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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행자의 편지/자유게시판

[스크랩] # 부처님께서 바라시는 실상염불 - 4 / 청화 큰스님


다음카페 : 『가장 행복한 공부』
      
        # 부처님께서 바라시는 실상염불 - 4 / 청화 큰스님
      육조혜능이란 스님은 위대한 도인인데 일자무식입니다. 
      그분은 전혀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도통하고 보니까 빛이 충분히 비치어 
      우주가 훤히 드러납니다. 우주가 하나의 생명으로 보인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분한테 법문을 들으러 수천명이 아주 멀리서 오고 그러니까.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여러분 저같은 사람말을 들으려고 멀리서 자주 오지 마십시오, 
      부처님 가르침을 꼭 믿어 버리면 두 번 다시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대로 믿으십시오” 하셨습니다. 
      제 법문을 들으러 오신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꼭 신인(信認)하시고 바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다시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말씀은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심작시불(心作是佛)이라, 
      우리 마음으로 부처를 이룬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과 위대한 부처님의 마음을 대비해 보아도 조금도 차이가 없는 
      생명의 실상입니다. 
      달마스님께서 이조 혜가스님께 하신 법문도 마음의 실상을 그대로 보이신 것입니다. 
      이조 혜가스님이 달마스님께 가서 “스승이시여,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 
      이 마음을 해결해 주십시오” 하니까 달마스님이 “그대 불안한 마음을 내 놓아라, 
      그러면 내가 그 불안한 마음을 가시게 해주마”하셨어요, 그러나 혜가스님이 
      불안한 마음이 어디에 있느가, 아무리 찿아 봐도 안보여요. 아파하는 마음이 어디에 있고, 
      미워하는 마음이 어디에 있고, 좋아하는 마음이 어디따로 있단 말입니까? 
      좋아하는 마음도 모양이 없고 미워하는 마음도 모양이 없고 
      똑똑한 척하는 마음도 모양이 없습니다. 모양이 없으면서 분명히 존재하고, 
      한도 끝도 없는 것을 구합니다. 김씨나 박씨나 예수나 맹자나 그 마음의 모양은 없습니다. 
      모양이 없다는 것은 사실은 똑같다는 것입니다. 
      모양이 없다는 것은 마음이 얼마만큼 크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도 끝도없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입정(入定)후에 삼매에 든다고 생각할 때, 
      그 때 마음은 사실 허공과 똑 같은 것입니다. 허공이 한도 끝도 없지 않습니까. 
      마음은 한도 끝도없는 것입니다. 성자는 한도 끝도 없는 그 마음, 
      그 마음 자리를 열어서 온전히 간직한 분인 것이고, 우리 중생은 내 마음, 
      내 몸뚱이 내 심장이 있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마음을 열어서 마음이 
      한도 끝도 없이 광대무변한 사람은 몸뚱이도 제 것이 아닙니다. 
      범부와 성자를 구분한다면, 범부는 똑 제 몸, 제 집, 제 가정만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회 봉사를 권하고 역설한다 하더라도 마음을 열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자기 중심을 못 벗어납니다. 남한테 베풀더라도 자기 몫은 남겨두고 
      남한테 베풀어야겠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자는 조금도 주저가 없습니다. 
      주저함이 없으니까, 주린 범한테도 순간 자기 몸을 몽땅바쳐 버립니다. 
      설산동자(雪山童子)가 진리를 구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나뭇가지에 올라가서 
      나찰귀신(羅刹鬼神)한테 조금도 주저없이 자기 몸을 던져 버렸습니다. 
      과거 전생의 석가모니부처님은 십이겁(十二劫)동안을 앞당겨 성불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몸뚱이를 개인적인 존재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연에 따라 잠시간 모양을 나툰 것이지, 어느누구 것이라고 
      소속이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내 몸이나 자기 남편 몸이나 아내 몸이나, 
      인연따라 잠시간 모양을 나투었고 금생에 잠시간 만난 것이지 
      꼭 내생에 다시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영원히 만나는 것은 극락세계에 가서 가능합니다. 
      극락세계는 영원히 한 곳에서 만납니다. 구회일처(俱會一處)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말씀을 믿고 부처님 믿고 염불많이 하면 일념왕생(一念往生)이에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부처님을 생각할 때는 임종때 그 순식간에 
      업장을 다 녹여버립니다. 그때 극락세계에 가서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절대로 자기 소견 하나로 옳다고 고집하지 말고, 모든 문제를 
      부처님법에 비추어서, 부처님 법으로 해결 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본체, 본바탕, 주체성을 바탕으로 판단하고 
      인생관과 세계관을 바르게 세우셔야, 함으로 덤벙거리지 않게 됩니다. 
      천지우주가 일미평등(一味平等)입니다. 모두가 다 무차별하게 부처뿐이에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부처님의 사상대로 생각하는 것이고, 
      또 우리의 불안의식을 온전히 없애는 기르침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우리 중생의 최상의 행복을 위한 그런 말씀입니다.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생각할 때는, 
      본 바탕을 정말로 부처라고 생각할지라도, 인간생활은 역시 업장 많은 
      생활이기 때문에 괴로움이 많습니다. 제아무리 자기가 옳게 생활한다 하더라도, 
      옆에서 미혹 중생이 많아서 여러 가지로 혼란스럽고 불공정하고 
      무서운 산업사회 아닙니까? 어려운 세계에 휘말리지 않고, 칠년 동안이나 
      옥중에서 끝끝내 자기 신념을 바꾸지지 않고 불에타서 죽은 
      이탈리아 수사(修士) 부르노 같이, 우리가 부처님만 믿는 굳건한 신앙심만 있다면, 
      그것 자체가 어디있으나 바로 그것이 최상의 사회적인 봉사가 됩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사회봉사는 물질로 남한테 베풀고, 
      어려운데 가서 같이 도와주고 일 해주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선방에서 공부하는 스님들은 남들이 해주는 것을 다 먹고 
      쓰고 하기 때문에, 어떻게 생각하면 봉사와는 전혀 관계가 없고, 
      중생들한테 신세만 끼치는 존재라고 생각할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생명은 끝도 없는 바닷물같이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우주 에너지가 어떻게 진동하고 운동하는가에 따라서 전자가 생기고 
      결합에 따라 물질이 생기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생명 자체는 
      에너지 불변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항시 그대로 영원히 존재합니다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고,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고, 
      생명자체 에너지의 실체 자체는 항상 그대로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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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가장 행복한 공부
글쓴이 : 여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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