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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산당 금타 대화상/금타(金陀) 대화상

벽산당 금타대화상 부도탑 제막식







벽산당 금타대화상

부도탑 제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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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다례 및 부도제막식

일시: 2018311() 오전 1030

장소: 백양사 부도전

 

식순

사회: 성진스님(BBS TV 행복공양간 진행자)

 

* 식전 공연(합창단)

* 개식

* 삼귀의

* 반야심경

* 헌화 분양

* 종사영반

* 법어(백양사 방장 학봉지선 대종사)

* 문도대표 인사말씀(벽산 문도회 문장 용타큰스님)

* 기금전달

* 찬불가(진주 선우선방 합창단)

* 공지사항

* 사홍서원

* 폐식

 

 

 

* 추모세미나

일시: 2018311() 오후 130

장소: 백양사 교육관

 

식순

 

사회: 성진스님(BBS TV 행복공양간 진행자)

* 개식

* 삼귀의

* 반야심경

* 인사말씀(벽산문도회 문장 용타큰스님)

* 인사말씀(백양사 주지 토진스님)

* 발제, 토론

* 공지사항

* 사홍서원

* 폐식

 

 

 

 

경과보고

 

 

백양사 부도전에 올 때마다 항상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열반에 드신지 어느새 70년이 다 되도록 어른스님의 부도를 모시지 못해 항상 죄스러웠는데 방장 스님의 배려와 상정 임창욱 거사님의 정성어린 시주, 그리고 문도스님들의 마음이 모여 오늘의 불사가 원만히 회향 할 수 있어서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다섯 분의 부도를 모시게 되었는데 다섯 분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가운데 모셔진 부도가 벽산당 금타대화상의 부도입니다. 아시다시피 만암 대종사의 제자이시자 무주당 청화대종사의 은사가 되십니다. 그 옆으로 법련당 정수 대선사의 부도가 모셔져 있고 그 다음이 법능당 성기대선사, 그 옆이 보하당 지죽대선사의 부도가 모셔져 있습니다. 이 세분은 벽산당 금타대화상의 제자이십니다. 마지막 부도는 청화대종사의 맏상좌이자 저의 은사이신 무지당 월성대선사의 부도입니다. 나란히 서 계신 큰스님들의 부도가 저희 백양사를 가호 하실 것으로 저는 믿습니다.

 

다음으로 불사 경과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20163월 벽산문도회 총회에서

금타대화상 백양사 부도 건립 결의,

부도탑 추진위원회 결성

(위원장 토진스님, 위원 대석스님, 광전스님)

20165월 중국 서안 초당사 구마라집삼장 부도의 형태로 제작하기로

추진위에서 결의

20167월 중국 복건성 FUJIAN RONGFA STONE CO. LTD

부도·비 제작 의뢰

20169월 백양사 방장 학봉 지선 대종사께 비문 의뢰

201610월 학정 이돈흥 선생에게 비문 글씨 의뢰

2017년 복건성 작업현장 6회 답사 점검

20179월 부도비를 완성하여 백양사에 안치

2018311일 부도제막식

 

 

백양사 주지 토진스님

 

 

 

 

 

 

 

법어法語

 

 

오늘은 금타 대화상께서 열반하신지 7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대화상의 문도들이 정성을 모아 큰스님의 출가 본사인 이 곳 고불총림 백양사에 부도와 비를 모시는 의식을 봉행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기쁘기 한량없는 일입니다.

대화상께서는 구한말인 1898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스물두 살 되던 해인 1919년 고창高敞 만세 시위에 참여한 후 왜경倭警을 피해 고창 문수사로 피신하셨다고 합니다.

문수사는 대화상의 고모가 크게 시주한 인연이 있는 도량이었는데 절에서 숨어 지내는 동안 스님은 우연히 금강경을 읽게 되었고 신심을 일으켜 출가를 결심하게 됩니다.

당시 문수사 주지스님과 상의한 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 곳 백양사로 와 만암曼庵대종사를 친견하고 스승으로 삼아 출가 사문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대화상께서는 이십대에 서울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학림에서 수학하신 후 평생을 이 곳 백양사 운문암과 내장사 벽련암에서 참선 수행에 몰두 하신 어른이십니다.

대화상이 남기신 유고인 우주의 본질과 형량』 『관음문자그리고 우리 범부가 성인이 되어가는 수도의 위차인 해탈십육지수능엄삼매도같은 것을 보면 범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대화상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또 만해사상 연구회가 펴낸 한용운 사상연구에도 금타스님과 관련된 내용이 있습니다.

만해스님이 일제에 반대해 북향으로 지은 심우장尋牛莊 토지를 금타대화상께서 보시했다는 내용입니다.

자주 방문하는 김벽산 스님이 자기가 초당草堂을 지으려고 송림중松林中52평을 매수買受 해 둔 것이 있었으나 번의翻意하고 선생에게 드리겠으니 몇 간을 지어 보시라고 진언進言 하므로......” 여기에 등장하는 김벽산 스님이 바로 금타스님이십니다.

이렇듯 만암대종사의 큰 제자 중 한 분이신 금타대화상의 부도와 비를 이 곳 고불총림 백양사에 모시게 된 것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이에 벽산문도들은 이 곳 백양사가 대화상이 출가하셔서 평생을 수행하신 도량이자 열반처이고, 또 그 제자이신 무주당 청화대종사가 출가하신 도량임을 명심하고 대화상의 가르침이 이 곳 백양사에서 꽃피울 수 있도록 잘 외호하고 문도들의 마음의 고향이자 의지처로 삼아 대화상의 가르침대로 열심히 수행정진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열반 70주년을 맞아 금타대화상을 흠모하는 후학들이 모여 대화상의 부도탑을 세우고 제막하는 이 법회를 대화상의 오도송을 들려 드리는 것으로 오늘 제 말씀은 맺도록 하겠습니다.

 

荷團稜尖是眞實(하단능첨시진실)

風吹雨打非幻境(풍취우타비환경)

絮蝶飛處生蓮華(서접비처생연화)

錐端鏡面放金光(추단경면방금광)

연잎 둥글고 뾰족한 모서리가 진실이며

바람 불고 비가 뿌리는 일이 허망한 경계가 아니로다.

버들 꽃 날리는 곳에 연꽃이 피고

송곳 끝과 거울바닥에서 금빛이 빛나도다.

 

大韓佛敎 曹溪宗 古佛叢林 白羊寺 方丈 학봉 지선 대종사

 

 

 

 

 

 

 

 

 

 

 

 

 

碧山堂金陀大和尙塔碑銘

 

 

대화상大和尙의 법명法名은 금타金陀이니 벽산碧山은 그 분의 법호法號이시다.

서기 1898년 무술戊戌 329일 전북 고창군 무장戊長에서 부친 김병룡金炳龍와 모친 밀양密陽 박씨朴氏의 장남으로 탄생하셨으니 본향本鄕은 김해金海요 속명俗名은 영대寧大이며 자는 성일性日이라 하였다.

 

14세에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에 외조부의 명으로 측량기계를 빌려와 독학으로 만석萬石의 전답田畓을 측량하셨으니 소년기부터 그 영민함이 남다르셨다.

22세인 1919년 무장戊長에서 삼일운동에 참여한 후 고창 문수사文殊寺 피신하시던 중 금강경金剛經을 독송하게 된 인연으로 보리심菩提心을 일으켜 출가를 결심하고 전남 장성군 백양사 만암曼庵 대종사大宗師에게 수계受戒하셨다.

 

그 후 석존釋尊의 일대시교一代時敎를 이수履修하시고 18년간 조주趙州 무자화두를 참구參究 정진하였으나 큰 진전이 없다가 39세 되는 1936년 운문암雲門庵에서 동안거를 맞이하여 금강경의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원각경圓覺經 삼정관三淨觀25청정륜법淸淨輪法을 수행법으로 택하여 용맹정진 하시어 정중定中에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의 첩경법문捷徑法門인 반야관조般若觀照의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을 얻으시고 이어 1117일 인시寅時에 활연대오豁然大悟하셨다.

 

안거 중 삼매三昧에서 금색金色바탕의 두루마기에 타 한 글자가 써진 광경을 보시고는 수계受戒할 때 상눌尙訥이었던 법명을 금타金陀로 개명하시고 그 후 전북 부안 내소사來蘇寺에서 한 차례 안거 정진 하신 것을 제외하고는 백양사 운문암과 내장사 벽련암碧蓮庵에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며 십 수 년 간 오후불식과 탁발을 원칙으로 보임정진保任精進하셨다.

 

대화상大和尙께서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구도행求道行에 겸하여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대비원력大悲願力으로 일인전一人傳(한 사람에게 전하여) 일인도一人度(한 사람을 제도한다)하시며 시기상응時機相應의 인연을 따라 쉼 없는 교화법문敎化法門을 펼치셨으니,

19426월에는 물심일여物心一如의 법계당처法界當處에 근원하여 일어나는 만유萬有의 현상을 현대적인 수치로 체계화한 불교의 우주론을 제창한 우주의 본질과 형량을 발간하여 각 지역의 대학교에 발송하여 유물적 사조에 일갈一喝을 하셨다.

1944년에는 반야심경약해般若心經略解를 저술하시어 제법개공諸法皆空의 이치를 밝히셨으며 대소승의 경론에 나타난 수행과 증오證悟의 위계位階를 회통會通한 해탈解脫 16의 법문을 제시하셨다.

1947년에는 삼신일여三身一如의 실상實相과 정혜균등定慧均等의 수행 등을 밝힌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의 교설을 설파하시고 훈민정음訓民正音의 본의에 입각하여 동서문자東西文字의 통일문자統一文字로서 관음문자觀音文字를 베포하시어 방편이갈方便二喝하시었다.

이어 1948년에는 수능엄삼매首楞嚴三昧의 경지에서 일진법계一眞法界의 성상性相을 관조觀照하는 수능엄삼매도결首楞嚴三昧圖訣 상편上篇의 법문을 찬술하셨다.

그 외에도 수많은 독창적 법문으로 수기제도隨機濟度의 방편을 삼으셨으니 법좌法佐인 청화淸華 가 유작을 편집한 금강심론金剛心論이 전해지고 있다.

 

1948년 동안거 해제 이후 운문암에서 118일부터 123일까지 수능엄삼매도결嚴三昧圖訣 하편下篇을 구술口述하시어 방편제삼갈方便第三喝 하시고 제자 법능法能스님에게 서필書筆케 하신 후 124일 정오 30분경에 입적하시니 세수歲數 51세 법납法臘30이시다. 다비를 모실 적에 사흘 동안 서기瑞氣가 하늘로 뻗쳤다고 하니 실로 이사理事에 무애無礙하시고 종설宗說을 겸통兼通하신 인천人天의 사표師表이시며 대선지식이셨다.

 

대화상大和尙께서 시적示寂하신지 68년을 맞이하여 문도들이 스님의 고풍방편시설古風方便示說을 추모하여 본사本寺에 비를 세우며 끝으로 대화상大和尙의 오도송悟道頌을 소개하여 명에 대한다.

 

荷團稜尖是眞實(하단능첨시진실)

風吹雨打非幻境(풍취우타비환경)

絮蝶飛處生蓮華(서접비처생연화)

錐端鏡面放金光(추단경면방금광)

연잎 둥글고 뾰족한 모서리가 진실이며

바람 불고 비가 뿌리는 일이 허망한 경계가 아니로다.

버들 꽃 날리는 곳에 연꽃이 피고

송곳 끝과 거울바닥에서 금빛이 빛나도다.

 

불기 2561丁酉 正月

 

古佛叢林 方丈 門姪 知詵 謹撰

鶴亭 李敦興 謹書

 

 

 

 

 

山中秩

方丈 鶴峯知詵

維那 一守

禪院長 無空

律主 慧權

律院長 法藏

律監 德宇

僧伽大學院長 圓哲

學監 正軒

護法 乘眞

布敎 慧悟

總務 華眞

副主持 光展

主持 土眞

 

門徒秩

上佐:

法蓮正修 法能性起 無住靑華 寶河知竹

 

孫上佐:

月星 金性 惠山 龍陀 高焄 碧峰 道雄 性本 正宙 性和

聖吼 圓明 道剛 道一 智源 智浩 如眞 壯宇 勇宙 正曼

無相 性俊 王忍 大瑩 泰昊 旲曼 庚眞 本空 正焄 勇忍

大石 正宰 主炅 惺全 壯晏 志重 旲宙 甫恩 命筌 旲闡

光展 勇和 東宣 永善 金忍 命原 秀晏 瑞焄 惠勇 志尙

光忍 炅宣 永曼 大玄 常展 瑞眞 本然 宇宣 眞聖 定本

梵展 光輪 法照 仙頂 正倫 性潭 智玄 智覺 正虛 晟寂

 

增損上佐

頭眞 哲忍 土安 梵玄 性吼 潁寬 土眞 白宇 如眞 光眞

指經 法忍 修眞 明眞 武垢 炯空 梵休 玄報 玄須 土日

宗德 覺性 無緣 世印 性倫 智常 金輪 大輪 龍眞 千眼

和正 成眞 皛眞 光祚 普圓 應眞 能眞 慈洪 一眞 華眞

炯至 國眞 東眞 黙眞 正空 圓眞 海眞 人眞 雲眞 上眞

心眞 道空 梵超 牛眞 大定 京眞 宙原 冏安 月眞 圓空

普潤 萬眞 乘眞 普光 眞空 普覺 藏虛 本有 貫眞 聖現

定帝 智承 圓耕 禪行 凡光 成株

 

高孫上佐

淨秀 弘炅 成光 正軒 峰山 曉明 性華

 

緣化秩

孫上佐 比丘 龍陀 外 門徒一同

常精 林昌郁 命淨月 朴賢珠 外 有緣佛子

 

 

 

 

 

 

 

1898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고창만세운동에 연루되어 고창 문수사에 피신중 발심하여

22세 되던 1919년 백양사 만암대종사를 은사로 출가하셨다.

이십대에 서울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학림에서 수학하신 이후

백양사 운문암과 내장사 벽련암에서 참선수행에 전념하셨다.

39세 되던 1936년 견성오도하시고

우주의 본질과 형량, 해탈십육지, 수능엄삼매도결, 관음문자, 반야바라밀다 심경약해등 대승과 소승, 밀교와 현교, 선종과 교종을 통섭한 다양한 저술을 남기셨다.

1948124일 백양사 운문암에서 열반에 드셨다.

 

제자로는 법련당 정수, 법능당 성기, 보하당 지죽스님과 태안사 조실과 조계종 원로 의원을 역임하신 무주당 청화대종사를 두셨다.

 

 

부도탑 조성기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50년의 짧은 인생동안 치열한 수행으로 천재적이고 독창적인 저술을 남기신 금타대화상의 부도탑을 조성해야 한다고 했을 때, 오래전 성지 순례길에서 우연히 만난 1700년 된 아름다운 자태의 구마라집스님 부도탑이 떠올랐다. 아마도 두 분의 굴곡진 인생과 천재성이 닮아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구마라집스님(344~413)은 천축출신 아버지와 구자국 공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7세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따라 출가해 대승을 공부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천재적 능력은 중국에까지 알려지게 되고 전진왕 부견은 구마라집을 얻기 위해 구자국에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전진의 장수인 여광은 귀국도중 본국이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할 수 없이 후량을 건국하였다. 20여 년간의 온갖 고생이 포로인 구마라집 때문이라고 여긴 그는 화풀이라도 하듯 스님을 엄청 구박했다. 뿐만 아니라 천재의 씨앗을 받아두어야 한다며 스님에게 결혼을 강요했다.

 

얼마 후 후진왕 요흥은 후량을 평정하였고,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어 구마라집을 장안으로 모셨다. 그는 70세로 입적할 때까지 무려 380여권의 경전을 번역하였고 제자는 3000명에 이르렀다. 살아있는 종교인을 얻고자 두 번씩 전쟁까지 치룬 경우는 종교사에서 흔치 않는 일일 것이다.

구마라집스님은 나의 번역에 오류가 없다면 내 시신을 화장한 뒤에도 혀가 타지 않을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스님의 말씀대로 다비식 이후에 오직 혀만이 그대로 남았다고 한다. 혀사리[舌舍利]를 모신 스님의 부도탑은 팔보옥석탑으로 불리는데, 신장위구르지방에서 출토되는 여덟 가지 돌로 조성했다고 한다. 열반 후 제자들이 스승 고향의 돌을 구해 부도탑을 조성해 드린 것이다.

 

노스님의 부도를 조성하다 보니 사숙님이신 법련스님을 잊지 못하시던 은사스님이 떠올랐다. 은사스님께서 운문암에 출가하실 무렵 대화상께선 이미 열반에 드신 직후였고 다른 곳에서 안거를 나신 법련스님께서 운문암에 와 계셨다고 한다. 은사스님과 동갑이셨던 법련스님의 모습이 얼마나 단정하고 거룩했던지 은사스님께서는 매일 법련스님의 발을 씻어드렸다고 말씀하시곤 했었다.

 

이후 혹자는 법련스님께서 6.25전쟁 중에 진산 태고사에서 돌아가셨다는 말을 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는 북한으로 끌려가셨다고 하는데 언젠가 불교신문에 묘향산 보현사 주지스님이 소개된 적이 있었는데 법명도 법련스님으로 같고 연배도 비슷해서 혹시 월북해 살아계신다면 언젠가는 뵐 날이 있을 거라며 스크랩한 신문기사를 은사스님께서는 수첩에 꼭 간직하고 계셨다. 또 노스님의 기일이 되면 법련스님의 위패도 대화상 위패옆에 나란히 두고 항상 그리워하시던 모습이 떠올라 이번 기회에 법련사숙님 부도와 법능사숙님, 보하사숙님과 월성사형님 부도도 함께 모시게 되었다.

 

나란히 모셔져 있는 노스님, 은사스님, 세분 사숙스님, 그리고 맏사형스님의 부도를 보니 이렇게라도 그리운 분들이 함께 계시는 모습이 유난히도 정겹게 느껴진다.

 

손상좌 광전

 

 

벽산당 금타대화상 부도탑 불사 동참자

 

 

유난히도 매서웠던 추운 겨울도 물러가고

법당 앞 고불매도 꽃망울을 머금고, 오는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벽산당 금타대화상 열반 70주년 추모다례 및 부도탑 제막식에

큰스님의 법의 향기를 흠모하고 기리고자 정성을 모아 준비하였습니다.

간절히 바라오니 이 공덕으로 모든 존재가 다 함께 성불의 길에 이르시길 기원합니다.

 

부도탑비 조성상정 임창욱 거사님

세미나진주 선우 선방

법공양책동진건설

다례제 상차림성륜사

점심공양서울 능현선원

부도전 장엄 및 홍보광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