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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행자의 편지/자유게시판

[스크랩] [본연스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법문


[1] 2008. 06. 24. 법문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님은 일체중생의 고통을
듣고 거두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관세음보살님은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일체중생의 고통의 소리에 자비심을 일으켜
거두어 준다면 그 분이 바로 관세음보살입니다.
그런 분을 관세음보살님이 화현했다고 합니다.
내면에 깊이 들어가신 분은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개미 한 마리에서도 고통의 소리을 듣고
자비심을 일으켜 거두어 줍니다.
일체중생은 본래가 관세음보살님이었습니다.
다만 중생은 널뛰는 마음 때문에 일체중생의
고통의 소리를 듣지 못할 뿐입니다. 관세음보살

[2] 2008. 12. 08. 법문
예전에 늘 "관세음보살" 을 念하는 노보살님이 계셨습니다.
노보살님은 언제부터 관세음보살을 念했는지도 모르고 삽니다.
근데 노보살님의 아들 하나가 속을 썩이는데 노름꾼입니다.
그날도 아들 등살에 노름 밑천 삼십만 원을 빼앗기고
(그 당시는 삼십만 원이면 꽤 큰 돈입니다.
백 원짜리 십 원짜리 종이돈 시절입니다)
서럽기도 하고 원통하기도 하고 하여
울면서 앉아서 밤새 "관세음보살" 을 염송했는데
비몽사몽 간에 관세음보살님이 나타나서
"옜다" 하면서 돼지새끼 3마리를 던져 주는데
두 마리는 치마 폭에 떨어졌고,
한 마리는 무릎을 맞고 방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들이 나타나 방문을 열면서 엄마! 돈! 하고,
십만 원짜리 뭉치 3개를 던져주는데 두개는 치마폭에 떨어지고,
하나는 무릎을 맞고 방바닥에 떨어지고,
그리고 그 후부터는 아들이 노름을 안 했다고 합니다.
공부하다 보면, 때론 영험도 볼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영험에 맛들여 영험에 집착하고 전부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공부의 본질적인 것은 영험이 아니라
염불을 하든 진언을 하든 화두를 하든
탐(貪), 진(瞋), 치(癡) 삼독심 소멸에 있습니다.
진정으로 삼독심이 소멸하였을 적에야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반조(返照)하여 삼독심을 제거하는 것이 공부의 본질입니다.
깨달음의 세계는 삼독심이 소멸된 마음의 세계입니다. 관세음보살

[3] 2009. 01. 12. 법문
관세음보살님은 스스로 관세음보살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위로는 항상 아미타불의 무량공덕을 찬탄하면서 아래로는
일체중생들을 위하여 대비주(大悲呪)를 염念할 뿐입니다.
저의 원불(願佛)은 관세음보살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을 찬탄하는 염불공덕도 무량하지만
일체중생들을 위해 대비주를 염송하는 공덕도 무량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과 "대비주" 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는 하나의 수행입니다.
다시 말하면 관세음보살님의 마음입니다. 관세음보살

[4] 2009. 04. 22. 법문
절집에는 옛날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소시(小時)적 삼국유사에 불교관련 글을 보고 신빙성 없는
전설로만 취급했는데 절집에 들어와 다시 부처님 공부를 하니
업이 녹았는가 거짓없는 참 글인 줄 늦게야 알게되었습니다.
(극락에 대한 글도 업이 녹아야 드러나는 깨달음의 세계입니다)
같은 글, 같은 책을 보아도 전생의 인연 따라 근기 따라
한 번만 읽어도 신심이 나고 잊어버리지 않는 글이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 마음 속에 무한한 신심을 내게 했던
관세음보살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관세음보살님께서 지옥에 있는 중생들까지도 다 제도하리라는
큰 원력을 세우시고 "만약에 내가 퇴굴(退屈)하는 마음을 내게 되면
몸이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지리라" 고 서원을 발하셨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지옥에 가서 모든 중생들을 다 제도하여
극락세계로 보냈는데, 매번 갈 때마다 지옥에는
여전히 전과 같이 많은 중생들이 있었습니다.
관세음보살께서 모든 중생들을 극락으로 보내고 하늘을 올려다 보니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 중생들이 겨울에 눈송이가 내리듯 많았습니다.
관세음보살께서는 순간, 퇴굴하는 마음이 일어나
"저 끝없이 많은 중생들을 어떻게 다 제도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의 서원 그대로 몸이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져 버렸고,
그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을 때 시방에 계신 부처님들께서 보시고는
신통력으로 관세음보살의 몸을 원래대로 회복시켜 주시고,
손이 천 개, 눈이 천 개가 되도록 해주셨습니다.
아! 지옥에 중생들이 눈송이 떨어지듯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짓는 죄업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또 중생의 마음으로도 대원력을 세워 정진하면서
언젠가는 - 금생이 아니더라도 - 잊지않고 간직한다면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


[5] 2009. 10. 01. 법문
무주선원 토굴의 부처님은 관세음보살입니다.
몇 년 전, 부안 내소사에 갔다가 서점에서 내소사 후불탱화 속
관세음보살님을 사진으로 찍어 만든 것을 구입해 액자로 만들어
제 방에 걸어두었던 것을 여기 와서 법당에 모시고 예불, 기도하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이 아미타불을 정대하고 일체중생의 고통을 거두어 주듯
저도 아미타불을 평생의 업으로 찬탄하고 살면서 일체중생을 대신하여
참회 발원하면서 살고자하는 원(願)입니다.
그러기에 관세음보살님과 닮아가고자 관세음보살님을
관(觀)하면서 "나무아미타불" 염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행방법에 대해서 시비(是非)를 논하면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연과 업에 따라
수행방법이 서로가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삼귀의(三歸依)와 계(戒)ㆍ정(定)ㆍ혜(慧)
삼학이 바탕이 된다면 정법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수행을 하든 사홍서원(四弘誓願)으로 회향해야 합니다.
수행은 대접 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을 시봉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다들 이 부분에서 착각하고 '공부했다, 공부한다' 하며
법상(法相)과 아만(我慢) 속에 살고 있습니다.
대접받기는 쉬워도 시봉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중생시봉 공부는 다겁생에 걸쳐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생 시봉하는 업이 다했을 때 성자(聖者)다
보살(菩薩)이다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다 하는 것이고
이 길을 가는 사람을 '행자' 라고 하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

[6] 2012. 07. 07. 법문
무주선원에 관세음보살님을 주불(主佛)로 모시는데,
본연스님은 왜 "나무아미타불" 염불하시는 분이
아미타불을 안 모시고 왜 관세음보살을 모시는지
고개를 갸우뚱하시는 분이 더러 계십니다.
무주선원은 저의 마음의 세계입니다.
카페도 불사도 저의 마음이 투영(投影)된 것이며
마음의 그림자입니다. 저의 수행은 관세음과 같은 모습,
관세음보살님의 마음을 흠모하며 닮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님!
관세음보살님이 아미타불을 정수리에 정대하시고
아미타불의 무량공덕을 찬탄하듯 저도 관세음보살님과 같이
아미타불을 정수리에 모셔 두고 "나무아미타불" 일심칭명하며
만일(萬日)을 인연있는 분들과 함께 아미타불의
무량공덕을 찬탄하고자 관세음보살님을 주불로 모시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이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으로 일체중생의 고통을
살펴보고 들어주며 거두어주듯 저도 아직 몸(身)과 입(口)과
마음(意)이 망상 덩어리지만 늘 관세음보살님을 바라보며
당신의 모습과 마음을 닮아가고자(能禮 所禮) 합니다.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극락전 법당에서도 관세음보살을 바라보며 염불하고
월출산 견성암 시절에는 관세음보살님을 모시고 염불하고
좌선도 하고, 제 방에는 항상 관세음보살 사진이
걸려있는 것을 아시는 분은 아실 것입니다.
무주선원 불사는 제 마음과 방에 모시던 관세음보살을 법당이라는
공간을 만들고 사진을 형상으로 바꾸어 놓은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천개의 손을 상징하는 42수(手)를 새겨, 뒤 탱화를 대신하며
대비주, 자비심을 일깨워주는 진실한 언어, 즉 진언을 닷 집 안에
새겨 놓은 것이며, 제 성격상 간단 간결한 것을 좋아하기에
법당에는 아무 것도 없이 관세음보살 한 분만 모시는 것입니다.
깨달음 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법신(法身)이기에 형상이 없습니다.
그러나 굳이 표현한다면 빛으로 표현합니다.
무량광불(無量光佛), 무량수불(無量壽佛),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다 빛을 상징하는 것이며 깨달음이 드러날 적에는
자비심으로 또한 연민심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자비심이 동반되지 않은 깨달음은 무의미합니다.
흔히 말하는 '화두를 타파했다'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비심은 사바세계의 감로수(甘露水)며 보약입니다.
순간의 자비심이 나(我)와 사바세계를 정화(淨化)시켜 주는 것입니다.
좀 더 자비심을 풀어서 이야기 한다면 배려(配慮)하는 마음입니다.
모자라고 부족한 중생에 대한 배려, 작게는 개인,
크게는 현대사회가 한 번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깨달음은 언변(言辯)에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에 있는 것도 아니고, 다만 행(行)에 있는 것입니다.
수행(修行)한다는 것이 행위(行爲)를 닦는다는 것이고
수행자란 행위를 닦는 사람인데, 수행이 깊어 갈수록
계행(戒行)이 맑아지고 자비스러워지는 것이 상식입니다.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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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가장 행복한 공부
        글쓴이 : 無量光明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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