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시절 걸망하나 매고 이 절 저절 다니며 기도하고 지넬 적입니다.
어느 절에서 기도하고 지내는데 가끔 사시기도 동참하시는 분이 본연스님이 퍽이나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한 날은 종무소 보살에게 부탁하여 복사해놓은 승려증에 생년월일을 가지고 용한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진짜 용한 사람은 생년월일이 필요 없는 모양입니다. 딱 두 가지만 물어보는데 남자, 여자 “남자” 몇 년생 “을미생” 하니 바로 “아 그 스님”하는데 화들짝 놀랐고 그 다음 말이 “이 스님은 밖에서 공부 다 마치고 절에 들오신 분인데 걱정할 것 없습니다.” 하더랍니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전화로 알려주어 웃었는데
공부를 다 마치려면 깊은 삼매(三昧)에 들어야 하는데 삼매는 아직 멀었지만 그러나 밖에서 수행의 자량(資糧)은 익히고 들어왔다 생각합니다. 수행의 자량은 첫 번째가 무상(無常)인데 무상을 깨쳐야 밀물과 썰물 같은 권력과 재물에 헐떡거리지 않는 것입니다. 무상을 말로는 쉽게 이야기하여도 출가사문도 대부분 크고 작은 권력과 재물에 마음 빼앗기고 사는 것이 현실 아닙니까?
현장에서 밀물과 썰물을 당해보아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인과(因果)입니다. 선업(善業)에는 선과(善果)가 있고 악업(惡業)에는 악과(惡果)가 있다는 것은 다 알지만 중생들의 습성이 악업을 짓는 것은 좋아하면서 바라는 것은 많은 것이 사실이고 한 업종에 2십여 년을 종사하면서 주변사람들 부침(浮沈) 속에서 인과를 눈으로 많이 확인하였습니다.
세 번째가 가난인데 예전 어른스님께서 수행자는 가난을 배우라고 하시였는데 우리 세대가 마지막으로 보릿고개를 경험한 세대이지만 더욱 척박한 환경 속에서 어린 시절부터 철저한 무소유를 실참(實參)한 가난 속에서 몸에 배였다 생각합니다.
무주선원에서 빈 마음으로 보내는 하루일과가 출가사문으로써 당연한 것 같지만 홀로 새벽에 자리 털고 일어나 손수 마지지여 올리며 기도 정진하고 땡볕에서도 검질 매는 일이 그리 녹녹하지 않는 일과지만 쉼 없이 보내는 제 자신이 고맙습니다.
농사의 성패는 퇴비의 질에서 결정짓듯이 수행의 자량은 낮은 곳에 있고 고난 속에 성숙되는 것입니다. 물질적 풍요는 정신적 빈곤을 가져오고 육체적 고통은 정신적 성숙을 가져옵니다. 한 생을 거의 야전에서 멧돼지처럼 살아도 건강한 몸을 낳아주신 부모님과 마니보주(摩尼寶珠)와 같은 “나무아미타불”을 일러주신 스승님의 은혜에 감동 할 뿐입니다
은혜(恩惠)! 사바세계에 가득 찬 은혜
한 생각 돌리면 사바세계는 은혜로 가득 찬 세계입니다.
다만 중생이 무지하여서 불평할 뿐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