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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2. 진리의 길

진리의 길 2권 3. 삼매로 습기 녹여야 무량공덕이 나옵니다.(4)


 

* 초월적인 본래의 자리에 가지 않고서는 절대로 해탈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는 일체법이 모두 공이라고 설했습니다. 중생이 보는 모든 것은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요, 또는 아지랑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여러분은 여실히 이해가 안 갈 것입니다. 내 몸뚱이가 모두 비었거니, 내 집이나 재산도 내 것이 아니라 잠시 내가 맡아있을 뿐이라고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죽어서도 가지고 갈 것같이 집착을 보이지요.

 

*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아보세요. 그것처럼 편하고, 쉬운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 세계가 순식간에 극락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성자의 안목에서 본다면 당체즉공이기 때문에 이 세계 그대로가 모두 공입니다. 공의 알맹이가 무엇인가, 그 실체가 무엇인가, 바로 불성이란 말입니다. 광명 찬란한 불성이 이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 지금은 모양으로 살지만 몇 억겁 뒤에는 우주의 법에 따라 모두 파괴소멸 됩니다. 따라서 그러한 참담한 재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정진해 그전에 해탈의 자리에 올라야 합니다. 다행히 부처님법은 대자대비한 법이기 때문에 우리 중생이 차근차근 공부해서 모두 천상에 올라간 후에 파괴가 됩니다. 기독교의 최후의 심판과 같이 비극적인 최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파괴가 된 다음에는 다 텅텅 빈 공무변이라, 거기에는 마음만 있는, 식만 존재하는 중생만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우주가 텅 빈 데서 모양이 이뤄집니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부처님 말씀입니다.

 

* 위대한 철인도 학자도 결국에는 부처님 법으로 회귀하고 있습니다. 현대물리학자도 점차로 증명해가고 있어요. 불교는 가장 투철한 과학인 동시에 가장 궁극적인 철학, 영생해탈의 종교입니다. 해탈의 길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세간법을 지양하고 제법이 비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음을 가다듬어서 내 행복을 위해서나, 우리 민족의 웅비를 위해서나, 지금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난국 극복을 위해서나 어렵고 힘들수록 부처님 가르침을 지극하게 따라야 합니다. 부처님 말씀은 마음법 뿐 아니라 우리 몸에도 제일 좋은 묘방입니다.

 

*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요, 과학 없는 종교는 맹인이다.” 이 말은 아인슈타인의 말입니다. 우리가 종교를 믿더라도 합리적인 도리에 입각하여 믿어야 하지, 불합리한데도 분별없이 전통적인 권위나 인습적인 법집(法執)을 답습한다면 참다운 종교가 못됩니다. 아집 법집을 여의는 것이 참다운 과학이요 진정한 종교입니다. 이런 과학정신이 기본이 되어서 현대물리학이 나온 것 아닙니까? 또 아인슈타인은 “우주적 종교성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종교는 불교다. 또한 현대과학이 결(缺)하고 있는 것을 메워 주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불교다”고 말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불교를 진정으로 아는 분이라고 봅니다. 우주과학시대의 종교는 철학을 날줄로, 과학을 씨줄로 서로 보완하고 조화하는 체계가 되어야 합니다.

 

* 신심(信心)은 마음을 활짝 열고 천지와 내가 둘이 아니고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반야지혜를 믿는 것입니다. 물질은 곧 의식이요 생명이므로 지구도 태양도 다 같은 생명이며 태양은 관음보살의 화신이요, 또 대세지보살과 문수보살은 지혜의 화신입니다. 그리고 지구는 이대로 바로 지장보살입니다. 우리는 이제 부처님의 광대무변한 가르침을 조그마한 자기 생각으로 좁혀서는 안 됩니다. 원융무애한 생명을 구분 짓고 가로막는 망념을 털어버려야 합니다. 삼천대천세계가 바로 부처님이거니 오척 남짓한 이 몸뚱이에 들어 있는 의식만 생명이 아니라 산하대지 두두물물이 한결같이 다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못 열려서 나로 보이고 너로 보이고 남으로 보이고, 그 무엇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 우리 중생들은 현상적인 모양[相]만 보기 때문에 그 모양만 실상 실재인 것이고 다른 것은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인간을 보세요. 남자 같이 생기고, 또는 여자 같이 생기고, 잘 나고 못나고 하는 그런 현상적인 상만 사실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자의 밝은 지혜로 볼 때는 사실 그런 상은 허망한 것입니다. 그런 상은 본래 있지도 않은 것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번뇌에 가리어서 없는 것을 있다고 봅니다. 현상적인 모든 것은 사실상 허망 무상한 것입니다. 고유한 것은 절대로 없습니다. 상대유한적인 인간의 업장으로 갇혀있을 뿐입니다.

 

* 생명은 어떻게 생긴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본래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무슨 모양이 있습니까? 자취가 없습니다. 사람의 생명도 자취가 없고 개나 소나 돼지나 그러한 다른 동물의 생명도 자취가 없습니다. 나무 같은 상, 풀 같은 상만 우리 중생의 제한 된 안목에서 보이는 것이지 그러한 나무나 풀도 역시 생명자체는 조금도 자취가 없습니다. 그러나 근본 생명자체는 우리 인간의 몸속의 심장에나 또는 뇌 속에만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 몸 전체에 생명이 가득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산이나 물이나 흙이나 모두가 다 생명이 거기에 충만해 있습니다. 이 공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생명이라 하는 우주의 실상 그 생명은 바로 우주에 끝도 가도 없이 충만해 있습니다. 무량무변하게 충만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주라는 것은 사실 생명뿐인 것입니다. 때문에 내 생명 네 생명이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김 아무개한테 있는 생명이나 박 아무개한테 있는 생명이나 똑 같은 생명입니다.

 

* 생명은 우리의 마음이요 중생이요 부처입니다.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이라, 우리마음이나 중생이나 또는 부처나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입니다. 하나의 생명 이것은 무슨 원리나 또는 가치나 그런 것에 머물지 않고 하나의 인격이기 때문에 부처님 그럽니다. 따라서 천지우주가 오직 동일한 생명이므로 성품은 모두 같은 부처님입니다. 이렇게 알아야 참다운 불자이며 최상의 공덕인 것입니다. 우리 생명, 우리 마음은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는 자리입니다. 우리 생명에는 자비나 지혜나 일체 공덕이 다 들어 있습니다. 행복도 들어 있습니다.

 

* 우리 중생의 허물이 무엇인가 하면 모양 이것은 가짜이고 허망한데 그것을 구하다가 우리 소중한 인생을 다 결단 내버리는 것입니다. 좋은 집에 살면 그것이 얼마나 오래 살겠습니까? 부자면 부자 된 만큼, 감투가 높으면 높은 만큼 공부에는 손해입니다. 또 중생의 망상 가운데 주의할 것은 무슨 일을 했으면, 자기 능력으로 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연이 합해서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이지 어느 개인의 개별적인 자기 능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관자는 있습니다. 인연이 합해지면 잠시간 무엇으로 이루어지고 인연화합이 안 되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뿐인 것이지요.

 

* 천도의식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부처님 당시부터 내려온 것입니다. 생명은 본래 부처이고 부처로 되어야 합니다. 설사 어떤 상황이라도 부처가 됩니다. 그런데 극락세계 가는 것을 모르고 죽은 사람은 저승길이 어두워 헤매게 됩니다. 금생 육칠십년 동안을 몸뚱이와 의식을 같이해 살았을 때 닦았으면, 본래적인 마음과 하나면 우주와 화합돼 극락에 갈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미처 업을 못 녹인 습관성으로 업식이 남아 있습니다. 업식이 당분간 존재하면 괴롭습니다. 개나 돼지 등 짐승처럼 생활하면 업식이 흘러 그대로 갑니다. 그래서 그 업식으로 헤매는 영혼을 타일러서 인도하는 것이 천도의식입니다. 금생에 못 닦은 미혹된 영혼을 천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귀신을 천도하는 데는 청정도량인 절에서 바른 계행으로 조심조심 청정히 하는 것이 의의가 큽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절에서 하는 것으로 한정할 수는 없습니다. 집에서 고인의 위패를 적고 향을 피운 뒤 업식을 소청해도 좋습니다. “영가시여 부처님 가피력으로 나오라”고해서 ‘반야심경’ ‘법성게’ 등을 독송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영가들에게 인연생으로 왔다가 인연생으로 간 것이기에, 따라서 누구도 원망해서는 갈 곳을 못 간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극락세계에 왕생하도록 독경하는 것입니다.

 

* 승가생활,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는 인간의 진정한 생활 표본입니다. 승가생활의 근본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무아 무소유생활 아니겠습니까? 달마스님 때부터 육조 혜능스님 때까지를 순수한 선시대 이른바 순선시대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때의 법문을 가장 중요한 권위로 의지 안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안심법문입니다. 이 가르침을 선양하고 진작시키는 것입니다. 마음을 편안히 하는 것은, 우주의 도리대로 본래 내가 없는 무아이기 때문에 내가 없다고 분명히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선 내 집이나 내 소유물이나 내 절이나 내 종단이나 이런 것도 본래가 없다고 생각해 버리면 참 편합니다. 자기 문중이나 절 때문에 애쓰고 싸울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승단이 바르게 서고 이 법향이 세계로 퍼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 참선수행도 한국불교 교단사를 돌아보면 교학을 가르쳐서 선(禪)의 갈래 즉 깊고 얕음을 안후에 참선을 시켰습니다. 교에 따라 원만하고 합리적인 도리에 따라 실천했던 것입니다. 간화선만이 최고라는 바짝 마른 논리는 위험한 일입니다. 간화선이 한국불교에 수승한 위치로 훌륭한 참선수행법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짚어보면, 임제종 간화선은 종파분별이 극에 달했던 중국 송나라 때 분열상의 한 종파로서 고려 말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후 조선조 배불정책으로 더 이상 중국과의 교류가 단절된 채 오늘날까지 내려온 참선법입니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원나라를 거쳐 수백 년을 각기 소견으로 분열되다가 마침내 명나라 때 가서 하나의 도로 종합되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간화선 묵조선 염불선 등은 고하가 있는 것도 아니요, 우열이 있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다만, 어떻게 하는가 하는 그 자세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가 본래적인 자세만 여의지 않고 본체를 여의지 않을 때는 다 그대로 수승한 대승법이요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 달마스님 때부터 육조까지는 이런 이름도 없이 오로지 마음공부만 했습니다. 부처님 법을 범부소견으로 무엇이 옳네 그르네 하는 것이 아닙니다.

 

* 현대 불자들에게 가장 부족한 점은 삼매에 못 드는 것입니다. 이는 불자가 아니더라도 현대인들에게 다 해당된다고 보겠습니다. 현실이 바쁘고 복잡하지만, 반드시 가야하고 또한 자신도 모르게 가게 되는 것이 성불입니다. 더디고 빠른 차이가 있을 뿐이지 꼭 성불하게 됩니다. 세상을 돌아보면 전쟁 지진 등 별별 일이 다 일어나도 차츰 좋은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언젠가는 다다르게 되는 성불의 길에 가장 지름길이 참선입니다. 유일한 법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참선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수행에 진전이 없는 것은 삼매에 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깊은 명상에 들어야 욕계가 보이고 초월하게 됩니다. 탁수(濁水)를 가만히 두면 맑은 물만 뜨는 이치와 같습니다. 고요히 맑히고 또 맑히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