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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3. 수행자료

달마대사의 관심론(觀心論)

달마대사의 관심론(觀心論) 1


“오직 마음을 觀하는 한 법이 모든 行을 다 거두어들이는 것”


혜가가 물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불도를 얻고자 한다면 어떤 법을 수행하는 것이 가장 간단하고 긴요합니까?” 달마스님이 대답했다. “오직 마음을 관(觀)하는 한 법이 모든 행(行)을 다 거두어들이는 것이니, 이 법이 가장 간단하고 요긴한 것이라 한다.” 물었다. “어째서 한 법이 모든 행을 거두어들인다고 합니까?”


달마스님이 대답했다. “마음은 모든 것의 근본이므로 모든 현상은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면 만 가지 행이 갖추어지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큰 나무의 가지나 꽃이나 열매는 모두 뿌리가 근본이다. 나무를 가꾸려면 뿌리를 북돋워야 살아날 것이고, 나무를 없애려면 그 뿌리를 베어버리면 반드시 죽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고 도를 닦으면 힘을 들이지 않고도 쉽게 이룰 것이고, 마음을 알지 못하고 도를 닦으면 힘만 허비할 뿐 아무 이익이 없다. 그러므로 모든 선악이 자기 마음에서 일어남을 알아야 한다. 마음 밖에 따로 구한다면 옳지 않은 것이다."


또 물었다. “어떻게 마음을 관해야 알았다고 합니까?” 대답했다. “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사대오온(四大五蘊:몸의 구성요소인 地, 水, 火, 風을 사대라 하고, 육신과 정신작용을 오온이라 함)이 본래 공하여 ‘나’가 없음을 알며, 또 자기 마음을 쓰는데 두 가지 차별이 있음을 분명히 본다. 무엇을 두 가지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깨끗한 마음이요, 둘째는 물든 마음이다. 깨끗한 마음이란 번뇌가 없는 진여(眞如)의 마음이요, 물든 마음이란 번뇌가 있는 무명(無明)의 마음이다. 이 두 가지 마음이 본래부터 갖추어 있어 비록 인연 따라 화합하기는 하지만 서로 생성하는 것은 아니다.


달마대사의 관심론(觀心論) 2


깨끗한 마음은 착한 인연 즐기고 물든 마음은 항상 악한 업 생각




깨끗한 마음은 항상 착한 인연을 즐기고, 물든 마음은 항상 악한 업을 생각한다. 만약 진여의 마음을 깨쳐 그것이 더러움에 물들지 않음을 깨달으면 이 사람은 성인이다. 그는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 열반의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물든 마음을 따라 악한 짓을 하여 그 업에 얽히고 덮이게 되면 이를 범부라 한다. 그는 항상 삼계(三界)에 빠져 갖가지 괴로움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 물든 마음으로 말미암아 진여의 마음이 가려졌기 때문이다.


 <십지경>에 말하기를 ‘중생의 몸 가운데 금강석처럼 굳은 불성이 있어 해와 같이 밝고 원만하며 광대무변하지만, 단지 오음(五陰)의 검은 구름에 덮여 마치 항아리 속의 불빛이 밖으로 비추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하였고, 또 <열반경>에 말하기를 ‘모든 중생에게 불성(佛性)이 있으나 무명에 덮여서 해탈하지 못한다.’ 하였다. 불성이란 깨침이다. 스스로 깨치고 그 깨친 지혜가 밝아서 덮였던 것에서 벗어나면 이것이 곧 해탈이다. 그러므로 모든 선(善)은 깨침으로 뿌리를 삼고, 그 깨침의 뿌리로 인해 모든 공덕의 나무가 무성하여 열반의 열매가 여문다. 이와 같이 마음을 관하는 것을 마음을 알았다고 한다.”


또 물었다. “위에서 말씀하신 진여불성(眞如佛性)의 모든 공덕은 깨침이 뿌리가 됨은 알았으나 무명의 마음과 모든 악은 무엇을 뿌리로 삼는 것 입니까?”


대답하기를 “무명의 마음에는 팔만사천의 번뇌와 정욕이 있어 갠지스 강의 모래 수효만큼이나 악한 것들이 한량없으나 요약해서 말한다면 삼독이 근본이다. 삼독이란 탐욕, 성냄, 어리석음 인데, 이 삼독심에는 저절로 모든 악이 들어 있다. 마치 큰 나무의 뿌리는 하나이지만 가지나 잎은 수없이 많은 것처럼 삼독의 뿌리는 하나이지만 그 속에는 나무의 비유보다 백천만배나 더하여 비유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달마대사의 관심론(觀心論) 3


삼독이 육근에 작용하면 육적(六賊)  돌이켜 육바라밀 이루어야



이러한 삼독은 하나의 본체에서 절로 삼독이 되어 만약 육근(六根)에 작용하면 육적(六賊)이 된다. 육적은 곧 육식(六識)이다. 이 육식이 육근을 드나들며 온갖 대상에 탐착심을 일으키므로 악한 업을 지어 진여를 가리게 된다. 그러므로 육적이라 일컫는다. 모든 중생은 이 삼독과 육적으로 말미암아 몸과 마음이 어지러워지고 생사의 구렁에 빠져 육도(六途)에 윤회하면서 온갖 고통을 받는다.


비유하자면 강물은 본래 조그마한 샘에서 발원하여 끊이지 않고 흘러서 마침내 물이 가득 넘실거리며 끝없는 파도를 이루게 되지만 만약 어떤 사람이 그 물줄기의 근원을 끊으면 모든 흐름이 다 쉬게 된다. 이처럼 해탈을 구하는 사람도 삼독을 전환하여 삼취정계(三聚淨戒:부처님이 정한 규칙을 지켜 악을 막는 세 가지 법. 착한 법은 행하라, 중생을 이롭게 하라, 계율을 잘 지켜라)를 이루고, 육적을 돌이켜서 육바라밀을 이루면 절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것이다.”


또 물었다. “삼독과 육적이 광대무변한데 오직 마음만 관한다고 해서 어떻게 한없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대답했다. “삼계의 업보는 마음에서 생긴 것이니, 마음만 깨치면 삼계안에 있으면서 삼계를 벗어난다. 삼계가 바로 삼독이다. 탐심이 욕계가 되고, 성내는 마음이 색계가 되고, 어리석은 마음이 무색계가 된다. 이 삼독심이 갖가지 악을 결집하여 업보를 이루어 육도를 윤회하게 되므로 이를 삼계라 한다. 또 삼독이 짓는 업의 경중에 따라 받는 과보도 달라서 여섯 곳으로 나누어지게 되므로 육도라 하는 것이다.”


달마대사의 관심론(觀心論) 4

진여의 성품 삼독에 덮였으니 삼독만 제거하면 해탈이라


다시 물었다. “여섯 갈래로 나눠지는 가벼움과 무거움은 무엇입니까.” 대답했다. “만약 어떤 중생이 바른 길을 알지 못하고 그릇된 마음으로 선(善)을 닦으면 삼계를 면하지 못해서 세 가지 가벼운 곳에 태어난다. 세 가지 가벼움이란 무엇인가. 말하자면 그릇되게 십선(十善)을 닦으면서 함부로 쾌락을 누린다면 탐욕의 세계를 면치 못해 하늘(天趣)에 태어나고, 그릇된 마음으로 오계(五戒)를 지켜 함부로 사랑과 미움을 일으키면 성내는 세계를 면치 못해 인간에 태어나고, 그릇되게 유위법(有爲法)에 집착하여 삿된 법을 믿어 복을 구하면 어리석은 세계를 면치 못해 아수라에 태어난다. 이런 세 종류를 세 갈래의 가벼운 길이라 한다.


무엇이 세 가지 무거운 길인가. 말하자면 삼독의 마음을 마음대로 부려 악업을 짓는 것인데, 만약 탐욕의 악업이 무거운 자는 아귀에 떨어지고, 성냄의 악업이 무거운 자는 지옥에 떨어지며, 어리석음의 악업이 무거운 자는 축생에 떨어진다. 이 세 가지의 무거움과 앞의 세 가지 가벼움을 합쳐 여섯 갈래(六趣)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업이란 오직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마음을 잘 다스려 그릇되고 악한 것을 버리면 삼계와 여섯 갈래의 길로 떠도는 고통은 절로 소멸하고,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다면 이를 해탈이라 한다.”


다시 물었다. “부처님께서는 ‘나는 한없는 아승지겁을 부지런히 수행하여 불도를 이루었다’ 하셨는데 스님께서는 어째서 오직 삼독만을 제거하면 해탈한다 하십니까.” 대답했다. “부처님의 말씀은 진실이다. 아승지란 곧 삼독심이다. 인도어인 아승지는 한문으로 헤아릴 수 없다는 뜻이다. 마음에는 갠지스 강 가의 모래만큼이나 악한 생각이 있고, 그 낱낱의 생각 중에 다 일 겁씩 있다. 강가의 모래를 셀 수 없듯이 삼독의 악한 생각도 모래와 같으므로 셀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진여의 성품이 삼독에 덮였으니 모래 수만큼이나 많은 악한 생각에서 초월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탈이라 하겠는가.


달마대사의 관심론(觀心論) 5


일독(一毒)만 제거해도 한없는 선 이뤄 삼독(三毒) 없애면 피안의 세계 도달


"지금 탐욕, 성냄, 어리석음 등의 삼독심만 없애면 이것이 곧 삼 아승지겁을 뛰어넘는 것이 되는데, 말세 중생들은 어리석고 둔하여 부처님의 깊고 묘한 삼 아승지겁의 비밀한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한량없는 겁을 지내야만 성불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어찌 말세에 수행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잘못 알고 의심을 내게 하여 보리도(菩提道)에서 퇴보하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물었다. “보살마하살이 삼취정계(三聚淨戒)를 가지고, 또 육바라밀을 행해야 불도를 이룬다 하셨는데, 지금 수행자로 하여금 오직 마음만 관하고 계행을 닦지 않게 한다면 어떻게 성불할 수 있겠습니까.” 대답했다. “삼취정계란 바로 삼독심을 제거하는 것이니, 일독(一毒)만 제거해도 한없는 선을 이루게 된다. 취(聚)란 모았다는 뜻인데, 삼독을 제거하면 곧 세 가지 무량한 선만 있게 된다. 그 선이 모두 마음에 모이게 되므로 삼취정계라 한다. 또 육바라밀이란 곧 육근을 맑게 하는 것이니, 인도에서는 바라밀이라 하고 한문으로는 피안(彼岸)에 이른다는 뜻이다. 육근이 청정하여 세상일에 물들지 않으면 곧 번뇌에서 벗어나 피안에 이르게 되므로 육바라밀이라 한다.


또 물었다. “경전에는 ‘삼취정계란 모든 악 끊기를 서원하고, 온갖 선 닦기를 서원하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를 서원하는 것이다’고 했는데, 지금은 오직 삼독심만 제거하라 하시니 이는 경문의 뜻과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까.”  대답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전은 진실한 말씀이라 거짓됨이 없다. 보살마하살이 과거세상에서 인행(因行: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함)의 지위에서 보살행을 닦을 때, 삼독을 없애기 위해 세 가지 서원을 세워 삼취정계를 지켰다".


달마대사의  관심론(觀心論) 6


계·정·혜 청정한 법 지켜 삼독 벗어나 불도 이루어야


항상 계행을 닦은 것은 탐욕의 독을 제거하여 모든 악 끊기를 서원한 때문이며, 선정(禪定)을 닦은 것은 성냄의 독을 제거하여 모든 선 닦기를 서원한 때문이요, 항상 지혜를 닦은 것은 모든 어리석은 독을 제거하여 일체 중생을 제도하려는 서원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처럼 계·정·혜의 세 가지 청정한 법을 지킴으로써 삼독의 악업을 벗어나 불도를 이루는 것이다.


삼독을 끊으면 모든 악이 소멸되기 때문에 ‘끊는다’ 한 것이며, 삼취정계를 지키면 모든 선이 갖추어지므로 ‘닦는다’ 한 것이고, 악을 끊고 선을 닦으면 모든 수행이 성취되어 자타가 이롭게 되어 널리 중생을 구제하기 때문에 ‘제도한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계행을 닦는 것도 마음을 떠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만약 스스로의 마음이 맑으면 모든 중생도 청정해진다. 그래서 경에도 ‘자기 마음이 더러우면 모든 중생도 더러워지고, 마음이 맑으면 중생도 맑아진다’하였고, 또 ‘불토(佛土)를 맑게 하고자 한다면 먼저 그 마음을 맑게 하라. 마음이 맑아지면 불토 역시 맑아진다’ 하였다. 그러니 세 가지의 독한 마음만 다스릴 수 있다면 삼취정계는 절로 성취되는 것이다.”


또 물었다. “경전에 말씀한 육바라밀은 육도(六度)로서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를 말합니다. 그런데 지금 육근이 청정한 것이 육바라밀이라 한 뜻을 알려주시고 또 도(度)란 무슨 뜻입니까.” 대답했다. “육도를 수행하려면 육근을 맑게 해야 하고, 육근을 맑게 하려면 먼저 여섯 가지 유혹(六賊)을 내쳐야 한다. 눈의 유혹을 버리면 물질의 애착을 떠나 마음에 인색함이 없어지는데 이를 보시라 한다. 귀의 유혹을 막아 헛된 소리에 얽매이지 않는 것을 지계라 하고, 코의 유혹을 항복시키면 모든 냄새 따위에 분별이 없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인욕이라 하며…


달마대사의  관심론(觀心論) 7


육바라밀은 배와 같아서

모든 중생 피안으로 운반


혀의 유혹을 다스리면 그릇된 맛을 탐내지 않고,

불법을 읊고 이야기하되 피로하다거나 싫어함이 없는 것을 정진이라 하며,

육신의 유혹을 항복받으면 모든 감촉(感觸)의 욕망에 담담해져서 흔들림이 없는 것을 선정이라 하며,

뜻을 잘 다스리면 무명(無明)을 따르지 않고 항상 깨침의 지혜를 닦으면서 모든 공덕을 즐거워하는 것을 지혜라고 한다.

또 도(度)라고 함은 ‘운반한다’는 뜻이다.


육바라밀은 비유하자면 배와 같아서 모든 중생을 운반하여 피안에 이르게 하므로 육도라 하는 것이다.”


다시 물었다.


“경문에는 ‘석가여래께서 보살로 계실 때,

서 말 여섯 되의 우유죽을 드시고 비로소 성불하셨다’ 했습니다.

먼저 우유를 드신 후에 불과(佛果)를 증득하셨는데,

어째서 관심(觀心)만으로 해탈한다 하십니까.”


대답했다.

“진실로 경문의 말씀은 허망함이 없다.

우유를 드신 후에 비로소 성불하셨는데,

이는 세속의 부정한 우유가 아니라 진여(眞如)의 깨끗한 법유(法乳)이다.

서 말(三斗)이라 한 것은 삼취정계요,

여섯 되(六升)라 함은 육바라밀이다.

부처님이 성도(成道)하실 때,

청정한 법유를 마심으로 해서 불과(佛果)를 얻으셨는데

도리어 말하기를 ‘세속의 음욕으로 화합된 누린내 나는 젖을 먹었다’하니,

비방함이 심한 말이 아니겠는가.


여래란 금강석과 같아 무너지지 않는 무루법신(無漏法身 : 번뇌 없는 진실한 몸)이라서 세상의 고통을 영영 떠났는데,


어찌 이 같은 부정한 우유로 기갈을 면했겠는가.

경에 말한 것처럼 ‘이 소는 높은 언덕에도 있지 않고,

낮은 습지에도 있지 않고,

곡식이나 지게미도 먹지 않으며,

잡된 소와 어울리지도 않으며,

몸은 자마금색(紫摩金色)이다’하였으니,

이 소는 바로 비로자나불인 것이다.


달마대사의  관심론(觀心論) 8


몸 가운데 진여불성 녹여서

계율의 틀에 넣으면 ‘眞容의 모습’


대자비로 모든 중생을 가엾이 여겨 청정한 법체에서

이러한 삼취정계와 육바라밀의 미묘한 법유(法乳)를 흘려 내리게 해서

해탈을 구하는 이들을 법유로 기르시니,

이와 같은 청정한 소의 청정한 우유를 마시면 비단 부처님만 그걸 드시고 성도(成道)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도 마시기만 하면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를 얻게 된다.”


다시 물었다.

“경전에는 ‘중생이 절을 짓고 성상(聖像)을 세우고,

향을 사르고,

꽃을 뿌리고,

장명등을 켜고,

밤낮으로 여섯 차례나 행도(行道)하고,

재계(齋戒)를 지키며,

예배를 올리는 등 여러 가지의 공덕을 닦으면 불도를 이룬다’ 하셨는데,

오직 관심법(觀心法)에 모든 수행이 포함된다 하시니 이건 전혀 허망한 말 같습니다.”


대답했다.

“경전은 무수한 방편으로 되어 있다.

중생들은 근기가 둔하고 지혜가 부족하여 깊은 뜻을 알지 못하므로

유위(有爲)의 일로 무위(無爲)의 이치를 나타낸 것이다.

만약 안으로 수행하지 않고 밖에서 복을 얻으려 한다면 옳은 처사가 아니다.

가람이란 범어의 음략(音略)인데 청정처란 뜻이다.

만약 삼독을 영원히 없애고 항상 육근이 깨끗하며,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하여 안팎이 청정하다면 이것이 가람을 짓는 것이다.


또한 불상을 조성하는 것은 중생들이 불도를 구할 때,


말하자면 각행(覺行 : 自覺·覺他하는 행법)을 닦을 때에 여래의 참되고 묘한 모습을 허상으로 반영한 것이지 어찌 법을 금동(金銅)으로 주조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해탈을 바라는 자는 몸으로 불가마를 삼고, 법으로 불을 삼고, 지혜로 공장(工匠)을 삼고, 삼취정계와 육바라밀로 모양을 삼아 몸 가운데 있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녹여서 계율의 틀에 넣어 하나도 빠뜨림 없이 가르침대로 행하면 절로 진용(眞容)의 모습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것이 말하자면 허물어지는 유위법이 아니라 영원히 상주하는 절대 진리의 미묘법신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도를 구하면서도 이러한 참된 진용(眞容)을 조성하고 그리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무엇으로 공덕을 이룬다 하겠는가.


  달마대사의 관심론(觀心論) 9


정법의 향과 꽃 공양하라 하였는데

근기 둔하여 향 태우고 꽃 뿌리니…


향(香)이란 세속의 형상이 있는 향이 아니라 무위정법(無爲正法)의 향이다. 더러운 냄새를 없애고 무명의 악업을 끊어 다 소멸시키는 것이다. 정법의 향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계향(戒香)이니, 모든 악을 끊고 선행을 닦는 것이다. 둘째는 정향(定香)이니, 대승(大乘)을 깊이 믿어서 물러남이 없는 마음이다. 셋째는 혜향(慧香)이니, 항상 몸과 마음을 안팎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넷째는 해탈향(解脫香)이니, 모든 무명의 결박을 끊는 것이다. 다섯째는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이니, 항상 관찰하는 것이 밝아서 걸림 없이 통달하는 것이다. 이 다섯 향은 최상의 향으로서 세상에서는 견줄 것이 없다.


부처님이 생존했을 때, 제자들에게 지혜의 불로써 이러한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보배의 향을 사루어 시방세계의 부처님에게 공양하라 하셨는데, 요즘 중생은 어리석고 근기가 둔하여 여래의 진실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침단·훈육 등 제조된 향을 불로써 태우며 복을 바라니 어찌 복을 얻겠는가. 또 꽃을 뿌리는 것도 역시 같은 이치이다. 말하자면 정법(正法)의 공덕 꽃을 설명하여 중생을 이익 되게 하고, 진여의 성품을 다스리고 뿌려서 널리 장엄(莊嚴)을 베푼다면 이런 공덕의 꽃이야말로 부처님이 칭찬하는 것으로 영원히 시들거나 떨어지지 않는다.


어떤 이가 이러한 꽃을 뿌린다면 한없는 복을 받는다. 그러나 ‘여래께서는 제자나 중생들로 하여금 아름다운 꽃이나 초목을 꺾어서 공양하게 했다’고 말한다면 크게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계행을 지키는 이는 천지의 삼라만상을 해칠 수가 없고, 설령 실수로 해치는 것도 큰 죄를 받는데, 어찌 청정한 계를 무너뜨리고 만물을 손상시키면서까지 복을 구하겠는가. 이는 이익을 바라다가 도리어 손해가 되니 어찌 옳다 하겠는가.


달마대사의 관심론(觀心論) 10


근기 둔한 사람 밖으로 과보 구해

밤낮 분주하게 세간의 탑 돈다.


또 장명등이란 바르게 깨친 마음을 뜻한다. 깨달은 지혜의 명료함을 등에 비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해탈을 구하는 사람은 몸으로 등대(燈臺)를 삼고, 마음으로 등잔을 삼고, 믿음으로 심지를 삼고, 계행을 기름으로 삼으면 지혜의 밝기가 마치 등불 같을 것이다. 항상 이러한 깨달음의 등으로 모든 무명과 어리석음을 비추어야 하며, 이러한 법으로 밝은 깨달음을 열어나가야 한다. 즉 하나의 등불로 백천 개의 등불을 밝히고 이 등불의 밝음이 끝없이 이어지므로 장명등이라 한다. 과거 세상에 연등불이 계셨다는 것도 역시 이러한 뜻이다.


어리석은 중생이 여래의 방편의 말씀을 알지 못하여 허망한 짓을 하고, 유위법(有爲法)에 집착하여 세간의 소유(蘇油)로 등을 켜서 빈 방을 비추는 것으로써 가르침대로 한다고 하니, 어찌 잘못됨이 아니겠는가. 그 까닭이 무엇인가.


부처님의 미간(眉間)에 있는 백호광(白毫光)으로도 십만 팔천의 세계를 비추고, 신광(身光)을 다 나타내면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게 되는데, 어찌 이런 세속의 등을 빌려서 이익을 삼겠는가. 이런 이치를 깊이 살펴보면 응당 그렇지 않겠는가.


또 여섯 차례 행도(六時行道)한다는 것은 항상 육근(六根)의 활동이 불도를 행한다는 뜻이다. 부처란 깨침이다. 즉시 모든 각행을 닦아 육근을 조복시키고 육정(六情)의 청정함을 오랫동안 버리지 않는 것, 이를 육시행도라 한다. 탑이란 몸과 마음을 상징한다. 밝은 지혜로 몸과 마음이 돌며 생각생각이 끊이지 않는 것을 탑돌이라 한다. 과거 성현들도 이 도를 행하여 열반락을 얻었는데 지금 해탈을 구하는 사람이 이런 이치를 모르니 어찌 행도한다 하겠는가. 근기가 둔한 사람을 보면 안으로 닦지 않고 밖으로 과보만 구하면서 밤낮 분주하게 세간의 탑을 돈다. 이는 피로하기만 하고 진성(眞性)에는 아무 이익이 없으니 어리석은 무리여 참으로 가엾다.


  달마대사의 관심론(觀心論) 11


모든 계행 법답게 지켜 보호하고

반드시 삼독 끊어 몸과 마음 청정


또 지재(持齋)라 하는 것도 그 뜻을 잘 알아야 한다. 이치를 모르면 공력만 허비한다. 재(齋)란 가지런하게 한다는 뜻이다. 즉 몸과 마음을 부지런히 닦아서 산란하지 않게 하는 것이고, 지(持)는 보호한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모든 계행을 법답게 지켜 보호하되 반드시 육정(六情)을 금하고 삼독을 끊으며, 부지런히 깨닫고 살피는 수행을 하여 몸과 마음이 청정해지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뜻을 알아야 재계(齋戒)를 지킨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재계를 지키고 보호하는 데에는 다섯 종류의 식사가 있다.


첫째는 법희식(法喜食)인데, 여래의 바른 법을 믿고 기쁘게 받들어 행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선열식(禪悅食)인데, 안과 밖이 맑고 고요하여 몸과 마음이 늘 즐거움을 말한다. 셋째는 염식(念食)인데, 늘 부처님을 생각하되 마음과 입이 한결같음을 말한다. 넷째는 원식(願食)인데, 다니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간에 늘 바른 원을 행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해탈식(解脫食)인데, 마음이 항상 청정해서 세상 번뇌에 물들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이 다섯 가지 깨끗함을 보호하고 먹는 것을 재식이라 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런 다섯 종류의 깨끗한 음식을 먹지 않고 재계(齋戒)를 지키며 보호한다 한다면 전혀 옳지 않은 말이다.


또 단식(斷食)이란 무명과 악업의 음식을 끊는 것을 말한다.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은 이런 이치를 모르고 몸과 마음을 멋대로 행동하여 악업을 짓고 정욕에 이끌려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면서 단지 입으로 먹는 음식만을 끊고는 재계를 지키고 보호한다 하니, 이는 철없는 아이가 썩은 시신을 보고 산 사람이라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전혀 옳지 않다. 또 예배라 하는 것은 법답게 행하는 것을 말한다. 안으로 밝은 것이 이치의 본질이고, 밖에서 변하는 것이 일의 모습이다. 이치는 버릴 수가 없으나 일이란 나가서 행할 때도 있고 물러나 숨는 때도 있다. 이런 뜻을 이해한다면 법에 의지한다고 할 수 있다. 대체로 예(禮)라는 것은 공경하는 뜻이며, 배(拜)라는 것은 굴복한다는 뜻이니, 진성(眞性)을 공경하고 무명을 굴복시키는 것을 예배라고 하는 것이다.

 

달마대사의 관심론(觀心論) 12

겉의 예배 통해 마음 밝아짐은

성품과 겉모습 서로 같기 때문


공경하므로 헐뜯지 않고, 굴복하므로 방종함이 없다. 만약 악한 감정이 영 사라지고 착한 생각이 항상 존속된다면 비록 겉모습으로 나타내지 않아도 항상 예배하는 것이 된다. 모습(相)이란 육신의 행위다. 세속적인 법을 따라 마음을 낮춰 겸손함을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에 겉모습을 굴복시켜 공경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 씀에 따라 드러나기도 하고 감춰지기도 하는 것이니, 겉의 예배를 통하여 마음이 밝아지는 것은 성품과 겉모습이 서로 같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이법(理法)을 행하지 않고 겉모습의 예배만을 집착하고 마음대로 탐·진·치에 놀아나며 악업을 짓는다면 이는 겉으로 거짓 흉내만 것이니 어찌 예배라 하겠는가. 성인과 현인을 기만하는 짓이니 반드시 윤회를 면치 못할 것이다.”


물었다. “<온실경>에 보면 ‘여러 스님을 목욕시켜주면 한없는 복을 받는다’ 하였는데 오직 관심(觀心)만 해도 마찬가집니까.”대답했다. “스님들을 목욕시킨다 하는 것은 세간의 유위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세상의 일을 빌려서 참진리를 비유한 것이며, 일곱 가지 일을 견주어서 말한 것이다. 그 일곱 가지는 첫째 맑은 물이고, 둘째 불을 피우는 것이고, 셋째는 조두( 豆)요, 넷째는 양지(楊枝)요, 다섯째는 깨끗한 재(灰)요, 여섯째는 우유 기름이며, 일곱째는 속옷이다. 이 일곱 가지의 법을 사용하여 목욕하고 장엄하면 삼독과 무명의 때를 제거할 수 있다.


일곱 가지 법이란 첫째는 법과 계율이다. 잘못된 허물을 따뜻한 물에 씻기를 마치 맑은 물이 더러운 때를 씻듯이 함이다. 둘째는 지혜이니, 내외를 관찰하기를 마치 타는 불이 맑은 물을 덥게 하듯이 함이다. 셋째는 분별이니, 악을 골라 버리기를 마치 콩을 씻어 깨끗하게 하는 것과 같음이다. 넷째는 진실이니, 온갖 거짓말을 끊는 것이 마치 양치질하여 입 냄새를 없애듯 함이다.


달마대사의 관심론(觀心論) 13


말로 인해 뜻을 얻지만

뜻 얻고 나면 말은 잊어버리라


통발로 인해 고기를 잡되 고기를 잡고나면 통발은 잊어버린다. 말로 인해 뜻을 얻지만 뜻을 얻고나면 말은 잊어버린다. 그러므로 이미 염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면 염불의 실체를 행해야 한다. 만약 생각에 실체가 없이 입으로 헛되이 명호만을 왼다면 공력만 허비할 뿐 이익이 없다. 또 외우는 것과 염(念)하는 것은 이름과 뜻이 매우 다르다. 입으로 하면 외운다 하고, 마음으로 하면 염한다 한다. 그러므로 염하는 것은 마음에서 일어나므로 깨치는 수행의 문이라 하고, 외우는 것은 입에 속하며 음성의 모습이니, 형상에 집착해서 복을 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경에 말하기를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하였다. 또 말하기를 ‘만약 모양으로 나를 보려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은 사도(邪道)를 행하는 것이니, 끝내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했으니, 이로써 본다면 형상은 진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과거의 여러 성현들이 닦은 공덕은 다른 말씀을 한 것이 아니라 오직 마음을 논하였을 뿐이다. 마음은 여러 성인들의 근원이고, 마음은 모든 악의 주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더없는 참 즐거움도 마음에서 생기고, 삼계를 윤회하게 됨도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마음은 세간을 벗어나는 문턱이요, 마음은 해탈의 나루터이니, 문턱을 안다면 어찌 이루지 못할 것을 염려하며, 나루터를 안다면 어찌 건너지 못할 것을 근심하겠는가.


  달마대사의 관심론(觀心論) 14


어리석은 이 작은 쾌락 탐하며

닥쳐 올 큰 고통 깨닫지 못하니


요즘 천박한 사람들을 보니, 오직 형상을 세우는 것으로 공덕을 삼아 많은 재물을 허비한다. 물과 육지의 중생을 죽여서 불상과 탑을 세우며, 인력을 허비하여 나무와 진흙을 쌓아올려 단청을 하기에 온힘을 다 기울이니, 자기도 손해요 남도 어리석게 하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니 어찌 깨달을 수 있겠는가.


유위법(有爲法)을 보면 부지런히 애착을 일으키고 무위법(無爲法)을 말해주면 바보처럼 멍청해진다. 세상의 조그마한 쾌락을 탐하다가 닥쳐올 큰 고통을 깨닫지 못하니 이런 공부는 스스로 피로할 뿐이다. 이는 불법의 바른 이치를 등지고 삿된 길로 가는 것이니, 복을 받는다는 것은 속이는 말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거두고 안을 비추어 항상 밝게 관찰하여 삼독심을 영원히 녹여 없애고, 육적의 문을 닫아서 다시는 침범 못하게 하면 한없는 공덕과 갖가지의 장엄과 무량한 법문을 성취할 것이다. 범부를 초월하여 성현의 지위에 오르는 것은 눈 깜짝할 사이다. 깨달음은 일순간인데 어찌 번거롭게 머리가 희도록 기다리겠는가. 참된 법문은 깊고 비밀하니 어찌 다 말하겠는가. 이에 간략하나마 관심법에 대해 조금 밝혔을 뿐이다.”

                                                              ㅡ끝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