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NP 몇 백 불 시절, 60년대 다 가난한 시절입니다. 가난해도 우리 집은 특별히 더 가난했기에 어린 시절부터 돈에 한이 많았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고향 인천은 작고 서울 가서 크게 한 번 살아보자고 아무런 반연 없는 서울을 19세에 빈손으로 올라와 처음 만난 사람이 뚝섬 꽃 농장을 소개시키어 주어 서울서 뿌리 내리고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가난한 농촌에 태어나 6십년 대 후반 7십년 대 서울로 상경한 청소년들 공돌이, 공순이 세대, 지금은 다 늙었겠지만 우리세대가 얼마나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고생하고 살았는가는 “전태일 평전”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한 번 읽어보시면 알 것입니다.
1984년 8월 31일부터 9월2일까지 서울에 폭우가 쏟아지어 천호동이 전체가 잠기고 한강 둑이 무너질까 조마조마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 난리 통에 십여 년을 안 먹고 안 쓰며 용맹정진 끝에 이루어 놓은 천6백 평의 바이올렛 꽃 농장이 3일 만에 다 털렸는데, 진짜 억울하면 눈물도 안 납니다. 고난의 길이 끝나는 줄 알았는데 계속 이어지고 믿거나 말거나 이지만 그 후 당시도 큰돈인 6천만 원짜리 계약 건이 결정적일 때 틀어지었는데 그날은 신장이 나타나 훼방 놓는 것이 보였습니다.
절에 갈 사람이 돈벌이에 골몰하니 결정적일 때 마다 물 먹이는 것이지요. 어느 날 출가 마음을 일으키자 대추나무에 연 걸리듯이 걸린 여러 가지 문제가 일시에 해결되는 일도 벌어지였습니다. 도(道)와 재물은 함께 할 수 없으며 사바세계 와서 돈 버는 것은 실패했지만 무상(無常)이라는 것은 깨달았습니다.
그 옛날 정부미 혼합곡에 왜간장 한가지로 밥 비며 먹은 시절이 있기에 지금도 반찬 한두 가지 놓고 공양해도 부족함이 없고 하루 12시간씩 노동한 시절이 있기에 지금 땡볕에 나가서 서너 시간 울력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긴 긴 세월의 고통이 있었기에 지금 고통 받는 사람들에 연민심이 일어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와 자비관을 할 수 있으며 돈이 얼마나 힘든 것인 줄 알기에 재공양은 아껴 쓰고 법공양으로 회향하는 것입니다.
어느 분이 말하기를 “스님 이렇게 무주선원을 애쓰며 가꾸는데 떠날 수 있습니까” 하는데 “난 밖에서 이것보다 더 큰 것을 버린 사람입니다 죽을 적에 가져가는 것도 아니고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작은 토굴에 가서 홀로 정진하고 싶습니다.” 하였는데, 일행삼매를 익히다 보면 시절인연이 도래하겠지요. 우바리존자 법문 그대로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는 것을 똑바로 구분하면서 가야할 길만 가는” 것이 수행자의 길입니다
- 아 - 그리고 마지막 목숨이 다 할 때는 이 사바세계에 더 남아 있고자 목숨을 구걸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원아임욕명종시(願我臨欲命終時)
진제일체제장애(盡除一切諸障碍)
면견피불아미타(面見彼佛阿彌陀)
즉득왕생안락찰(卽得往生安樂刹)
원하오니 제가 명이 다 할 적에
모든 장애가 제거 되어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발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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