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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산당 금타 대화상/금타(金陀) 대화상

2. 금타대화상 열반70주년 세미나

                 


2.금타대화상 열반70주년 세미나.zip



金陀禪師 생애의 재검토

 

김광식(동국대)

 

1. 서언

 

한국 근대불교사에는 불조혜명의 수호 및 계승, 개혁불교, 지성적 노선, 독립운동, 불교철학 등의 분야에서 특별한 행적을 남긴 승려들이 적지 않았다. 그간 불교계에서는 이런 승려를 고승, 큰스님, 선지식 등으로 불러 왔다. 이런 인물들에 대한 학문적인 조명은 불교사, 불교사상사, 승단사, 교단사, 문중 · 문도의 역사, 교구 본사 등의 차원에서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중요한 행적을 역사에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연구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대상자가 적지 않다. 이에 대한 원인은 다양한 측면에서 지적될 수 있다. 그는 자료의 부재, 후학 및 연구자의 무관심, 정치적 요인, 소외자 등을 거론할 수 있다.

 

이런 배경 하에서 본 고찰에서 다루고자 하는 인물은 金陀禪師(1898~1948, 이하 금타로 약칭)이다. 금타는 백양사 출신 승려인데, 그는 치열한 수행을 하여 깨달음을 거쳤으며, 근대적인 세계관의 성격이 개재된 ?우주의 본질과 형량?(1941) 등 몇 편의 불교의 저술을 남겼다. 그의 저술은 전통성과 근대성의 변증법적인 결합에서 나왔으며, 과학적인 사유가 개입되었으며, 수행의 단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노정된 귀중한 대상이었다. 사실, 근현대기에서 불교사상서를 생존에 저술한 대상자는 한용운, 백용성, 박한영, 이성철 등 일부 승려에 지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금타에 대한 최근까지의 학문적 분석은 황무지와 같았다. 이에 대한 1차적인 책임은 관련 문도, 연고 사찰에 있겠지만 이 분야를 담당하는 학자들의 빈곤한 역사의식, 나약한 학문의식도 그 책임에서 자유스러울 수는 없다. 근현대불교에 대한 연구는 최근 20년 전부터 본격화되고 있지만, 그 이전의 불교학계는 이 분야 역사 및 인물에 대한 연구를 방치하였다. 일면에서는 금타의 사유, 저술을 이해할 수도 없었던 불교 승단 지성의 빈곤성도 그 문제를 부가하였던 것이다.

한편, 현재는 금타선사에 대한 자료집이 발간이 되면서 서서히 연구가 시작되는 초보 단계에 접어들었다. 물론 이는 금타의 상좌인 淸華禪師(1924~2003)의 영향에서 나온 것이다. 청화는 금타의 영향을 받아 치열한 수행을 하였고, 특별한 깨달음의 세계를 구축하고, 독특한 수행관을 강조하였으며, 후학 및 재가자들을 자비스럽게 지도하여 그의 가풍은 널리 파급되었다. 이런 구도에서 금타의 문손인 벽산문도회와 청화사상연구회에서는 청화에 대한 학문적인 정리를 본격화 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흐름에서 자연 청화의 스승인 금타가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에 답을 해야만 되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금타에 대한 학문적인 정리가 요청되는 시점에 도달하였던 것이다.이런 전제에서 필자는 본고에서 금타의 행장을 탐구하고 나서 느낀 것을 관련 연구자들과함께 공유하고 싶은 것 몇가지를 보고하려고 한다. 현재 금타의 행적, 행장, 역사는 객관적으로 정리된 것이 부실하다. 금타의 행적은 청화, 지선이 찬술한 碧山堂 金陀大和尙 塔碑銘의 비문, 空閑山人이 펴낸 ?碧山禪要?(1993)의 총론, 상좌인 법능이 찬한 碧山 略記(1995) 등에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행장, 행적은 근거, 객관성, 통일성 등에 있어서 적지 않은 문제가 있다고 보인다. 객관적인 근거, 문헌, 보편성 등에서 한계가 보이기 때문이다.

 

본고의 초점은 금타의 행적을 탐구하면서 추후에는 보완, 재해석을 해야 할 측면을 몇가지로 도출하는 것에 있다. 그 초점은 백양사 및 만암의 영향, 금타가 실천한 淸規와 학명 · 만암의 선농불교와의 상관성, 만해 한용운의 거처인 심우장을 금타가 후원한 정황 등의 민족의식, 관음문자를 조선어학회에 보낸 전후 사정 등으로 나누어 고찰하고자 한다. 필자의 이런 개진은 금타 행적을 총체적으로 정리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임을 이해하여 주길 바란다. 나아가서는 금타의 행적이 근현대기 백양사의 역사 및 문화의 창달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2. 금타 행적에서의 유의점

 

1) 백양사 및 만암의 영향

금타는 전북 고창 출신이다. 그는 19193·1운동을 고창에서 주도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고창 문수사로 피신하였는데, 그것이 입산의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정식 출가는 백양사에서 만암스님을 은사로 이루어졌다. 그의 출가 당시의 법명은 尙訥, 법호는 碧山이었지만 1930년대 후반 무렵부터는 金陀라고 법명을 자작 개명하였다.

 

필자가 여기에서 거론하려는 것은 금타의 행적을 밝히고자 할 경우에는 백양사에서의 기본적인 행적, 백양사의 문화, 은사인 만암의 가풍 및 사상 등과 관련하여 적극적으로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금타라는 특별한 수행자가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라 백양사라는 기반, 문화에서 나왔음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이런 입론에서 우선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금타의 입산, 출가의 일자를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그에 관련된 문헌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추후에는 승적부 등을 찾아야 할 것이다. 또한 금타가 입산 직후 강원을 졸업하였다고 하는데, 어디에서 하였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불교전문대학을 졸업하였다고 전하지만 이에 대한 근거, 기록도 아직까지는 찾을 수가 없었다. 금타에 대한 여러 전후 사정을 고려하면 1920년대 전반기 中央學林 재학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금타의 역사 찾기에서는 백양사 출신이라는 점, 그리고 은사인 만암에 대한 것이 적절하게 서술되고 강조되어야 한다. 그래서 지금껏 만암의 제자로 널리 알려진 西翁禪師(1932~2007)만을 백양사 역사에서 거론할 것이 아니라 금타 - 청화의 맥을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우선 일제하 불교계에서의 만암과 백양사의 가풍을 거론하고자 한다. 현재 백양사의 역사와 문화는 단순하게 거론할 수는 없지만 근대기 백양사의 문화를 계승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금타는 30세 무렵(1929?)에 재입산하여 참선수행을 하다 1936년에 오도를 하였다. 그런데 금타의 행장에는 ‘18년간 無字話頭로 참선하면서 정진하였다고 나오거니와, 이를 단서로 도출하여 지금부터는 백양사와 만암의 가풍을 들추어 내고자 한다.

 

일제하의 불교 잡지인 佛敎? 79(1931.1)에는 근대기의 불교 역사가로 명망이 높은 안진호의 白羊白羊寺라는 기고문이 전한다. 이 글은 1920년대 후반 백양사를 방문하고 나서 쓴 글이다. 이 글에는 1920년대 백양사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나오기에 백양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그 글에 '白羊模範'이라는 부분이 있다. 그 내용은 看話本位, 齋式如法, 齋式美風, 生活統一 등이다. 이 중에서 재식의 여법과 미풍은 재(제사)를 지냄에 있어서의 법도, 절도, 전통 고수 등을 높이 평가한 내용이다. 그런데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간화로 본위'이다. 여기에서 看話 관련 내용을 제시한다.

 

看話本位

當寺主客老少를 뭇지 안코 入寺 즉시로 看話 本位이다. 더욱이 冬夏安居末寺 住持 全部

招待하야 一個月間 面壁 家風宣揚하니 누가 보던지 靈山威儀가 그대로 옴겨 왓다 할 것이다.

 

백양사에 거주하는 모든 승려 즉 主客, 老小를 막론한 승려들은 백양사에 들어가기만 하면 참선 수행을 하였다는 내용이다. 즉 간화 본위로 수행하는 전통이 확립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안거 수행시에는 백양사의 말사 주지들도 1개월 간의 면벽참선을 하는 것이 가풍이 었다. 이렇듯이 간화선풍이 백양사에서 고양되었다는 함은 일제하의 여타 본사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특별한 성격이다. 이런 간화선풍 중심에는 당시 주지이었던 蔓庵(1876~1957)이라는 고승이 있었다.

 

그러면 여기에서 1926년 무렵 만암이 백양사 주지로 근무하던 당시의 정황을 전하는 회고문을 제시한다. 李能和?불교? 31(1927.1)에 기고한 朝鮮佛敎三時代에서 백양사 및 만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이 회고는 위의 정황을 보완하여 주는데, 여기에서 1920년대 후반 만암과 백양사의 가풍을 살필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내용은 필자의 시선을 주목케 한다.

 

去年 冬間全羅南道 長城郡禪敎兩宗大本山 白羊寺巡禮하야 본 일이 잇다. 當寺淸衆住持 宋蔓庵和尙導率下하야 和合一致되야 公同心力으로써 一大 伽藍 法堂 寮舍 其他一新 建築하야 노코 그 淸規를 직힘에는 朝夕禮佛 一堂會食 뿐만 아니라 비록 小沙彌일지라도 法衣를 입지 안코는 朝夕供養參與不許하며 工課를 함에는 晝參夜參禪風四敎 大敎淸規嚴格으로 함을 보고 心中實地 所見表面 所聞相異함을 늣겻다. 그리고 朝鮮 各寺가 이와 가튼 風規를 직히는 줄을 알겟다. 佛敎主人朝鮮僧侶現下 狀態上述하니 이것으로 보아서 佛敎 前途發展되야가는 것을 確信한다.

 

이능화가 1926년 겨울, 백양사를 순례하여 하고 나서 쓴 글이다. 이 글에는 백양사 가풍, 만암의 사상, 백양사 승려 대중들의 수행이 담백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탐방기에서 당시 백양사 수행 문화, 만암의 뜻을 찾을 수 있다. 우선 주목되는 것은 주지인 만암을 중심으로 백양사 대중들이 일치 단결하여 화합일치, 공동합심으로 가람불사를 성공리에 단행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나아가서 백양사에는 淸規가 엄정하였는데 밤낮으로 參禪을 하는 禪風이 간단치 않았음을 전한다. 이런 만암의 실천적 행보는 19254월 백양사를 탐방한 최남선의 글에서도 나온다.

 

쌍계루 왼쪽으로 대가람백양사란 광고판이 달린 산문을 들어가노라니, 새로 닦은 마당에서 흙손으로 화초를 심다가 망연히 일어서 예를 갖추는 이가 이곳 주지 송만암宋蔓庵 화상이었다. 이렇듯이 몸으로 시키고 일로 보이는 성의가 철저한 가운데 그의 백양사 중흥의 공업功業이 나온 것을 직감하였다. 중후하고 침착하여 아닌 게 아니라 실행적인 인물인듯 했다. 극락보전과 큰방 한 채만 남기고 오래 황폐했던 이 절을 몇 년 사이에 전각과 요사 170칸의 면목으로 다시 보게 한 것은 있던 것도 없애기로 능사를 삼는 이 세대에 보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위의 글에 만암의 실천적인 행보가 잘 나와 있다. 이와 같은 근대기 백양사의 문화, 가풍, 청규는 곧 백양사를 대변하는 만암의 사상이라 하겠다. 때문에 금타가 18년 수행을 하고 나서 깨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배경, 이력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물론 금타는 18년간의 간화선 수행, 무자화두 수행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깨치지 못하자, 1936년 동안거 수행 결제를 백양사에서 준비하면서 부처님 경전에 따라서 依法修道로 결제하겠다는 뜻을 세웠다. 그래서 ?원각경??금강경?에 의지한 치열한 수행을 하고 마침내 오도하였다. 이렇듯이 금타의 깨침은 독특한 것이었지만, 그런 깨침을 가능케 하였던 줄탁동시의 기연은 18년간의 화두 수행, 백양사의 참선문화와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즉 백양사의 참선 수행의 가풍에서 깨달음의 기반이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가 강조하는 것은 백양사와 은사인 만암의 영향을 결코 가볍게 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2) 금타의 수행 淸規 ; 禪農一致

금타는 19361127, 백양사 운문암의 동안거 수행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오도 후에도 백양사에 머물렀으나 1939년부터는 내장사의 산내 암자인 碧蓮庵에서 수행하였다. 여기에서 우선하여 거론할 것은 왜 그가 하필이면 내장사 벽련암으로 갔는가이다. 벽련암은 백양사, 내장사의 고승이었던 백학명이 주석하였던 암자이었다. 백양사 선원의 조실이었으며, 선농불교의 이념과 실천적 행보를 백양사 문화에 토착화시킨 주역이다.

 

白鶴鳴禪師重創新築하신 碧蓮庵이며 禪師께서 十餘年間 보금자리를 치시고 半農半禪主義有時에는 禪園曲을 부르며 호미자루를 들고 김도 매시고 有時에는 解脫曲을 부르며 把定도 하시고 有時에는 明月曲을 부르며 看月도 하시다가 無去無來 亦無住最後 圓寂에 드신 곳이다.

 

위의 기행문에 보이듯, 내장사 벽련암은 백학명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즉 그가 중창하였고, 반농반선의 선농불교를 제창하고 실천한 곳이었다. 이런 역사가 배어있는 벽련암에 금타가 주석한 것은 우연이라고 결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학명의 입적이 10년이 된 시점에서 벽련암으로의 입주에는 금타의 깊은 뜻이 개재되었을 것이다. 즉 그는 학명의 선농사상을 계승, 실천하려는 의지가 있었다고 필자는 보고자 한다.

 

금타는 학명이라는 존재를 출가 당시부터 알았고, 학명이 내장사에서 행한 선농불교라는 불교혁신 활동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에 그는 학명이 입적하고 부재하였지만 학명이 입적하였던 암자이었으며, 학명이 선농블교를 실천하였던 내장사의 벽련암에서 새로운 지향의 깃발을 표방하고 실천한 것은 우연이라고는 볼 수 없다고 필자는 보고자 한다.

 

하여간 그는 벽련암에서 홀로 수행을 하지 않고, 그의 상좌들과 참선을 하면서 동시에 자급자족의 생활을 하였다. 당시 그 정황을 전하는 관련 회고를 제시하겠다.

 

其後 全北 內藏寺 碧蓮禪院에서 一九三九年(己卯)開堂修禪이니 開堂 初 大衆碧山閒人(필자 주, 금타)爲首하여 上首弟子 法蓮堂 定修禪師(自號 碧蓮)小納 法能 三人也午前 二時 起床 入禪 · 六時放禪同時 禮佛(禮佛后 掃除, 供養 等) ·八時 入禪 · 十時 放禪同時 所任 處理 · 巳時마지(引聲念佛) · 十一時 巳時供養 · 午后 一時 午後 勞動 始作 · 午後 五時 作業 마감(以后 自由時間) · 午后 八時 入禪 · 午后 十時 方禪과 동시 就寢으로 巳時供養 前에는 年中 黙言修禪으로 靜中工夫하였고, 巳時供養 後에는 年中(三冬 結制 除外 · 三冬 結制 中에는 靜中工夫) 行道로서 또는 境智修禪으로 平常心 動中工夫하였다. 此是 平常心是道修行이요 三冬結制三個月間 黙言精進으로 只 空閑坐的 修道.

碧山淸規靜中的 修道動中的 修行으로 一切自給自足하고 自力自生하면서 隨處禪觀이라.

하면 食糧動鈴이요, 自生勞動으로 修道觀心하고 修行觀行하며 平常心觀照無念修道, 結制에는 獨房에서 修行하는 것은 一切 不許하고 碧山閒人 外護下 結制精進으로

 

위의 기록은 벽련암 시절의 수행을 전하는 귀한 자료이다. 위의 내용에 나오는 수행 일과를 간략히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오전 2; 기상, 入禪

6; 放禪, 예불

8; 입선

10; 방선, 소임 처리, 사시 마지(염불)

11; 공양

오후 1; 勞動 시작

5; 노동 마감, 자유시간

8; 입선

10; 방선, 취침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아주 철저한 참선수행과 오후에 4시간을 노동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기록에 나오듯이 오전 참선시에는 黙言 정진을 하도록 하였고, 오후의 수행시에는 行道 혹은 境智修禪을 하도록 하였다. 行道境智修禪은 활동을 하면서, 노동을 하면서 하는 수행을 의미한다고 본다. 금타는 자신이 실천한 수행을 靜中的 修道動中的 修行이라고 보면서 自給自足하고 自力自生해야 함을 제창, 실천하였던 것이다. 요컨대 선농불교를 실천하였다. 근대지향적, 근대문명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던 금타가 이와 같은 선농불교를 시행하였다는 것은 특이한 노선이다. 그런데 금타는 이런 수행을 1942년 무렵, 백양사 운문암으로 이전하면서도 지속하였다. 이 사정을 전하는 다음의 기록을 제시한다.

 

辛巳(필자 주, 1941)까지 ?宇宙本質形量?出版 發送·三個月 后頃 當時 白羊寺 住持 蔓菴宗憲大宗師(碧山閒人 師傅)로부터 連絡을 받았으니 其 連絡內容?白羊寺 雲門庵 禪房閉鎖할 것이니 그곳에 碧山禪法으로 開堂하여 別途宗派를 세우고 碧山禪門淸規開創하기를 바란다?면서 ?食糧碧山閒人 · 法蓮 · 法能 三人分?으로 每月 白米 一叭固定的으로 큰절에서 責任 補給한다? 하는 ·四次連絡을 받고 雲門庵 開堂決定하여 白羊寺 蔓菴大宗師에게 雲門庵 開堂通告하면서 (중략)

壬午(필자 주, 1942)春 碧山閒人法蓮 · 法能 三人移居 雲門庵하고 心宗旗幟 下 ?雲門道場?이라고 하여 開堂하고 從前 碧蓮道場修行 淸規一也移居道場하였던 바 漸次 雲集大衆하여 修行僧 二十餘名이라.

 

즉 금타는 19414월에 펴낸 ?우주의 본질과 형량?을 발송한 이후, 1942년 봄 내장사의 벽련암에서 백양사의 운문암으로 복귀하여 본격적인 개당을 하였다. 이와 같은 복귀와 개당은 만암의 3~4차례의 권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목할 것은 은사인 만암은 기존 선방을 폐쇄시키면서도, 金陀禪法碧山淸規로 개당할 것을 왜? 권유하였는가이다. 백양사 수행문화의 상징인 운문암을 제공한 것에는 남다른 뜻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석은 조심스럽다. 일단 여기에서 금타는 만암으로부터 신뢰를 받았음을 수긍할 수는 있다. 독자 수행법, 독자노선을 더욱 본격적으로 구현해 보라는 배려이었다고 이해된다.

 

이런 배경에서 금타는 예전 벽련암에서 실천한 청규를 그대로 활용하면서 수행에 매진하였다. 그러자 운집한 대중이 20여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는 주목할 사실이다. 기존, 제도권 선원에서 조실 · 입승 등을 거치지 않았고, 파격적인 수행법을 실천하였던 금타회상에 대중이 모인 것은 특별한 역사이다. 금타가 이렇듯이 독자적인 수행법을 제시하고 실천하였음에도 다수 대중이 모여들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운문암에서 행한 수행법의 내면을 들여다 보자.

 

修行者二十餘名이나 되니 正法僧法蓮 · 法能 二人으로 하고 其他 大衆護法僧으로 하여 慈水悲火性識으로 自覺 三身自治性相修道僧正法僧이라 하고 根境修行依他修者護法僧이라 하여 正法僧碧山閒人 外護下 二十四時 勇猛精進獨房修道午前 二時 起床觀心으로 只空閑坐, 護法僧雲門淸規에 따라 入放禪 僧堂 修行午前 三時 起床하여 아침 禮佛에서 六時 禮懺으로 焚香 念誦하고 修禪이라.

 

如斯하여 正法僧無住禪師無念只空閑坐, 護法僧無相禪師高聲提唱으로 受緣后 依菩提 方便門修禪이며 巳時 供養后自給自生生活勞動에서 遊方頭陀하고 日常生活에서 隨處坐禪하니 馬祖道一禪師平常心是道動中工夫自給自足勞動에서의 自立自生이니 依他性起하여 圓成實性하는 百丈淸規一法으로 一心하고 平等性으로 一法하여 自治而不自.

 

이 회고에서 주목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운문암의 대중은 正法僧護法僧으로 구분하였다는 점이다. 정법승과 호법승을 구분한 내용은 적시되지 않았지만 그는 비구승과 대처승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정법승은 용맹정진, 독방 수도를 하였지만 호법승은 운문청규에 의거하여 僧堂(대중 처소) 수행을 하였다는 것이다. 즉 정법승은 개인적인 수행으로 깨달음을 추구한 반면에 호법승은 단체 수행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호법승은 禮懺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계율 파기에 대한 참회, 반성을 하도록 한 것을 의미한다. 또한 호법승에게 염송, 고성제창을 하도록 한 것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셋째, 호법승은 자급자생의 生活勞動을 하도록 하였다는 점이다. 禪農佛敎를 실천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금타는 벽련암, 운문암에서 청규를 제창하면서 선농불교를 실천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금타가 실천한 선농불교는 금타가 독자적, 혁신적으로 추진하였던 내용인가에 대하여 더욱 생각할 여지가 있다. 필자는 백양사의 고승이었던 白鶴鳴宋蔓庵의 사상에서 일정한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본다. 백학명은 내장사를 주된 주석처로 활용하였지만 그도 백양사의 고승이었다. 그는 백양사 주지를 27년간이나 하였던 만암의 선수행, 선농일치 구현에 영향을 주었던 인물이었다. 백학명은 선 분야의 종장으로서 근대불교의 선지식이었다.

 

그러나 그는 궁벽한 사찰에 은거만 하였던 보수적인 승려는 아니었다. 그는 당시 불교 현실을 직시하고 개혁을 강구하였으며, 개혁을 추진하는 이론을 모색하기 위해 일본과 중국까지 다녀왔다. 마침내 그는 수좌들의 조직체인 선우공제회의 발기에도 참여하였고, 불교개혁의 구도하에서 선원의 개신을 모색하였다. 그의 선원 개신은 선원 규제의 재정비와 승려의 노동을 결합시킨 선농불교로 나타났다. 그는 1923년부터 선농불교의 기치를 내장사에서 내걸고, 입적하였던 1929년까지 실천하였던 것이다. 백학명의 선농불교의 개요, 성격은 어떠하였는가에 대해 살피고자 한다. 이 내용을 전하는 것으로 내장선원 규칙이 있다. 그 전모를 보면 다음과 같다.

 

-, 禪院目標半農半禪으로 變更 -, 禪會主義自禪自修하며 自力自食하기로 함 -, 會員新發意新出家募集 但 久參衲子勤性하니 選入 -, -, 叢林正規하야 衣食圓融으로 함 -, 日用午前 學問 午後 勞動 夜間 坐禪 三段으로 完定 -, 冬安居坐禪爲主 夏安居學問勞動 爲主로 함 但 安居證三年授與 -, 梵音時勢適合淸雅梵音學習하며 또 讚佛, 自讚, 回心, 還鄕曲 等 新作하야 하기로 함 -, 破戒, 邪行, 懶習, 기타 弊習一切 嚴禁

 

이와 같은 규칙에서 백학명의 선농불교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필자가 생각하는 그 성격을 대별하여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의 선농불교는 반농반선으로 나타나듯이 노동과 참선이 균형적으로 나오고 있다. 둘째, 그 실천 이념은 自禪自修, 自力自食으로 표방되듯 자주적인 성격이 강하다. 셋째, 참가자는 새로운 발심을 한 대상자와 처음으로 입산 출가한 대상자로 한정하였다. 넷째, 일과의 내용이 학문, 노동, 좌선으로 구분되듯 활동의 틀을 분명히 하였다는 점에서 그 실천성이 뚜렷하였다.

 

다섯째, 노동과 수행의 생활에 범음을 이용해서 다양한 가사를 만들고 그를 활용하였다는 점이다. 이런 성격의 청규에 의거하여 백학명이 내장사에서 실천한 선농불교는 금타가 추진한 것과 거의 흡사하다. 물론 일부 측면은 다른 면도 있지만, 동일한 측면은 자립적인 선농불교 수행이다. 그리고 학명은 梵音(불교음악)을 적극 활용한 것과 금타는 고성 염불을 수용한 것에서는 지향하는 바가 같다고 하겠다.

 

이렇게 금타와 학명의 선농불교가 유사한 것은 금타가 출가 당시 백양사로 오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백학명이라는 도인을 만나기 위함에 있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즉 금타는 학명의 사상, 노선을 주목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내장사 벽련암에서 회상을 차려 수행을 한 것에서도 내장사에서 실천된 학명의 선농불교의 관행에 저절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제는 금타가 추진한 청규 및 선농불교와 그의 은사인 만암의 경우와는 어떠한지 살펴 보겠다. 만암이 일제하의 불교에서 행한 선농불교에 대한 정황은 김소하(대은스님)가 백양사를 탐방하고 남긴 기행문, ?불교63(1929.9)에 기고된 南遊求道禮讚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두 碑文을 어름 더듬 읽어 마친 뒤에 다시 큰절(필자 주, 백양사)에 드러와서 본즉 三代藏敎盡在此聞이라는 말을 腐儒로 하야곰 케 할만치 寺規嚴肅하고 僧風整然하다. 會僧堂 禪院에는 三十餘名禪客拄杖跏趺하야 禪三昧에 드러 잇고 香積殿 講院에는 十餘名學人義學을 캐고 잇다. 그리고 寺內에서는 어떠한 僧侶라도 法衣가 아니고는 出入不得케 한지라 事務員까지라도 法衣常着하고 잇는 모양이며 宋蔓庵禪師主義晝經夜禪 或晝耕夜禪主義라 어떠한 사람을 勿論하고 晝間에는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白羊山居住僧侶로는 朝暮 焚修時一時間 或二時間式 入定 坐禪케 한다 하며 그대로 꼭 實現한다. 그리고 宋禪師께서도 一髮만한 差違도 업시 낫이나 밤이나 禪定에 드러 잇스며 初學으로 하야금 至誠으로 參禪한다고 한다.

 

즉 위의 기행문에는 만암이 주지로 있었던 백양사는 寺規가 엄숙하고 승풍이 정연하다는 것이다. 또한 만암의 강조하고 실천한 主義晝經夜禪 或晝耕夜禪이라는 점이다. 즉 수행과 생활의 구조가 강학, 참선, 노동 등을 균형적으로 하는 원융적인 수행이었다. 물론 그 내용에는 선농불교가 강조되었다.

 

한편 만암은 8·15해방 직후에 선언한 1947년의 고불총림에서 선농불교를 핵심 내용으로 구현하였다. 그는 백양사를 근거로 전라도 일대의 사찰에서 고불총림을 운영하였다. 이는 자생적인 불교정화이었다. 만암이 단행한 고불총림은 일제하의 백양사에서 시행하였던 수행, 선농일치 사상을 계승한 것이다. 때문에 고불총림의 청규에는 선농일치적인 내용이 전한다. 그 단적인 예증은 대중(법중)의 자격, 대중의 일상 생활의 원칙을 정한 근간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대중의 자격은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法衆의 자격은 종지를 崇奉하며 淸規嚴守함에 僧尼 道俗을 물론하고 均一 정도와

部衆하여 戒定慧 삼학을 수련하며 濟世儀範함에 遜色케 함

 

, 청규를 준수하는 것을 원칙으로 정하였다. 여기에서 나온 청규는 고불총림 운영의 철칙이다. 이 청규 내용에 선농일치가 나온다.

 

법중의 日用均一함을 期圖하는 바 직원 일동과 定慧 兩衆實行

시간별 오전 4~7시 오전 9~ 12시 오후 2~3시 오후 4시 오후 5시 오후 7~10

法衆別

職員級 禮敬修禪 執 務 執務 讀經 勞動 禮敬 講演

定學部 상동 修 禪 修禪 상동 상동 상동

慧學部 상동 看 經 看經 상동 상동 상동

 

위의 내용은 만암이 일제하의 백양사에서 행하였다는 "晝經夜禪 혹은 晝耕夜禪"으로 표현한 청규와 같다. 여기에서 직원은 종무소 직원을, 정학부는 비구승과 선방 대중을, 혜학부는 강원 대중과 그리고 대처승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고불총림 청규에 의하면 해방공간 당시 백양사 대중은 선농일치로 생활하는 것을 원칙으로 정했다. 청규에서 수행(참선, 간경 등)의 여가에 노동하는 것은 의무로 정해졌다. 단순히 노동함에 머무르지 않고, 자급자족의 의미까지도 담겨 있었다.

淨財貯蓄僧侶正命生活이오니 淸淨乞食하며 松落草衣菜根木果糊口遮身가 아님은 아니나 如今風俗習慣이 도저히 劃一한지라 가급적 修養勞動所得으로 自力生活하며 隨分貯蓄하여 世財 法財兩足함을 期圖하는 義務

 

위의 청규에 나오는 근간은 수행과 노동을 동일하게 인식하고, 노동의 소득으로 自力生活해야 함의 강조이었다. 나아가서는 선농일치에 의한 생산물을 저축하고, 공적인 분야에 활용함을 원칙으로 정하였다. 요컨대 만암은 해방공간에서도 선농일치를 백양사, 고불총림의 이념의 근간으로 운용하였다.

그런데 금타의 청규에 나오는 정법승, 호법승은 고불총림 청규에서는 正法衆, 護法衆이라는 개념으로 나온다. 백양사에서는 비구승과 대처승을 분리하고, 소임을 구분하여, 분한을 정하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法衆組織

吾敎는 원래 四部衆(승려, 尼僧, 信士, 信女)한 바 現 敎門事情하여 僧侶중에 戒體가 완전한 正法衆, 戒體가 불완전한 護法衆이라 하고 五部衆을 조직할 (는 종래에 理事判制함에 )

 

바로 위와 같이 원칙을 정하고 실행을 하였다. 이와 같은 만암의 일제하 공간, 해방공간에서의 선농일치 사상과 자생적인 정화사상을 검토함에 있어 추후에는 금타의 청규와의 상관성, 同異性을 적극 검토해야 할 것이다.

 

3) 금타의 민족의식

금타의 입산 출가의 계기가 된 것은 19193·1운동의 참가이었다. 그는 출신지인 전북 고창지역(무장)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나, 성공치 못하여 고창 문수사로 피신하였다. 그 피신을 할 때에 금타는 ?금강경?을 읽고 발심하여 백양사로 오게 된 것이 승려가 된 배경이었다. 이렇게 그는 20대 초반부터 민족의식이 강렬하였다고 이해된다. 그런데 금타가 3·1운동 민족대표이면서 일제하 불교의 대표적인 승려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의 거처인 尋牛莊 1933년에 지을 때에 도움을 주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 증언 기록은 한용운을 10여년간 시봉, 추종한 재가 신도인 김관호가 밝힌 내용이다. 그러면 우선 그 내용을 제시한다.

 

자주 방문하는 金壁山스님이 자기가 草堂을 지으려고 松林中52買受해 둔 것이 있었으나 翻意하고 선생에게 드리겠으니 몇 집을 지어 보시라고 眞言하므로 비로서 建築生意하였으나 최소한 약 천원 가량의 비용이 소요되는데 婦人兪氏所持金 약간과 洪淳泌氏 方應謨氏 朴洸氏 尹相泰氏 金寂音스님 몇분의 施助를 받았으나 連接土地 52을 부득이 買受하게 되어 약 3백여원 부족이 하였는데 洪淳泌氏의 주선으로 3백원을 鍾路 金融組合으로부터 借用하고

 

여기에 나오듯, 금타는 만해의 거처인 심우장을 짓도록 그가 마련한 초당 부지를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신뢰할 수 있는가? 필자는 만해를 연구하는 학자인 연고로 이에 대하여 다각적인 탐구와 자료수집을 하였으나, 만족할 만한 근거를 찾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자 한다. 만해를 10년간이나 시봉한 김관호가 증언한 것이기에 이를 믿을 수 밖에 없다고 본다. 김관호는 이를 증언하고 나서 10년 후인 1991년에도 심우장 건립은 내장사 벽산스님이 52평의 터를 제공하였다고 증언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다.

 

그 무렵 통도사에서 스님을 평생동안 모시기로 했는데 경찰이 미리 알고 금지시켜서, 내장사 벽산스님이 52평의 터를 내놓아 심우장을 세우게 했어요.

 

이렇게 내장사 벽산스님이라고 구체적으로 구술하였음에서 신뢰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면 금타는 만해와 어떤 인연으로 만나게 되었는가. 이를 말해주는 문헌 기록은 없다. 그래서 그 가능성을 추론하고자 한다. 금타는 입산 후에 서울의 불교 전문학교(중앙학림?)에 가서 수학을 하다가, 일시 세속에서 나가 큰일을 도모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청화의 어록이 참고된다.

 

출가한 뒤 강원도 졸업하고 그 당시의 불교 전문대학을 졸업한 뒤 26세 경 과학이나 수학 등 신학문(新學問)을 공부하여 현대 사회를 제도한다는 포부를 갖고 잠시 동안 환속하였다고 합니다. 30세때 재입산하여 50세에 입적하였습니다.

 

이렇게 금타는 서울에 위치한 불교계 최고 학교인 중앙학림에서 수학하였다. 그러나 그는 신학문을 공부하여 포교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세속에 머물고 있었다. 이 정황은 법능의 회고에서도 나온다.

 

출가 후 얼마 안 되어 혜화전문(동대 전신)에 입학하여 수학하였으나 벽산의 질문에 답할 교수가 없어 교수회의에서 교비로 일본대학에 유학을 시키도록 결정하고 벽산을 교수회의에 소환하여 일본유학을 권유하였으나 불응하고

 

귀사한 얼마 후 세 이십사(24)로 고창 소성면 소성보통학교장으로 부임하였지만 선비(先妃) 밀양박씨는 세 삼십팔로 사망하였으므로 선고(先考)만을 모시고서 부인하고 관사(官舍)에 입주하여 보니 (중략) 표면은 호남조(湖南組)라는 명의하 토건업을 하면서 이면은 서울에서의 신간회(新幹會)와 민족주의자의 기반과 다름 없는 곳이 되었든 것이다.

 

또한 벽산의 혜화동 집에서의 생활에는 속인 세상과 같은 가정적인 면은 일체 엿볼 수 없었고 모든 동지의 집회소인양 매일 수 많은 사람의 내왕에 가족은 손님 수발의 나날이었으며 모이는 동지는 계획된 사건이나, 계획한 사건에 벽산의 말을 군사(軍師)의 말과 다름없이 받아들이며 선견(先見)이 비범하다 하여 신봉하며 모이는가 하면 혹인(或人)은 심모(深謀)함이 영통(通靈)한 사람 같다 하기도 하고 귀신같다 하기도 하여 절대적인 신봉(信奉)함을 갖고 모이는 것이였으나 당사자(當事者)는 관헌(官憲)의 눈을 피하여 함이 절대적인 요건임으로 집에서는 사업 관계로 매일 손님과 어울려 대주(對酒)하는 것 같이 보이도록 하기 위하여 매일 주연(酒筵)이요

 

상좌인 법능이 위와 같이 기술한 것은 보다 객관적인 문헌, 역사로 검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강의 움직임과 정황은 수긍할 수 있다고 본다. 우선 위의 증언에 금타는 일본유학을 거절할 정도로 자주의식, 자존심이 강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이런 의식은 자연스럽게 민족의식으로 전환될 소지가 다분한 것이다. 실제 금타는 1920년대 후반 경 상경하여 좌우 합작, 민족유일당 운동의 성격인 新幹會의 활동에 관여되었다. 그의 서울 혜화동 집은 신간회와 민족주의자 활동의 거점이 되었던 것이다. 금타의 민족의식과 유관한 증언은 더 나온다.

 

열거한 것 외에도 광주학생 만세사건을 주모(主謀)하였음에도 베일 속의 사람이 되어 일을 관장(管掌)하게 되어 동지들은 검거가 되었으나 벽산은 관헌의 검거에서 피하게 되었고 검거에서 피한 벽산은 또한 마음이 놓이질 않아 가족에게 조차 비밀로 하고 묘향산 보현사(普賢寺)로 피신하였는데 검거된 동지가 형량을 마치고 벽산의 피신처를 알아 내기 전까지는 가족도 몰랐던 사실이 있었고, 또한 신간회에서 발생시킨 장성 월평 일인 집단 상가 방화 사건 등의 수다한 일이 있었으나 생략한다.

 

여기에서도 금타의 세속에서 행한 민족운동과 유관한 내용이 나온다. 추후에는 이런 회고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연고 분야의 기록, 증언 등과 연결시켜서 금타의 공식적, 객관적인 역사로 편입을 시켜야 할 것이다.

 

한편 만해 한용운은 신간회의 발기인, 중앙위원, 경성지부장을 역임하였다. 즉 신간회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만해는 금타를 서울 집(혜화동)에서 만나고, 대화를 하고, 인연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더욱이 만해와 금타는 승려라는 공통 분모가 있었기에 그 인연은 돈독하였을 것이라 본다. 이런 배경 인연이 있었기에 심우장을 짓기 전에 머물던 거처에 자주 방문하였던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금타는 자신의 초당의 자리로 마련한 성북동 산 골짜기의 터를 만해의 거처(심우장)로 마련할 수 있게 제공하였다고 이해된다.

지금껏 살핀 바와 같이 금타는 민족의식이 충만하였고, 그를 실천에 옮긴 지성적 행보를 갔음을 알 수 있었다. 추후에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 증언에 입각하여 보편적인 행적을 재정리를 해야 할 것이다.

 

4) 觀音文字와 조선어학회

금타는 194728일에 觀音文字를 공표하였다. 이는 해방공간에서 한자 폐지설이 나오는 것을 직시하면서, 추후에는 한글이 전용될 것을 대비하여, 한글을 보완해야 한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增補正音 관음문자라고 명명된 금타가 그 문자를 설명하는 취지문을 보면, 한자가 폐지되면 조선문화가 위축될 것이기에 우리 한글을 보완하여 국민정신의 함양에 이바지 하겠다는 의식을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 30년간이나 문자에 대한 연찬을 하였다는 그의 문자에 대한 관심과 과학적 사고방식이 주목된다. 이런 의식은 민족의식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배경에서 관음문자를 만든 금타는 그를 각 기관, 연고가 있는 학자 등에 보낼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그 당시 한글학회에서 금타에게 보낸 편지(1947.4.14)와 이에 대한 금타의 답신(1947.6.1)이 전하고 있다. 금타가 만든 관음문자에 대한 분석은 언어학자가 담당해야 할 몫이거니와 필자는 해방공간 당시 조선어학회가 백양사에 와서 한글 강습회를 하였던 것과 금타의 관음문자와의 상관성을 추론하고자 한다.

 

조선어학회의 한글 강습회 강사는 19451112(강습회 담당자로 통지를 받음)부터 1210일까지 1개월 동안 백양사에 머물면서 한글 보급 차원에서 한글 강습회를 담당하였다. 199810, ?현대불교?가 보도한 기사에 의하면, 백양사는 조선어학회가 한글 보급을 위해 전국 지방분회를 통해 실시하였던 한글 강습회가 개설이 되도록 권유하였다. 그 강습회에는 영광, 순창, 부안, 고창, 담양, 정읍 등의 지역과 사찰에서 온 강습생 37(승려 25, 재가자 12) 참가했다.

 

이 강습회는 조선어학회가 미국 군정청의 위탁을 받아 19459월부터 각 도별로 한글문화 보급회의 지부를 설치하고, 지부를 중심으로 분회 개설을 통해 한글을 보급하겠다는 운동에서 나온 것이다. 당시 그 강습회의 강사로 내려온 김민수(1926~?)에 따르면 당시 백양사 주지었던 만암이 한글 교육의 필요성을 피력함으로써 가능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만암의 제자인 서옹이 강습회의 개설을 위해 서울 청진동에 있었던 조선어학회 사무실을 직접 찾아서 이희승과 대화를 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당시 강습회를 마치고 만암과 수료생, 강사인 김민수, 백양사 일부 승려가 같이 찍은 사진, 수료증(마침 증서), 명단부가 전하고 있다.

강습회를 담당한 김민수의 증언에 의하면 1127일부터 2주간 오전 930분부터 오후 430분까지 백양사 향적전에서 한글맞춤법 통일안(1945.9)을 주교재로 최현배가 지은 한글의 바른 길(1945)을 보충교재로 하여 훈민정음 표준어 표기법, 한글 교수법 등을 가르쳤다. 강습생은 고등부와 보통부로 나누어 하였는데. 일부 백양사 대중 승려도 참가하였다. 김민수가 그 당시에 쓴 일기에는 만암, 이상순(서옹), 최덕림, 이만흥(혜전, 백양사) 등을 만난 내용이 나온다.

 

참가 강습생의 사찰은 백양사, 불갑사, 내장사, 개암사, 문수사, 상원사(고창), 구암사, 소요사(고창) 등이었다. 강습이 끝나면 오후 밤에는 대중 승려들과 이야기를 하였으며, 강습생들과 운문암 · 영천암 등을 등산하고 한글 노래를 배우며, 연극(해방축하 공연)도 구경하였다고 한다. 이때 만암은 김민수를 깍득하게 대해주고 독립, 항일, 교육의 필요성 등을 강조하였다. 이렇게 백양사에서 있었던 한글 강습회에 대하여 운문암에 있었던 금타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추측하건대 강습생들이 운문암을 찾았다는 것을 볼 때에 금타는 김민수와도 대화를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연고가 있었기에 금타는 한자 폐지설을 들었고, 그에 대비한 한글을 보완하겠다는 취지로 관음문자를 만들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그래서 1년간 관음문자를 만들고 조선어학회로 보내 주었을 것이다.

 

한편, ?현대불교?199810, 이와 같은 내용을 보도하고 강사이었던 김민수의 당시 日記를 입수하였다. 그래서 김민수 교수의 백양사 일기(4511~12)이라는 제목으로 8회로 나누어 ?현대불교?의 지면 10~11월에 연재하였다. 그 일기에 보면 강습회에 대한 세세한 정보가 나와 있어 흥미롭다. 우선 만암의 강습회에 대한 애정이 강열하였음이 보인다. 김민수는 도착한 다음날 만암을 만나 강습회의 개요, 추진 등에 대하여 협의를 하였다. 이때 만암은 강습회에 참가할 강습생의 자격, 인원수, 지역별 할당, 기간, 등급, 모집 방법, 도청 학무국에 공문 요청 등을 상의하였다. 이런 애정, 협의는 만암의 민족의식, 교육의식이 상당한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해방직후의 백양사에서 일어났던 행사(북항청년동맹 결성식), 주민들의 환희, 당시 승려의 학문적 수준(최덕림), 백양사 監事인 정문학과의 대화, 군산 강습회, 한국문화보급회 전남지회, 도청 학무과에서의 업무 협의, 강습회의 강령 및 개강식, 운문암 방문, 한자 폐지 실행회의 발기, 사은회 등에 대한 정보를 엿볼 수 있는 등의 내용이 나온다. 이런 내용들은 그 당시 백양사 역사, 문화에 편입시킬 수 있는 좋은 사료이다.

 

지금껏 서술한 것을 정리하면 금타의 관음문자 제정에서 그의 민족의식, 과학의식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다. 그런데 그의 관음문자의 창안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고 194511~12월 백양사에 개최되었던 한글 강습회의 영향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때문에 추후에는 이에 대한 증언 채록, 상관성의 탐구, 그리고 언어학자에 의한 관음문자의 분석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3. 결어

 

본 고찰의 맺는말은 전술한 내용을 유의하면서, 추후 금타 연구에서 유의할 측면을 필자가 생각한 것을 개진하는 것으로 대하고자 한다.

첫째, 금타의 연구가 이제 본격화가 되는 시점에서 금타에 대한 자료를 다각도로 수집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현재 ?금강신론?이 발간되었지만, 금타의 총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료가 아직 미흡한 실정이다. 법능이 지은 약기에 대해서도 서지적 분석, 6하원칙에 입각한 분석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금타에 대한 일화, 증언, 비사 등을 수집하여 자료집으로 낼 것을 제안한다.

 

둘째, 근현대기의 백양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료집 발간, 탐구, 학술적 검토를 요청한다. 현재 ?만암문집? ?학명집? 발간되었지만 여타의 자료집, 학술적 분석 등은 미진하다. 최근 백학명과 만암, 고불총림에 대한 논고가 발표되었지만 서옹에 대한 탐구도 부족하다. 그리고 본 고찰에서 다룬 금타와 청화도 백양사 문화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백양사의 寺誌 발간, 백양사와 연고가 있는 승려들에 대한 총체적인 접근이 요청된다.

 

셋째, 만암과 금타의 同異性, 상관성, 법의 계승 등에 대한 문제를 탐구해야 한다. 백양사에서는 만암의 영향과 가르침을 결코 배제할 수 없다. 만암과 금타는 법에 대한 견해 차이로 불편함이 있었다는 증언이 있지만, 이는 단순하게 접근할 수 없는 것이다. 보다 심화된, 보편적인 접근과 해석이 요청된다.

 

넷째, 금타의 정체성에 유의해야 한다. 금타는 전통적인 불교 승단에서 출가, 수행을 하였지만 그의 불교관, 문명관, 민족의식 등을 유의하면 그의 정체성을 언급함은 간단치 않다. 그래서 금타의 불교사상, 수행론, 민족관, 세속에서의 다양한 행적 등을 치밀하게 천착해야 한다.

 

다섯째, 금타의 계승에 대한 문제이다. 이는 금타의 법, 가르침, 사상 등이 전수되고 있는가이다. 요컨대 금타와 청화와의 상관성을 이제는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할 것이다. 청화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청화사상을 객관적으로 보려면 금타에 대한 인식, 영향 등을 폭넓게 접근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껏 필자가 생각하고 있는 추후의 연구 방향, 주제를 거론하여 보았다. 필자의 지적이 금타, 청화, 백양사의 문화 등을 연구하는 관계자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이만 그친다.


2.금타대화상 열반70주년 세미나.z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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