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4. 청화 큰스님 법문집/12. 진리의 길

진리의길.10 (1)


종교와 철학은 하나다

 

 

* 종교와 철학은 같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와 철학이 분리되면 큰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철학이 분명치 못한 종교는 맹신에 빠지기 쉽고 신앙에 깊이가 없으며, 바른 신앙이 될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대 인간 사회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불행과 부조리는 어디서 연원되는 것입니까? 각기 견해가 다르겠지마는, 인간성 문제에 대한 불철저한 인식에서 온다고 생각이 됩니다.

 

* 옛날 그리스에서부터 이루어진 인간의 여러 가지 순수 사유 문제를 생각해 보더라도, 보다 철저하고 깊이 있는 사유를 했더라면, 모든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도출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철저한 사유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즉 순수 사고가 부족했기 때문에, 이론적이고 지엽적인 것에 그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 서기 전 오백사십년 경에 살았던 그리스의 파르메니데스라는 철학자를 생각하곤 합니다. 그이는 이른바 진리에 대한 사유와 진리가 아닌 일반적인 사유를 구분하고, 참다운 것은 ‘오직 하나’가 있을 뿐이다고 말했습니다. 그 ‘하나’라는 것은 사실로 존재하는 ‘유有’로서, 그 ‘하나’라는 ‘유’는 그 존재가 영원 불멸하고 불가분이며, 무시무종으로 영구히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또 그것만이 우주에 존재하는 참다운 실존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당시에 파르메니데스는 헤라클레이토스하고도 거의 같은 시대 사람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하는 동적인 것에 관심을 두었지마는, 그분도 역시 참다운 것은 로고스, 우주의 참다운 이성, 참다운 진리에 따라서 행동하고 사유해야 된다고 역설했기 때문에 ‘헤라클레이토스’나 ‘프라메니데스’나 별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 우리가 이성을 일백퍼센트 활용해서 바르게 생각한다면, 부당한 것, 필요없는 것은 자연적으로 제거됩니다. 그렇지 못하고 미온적이고 애매모호한 사유 때문에 부당한 것을 우리 스스로 생각하게 되면, 사회적으로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 철저히 사유하면 존재하는 것은 모두가 “하나의 진리뿐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불철저한 사고 때문에, 상대적이고 연기법적인 사고를 하게 됩니다. 그런 상대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을 때는 현상적인 것은 모두 허망 무상한 것입니다. 따라서 현상적인 것은 조건부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실존적인 것이 아니라는 해답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철저하고 올바른 순수 사고를 한다면, 오직 존재하는 것은 참다운 것 ‘하나 뿐’ 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철학적 사고라고 생각합니다.

 

* 일반 사람들은, 우리의 실존적인 삶에서 초월적인 면을 너무 소홀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고와 함께 초월적인 면을 아우르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의 실상도 파악할 수 없음과 동시에, 사회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근원적인 것을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 우리가 인간적인 모순 현상을 지적합니다마는, 그것은 우리 사유체계가 불철저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다시 부당한 것을 되풀이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깊이 생각하고 철저하게 사유한다면, 마땅히 바로 불수가 있고, 바로 볼 수 있으면 자기라는 개인적인 에고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지엽적인 문제에서 멈춰 버리기 때문에, 근원적인 사고가 안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근원적인 사고를 어느 정도 깊이 한다고 하더라도, 실천면에서 제대로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 우리가 명상을 한다고 하더라도 보통 차원에서 그쳐 버리면, 자기 실상도 깨달을 수가 없고 우주의 실존 문제에 대한 해답도 얻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바른 사유를 한다면, 실천면에서 깊이깊이 따지고 들어가야 할텐데, 그러지 못하고 미온적으로 어물거립니다. 그래서 이론적인 사유 체계도 상식적인 분야에 그쳐 버립니다. 실천적인 면도 불철저해서, 자연히 모든 면에서 바른 해답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도 자기 불안 의식을 해소할 수도 없으며, 만연된 사회의 부당한 부조리도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때, 한낱 현상적인 것에 우리 사고를 낭비하지 말고, 근원적인 문제에 관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상적인 것, 현상적인 것, 그때그때 있다가 없어지는 것에 대하여 정확한 판단을 내렸을 때, 실천적으로 자기 초월을 해야 합니다. 그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종교와 철학은 서로 상호보완적인 동시에, 더 나아가서 일치가 되어야 합니다.

 

* 우리는 달마스님 같은 분들이 문자를 세우지 않고 그저 명상만 하는 도인으로 생각합니다마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스님도 정확한 교리 체계를 앞세운 후에 소림사에서 구년 동안 벽만 바라보고서 명상했다는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달마스님을 신봉하는 불교일반론에 배치가 되겠지요.

 

* 불교 자체가 어디까지나 신앙과 교리 체계인 철학과 아울러서 있는 것이며, 비단 불교뿐만 아니라 서구사상에서도 실천과 교리가 아울러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가령 기독교의 에리유게나라는 신학자도 위대한 분이지만, 역시 이성과 신앙 문제 즉 철학과 종교 문제를 ‘일치한다’는 관점에서 보았습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종교도 살 수 있는 것이고 철학도 살 수가 있습니다.

 

* 철학이 종교적인 실천면을 소홀히 하면, 사실은 철학이 이론적 사변에 그쳐 버리면, 참다운 철학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마땅히 현대에 와서도 여러 가지 지적들을 하지마는, 모두가 이론적인 것이 불철저하고, 동시에 그것에 실천적인 면이 따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 실존철학만 보더라도, 야스퍼스나 하이데거 같은 분들이 여러 가지 심오한 철학 체계를 세웠습니다. 그분들이 자기자신의 한계상황을 어떻게 초월할 것인가의 문제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미흡하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나날이 자기 개조를 하고, 나날이 변신해 가는 자기 초월의 문제는 철학에 있어서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을 소홀히 해 버리면, 철학은 철학대로 교리敎理만 분석하고 교리만 따지는 것이 될 것이고, 또 종교는 철학이라는 체계가 없어지면 엉뚱한 미신같은 맹신 쪽으로 흘러갈 수도 있겠지요. 마땅히 철두철미하게 사유를 해야 합니다.

 

* 철두철미한 사유는 그것이 바른 사유가 되기 때문에, 철두철미한 사유를 하는 사람은 자기 개인적인 에고는 저절로 끊어집니다. 왜냐하면, 철두철미하게 생각하면 자기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연기법緣起法이기 때문에 자기 몸뚱이든, 자기의 개념적 사고든, 모두 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깊이 생각해 보면, 자기라는 고집이나 법집法執을 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철저한 순수 사유로 해서 모든 사태를 바르게 보고, 동시에 바라본 그 자리에서 철저한 실천이 뒤따라야 합니다.

 

*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석가모님 부처님 당시에 ‘다라표’라고 하는 위대한 승려가 있었습니다. 다라표는 머리가 총명할 뿐만 아니라 정진력도 굉장히 투철한 분이어서, 십사세에 출가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 년 동안 용맹정진을 해서 십육세에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성취했습니다. 아라한과는 아시는 분은 아시겠습니다마는, 불교에서 공부하는 모든 과정과 명상 과정을 거쳐서 삼명육통三明六通을 했다는 말입니다. 삼명육통은 과거에도 통달하고 미래도 비추어 보고, 또 자기 번뇌의 뿌리를 뽑아 버렸을 때에 얻습니다.

 

* 아라한과는 기적적인 지혜입니다. 자기 공부는 다 했으니까, 다라표 스님은 봉사할 것을 자원했습니다. 손님들이 오면 손님들을 바라지하는 심부름꾼으로 자처했습니다. 전기가 없는 때라, 밤에 손님이 오면 촛불 등으로 불을 밝혀야 했습니다. 그러나 신통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화광삼매火光三昧라, 몸에서 불을 내는 삼매를 내가지고, 왼손으로 불을 비추면서 오른손으로는 이리저리 가리켜서 지도했습니다.

 

* 삼매를 닦아서 초월해 버리는, 우리 인간의 번뇌성을 초월해 버리는 그런 단계에 이른 분들은, 단지 다라표 스님만 아니라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같은 수행자도 공부를 잘 했으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인데, 사실은 제대로 하지 못해서 그렇지, 본래 못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정진력이 부족해서 여실히 못 닦아서 그렇지, 원래 못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 우리 인간성은 아라한도를 성취하면, 누구나 다 삼명육통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성은 정말로 끝도 가도 없는 무한한 가능성을 갖춘 것인데, 중생들은 아라한도를 성취할 만하게 제대로 닦지를 못할 뿐입니다.

 

* 제대로 닦는 길을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우선 철저하게 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이른바 도덕으로 하자가 없는 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계율 가운데서도 특히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음식을 함부로 먹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리生理와 심리心理가 본래 둘이 아니라서 서로 상응하기 때문에, 음식을 함부로 먹으면 우리 마음도 흐리멍덩할 뿐만 아니라, 우리 몸도 오염이 됩니다. 그래서 철저한 계율로 해서 준비 작업을 하고, 그 다음에는 불교말로 하면 삼마지三摩地라, 삼매三昧에 들어야 합니다.

 

* 삼매라는 것은 명상을 말합니다. 보통 명상은 삼마지, 삼매라고 못합니다. 초보적인 위빠사나나 관조하는 초보적인 명상을 해서, 우리 마음이 분열되지 않는 오직 일념으로 흘러가는 것을 삼매라고 하지요. 삼매에 들어야 비로소 자기를 초월합니다.

 

* 삼매에 온전히 들어서 삼매를 성취해야 자기를 초월해 성자가 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특수한 사람만 성자가 되는 것으로 생각할는지 모르나, 옛날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같은 분도 성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소크라테스는 길을 가다가도 가만히 서서 엑스타시스라, 명상에 잠기고 망아忘我적인, 자기를 잊어 버리고 자기를 초월하는 경지에 들어갔습니다.

 

* 깊은 사유를 하면, 모든 것이 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졌기 때문에, 내 관념이든 내 몸뚱이든 눈에 보이는 현상계는 결국 자기라고 고집할 것도 없고, 자기 소유를 주장할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4. 청화 큰스님 법문집 > 12. 진리의 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리의 길. 11(1)  (0) 2015.03.23
진리의길. 10(2)  (0) 2015.03.16
진리의 길.9  (0) 2015.03.02
진리의 길.8  (0) 2015.02.23
진리의 길.7  (0) 2015.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