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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3. 광륜

광륜23호 2555년 봄

 

 

 

 

광륜 통권23호 2555년 봄



*특집화보*


중도실상

어디에도 안 치우치고 모두가

다 포함된 자리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듯이

허망무상한 상만

있다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텅 비어서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조금도 치우침이 없이

모두를 다 초월한 자리이며,

모든 성자들이

체험하는

참다운 생명자리입니다.

일체가상을 떠나서

인생과 우주

본래생명의 실상자리가

바로 중도실상 자리입니다.


           -수행한담 중에서-


하루 한 끼니만 먹으면 몸이 굉장히 가볍습니다.

몸이 가볍다는 것은 그만치 피 순환이 잘 된다는 것이고

또 피 순환이 왕성하니까 병균이 못 침범하겠지요.

사실은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하루 한 끼 드셨습니다.

나는 재가불자들도 적어도 한 달에 여섯 날

오후불식하라고 권합니다.

‘6재일’이라 해서 한 달 가운데 스스로 정해서

여섯날은 출가한 셈 치고 생활규범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수행한담 중에서-


길을 갈 때는 먼저 길목을 알아야 합니다.

실천에 앞서서 이론이 있어야지

이론 없이 실천만 있으면

맹종이 되는 것이고

빗나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꼭 이론이 앞서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부처님께서 밝혀 놓으시고

무수한 성자가 탄탄대로를 닦아놓으신

그대로 따라가면 되는 것인데

길목도 연구하지 않고서 동서를 헤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편안하게 되어있는

환한 길을 인도하는 것

안심법문(安心法門)입니다.


     -수행한담 중에서-


어느 누구나 성자가 되려면

깊은 삼매에 드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 과정이 없이 성자가 되려고 하니까

무리가 생기고 폐단이 생기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나도 과연 성불할 수 있을까’ 하고

스스로 한계를 의식하며 자신 없어 합니다.

잘못된 생각이지요.

누구나가 삼명육통을 다 할 수 있고,

위대한 공덕이 있는 성자와 내가

조금도 차이가 없다고 보는 것

불법입니다.


    -수행한담 중에서-

                    무엇이 바른 명상법인가


                                   -무주당 청화대종사-


개개원성(箇箇圓成)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낱낱의 모든 하나하나의 존재가 본래로 성취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때는 바야흐로 명상하고 사색하기 좋은 계절입니다. 그런데 어떠한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수승(殊勝)한 명상법이라고 할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어떤 방식을 취해야 가장 능률적이고 부처님 제자로서 바른 명상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명상법 간택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듣는 바에 의하면 유교(儒敎)식의 명상법이 있습니다. 그것도 훌륭한 명상법입니다. 유교식은 존심(存心)이라 하여 우리 마음을 그 중심에다 놓으려 하는 것입니다. 우주는 이(理)와 기(氣)의 합심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이 기의 근원자리가 태극(太極)이라서, 이 태극이라는 진리의 중심에다가 마음을 머물게 하는 것이 유교식의 명상법입니다. 그 외에 기독교 명상법이 있고 불교 명상법으로서 위빠사나 명상법이 있습니다. 진주도 위빠사나 명상법이 있을 것입니다만은 서울에는 몇 군데나 있는 모양입니다.


위빠사나 명상법은 근본불교의 명상법입니다. 이른바 고(苦), 공(空), 무상(無常), 무아(無我)라는 우리 존재의 본바탕을 여실하게 밝히는 명상법입니다. 이것도 굉장히 좋은 명상법이고 특히 미얀마라든가 태국, 스리랑카 같은 남방불교 쪽에서는 주로 위빠사나를 합니다. 이 짧은 시간에 위빠사나를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근본불교에서 행하는 훌륭한 명상법의 하나인 것을 말씀드립니다. 이것은 제법(諸法)이 허망무상(虛妄無常)하다, 제법이 모두 공(空)하다는 이런 도리까지는 이를 수 있는 명상법입니다. 하지만 제가 서두에서 말씀드린 일체존재가 개개원성이라는, 모든 존재가 본래(本來)로 원만히 갖추고 있다는 도리에 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 유포돼 있는 단학명상법 즉 단전주, 단전호흡 명상법도 있고 또 아바타 명상법도 있습니다. 제가 이와 같이 말씀드리면 저 노장이 무조건적으로 비판한다고 생각하시지 말기 바랍니다. 제가 피상적으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 명상법들이 어떤 것인가 하여 몇 번이고 읽고 검토해서 비판하는 것입니다.


아바타 명상법은 위대한 미국인 해리팔머가 만든 것입니다. 지금도 조직 확대를 위해 세계 각국을 돌면서 분주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불교인 입장에서 본다면 사실은 별로 좋은 명상법이 못됩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그들은 우리 마음이 개발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연구해서 만든 것인데, 그 사람들은 마음 자체가 무엇인지 모른단 말입니다. 해리팔머는 얼굴이 아주 호의적로 생겼는데 그 사람이 쓴 것을 보니까 부처님 가르침이 대체로 우리 마음이 어떤 것인가. 마음을 개발해서 또 어느 방향으로 우리 마음을 인도할 것인가. 또 나아가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이런 핵심적인 것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성인의 경계로 이끄는 높은 이상적인 가르침이 없어요. 그래서 ‘아, 이것도 저분이 돌아가시면 그것으로 끝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명상법이 나왔지만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명상법들은 상대적인 하나의 마음을 개발하는 법이지 부처님 가르침같이 절대적인 궁극적인 가르침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부처님 가르침 주위에 있다는 사실을 지극한 행복으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동시에 부처님께서 어떻게 마음 개발하는 방법을 말씀했는가를 아셔야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불교의 명상법은 한 말로 하면 참선법(參禪法) 아니겠습니까? 참선법도 따지고 보면 명상법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차원의 문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만은, 참선법은 이른바 삼매법(三昧法)입니다. 명상이나 삼매나 참선이나 다 그 개념 내용은 비슷비슷합니다. 그래서 참선법을 이야기할 때는 먼저 이른바 외도선(外道禪)이라는 이른바 정도(正道)가 아니라 외도를 하는 선이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외도명상법입니다.


그러면 외도 명상법이란 어떤 것인가? 이것을 명상하고 있으면 마음이 맑아지고 몸도 건강해지고 운수도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즉 그러한 세간의 유위법(有爲法), 세간의 때를 벗어나지 못한단 말입니다. 이른바 인간의 욕망의 충족을 위해서 하는 법이 외도명상법입니다.


그 다음 좀 차원이 높은 것이 범부명상법(凡夫冥想法)입니다. 이것은 외도 보다는 한 차원이 높습니다. 어떤 것이 범부명상법인가? 그것은 적어도 인과는 믿는단 말입니다. 인과법을 믿는다는 것은 아시는 바와 같이 선을 행하면 당연히 행복이 그 과보로 올 것이고 악은 악의 업보로 해서 틀림없이 불행이 온단 말입니다. 이런 정도의 인과응보의 범주 내에서 믿는 명상법이 즉 범부명상법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한 차원 더 높은 명상법이 이른바 소승명상법(小乘冥想法)입니다. 소승명상법은 어떠한 것인가.

부처님 가르침은 어느 때나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하신 가르침입니다. 금강경에 부처님 말씀은 여어(如語)라 했습니다. 부처님 말씀은 여실(如實)한 말씀이란 말입니다. 절대로 허튼 말씀이 없습니다. 따라서 소승명상법은 부처님가르침에 의지해서, 이 몸이 자기 존재가 본래로 허망한 존재란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과학적으로도 완벽한 가르침입니다. 과거 고전물리학이나 현대물리학이나, 어떤 면으로 보나 부처님 가르침은 다 상통(相通)하는 완벽한 가르침입니다. 왜냐하면 현대물리학이 여태까지 애써 발견한 결과가, 모든 존재는 본래(本來)로 비어있다는 소식입니다.


우리는 조금 전에 반야심경을 독송했습니다. 아마 반야심경의 뜻을 알고 독송한 분은 귀하시겠지요. 반야심경은 눈에 보이는 존재든 관념적인 존재든 모든 존재가 다 비어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법문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오온개공(五蘊皆空)입니다. 오온개공이라는 말에 그렇게 심심미묘(甚深微妙)한 뜻이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상적인 존재 뿐 아니라, 자기의 육신 또는 관념, 모두가 본래 존재성이 없단 말입니다. 애써 명상을 한다고 하더라도, “금쪽같은 몸, 이것이 소중하고, 보이는 환경도 지금 내가 보는 대로 실존적인 대상이다”고 생각한다면 참다운 명상이 못됩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봐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부처님 법에 따르는 명상법이 됩니다. 왜냐하면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상대적인 유위법(有爲法)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한계적인 것이지, 영원한 해탈의 법이 절대로 못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해탈법이란 영생의 행복을 보장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소승적인 명상법은, 우선 자기 존재가 본래로 존재성이 없다는 것을 믿고, 해탈을 위해 닦는 선입니다.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잠시간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 우리 몸입니다. 현대물리학도 이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각 원소가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잠시 모였습니다. 우리 마음도 불교에서 말하는 수상행식(受想行識), 감수하고 상상하고 미워하고 분별시비하고 이런 우리 마음의 부스러기가 잠시 인연 따라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철학적으로 심오한 것입니다. 인연생(因緣生)이라, 인연 떠나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연 따라 생긴 것은 인연을 다하면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인연 따라 생긴 것은 한순간도 머묾이 없습니다. 몇 억 분지 1초간의 찰나도 머묾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무상입니다. 공부하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不確定性原理)라, 미세한 부분에 가서는 측정을 못합니다. 왜 측정을 못하는가. 정확한 위치를 측정할 수 없고 정확한 운동을 측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으로 아! 이것이다, 저것이다, 의학적으로 어떻게 된다, 인과적으로 어떻게 된다, 그렇게 알고 있지만, 그것은 거시적으로 우리 눈에 보이는 한계에서 그런 것이지, 눈에 안 보이는 소립자(素粒子)단계에서는 측정을 못합니다. 위치와 운동을 측정할 수 없습니다.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는 측정을 못합니다. 따라서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 불확실한 것이 이른바 우주의 일체존재의 근원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면 확실한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성자(聖者)의 법, 부처님의 법은 확실합니다.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이것이 불성이란 말입니다. 우주의 도리이기 때문에 진여(眞如)입니다. 그 자리는 다만 하나의 도리에 그치지 않고, 바로 우주의 생명, 우주의 에너지이기 때문에 불성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현대물리학이라는 과학적인 학문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체의 모양이 있는, 모습이 있는 존재는 모두가 비었다, 이런 소식까지는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이 비어있는 저쪽은 무엇인가? 이것은 측정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성자의 투철한 깨달음의 안목에서만이 불성자리는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원효스님, 의상스님, 또는 보조스님, 대각국사, 서산대사 등 한국의 도인들은 그런 자리를 모두 몸소 체험하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인이라고 못하는 것입니다.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본래 자성자리를 체험하고 그대로 여실하게 말씀해왔으므로 도인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명상법으로 다시 돌아가서 소승적인 명상법은 다만 자기 존재의 허무함을 느끼고서 닦는 명상법인 것이고 그 다음 한 차원 높은 대승명상법(大乘冥想法)은 무엇인가?

대승명상법은,  비단 자기 존재의 허무성이나 자기 존재가 한 생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꼈다하더라도 일체존재 일체만유는 무엇인가. 자기 존재는 그렇다 하더라도 달이나 해나 이런 일체만유는 있지 않는가. 산천초목은 있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단계는 아직은 소승적인 단계고 대승명상법은 비단 자기 존재만이 아니라, 대상적으로 느끼는 산하대지 삼라만상, 해, 달, 그 어떤 것도 존재하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존재성이 없습니다. 오온개공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오온개공이 되어야 내 몸뚱이뿐만 아니라 일체존재 모두가 본래 비어있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대승의 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치만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치만으로 아는 것은 철학적으로 아는 것이지 실제로 우리가 증명한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증명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증명하는 명상이 필요한 것입니다.


명상이 있어야 실지로 체험합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명상이라는 말이나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삼매라는 말이나 참선이라는 말이나 개념적인 내용은 천착하면 조금씩 다르게 말할 수 있지만은 대부분 같은 종류의 뜻입니다. 우리 마음을 맑혀서 본래 마음자리로 돌아가는 공부방법입니다. 따라서 기왕이면 차원 높은 명상법을 해야 불자로서의 자긍심으로 보나 책임으로 보나 되지 않겠습니까? 차원 높은 명상을 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보통 명상법도 어려운데 그렇게 최상승(最上乘)명상법을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겠지요. 그러나 사실은 최상승명상법이 제일 쉽습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느끼시기 바랍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최상의 명상법이 사실은 제일 쉽고 우리에게 행복을 보장하고 정신적 건강과 육체적인 건강에도 이익이 있는 법입니다. 그렇게 이익이 있고 재미도 한량없는 또는 하기 제일 쉬운 법을 우리가 마다 할 이유가 없습니다. 성자의 법은 따지고 보면 간단명료합니다. 조금도 찌꺼기가 없습니다. 우주가 생긴 대로 우리 믿음이 생긴 대로 그대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인간 존재는 본래가 개개원성이라, 본래로 원만히 성취되어 있단 말입니다.


이 말을 다시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 존재란 것은 우리가 애쓰고 닦은 뒤에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알고 보면, 바로 볼 수만 있다면, 이대로 본래로 모두 다 부처입니다. 잘나나 못나나 지체부자유자나, 또 사람뿐만 아니라 개나 소나 돼지나 식물이나 모두 개개원성이라, 그 존재 자체 하나하나가 모두 다 원만히 성취돼있습니다.


우리가 종교를 공부할 때는 실천적인 것도 필요하지만 철학적인 것이 따릅니다. 화엄경이나 능엄경이나 법화경이나 모두가 최고의 철학이란 말입니다. 지금 실존철학, 과학철학, 별별철학이 다 있지만 부처님 가르침 같이 확실하게 밝힌 철학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 우리는 그러한 부처님 가르침을 꼭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생명의 본의는, 사는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몇 만생 다시 태어나고 태어나서 윤회한다 하더라도, 우리 생명의 본래모습으로 다 돌아가는 것입니다. 내 본래모습이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나 한결같이 부처가 됩니다. 그러기에 열반경에서도 일체중생(一切衆生)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체중생(一切衆生) 개당작불(皆當作佛)이라, 모든 중생이 필연적으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노력여하에 따라서 빠르고 느리고 그런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게으름을 부리면 금생에 그렁저렁 할 일 없이 생명을 낭비할 것이고 게으름 안 피우고 부처님 법대로만 살면 금생에도 본래 부처라서 성취할 수가 있습니다. 본래 부처란 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부처 아닌 것이 어디서 억지로 가져와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개개원성이란 말은 본래 우리가 원만히 갖추고 있는 부처란 뜻입니다. 소승은 그냥 애쓰고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서 되고 대승은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본래 부처입니다. 이 마음 이대로 부처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느끼고 못 느끼고 그런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가령 원효스님이나 달마대사나 육조혜능이나 그런 분들이 우리를 본다고 할 때는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런 분들은 우리를 모두 부처로 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만 부처님이 아니라, 또 삼세제불만 부처님이 아니라 모두가 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부처로 본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 안목이 흐리멍덩한가, 번뇌에 가려 있는가에 차이가 있는 것이지 본래 모습은 우주가 한결같이 부처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명상하는 때도 우리의 마음자리 그곳이 부처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른바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 같이 업장 많은 사람이 어떻게 진여불성이, 우주 불성이 가득 충만해 있다고 어떻게 감히 말할 수 있는가? 하고 겁을 내지 마십시오. 우리 생각 가운데서 무슨 생각이 가장 고귀한가 하면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방편이 없는 진실한 말씀을 하신 그 자리를 그대로 수용한단 말입니다. 그것이 생각 가운데서 가장 소중한 생각입니다.


그 무슨 명상법, 무슨 명상법 해서 별별 명상법이 다 나와 있습니다. 우리 스님네들도 거기에 빠져 가지고 승복 입고서 거기에 다닌다고 하는 분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참 비참한 일입니다. 부처님 공부를 어떻게 했길래, 그렇게도 소중한 보배를 가지고 있으면서 하찮은 자갈쪽 같은 것과 바꿀 것인가 말입니다. 대승명상법은, 내 존재뿐만 아니라 우주의 일체 존재가 인연 따라 잠시간 이루어졌기 때문에 무상입니다. 무상이란 말은 거기에 들어있는 의미가 굉장히 소중합니다. 무상이란 말속에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시간성과 공간성이 없다는 뜻이 포함돼 있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현대적으로 공부를 많이 해서 현명하게 잘 느끼실 것입니다. 인연 따라 잠시간 이루어진 것은 한 순간도 머무름이 없이 순간순간 변화해 마지않습니다. 그런 것은 존재성이 없습니다. 존재성이 없는 것은 일정한 시간 내에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따라서 일정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어느 위치도 점유하지 않으니 그것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것은 다 그렇습니다. 내 몸이고 내 관념이고 다 그렇습니다. 인연생이기 때문에 인연 따라 잠시간 이루어졌기 때문에 어느 순간도 어디에서도 그대로 머물지 않습니다. 어느 위치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있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인식이 되어야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시간성 공간성이 없다는 것은 결국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그러한 혜안, 곧 부처님의 투철한 안목은 2천5백여 년의 사이에도 만유(萬有)의 진상을, 참다운 모습을 그대로 보신 것입니다.


불성이라고 말하나 부처님이라고 말하나 똑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명상을 생각해 볼 때도 누누이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명상법 같이 수승하고 위대한 명상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유위법적인 상대적인 명상법에다가 우리 마음을 놓을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자기 생명의 낭비에 불과합니다. 무슨 필요로 부처님 법 같은 법을 놓고서 다른 그런 명상법들을 찾겠습니까? 무슨무슨 명상법이라 하지만 오래 가지는 못합니다. 부처님 법은 2천5백 년 동안에 무수한 성자가 나와서 다 증명하고, 달마를 거쳐 육조혜능스님 까지 그대로 고스란히 전수한 법 아닙니까? 삽삼조사(卅三祖師: 33조사)가 계계승승(繼繼承承) 가감이 없이 이어온 대승명상법입니다. 이런 법은 기간이 없습니다. 영원히 갑니다. 이제는 다 포괄해서 최상승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최상승법은 이미 거의 다 말씀드렸지만 그래도 통합적으로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최상승 명상법은 모든 것이 우주가 다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우주가 하나의 생명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의 생명이 사실인데, 우리 중생이 중생심으로 보니까 나는 나 다르고 너는 너 다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의 가정을 구성할 때도,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 어떠한 마음자세가 가장 소중한가, 이것은 가정을 구성하는 구성원 하나하나를 다 부처님으로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으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소중한 가정화합의 묘결(妙訣)은 없습니다.


친구지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친구를 부처님 같이 대접하는 것, 그보다 더 깊은 우정은 없습니다. 또 모든 사람을 다 부처님같이 생각하고, 서로 부처를 증명하기 위해서 상대방을 부처님으로 생각하는 단계는 아직 이론적인 깨달음이지요. 그러나 참말로 어느 때 어느 순간에서나 부처님 같이 여실하게 볼 수 있는 자리가 되기 위해서는 깨달아야 합니다. 이른바 명상이 필요합니다.


명상을 체험할 때 우리 마음이 맑게 닦아지고 생리가 바꿔집니다. 명상이라는 것은 분명히 우리 생리가 바꿔지는 것입니다. 욕심이나 진심(瞋心)으로 찌든 우리 지수화풍 사대가 청정한 사대광명으로 이루어진 진정한 사대로 바꾸어지니 말입니다. 바꾸어지거니 우리 마음이 얼마나 통쾌하겠습니까?

하루 하면 하루 한 만큼, 한 시간 하면 한 시간 한 만큼 우리 마음도 통쾌합니다. 몸은 마음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몸뚱이도 거기에 따르게 됩니다. 따라서 가장 건강한 법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명상법, 불교적으로 말하면 최상승선이지요.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각 원자(原子)는 무엇으로 되었다 하는 것은 현대 과학적으로도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의 본바탕은 무엇인가, 이것을 현대과학은 모릅니다. 미세한 데까지는 이르렀지만 결국에는 마이너스, 플러스가 되어서 무엇인지 모르게 텅 비어버리면 과학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텅 비어버린 자리, 텅 비어버린 그 자체, 그 자리가 바로 불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을 불성에다 두어야 본체(本體)를 안 여읜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뜻을 굳세게 해서 육조단경이나 달마스님 어록을 보십시오. 우리 마음을 근원적인 데다 두란 말씀입니다. 화두를 왜 듭니까? 가령 “이뭐꼬” 화두를 든다고 합시다. 끝끝내 “이뭐꼬” 화두를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화두를 빨리 타파해서 진여불성자리, 생명의 근원자리를 우리 보고 증명하라는 것입니다.


역시 가장 저급한 명상법은 자기 존재가 그대로 있다고 생각하고 또는 대상이 있다고 생각하는 명상법입니다. 이런 명상법은 앉아 있으면 답답하고 몸이 굉장히 무겁습니다. 숨도 가쁘고 그러겠지요. 그러나 적당히 숨도 조절하고 하면 조금씩 나아지겠지요.

그러나 그런 것으로는 구경적(究竟的)인 참다운 깨달음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한계에 부딪히고 맙니다. 또는 근기가 수승한 사람들은 조금씩 맑아지려는가 모르겠지만 근기가 하열(下劣)한 사람은 잘못 들어가면 도리어 병이 생깁니다.

우리 스님네 가운데도 호흡법이 좋다고 하니까 호흡법을 하다가 위(胃)가 확장되어서 말은 큰스님 소리를 듣지만 끙끙 앓는 사람을 봤어요. 왜 그러는가하면 우리 마음이 본래 자성자리, 본래 불성자리에 가 있지 않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몸도 돌고 마음도 돈단 말입니다. 몸과 마음이 둘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렇습니다. 몸과 마음은 절대로 둘이 아닌 것입니다.


오직 우주라는 것은 순수생명의 마음뿐입니다. 부처라는 하나의 우주생명과 내 마음이라는 나, 생명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우리가 생각할 때는 부처라는 것은 충만한 우주에너지이고 생명이다, 또 내 마음은 내 몸에 있는 하나의 생명이다, 이렇게 생각하시겠지요. 그러나 거기에는 우주생명, 우주마음인 그 자리와 또는 우리 개인 존재의 마음인 그 자리와 둘이 아닙니다. 깊이 있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이 지금 모양이 있습니까? 분명히 살아있으니까 마음이 있게 되어 있는데 모양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시간성도 공간성도 내 마음에는 없는 것입니다. 분명히 있는데......, 그럼 우주에 충만해 있는 부처님 마음은 모양이 있는 것인가. 그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주에너지로 분명히 있긴 있는데 모양은 없습니다. 모양이 없는 것은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양이 없는 것은 결국 같은 거란 말입니다. 크다 작다하는 비교대상이 아니란 말입니다. 모양이 없는 것은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내 마음도 있으면서 모양이 없는 생명자체고 우주의 마음도 있으면서 모양이 없는 우주의 생명 자체입니다. 불성도 역시 모양이 없으면서 분명히 존재합니다. 따라서 우주의 불성과 내 마음은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달마대사 어록을 보면, 우주의 순수에너지와 내 마음이 본래로 둘이 아닙니다. 이렇게 느끼는 것을 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 그럽니다. 안심법문은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법문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마음이 편안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마음이 어떻게 가장 편안할 것인가. 그것도 내 마음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알아서 그것이 둘이 아니고 원래 우주자체가 모두 다 하나의 생명뿐이다, 하나의 부처님뿐이다, 이렇게 알아버려야 이른바 안심법문입니다.


지금은 아시는 바와 같이 다원화시대 아닙니까? 여러 가지 문제에 있어서 이른바 민족도 다민족사회, 종교도 다종교사회 아닙니까? 이런 때에 있어서는 우리가 참 주의해야 됩니다. 지금 기독교 신학에서 불교를 열심히 가르칩니다. 제대로 공부한 신부들은 저 사람이 어떻게 불교를 저렇게 많이 아는가 할 정도로 불교를 많이 알고 있어요. 그에 비해서 우리 불교인들은 어떤가? 엄연히 기독교가 우리보다 수가 훨씬 많고 여기 진주만 하더라도 교회 수가 절 수 보다 훨씬 많겠지만 엄연히 공존해 있으면서도 대부분이 기독교를 모릅니다. 그것은 외도(外道) 공부 아닌가. 기껏해야 하늘로 올라가는 법이 아닌가. 지금은 그렇게 소홀히 취급할 때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분명히 우리 주변에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그걸 무시할 것입니까? 그리고 성자의 법이라는 것은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예수가 성자가 아니라면 모르거니와 우리가 성자라 전제할 때는 똑같은 진리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 같이 하나의 종교체제로는 다 확립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훌륭한 진리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허심탄회하게 공간 복음서라든가 신학을 공부한 사람은 다 구분이 됩니다. 한 번도 그쪽을 공부하지 않고서 무슨 염치로 우리가 그쪽을 비판하겠습니까? 지금은 그런 때가 아닙니다.


다원화시대는 참 어려운 시대입니다. 이 어려운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기도 알지만 다른 것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한국 대통령을 위시해서 대부분의 정부 요인들 중 기독교인들이 8할 이상을 점유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회를 살고 있으면서 그쪽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다 부처님 법에 몽땅 들어있음을 보시면 부처님께 거듭 감사와 찬탄을 드리지 않을 수 없게 되실 것입니다. 바이블에서도 어떻게 말하던 간에  부처님 가운데 다 포섭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 자부심과 자랑을 느껴야 합니다. 불교에 세밀한 교리 체계가 안 서있다 하더라도 진리가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도 역시 해탈을 목적으로 하고 있고 영생의 하늘나라를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진리가 아니면 2천년 동안이나 여러 가지 시련과 비판을 거쳐서 살아올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꼭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관용을 가지고 좋은 점을 보고 같이 대화하고 같이 공존해야할 시대란 말입니다


명상과 사색의 방법은 지금까지 아까 누누이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여러 가지 차원이 있는 것인데, 가장 고도한 차원의 명상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존재의 실상을 보고서 실상을 그대로 느끼고서 실상을 여의지 않는 명상을 하는 것입니다. 천지우주가 하나의 불성입니다. 진여불성에다 우리의 마음을 두어야 비로소 우리 주체성이 확립되는 것입니다. 자기 소외다, 스트레스다, 요즘 별스러운 말로 불안스러운 우리 마음을 표현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원인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 마음의 의지처가 확실하게 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을 어디다 붙일 것인가? 상대적이고 유한적인데다 우리 마음을 붙인다고 생각할 때는 항시 불안합니다. 상대적이고 유한적인 것은 결국 다 변하고 마는 것이니까, 그 무상한 허망상대에다 우리 마음을 붙이면 절대로 우리 마음이 안정이 안 되고 참다운 명상이 못되는 것입니다.


참다운 명상을 하기위해서는 불멸의 우주에 존재하는, 나지 않고 죽지 않고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자리에다 우리 마음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참다운 주체성이 확립되는 것이고, 동시에 그런 공부를 해야 최상의 명상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상의 명상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것이 최상이니까 굉장히 어렵겠다, 이렇게 생각하시지 마십시오. 그것이 제일 쉬운 법이라 말입니다. 가장 확실한 것이고 우리 생리로 보더라도, 생리는 우리 마음에 따르는 것이므로 모두가 다 나와 더불어 본래로 부처 아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 몸에 건강한 생활은 없습니다.


명상을 바로 한다고 할 때는 경안(經安)이라, 불교말로 하면 법희선열(法喜禪悅), 법을 닦아 나가면 거기에 따르는 기쁨이나오고 또 명상을 하다 보면 우리가 본래 갖추고 있는 불성의 무한공덕장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서 그 기쁨이 한량없습니다. 맨 처음에는 빡빡할지 모르나 그것은 업장소관이나 참선법을 잘 몰라서 그러하기도 하나역시 최고의 진리에다 마음을 둔다면 다른 것은 다 해소되어 갑니다. 하루 앉으면 앉은 만큼, 한 시간 앉으면 앉은 만큼 우리 마음과 몸이 정화됩니다. 그러나 명상을 할 때는 기본적인 자세는 떠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 욕계중생은 음식 때문에 굉장히 오염되어 있습니다. 저 색계만 올라가도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생사윤회 하는 중생만이 음식을 필요로 합니다. 색계나 무색계는 음식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본래는 다 부처인데, 음식을 무던히 좋아 하니까 색계도 못 가고 무색계도 못 가고 욕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부처님 법은 그야말로 절묘합니다. 예컨대 모든 계율을 지키는 것은 우리 명상에 필요한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절대로 많이 드시지 마십시오. 아무 이득이 없습니다. 몸만 무겁고 찌꺼기만 많이 생깁니다. 저는 빚진 것이 많아서 갚고 죽으려고 건강법을 많이 봤어요. 오래 사는 비결은 책마다 소식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한 번 해보십시오. 부처님 법은 어느 면으로 보나, 즉 계율로 보나 선정으로 보나 지혜로 보나 모두 다 성불하는 법입니다. 성불의 3대 강령이 계 ‧ 정 ‧ 혜(戒‧ 定‧ 慧) 삼학(三學)이지 않습니까? 계율 지키고 명상을 깊이 하여 참선 염불하고 지혜로써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로 써 앞으로 깨달아서 증명한다 하더라도, 깨치기 전에 먼저 이치로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이치로 아는 것은 천지우주와 모든 것이 모두 하나의 생명이다, 이렇게 아는 것이 이치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서 우리가 그 자리를 체험해야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육재일(六齋日)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누가 육재일 말도 안 해요. 육재일이란 것이 원래 8, 14, 15, 23, 29, 30일이라 해서 한 달에 여섯 번 하는 것인데, 육재일 날은 하루에 한 끼만 먹으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제법 일요일이 되면 성경책가지고 교회에 갑니다. 불자인 우리는 부처님께서 정해 놓은 육재일이 언제인가도 기억을 못해요. 그냥 그대로 부처님 법을 최고로 믿고 있으니까 좋다 이런 생각만 있지 법을 지키려고 않습니다. 이슬람교도 라마란타 같은 데서 한 달 동안 온전히 단식을 합니다. 해 떠서 해 질 때까지, 우리 부처님 제자들은 부처님 가르침을 믿으려고 하지 않아요. 사실은 그것이 꼭 필요한 것인데 건강에도 필요하고 공부에도 필요한 것인데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육재일에는 일종식 하고 고기도 안 먹고 술도 안 먹어야 됩니다. 부부생활도 그때만큼은 청정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우리 인간생활을 보다 정화시켜야 합니다. 우리 인간생활을 영원으로 차근차근 이끌어 가야지요. 부처님 법은 우리한테 최상의 행복을 보장하는 가르침이고, 사회적으로 보나 어떤 면으로 보나 최선의 가르침입니다. 그러한데서 자부심을 가지십시오. 지금 모든 철학이 부처님 지혜를 차근차근 따라가고 있습니다. ‘하이데거’나 이런 사람들이 어려운 실존철학을 말했지만 실존이 무엇입니까?

 

실존이란 것은 실지로 존재하는 생명자체가 실존이란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 같이 명백한 실존을 밝혀 놓은 것이 없습니다. 물질이 아무리 미세하고 현대과학이 비대하게 지배하고 있지만 그 본래의 자리, 미세한 그 자리 역시 현대과학이 지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바 제법이 공이라는 그 자리까지는 현대과학도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 공의 알맹이는 무엇인가? 생명자체는 무엇인가? 이것을 모른단 말입니다. 이것은 불교 아니면 알 턱이 없습니다.


기독교 역시 예수의 가르침의 하늘이라는 것이 당시 하늘 어디엔가 계시는 사람 같은 모양이 아니라 하나의 우주의 진리를 말했기 때문에 같다고 봐야지요. 그런 성자의 가르침만이 눈에 안 보이는 세계, 눈에 안 보이는 생명자체를 그대로 밝혀 놓았습니다. 그런 자리에다 우리 마음을 둬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다 우리 마음을 두는 것이 참다운 명상이고 참다운 종교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외도가 하는 명상이라든가 범부가 하는 명상이나 소승의 명상을 떠나 최상승법으로 닦으셔서 다시없는, 위없는 경계를 이루시기를 간절히 빌어 마지않습니다.

  나무아미타불!


*이 법문은 2001년 10월 진주 선우선방 법회에서의 법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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