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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3. 광륜

광륜 2010년 가을

 

 

 

                         불성광명(佛性光明)


                                        청화큰스님



 우리 인간 마음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마음 풀이를, 이것도 역시 유식론이라 - 불교심리학에서 말씀하신 것을 들어서 얘기 하겠습니다. 「십식(十識)」이라 - 우리 마음을 십식이라 하는 말도 역시, 마음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심(心)이나 식(識)이나 같이 풀이 합니다.


 십식(十識), 이것은 무엇인고 하면

 맨 처음 안식(眼識)이라 - 우리의 시각(視覺)이고,

 그 다음 이식(耳識)이라 - 청각(聽覺)이고,

 그 다음 비식(鼻識)이라 - 후각(嗅覺)이고,

 그 다음 설식(舌識)이라 - 미각(味覺)이고,

 그 다음 신식(身識)이라 - 촉각(觸覺)이고,


 그 다음 제6의식이라 - 이것은 우리가 느끼는, 판단(判斷) 분별(分別)하는 의식입니다. 헌데, 우리 인간은 지금 이런 가운데서 육식(六識)까지 밖에는 우리는 지금 못 쓰는 것입니다. 다만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또는 맛 알고, 몸의 촉각 알고, 또는 의식으로 분별하고, 우리 인간은 6식까지 밖에는 지금 못 씁니다. 인간 이외의 동물은 6식도 못 쓰고 5식만 씁니다. 의식판단은 그네들은 못 하니까 말입니다.


일반 식물이나 그런 것은 역시 아무 식(識)도 못 씁니다. 불경(佛經)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초목무심어생호소승(草木無心語生乎小乘)이라, 초목이-풀이나 나무가 마음이 없다고 하는 말은 소승(小乘)에서 쓰인다는 말입니다. 대승(大乘)에서는 이런 말을 안 쓰는 것입니다. 소승(小乘)은 밀교(密敎)를 못 봅니다. 즉 말하자면 소승은 마음의 본질을 못 본다는 말입니다. 대승은 본질을 봅니다.


따라서“동물이나 마음이 있지, 나무나 풀은 마음이 없다”이렇게 말하는 것은 소승에서 비로소 나온 말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뜻입니다. 비록, 하나의 나무라 하더라도, 다 마음이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잠재(潛在)해 있을 뿐입니다. 마음의 형상이 없어놔서 잠재해 있을 뿐입니다. 아, 보십시오. 하나의 꽃이라도 똑같은 화분에다 놓고서 하나에는 정성을 드리고, 또 하나에는 덜 드리고 하면, 똑같이 비교하기 위해서 거름도 주고 하더라도, 역시 우리 정성을 드린 쪽이, 마음을 쏟은 쪽이 더 성장했다는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초목(草木)도 역시, 잠재해 있을 뿐이지, 마음이 있습니다. 다만, 진화(進化)과정 따라서, 일반 동물들은 그 가운데 잠재의식(潛在意識)이 발동(發動)되어서, 개발(開發) 되어서 5식을 쓰고, 사람은 더 개발되어서, 더 진화를 거쳐 와서 6식까지 쓰고 말입니다. 하나, 6식이 모두가 아니라, 6식 뿌리에는 역시 제7말라식(末那識)이란 식(識)이 있습니다. 또 말라식이 모두 다가 아니라 말라식의 뿌리에는, 밑바닥에는 또 역시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는 식(識)이 있습니다.


아뢰야식이란 식이 또 우리 마음의 전부가 아니라 그 밑에는, 또 역시 그 저변에는 암마라식(菴摩羅識)이 있습니다. 그것만도 저변(低邊)이 아니라 가장 밑바닥에는 역시 건율타야식(乾栗陀耶識)이라는 식이 있습니다. 이같이, 우리 인간의 마음에나, 또는 동물의 마음에나, 어떤 것의 마음에나, 풀이나, 또는 하나의 전자(電子)나, 어떤 것이나 이와 같이 십식(十識)이 다 있습니다. 우리는 전자(電子)라는 것은 무생물이라 하지만, 어떤 소립자(素粒子)나, 무엇이나 다 식(識)이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어느 만치 개발되었는가 하는, 개발의 정도(程度)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헌데, 제10에 있는 건율타야식(乾栗陀耶識) 곧 진실심(眞實心) 또는 견실심(堅實心), 이것이 불심(佛心)입니다. 이것이 불성(佛性)이고 불타(佛陀)‧ 진여(眞如)입니다. 비록 개발만 못 했을 뿐이지 일체만유의, 존재의 근본은 모두가 다 불심입니다. 이것이 청정자성심(淸淨自性心)입니다. 다만, 그 존재 자체의 업(業) 따라서 개발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수행하면 그때는 차근차근 6식에서 7식으로 나가고, 그 다음 8식이라, 이렇게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들어가서 10식의 끝까지 이르면 그때는 성불이 되는 셈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제 밑바닥에 닿는다는 말입니다. 고향은 역시 여기입니다. 이것이 진실심(眞實心) 견실심(堅實心)이고, 이것이 불심(佛心)인 동시에 진여(眞如)고 여래(如來)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현재 인간존재가 비록 6식에 머물러 있다 하더라도, 먼저 이것을 딱 알아버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일반중생은 자기 보배를 모릅니다. 금은(金銀) 보화(寶貨)나 보배로 알지, 영원적인, 영원의 생명을 가지고 있고 일체 공덕(功德)을 갖추고 있는, 일체 만덕장(萬德藏)인, 즉 말하자면 만덕의 곳집인, 이러한 영원적인 불심(佛心)은 잘 모릅니다. 이것만 깨달으면 천지가 자기 것인데 말입니다. 이것 깨닫는 것이 이제 불교(佛敎)인 셈이지요. 이것을 깨닫는 지름길이 참선(參禪)입니다. 따라서 불교를 믿는다 하더라도,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냥 끄덕끄덕, 하나둘씩 올라갑니다만, 참선은 그렇지 않고서 그냥 비약적으로 막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기 열 번째 건율타야식, 즉 진실심, 불심을 갖기 위해서 화두(話頭)를 드네, 또는 염불(念佛)을 하네, 다 그러는 것입니다.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 「중생의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김가나 박가나, 지금 마음은 모두가 다 이런 제 6식의 의식(意識)단계에 있는 셈이지요. 지금 우리는 의식단계에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곧 부처라, 비록 우리가 정화가 아직 못 되어서 이런 불심(佛心)은 미처 못 되어 있다 하더라도 불심과 내 마음은 이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둘이 아닙니다.


한 마리의 파리 역시, 파리 마음 밖에는 못 쓸망정, 그도 역시 본질은 또한 똑같은 부처란 말입니다. 부처와 이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의 전자(電子)역시, 겉으로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은 전자지만 본바탕은 역시 불심(佛心)입니다. 불심과 이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따져볼 때는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불심을 바탕으로 합니다. 겉에 뜬 것을 중생이 잘못 봐서 그런 겁니다. 중생이 「정유리무(情有理無)」라 - 망정(妄情)으로 봐서 나무요, 소요, 그렇게 보고, 중생이 가짜로 이름 지어서 산이요, 무슨 산이요,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바로 보면 다만 불심(佛心)이 이렇게 저렇게 변화한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도인(道人)들은, 전부를 다 부처로 본다는 것이 거의 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성불하는 방법도, 여기에서 추출(抽出)이 되어서, 구경지(究竟地) - 우리가 가야할 고향, 여기를 딱 집어 들고서, 이 놈 안 놓치고 항시 생각하면, 그때는 빨리 가겠지요, 바로 이렇게 연결되어 있으니까 말입니다. 자기 마음 떠나가서 저만치 불심(佛心)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본바탕이 바로 불심이기 때문에, 불심이란 마음, 그 마음 안 놓치고서 마구 파고 들어가면, 그때는 우리가 불심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불심(佛心), 이것은 내가 생명인지라, 내 바탕, 천지만유의 바탕은 그야말로 참, 보다 더 큰 생명이 되겠지요. 그런 생명을 갖다가 하나의 원리로만 구하면 그때는 바싹 말라서 우리가 참 납득이 안 되는 것이고 무미건조(無味乾燥)합니다. 생명이기 때문에 역시 우리가 흠모(欽慕) 추구(追求)하는 어떠한 우리 감성(感性)으로 구해야 합니다. 어제도 말씀드렸습다만 어떤 종교나, 고등종교는 - 가장 고도한 문화 종교는 모두가 다 신앙대상을 생명으로 구합니다.


 ‘오! 하느님’ 또는 천도교는‘한울님’마호메트는‘알라신’모두가 다 생명으로 구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대상을 생명으로 구하는 것은 우리 수행법의 가장 중추(中樞)인 것이고, 기타 방법은 하나의 개별적인 특수에 불과합니다. 화두(話頭)를 든다, 무(無)자를 든다, 이런 것은 그때그때 어느 사람에 따라서 특수한 것에 불과한 것이고, 줄거리는 아까 말씀마따나, 생명자체를 생명 그대로 수용(受用)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참선의 방법도 많이 있으나, 화두를 들어서 의심 하는 것이나, 또는 가만히 앉아서 있는 것이나, 이런 것은 하나의 특수한 방법인 것이지, 우리 본바탕 - 불성(佛性)을 구하는 기본적인 방법은 아닙니다.


따라서, 부처님 당시나 도인들은 모두가 다, 생명을 수용하는 그런 방법으로 해서 우리를 지도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일체 만법(萬法)을 가지고 있어놔서 모든 법을 다 수용합니다. 어떤 법이나 본질은 부처이기 때문에, 가사 지성적(知性的)으로 구하나, 뭐로 구하나, 들어가서 끄트머리에 가면 그때는 다 부처가 되고 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 용납(容納)할망정, 주장된 우리 수행법은 역시 뭐라 해도, 부처님을 생명으로 구해서, 그것을 생각하고, 부처님을 우리가 생명으로 외우고, 그런 식으로 하면서, 딴 방법은 우리가 종적(縱的)으로 용납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은 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부처님을 생각하는 그 순간 우리한테 공덕(功德)을 많이 줍니다. 기독교인들이‘오, 주여!’하는 그 생각도 역시 굉장히 많이 공덕을 주는 것입니다. 흐트러지고 망정(妄情)밖에 없는 우리 중생이 완벽한 존재를 구하는 그 마음으로 해서, 우리 마음은 승화(昇華)가 되어서, 우리 본심(本心)으로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경(佛經)에도 「신위도원공덕모(信爲道源功德母)」라 - 신앙 이것은 도(道)의 근본인 동시에 공덕의 어머니란 말입니다. 믿는 마음이 없으면 도(道)는 못 통합니다. 우리 중생은 안 보이니까 우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실상(實相)이 보입니까? 그러나 부처님이나 성자(聖者)는 거짓말이 없습니다. 이 말씀 우리가 안 믿는 것은 그만치 업장(業障)이 무거운 소치입니다. 우리 마음의 광명이 밝아서, 실상(實相)의, 불성(佛性)의 지혜가 우리한테 좀 빛나 있다면 빨리 믿는 것입니다.


허나, 우리는 어두워서, 우리 본래 마음 -불성광명(佛性光明)이 빛나 있지 않으면 잘 못 알아먹습니다. 불성(佛性)은 무엇인가? 불성은 광명뿐입니다. 사바세계에서 보는 이런 보통 유한적(有限的)인 그런 광명이 아니라, 영원적인 진리를 갖춘 광명입니다. 광명을 부정하는 마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둠입니다. 물질이란 것은 일차 광명을 부정하는 데서 물질이 생기는 것입니다.  <나중에 불교를 깊이 연구해 보시면, 재미도 있고, 그야말로 참, 과학을 보다 더 이끌 수 있는 지혜가 나오겠습니다만......>


우주가 텅 비어서, 태초(太初)에 우주가 이루어질 때, 어떻게 해서 원자(原子)가 생기고 무엇이 생겼을까? 모두가 사람의 업(業)에 따라서 이루어집니다. 우주가 텅 비어서,허무(虛無)가 돼버리지만 다만, 빈 것은 아닙니다. 광명으로 꽉 차 있고, 다만 형체만 비었단 말입니다. 그런 가운데 몸도 그냥 이런 몸이 아닌 광명체(光明體)인 중생들이 생각하면 생각하는 힘이 모이고 모여서 원자(原子)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중생들은 그때는 존재가 없습니다. 다만 광명을 몸으로 하는 중생만 존재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역시, 그 중생도 성불을 못했기 때문에 분별하는 마음이 있단 말입니다. 분별하는 마음에, 싫어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냥 즉시에 싫어하는 마음, 에너지 그것 따라서 하나의 전자(電子)가 이루어집니다. 또는 내키는 마음이 있으면, 내키는 마음 즉시에 또 거기에서 이제 자기(磁氣)가 이루어집니다. 전자(電子)와 자기(磁氣)가 이렇게 모이고 모이고, 쌓이고 쌓여서 그때는 우주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허나, 그 근원(根源)은 역시 불심(佛心)뿐입니다. 불심을 우리가 분별시비한 데서 그때그때 물질이 이루어진단 말입니다. 물질은 결국, 광명을 일차 부정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밝아지면 밝아질수록 물질은 차근차근 우리가 과소평가(過小評價)하고, 또 무시(無視)한단 말입니다.


 닦아보면 알지마는, 닦아본 분들은 자기 몸을 굉장히 원수로 압니다. 여러분도 닦아보세요. 숨이 막히는 것도, 이 얼마나 자기 몸이 원수입니까? 일차 한 고비를 넘어서, 몸에서 부담이 없으면 그때는 모르겠습니다만, 부담이 없을 때까지, 그 동안 까지는 굉장히 몸이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몸이 원수로 알아지고 말입니다. 조금 잘 먹으면 배부르고, 조금 덜 먹으면 배고프고, 어디가 조금 언치면 우리 색신을 구성한 원소(元素)가 부자유하니까 아프고 말입니다.  하여튼, 우리는 모두가 다, 일체가 다 마음임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그러한 마음을 생명으로 구하는, 즉 쉬운 말로 부처님의 이름을 우리가 찾는단 말입니다. 이런 불성(佛性)은 천지우주의 밑바닥이고 말입니다.


 우주가 다 불성(佛性)이기 때문에, 우리가 몇 마디 말로는 표현을 못 합니다. 따라서 부처님이나 도인들이 말씀하신, 부처님의 대명사, 이름 따라서 겨우 이제 우리가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미타불’하면, 우리가 뜻은 별로 모를망정 하여튼, 그 말은 벌써‘우주의, 모든 실존(實存)의 대명사구나!’이렇게 느낄 수가 있단 말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이 활용하는 하나의 기운, 이것이 관세음보살입니다. 불경(佛經)에서 보면「관음삼십삼신(觀音三十三身)」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관음(觀音)의 몸이 서른세 가지로 화신(化身)한다」는 말입니다. 부처의 몸, 또는 사람 몸, 국토의 몸, 또는 귀신 몸 등 이와 같이 화신이 됩니다. 따라서 관음보살은 무엇인고 하면, 부처님의 체(體)가, 부처님이 그때그때 만유(萬有)로 형성하는 그것이 관음보살입니다.


또한 동시에, 만유(萬有)를 다시 부처한테로 이끌어가는 그것이 관음보살입니다. 그런데서,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관음보살(觀音菩薩)이나 같은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내 근본이요, 우주의 근본인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 부처님을 우리는 다 알 수가 없는 것이니까 - 다만 그저‘끝도 갓도 없는 우주에 펼친 광명, 영원적인 진리를 갖춘 광명이 부처구나!’ ‘부처님은 우주의 모든 실존의 대명사구나!’ 이렇게 느끼면서 부처님을 생명으로 구하고, 부처님 이름을 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할 때, 사소한 것에 얽매이면 공부가 안 됩니다. 참선을 제 아무리 많이 했다 하더라도, 마음이 옹졸하면 공부는 못 트이는 것입니다. 어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어느 문제를 의심이나 한다든가, 주문(呪文)만 해서 공부하면 괜히 사람이 고집만 강해집니다. 역시, 참선은 먼저 마음을 열어놓고 해야 합니다. 물론, 공부하면 열려지겠지만, 잘못 나가면 공부한다고 해봤자 도리어 마음이 더 옹졸해집니다.  따라서, 우선 마음 열어서 - 비록 내가 미처 못 증(證)했다 해도, 내 마음은 천지우주를 다 감싸있단 말입니다. - 모두를 다 자기 마음에다 딱 집어넣어야 합니다.


 어제 말씀마따나, 양자강 물을 한 번에 들이마시는, 그런 기운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지위에서, 부처님을 천지 우주의 전부로 보고서, 전부를 내가 이제 다 감싸버리는 그런 기백(氣魄)으로 해서 공부를 해야 만이 차근차근 마음지평(地坪)이 열려갑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가?

 역시, 그러한 광대무변(廣大無邊)한 광명을 상상하면서 부처님 이름을 외우는 것입니다. 부처님 이름은 그냥 우리 중생 이름과는 다릅니다. 불교말로「명호부사의(名號不思義)」라 - 이름 자체에 부사의한 뜻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 몸에 향(香)을 지니면, 우리 몸에서는 향을 안 피우지만 그냥 향냄새가 풍깁니다. 우리 몸에다 나쁜 냄새를 지니면 또 역시 나쁜 냄새가 풍깁니다.  그와 똑같이, 가장 높은 이름, 일체 공덕이 갖추어 있는 그러한 공덕 이름이 부처님 이름이기 때문에, 부처님 이름을 자꾸만 외워 쌓으면, 그때는「향광장엄(香光莊嚴)」이라 - 우리 몸에서 영원자(永遠者)의 빛이 나간단 말입니다.


「관음보살(觀音菩薩)」을 하루에 3만 번해 보십시오. 그 사람 얼굴은 이상하게 빛나갑니다. 원래 우리가 부처인지라, 자꾸만 불러 쌓으면, 그때는 이름 자체에 영원적인 이름이 포함되어 있어놔서, 부르면 부를수록 결국은 우리 몸이나 우리 마음은 향기롭고 빛나갑니다. 광명은 차근차근 증장(增長)되어 갑니다. 우리 중생심은 - 원래 불심(佛心)은 광명뿐인 것인데, - 일차 어두워졌다 하더라도, 불러 쌓으면 그때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광명이 차근차근 비중이 더 높아져서, 우리 마음이 광명 쪽으로, 즉 말하자면 불심(佛心)으로 가까워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광명만으로 충만(充滿)하면 그때는 성불(成佛)이 되겠지요. 광명만으로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부처님을 한시도 안 놓쳐야 합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이름은 「지극청정보주명호(至極淸淨寶珠名號)」라 - 지극스럽고, 또는 청정하고 보주(寶珠)라, 보배 같은 그런 광명이 빛나는 이름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아미타불이나 그런 부처님은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합니다.

이러한, 무량의 부처님의 광명을 염두에 두고서 찰나도 잊지 말고서 가는 것이, 이것이 참선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일상삼매(一相三昧)」라 - 천지우주를 부처님의 일상(一相)으로 보는 것이고, 「일행삼매(一行三昧)」라 - 일상(一相)으로 보는 그것을 안 끊어지게끔 사뭇 이어 간다는 말입니다.


일상삼매와 일행삼매, 이것이 참선입니다. 이렇게 해서, 꼭 우리 이번 용맹정진 동안에 부처님 쪽으로 가까이 가셔서 한사코, 부처님을 「견불성불(見佛成佛)」이라 - 부처님의, 반드시 이러한 10식인 불심(佛心)을 바라고서 성불하시길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말씀 마칩니다.


                                      -『정통선의 향훈』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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