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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행자의 편지/자유게시판

[스크랩] 이름 없는 한 수행자의 삶 - 청전스님

 

청전 스님 2012. 04. 16

 

 P1020580s.jpg » 있는 그대로의 노스님 근영

경전을 읽으시는 스님

 

 

롭쌍 왕뒤 티벳 망명 노스님.

 

나이 열세 살 되던 해에 라싸 근교 뀐뒬링 곰빠란 절에 보내졌단다. 올 연세는 78세이며, 평생 학고방 같은 조그만 단칸방 안에서 지금도 매일 변함없는 일과 속에, 가진 게 거의 없는 수행자의 삶이다. 어떤 특별한 존함이나 이력도 없고 그저 드러나지 않는 자기만의 조용한 비구 삶일 뿐이다. 늘 부산하고 예식이나 의식이 많은 사원을 떠나 그 단칸방 한자리에서 이렇게 혼자 지낸 지가 26년이란다.

 

역사적으로 종교의 제일 부끄러운 모순이란 게 우선 제일 많은 사람을 죽여 왔다는 것 일 게다. 어느 종교나 이웃 사랑과 관용, 자비의 실천을 호소하는데도 그 이면에는 무서운 폭력, 자기 종교를 위한다는 도그마를 앞세워 수많은 사람을 죽여 온 역사라는 게 가끔 종교의 회의와 실망감을 느끼기도 한다.

 

한번은 내 방에 찾아온 한 나이든 낯선 여행자의 말이 잊을 수가 없고 부끄러움으로 남아있다.

 

“시님요, 막말로 요즘 성직자가 정말 성직자 맞습니까? 방에 한번 들어가 보세요. 정말 우리 보담 몇 배 고급스런 물건들이 꽉 차 있고요. 막말로 우리가 있는 마누라 하나 없다는 거 빼곤 있을 거 다 있던디요. 또 눈에 보이는 건 죄다 최고급품이구요.”

 

 

 

이 노스님과 인연이 시작된 것은 어디서 들으신 건지 약을 누구에게나 준다는 말을 듣고 찾아오신 때부터다. 무릎이 시어간다며 영양제를 받아가기 위한 것이었다. 일 년에 서너 번 정도 필자를 찾아오신다. 벌써 십 육칠년이 넘는다. 잡수는 게 너무 간소하다. 거기에 오후불식(정오가 지나서는 다음날 아침까지 일체 음식을 먹지 않는 것)과 티벳 사람이라면 불문율로 누구나 먹는 육식을 전혀 하지 않는 순수 채식가이다.

 

일과는 새벽 세 네 시가 아닌 두시부터 명상과 간경, 그리고 절로 시작된다. 당신 방 정말 좁은 방에서 매일 삼백배의 절을 한다. 소박한 티벳식 짬빠(볶은 보릿가루)와 버터차로 아침을 마친 뒤 달라이 라마가 거주하는 왕궁과 절 주위를 참배하는 티벳 사람만의 불교 신앙의식인 꼬라 길을 매일 새벽에 세 바퀴, 낮에 네 바퀴 씩 돈다. 한 바퀴 도는데 얼추 반시간이 걸리는 길이다. 점심 이후는 당신 개인 일과로서 난민들 가정을 방문하는 게 많다. 어느 날부터 이 스님의 손이 약손이 되어가는 것이었다. 아픈 부위에 손을 대고 기도하면 신통하게도 아픈 곳이 낫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특별한 비밀 수행을 해 온 어떤 비법일까? 아니다. 그 어떤 비법이랄 건 하나도 없다. 한 비구승의 맑고 맑은 영혼의 에너지일 것이다. 이 노스님이 추운 겨울이 다가오면 여기를 떠나 성도지 부다가야에 내려가신다. 노구에 추위도 피할 겸 바로 당신 혼자 정해 놓고 연연히 해가는 수행을 하러 가는 것이다.

 

티벳 절을 매번 이십만 배 씩를 한다. 백일을 정하고선 그 노구에 하루 이천 배 씩 절을 올리는 것이다. 지금까지 집에서 매일 삼백 배씩 하는 절 빼고, 부다가야에서만 절하신 게 올해로써 육백만 배를 마쳤단다. 놀랍지 않은가! 흔히들 티벳 전통대로 어떤 수행 전에 십만 배를 기초수행으로 하는 것으로 안다.

 

P1020575s.jpg  

방안의 시멘트 벽 선반 위의 불단.

 

지난 겨울 칼라차크라 행사에 참석, 부다가야 대탑을 참배 할 때 저쪽 한쪽 구석에서 절을 올리는 노스님을 멀찌기 좀 떨어진 곳에서 보고는 참으로 행복했다. 그 절하는 모습이 사람이 절을 하는 게 아닌 어느 하늘 사람이 지금 절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유연한 몸매며 절 한 배 한 배에서 가냘픈 노비구의 향이 베어 나오는 것이었다. 아, 바로 저 에너지, 저 청정무구한 비구의 맑은 영혼이 병든 중생의 아픔을 치료하는 것이구나!

 

당신이 사시는 방을 한 번 보자.

컴컴하고 좀 퀴퀴한 버터 냄새가 베어나는 방의 구조라니!! 침대 하나에 취사도구와 조그만 불단, 그리고 절 할 수 있는 공간이 전부다. 출입문 하나에 벽엔 창문도 없다. 우리나라 식 평수로 말하면 네다섯 평이나 될까. 이 방안에서 26년이라니 숙연해진다.

 

가끔 필자를 찾는 손님 중에 의식을 갖춘 분이라 판단되면 그 노스님께 인사차 찾아간다.

쉽게는 가지 않는바 노스님의 수행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이다.

운이 좋은 몇몇은 일반신도였다.

 

놀랍게도 결과는 하나다.

스님이건 누구건 그 스님을 보고 그 방을 보고는 그냥 그 자리에서 펑펑 운다.

어떤 이는 대성통곡이다.

 

왜 우냐고 물으면 대답도 똑같다.

말로 할 수없는 뭔가가 그리 울음을 나오게 한단다.

 

 

 

이 시대에 우리 출가자나 성직자라고 말 할 수 있는 분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수도자의 옷만 걸쳤다고 그저 성직자일까?

신전에 사원에 산다고 성직자로 존경 받아야 하는가?

 

그 휘황찬란한 신전이나 사원도 문제다. 그 어느 성자가 그 어느 종교 창시자인 교조가 그런 호강과 대접을 받고 살았던가? 막말로 부처나 예수가 그런 집 그런 풍요를 누려왔던가?

 

요즘엔 신전이나 사원의 크기로 성직자의 위상을 잣대 매김 질 하는가 보다. 어디서나 큰 사찰과 대형 교회를 짓는데 놀랍게도 옆에는 버젓이 이미 큰 종교건물이 있는데도, 그 아담한 건물 죄다 뜯어내고 크게 만 크게 만 새로 또 짓는 일의 반복이다. 쉽게 말해 새 포장지만 자꾸 바꿔 나가는 꼴이다. 막말로 신이 된 교조나 부처가 그런 큰 신전 사원에만 있을까? 이젠 이 열린 세상에서 그런 비린내 나는 장사속의 대형화로 더 이상 민중을 속일 수가 없는 시대이다. 본래 교조의 사상을 행할 때, 사랑과 자비의 실천만이 이 세상에 길이 남을 것이다.

 

“대형화되는 사찰과 교회 반성해야…사랑과 자비 실천이 우선”

 

또한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 헐벗은 민중에게 따뜻한 진리로 남을 것이다. 요즘 잘 나간다는 성직자들은 사회적 명사나 가진 자들이나 만나준다니 어디 이게 성직자인가? 외려 자기 일 성실히 하고 착하게 살아가는 이름 없는 민중이 바로 성직자 보다 낫다. 허긴 요즘 성직자들의 위상이란 민중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있는 실정이라니. 해야 할 사랑의 실천이나 자기희생이 베인 수행과 맑은 삶은 고사하고 이젠 선거판까지 뛰어든다니. 그래도 이 시대에 어느 목사님이 쓴 “대형교회가 망해야 한국교회가 산다.”는 책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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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의 노스님 근영

 

 

 

절집에서 새벽 예불 중에 늘 축원을 올리는 대목 중에 이런 문구가 있다.

 

문아명자면삼도(聞我名者免三途)

견아형자득해탈(見我形者得解脫).

 

즉, “내 이름을 듣는 이는 모두 삼악도(지옥, 아귀, 축생)의 괴로움을 여의고, 내 모습을 보는 이는 모두 해탈을 얻게 하소서.”라는 의미의 기도축원문이다. 필자는 바로 이 문구가 이 소박한 스님의 일생 수행 자태에 맞는 말이 아닌가 생각한다. 누구나 이 스님을 보는 자체에서 큰 기쁨과 나의 본래 숨어있는 착함을 돌이켜보는 계기를 주니까 말이다. 흔히들 요즘 잘 챙겨 입으며 잘 섭생 한 건지 기름기 흐르는 우람한 성직자의 모습에서 존경심이 우러나거나 환희심을 받기는커녕 외려 짜증을 불러일으키게 한다는 말을 듣는다.

 

 

 

어쩌다 한국을 들어가서 대형화 되어가는 종교 건물을 볼 때마다에 바로 이 이름 없는 롭쌍 왕뒤 노스님의 거처와 삶이 생각난다. 이 글을 쓰고서 사진을 촬영하고자 당신 거처인 방에 들어가 불단과 스님 그대로의 간경 모습을 찍을 수 있었다. 어떤 꾸밈없이 당신 방 있는 그대로 보인다. 그리곤 묻지도 않았는데 하시는 말씀이란, 대탑에서 육백만 배를 마친 마지막 회향일 날 밤에 놀랍게도 부처님을 뵙는 상서로운 꿈을 가졌는데 올핸 꼭 고향땅과 자기 출가한 절 곰빠에 다녀 올 수 있을 거라며 기뻐하신다. 망명 이후 아직 한 번도 티벳에 가본 적이 없단다. (현재 티벳 국경은 분신사태로 꽁꽁 묶어놔 티벳 사람 누구 하나도 통행이 금지 되어있다.)

 

이 글을 마치며 필자도 이 노스님처럼 평생 청정하게 수행하며, 겸손과 침묵으로 맑은 영혼을 갖추고자 노력할 것이다.

 

2012년 4월 히말라야 맑은 봄기운 속에서, 비구 청전 두손 모음.

 

 

 

 

 

청전 스님
가톨릭 신부가 되기 위해 광주 대건신학대에 다니다 송광사 방장 구산스님을 만나 출가했다. 1988년 인도로 떠나 히말라야에서 달라이라마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매년 여름 히말라야 최고 오지인 라다크를 찾아 고립된 티베트 스님들과 오지 주민들에게 약과 생필품을 보시하고 있다. 어느 산악인보다 히말라야를 많이 누빈 히말라야 도인.
 
이메일 : cheongjeon91@hanmail.net   

 

 

깨달음에 이르는 길

 

위 책은 청전스님께서 람림을 번역하신 책입니다.

무려 5년간이나 고생하시면서 일일이 손글씨로 작업해서 편찬하신 책입니다.

 

달라이라마께서도 추천하신 책이니..

티벳 불교를 배우시고자 하시는 분들은 꼭 보세요.

 

분량도 1000페이지라 볼 내용도 너무나 많아서 좋습니다.

출처 : 출리심 보리심 공
글쓴이 : - 반야바라밀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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