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을 인터넷에 게재하도록 허락해 주신 <미주현대불교> 잡지사에 감사드립니다.
채식, 그리고 지속 가능한 성장
둘째 마당, 붓다와 피타고라스로부터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리처드 기어까지
헤시오도스(BCE 8세기말)
헤시오도스는 그리스 중부 헬리콘 산 기슭에 살았던 농부 시인으로 아주 먼 옛날에 존재했다는 이상적 시대인 ‘황금시대’를 동경했다. 황금시대의 종족은 다음 인용에서 엿볼 수 있듯이 채식인이었던 듯하다.
“그들은 갖가지 제물로 여신을 달래기 위해 동물을 그린 액자와 온갖 종류의 향유, 순수한
몰약, 황금색 벌집을 제물로 하고 신비로운 향료를 대지에 부었다. 그 때는 재단을 부끄러
운 암소의 피로 물들이는 일이 없었다. 아니 생명을 잡아죽이고 동물의 사지를 탐욕스레 먹
는 일은 사람들 사이에서 최대의 추악함으로 여겨졌다.”
그의 시를 보면 이상적인 채식주의(vegetarianism)가 실현된 황금시대를 향한 동경과 힘든 노동 생활을 강요받는 현실에 대한 절망이 늘 교차하고 있다. 헤시오도스는 힘든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베지테리아니즘을 소중히 여기고, 대지 가이아와 여신 데메텔을 우주의 근원인 어머니로 숭배하며, 풍요로운 축북이 내리도록 열심히 기도하면서 농업에 임했다.
붓다 (BCE 563?~BCE 483?)
불교에서 육식을 피하라는 가르침과 관련해 삼정육(三淨肉: 세 가지 깨끗한 고기)이 혼란을 야기시킨다. 자신의 눈으로 도살하는 장면을 보지 않은 고기, 나를 위해 도살되었다고 듣지 않은 고기, 나를 위해 도살되었다는 의심이 들지 않는 고기는 석가모니 붓다께서 먹어도 된다고 허락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하루 1식의 생활을 하던, 먹을 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대의 상황을 고려해 이해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다양하고 풍부한 채식 식품이 있는 현실에 적용되는 내용은 아님에 분명하다. 또한 삼정육 제시는 보시하는 이의 정성을 감안해 방편으로 용인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열반경』에서 가섭 존자는 붓다께 삼정육에 대해 질문한다.
“어찌하여 처음에는 세 종류의 깨끗한 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허락하셨습니까?”
“이는 상황에 따라 점진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제는 모든 육식을 끊을 줄
알아야 한다.”
『능가경』 의 다음 구절도 붓다의 말씀을 왜곡하는 자를 경계하고 있다.
“미래의 세상에 어리석은 자들이 계율을 망령되이 언급하며, 정법을 어지럽히고 나(붓다)
를 비방하면서, 내가 육식을 허락했다고 말하며 자신도 먹을 것이다.”
『수능엄경』은 육식을 하는 이는 결코 깨달음을 얻지 못하리라 천명한다.
“아난아, 이 세계의 여섯 갈래 중생들이 산 것을 죽일 마음을 끊지 않으면 번뇌에서 벗어
나지 못할 것이다. 설사 지혜가 있어 선정이 앞에 나타날지라도 죽일 마음을 끊지 않으면
반드시 귀신의 길에 떨어져 으뜸은 기운 센 귀신이 되고, 중간은 날아다니는 야차와 귀신
의 장수가 되며...... 내가 열반한 뒤 말법 시대에 귀신 무리들이 세상이 많이 성행하여 고
기를 먹고도 보리에 이르는 길을 얻었다 하리라. (중략) 청정한 비구나 보살이 길 다닐 적
에 산 풀도 밟지 않는 것이거늘 하물며 제 손으로 뽑을까 보냐. 자비를 행한다면서 어찌
중생의 고기를 먹겠느냐.”
특히 “길 다닐 적에 산 풀도 밟지 않는 것이거늘”이란 구절에서 지극한 생명 사랑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이어 수행자는 입는 것, 신는 것조차 동물을 해쳐 얻어진 것을 이용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만일 비구들이 동쪽 나라에 있는 명주실이나 풀솜, 비단 등속과 이 지방에 나는 가죽신
이나 가죽옷, 털붙이를 입지 아니하면 이러한 비구는 세간에서 참으로 벗어나 묵은 빚을
갚는 것이므로 삼계에 다시 나지 아니하리라.”
지금까지 다룬 많은 언급들의 근거로 『범망경』의 다음 내용을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붓다는 어릴 적에,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있는 존재들을 자유롭게 하는 일을 실천했
음이 틀림없다. 모든 남자는 우리의 아버지이다. 모든 여자는 우리의 어머니이다. 모든 존
재는 그들로부터 태어났다. 그러므로 육도의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은 우리의 부모이다.
만약 우리가 그들을 죽인다면, 우리는 우리의 부모를 죽이는 것이고 또한 우리의 전생의 육신을 죽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대지(地)와 물(水)은 우리 전생의 육신이고, 모든
불(火)과 바람(風)은 우리의 근원적인 물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항상 생명체의
해방을 실천해야 한다(생명을 주고받는 것은 영원한 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이
들도 그와 같이 하도록 해야만 한다. 만약 어떤 이가 세속의 한 사람이 동물을 죽이는 것
을 본다면, 그는 적절한 방법으로 공포와 위험으로부터 동물을 구하고 보호해 주어야 한
다.”
3. 피타고라스와 그의 영향을 받은 서구 채식인들
① 피타고라스(BC582?~BC497?): 피타고라스는 물고기부터 철학자까지 모두 형제 관계이고 영혼은 이러한 형태들 간에 이동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피타고라스 형제단의 철학자들에게 채식은 너무나 당연한 실천 규범이었다. 육식은 도덕적 수치로 여겨졌을 뿐만 아니라 순수한 명상을 방해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철학자들은 또한 흰색의 식물성 망토를 입었고, 동물을 사냥하지도 않았으며, 양털로 만든 옷도 입지 않았다.
피타고라스는 사람들이 동물을 해지지 말도록 주의시켰으며, 야생동물조차 처벌이 아니라 말과 행위로 가르치고자 했다. 피타고라스 형제단 성원들에게 인간과 동물은 친족 관계였으니, 어떠한 동물도 해를 입어서는 안되었고 이는 법률로 규정할 필요가 있는 사항이었다. 이런 관점은 대승불교 문헌인 『능엄경』에 나오는 말과 흡사하다. “윤회의 긴 과정에서 어머니나 아버지, 형제, 자매, 아들, 딸, 혹은 다른 친척들의 모습을 띠지 않았던 존재는 없다. 생을 취하는 과정과 관계되어, 한 존재는 모든 야생동물과 가축들, 새들, 그리고 태생들 모두와 친척이다.” 이런 피타고라스도 결국 보통 사람들이 완전히 정화되거나 신성하지 않고 철학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감안해 고기 먹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동물을 먹더라도 심장과 뇌와 골수를 먹지 않도록 금지시킨다. 이런 부위가 천상계와 공명하는 첫 번째 메신저라 믿었기 때문이다. 윤회사상을 믿었고 인간과 동물의 밀접한 관계를 상정하는 등 불교와 매우 비슷한 관점을 지녔던 피타고라스의 생명관은 서구의 수많은 지성인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리하여 플라톤을 비롯해, 레오나르도 다 빈치, 벤자민 프랭클린, 셀리, 톨스토이, 헨리 소로 등 피타고라스의 영향을 받은 서구 지성인들에 의해 서구에서 채식주의가 촉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연유로 19세기 이전까지 채식인을 가리키는 말은 ‘vegetarian’이 아니라 ‘Phythagorian’이었다.
② 플라톤(BC 428/427~BC 348/347):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란 말을 남기며 독배를 마시고 사망하자, 플라톤은 정치에 대한 혐오감에 사로잡혀 아테네를 떠난다. 이후 플라톤은 세상을 방랑하며 12년 동안 학습에 몰두한다. 플라톤은 마가에서 피타고라스학파의 유클리드 기하학을 공부했고, 이집트 카이로 등지에서 연금술적 비전을 배운다. 플라톤은 12년간의 여행 끝에 과학과 종교의 중심지였던 남부 이탈리아 티렌툼으로 가서 피타고라스 학파의 계승자 아키타스의 제자가 된다. 고향으로 가는 항해 중에 플라톤은 유명한 채식인 철학자를 만나고자 시실리를 들른다. 이 철학자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시실리에서 플라톤은 디오니시우스 1세의 초청으로 궁전을 방문해 너무 직설적으로 왕과 가족에게 완전 채식이라는 피타고라스식 식사와 검소한 생활을 촉구한다. 이는 왕의 아내와 두 딸을 모두 모욕한 셈이었으니, 분노한 디오니시우스 1세는 플라톤의 손가락을 자르려 한다. 신하들의 만류로 겨우 시실리를 벗어난 플라톤은 우여곡절 끝에 귀향에 성공한다.
③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 레오나르도가 채식인이 된 계기는 두 가지로 추론된다. 하나는 당시 유행하던 신(Neo)피타고라스주의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절친한 채식인 친구 때문이다. 신피타고라스파로 불리는 플루타크, 플로티누스, 엠페도클레스 등은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까지 풍미되던 영육(靈肉)이원설에 근거해 채식과 금욕 수행을 하고 피타고라스와 같은 철인을 숭배하였다. 레오나르도는 이들의 사상에 영향받아 채식했던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레오나르도가 채식인이 된 두 번째 가능성은 견습 시절 친구를 통해서다. 가장 절친한 친구 중 하나인 토마소 마지니는 채식인이었고 별명조차 채식하던 종파인 조로아스터였다. 토마소 마지니는 레오나르도보다 더 엄격한 채식인으로 한겨울에도 가죽, 양모, 털로 된 옷을 입지 않았고, 가죽으로 된 신발이나 벨트를 착용하는 것도 거부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친구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레오나르도는 시장에 들를 때면 새장에 갇힌 새들을 사서 놓아주곤 했다고 한다.
④ 벤저민 크랭클린(1706~1790): 미국의 정치가·외교관·과학자·저술가인 벤저민 크랭클린이 채식인이 된 것은 16살 때였다. 영국 채식인 토머스 트라이언이 쓴 『건강, 장수, 행복에의 길』을 읽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프랭클린의 점심은 비스킷과 빵, 건포도, 파이를 먹는 가벼운 식사였다. 프랭클린이 전 생애를 통해 온전히 채식을 했다고 보긴 어렵지만, “미식과 사치를 자제하고 소식과 절제에 힘쓰면 건강과 부의 길로 이를 수 있다.”는 그의 지론은 그의 인생에 잘 적용되었다. 프랭클린의 저서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에 나오는 격언이다.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잠들어 있는 여우는 한 마리의 닭도 잡을 수 없다./희망으
로 사는 자는 배고픔에 죽는다./미식가의 종말은 거지가 되는 것이다./어리석은 해설가가
좋은 책을 망치듯 신은 악마처럼 요리사에게 고기를 주었다./가난한 자는 위(胃)를 위해 먹
을 것을 구하고 부자는 먹을 것을 위해 위를 구한다.”
⑤ 퍼시 셸리(1792~1822): 영국 낭만파 시인 셸리는 19살에 아일랜드 혁명운동에 투신했다. 셸리는 자신이 만든 팸플릿 ‘아일랜드 국민에게 고함’ 1500부를 갖고 더블린으로 가서 사람들에게 배포하고 가까운 극장에 모인 청중을 상대로 1시간 이상 열변을 토했다. 셸리와 (유명한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쓴) 그의 젊은 아내 헬리엣이 피타고라스를 본받기로 하고 육식을 그만 둔 것이 바로 그 무렵이었다. 이후 30살의 젊은 나이에 사고로 죽을 때까지 셸리는 채식인이었다. 셸리는 육식이 악의 근원이고 부의 상징이라 생각했다. 셸리는 육식의 문제점을 놀라울 정도로 깊이있게 인식했다. 다음 연재분에서 필자가 다룰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그의 예리한 관점을 인용해본다.
“육식과 음주는 정치와 경제 및 산업 시스템을 한층 복잡하게 만들었다. 가령, 고기 요리에
필요한 향신료는 인도에서, 고기 요리에 잘 맞는 와인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수입하고
있는데 세계 각지에서 약탈해오는 이들 엄청난 사치품은 국가간 충돌의 원인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연 그대로의 식사를 한다면 그같은 복잡함과 충돌을 얼마든지 피할 수 있
다.”
셸리는 “식생활을 개선함으로써 얻는 이점이 크기 때문에 식생활 개선은 다른 어떤 일보다도 위대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곡식과 야채, 과일을 먹는 식생활의 사소한 변혁이 커다란 사회 변혁으로 이어진다고 믿었다.
⑥ 레프 톨스토이(1828~1910): 톨스토이는 농장에서 농민과 함께 식사할 때 특별한 요리를 주문하는 일이 없었다. 크무이스와 쿠와스(검은 빵을 발효시킨 음료)가 평소의 음료였고 조금 더 사치를 부릴 때는 커피와 홍차, 거기에 검은 빵과 파란 캬베츠 즙, 쿠와스를 끼얹은 무, 죽, 사과가 전부인 그야말로 소박한 식사를 즐겼다. 특히 파란 캬베츠 즙은 어딜 가도 톨스토이에게 대접되었다. 59세의 나이에 뒤늦게 채식인이 되기 이전부터도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채식을 하고 있었다. 조금있다 다루게 될 간디 항목에 나오는 하워드 윌리암(Howard William)의 저서 『식이의 윤리』(The Ethics of Diet)에 서문을 쓴 이도 톨스토이였다.
⑦ 헨리 소로(1817~1862): 우리에게 ‘시민불복종’ 사상과 숲속 생활로 유명한 소로의 식사는 지극히 단순했다. 호밀가루와 옥수수가루에 이스트를 넣지 않고 갓 구운 빵과 쌀, 옥수수 밭에서 따온 쇠비름을 삶아 소금에 무친 것, 당밀, 머루, 키위에다 자신이 무척 좋아한 야생 사과와 계절 과일을 먹었고 차와 커피 대신 물을 마셨으며, 우유와 고기는 일체 먹지 않았다. 소로가 고기를 먹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본능적으로 육식의 불결함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육식은 그의 정신세계와 조화되지 않았으니, 시인이었던 그로선 이것이 육식의 가장 큰 문제였을지 모른다. 소로는 가끔 물고기와 산쥐를 잡아 요리를 해먹기도 했지만, 이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 소로가 육식을 하지 않은 또 하나의 이유는 경제적인 문제였다. 비싼 고기와 버터를 사기 위해 돈이 많이 드는데, 돈은 일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일하려면 에너지를 써야 하므로 그만큼 먹게 된다. 쓸데없이 먹기 위해 쓸데없이 일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런 과정이 악순환이라는 게 소로의 지적이다. (‘사용 불가능한 에너지’를 ‘사용 가능한 에너지’로 바꾸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용 가능한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엔트로피 법칙의 핵심을 정면으로 지적한 셈이다.
4. 소크라테스(BCE470~BCE399)
한겨울 마케도니아의 전쟁터에서 얼음 위를 맨발로 뛰어다니는 소크라테스를 묘사한 구절을 보자.
“추위가 정말 매서웠습니다. 모든 병사가 막사 내에 머무르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나가더라도 병사들은 두꺼운 옷을 입고 가죽과 양털로 만든 신을 신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소매 없는, 솜으로 된 외투만 걸치고 신발도 없이 맨발로 얼음 위를 걸어다녔
습니다. 두꺼운 털가죽신을 신은 사람들보다 더 쉽게 말입니다.” --알키비아데스
소크라테스가 동물성 가죽으로 된 신발을 신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은 그가 채식을 했기 때문이다.
『국가』에 등장하는 대화에서 플라톤의 작은 형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에게 단순한 음식들로는 사람들이 만족하지 못하며 더욱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사람들이 육체의 말초적인 감각의 만족을 추구한다면 도시는 점점 더 많은 것들이 필요할 테고 이어서 정의롭지 못한 도시국가로 변해갑니다. 그리고 고기의 등장이 필연적으로 동반되고 고기 소비를 유지하고자 점점 많은 땅과 자원, 사람들이 필요해지고 결국은 전쟁의 발생으로 이어집니다.” 앞서 낭만주의 시인 퍼시 셸리처럼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육식의 근원적 문제점을 간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 예수(?~ACE31/32)
성경에는 예수가 채식을 하였다는 기록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성경의 구절들은 성경이 기본적으로 채식을 옹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의인은 그 동물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나라.”(잠언 12: 10)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
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린도전서 8:13)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로마서 14: 17)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
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로마서 14: 21)
신약성서 어디에도 예수가 고기를 먹었다는 구절은 없다. 그런데 누가복음 24: 42~43에 나오는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는 구절은 어떻게 된 것일까? 이 장면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신 예수를 묘사한 대목이다. 웬지 이런 상황에서 생선을 받아 먹는 예수의 모습은 어색하기 짝이 없다. 그리스어의 생선 ‘LCHTHYS’가 ‘예수 그리스도, 신의 아들, 구세주’를 합성한 단어로 사용한 것임을 간과하고 후대에 잘못 번역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우리에게 통상적으로 알려져 있는 성경에는 이외에도 오역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구절이 더러 있다).
초기 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이 채식주의를 실천했음은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유명한 성 아우구스틴을 비롯한 성인들, 유대 크리스천 분파, 마니교도를 비롯한 영지주의 그룹, 동방 수도원과 은둔 성인들, 서방교회 수도원과 은둔 성인들, 수많은 기독교 신비주의 성자들과 수도원 설립자 등 기독교의 채식인은 기록상으로 수백 명에 이른다. 이들의 스승이라 할 예수를 어렵지 않게 채식인으로 상정해볼 수 있는 근거라 하겠다.
6. 뉴턴(1642 ~ 1727)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은둔에 가까웠던 뉴턴의 삶으로 인해 채식과 관련한 뉴턴의 일화를 찾기가 쉽지 않다. 말년에 뉴턴과 함께 보낸 조카 사위의 기록에 의하면 뉴턴의 일상 식사는 채식이었다. “그는 동물의 살을 거의 먹지 않았고 주로 묽은 채소 수프, 채소와 과일을 늘 양껏 먹었다.” 뉴턴 연구자들에 따르면, 적어도 뉴턴 생애 마지막 5년간은 고기를 먹지 않고 채소와 묽은 수프를 먹었음이 확실하다. 한편, 뉴턴은 아리우스의 교의를 따르는 철저한 청교도였으니, 미국에 첫발을 내디뎠던 청교도 중 상당수가 채식인이었음을 감안할 때 뉴턴도 채식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뉴턴은 피타고라스의 음악에 대한 ‘톤과 화음’의 글들을 읽으며 자기 노트에 “피타고라스가 이미 역제곱의 법칙을 알고 있었다.”라고 기록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피타고라스는 서구 역사 전반을 통해 ‘서구 채식인의 아버지’로서 명성이 높았다. 그러므로 뉴턴이 피타고라스가 강조한 채식의 중요성을, 적어도 그의 글을 통해서라도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 뉴턴에게 채식은 그의 인생 전체를 관통했던 ‘진리에 대한 사랑’의 당연한 실천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7. 간디(1869~1948)
종교적 영향으로 처음에 자연스럽게 채식을 하던 간디는 고기를 먹으라는 친구의 끈질긴 권유로 고기를 먹게 된다. 당시 간디가 다니던 학교에서 유행하던 시도 이에 한몫을 했다. “보자 힘센 영국인들/그들은 작은 인도인을 지배한다./고기를 먹기 때문이지./그의 키는 오 큐핏.” 상황은 바뀌어 영국 유학을 떠나면서 간디는 어머니에게 술과 여자를 멀리하고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간디는 영국에서 채식식당을 찾아내 먹는 문제를 해결하고 채식주의에 관한 많은 책을 사서 읽는다.
“하워드 윌리암(Howard William)의 『식이의 윤리』(The Ethics of Diet)는 역사의 초기에
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식이에 대한 연구의 전기체적 역사였다. 그것은 피타고라
스와 예수로부터 현대의 채식인들까지 모든 철학자와 예술가의 채식을 밝혀 놓으려 한 것이
었다. 안나 킹스포드 박사의 『완벽한 식이의 길』 또한 매력적인 책이었다......”
간디는 영국의 채식인협회가 매주 발간하던 잡지를 탐독하다 스스로 채식인협회에 가입하고 곧 실행위원으로 활동하며 당시 협회에서 활동하던 주요 인물들과 교류하게 된다. 간디의 사회정치적 활동은 내면으로부터의 종교를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이는 채식을 통해 간디가 내면의 평정과 인내, 절제, 신념을 배양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8. 그밖의 유명 채식인들
①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카프카는 철저한 채식주의자였으며 담배와 술, 과자도 멀리했다. 또한 수영, 조정, 승마, 산보 등을 즐긴 스포츠맨이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자연치유법, 호흡 운동법, 의복 개선, 체질론, 생식 등에 관심을 보였다.
② 리처드 기어 (Richard Gere): 최근 방한해 사진전을 개최하고 한국 사찰을 둘러보고 야구경기를 관전하고 돌아간 불자인 그의 말을 인용한다. “지구의 수호자로서, 모든 종의 생물을 친절과 사랑, 그리고 동정심을 가지고 대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다. 그래서 이러한 동물들이 인간의 잔혹성으로 고통받는 것은 이해받을 수 없는 것이다. 제발 이런 미친 짓을 그만두자.”
③ 대니서(Danny Seo): 한국 이름이 서지윤으로 환경운동가이며, 1998 피플지 선정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50인’에 선정되었고, 1998 슈바이처 인간존엄상을 수상했다. 대니서는 “열두 살이었을 무렵부터 나는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동물을 정말 사랑했기 때문이다.”고 토로했다. 당시 그는 TV에서 닭의 도살 장면을 보았고, 먹고 있던 치킨 샌드위치를 쓰레기통에 토했다. 이후 그는 철저한 비건(vegan)이 되었다.
④ 다이애나 왕세자비(Princess Diana):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옷 장식품으로서조차 모피가 쓰인 것은 절대 착용하지 않았다. 다이애나가 채식인이었으므로 그녀의 첫번째 미국 방문 동안 영국 사절단의 방문을 기념해 대규모 17코스의 채식 잔치와 같은 기억할 만한 연회가 개최되었다. 다이애나는 사냥에 참여하는 걸 거절함으로써 왕가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동물에게 해를 끼치거나 동물을 죽이는 것은 그녀의 가장 깊은 신념에 반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⑤ 스티븐 시걸 (Steven Seagal): 영화배우인 시걸은 채식인으로서 대만의 유기견들의 보호를 위해 PETA(People for the Ethical Treatment of Animals)를 대표하여 캠페인을 펼쳤다. 또한 환경보호운동가로서 ‘Save the World Air, Inc’의 대변인으로서 에너지 재활용에 대한 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힘쓰기도 했다.
(참고서적)
* 이광조 〈역사 속의 채식인〉
* 이영화 〈나는 채식하는 오페라 가수〉
* 조엘 펄먼(Joel Fuhrman) 〈내 몸 내가 고치는 식생활 혁명(Fasting and Eating for Health)〉
* 쯔루다 시즈카(鶴田 靜) 〈베지테리안, 세상을 들다(Vegetarian No Bunkashi)〉
* 하버드대학 세계종교연구센터 〈불교와 생태학〉
* 하워드 F. 리먼(Howard Lyman) 〈나는 왜 채식주의자가 되었는가(Mad Cowboy)〉
* 함영 〈인연으로 밥을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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