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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3. 광륜

광륜24호 여름(2011년)

 

 

최상승선(最上乘禪)


선원(禪院)에서 안거정진(安居精進)하실 우리 용상대덕(龍象大德) 스님들, 또는 후원에서 정진을 같이 하시는 우리 재가(在家) 불자님들, 또 오늘 돌아가셔서 자기 집안에서 참선(參禪)공부를 하실 우리 불자님들 만나 뵈어서 대단히 반갑습니다.


참선(參禪)공부를 하는데 있어서는 우리가 3가지를 주의해야 됩니다.


한 가지는 무엇인가 하면은 암증선(暗證禪)이라, 어두울 암(暗)자, 증명할 증(證)자 암증선(暗證禪)이라, 교법(敎法)에 의지하지 않고서 자기 주관(主觀)대로 한다든가 또는 그러한 기회가 없어서 교법을 의존하는 수순을 밟지 않고서 하는 참선이 암증선입니다. 암증선을 하는 경우는 이것은 자칫 하면은 증상만(增上慢)이라, 증상만이란 것은 자기 정도이상으로 자기를 돋보인단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무슨 삼매(三昧)에 든다 하더라도 삼매에도 깊은 삼매도 있고 또는 옅은 삼매도 있는 것인데 어느 깊은 삼매에 미처 못 들어가고서 어느 경계(境界)에 부딪치면 조금 어느 정도 쾌적하면 내 공부가 상당히 됐구나 이러한 것이 이른바 증상만입니다.


자기가 깨닫지 못하고 깨달았다는 그런 것이라든가, 또는 아까 말한바와 같이 어느 경계를 자기가 그것이 좋은 경계가 아닌데도 과장해서 생각하는 것이 증상만(增上慢)입니다. 더할 증(增)자, 윗 상(上)자, 또는 거만할 만(慢)자,


그래서 암증선, 덮어놓고서 하는 그런 선(禪)을 할 때는 증상만 되기가 쉬운 것이고, 또는 교학(敎學)을 좀 공부를 해서 어느 정도 체계(體系)는 세웠다 하더라도 그걸로 해서는 이른바 생사해탈(生死解脫)이라 하는 우리의 참선의 구경(究竟)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는 것인데 이른바 해오(解悟)라, 해오란 것은 해석으로 해서 이론적으로 해석해서 아는 것이 해오(解悟)입니다. 풀해(解)자, 깨달을 오(悟)자, 그래서 그 참선이라는 것은 실참실구(實參實求)라. 우리가 스스로 실천해 가지고서 닦아서 우리 업장(業障)을 녹이고서 깨달아야 할 것인데 이론적으로만 알고서 그냥 실천실참은 없이 깊은 삼매에 들어서 하는 공부가 아니고서 그냥 문자(文字)나 말로만 아는 그런 식의 공부가 이른바 문자선(文字禪)입니다.


 또 한 가지는 야호선(野狐禪)이라, 야호선이란 것은 들 야(野)자, 여우 호(狐)자, 야호(野狐)라는 것은 그 꾀가 많고 삿된 지혜가 많은 여우란 놈이 그와 같이 꾀를 부리고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못 깨닫고 깨달았다고 한다든가, 재주로 해서 꾀로 해서 교묘한 그런 말로 해서 깨달은 척하는 이런 것이 이른바 야호선입니다.


그래서 참선하는 분들은 세 가지 그런 경우를 다 피해야 됩니다.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암증선이라, 이른바 암중모색(暗中摸索) 하는, 참선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또는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훌륭한 차원 높은 바로 불조가 말씀하신 그러한 참선인 것인가? 이런 것을 모르고 닦는 암증선, 또는 문자로만 해석해서 어느 체계를 세워가지고서 공부가 다 되었다 하는 이른바 문자선이라, 또는 못 깨닫고 깨달았다고 한다든가 또는 자기가 어느 수승한 경계를 증하지 못한데도 나는 지금 굉장히 높은 공부를 했다든가 이런 이른바 증상만 하는 그런 야호선을 경계(警戒)를 해야 됩니다.


그런데 보통 참선에 있어서는 여러 갈래가 있는 것인데 구참(舊參)공부하신 분들은 다 알으시겠지만 우리 재가 불자님들은 잘 모를 성 싶으니까 제가 간단히 얘기 합니다.


우리가 지금 명상(瞑想) 하면은 명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까. 서구(西歐)식의 명상도 있고 또는 어느 위대한 철인(哲人)도 역시 명상을 소외하고서 또는 명상을 배제하고서 위대한 철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꼭 그 나름대로 방법은 좀 다르다 하더라도 명상이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건 왜 그런고 하면은 우리 앎이라는 것은 앎 자체로 해서는 한 체계는 선다 하더라도 그걸로 해서는 우리 업장(業障)을 녹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 업장은 무수(無數)생 동안에 과거 전생(前生)에나 또는 금생(今生)에나 아주 습관성(習慣性)이 되어서 상당히 지겨운 것인데 그 앎 자체만으로 해서는 업장을 녹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업장을 녹일려면 깊은 삼매(三昧), 깊은 선정(禪定)에 들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 중국 당나라 때 조주스님, 조주(趙州,778~897)스님은 임제(臨濟)스님이나 같은 때 분입니다. 근데 임제스님하고 조주스님은 상당히 아주 성격도 차이가 있고 교화하는 면에서 여러 가지로 해서 상대적인 차이가 있는 분이여요.


임제스님은 아주 발랄하고 그야말로 활발발(活鱍鱍)하게 패기가 넘쳐흐르는 분이고 또 조주스님은 아주 겸손하고 그런 분입니다. 조주스님은 겸손(謙遜)하고 자비심(慈悲心)이 많고 그런 특색이 있는 분인데, 그 조주스님은 대체로 아실 분들은 아시지만은 조주스님은 60세까지는 남전보원(南泉普願)선사한테 법(法)을 이어 받은 분인데, 남전보원선사를 모시고서 원주(院主)도 하고 윤하도 지내고 말입니다. 또는 절주지(住持)도 맡고 해가지고서 60세까지는 아주 성실하게 스님을 시봉(侍奉)했단 말입니다.


그러자 그 남전보원스님이 열반(涅槃) 들으시니까 인제는 나도 만행(萬行)도 하고 행각승(行脚僧)으로 해서 제방(諸方)의 선지식(善知識)들도 방문도 하고 그래야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해서 60세 되어서야 이른바 스님이 돌아가시니까 먼저 절을 하직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80세까지는 제방의 선지식들을 신방하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공부해서 그 80세에야 비로서 조그만한 정사(精舍)를 하나 얻어가지고서 120세 가셨으니까 40년 동안 교화(敎化)를 하신 셈이지요.


그렇게 지낸 분인데, 따라서 그 분 공부하는 것은 건둥건둥 건성으로 공부를 안 한단 말입니다. 건성으로 않고서 아주 그 세밀하고 면밀하게 공부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어느 때 상당(上堂)에 올라가서 이와 같이 법상(法床)에 올라가는 것을 가리켜서 상당이라고 합니다.


상당에 올라가서 하신 법문이 무엇 인고 하면은 일념불생(一念不生)이라. 일념불생이란 말은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단 말입니다. 일념불생이라,


우리는 자꾸만 생각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이 공부는 특히 참선공부는 분별시비(分別是非)를 끊어야 합니다. 아는 것이나 모른 것이나 그런 것은 일반 세간적인 의미는 있을란가 모르겠지만 이 참선공부라 하는 것은 좋은 것이나 궂은 것이나 모든 분별시비를 다 끊어야 됩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우리 중생이 안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아견(我見)이라 하는 나아(我)자, 볼견(見)자 아견이라 하는 거기에 근거합니다.


우리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나아(我)자, 볼견(見)자, 아견이 있으면 이것은 범부중생(凡夫衆生)이고 나 아(我)자, 볼 견(見)자, 아견이 없으면 이것은 깨달은 성자(聖者)고 또는 그야말로 부처의 경계에 가까이 있는 분이라고 할 수가 있지요.


근데 아견이란 나아(我)자, 볼견(見)자, 나라는 관념(觀念), 우리가 사람치고 보통 나라는 관념이 없는 분이 있습니까. 다 나라는 관념이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법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사실은 나라는 것은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없을무(無)자, 나아(我)자, 무아(無我)가 이것이 참말로 옳게 자기를 보는 것입니다.


내가 있다고 생각한 것은 이것은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 바로 보지를 못한단 말입니다. 불교(佛敎)와 외도(外道)와의 가장 근원적인 차이도 거가 있습니다. 다른 외도는 아견을 없앤다든가 그런 것은 별로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불교는 첫 패스로 부터서 그 나라는 견해(見解), 나라는 존재(存在), 이런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들어가야 된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불교는 그런 의미에서는 사실은 상식적(常識的)이 아닙니다. 상식적이 아니라 본래(本來)대로 있는 사실 그대로 부처님 가르침을 말씀하셔서 사실 그대로의 가르침입니다. 내가 없다는 것이 사실인 것이고 내가 있다는 것이 사실이 아닙니다.


어째서 내가 없는 것인가? 나라는 존재는 다만 인연(因緣)따라서 잠시간 우리 중생(衆生)의 착각(錯覺)에서 내가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실상(實相)적으로, 실존적(實存的)으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나는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인연(因緣)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 같은 것이 순간순간 변화무상(變化無常)해서 마지않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변화무상하다는 것은 일정한 시간(時間), 일정한 공간(空間)내에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항시 기본적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명심하셔서 잘 관찰(觀察)을 하시기 바랍니다. 사실은 시간(時間)도 원래는 절대시간(絶對時間)이 없는 것이고 공간(空間)도 절대공간(絶對空間)이 없습니다. 물질(物質)도 절대물질(絶對物質)이 없습니다.


17세기에 뉴턴이라든가 또는 데카르트라든가 그런 분들이 물질(物質)이 실지로 있다고 생각하고 공간도 시간도 실지로 있다고 생각을 해가지고서 유포(流布)를 시키니까, 우리 중생(衆生)들은 우선 우리 지각(知覺)으로 알 수 있는 그런 범위에서 우리가 판단하니까 그런 것이 옳구나. 그러나 현대물리학(現代物理學)은 그런 것이 허망(虛妄)한 것이고, 그 부처님 말씀, 시간도 공간도 없는 것이고 물질도 사실은 우리가 측정할 수가 없이 허망한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存在)도 결국은 다 무상(無常)하고 허망(虛妄)한 거란 말입니다.


깊이 명심들 하시길 바랍니다. 정말로 시간도 원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간도 원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도 원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변화무상(變化無常)한 것을 그대로 사실대로 보지를 못하기 때문에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말하는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 우리가 거꾸로 본단 말입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우리가 사실로 본단 말입니다.


너무 또 깊이 말씀을 드리면 공연히 분별시비(分別是非)가 되니까 제가 줄여서 말씀을  드립니다.


참선이란 것이 모두가 다 제법공(諸法空)이라, 일체존재(一切存在)가 다 본래(本來)로 없다는 그런 자리에서 출발해야 참선(參禪)이 됩니다.


나라는 주관(主觀)도 없고 또는 너라는 객관(客觀)도 없고 나라는 견해는 이것은 나아(我)자, 볼견(見)자, 아견(我見)이 아닙니까? 또는 대상(對象)적으로 우리가 지금 보는 것은 객관의 이른바 하나의 불교(佛敎)에서 말하는 만법(萬法)이란 말입니다.


아견(我見)과 법견(法見), 아집(我執)과 법집(法執), 나라는 것을 고집하는 것이 아집인 것이고 또는 대상적으로 무엇이 있다고 보는 것이 법집입니다. 아집과 법집이 없다는 소식을 우리가 증명(證明)은 못해도 그 자리를 알고 들어가야 이른바 참선(參禪)이란 말입니다. 일반 명상은 참선이 못 됩니다.


우리가 보통 여러 가지 명상이 있지 않습니까? 그 유위공덕(有爲功德)이라, 눈에 보이는 가식적(假飾的)으로 무슨 어떤 이득(利得)이 있다. 몸이 건강해진다. 머리가 좋아진다. 이런 정도로 법도 모르면서 유위공덕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외도(外道)의 선(禪)입니다. 선이라고 가히 말 붙이지도 못합니다. 외도의 명상(瞑想)이란 말입니다.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어서 인과(因果)는 좀 알지만은 그래도 아직은 그 유위공덕, 가식적인 그러한 공덕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닦는 선이 이른바 불교에서 말하는 범부선(凡夫禪)입니다.


또는 그 다음은 소승선(小乘禪)이라, 이것은 그 아집(我執)을 알고 나라는 것이 원래 없는 것이라는 집착(執着)을 떠나서 닦는 선이 이른바 소승선입니다.


그 다음은 대승선(大乘禪)이라, 한 차원 더 올라가서 나만 존재(存在) 할 수가 없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客觀的)으로 보이는 모두가 다 허망(虛妄)한 것이다. 아집(我執), 법집(法執)을 떠나서 닦는 선(禪)이 이른바 이것이 대승선입니다.


그 다음에 진실로 선(禪)이라고 말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최상승선(最上乘禪)인데 그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내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내 마음의 본래자리가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내 마음과 불심(佛心)이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참다운 부처는 불교의 전문술어로 하면은 법신(法身)부처 아닙니까. 법신부처님, 석가모니(釋迦牟尼)가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이 없이 영원(永遠)히 존재하는 부처가 이른바 법신부처란 말입니다.


그 법신부처하고 내 마음하고 절대로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둘이 아니기 때문에 그 법신부처님 가운데 들어있는 헤아릴 수 없는 만공덕(萬功德)이 내 마음 가운데도 다 들어 있단 말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같은 또는 공자(孔子)같은 노자(老子)같은 예수 같은 그런 천재적인 성품(性品)이라든가 또는  성자(聖者)가 되어서 기적도 부리고 신통(神通)도 하고 불교로 말하면 삼명육통(三明六通)이지요. 그런 모든 가능성이 내 마음에 다 들어 있단 말입니다.


내가 원래 부처인 것을 내 마음과 부처의 법신, 법신 부처와 똑 같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여기 100여명 우리 불자님들이 계시지만은 다 모두가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생각 할 때는 아, 이 사람 마음, 대학교 나온 사람, 고등학교 나온 사람, 또 박사학위 가지고 있는 분, 이 분들 저 분들 마음이 지금 우리가 뿔뿔이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마음이란 것이 모양이 있습니까? 마음은 모양이 없는 것입니다. 모양이 없는 것을 우리가 국한시켜서 얘기도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2500년 이상 되는 그때 부처님 마음이나 또는 2000년 이상 되는 예수님 마음이나 그런 마음이나 우리 마음이나 똑같이 모양이 없습니다. 모양이 있어야 짧다 길다 또는 크다 작다 모두 할 것인데 모양이 없는 것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 4조 도신(道信)스님 법문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내 마음도 모양이 없고 그대 마음도 모양이 없고 또는 석가모니 마음도 모양이 없고 또는 각 그때그때 제방 선지식들 도인들 마음도 모양이 없거니 모양이 어떻게 있고 우리가 측정할 수가 있어야 잴 수가 있어야 할 것인데 모양 없는 것은 잴 수가 없지 않습니까? 모습이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따라서 사실은 모든 존재(存在)가 마음자리에서는 다 하나입니다.


그 물질(物質)은 무엇인가? 아까도 얘기한 바와 같이 물질이란 것은 우리 중생이 잘못 봐서 물질같이 보이는 것이지 존재하는 것은 모두가 다 제법(諸法)이 공(空)이란 말입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모두가 다 제법이 공입니다.


따라서 모두가 사실은 마음 아님이 없습니다. 모두가 물질이 아니다 라고 생각 할 때는 그때는 모두가 다 마음이란 그런 말씀이나 똑 같은 의미가 되겠지요. 천지우주는 물질이란 것은 티끌하나도 없이 모두가 사실은 마음뿐이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잘못 봐서 그런 것이지 마음은 무엇인가? 그 마음이 바로 두 마음이 아닌 옛날 위대한 성자(聖者)마음이나 오늘날 우리 마음이나 또는 산 마음이나 물 마음이나 모두가 다 하나의 마음이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衆生)은 갈라서 보고 성인(聖人)들은 하나의 마음자리를 깨달아서 아까 말씀드린바 깊은 참선(參禪)을 해서 우리 번뇌업장(煩惱業障)을 다 녹여 버리면 그때는 마음만 남는단 말입니다. 순수(純粹)한 마음만 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로 깊은 명상(瞑想)해서 모든 찌꺼기라든가, 우리 잘못 보는 착각(錯覺)을 다 없애버리면 오직 천지우주가 하나의 마음자리입니다. 바로 그 자리가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입니다. 진여불성이라, 진리(眞理)란 것이 여가 있고 저가 있고 둘이 있고 셋이 있고 하지 않습니다. 진리란 것은 오직 하나의 도리입니다.


그 진리는 바로 우주의 생명이기 때문에 진리는 그냥 이치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그때는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이라 그럽니다. 생명이란 뜻을 조금 더 강조하기 위해서 부처님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참선(參禪)할 때는 참선이 되기 위해서는 내 마음이 본래로 청정무비(淸淨無比)한 부처다. 이렇게 알고서 그 자리를 찾기 위해서 우리가 명상을 해야 참선이 된단 말입니다. 그래야 이른바 최상승 참선이라, 최상승선이 되고 또는 여래선(如來禪)이라, 조사선(祖師禪)이라, 무심선(無心禪)이라, 모두가 다 같은 뜻이여요.


육조단경(六祖壇經)에 보면 자성(自性), 불성(佛性)이란 말씀이 100군데가 넘어요. 스스로자(自)자, 성품 성(性)자, 자성이나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이나 똑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분들은 모두가 다 근원적인 그 자리, 근본적(根本的)인 본체(本體)자리, 그 자리에다가 마음을 둔단 말입니다.


상(相)을 떠나면 그때는 본체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중생(衆生)들은 이 현상(現象)만 가지고서 현상은 다르니까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좋다 궂다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육조단경에서도 리상즉선(離相卽禪)이라. 상을 떠나면 떠날리(離)자, 모양형상 상(相)자 상을 떠나면 선(禪)인 것이고 상을 못 떠나면 선이 아니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대덕스님들 또 우리 불자님들 상을 떠나서, 상이란 것은 사실로 존재한다고 하면은 우리가 떠날 수가 없지요. 그러나 상은 존재 않는 것입니다. 인연(因緣)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같이 보이는 것을 우리가 전도몽상(傳導夢想) 해서, 우리가 뒤 바꿔 보고 착각으로 있다고 보는 것이지 사실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천번 만번 있지가 않다고 우리가 되 뇌이면서 있지도 않은 그 자리, 제법공(諸法空)자리, 오온개공(五蘊皆空)자리, 그런 자리를 우리가 참말로 증명(證明)을 해야 그래야 인생고(人生苦)도 떠날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인생고를 떠나기 위해서 발버둥 쳐도 모두가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좋다 궂다 시비분별(是非分別)하는 차원에서는 못 떠납니다. 사실대로 봐야 사실대로 본다는 것은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生命)이란 말입니다.


하나의 생명이 바로 지장보살(地藏菩薩)이고 문수보살(文殊菩薩)이고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고 다 그렇습니다. 


그 부처님 명호(名號)도 그렇게 많지만은 이른바 총대명사(總代名詞)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아미타불(阿彌陀佛) 아닙니까? 사실 그래서 일반 분들은 가만히 아무 말도 않고  잠자코 명상하기가 쉽지가 않겠지요. 따라서 염불삼매(念佛三昧)라, 부처님 이름을 자꾸만 외이다 보면 그때는 마음이 차근차근 다른 망상(妄想)이 줄어지고 우리가 본래(本來) 부처인지라 부처와 가까워진단 말입니다.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는 사람들은 그냥 단순히 의심(疑心)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그 본분자리 말입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는 바로 보면 본체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인데, 진여불성 자리를 여의지 않아야 이른바 참다운 화두란 말입니다.


진여불성을 여의지 않고서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生命)이다. 하나의 진여불성이다. 이렇게 생각하고서 그 자리를 참구(參究)해야 그래야 참다운 화두 공부가 됩니다.


이렇게 하셔서 이번에 하안거(夏安居) 때는 꼭 정말 본래부처인 만능(萬能)을 갖춘 본래부처인 그 자리를 온전히 깨닫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온전히 깨닫지 못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우리 마음이란 것이 잘나고 못나고 많이 배우고 덜 배우고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 공덕(功德)은  절대로 이우러지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훼손이 안됐단 말입니다.


천재(天才) 같은 아인슈타인 마음 그대로, 석가모니(釋迦牟尼) 마음 그대로, 예수님 마음 그대로, 우리한테 지금 다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로 100% 바로 믿고 우리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우리 본래고향(本來故鄕)자리에 대한 간절한 절실한 우리의 구도심(求道心)만 있다고 생각 할 때는 순식간에 우리 마음은 비약(飛躍)해서 극락(極樂)도 갈 수가 있고 또 성자(聖者)도 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부지런히 공부하시길 바랍니다.





나무석가모니불(南無釋迦牟尼佛)!

나무석가모니불(南無釋迦牟尼佛)!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南無是我本師釋迦牟尼佛)!


*이 법문은 2002년 5월26일 성륜사 하안거 결제법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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