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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3. 광륜

광륜25호 2011년 가을호

이 가을은 염불念佛의 계절 도약의 계절입니다

 

 

 

무주당 청화 대종사

 

 

 

사천왕四天王을 조성해서 회향廻向 법회를 원만히 마쳤습니다. 조성한 목아木芽 선생은 솜씨가 아주 훌륭한 분입니다. 그래서 비록 성륜사가 절은 작아도, 사천왕만큼은 한국 어느 큰 절에 비해 손색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걸작이 되었습니다. 잘 모르는 분들은 모두 다 일합상一合相으로 관찰해서?나무아미타불?하면 됐지, 사천왕을 모실 필요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런 점에 대해서 우리가 회의심懷疑心을 가지면 공부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제가 풀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중생들이 보는 시각이라는 것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현상계, 즉 형이하학적인 세계, 물질세계는 볼 수도 있고 말할 수도 있지만, 형이상학적인, 물질을 초월한 세계는 알 수가 없습니다.

 

가령 원자 구조 이론原子構造理論은 원자핵을 중심으로 전자가 빙빙 돌고 있는 것이지만, 우리 눈에 안 보이니까 전자 현미경으로 가까스로 감별하는 것이지, 보이지 않습니다. 이처럼 모든 분야에서 우리 중생 시야에 들어오는 대상은, 극히 우리 중생의 업장業障에 제한된, 업에 여과되어서 나오는 정도를 보기 때문에, 있는 사실대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천왕도 역시 얼핏 생각할 때는 그렇게 생각이 될 것입니다.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 하실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사실 돈도 많이 들었고 물론 개별적인 시주도 하셨습니다. 그러면 사천왕은 어떠한 존재인가? 사천왕은 우리 주변의 동북을 지키는 하나의 천상적天上的인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불교가 눈에 보이는 세계만 가지고 얘기하면 아주 간단하겠습니다마는, 눈에 안 보이는 세계가 너무 많습니다.

 

부처님의 청정불안淸淨佛眼으로 본다면, 우주를 모두 다 빠짐없이 볼 수 있습니다. 또 부처님 차원까지 미처 못 가고 천상적인 존재만 되어도, 훨씬 우리 인간보다 더 잘 보입니다. 또 보살 지위만 되어도 더 잘 볼 수 있습니다.

 

하여튼 조금도 흠절欠節없고 부족 없이 우주의 모든 것을 명확히 볼 수 있는 것은, 청정 불안에 한해서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중생이 생사내왕生死來往하는 세계가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입니다. 욕심을 주로 하는 욕계가 있고, 욕심을 떠나 버린 색계가 있고, 또는 욕심도 모든 물질적 욕망도 떠나 버린, 이른바 정신만 있는 무색계가 있습니다. 이 삼계三界를 우리 중생들은 자기 업장 따라서 윤회합니다.

 

 

그런데 욕계 내에도 천상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육욕천六欲天이라는 그 천상만 해도 여섯 층계의 하늘이 있습니다. 맨 처음의 낮은 단계가 오늘 우리가 모시는 사천왕입니다.

 

사천왕은 동쪽에 지국천持國天, 남쪽에 증장천增長天, 서쪽에 광목천廣目天, 북쪽에 다문천多聞天, 이렇게 네 개의 천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왕천은 동북 사방四方을 지키는 천상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수미산의 사방을 지키는 세계인 사주四洲가 있습니다. 사주는 천상이 아니라, 우리 지구같이 지성적地性的인 땅, 지성을 못 떠나는 세계가 사주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나 이런 데는 남섬부주南贍部洲이고, 그리고 동쪽 승신주勝身洲, 여기는 우리 지구보다 업장이 가벼운 중생이 사는 세계입니다. 서쪽은 우화주牛貨洲인데, 지구보다 훨씬 맑은 존재가 있습니다. 그리고 북쪽은 구로주瞿盧洲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 지구 가운데서 한국은 그야말로 조그마한 존재 밖에 안 됩니다. 사대주 중에서도 우리 지구 덩어리가 제일 작습니다. 업장도 제일 무거운 곳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조심조심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어서도 다시 지구에 인도환생人道還生한단 말입니다.

 

우리 생명은 죽을래야 죽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무시이래無始以來로 우리 생명은 절대로 죽음이 없습니다. 생명 자체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죽음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금생에 생을 그만두면, 태어나기 싫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지은 대로, 잘못 살면 지옥도 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런 도리를 안다면, 사실 함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대로 가니까 말입니다. 우리가 욕 한 마디 하면 욕 한 마디 한 것, 남 미워하면 미워한 그대로 업으로 남습니다.

 

이란 따지고 보면 굉장히 지겹습니다마는, 한편으로 생각하면 고마운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나쁜 업을 지으면 그것에 상응相應되어서 나쁜 곳에 태어나지마는, 좋은 업을 지으면 또 좋게 태어납니다. 지금까지는 가난하고 불행하더라도, 당장 마음을 바로 먹고 바르게 행동한다면, 우리 업이 그냥 바뀌어 집니다.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도인道人도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인간 존재라는 것은 항시 비약飛躍할 수 있습니다. 초월超越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 살았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그때 잘못 산 우리 마음을 혁신시켜야 합니다. 마음을 혁신시키는 가장 훌륭한 작업이 신앙 아니겠습니까? 가령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염불을 하고, 또 화두를 의심할 때는 화두하고, 이런 것은 모두 우리 정신을 비약시키는 가장 좋은 지름길입니다.

 

그래서 욕계도 여섯 천상이 있어서, 사왕천 그 다음에는 도리천灱利天이 있습니다.

부처님을 낳으신 어머니 마야부인摩耶夫人도 맨 처음 돌아가시고는 바로 극락세계에 못 갔습니다. 인간으로 해서 지은 바가 그렇게 많기 때문에, 극락세계極樂世界에 비약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인 아들한테 대한 간절한 애착愛着 때문이었습니다. 설사 업장이 가볍다 하더라도, 애착을 많이 품으면 분명히 못 갑니다. 자기 재산에 대해서나 자기 처에 대해서나, 누구를 그리워한다던가 또는 미워한다면 분명히 못 갑니다.

 

여러분들이 가끔 영혼 천도도 하시지 않습니까마는 그 내용은 집착執着을 다 풀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미움이나 사랑이나 모든 것을 풀어 버리고, 아무런 미련 없이 빨리 벗어나고 도약해서 영생의 극락세계로 가라는 그런 법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어머니 같은 대성자大聖者를 낳으신 분도 아들에 대한 애착, 아들을 미처 키워 보지도 못하고 이fp 만에 돌아가시는 간절한 그 마음으로 인하여, 도리천 밖에 못 가셨단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공부하시고 교화敎化하실 때, 한 여름 동안에는 삼 개월 동안 오로지 도리천에 올라가셔서, 어머니를 비롯해서 도리천 천상교화天上敎化를 시키셨습니다. 부처님도 그렇게 효성孝誠이 지극한 분입니다.

 

부처님이 열반涅槃에 드실 때에도, 도리천 어머니께서 염려가 되어서 천상 사람들을 거느리고 부처님 곽주변에 와서 눈물을 흘리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그 관가운데서 벌떡 일어나셔서, ?어머니시여, 모두는 다 무상無常한 것입니다. 이 있는 것은 반드시 죽어야 되고, 만나면 반드시 헤어져야 하는 것이니, 마음을 거두셔서 평정平靜한 마음으로 극락세계에 왕생하소서? 하고 간절히 말씀드리니까, 도리천에 다시 올라가셨습니다. 그래서 도리천에 가셔서 부처님께서 특별히 삼 개월 동안이나 어머니와 천상사람들을 위해서 설법을 하셨습니다.

 

도리천 다음에 야마천夜摩天입니다. 야마천은 염라대왕閻羅大王이 있는 세계가 야마천입니다. 사왕천, 도리천, 야마천은 같은 천상이지만, 지구라든가 땅 덩어리같은 오염汚染된 영역을 미처 못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지거천地居天이라 합니다. 그리고 같은 욕계천상欲界天上도 도솔천兜率天 또는 화락천化樂天 또는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은 땅덩어리의 오염된 기운을 벗어나서, 지금 말로 하면 성층권 밖이 되겠지요. 즉 성층권成層圈 밖에 공기가 오염이 안 된 그런 천상이 공거천空居天입니다. 아까 말한 지거천하고 합해서 육욕천六欲天입니다. 여섯 하늘입니다.

 

그러면 여섯 하늘은 어떻게 해서 욕계천이라고 하는가? 이것은 남녀 이성간異性間의 음탕한 욕심, 음식에 대한 욕심, 또는 잠 욕심, 이런 욕심을 온전히 다 뿌리 뽑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상당히 공부했다고 하더라도, 뿌리를 못 뽑으면 욕계의 영역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욕계를 벗어나면 육욕천상을 벗어나서) 우리가 정진을 통해 인간의 기본적基本的인 욕심을 떠나면, 비로소 욕계를 벗어나서 색계에 태어납니다.

 

색계라는 것은 비록 물질세계를 못 떠났지만, 보통 물질세계가 아니라 이른바 광명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물론 이 광명은 순수純粹 광명은 못 됩니다. 광명으로 빛나고 있지마는, 물질적인 욕망은 완전히 못 떠난 것이 색계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이제 순수한 정신만 가지고 느끼는, 색계를 벗어난 무색계가 있습니다.

무색계는 아예 물질적인 것은 없습니다. 욕심도 없고 진심瞋心도 떠나고, 순수한 정신만 존재합니다. 그러나 정신만 존재하지, 무명심無明心의 범위는 못 떠나 있습니다.

 

무명심은 무엇인가 하면, 내가 있고 네가 있단 말입니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는 존재에 대한 분별심分別心을 내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못 떠나기 때문에, 미처 무색계도 못 떠납니다. 그래서 욕계색계무색계를 온전히 떠나야, 이른바 윤회輪廻를 벗어납니다.

 

우리 중생은 업을 지으면 지은 대로, 이른바 업의, 카르마(Karma)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공부를 좀 했다고 하더라도, 아는 것은 많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는 것 그것으로는 윤회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실험적實驗的 증명證明을 해야 업을 벗어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중생이 생사 내왕하는 욕계색계무색계를 나누어 보면, 이십팔천二十八天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십팔천을 다 뛰어넘어야 할 것인데, 하나씩 하나씩 사왕천에 있다가 가까스로 한자리씩 도리천에 올라가고, 또 올라가고 그러다가는 한도 끝도 없습니다. 여기에서 부처님이나 성인들의 가르침이 한없이 고마운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성인들의 가르침은 우리를 초월케 하고 도약을 시킨단 말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좋은 가을날에 여기까지 오신 것은 도약을 위해서입니다. 꼭 도약을 하셔야 됩니다. 부처님이나 무수한 도인들이 다 증명을 했습니다. 아까 보니까 보적거사寶積居士가 보입니다. 보적거사가 번역한 화두놓고 염불하세라는 책이 있는데 굉장히 좋은 책입니다.

 

중국의 인광대사印光大師란 분이 1940년쯤에 열반하셨는데 아주 위대한 분입니다. 참 진실한 분입니다. 그래서 인광대사 가언록印光大師嘉言錄이라는 책을 화두놓고 염불하세로 제목을 붙여서 풀이한 것인데 좋은 책입니다.

 

한국사회에서 근래, 그렇게 진지하고 체계 있게 염불을 풀이한 책이 별로 없습니다. 고구정녕苦口叮寧하게 풀이를 했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증명을 다해서 다양多樣하게 다른 공부와 대비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번역을 잘해서 읽기도 참 좋고 하니, 꼭 보시도록 제가 권해 드립니다.

 

염불이란 것이 생각할 염자 부처 불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중생들이 생사 내왕하는 부처까지 다 합해서 십법계十法界라고 합니다. 화엄경華嚴經에도 또 다른 경에도 말씀을 다 했습니다마는 열 가지 경계境界가 있습니다. 열 가지 경계 가운데 제일 밑인 지옥아귀, 아귀는 죽어서 가는 나쁜 귀신들이란 뜻입니다. 아귀 다음에 축생수라, 수라는 업장이 무거워서 싸움만 좋아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만도 못하지요. 다섯 번째가 우리 인간 세계입니다. 열 가지 경계 가운데서 우리 중생이 다섯 번째입니다. 지옥아귀축생수라인간이니까, 우리도 무던히 좋은 일을 많이 해서 인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5계를 지키고 하품십선下品十善을 지키면 인간으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중품中品10선을 지키고 선정禪定을 닦아서 마음을 가지런하게,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공부를 하면, 욕계 천상에 태어납니다. 그래서 중품상품까지 올라가서 우리가 착한 일을 많이 하면, 깊은 선정에 듭니다. 여러분들, 삼매三昧란 말씀 들으셨지요. 삼매는 선정이라고도 하는데 인도 말이며 우리 마음이 바른 정심正心에 입각立脚해서 흐트러지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들은 참선을 하고 염불을 해도 금방 산란散亂스럽게 되지마는, 참답게 삼매를 성취할 때는 마음에 동요動搖가 없습니다. 삼매에 들어 마음에 동요가 없어야 마음을 비로소 깨닫는 것입니다. 따라서 삼매에 못 들면 절대로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경로經路를 밟던지 간에 삼매에 들어가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고요해서 심일경성心一境性이 명경지수明鏡止水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밝은 거울이나 고요한 바닷물 같이 되어야 삼매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삼매에 들어야 우리 마음의 바탕이 보입니다. 항시 말씀드리지마는, 우리 마음은 본래로 자성自性이고 불성佛性이고 본래면목本來面目입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의 우리 마음은 완전한 마음이 못 됩니다. 참마음이 못 되어 있고, 지금 이 마음은 겉에 뜬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의 그 근본 자리, 본래 근원적인 마음은 바로 부처입니다. 부처 불, 성품 성, 불성입니다. 스스로 자, 성품 성자 자성自性이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의 본래면목은 바로 자성이요, 불성이요, 생명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불성이나 자성 자리에 못 가면 윤회를 거듭합니다. 그러기에 지옥이나 축생이나 아수라나 인간이나 이런 존재가 되는 것은, 모두가 다 우리 마음이 본래 마음 그 바닥까지 사무치지 못하고, 다 못 들어간 것을 의미합니다. 불성이란 것은 한계限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광대무변廣大無邊하여 끝도 갓도 없는 것이 마음입니다.

 

여기 계시는 여러분의 마음도 다 그렇습니다. 겉에 뜬마음은 자기 모습이 다르고 이름이 다르듯이 조금씩 다르겠지요. 그러나 마음의 바탕은 똑같이 다 불성이고 자성입니다. 성인聖人들은 자성불성을 바르게 깨달은 분들이며, 중생은 참 마음인 불성 자리에 가다가다 못간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제 일로 덮이고 가리어져 있어서, 지혜智慧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지옥에 있는 마음입니다. 그 지옥은 사고思考할 틈이 없습니다. 너무 고통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간지옥無間地獄이라 합니다. 그런 지옥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가 어쩌다가 다행히 사람이 되었습니다.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 눈먼 거북이가 바다에서 떠돌다가 나무토막 만난 격입니다. 물론 엄격히 말하면 우연도 아닙니다마는 어쩌다가 우리가 다행히 사람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축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부모님한테 감사하고 모든 존재存在에 감사해야 됩니다. 저같은 사람은 나이가 많아지니까, 모든 분들의 은혜恩惠에 뼈저리도록 감사를 느낍니다. 힘이 부치니까, 자기가 쓰는 이불 하나도 치우기 힘듭니다. 하기야 손주가 있고 며느리가 있고 하면 되겠지만, 그런 신세는 못되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은 그야말로 불성이고 자성이고 참다운 마음입니다. 그래서 염불하는 것은 내 마음의 근본 자리, 내 마음의 근본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근본은 물질이라든가 어떤 무생물이 아닙니다. 하나의 생명입니다. 살아 있는 생명입니다. 우리에게 마음이 있으니까, 살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금생今生에 살다가 인연因緣이 다 해서 마음이 떠나 버리면, 몸뚱이 밖에 무엇이 남습니까? 물질만 남습니다.

 

물질이라는 것은 사실은 실존인實存的인 존재가 아닙니다. 실체實體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은 잠시간 우리 마음에 덮인 업이 각 원소를 긁어모아서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실존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하지 않습니까? 몸뚱이나 다른 물질이나 모두가 다 순간순간 변화하여 무상하단 말입니다. 일반 중생들은 없는 것을 그대로 보지를 못하니까,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중생의 병이 있습니다. 자기 재산이나 권세나 모두가 다 잠시 지금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 실존적으로는 있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실지로 있다고 보기 때문에, 자기 가족을 위해서, 자기 몸뚱이를 위해서, 허망한 자기 명예名譽를 위해서, 소중한 자기 생명을 낭비를 합니다.

 

부처님 말씀은 간단명료합니다. 그렇게 복잡하고 어렵지가 않습니다. 우리 중생이 무명심 때문에 잘못 살고, 무지 무명을 못 떠나서 말로 생각으로 몸으로 스스로 업을 짓고, 자기가 한 대로 당한단 말입니다.

 

부처님 상을 보면, 부처님께서 오른 손을 이렇게 하고 계십니다마는, 이것은 무외시인無畏施印입니다. 중생의 공포를 덜어주시는 서원誓願을 상징하는 모습입니다. 왼손을 아래로 하신 것은 여원인與願印입니다. 중생이 바라는 대로 다 주겠다는 부처님의 서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부처님 서원은 참 철저합니다.

 

부처님한테서는 어떻게 그런 자비가 나오는가? 천지 우주가 오직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존재의 뿌리가 같습니다. 김씨도 광대무변한 마음이고, 박씨도 광대무변한 마음이고 모두가 다 광대무변한 마음입니다. 광대무변한 마음인 것을 모르고 욕심을 내면, 그마만큼 우리 마음이 좁아집니다. 옹졸해집니다. 좁아지면 얼굴도 찌푸러지고 동시에 우리 몸에도 해가 옵니다.

 

불자님들, 부처님 가르침은 어느 면으로 보나, 우리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나, 가장 도움이 되는 그런 가르침입니다. 자기 건강이나 가족이나 사회를 위해서나, 정치를 위해서도 최상의 가르침입니다.

 

인간이 본래 타고난 근본적인 성품은 이처럼 고귀하건만, 금싸라기 같은 불성 보배를 바로 쓰지 못하고 인생을 허무한 곳에 쓰고 있습니다.

 

방금 전에 화두놓고 염불하세를 잠깐 이야기하면서 말했습니다마는 그 화두란 것도 어디서 나왔는가 하면, 중국 송나라 때 나왔습니다. 화두를 지금 놔야 한다는 당위성當爲性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우리 불자님들도 깊이 생각하십시오. 소홀히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화두를 자기 할아버지가 했다던가, 금생에 자기 스승이 했다던가, 또는 전통적으로 우리 종단宗團에서 했다던가 하는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인습적因襲的으로 묵수墨守해서 덮어놓고 따라갈 그럴 때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은 정보화 시대아닙니까. 정보화 시대는 지적인 정보를 가지고 정사正邪를 따져야 합니다. 비판해서 가려야 합니다. 화두라는 것은, 중국 송나라 때 대혜종고大慧宗杲 스님이 비로소 정형화定型化시켰습니다. 달마스님이 만든 것도 아니고 또는 2조 혜가慧可, 3조 승찬僧粲, 4조 도신道信, 5조 홍인弘忍, 6조 혜능慧能, 그런 분이 만든 것도 아닙니다. 또 그 뒤 마조馬祖스님이나 임제臨濟스님이나 그런 분들이 만든 것도 아닙니다. 또 송나라 때도 다 화두를 한 것이 아니라, 대혜종고스님 일파에서만 화두를 정형화시켜 유도誘導했습니다. 그 당시도 저사抵死해서 화두를 반대한 스님 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는 화두 없이 잠자코 마음을 관조觀照하자는 조동종曹洞宗의 천동정각天童正覺이었고, 또 하나는 ?기왕에 화두를 할 바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 넉자 화두를 해라?하시고 나선 분은, 대혜종고大慧宗杲 스님과 같은 시대의 진헐청요眞歇淸了스님이었습니다.

 

진헐스님은 ?기왕에 화두를 할 바에는 아미타불 넉자 화두(四字名號)를 해라. 아미타불이라는 것은 우리 마음의 본래면목이기 때문에, 또 우리 마음의 본래 자리를 깨닫는 것이 불교이기 때문에 참선을 하는 것이니까, 기왕에 화두를 할 바에는 의심만 주로 하는 쪽이 아니라 부처님을 백퍼센트 신뢰하는 아미타불 화두를 해라?하면서, 그렇게 아미타불 화두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송나라를 지나 명나라 때가 되었습니다. 제가 구구하게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여러분들이 바빠서 역사적 고찰을 하기가 어려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명나라 때는 연수年數도 많고 송나라 때보다 고승高僧이 훨씬 많이 나왔습니다. 바로 화두를 한 그 파에서 많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화두를 반대했습니다. 고승들의 종파는 같은 화두파였는데, 그 분들은 다 화두를 반대했습니다. 누군고 하면 운서주굉雲棲袾宏(1532~1612)스님, 저 유명한 선관책진禪關策進을 쓰신 바로 그 스님입니다. 그 스님도 명나라 불교를 지도하다시피 하신 분이었습니다. 명나라 때 제일 유명한 분입니다.

 

또 운서주굉雲棲袾宏(1532~1612)스님, 다음에 감산덕청憨山德淸(1546~1623)스님 이 분도 위대한 분입니다. 또 지욱우익智旭藕益(1596~1655)스님 그리고 또 자욱진가紫旭眞可(1543~1603)스님, 이 네 분이 명나라 때 사대고승四大高僧입니다. 사대 고승이 다 한결같이 염불 쪽에다 역점을 두고서 불교를 창도創導하신 분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 한국에서는 어찌하여?화두 아니면 참선이 아니다? 이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송나라 때가 한국으로 치면 고려高麗 때에 해당합니다. 당시 중국에는 대혜종고스님이 이끄는 세력이 제일 강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법을 배울 때 그 중 세력이 제일 강한 쪽에 가서 배우려고 하겠지요. 그래서 그 화두하는 쪽에 가서 배워 왔습니다.

 

그때는 마침 한국은 고려 말엽으로 불교가 정치 세력과 밀착되어, 신돈?같은 사람이 나올 정도로 부패 타락했습니다. 새로운 정치 지배세력인 이씨 조선이 서고, 이조오백년李朝五百年 동안에는 고려 때 불교의 잘못으로, 부패한 과보果報로 배불排佛이라, 유교인儒敎人들에게 핍박逼迫을 당해서 스님들이 도성 안에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불교가 발전할 수 있겠습니까? 중국은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때가 불교가 가장 왕성할 때였는데, 불행히도 명나라 때 불교가 우리나라에 못 들어왔단 말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일제日帝 강점기 36년간이나 또 815해방 이후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부처님 가르침이 제대로 발전을 못했습니다.

 

어떤 스님네는 화두를 한 번도 안 해 보고도, 또 참선도 안 해 보고도, ?화두 아니면 참선이 아니다?고 합니다. 한국 선방의 모습이 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선방에서도 화두 아니면 참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달마스님이 한 것도 아니고, 석가모니가 한 것도 아니고, 육조대사六祖大師가 한 것도 아니고, 지금 참선의 교과서敎科書 같은 육조단경六祖壇經에도 화두란 말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다만 여러분들이 일체삼신자성불一體三身自性佛이라, 우리 마음이 본래로 자성이고 불성입니다. 이러한 불성이 끝도 갓도 없이 꽉 차 있는 이 자리를 청정법신이라고 하며, 이 자리가 내 마음 자리이기도 합니다. 이 청정법신淸淨法身 가운데는 만공덕萬功德이 차 있는데, 이것을 ?자비다, 지혜다?라고 합니다. 이것을 보신報身이라고 합니다.

 

이 법신, 보신을 근거로 이루어지는 것, 즉 현상적現象的인 만유가 화신化身입니다. 이 모두가 다 우리 마음에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계발만 못하는 것이지, 우리한테 몽땅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글자를 안 배워도 우리한테 다 들어서, 이것을 불교 용어로 원만구족圓滿具足이라 합니다. 다 들어 있는 내 마음입니다. 학교 갈 수 없으면 안 가도 무방합니다. 우리한테 모두가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같은 분도 대 도인이고 육대조사지만, 일자무식이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석가모니께서도 여러 가지 학문을 배우셨지만, 다 놔 버리고 육년고행六年苦行에 참선을 했지 않습니까? 오직 명상瞑想만 했단 말입니다.

 

여러분께서도 석가모니만 못할 이유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도 석가모니께서 갖추고 계시는 지혜나 덕성을 다 갖추고 계십니다. 또한 방법도 쉽습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라는 생각을 한 생각도 안 놓치고 나간다면, 그냥 삼매에 듭니다. 삼매에 들면, 삼매 가운데서 우리 마음의 본래면목 자리, 불성을 깨닫게 됩니다. 학문적으로 못 배웠다 하더라도 슬퍼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은 어떤 상황狀況에 있든지, 저 같은 팔십 노장이나 어린아이나, 모두가 다 부처님,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여불성은 더하고 덜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생사生死도 없어 영원히 죽지 않고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불구부정不垢不淨하여 오염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삶의 고뇌苦惱가 심해도 오염이 안 됩니다. 그 불성은 바로 우주宇宙의 참다운 생명의 빛입니다. 우리 중생의 눈에는 안 보이지만 불자님들이 일심정념一心正念으로 부처님의 명호名號를 외운다면, 마음이 모아져서 차차로 얼굴도 빛나고 눈도 빛나고 부처님 광명도 볼 수 있습니다. 염불 회향문에 이런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광명변조光明遍照, 천지우주에는 오직 부처 광명으로만 충만해 있습니다. 부처님 광명이나 우리 마음의 본성이나, 모든 존재의 근본 모습은 한계가 없습니다. 물리적인 빛에는 한계가 있지마는, 생명의 빛은 한계가 없습니다. 끝도 갓도 없이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차근차근 닦아 깨달아 가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서서히 광명이 찾아옵니다. 광명이 빛나면 우리 몸도 가벼워지고 마음도 가벼워지고 행복도 충만해 진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가르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요익饒益한 것을 우리한테 축복하는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부처님의 광명이 우주에 두루 충만해 있어도, 우리 중생이 외면하면, 있는 것도 다 찾지 못합니다. 어린애가 어머니에게 졸라야 사탕도 사 주고 젖도 주시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중생염불불환억衆生念佛佛還憶이라, 중생이 부처님을 간절히 그리워해야, 부처님도 중생을 그리워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생각하고 이름을 부르고 하셔야 됩니다. 그것은 허망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고구 정녕히 타일러 주신 것입니다. 어느 모로 보나, 어느 면으로 보나, 닦기도 좋고 공덕도 빠르고 말입니다.

 

혜원대사慧遠大師가 말한 공고이수功高易修, 공이 높고 또 닦기가 쉽단 말입니다. 극락세계란 것이 우리 근본 고향이어서, 우리 중생은 누구나 다 근본적인 향수가 있습니다. 근본적인 향수가 무엇인가 하면, 우리 생명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간절한 그리움인 것입니다. 그런 간절한 그리움이 있기 때문에, 그런 그리움에 편승便乘해야 됩니다. 부처님한테 대한 간절한 마음으로 내 고향, 내 생명의 근본 자리, 즉 부처님을 간절히 그리워하고 추구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모든 행복과 공덕이 약속된 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싫다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운 갈앙심으로 부처님을 간절히 부르십시오. 이 가을에 명상을 하셔야 됩니다. 이 서늘한 가을에 우리의 그리운 고향을 찾기가 제일 좋습니다. 가을은 정말 부처님께서 베풀어 주신 참 은혜로운 시절 인연입니다. 이 서늘한 가을에 우리 생명을 낭비하지 마시고, 하기 쉽고 공이 많은 염불로 본래면목 자리를 훤히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가을은 부처님을 부르는 계절입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 글은 2001107일 성륜사 사천왕 점안식 때 설하신 큰스님 법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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