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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2. 진리의 길

진리의 길 2권 3. 삼매로 습기 녹여야 무량공덕이 나옵니다.(3)

 

 

* 우리 인간이 지켜야 할 도덕률 가운데 부처님이 설하신 계율같이 합리적인 것은 없습니다. 계율은 사회생활에서 꼭 지켜야 할 우주의 질서입니다. 유교의 인의예지신이나,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십계명, 그러한 세계 종교의 우수한 도덕률도 다 불교의 계율에 들어있습니다. 계율만 제대로 지키면 자연적으로 우리의 마음도 편해지고 주위도 편해집니다. 우리가 참선 염불을 해서 깊은 명상에 들어가려 하더라도 계율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명상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흉내만 낼뿐이지 마음이 정화가 안 됩니다. 명상이라는 것은 마음의 정화를 도모하는 것인데 계율이 밑받침이 안 되면 명상을 해서 이루는 마음정화는 올 수가 없지요.

 

* 참다운 지혜는 반야의 지혜입니다. 세속적인 분별지혜, 차별적인 지혜, 이런 것은 우리 인간의식의 범위 내에서 분별하는 것이지, 초월적인 모든 존재 본질의 지혜는 못됩니다. 따라서 좀 재주가 있고, 학문적인 수련이 깊어서 분별적인 지혜는 어느 정도 익힌다 하더라도, 이른바 분별을 떠난 현상적인 문제라든가 초월적인 문제를 통틀어서 제일의 것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반야바라밀입니다.

 

*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른바 무위법입니다. 또는 무루법이라고도 합니다. 무위법은 인연사이의 모양이 아닌 그 모양을 지양한 생명자체의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것을 다른 종교의 교조가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부처님처럼 명확히 구분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가령 우리가 어느 누구에게 물질이라든가 여러 가지 것을 보시도 하고, 봉사활동을 한다고 합시다. 하지만 유위법의 범위 내에서는 나라는 관념과 너라는 관념을 떠날 수 없고, 내가 물질을 많이 보시한다, 적게 보시한다는 그러한 상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 우리는, 해탈이라는 불교의 궁극적인 도리, 동시에 우리 인간의 본래적인 도리에 대해서는 상당히 미흡합니다. 상을 떠나는 행위 이것은 그 생각으로나 행위로나 참다운 자유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을 보시한다 하더라도 상을 떠나서 행해야 그것이 도업이 됩니다. 우리 불자들은 도업과 세간에서 착한 일을 해서 쌓는 선업에 대한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중생이 하는 것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선업입니다. 욕계 천상 무색계와 같은 곳에 가는 것은 선업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나 선업만으로는 우리의 번뇌를 모조리 소멸시켜서 영생해탈로 나아가게 할 수 없습니다. 욕계를 초월하고, 색계를 초월하고, 또 무색계를 초월하고, 천상도 다 초월해서 정말로 대 자유인, 참다운 자기인 대아, 진아의 존재까지 올라가기 위해서는 도업을 쌓아야 합니다.

 

* 부처님 가르침은 참다운 해탈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해탈은커녕, 아직 선업도 못 닦은 이가 많은 것을 볼 때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더라도 절대로 비관할 것이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 세속적인 생활을 하고 있고, 인간의 몸으로 욕계의 굴레 가운데 있더라도 우리의 불성 자체는 조금도 오염되지 않았습니다. 다라서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달마대사와 같은 도인들과 비교하더라도 우리 마음자리만은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 불지에 오른 유마거사의 말씀을 모은 유마경 가운데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 상수제자인 사리불 목건련을 위시해서 삼십이 아라한에게 유마거사가 설한 법문입니다. 둘이 아닌 그런 수승한 법에 들어가는 법문입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가 둘이나 셋이나 이원론도 삼원론도 아니고 오직 일원론이라는 말입니다. 일원론은 나나 너나 달마 석가 우리 모두가 본체에 있어서는 아무 차이도 없다는 것이지요. 다만 현상에서 차이가 날 뿐입니다.

 

* 나 같은 중생과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이 왜 차이가 없다는 것일까 하고 의심을 품는 분도 계시겠지요. 차이가 있는 모양에서 의심을 품을 수는 있습니다. 불교말로 구체화하면 나라는 상, 너라는 상, 또는 중생이라는 상, 또는 우리 수명이나 시간이 짧다고 하는 상을 떠나버린 경지에서 본다고 할 것 같으면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 상을 어떻게 여읠 것인가? 상을 여의는 법문이 바로 유마거사의 입불이법문입니다.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하나라는 것입니다. 중생과 성자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성자는 모든 것을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데, 중생들은 천차만별로, 모든 것을 업장이라는 안경을 쓰고 본다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중생은 평생 분별합니다.

 

* 요즘같이 정보가 홍수처럼 몰려들 때는 상당히 편리한 점도 있으나, 우리 불자들의 수행에는 걸림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데, 정보화시대의 정보라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합니까. 컴퓨터는 문명의 이기임에는 틀림없이 물질적인 편리함을 줄 수는 있어도, 우리 생명자체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 인류가 점차 발전되어 간다고 사람들이 말을 합니다. 사는 모양은 좀 발달돼 가겠지요. 그러나 정작 우리 마음으로 봐서는 발달은커녕 점점 퇴화한다고 봐야합니다. 육십억 인구가 사는 이 지구상에 참다운 성자가 몇이나 있을 것인가? 하고 생각할 때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불자들은 겉을 꾸미는데 집착하지 말고, 속절있게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상에 끄달려 행하는 모든 것은 부처님 법을 자기 것으로 하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이른바 상을 떠나버린 모두를 하나의 생명으로 본다는 것은 그냥 하나의 생명으로 본다는 것이 아니라 우주만유의 본체인 불심(佛心)을 깨닫는 것을 뜻합니다.

 

* 상으로 보아서는 제 아무리 많은 현상이 있다고 하더라도, 근본자리에서는 모두가 다 하나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근본자리와 현상의 것을 물과 물결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근본자리는 물에, 현상적인 문제는 바람 따라 일어나는 파도에 빗댄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을 보지 못한 채 업장의 현상만 볼 뿐 나의 본질도 너의 본질도 못 보고, 만유의 본질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뿐 아니라 식물 동물 모든 두두물물의 본바탕이 바로 불심이고, 일체존재의 본질이기에 불성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법성·실상·도·열반·여래장 등도 같은 뜻입니다. 표현은 비록 다르더라도 근본은 똑같습니다. 모두가 하나라는 것은 불심자리, 불성자리에서 하나라는 것입니다.

 

* 성자는 그 자리가 하나 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은 아직 그 자리가 보이지도 않습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부처님 같은 성자들의 가르침이 있기에 마음의 본질이 불심임을 믿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 지금 우리 한국은 여러모로 어려운 시기에 처해 있습니다. 고민도 많이 하고, 더러는 비극적인 일들도 많이 생깁니다. 나 또한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특히 미국에 있으면서 한국에서 보시를 해주신 그런 분들에게는 더욱 더 가슴 아프고, 죄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원인이 어디에 있는 걸까요?

 

* 경제학자, 철학자들이 나름대로 분석을 내놓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사람이 자기의 본바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도 알 턱이 없습니다. 세속적인 말로 철학의 빈곤입니다. 철학이 없습니다. 칸트, 니체 이런 것에 박식하다고 철학이 아닙니다. 일체존재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철학입니다.

 

* 우리가 아무리 불경을 통달하라 정도로 외우더라도 그 본질 자리를 알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 요즘 나라경제나 개인 경제나 모두 거품을 걷으라고들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중생 모두가 거품을 가지고 삽니다. 아무리 금붙이를 많이 지녔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림자에 그림자를 붙인 것입니다. 마음 찾기에는 하등 도움이 안 됩니다. 일체 물질이 사실은 텅텅 빈 것입니다. 반야심경에 왜 ‘색즉시공’이라 했을까요? 물질 그대로가 공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자 같이 물질을 분석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당체즉공이고, 삼계유심입니다. 중생이 생사윤회 하는 모든 세계인 삼계에 오직 마음뿐이란 말입니다. 마음이란 것은 순수생명입니다. 순수생명 외에 다른 것은 모두가 헛것이라는 겁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도리가 모두 이런 도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