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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3. 수행자료

현장스님의 염불선.4

佛日會報 서기 1989년 10월 1일 제 109호

 

염불선④

부처의 눈으로 바라보라

玄藏/ 송광사 스님

 

 

1. 아미타불에 대해서

부처님께서 성도 후에 고향인 카필라성에 돌아왔을 때 상서로운 광명이 온누리에 뻗치어 정반왕을 비롯한 모든 대중들을 환희에 넘치게 하였다. 이때 정반왕이 부처님께 물었다.

“이제 부처님이 되어 그 광명이 이렇듯 형언할 수 없이 장엄하거니와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에 말세 중생들은 어떻게 부처님의 한량없는 광명을 알 수가 있으리요. 원컨대 세존께서는 나와 여러 중생들을 위하여 자세히 말씀하여 주소서.”

 

이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부처가 열반에 든 후에 중생들이 애써 죄악을 멀리하고 생각을 오롯이 하여 한량없는 부처의 광명을 생각한다면 부처가 생존해 있지 않더라도 부처를 보는 것이 될 것이며 필경에는 반드시 위없는 진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같은 가르침에 의거해 대승불교시대의 불교인들은 역사적 인물인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한 열망과 이미 세상에 안 계신 부처님에게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한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광명을 인격화하여 ‘아미타불’이라고 하였다. 아미타불의 원어를 살펴보면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아미타바(Amitabha): 무한한 광명〔無量光佛〕 둘째, 아미타유스(Amitayus): 영원한 생명〔無量壽佛〕 영원한 생명은 영원한 시간과 자비를 상징하고 무한한 광명은 무한한 공간과 지혜를 상징한다. 또한 아미타불이 성불이전 법장(法藏) 보살 때 세운 48원은 모든 부처님의 서원이고 우주자체의 목적의식을 나타낸다.

법장(法藏)이란 이름도 모든 법과 진리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닌 자기 내면에 부족함없이 구족한 것을 상징한다. 아미타불 48원이야말로 사홍서원의 구체적 표현이요, 우주가 진화해 가는 우주 자체의 우주계획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은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모습으로 비춰진다. 망원경으로 사물을 보면 크게 보인다. X-레이로 보면 해골과 뼈만 보인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일 것이다. 물리학자들이 전자 현미경을 통해 물질의 구성단위인 원자를 관찰하면 텅 빈 공간에 전자의 움직임을 볼 것이다. 이 원자의 집합인 물질을 물질 그대로 비어있음〔空〕으로, 찰나도 멈추지 않고 변화하는 상태로 〔無常〕, 내세울만한 실체가 없음으로 〔無我〕파악할 것이다. 부처님의 청정한 안목으로 세상을 보면 유정무정 모든 존재들인 한결같이 청정미묘하고 영생불멸하는 생명의 광명〔佛性〕으로 보일 것이다. 부처님의 눈으로 보는 세계, 그것이 바로 우주와 생명의 실상이요, 바로 아미타불의 세계인 것이다.

 

아미타불과 염불선의 신앙과 수행은 새로운 형태가 아닌 바로 부처님에게로 다시 돌아가는 최상의 수행이다. 부처님의 견해를 나의 견해로 하고 궁극적이고 이상적인 인격으로서의 부처님에게 절대적으로 귀의하여 자아의식을 던져버리고 우주의식과 하나가 된다. 그것은 중생심을 떨쳐 버리고 불심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여기 염불선의 이치를 노래한 글이 있다.

「오직 몸도 마음도 떨쳐 잊어버리고 부처님이 사는 집으로 뛰어 들어 부처님이 하는 대로 맡겨서 이에 따라갈 때 힘도 들지 않고 마음도 쓰지 않고 생사를 떠나 부처가 된다. 」 <道元, 正法眼藏>

 

2. 왜 염불선인가?

우리나라에서 몇 해 동안 라즈니쉬, 크리슈나 무르티, 요가난다 등의 가르침을 소개한 명상서적이 붐을 이뤄 장기간 베스트셀러를 형성해 오고 있다. 답답한 현실정치와 공허한 현대문명 생활이 자신의 내면세계에로 눈을 돌리게 한 것이다.

그러나 명상서적만을 읽고 명상을 체험할 수는 없다. 책을 읽고난 후면 현실과의 괴리감 때문에 더욱 공허함에 빠져들기 마련이다. 다양한 명상과 스승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어떠한 길을 택해야 하는가?

불교만 해도 여러 가지의 수행이 전해져 오고 있다. 이제는 남의 말을 흉내 내거나 뜬구름 잡는 얘기를 할 때가 아니다. 실제적인 명상수행이 필요한 때이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정해져 있지 않고 〔大道無門〕

집집마다 서울로 가는 길은 열려 있다 〔家家戶戶 通長安〕

고 했듯이 어떤 신앙이나 수행을 통해서도 진리를 체험할 수는 있다. 그러나 전문적인 수행자가 아닌 재가불자들이나 바쁜 현대생활을 살아가면서 실천할 수 있는 적합한 수행법은 무엇일까?

 

일본의 다나베하지매는 그의 「기독교와 공산주의, 그리고 일본불교」에서 “염불선의 수행법이 아니면 일본불교는 생기있게 소생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그것은 선과 염불의 조화적인 수행을 통하여 지혜와 자비를 갖춘 종교적 인격으로 불교의 근본을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3. 청화스님의 염불선

우리나라에는 청화(淸華) 큰스님이 불자들에게 염불선을 적극 권장하신다. 필자 자신 태안사 선원에 지내면서 큰 스님의 은혜 입은 바 크다.

큰 스님을 가까이서 지켜보노라면 당신이 설하시는 불법과 삶의 모습이 완전히 한 조각이 되어 있음을 본다. 사람이 불법을 닦으면 저렇게까지 될 수 있구나 하는 환희심과 불법에 대한 믿음이 새로워진다. 이런 훌륭한 선지식을 이 시대 우리 불교에서 모시고 있다는 것은 이 시대 우리 모든 불자들의 영광이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최근 문도들에 의해서 간행된 큰 스님의 법어집에서 염불선의 이치와 수행에 관한 내용들을 발췌해서 소개한다.

 

“선이라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이 실상에 안주해서 그 진리를 한시도 안 떠나는 공부, 이것이 선입니다. 염불도 부처님의 이름을 외우되 우리 마음이 부처님의 진리를 안 떠나면 실상염불이 되고 염불선이 됩니다. 육조단경에도 <내법은 체(體 )를 여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참선은 순간도 본체를 여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뭣고’ 화두를 하더라도 본체를 알지 못하고 ‘이뭣고’ 하면 참선이 못됩니다. 수행한다면서 본체를 알지 못해서 마음을 확 열어버리지 못하면 고집만 강해집니다. 본체를 알지 못하면 마음이 옹졸해지고 공부가 트이지 못합니다.

 

본체를 가장 간단하게 표현하면 진공묘유(眞空妙有)입니다. 천지우주는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는데 그 가운데 불성광명으로 충만되어 있습니다.

현대물리학의 양자역학(量子力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일체 존재를 구성하는 근본요소인 양자(量子), 전자(電子), 중성자(中性子) 등의 소립자란 우주에 충만한 장(場) 에너지 (Energy of Field)인 광명의 파동〔光波〕으로부터 이루어진 광명의 입자〔光粒子〕임을 증명하고 있으니 일체 물질현상은 그대로 광명의 형상화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물리학은 그 광명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순수한 광명, 그것이 바로 불성의 표현 아미타불입니다.

 

염불하는 공부는 우리의 지혜, 우리의 감성, 우리의 의지를 조화롭게 합니다. 따라서 하면 하는 만큼 우리 마음이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현대와 같이 불안할 때 가정생활, 사회생활로 고통이 많은 때 언제 어디서나 하기 쉽고 제일 좋은 방법이 염불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가장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불경 가운데 200부 이상에서 염불을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나 부처를 자기 마음 밖에서 구하고 극락을 멀리 십만억 국토 밖에서 구하는 것은 방편염불입니다. 참다운 염불이 못됩니다. “ 내 마음의 본 바탕이 부처이다. 천리우주는 불성광명뿐이다.” 이렇게 천지우주와 자기의 몸과 마음을 탈락시켜 버리고 오직 부처님의 법신을 관(觀)합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이렇게 하는 염불이 염불선입니다.

 

우리 중생심은-원래 불심(佛心)은 광명 뿐인 것인데 일시적으로 어둠에 덮여 있다 하더라도 광대무변한 광명을 명상하면서 부처님 이름을 부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마음이 밝아져 옵니다. 즉 불심으로 가까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명만으로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부처님을 한시도 안 놓쳐야 합니다.

 

모든 중생들은 자기 자신이 우주의 실상인 부처님과 하나임을 깨닫지 못하는 한,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과 갈등은 영구히 해소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염불선의 수행을 지속해 갈 때 어두운 번뇌의 그림자는 스러지고 날로 생명의 광명인 부처님과 가까워지며 필경 부처님과 하나가 되는 생명의 근본 목적을 달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일체 존재의 동일한 성품인 불성을 자각하고, 그 불성에 입각한 보편적 예지와 자비에 의해서만 비로소 물질문명에 멍든 갈등과 분열의 역사적 위기는 극복되고 인류의 사무친 비원인 진정한 자유와 평등과 영생의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함께 음미할 만한 서양철학자의 말이 있다.

영원의 자리에서 현실을 관찰하면, 일체가 영원 속에 참여한다.

<스피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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