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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4. 인광대사의 가언록

화두 놓고 염불하세(10)

  

 

印光大師 嘉言錄(인광대사 가언록)

                                                                               옮긴이 김지수(寶積)

 

1. 정토(염불)위에 법문 없소.(4)

 

 

어찌 이렇게 말하겠소? 일체의 법문은 비록 돈오나 점수 권변(權變)이나 실체(實體)의 차이가 나지만, 모두 수행의 공덕이 깊어져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해야만, 생사고해를 벗어나 성인의 경지에 들 수 가 있소. 이는 오로지 자신의 힘에 의지하고 달리 의탁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가령 미혹이 조금만 남아 있어도 여전히 윤회하게 되오. 그리고 이 모두 이치가 몹시 심오하여, 쉽게 학습 수행할 수 없소. 때문에 숙세의 영민한 근기와 특수한 인연이 없는 자는, 단 한 번의 금생으로 증득하기 몹시 어렵소.

 

오직 정토 법문만이 빈부귀천이나 남녀노소 지우승속(智愚僧俗) 사농공상을 가릴 것 없이, 모든 사람이 익혀 수행할 수 있소. 아미타불께서 대자비의 원력으로 사바고해의 중생을 모두 맞이해 주시기 때문에, 다른 모든 법문과 비교해도, 공덕을 성취하고 과보를 얻기가 가장 쉽다오.

 

중생의 일념 심성은 부처와 둘이 아니오. 비록 미혹 속에 빠져 깨닫지 못하고, 망상을 일으켜 악업을 짓더라도, 본디 갖추고 있는 불성은 조금도 줄어들거나 변하지 않소. 비유하자면, 마니보주(摩尼寶珠)가 측간 밑에 떨어져 똥 속에 묻힌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소. 어리석은 자는 보배구슬인 줄 모르고, 똥과 같이 취급하고 말 것이오.

 

그러나 지혜로운 이는 그것이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보배(無價之寶)인 줄 알고서, 똥이 더럽다고 싫어하는 마음 없이 그것을 측간에서 건져 올려, 갖은 방법으로 깨끗이 씻고 닦아 높은 깃대 위에 걸어 놓을 것이오. 그러면 곧 커다란 광명을 발하면서, 사람이 원하는 대로 각종 보물을 쏟아내게 되오. 그 때사 어리석은 자는 그걸 보고서야, 비로서 보배임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오.

 

크게 깨달으신 세존께서 중생들을 보시는 것도 이와 똑같소. 설사 제아무리 혼침하고 미혹되어, 오역십악의 죄를 다 짓고 영원히 삼악도에 떨어진 중생이라도, 부처님은 한 순간 한 생각도 그를 내 버리시는 마음이 없소. 반드시 시기와 인연이 무르익길 기다려, 그윽한 가피력과 현저한 설법을 베푸시어, 중생들이 허망한 미혹의 악업을 끊고 항상 진실한 불성을 깨달아, 무상보리를 원만히 증득하도록 이끄시고야 만다오. 극악무도한 죄인에게도 오히려 이러하시거늘, 하물며 악업이 작은 자나 계율과 선행을 함께 닦은 자와 선정의 수행력이 깊은 이는 말할 것이 있겠소?

 

무릇 삼계(三界)안에서는, 비록 몸과 마음을 잘 추스르고 견고히 지녀 모든 번뇌와 미혹을 조복시킨 사람이라도, 감정의 종자(情種)가 아직 남아 있기 마련이오. 때문에 그도 복덕의 과보가 일단 다하면, 하계(下界)로 내려오게 되오. 그러면 각종 경계와 인연을 만나, 다시 미혹을 일으키고 악업을 짓게 되며, 그로 말미암아 고통을 불러오고 육도 윤회가 그칠 날이 없게 되오.

 

그래서 법화경에서 삼계가 편안치 못함이 마치 불타는 집과 같으니, 뭇 고통 충만함이 몹시도 두려워할 만하다.”고 말씀하셨소. 업장이 다하고 감정이 텅 비어,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한 자가 아니라면, 이 삼계를 벗어날 가망이 없소.

 

그런데 오직 정토법문만큼은, 단지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만 갖추고 나무아미타불의 명호를 지송하면, 부처님의 자비 가피력에 의지해 서방정토에 왕생할 수 있소. 일단 왕생하면 부처님의 경계에 들어가, 부처님과 똑같이 받아쓰게(受用) 된다오. 범부의 감정과 성인의 견해 둘 모두 생겨나지 않으니, 천만 번 확실하고 견고하며, 만에 하나도 누락되지 않는 특별 법문이라오. 지금 말법시대에 즈음하여, 이 법문을 놓고서는 별다른 방도가 없음을 알아야 하오.

 

불광(佛光)이란, 십법계(十法界)의 평범한 중생과 성인 부처가 마음 자체에 본래 지니고 있는 지혜의 본체(本體)라오. 이 본체는 영명(靈明)스럽고 통철(洞徹)하며, 맑고 고요히 항상 존재하오.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소. 세로로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를 관통하여 시간을 구분지으며, 가로로 시방세계에 두루 퍼져 공간을 감싸 버린다오. 텅 비었다()고 말하기에는, 만 가지 공덕을 너무 원만히 나투며; 있다()고 말하기에는, 한 티끌조차 전혀 세우지 않는다오. 일체의 법()에 스며 있으면서, 일체의 모습()을 떠난 것이오. 범부라고 줄어드는 법도 없고, 성인이라고 더 늘어나지도 않소. 비록 오안(五眼)으로도 볼 수 없고, 사변(四辯)으로도 표현할 수 없지만, ()마다 모두 그 힘을 이어받고, 도처에서 누구나 그를 만날 수 있소.

 

다만 중생들이 아직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불광(佛光)을 받아 쓸 수 없다는 것이오.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 불가사의한 힘을 받아 미혹을 일으키고 악업을 지으며, 업장으로 말미암은 고통을 당하면서 끊임없이 생사윤회를 되풀이하는 거라오. 항상 존재하는 진실한 마음(眞心)을 가지고, 나고 죽는 허깨비 같은 과보(幻報)를 받는 셈이라오.

 

비유컨대, 사람이 술에 몹시 취하면 천지가 빙빙 도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 천지는 돌지 않는 것과 같소. 또 길손이 길을 잃으면 사방이 뒤바뀐 듯 생각하지만, 역시 사방은 바뀌지 않은 것과 같소. 이는 완전히 허망한 업장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일 따름이지, 진실한 법(實法)은 얻을 만한 게 하나도 없소. 그래서 석가세존께서 부처의 도를 성취하여 불광(佛光)을 완전히 증득하셨을 때, 이렇게 탄식한 것이오.

 

참으로 기이하고 또 기이하도다. 일체의 중생이 모두 여래의 지혜 덕상을 갖추고 있건만, 단지 망상과 집착 때문에 증득할 수 없구나.”

만약 망상과 집착만 떠난다면, 일체의 지혜(一切智), 자연의 지혜(自然智), 막힘없는 지혜(無礙智)가 저절로 앞에 나타날 것이오. 또 능엄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소.

 

미묘한 성품, 원만한 광명, 모든 이름(개념)과 모습(형상)을 떠나 있으니, 세계니 중생이니 본래 존재하는 게 아니다. 단지 허망으로 말미암아 생겨남이 있고, 생겨남으로 말미암아 사라짐이 있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허망이라 부르고, 이러한 허망이 사라지는 것을 진실이라고 한다.”

 

이는 여래의 더할 나위 없는 보리(無上菩提)와 대열반이라는 두 전의(轉衣)를 일컫는 호칭이오. 한편 반산(盤山) 스님은 이렇게 읊었소.

 

마음의 달 홀로 둥그러니 떠, 그 빛 만물을 다 집어 삼키네. 빛이 경계를 비추는 것도 아니고, 경계 또한 존재하지도 않네. 마음과 경계 모두 존재하지 않는데, 다시 무슨 물건이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