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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0. 마음자리로 돌아가는 가르침

18. 하나의 진리

18. 하나의 진리

 

 

역사적으로 위대한 도인들은 절대로 한 법에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천지우주가 다 불성이고 부처님 법이 모두가 다 성불하는 법이거니

어떻게 하나만 옳고 다른 것은 그르다고 하겠습니까.

 

 

 

 

불교는 경전이나 법문이 대단히 많습니다. 그렇다 보니 경(經)에 따라서 참선하는 방법들도 매우 다양합니다. 그래도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는다면 보조국사 어록에도 나오는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淨慧雙修)입니다.

 

돈오(頓悟)는 문득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문득 무엇을 깨달을 것인가? 천지우주가 하나의 진리로 통일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중생의 업장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천 갈래, 만 갈래 구분이 있겠지만 모두가 하나의 진리로 통일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돈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중에는 돈오를 이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보는 분도 있고, 그 논쟁도 심합니다. 그래도 우선 역사적으로 보면 보조국사가 말한 것은 체(體)와 용(用), 성(性)과 상(相)이 둘이 아니고 색즉공(色卽空) 공즉색(空卽色)이라는 것입니다. 천지우주 모두를 하나의 진리와 하나의 체계로 묶어버리는 것입니다.

 

점수(漸修)는 그와 같은 진리를 체험하기 위해 차츰 수행하여 올라가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의 진리를 깨우쳤다 하더라도 이론적으로 된 것이지 아직 체험을 했다고 볼 수는 없으므로 그 같은 진리의 실체를 체험하기 위해 수행을 계속하는 것이 점수입니다.

 

돈오점수를 하는 것도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우선 마음자리를 고요히 묵조(墨詔)하는 방법과 관조(觀照)를 주로 하는 관법(灌法)이 있습니다. 관조를 하는 선법(禪法)은 조계종(曹溪宗)이나 임제종(臨濟宗)에서 주로 합니다. 원불교(圓佛敎)나 일본의 조동종(曹洞宗)에서는 묵조선(黙照禪)을 합니다.

 

묵조선은 잠자코 무념무상으로 비추어보는 것입니다. ‘모두가 본래 부처인데 새삼스럽게 의심할 필요가 있는가? 천지우주가 부처인줄을 알았으면 그 자리를 지키고 가만히 묵조하면 되는 것이지 새삼스럽게 의심할 것인가? 가만히 있으면 흐린 물의 탁한 것이 밑으로 가라앉아 맑아지듯이 그렇게 조용히 묵조하면 부처가 될 것인데 의심을 하면 괜히 마음만 흐트러트려 더욱 귀찮은 일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이거니 가만히 있으면 부처가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송나라 때도 문제를 들고 의심을 하는 화두 선법이 있었고 그와 대립하여 묵조하는 선법도 같이 있었습니다.

 

이렇듯 깨우치는 방법에는 여러 갈래가 있는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 문중에서 하는 선법이 더 좋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행법(行法)이라는 것이 결국은 모두 성불하기 위한 법이기 때문에 자기가 어떤 행법을 하면 어떤 식으로든 거기에서 즐거움을 느끼게 됩니다. 화두도 하다보면 마음이 모아지고 개운해지면서 공부가 되고 재미가 붇습니다. 여기까지라면 별 상관이 없겠지만 자기가 하는 수행법에 재미가 붙으면 자기 공부만 맞는 것이고 다른 방법은 별것이 아니라고 폄하기가 쉽습니다.

 

일본의 조동종은 묵조라, 잠자코 무념무상 하는 종파입니다. 조동종은 묵조만 하는데도 그 규모가 굉장히 큽니다. 종파는 하나지만 불교대학이 몇 개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종파는 화두를 하되 우리 생활과 상관이 없는 엉뚱한 말이나 또 옛날에 그때그때 쏘아버린 말로 화두를 할 것이 아니라 기왕이면 부처님 명호를 가지고 화두를 합니다. 이렇게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 같은 부처님 명호를 화두로 하는 종파를 염불참선이라고 합니다.

 

한국도 서산대사, 사명대사, 진묵대사, 태고대사, 나옹대사, 연기대사 같은 분들은 화두보다 염불을 더 많이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이거나 저거나 부처님이나 도인들이 말씀하신 법문들은 모두 성불하는 법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든 하나를 잡아서 애쓰고 하면 공부가 됩니다. 그 방법이 주문이든 염불이든 다 공부가 되는 것인데, 자기가 한 가지만 열심히 하고는 그것만 옳다고 고집하면 하나의 종파가 생기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도인들은 절대로 한 법에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천지우주가 다 불성이고 부처님 법이 모두가 다 성불하는 법이거니 어떻게 하나만 옳고 다른 것은 그르다고 하겠습니까?

 

참선이라는 것은 우리 마음을 본래의 자리, 본래 본체 자리에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선이라고 하면 왠지 고차원적인 수행을 하는 사람들 같고, 염불은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참선이라고 한다 하더라도 괜히 현상적이고 상대적인 문제만 따지고 있으면 선(禪)이 될 수 없습니다. 본체를 떠나버리면 무슨 선이 되겠습니까?

 

선시불심(禪是佛心)이요, 교시불어(校是佛語)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은 부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의 말이라는 뜻입니다. 선가귀감(禪家龜鑑)이나 여러 경전에서 말하듯이 우리 마음이 진리를 갖추고 있는 본체 자리, 본래면목 자리를 여의지만 않으면 그때는 다 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無)자 화두를 들든 이뭣고 화두를 들든 본래면목자리를 떠나버리면 그건 선이 아닙니다. 그때는 선이 될 수가 없습니다. 6조스님의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위대한 도인들은 절대로 한 법에 치우친 적이 없는데 우리 중생은 한쪽 면만 보는 독선적인 안목을 가지고 꼭 자기 방식만 옳다고 합니다. 전부를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게 치우칠 필요가 없습니다.

 

서산대사도 참선에 대한 귀감으로 선가귀감을 내놓고, 또 도교에 대한 것을 적어 도가귀감도 내고, 유교에 대한 것도 유교귀감이라고 해서 내놓았습니다. 어떤 도인들이라도 그 시대의 종교나 철학을 다 통달해서 당시의 철학이고 종교를 모두 하나의 체계로 묶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부처님 사상은 어느 누구나 무슨 주의나 모두가 근본에서 보면 하나라는 것입니다. 동일률(同一律), 동일철학(同一哲學)을 가져야만 이 하나로 묶을 수가 있습니다.

 

도량이 좁은 사람들이 꼭 자기가 하는 것만을 고집합니다. 우리 공부도 하나에만 치우쳐 놓으면 결국 이루지 못하고 소리만 요란한 것입니다.

 

서울에서 나무호랭게교의 여자 포교사들이 오신 적이 있었는데, 일연스님이 교주로 있습니다. 그 포교하는 분들은 일연스님을 석가모니 부처님보다도 더 앞서 있는 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석가모니뿐만이 아니라 그 뒤에 나온 도인들도 다 아무것도 아니고 일연대사만이 가장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일연종이 큰 세력을 잡고 있지만 일연대사라고 하는 한 사람의 주장에 얽매여 있습니다.

 

우리 불교라는 것은 훨씬 더 광대무변한 것입니다.

 

8.15 해방 후에 우리 조계종도 보다 넓게 문호를 개방했으면 한국 불교의 종파가 20여개나 될 리가 없습니다. 꼭 화두 아니면 선(禪)이 아니라는 식으로 자기 문중만 옳다고 꽉 막혀서 고집을 부리다 보니까 그 범주에 못 들어가는 사람들은 다른 종파를 세울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자기 고집 부리는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자기들과 맞지 않으면 설사 부처님 말씀이라 하더라도 배격을 합니다.

 

현대사회는 자기 안에 갇혀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닙니다. 불법도 다 열어버려서 불교의 화합을 이루는 것도 중요하고, 다른 종교를 인정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지구상의 기독교도가 20억 인구입니다. 이슬람도 거의 10억 인구입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을 세계적으로 수십억의 인구가 믿는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길이 아니면 그 수많은 사람들이 믿을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를 비방하고 싶은 분들은 바이블도 한번 연구를 해봐야 합니다. 저는 바이블을 여러 번 읽었습니다만, 요한복음서나 마태복음서나 누가복음서나 중요한 대목을 놓고 보면 불교와 차이가 없습니다. 상징적인 비유에 차이가 있을 뿐 근본정신은 비슷한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정신, 중생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희생한 정신은 모두가 다 같습니다.

 

어느 누구도 남을 심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다 같은 공업(共業) 중생입니다. 도둑이나 강도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같이 짓고 있습니다. 중중무진(重重無盡)이라, 돌멩이 하나 움직이는 것도, 누가 어깨를 한 번 드는 것도, 내가 듣는 것이나 말하는 것 모두에 천지우주가 다 관여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의 관계로 얽혀 있습니다.

 

미운 사람 예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죄 지은 사람과 결백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말 하나, 행동 하나, 표정 하나가 진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쌓여서 사회적으로 범죄도 늘어나고 전쟁도 일어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