 있는 것이며 실상염불은 모든 수행법을 포섭하며 다 숙세(宿世) 인연에 따라 할 뿐입니다.
염불을 하나 자비관을 하나 수행공덕을 일체중생의 행복으로 회향하고자 하나 나의 수행으로 얼마나 사바세계를 정화시키고, 얼굴에 화가 가득한 분을 나의 자비관으로 얼마나 녹으려는 지는 저도 모릅니다. 다만 일체중생을 위하여 마음을 일으키면 일체중생이 감응한다는 소신입니다.
자비관을 수행하여 얻는 공덕은 첫 번째가 건강해진다는 것입니다. 과학적으로도 자비심을 일으킬 적에 면역체개가 가장 튼튼하다고 합니다. 흔히 결혼한 여자가 더 건강하고 애기 엄마가 건강하다고 하는 것이 애기에 대한 자비심이라고 합니다. 저도 안구건조증이 좀 있는데 좌선 중에는 눈이 촉촉이 적혀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고 의외로 스님들 건강이 부실한데 아직까지 일식 일 찬(饌)으로 살아도 큰 무리 없이 잘 지네는 것이 자비관 수행 덕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두 번째는 행복감을 바로 느낄 수가 있습니다. 억한 마음 움켜지고 살아야 끝없는 고통과 병고뿐입니다. 거친 사바세계에 와서 마음의 상처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 드러나거나 깊은 의식 속에 있는 “억” 함을 놓고 이해하며 용서하고 연민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바로 행복감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자신에 행복감이 충만 할 적에 주변도 행복한 것입니다.
세 번째는 가장 인간다운 삶입니다. 『자비경』에 자비관을 하는 수행자는 가장 거룩한 삶이라고 하였습니다. 재물이나 이름은 다 무상한 것이지만 이웃 중생을 위하여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영원한 것이며 가장 인간답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자비관이 익으면 행주좌와에 이루어지며 선한 마음이 익으면 선한 행위가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 복과 지혜가 쌓이는 수행입니다.
마지막으로 수행 성취에 조급증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저 역시 자비관을 한다고 하지만 망상을 쥐고 하는 것이고 깊은 삼매에 들어야 삼독심의 뿌리가 뽑히는 것이고 비로소 마음을 증명하는 것이지만 열 번 화나던 것 다섯 번으로 줄었다면, 한 번 용서가 몇 번의 용서로 늘었다면 수행의 진일보며 증명한 것입니다.
-아- 언제나 결정신심이 일어나 밤새워가며 정진 할까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