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사람이 속히 불퇴전지不退轉地에 오르고자 한다면, 마땅히 공경심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집지執持해야 한다. 만약 보살이 이 몸으로 불퇴전지에 올라 아누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려면 마땅히 시방의 모든 부처님을 생각하고 그 명호를 불러야 한다.
- 용수보살〈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
* 《무량수경》에 「누구든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듣고 기쁜 마음으로 신심(信心)을 내어 잠시라도 지성으로 극락세계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이는, 그 부처님의 원력으로 바로 왕생하여 마음이 다시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의 자리에 머물게 되느니라. 그러나, 오역죄와 정법을 비방한 자는 그럴 수 없느니라.」 라고 하였다.
* 《아미타경》에 「극락국토에 태어난 중생들은 불퇴전보살이니라.」 라고 하였다.
* 영명연수선사의 〈만선동귀집〉에 「연화(蓮華)에 화생화면 부처님께서 친히 영접하여 문득 보살의 지위에 오르며, 단박에 여래의 집에 태어나 길이 불퇴전에 처하고, 모두가 보리(菩提)의 수기를 받아 몸엔 광명의 묘상(妙相)을 갖추며 보수(寶樹)의 향대(香臺)를 거닐면서 시바에 두루 공양하고 정신을 삼매에 평안히 하여 귀에 부딪침에 언제나 대승법을 들으며 또한 어깨를 지나침에 모두가 보처(補處)의 인(人)을 이웃하나니, 생각 생각이 텅 비어 오묘하고 마음 마음이 맑고 고요하여 번뇌의 불꽃이 소멸하였고 애욕의 샘이 영원히 마른지라, 악취(惡趣)라는 이름도 오히려 들을 수 없거든 어찌 다시 윤회하는 일이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 남회근 선생은 「팔지(八地)보살 경계에 이르지 않으면 여전히 퇴전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팔지보살의 부동지(不動地)를 지나야 비로소 불퇴전을 말할 희망이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 용수보살은 〈십주비바사론〉에서 「만약 보살이 이 몸으로 불퇴전의 땅에 이르러 아누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고자 한다면 응당히 바로 시방의 부처님, 그 명호를 불러야 한다. 아미타불 등의 부처님 및 모든 대보살(大菩薩)의 명호를 외우고 일념으로 염(念)하면 불퇴전을 얻는다.」 라고 하였다.
* 남회근 선생은 「구함이 없는 마음으로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를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공경하십시오. 삼보에 대해 경의를 품고 존중하여야 자신이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 남회근 선생은 「마음속에서 한 부처님을 생각하고 이쓴ㄴ 것이 진정한 염불입니다. 시시각각 마음속에 부처님이 있는 겁니다.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래께서 항상 살아계신 것처럼 한다.’ 거나, 유교(儒敎)의 ‘신(神)을 공경하기를 마치 신(神)이 살아 있는 것처럼 한다.’ 라는 말과 같습니다. 부처님께 절을 할 때에는 부처님이 살아서 내 앞에 계시는 것처럼 하는 겁니다. 정성스러우면 영험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절을 할 때, 마음으로 공경하지 않고 정성도 없으면서 절을 그저 운동으로 여긴다면 설사 일만 번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절대 주의해야 합니다. 이치는 바로 정성과 공경에 있습니다. 부처님께 향이나 꽃이나 물 등을 공양할 때에도 정성스럽고 공경스러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공양할 필요가 없습니다. 소용없습니다. 소용없을 뿐만 아니라 죄과(罪過)가 엄중합니다.」 라고 하였다.
일심으로 염불하면 만 가지 인연을 내려놓는 것이니, 이것이 곧 보시요,
일심으로 염불하면 모든 번뇌를 조복시키는 것이니, 이것이 곧 지계요,
일심으로 염불하면 다투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으니, 이것이 곧 인욕이요,
일심으로 염불하면 점점 순일純一해지니, 이것이 곧 정진이요,
일심으로 염불하면 망념이 일지 않으니, 이것이 곧 선정이요,
믿음과 발원을 갖고 일심으로 염불하면 왕생하니, 이것이 곧 지혜니라.
* 마조도일선사의 제자인 대주혜해선사께서 지은 〈돈오입도요문론〉에 「망념(妄念)이 일어나지 아니함이 선(禪)이요, 앉아서 본성(本性)을 보는 것이 정(定)이니라. 본성이란 너의 무생심(無生心)이요, 정이란 경계를 대(對)함에 무심(無心)하여 팔풍(八風)에 움직이지 아니함이라. 팔풍이란 이익[利]과 손실[衰], 헐뜸음[毁] 높이 기림[譽], 칭찬[稱]과 비웃음[譏] 그리고 괴로움[苦]과 즐거움[樂]이다.」 라고 하였다.
* 남회근 선생은 「우리 자신의 생명을 가지고 참구해 봅시다. 지금 모두들 여기 앉아 있습니다만, 만약에 무아(無我)라고 말한다면, 아마 그저 말해본 것일 뿐 분명히 내가 여기 앉아 있다는 것을 느끼는데 어떻게 무아라고 말할까요. ‘나[我]라는 것’ 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 육체일까요. 육체는 하나의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잠시 빌러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안에 ‘나’ 가 없습니다. ‘나’ 가 어디에 있는지 진정으로 참구해야 합니다. 중생은 본래 무아(無我)입니다.
그런데 ‘아(我)’ 가 있다고 멋대로 허망하게 인정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대망념(大妄念)입니다. 어째서 무아가 되지 않을까요. 세 가지 잘못을 범하기 때문입니다. ‘나’ 라는 것이 있고, ‘짓는 자’ 가 있고, ‘받는 자’ 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좌(靜坐)를 하자마자 혹은 염불을 하자마자 여러분은 무의식적으로 ‘내’ 가 공부한다는 생각이 있게 됩니다. 공부할 때에 여러분이 관상(觀想)을 하다느 진언을 수지하든 기(氣)를 수련하든 부처님 명호를 부르든, 모두 다 자기 스스로 조작을 하고 있는 겁니다. 가장 큰 잘못은 받는 자가 있다는 겁니다.」 라고 하였다.
진실로 염불한다면 몸과 마음을 다 내려놓을 수 있으니 곧 대보시요,
진실로 염불한다면 다시는 탐진치가 일어나지 않으니 곧 대지계요,
진실로 염불한다면 옳고 그름, 너와 나를 따지지 않으니 곧 대인욕이요,
진실로 염불한다면 점점 끊이지 않고 망념이 섞이지 않으니 곧 대정진이요,
진실로 염불한다면 다시는 망상이 날뛰지 않으니 곧 대선정이요,
진실로 염불한다면 다른 법문에 현혹되지 않으니 곧 대지혜이다.
- 우익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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