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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2. 진리의 길

진리의길. 10(2)


 

 

 

* 인간이 자기라는 에고나 소유를 주장하지 않고서 생활한다면, 부조리가 생겨날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자기라는 에고가 생기면, 거기에 내 남편, 내 아내, 내 재산, 내 영역이 따르겠지요. 그래서 철학이란 것은 철저하게 사유해야 합니다. 끝까지 투철하게 사유해 나가야, 이른바 인생과 우주의 본바탕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본래적인 본 바탕을 안다고 할 때는, 결국 무아를 체험한 것입니다.

 

* 기독교와 불교와 이슬람교의 어떤 종교도 별도로 따로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하나기 때문에, 종교도 하나입니다. 진리는 하나기 때문에, 종교도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신학 체계를 세운 초기의 아우구스티누스, 그 다음에 구세기에 나온 에리유게나나, 십사세기에 나온 에크하르트나 또는 십삼세기에 나온 토마스 아퀴나스나, 니콜라우스 쿠사누스 등등 이런 분들이 세운 종교나 철학의 체계는 불교와 같습니다.

 

* 모든 성자나 철학자들은 각기 별도의 진리 체계를 세운 것이 아닙니다. 똑같은 동일률同一律이라, 하나의 진리에서 온 일체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모두가 하나요, 일원적 존재요, 진리입니다.

 

* 깊이 사유해 보면, 눈에 보이는 것은 허상이기 때문에, 진리의 자리는 하나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철학적인 깊은 사유가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노파심에서 자꾸 반복합니다마는, 순수 사유를 해서 자기라는 것이 원래 허망한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 우리는 실재와 실재 아닌 것을 명확히 구별해야 합니다. 진리라는 것은 결국 하나의 진리인데, 하나의 진리는 아까 파르메니데스도 말했습니다마는, ‘존재하는 것’, ‘있는 것’은 오직 하나일 뿐이란 말입니다.

 

* 실상은 하나일 뿐입니다. 실상은 모두가 다 하나이고,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다 가상에 불과합니다.

 

* 가상假相과 실상實相을 철학적 사유를 통해서 분명하고 철저하게 구분한 다음에, 자기 스스로도 본래가 무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무아라는 것은 아시는 바와 같이, 불교에서 말하는 “내가 없다”는 무아 아니겠습니까? 어째서 내가 없는가 생각할 때, 모든 것을 철저히 사유해나가면, 나라는 것이 어디에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잘못 생각하고 미지근하게 생각하니까 내가 있는 것이지, 깊이 생각하면 현상적인 문제는 사실 꿈같은 것입니다. 허상입니다.

 

* 우리가 허상을 떨쳐 버릴 수 있는 데까지 사유를 철저화해야 합니다. 그 다음은 우리가 초월하기 위해서 명상을 해야 합니다. 초월이 안되면 범부성을 초월할 수가 없습니다. 또 초월이 안되면 실상을 파악하지 못하는 셈이 됩니다. 또 실상을 파악하지 못하면, 우리는 언제나 시간성과 공간성과 인과율에 제약을 받습니다. 초월하는 길이 명상법인데, 명상법은 여러 가지 다른 법도 많이 있지만, 철학도들도 명상법은 꼭 불교의 것을 참고로 하셔야 합니다.

 

* 불교의 명상법은 우리 범부 중생이 부처가 되어 가는, 성자가 되어 가는 법을 소상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구차제정九次第定이 있습니다. 구차제정은 아홉 단계로 우리의 사유 체계와 명상이 올라가는 단계를 말한 것인데, 단계단계 올라가면 성자의 지위인 아라한도에 들어가 초월적인 기적을 낼 수가 있습니다.

 

*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의 경전을 보면, 초월적인 기적을 낸 분들이 한두 분이 아닙니다. 중세에 있어서도 진묵대사나 그런 분들은 상당한 기적을 드러냈습니다. 서산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또는 신라 때 원효 스님은 더욱 그랬습니다.

 

* 우리가 깊은 삼매에 들어서 우리 스스로의 본래적인 인간성이 갖추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드러내려고 생각한다면, 누구나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런 기적을 부사의한 것이고 신화적인 것이라 생각하나, 신화도 기적도 아닙니다. 누구나 꼭 할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입니다. 계발만 하면 됩니다.

 

* 현대에 있어서 인간의 한계상황을 놓고 불안한 고민도 합니다마는 한계상황을 넘어가면 길이 분명히 있습니다. 다만 그런 길을 가지 못할 뿐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저도 제대로 갔다면 그런 초월적인 가능성을 만들 수 있을 텐데, 제대로 못했다는 것을 참괴합니다.

 

* 인간 자체가 본래적으로 무한을 구하고 영원을 구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바와 같이, 유한자가 무한을 구하고, 또는 시간적인 존재가 영원을 구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 우리 인간은 본래적으로 영원성을 갖추고 있어서, 무한과 절대와 영원을 구하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있는데도 이것을 구하지 말라고 막을 수가 없습니다. 보다 더 그것을 증장시키고 더 깊이 탐구해 성취하도록 권장해야겠지요. 그렇게 하려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철저하게 순수 사유를 해야 합니다.

 

* 에리유게나나 엠페도크레스라든가 그런 분들같이, 다른 찌꺼기는 다 털어버리고 순수성만 남을 수 있도록 저 바탕까지 깊이 사유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도덕적인 결단을 내려서 계율을 잘 지켜야 합니다.

 

* 몸이 부도덕한 사람은 삼매나 깊은 명상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철저히 도덕적인 행동이 꼭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깊은 삼매에 들어가고자 생각한다면, 남녀 관계도 역시 절제를 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남녀 성 문제를 초월하지 못하면 명상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어느 한계에서 머물러 버려, 절대로 온전한 초월을 못합니다.

 

* 음식 문제, 남녀이성 문제 이런 문제를 초월할 수 있는 자아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철학자는 단순히 교육적으로 훌륭한 체계를 세워야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선 도덕적으로 하자 없는 인격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깊은 명상을 해야 합니다. 그 명상은 불교적인 것이 표준적인 명상법입니다.

 

* 구차제정, 즉 아홉 단계를 밟아서 올라가면 차근차근 정화가 되어서, 마지막에 우리 범부성을 초월해서 영원한 자유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결국 성자가 됩니다. 어느 누구나가 성자가 되는 것이 철학이나 종교의 구경적인 목적이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이 한도 끝도 없는 가능성이 원래 있는 것이므로, 다만 거기에 가기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가 관건인 것입니다. 그것은 철저한 순수 사유를 통해 과거 전생부터 무수생 동안에 우리 몸이나 마음에 오염된 것을 씻어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상당한 기간 동안 명상에 잠겨야 됩니다.

 

* 더러는 십년 명상에 잠기기도 하고 삼십년을 명상에 잠기기도 합니다. 또 저와 같이 팔십이 가까워져도 미처 다 끝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대로 잘 못해서 그렇습니다. 물론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충분히 있습니다. 스스로의 행복이나 무슨 문제도 결국 개별적인 인격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의 인격자로서 투철하게 깊은 생각을 해서 정당한 진리까지 순화시키고, 다음에는 도덕적인 결단으로 초월하면 되는 것입니다.

 

* 야스퍼스나 하이데거나 베르그송이나 그런 분들도 차원만 좀 다르지, 읽어 보면 모두 그런 뜻입니다.

 

* 오늘 모이신 철학자나 석학들께서 이런 문제에 대해서 깊이 있게 연구하신 만큼, 훌륭한 지침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오로지 하나의 수행자 입장에서, 종교와 철학이 절대로 둘이 아닌 하나가 되어서, 종교는 종교대로 실천적인 면을 맡아야 할 것이고, 철학은 철학대로 실천을 바르게 하도록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는 생각을 강조할 뿐입니다. 우리 서로 상호적으로 혼연일체가 되어 인간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십시다.

 

[2001년 5월, 국제철학대회 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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