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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행자의 편지/자유게시판

[스크랩] 달라이라마도 화를 내는 가 ,,,/ 천축에서 청전 스님

 

달라이라마도 화를 내는가

 
청전 스님 2012. 09. 11
조회수 554 추천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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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달라이라마 홈페이지에서



수행자의 위상이랄까 도대체 일반인과의 차이라면 무엇을 기준하여 성직자라고 할 수 있을까. 하긴 요즘의 성직자들의 위상은 일반인보다도 몇 수 아래의 인격으로 내려앉은 꼴로서 부끄러워 얼굴을 내밀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존경과 사랑을 받는 게 아닌 지탄과 문제를 일으키는 장본인들이 되어버렸기에 하는 말이다. 청빈과 순수해야 될 성직자의 인격이나 위상은 여지없이 박살난 피할 수 없는 사실의 드러난 대로의 세상이니까. 막말로 할 짓 다하고 먹을 것 다 먹으며 가질 것 다 가진 자들이라면 일반인과 다를 게 뭐란 말인가. 


  그렇다면 진정 성직자를 성직자로써 위의와 존경의 가치를 무엇으로서 기준 할 것인가. 필자의 견해는 이렇다. 화를 내는가 안 내는 가에 있다고. 즉 화가 날 상황에서 그분들이 어떻게 대처하는가, 즉 어떤 화가 날 원인과 조건 속에서도 화를 내지 않고 태연 하는가에 있다고 본다. 흔히들 명예나 신분이 높고 재산이 많고, 사회적 지위가 큰 사람일수록 화를 잘 낸다는 게 일반적이리라. 자기 맘대로 쉽게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늘 웃음만 짓는 이곳의 달라이 라마 존자님은 어떤가. 당신의 법문에서 하신 말씀으로 몇 번이나 들어왔다. 당신께서 인도로 망명 오기 전, 즉 티벳에서 젊은 시절 최고의 자리에 계실 때의 옛날 이야기를 하시곤 했다. 포탈라 궁에서 주로 사실 때의 이야기라고 한다. 당신 젊은 나이엔 성질이 급해 유독 화를 잘 냈다고 한다. 그러나 누구나가 화를 낸 이후에 스스로에 오는 자괴감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스스로 괴롭기도 한 것이니까. 당신이 아래의 스님들이나 사무관에게 화를 내고는 바로 이거 또 실수라니 하면서 늘 상 하는 말이란, 


  “아까 화를 낸 것은 내 탓이 아니고, 내 부친이 화를 잘 내곤 했는데 내가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 거니 양해를 하게나.”

라면서 자기 허물을 당신 아버지 탓으로 돌리곤 했다 한다. 그런데 막상 수행을 하고보니 그것은 다 자기 탓이었음을 알았고, 공부가 익게 되니 이젠 화가 나지 않으신다고 말했다.


  대승불교권에서 중요한 저서 중의 하나인 “입보리행론”이란 글을 보면 수행 중에 화가 얼마나 해로운가의 내용이 반복된다. 7세기 샨티데바(적천)스님의 저서인데 이곳 달라이 라마의 법문에 가장 많이 인용되는 글 이기도하다. 올 9월 달에 있은 아시아 영어권 불자들에게도 바로 이 책을 교재로 법문 하였다. 그 중에서도 제6장의 인욕(인내) 편을 중점적으로 설명했다. 게송 하나를 보기로 하자.


    분노보다 더한 죄악은 없고

    인욕보다 더 어려운 고행 없다.

    그러므로 인욕을 진지하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수행해야 한다.


  그러면 당신은 수행이 익었다고 한 이후로 정말 화를 한 번도 내지 않았다는 말인가? 필자에게 궁금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문제, 즉 “달라이 라마도 화를 내는가?”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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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달라이라마 홈페이지에서



  달라이 라마의 영어 통역관 스님이 있다. 20년을 항상 그림자처럼 당신과 함께 외국이나 인도 어디에고 늘 옆에서 통역자로서 살아 온 스님인데, 요즘엔 나이가 있어 다른 스님께 인계하고는 정부 도서관장으로 일한다. 필자가 여기 오래 산 인연으로 그 스님과는 지금도 각별히 지내고 있다. 


  한번은 뜬금없이 내 방엘 찾아왔다. 지금 막 미국에서 돌아왔단다. 그런데 여태껏 자기도 못 보던 존자님의 놀라운 이변이라며 얘기를 한다는 게 드디어 달라이 라마도 화를 낸 상황을 말한다. 미국 내의 모든 라마들과 이름 있는 린포체들의 만남 장소에서 일어난 일이다. 사실 인도에 망명 나온 큰스님이라고 좀 이름이 있는 티벳 스님들은 거의가 미국에 살고 있는 상황이다. 모인 많은 티벳 스님들이 달라이 라마께 뭔가를 올리고 절을 하는 등의 티벳식 예의를 마친 후 존자님의 말씀이란 어떤 칭찬이나 감사하다는 말이 아니었다. 큰 음성과 함께 아주 큰 화를 내시며, “당신네들은 자기만을 위해 이 미국 땅에서 이런 풍요의 안락과 편리 속에서 즐겁게 살고 있구나.


티벳이라는 고국은 잊어버린 지 오래이며 티벳 문제는 누가 풀어야 하는가. 나 혼자 인도  땅에서 그 많은 일을 하도록 내동댕이쳐 버리고 그래 사람으로써의 양심도 없는가. 지금 티벳 내에서 고통당하는 우리 민족과 티벳 땅은 더 이상 당신들 일이 아닌가. 우리에게 희망 둔 민중들을 버리고 조국 땅도 버린 당신네들, 과연 이 행복이 오래 갈 것으로 아는가. 나 혼자 고국을 되찾고 민족을 연민하는 일에 이젠 지쳐있음을 그대들이 알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래 나 혼자만을 인도에 두고 잘 사시오. 


더 이상 나를 보러 오지도 말라. 이렇게 내게 챙겨온 이런 물건들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라는 뜻의 말이었다고.  그 누구 하나도 얼굴을 들지 못했고 존자님의 이런 화를 내는 이변에 몇몇 라마들은 그냥 대성통곡을 하기도 했단다.

 

  필자는 이 말을 전해 듣고 생각이 깊어졌다. 달라이 라마의 개인적인 수행을 떠난 순수한 인간으로서의 고뇌를 읽은 것이다. 우리도 한 때 일제 강압기에서 우리 민족을 고달프게 했던 친일파들이 득세해왔던 일이나, 근래 유신 같은 악법에서도 일부 성직자들은 성명서까지 내면서 통치권자들에게 빌붙어 개인의 영달을 꾀해왔었다. 그런대도 지금처럼 열린 세상은 어떤가. 부끄럽게도 선거 때만 되면 누구를 지지한다며 정권과 결탁하며 훗날 뒷거래를 하는 게 요즘의 성직자들의 위상이니 말해 무엇 하랴. 


  지금 티벳은 어느 때보다도 힘든 상황이다. 참으로 순수한 스님들이 조국을 위한, 종교의 자유를 위한 이어지는 분신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이 일은 달라이 라마 개인의 일일까. 화를 내면서 큰 언성으로 모인 라마들을 질타한 이야기는 바로 우리 모든 인류의 일이라고 본다.  어디 개인의 일이겠으며 한 나라의 일로만 국한 되겠는가. 조국이 어찌되든 민중이 어찌되든 자기 혼자만 편한 나라에서 그리 살아간다는 달라이 라마의 질타가 처량하게 들리는 호소였으니까.


  화를 내고 안내고를 떠난 한 인간 개인으로 볼 때, 꼭 화를 내야 될 자리에서 어떤 자세로 임해야 될까? 준엄한 질타? 아니면 소극적인 자세로 나 몰라라? 필자 개인으로서 어려운 문제이며 답하기 힘든 질문이다. 


  지금까지 필자가 읽어 온 불교의 많은 경전 안에서 붓다 세존께서 화를 내셨다는 대목은 못 읽어봤다. 제자들을 꾸짖는 대목은 많다. 그러나 화를 내셨다는 구절은 아직까지 못 봤다. 설령 부처님께서 화를 내시었다해도 그것이 어디 범부가 주체할 수 없는 분심으로 타인을 고통에 빠트리는 것이었을까 만, 아마 이 또한 중생을 연민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리라. 


  달라이 라마 존자님에게 눈물 찔끔 흘리던 라마 스님들을 동정하기에 앞서, 한국에서 들려오는 함량 미달인 성직자들의 튀는 뉴스들은 진리의 인생길에 가고자하는 착한 민중들에게 너무도 삶의 의욕을 빠지게 한다. 성직자이기 전에 이 시대의 우리들은 자기 발밑부터 살펴봐야 한다. 아무리 험하고 혼탁한 세상살이일지라도 마음속에 얼마나 성냄을 담고 사는지를, 그리고 참고 살아갈 수 있는 이웃에 대한 배려의 마음, 관용의 마음을 저울질 해봐야 한다. 우리 인간의 행복은 바로 마음이 편할 때 온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행복의 열쇠는 마음의 힘, 내적 평정심 그리고 꾸준함 같은 덕목 속에 있다고 확신 합니다.


   2012년 9월 인도 우기 끝나기를 희망하며, 그리고 이 세상을 참되게 살려고 애쓰시는 모든 분들에게.

                삼가 비구 청 전 합장 드립니다.


출처 : 나무아미타불
글쓴이 : 평신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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