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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불교] 밀교 명상의 핵심 - 소갈 린포체

[티벳불교] 밀교 명상의 핵심 - 소갈 린포체

 

명상을 배우는 일이야말로 당신이 당신 자신에게 이번 생에서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오직 명상을 통해서만 당신의 참자아를 발견하는 여정에 나설 수 있고,
제대로 살고 제대로 죽기 위해서 필요한 확신과 안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명상은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다.

명상이란, “버릇에 따라서” 움직이는 행동방식과 철저히 결별하는 것이다.

모든 걱정과 근심에서 벗어난 상태, 그 무엇과도 겨루지 않고 그 어느 것도 붙잡아 가지려 하지 않고 그 무엇도 이루려 애쓰지 않고 치열한 갈등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는 상태, 끌어들이지도 않고 떠밀지도 않고 희망하는 것도 없고 두려운 것도 없는 상태, 그동안 우리를 감옥에 가두어놓았던 모든 감정들과 관념들을 자연스런 단순함 속으로 풀어버리는 일이 조금씩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상태에 머무는 것이 곧 명상이기 때문이다.

 

명상의 목적은 우리 안에 하늘같은 마음의 본성을 일깨우고 우리를 본디 우리에게로,
삶과 죽음을 함께 떠받들고 있는 순수한 깨어있음에로 이끌어가는 데 있다.

명상의 고요한 침묵 속에서 우리는, 바쁜 일상의 업무와 잡다한 생각들에 파묻혀 오래 전에 잃어버렸던 깊은 내면의 바탕마음을 들여다보게 되고 마침내 그리로 돌아간다.

 

당신이 자신을 열어 놓고 마음을 모아, 당신 마음에 집중하면 할수록 그만큼 당신의 좋지 못한 점들이 제거될 것이다. 차츰차츰 다른 사람으로 되어 있는 자신을 느낄 것이다.

그리하여 깊고 자유로운 평안을 맛보게 된다.
내 생각에는 자기 중심을 바라보는 이 수련법이야말로 자기를 치료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마음을 훈련한다(training)고 할 때,
그 말은 강제로 마음을 굴복시킨다거나 세뇌시킨다는 뜻이 아니다.

마음을 훈련한다는 것은 우선 자기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명상 수련을 함으로써 경험으로 알게 된 바를 소화시키는 것이다.

그런 다음 당신은 얻은 바 지식을 활용하여 마음을 길들이고 솜씨있게 다루어 차츰차츰 유연하게 만들고, 그렇게 해서 마침내 당신 마음의 주인(master)이 되어 당신과 세상 모두에게 유익을 주도록 충분히 마음을 부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음 모으기 수련은 수많은 생(生)을 통하여 집적되었을 온갖 부정적이고 공격적이고 난폭한 감정들을 소멸시킨다. 그것들을 억누르거나 그것들에 빠져들지 말고, 될 수 있는대로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자세로 그것들―당신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느낌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이 중요하다.

티베트 스승들은 그 너그러움에 한없는 공간의 풍미(風味)가 있다고, 너무나도 따뜻하고 아늑하여 마치 햇볕 담요에 감싸여 보호받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말한다.

 

마음 모으기 수련은 당신 속에 본디부터 있는 착한 마음(essencial Good Heart)의 베일을 벗겨 드러내 준다. 그것이 당신의 불친절과 남 해치려는 마음을 녹여 없애기 때문이다.

속에서 남 해치려는 마음이 사라질 때에만 당신은 진정으로 남에게 쓸모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마음 모으기 수련을 통해, 불친절과 남 해치려는 마음을 천천히 소멸시킴으로써 당신 진짜 본성인 친절함과 착한 마음이 밖으로 드러나, 당신의 참자아를 꽃피울 따스한 날씨로 바뀌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명상이야말로 평화를 위해 필요한 수련이요,
세계의 비폭력과 진정한 비무장을 위한 수련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흩어져 있는 마음을 불러 들이고 그렇게 해서 몸과 마음으로 하여금 온전히 지금 여기에 머물도록 하는 마음모으기 수련을 다른 말로 "평화롭게 머물기"(Peacefully Remaining) 또는 "고요한 거주"(Calm Abiding)라고도 한다.

서로 부딪쳐 갈등하던 우리 자신의 여러 모습들이 마음모으기 수련을 통해서 정돈되고 풀어지고 화해하고 친구가 된다. 그런 과정을 거쳐 우리는 좀 더 자기를 이해하게 되고 때로는 자신의 근본 바탕에서 뿜어내는 밝은 빛살을 흘낏 훔쳐보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가 마음 수련의 길을 걷는 이유는 에고의 이상야릇한 독재를 끝장내려는 데 있다.

그러나 에고의 비상한 재주는 무궁무진이어서 저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우리의 욕구를 온갖 방법으로 가로막고 훼방놓는다.

진실은 간단하고 가르침들은 명료하다.

그러나 우리가 가르침을 받아 진실에 접근할 때마다 위협을 느낀 에고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들을 어지럽히려 하는 것을 나는 큰 슬픔을 안고서 거듭거듭 보았다.

그렇지만, 에고가 아무리 마음 수련을 방해하고자 애쓴다 해도 당신이 진심으로 명상수련에 정진한다면, 그동안 에고가 어떻게 거짓 희망과 거짓 두려움으로 당신을 속여왔는지 조금씩 천천히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희망과 두려움이 당신 마음의 평화를 무너뜨리는 적(敵)들이라는 사실을,
희망은 당신을 속여 마침내 절망과 공허 속에 혼자 있도록 만들고
두려움은 거짓 정체(正體)의 좁은 독방에 당신을 가두어 마비시킨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아울러, 그동안 어떻게 에고의 막강한 통치력이 당신을 지배해왔는지 깨닫는 것과 동시에 명상으로 열어놓는 자유의 공간 안에서 순간적이지만 모든 집착을 놓아버릴 때 당신의 참자아가 지닌 거칠 것 없는 광활함을 비로소 흘낏 보게 될 것이다.

 

보통 우리는, 사람의 생각이라는 게 끊임없이 흐르는 어떤 것인 줄 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자세히 관찰하면 당신의 생각과 생각 사이에 틈(gap)이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앞생각이 지나가고 뒷생각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바로 그 틈 사이에 마음의 참본성인 리그파가 드러난다. 명상이란, 생각들을 가라앉혀 그 틈을 차츰 넓히고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명상을 가르칠 때 나는 자주 이런 말로 시작한다.
“당신 마음을 집으로 데려오시오. 그리고 풀어놓으시오. 그리고 쉬시오.”

마음을 집으로 데려오라는 말은,
마음모으기 수련을 통해 ‘고요한 거처’로 마음을 불러 들이라는 뜻이다.


마음을 집으로 데려오는 것은 마음을 안으로 돌이켜 마음의 참본성 안에서 쉬게 하는 것이다.
이것 자체가 가장 높은 차원의 명상이다.

풀어놓으라는 말은, 마음을 집착의 감옥에서 풀어놓으라는 뜻이다.
모든 고통과 두려움과 번뇌가 움켜 잡는 마음의 욕망에서 일어나는 것들임을 당신은 알고 있다.

 

마음의 참본성에 대하여 차츰 알아가면서 얻게 되는 깨달음과 확신은 당신으로 하여금,
모든 집착을 놓아버리고 그것들을 명상이 주는 영감 안에 녹여 없앨 수 있도록 도와준다.


쉬라는 말은, 거칠 것 없이 탁 트여 마음의 긴장을 풀고 쉬라는 뜻이다.
더 깊이 들어가면, 마음의 참본성인 리그파(Rigpa) 상태에 들어가 거기서 쉬게 된다.

그것은 마치 모래 한 줌을 평평한 바닥에 놓을 때 한알 한알이 스스로 제 자리를 잡는 것과 같다.

이것이 당신의 참본성 안으로 들어가 거기서 쉬는 방법이다.
그리하여
모든 생각과 느낌들로 하여금, 저절로 마음의 참본성 안에 녹아들도록 하는 명상법이다.

** 마음의 참본성(ture nature of mind) : 붓다의 바탕 마음[佛性]. 상황에 따라 바뀌는 변덕스런 마음과 동떨어진 것은 아니지만 결코 같은 것도 아니다. 비유하자면, 전자는 물결이요 후자는 물이다.

** 리그파(Rigpa) : 가장 심오하고 본질적인 마음의 본성. 순수하고 소박하고 원초적인 깨달음.

 

명상이란, 마음을 집으로 불러오는 것이다.
그것은 우선, 마음 모으기 수련(the practice of mindfulness)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한번은 늙은 여인이 붓다께 와서 명상하는 법을 물었다.
붓다는 그녀에게, 샘에서 물을 길을 때 손의 움직임을 빠뜨리지 않고 잘 살펴보라고 했다.

그러면 이내, 명료하게 깨어 있으면서 어디에도 막히지 않는 고요함에 머물러 있는 자기를 발견한 터인데, 그것이 명상이라고 대답해주었다.

 

명상을 구체적 행동으로 실현하는 것이 명상의 바탕이요 욧점이요 목적이다.

현대인의 삶에서 드러나는 폭력과 스트레스와 갈등과 혼란이, 명상의 생활화를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 어떻게 우리는 명상을 생활 속으로 끌어들여, 집착하지 않고 태연스런 평상심으로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을까?

날마다 실천하는 정규 수련 말고 다른 대안(代案)이 없다.

성실한 명상 수련 만이 마음의 바탕 본성에서 우러나는 고요함을 깨뜨리지 않고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당신이 진심으로 이를 이루고 싶다면,
명상수련을 아플 때 약 먹는 것처럼 하지 말고 물 마시듯이, 밥 먹듯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다.

 

명상을 제대로 하려면, 고요하고 아늑한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마음을 항복시키기 전에 먼저 마음의 주변 환경을 고요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우리 마음은 끝없이 떠오르는 잡념들과 느낌들의 사나운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과도 같다.

주변 공기가 조용해져야 촛불이 흔들리잖고 타오르듯, 잡념과 느낌들의 소용돌이를 가라앉힌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는 마음의 본바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서 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일단 마음의 안정을 얻으면,
온갖 종류의 소음과 어지럽힘이 우리에게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번잡한 도시에서 좀처럼 명상에 들 수 없거든, 일삼아 짬을 내어 자연 속으로 들어가라.
자연은 언제나 샘처럼 영감(靈感)을 솟아나게 한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새벽 공원을 산책하든지 장미꽃 잎에 맺힌 이슬을 바라보라.
풀밭에 누워 하늘을 쳐다보며 그 무한공간에 마음을 녹여 보내라.


당신 바깥에 있는 하늘로 하여금 당신 안에 있는 하늘을 일깨우게 하라.

개울가에 앉아 흐르는 물에 마음을 띄워 보내라. 끊임없이 졸졸거리는 개울 물소리와 하나 되어라.

폭포수 아래에 앉아서 그 치유하는 웃음소리로 당신 영혼을 씻어내라.
바닷가를 걸으며 달콤한 해풍으로 당신 얼굴을 감싸주어라.
아름다운 달빛을 찬미하고 그 부드러운 손길로 당신 생각들을 어루만져 조화를 이루도록 하라.

정원이나 호숫가에 앉아 조용히 숨쉬며,
구름없는 하늘에 장엄한 빛을 뿌리며 떠 있는 달처럼, 당신 마음을 고요히 머물게 하라.

 

명상할 때에는 마음의 내적 환경(inner environment of the mind)을 바르게 조성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사방 막힌 데 없이 확 트인 상태로 있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저런 노력과 수고를 헛되이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바른 내적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참된 명상을 위해 결정적으로 필요하다. 유모어와 사방 경계 없는 트임(humor and spaciousness)이 공존할 때, 명상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명상할 때에는 될 수 있는 대로 편안하게 자연스럽게 자신을 열어두어라.

습관적으로 불안해하는 자신의 올가미에서 조용히 빠져나와,
모든 집착을 놓아버리고 당신의 참본성 안에 들어가 쉬어라.

보통 때의 생각들과 감정들에 얽매여 있는 당신의 자아를, 땡볕 아래 놓인 얼음덩이나 버터 조각이라고 생각하여라. 굳어진 느낌이 들거나 춥다는 느낌이 들면, 명상의 햇볕에 그것들을 녹여 없애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마음을 지금 여기 고요한 머뭄 속으로 불러들이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이 내면에서 밝아지도록 하여라.

당신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모두 해체되고 남을 향한 공격성이 풀어지면서, 절대적인 참자아의 광활하고 티없는 하늘 속으로 당신의 미혹됨이 안개처럼 천천히 증발되어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되리라.


초보자가 명상 수련하는 시간을 길게 가져서는 안 된다고, 둣좀 린포체는 늘 말씀하셨다.
4분에서 5분 정도 수련하다가 1분 동안 짧게 휴식하는데 휴식 시간에 자세는 고쳐도 마음 모으기는 계속한다.

때로는, 이상스럽게도 명상이 잘 안 되다가 자세를 고치고 짧은 휴식을 취하는 바로 그 순간에 진짜 명상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다. 앉아서 명상하는 시간 못지 않게 휴식하는 시간도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나는 명상수련을 힘들어하는 학생들에게, 휴식하면서 명상하고, 명상하면서 휴식하라고 자주 말한다.

 

짧은 시간 앉아 있다가 30초에서 1분 정도 휴식한다.
그러나 휴식하는 동안에도 당신이 하고 있는 일에 마음을 모으고 평안한 상태를 유지한다.

그런 다음 다시 자세를 갖추어 앉는다.
이렇게 여러 차례 반복하면 휴식이 명상을 더욱 살아있게 하고 더 많은 영감을 줄 것이다.

 

당신의 명상수련에서 어색함, 지루함, 딱딱함, 근엄함, 부자연스러움 등을 제거해주고
마음을 좀더 쉽게 집중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명상과 휴식을 이런 식으로 번갈아 하는 동안, 명상과 일상생활 사이의 장벽이 조금씩 무너지고 둘 사이의 충돌은 해체되며 좀더 자연스럽게 순수 현존에 들어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둣좀 린포체가 자주 말씀하셨듯이, “명상하는 사람이 어쩌다가 명상을 떠나더라도 명상은 명상하는 사람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가끔 사람들이 묻는다.

“얼마나 오래 명상해야 합니까? 언제 하지요? 아침저녁으로 20분은 해야 할까요? 아니면 하루에 여러 번 짧게 하는 것이 좋습니까?”

 

그렇다. 아침저녁 20분씩 명상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꼭 20분으로 시간을 정하라는 말은 아니다. 경(經)을 뒤져봤지만 20분간 하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마도 서양인들의 생활 패턴에 맞추어 그런 시간 계산이 나온 듯하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서양 표준 명상 시간이라고 부른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명상하느냐에 있지 않고
명상하는 동안 실제로 마음을 한 곳에 모아 고요함에 머물 수 있느냐,
그래서 당신의 중심에 가 닿을 수 있느냐에 있다.

20분간 멍하니 앉아 있는 것보다는 5분 동안 깨어 있는 상태로 앉아 있는 것이 훨씬 낫다!

 

명상할 때 숨은 평상시처럼 자연스럽게 쉬도록 하라.

내쉬는 숨에 가벼이 의식을 모으라.
숨을 내쉴 때마다 당신이 움켜잡고 있는 것을 모두 놓아버리라.

그 모든 것이 광대무변한 진실의 품 안에 녹아 없어지는 것을 상상하라.


숨을 내쉬었다가 다시 들여마시기 전,
당신의 집착이 모두 해체되는 자연스런 틈새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틈새, 열린 공간에서 쉬어라.

그리고 숨을 들여마실 때에는 들숨에 특별히 신경쓰지 말고,
열려 있는 공간에 계속 마음을 얹어두고 쉬어라.

 

명상 수련할 때에는 머리로 분석하고 헤아리고 생각하는 일에 빠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마음을 모은답시고 호흡을 헤아리는 데(“지금 나는 숨을 들이 쉰다. 지금 나는 숨을 내쉰다.”)
몰두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중요한 것은 ‘순수하게 그냥 있음’(pure presence)이다.

 

호흡에 너무 많이 집중하지 않는 게 좋다.
25 퍼센트쯤 호흡에 집중하고 나머지 75 퍼센트는 조용히 그냥 그리고 광대무변하게 휴식하라.

이런 식으로 호흡에 마음을 모으다보면, 그만큼 고요하게 현존하면서 흩어져 있는 마음들을 안으로 불러 들여 이윽고 하나인 전체가 되어 있는 당신을 발견할 것이다.

  

내가 배운 명상법에서는 눈을 뜨게 되어 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요령이다.

처음 명상을 시작할 때 바깥 사물들이 눈에 들어와서 번잡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눈을 감는 것이 내면으로 조용히 들어가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일단 마음이 고요해지면 천천히 눈을 열어 평화롭고 그윽한 시선으로 코끝을 따라 45도 아래 바닥을 응시한다.

한 가지 조언을 한다면, 마음이 거칠어질 때에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멍해지거나 졸려울 때에는 시선을 위로 올리라는 것이다.

마음이 고요해지고 통찰의 밝은 기운이 일어남에 따라, 눈을 크게 뜨고 앞에 있는 공간을 곧장 뚫고 들어가 볼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족첸 수련법에서 적극 추천하는 ‘응시(gage)’다.

명상 수련할 때 눈을 떠야 할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눈을 뜨면 우선 덜 졸게 된다.

 

명상은 이 세상에서 도망치거나 몽롱한 의식상태로 황홀경에 들어감으로써 이 세상을 외면하기 위한 방편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자기를 제대로 이해하고 이 세상과 참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이 명상이다.

그런즉, 명상할 때에는 눈을 감지 말고 떠라.

 

삶을 외면하지 말고, 모든 것에 당신을 열어놓고 모든 것과 평화롭게 지내라.
듣고, 보고, 느끼는 당신의 모든 감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

무엇이 보이든, 무슨 소리가 들리든, 그것들을 붙잡지 말고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라.

들음(hearing)은 들음으로, 봄(seeing)은 봄으로,
그것들에 대한 당신의 인식을 움켜잡지도 말고 뿌리치지도 말고, 그냥 그대로 두어라.

 

명상하는 자세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등을 “화살처럼” 또는 “쌓아 놓은 동전들처럼” 곧추세우는 것이다.

등을 곧추세워야 몸 안의 기운(프라나)이 미묘한 채널들을 통해 순조로이 흐르고 마음도 평안한 휴식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척추 아랫부분은 태어날 때부터 굽어 있지만, 그래도 힘을 주지 않은채 곧게 세워야 한다.


몸의 어디에도 억지를 부리지 말아야 한다.
머리는 목 위에 편안하게 얹고 어깨와 가슴으로 앉은 자세의 균형을 잡는데, 긴장하면 안 된다.

두 다리는 꼬아서 앉되 반드시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할 것까지는 없다.
그것은 숙련된 요기들이나 할 수 있는 자세다.


겹쳐진 두 다리는 삶과 죽음, 선과 악, 남성과 여성, 삼사라와 니르바나, 하늘과 땅 그리고 불이성(不二性)의 유모어를 나타낸다. 두 손은 무릎 위에 가벼이 얹는다. 이 자세를 일컬어, “마음을 편(便)하고 안(安)하게 하는” 자세라고 한다. 걸상에 앉는 것이 좋은 사람은 걸상에 앉되 두 다리를 꼬지 말고 편하게 굽힌다. 이 때에도 등을 곧추 세워야 함은 물론이다.

좌선을 할 때 당신 마음이 몸과 일치되지 않는다면 ― 예컨대, 어떤 일로 걱정하거나 마음이 어지러우면 ― 당신 몸이 불편을 느낄 것이고 좌선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반면에, 당신 마음이 고요한 가운데 깨어 있으면 그것은 곧 몸의 자세에 영향을 미치고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고 평안하게 앉을 수 있다. 몸의 자세와, 마음의 본성을 깨우침으로써 얻게되는 확신의 일치됨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다.


사람들은 때로 명상하는 동안 아무 잡념도 감정도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잡념이나 감정이 일어나면 그것들에 끄달려 화를 내면서 명상을 망쳤다고 생각한다.

이보다 더 진실에서 먼 생각은 없다.

티베트에 이런 말이 있다.
“뼈 없는 고기를 달라거나 잎사귀 없는 차(茶)를 달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요구다.”

당신에게 마음이 있는 한, 생각과 감정은 일어나게 마련이다.


명상하는 동안 어떤 생각이나 느낌이 일어나든지, 바다의 파도들처럼, 일어났다가 꺼지도록 내버려 두어라.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때마다, 억지로 어떻게 하려하지 말고, 그냥 생각이 일어나고 꺼지게 두어라. 붙잡지도 말고 먹이지도 말고 빠져들지도 말고 매달리지도 말고 굳히려 하지도 말아라.

 

생각들을 쫒아다니지도 말고 불러들이지도 말아라.
자신의 파도를 바라보는 바다처럼, 저를 가로질러 흐르는 구름을 응시하는 하늘처럼....

생각들이라는 게 바람과 같아서 왔다가 사라져 가는 것임을 곧 알게될 것이다.

생각들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고, 당신 마음을 관통하여 그냥 흐르게 하고, 뒷생각들로 마음을 어지럽게 하지 않는 것이 제대로 하는 명상의 비결이다.


사람들은 명상을 시작할 때, 전보다 더욱 거칠고 시끄럽게 잡념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나는 그것이 좋은 징조라고 말해준다.

잡념이 거칠어졌기 때문에 좋다는 게 아니라, 그만큼 고요해져서 평상시 얼마나 많은 잡념들로 시끄럽게 살아왔는지를 알게 되었으니까 좋다는 뜻이다.



일어나는 잡념 때문에 상심하거나 포기하지 말라. 어떤 생각이 일어나든, 계속 알아차리면서, 호흡으로 돌아가기를 되풀이하는, 그것이 명상의 요령이다.

  

옛적의 명상법 교재에 보면, 명상을 시작할 때에는 생각들이 폭포수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명상이 차츰 깊어지면서 생각들은 좁은 개울처럼 되었다가, 바다를 향해 천천히 넓어지는 강물로 흐르다가, 이윽고 그 마음이 고요한 바다처럼 되어 간간히 일어나는 잔 물결에 출렁일 뿐이다.

 

마음에 어떤 부담도 주지 않도록 조심할 일이다.
명상할 때, 마음을 다스리려 애쓰지 말고 평화로워지려고 시도하지도 말아라.

지금 당신이 무슨 특별한 일을 치르고 있다는 느낌으로 지나치게 신중하거나 엄숙할 것 없다.
당신이 지금 명상을 하고 있다는 생각까지도 놓아버려라.

몸을 있는 그대로 놔두고, 숨도 쉬어지는 대로 쉬면서 지켜보아라.
우주를 보듬은 하늘이 당신이라고 생각하여라.

 

나는 학생들에게, 명상에서 너무 급히 나오지 말라고 늘 말한다. 명상하는 동안 누렸던 평안함이 삶 속에 스며들 수 있도록 얼마쯤 시간을 두고 기다릴 필요가 있다.

우리 스승이신 둣좀 린포체는 자주 말씀 하셨다.

“벌떡 일어나서 달려나가지 말고 명상하는 동안 모아진 마음을 일상생활에 섞어 넣도록 하여라.  두개골에 금이 가서 누가 건드리면 깨어질까 조심하는 사람처럼 되어라.”

 

좌선 수련에서 중요한 것은, 앉아 있는 일 자체보다 앉아 있는 동안과 그 뒤의 마음 상태다.
명상하는 동안이나 명상 직후의 고요하고 집중된 마음을, 일상생활 속에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선(禪) 이야기에 이런 것이 있다.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묻는다. “스승님께서는 어떻게 깨달음을 행동으로 나타내시는지요?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깨달음을 실천하십니까?”

스승이 제자에게 대답한다.
“밥먹고 잠자는 것으로 그렇게 한다.”

“하지만 스승님, 밥은 누구나 먹고 잠도 누구나 자지 않습니까?”

“그러나, 잠잘 때 잠자고 밥먹을 때 밥먹는 건 누구나 하는 일이 아니지.”

여기서 “먹을 때 먹고, 잘 때 잔다”는 유명한 말이 있게 된 것이다.

먹을 때 먹고 잘 때 잔다는 말은, 지금 여기서 자기가 하고 있는 행위에, 그것을 훼방하는 에고의 장난에 휘둘리지 않고, 온전히 깨어있음을 뜻한다. 이것이 깨달음의 완성(integration)이다.

우리는 명상하는 동안 마음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무것도 없다.
그냥, 그것을, 있는 그대로, 두어라.

명상을 가리켜 “아무 곳도 아닌 공(空) 사이에 마음 걸어두기” (mind, suspended in space, nowhere)라고 말한 스승이 있다.

 

명상을 하고 나서, 사물을 인식하는 자신의 습관적 방식에 빠져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명상을 마치고 일상생활로 돌아갈 때, 명상하는 동안 얻은 바 지혜, 통찰, 자비심, 유모어, 부드러움, 너그러움, 초연함 등을 그대로 당신의 경험 속에 끌어들여라.

 

명상은 당신에게 어떻게 해서 모든 것이 꿈과 같은 환영(幻影)인지를 깨우쳐준다.
비록 두터운 삼사라 안에 살더라도 그 깨우침을 유지하도록 하여라.

위대한 스승 한 분이 이르셨다.
“명상수련을 마치면 환영(幻影)의 자식(a child of illusion)으로 바뀌어 있어야 한다.”

 

명상 생활의 진짜 빛나는 열매는, 언제나 지금․여기에서 행복하고 투명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인데, 그 모든 것, 그 어디에도,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당신의 집착하는 손아귀에서 힘이 빠지는 것은, 당신이 자기로부터 그만큼 자유로워진다는 신호다.

 

이 자유를 더 많이 경험할수록 그만큼 당신의 에고와 그것을 살아있게 한 희망과 두려움(hope and fears)은 사라지고, 한없이 너그러운 “무아(無我)의 지혜”에 그만큼 가까이 다가갔다는 신호가 분명해진다.

당신이 그 지혜의 방(房)에 머물면, ‘나’와 ‘너’, ‘이것’과 ‘저것’, ‘안’과 ‘밖’ 사이의 장벽을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이며, 마침내 당신의 참된 거처인 불이(不二) 상태에 들어갈 것이다.

 

마음 수련을 하다보면, “멍해져서 바르게 행동하지 못하는” 상태에 떨어질 위험이 있다.
족첸 수련처럼 강하고 수준 높은 가르침에는 그만한 위험이 따르게 마련이다.

스스로 사유와 감정에서 해방되었다고 잘못 알고는,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못한데도, 자신이 꽤 훌륭한 족첸 수련자가 되어 거리낌 없이 행동하고 있는 줄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하는 일은 부정적인 카르마를 더욱 많이 쌓아 올리는 것일 뿐이다.

파드마삼바아바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것이 우리가 갖추어야 할 바른 태도다.
“내 눈길은 하늘처럼 광활하지만, 인과(因果)에 대한 존중(尊重)과 나의 행동은 밀가루만큼 섬세하다.”

 

명상을 할 때 머리에 두건을 덮어 씌운 것처럼 멍하고 졸립고 반쯤 정신이 나간 것같은 상태를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은 흐릿하고 혼미한 정신상태일 뿐이다.

어떻게 하면 그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척추를 곧추 세우고 폐 가득히 숨을 들여마시며 눈 앞 공간을 똑바로 바라보고 당신 자신을 일깨워라.

그와 같은 몽롱한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러니 그런 상태를 경험할 때마다 거듭 거듭 척추를 세우고 정신을 차려야 한다.

할 수 있는 만큼 상황에 깨어 있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둣좀 린포체

 

명상수련을 하다보면 가끔 좋지못한 경험들(negative experiences)을 하게 되는데 그것들을 좋지 못한 증표로 여기기 쉽다. 그것은 잘못이다.

실제로, 좋지 못한 경험들은 수련자에게 위장된 축복이다.

그런 경험들을 늘 그래왔듯이 싫어하는 마음으로 상대하지 말고, 환영(幻影)이자 꿈과 같은 그냥 경험일 뿐임을 알아차리도록 노력하라.

경험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은 당신을 경험 자체의 위험과 상해(傷害)에서 구해주며 그 결과, 좋지못한 경험이 위대한 축복과 성취의 근원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좋지못한 경험들을 이렇게 다룸으로써 그것들을 깨달음의 촉매로 만든 스승들에 대한 이야기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좋지 못한 생각이나 감정이 솟구칠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경우가 자주 있다.

그럴 경우 당신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태도로 그 생각과 느낌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명상수련의 열매다.

당신의 태도가 바뀔 때 당신 생각을 둘러싼 전체 상황(the whole atmosphere)이 바뀌고 마침내 당신의 생각과 감정까지도 바뀌게 된다. 당신이 좀더 기분좋아질 때 그것들도 기분좋아진다. 당신이 그것들을 힘겨워하지 않을 때 그것들도 당신을 힘겨워하지 않을 것이다.

명상 수련을 계속하다 보면 온갖 좋은 경험과 좋지 못한 경험을 두루 겪게 된다.

당신은 지극히 행복한 지복의 상태, 모든 것이 깨끗해진 청정의 상태, 모든 생각이 사라진 무념무상의 상태를 경험할는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경험들이 좋은 경험이고 당신의 명상 수련에 진보가 있다는 표시들이다.


지복(至福, bliss)의 상태를 경험한 것은 당신의 ‘욕망’이 잠정적으로 충족되었다는 표시요, 청정(淸淨, clarity)의 상태를 경험한 것의 당신의 ‘공격성’이 잠정적으로 그쳤다는 표시요, 무념무상(無念無想, absence of thought)의 상태를 경험한 것은 당신의 ‘무지’가 잠정적으로 죽었다는 표시다.

그 자체로서 모두가 좋은 경험들이지만
그러나 만일 당신이 경험/체험들에 집착한다면 곧 장애물로 바뀌고 말 것이다.

경험들 자체는 깨달음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들에 집착하지만 않는다면,
‘깨달음을 위한 재료’(materials for realization)로서 제 역할을 충실히 감당할 것이다.

 

무슨 일을 겪든지 당신의 고통을 뿌리치지 말고 받아들여라.
자신의 취약함을 감추지 말아라.

아무리 절망스럽더라도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 고통이 당신에게 값진 선물을 건네주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지금 겪는 고통은, 마음 수련을 통해서, 슬픔 뒤에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하도록 기회를 제공한다.

“슬픔은 자비의 정원임에 틀림없다. 그대가 모든 것에 가슴을 열어둔다면, 그대의 고통은 사랑과 지혜를 찾아나선 그대에게 가장 훌륭한 길동무가 되어줄 것이다.”(루미)


당신이 괴로움을 겪는 때가 바로 당신을 열어놓을 수 있는 때요, 당신의 취약성이 드러나는 곳이 바로 당신의 큰 능력이 숨어 있는 곳이다.

당신 자신에게 말하여라.

“이 고통으로부터 달아나지 않겠다.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여 이 고통을 활용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좀더 자비롭고 제대로 도움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나 자신을 바꾸겠다.”

무엇보다도, 고통은 우리에게 자비를 가르쳐줄 수 있다.
스스로 괴로움을 당할 때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괴로움을 겪을 때 어떻겠는지 알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도와야 할 자리에 있을 때에도, 당신이 겪은 고통을 통해서 얻은 바른 이해와 자비로 그들을 제대로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요기에게도 슬픔과 기쁨의 감정은 예전처럼 일어난다.
보통 사람과 요기의 차이점은, 그와 같은 정서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대응하느냐에서 드러난다.

보통사람은 그런 감정이 일어날 때 본능처럼 받아들이거나 거부함으로써 집착 또는 혐오의 태도를 보이고 결과적으로 부정적인 카르마를 쌓는다.

반대로 요기는 어떤 감정이 일어나든 있는 그대로 인식함으로써
집착하지도 않고 떨쳐버리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당신이 무슨 나쁜 짓을 했는데, 그 짓을 한 데 대하여 죄의식을 느끼고, 그것을 생각만 해도 뒷걸음치게 된다면, 오히려 그 때의 상황 속으로 생생하게 들어가보라.

숨을 들이쉬면서, 그 때 그 상황에서 그렇게 행동한 것을 변명하거나 정당화하려 하지 말고 모든 책임을 스스로 받아들여라.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는지 정확하게 인식하고 진심으로 용서를 빌어라.

이제 숨을 내쉬면서, 화해, 용서, 치유, 이해를 연관된 사람에게 보내어라. 이렇게, 들숨과 함께 비난과 책임을 받아들이고 날숨과 함께 용서와 치유와 화해와 이해를 내보낸다.

 

이 수련법은 당신의 잘못으로 상처입은 상대방을 만나볼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줄 뿐 아니라 그에게 마음 깊은 곳에서 용서를 구하는 데 필요한 의지와 힘을 줄 것이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인 어머니나 아버지, 남편이나 아내, 연인이나 친구와 무슨 문제가 생겼다고 하자.

그럴 경우 상대를 그가 맡은 ‘역할’인 남편이나 아내, 어머니나 딸로 보지 말고 그냥 당신과 똑같은 사람으로, 당신처럼 느끼고 당신처럼 행복을 갈구하고 당신처럼 고통을 두려워하는 그런 사람으로 여기면 크게 도움받을 수 있다.

 

상대방을 당신과 똑같은 하나의 인간으로 보면, 그에게 향한 당신의 마음이 열리고, 어떻게 그를 도울 수 있는지에 대하여도 알게 될 것이다.

 

마음 닦는 길에서 장애물들을 만날 때, 훌륭한 수행자는 믿음을 잃지 않는다.

그 대신, 장애물을, 그것이 어떤 장애물이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장애물을 장애물로 알아차릴 때 그것은 더이상 장애가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 이유로, 장애물을 장애물로 알아차리지 못해서 그것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되고, 그래서 그것을 더욱 단단하고 힘있는 진짜 장애물로 만드는 것이다.


깊은 명상 상태에 자연스럽게 도달하면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방해받는 일 없이 그 안에 오랜 시간 머무를 수 있다. 지키거나 유지해야 할 “명상”이라는 게 따로 없거니와, 이는 저절로 흐르는 리그파의 지혜 안에서 함께 흐르기 때문이다.

그 때 당신은 그것이 언제나 그래 왔듯이 지금도 그렇다는 진실을 깨닫는다.

의혹의 그늘 한 점 없이 리그파의 지혜가 빛나고, 완전한 깨달음이 자연발생으로 곧장 이루어진다.
이 순간이 곧 깨어남의 순간이다.

심오한 유모어 감각이 안으로부터 솟아나면서, 이전에 당신이 가졌던 마음에 대한 개념들과 생각들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를 알고 웃음짓게 된다.

 

모든 것이 명상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웃음짓는 아이, 지하철에서 보는 지친 얼굴, 포장된 길 틈바구니에 피어난 작은 꽃 한 송이, 백화점 진열장에 내걸린 값비싼 옷가지들, 창틀에 놓인 화분에서 피어난 꽃들 위로 쏟아져 내리는 햇살. 모든 것들 안에 숨어 있는 아름다움과 하늘의 은총을 눈여겨 보라.

 

작은 기쁨을 느끼고, 순간 순간마다 “침묵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뉴스”에 귀를 기울이라.

천천히 당신은 자신의 지복(至福)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언제 어디서나 본인의 호흡과 동작을 북돋아주고 빛나게 하고 힘있게 해줌으로써 기쁨을 창출해내는 연금술사로 될 것이다.

 

가능한 한 명상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다.

좋아하는 음악을 선택하여 마음을 여는 데 활용할 수도 있겠고 오랫동안 감명을 준 싯귀나 스승의 가르침이 담긴 문장을 머리맡에 적어 놓고 자주 읽어보는 것도 좋은 방편이다.

 

나는 티베트 탱화(幀畵)를 걸어놓고 그 아름다움에서 기운을 얻는다.

당신도 신성한 느낌을 주는 그림을 벽에 걸어두고 자주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이 담겨진 카셋 테잎이나 거룩한 찬트 음악을 듣는 것도 좋다.

꽃 한 송이, 촛불 하나, 스승의 사진이나 불상(佛像) 또는 당신이 예배하는 신(神)의 상(像)을 모셔놓고 그 앞에 향을 피우는 것으로써, 명상하는 장소를 간소한 낙원으로 만들 수 있다. 이렇게 당신의 평범한 거실을, 당신의 참자아와 긴밀하게 만나서 기쁨과 행복을 나누는 성소(聖所)로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가끔 명상할 때 나는 아무런 명상법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냥 마음을 내려놓고 앉아 있자면, 특히 어떤 일로 마음이 흔들릴 때, 그 마음이 아주 빨리 안정을 취하는 것을 본다. 나는 고요히 앉아 마음의 본바탕 안에서 쉰다. 내가 지금 “바른” 상태에 있는지를 의심하지도 않고 질문하지도 않는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지만, 모든 것이 이해되고 선명하게 깨어있고 흔들리지 않는 안정(安靜)을 맛보게 된다. 내가 마음의 본바탕 안에 있을 때, 더이상 거기에는 오락가락하는 변덕스런 마음이 없다.

존재하려고 따로 애쓸 것도 없고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것도 없다.
그냥 나는 있다(I simply am). 뿌리깊은 신뢰가 거기 있다. 특별히 해야 할 어떤 일도 없다.

 

어떤 방법으로 명상을 시작했든지, 선명하게 깨어 있으면서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평화스런 상태에 들었거든, 더 이상 명상법에 구애받지 말고, 특별한 명상법을 계속 사용할 필요없이 그냥 그런 상태로 조용하게 있어라.

그 명상법으로 이루어야 할 목적은 이미 달성되었다. 그러나, 만일 길을 잃고 헤매게 되거나 마음이 시끄러워진다면, 다시 내려놓았던 방법으로 돌아가는 게 좋다. 


다른 모든 예술활동과 마찬가지로 명상수련에도 죔과 풀어줌 사이에 섬세한 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 붓다의 측근 제자에게서 명상법을 배우는 수도승이 있었다. 그는 바른 마음상태를 유지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정신을 집중하려고 너무 애쓰다보니 두통이 왔다.
그래서 이번에는 마음을 느슨하게 풀어주자 잠이 들어버렸다.

결국 이 문제를 안고 붓다를 찾았다.

그가 불교에 입문하기 전, 유명한 뷔나(악기 이름) 연주자였음을 아시고 붓다께서 물으셨다.

“그대는 전에 뷔나를 연주하지 않았던가?”

“그렇습니다.”

“뷔나에서 가장 좋은 소리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줄을 팽팽하게 죄어야 하는가? 아니면 느슨하게 풀어야 하는가?”

“둘 다 아닙니다. 너무 팽팽하지도 않고 너무 느슨하지도 않게, 알맞은 긴장상태를 유지해야 좋은 소리가 나지요.”

“바로 그걸세. 자네 마음도 그래야 하네.”

 

기억할 것. 방법은 방법일 뿐, 명상 그 자체가 아니다. 한 가지 방법을 잘 활용함으로써 당신은 ‘온전한 현존의 순수한 상태’(pure state of total presence)에 도달하는데, 그것이 진정한 명상이다.

티베트에 이런 말이 있다. “곰파 마 이인, 콤파 이인.”

옮기면, “명상(meditation)은 없다, 익숙해짐(getting used to)이 있을 뿐”이라는 말이다.
명상 ‘수련’에 익숙해지는 것이 곧 명상이라는 그런 뜻이다.


“명상은 애써 노력하는 것이 아니고 저절로 자연스럽게 동화(同化)되는 것”이라는 말도 있는데 맞는 말이다.

한가지 방법으로 계속 수련하면 명상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명상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당신이 수련에 정진할 때 저절로 이루어지는 무엇이다.

 

마음 수련을 훌륭하게 잘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언제 어디서나 본인의 참자아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
깊고 깊은 영감(靈感)의 원천을 발견하고 그 샘에서 늘 신선한 영감을 얻는 사람.

영국 저술가 루이스 톰슨은 이렇게 썼다.

 

“최고의 시인(詩人)이었던 그리스도는 오로지 진실에 몸바쳐 살았기에 그의 몸짓 하나 하나가 초월자를 몸으로 드러낸 순수 행위였고 완벽한 상징이었다.”

초월자를 몸으로 드러내는, 그것이 우리가 여기에 존재하는 이유다.


우리 모두, 몇 가지 마음 수련법에 대하여 공부할 수 있는 카르마를 지니고 있다.

그 방법들 가운데서 당신에게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한 가지 수련법을 선택하고 그 방법에 따라 정진하기를 진심으로 권한다.

만일 당신이 이 방법 저 방법을 알아보는 데 시간을 낭비한다면, 마음 수련법에 대하여는 모르는 게 없지만 바로 그 지식에 발이 묶여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런 사람을 두고 파트룰 린포체는, “집안에 코끼리를 두고 숲에 가서 그 발자국을 찾는다”고 말한다. 한 가지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른다는 것은 자신을 제한하거나 다른 가르침을 배척하고 외곬으로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이런 저런 장애물을 지혜롭게 피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벗어나지 않고 확실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이 효과를 보는 명상법 가운데 하나는, 한 대상 위에 가벼이 마음을 얹어놓는 것이다.
꽃이나 수정같이, 특별한 감동을 안겨주는 아름다운 사물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붓다나 예수처럼, 혹은 당신이 모시고 있는 스승처럼, 실제로 진실을 깨달아 실현한 분의 상(像)은 더욱 강한 효력을 나타낸다.

당신에게 모시고 배우는 스승(master)이 있다면, 그는 진실에 연결되어 있는 살아있는 실체이므로 그의 얼굴을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당신 자신의 본성에서 우러나는 영감과 진리에 곧장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깨달은 이들의 도움을 받아 마음의 참 본성을 깨치는데 구루 요가*보다 더 효과적이고 신속한 수련법은 없다.

딜고 키옌체 린포체는 구루 요가를 가리켜 “구루의 참본성에 합일되는 것”이라고 했다.
구루 요가를 통해서 우리 마음을 스승의 깨달은 마음에 섞어 합일시키는 것이다.

스승(구루)은 모든 붓다들, 조사(祖師)들, 깨달은 이들의 축복을 자기 몸에 결정(結晶)시킨 사람이다.

그러기에 그를 불러내는 것은 그들 모두를 불러내는 것이요, 당신 마음을 스승의 지혜로운 마음에 몰입시키는 것은 스승이 몸으로 체현한 진실에 당신 마음을 몰입시켜 하나로 되는 것이다. 

*** 구루 요가(Guru Yoga) : 스승을 깊이 생각하여 스승과 하나로 되는 수련.


조용히 앉는다.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진리의 화신(化身)인 당신 스승이나 성인 또는 깨달은 이의 모습을 눈 앞 허공에 떠올린다. 무지개처럼 투명한 빛살을 내뿜고 있는 그의 모습을 상상한다.

생생한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거든, 그냥 빛 덩어리로 생각하든지 바로 당신 앞 허공에 온전히 현존하는 그를 느끼려고 애써보라. 그리고 거기서 당신께로 쏟아져 내리는 영감과 기쁨과 위안을 느껴보라.

나의 스승이신 둣좀 린포체는, 그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지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현존을 당신 가슴으로 느끼고 모든 붓다들의 축복과 자비와 기운과 지혜가 그의 현존에 살아 있음을 아는 것이다. 깊은 신뢰로 스승에게 전심귀의 하여, 당신 마음을 그의 마음에 녹아들게 하고 당신 생각을 그의 지혜에 내어맡겨 쉬게 하라.


스승은 인생이라는 험난하고 위태로운 바다를 건너는 이들의 배와 같고, 그들을 해탈이라는 육지로 안내하는 믿음직한 선장과 같고, 욕정의 불을 끄는 빗물과 같고, 무지(無知)의 어둠을 몰아내는 일월(日月)과 같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의 무게를 함께 실어 주는 든든한 땅과 같고, 일시적인 행복과 영원한 지복(至福)의 열매를 맺어 주는 여의목(如意木)과 같고, 넓고 깊은 가르침들로 가득 차 있는 보고(寶庫)와 같고, 온갖 깨달음을 안겨주는 여의주(如意珠)와 같고, 모든 중생에게 똑같은 사랑을 베푸는 어버이와 같고, 자기의 큰 강(江)과 같고 세속의 이런 저런 관심사들 위로 우뚝 솟아 감정의 바람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 태산과 같고, 정욕의 불길을 잠재우고자 빗물을 머금은 구름과 같다.


한 마디로, 그는 모든 붓다들과 똑같은 존재다.

눈으로 그 모습을 보든지, 귀로 그 음성을 듣든지, 손으로 그 몸을 만지든지, 머리로 그를 기억하든지 어떤 방식으로든 그를 접함으로써 우리는 해탈을 향해 나아간다.

그를 전적으로 믿고 모시는 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확실한 길이다. 그의 지혜와 자비에서 나오는 따뜻한 기운이 우리 몸의 잡석(雜石)을 녹여 본디부터 우리 안에 있던 황금 불성(佛性)을 살려낼 것이다. ―딜고 키옌체 리폰체

 

스승께 전심귀의(專心歸依, devotion)하는 것은 마음의 본바탕과 다른 모든 것을 깨달아 아는 데 가장 순수하고 간단하고 빠른 길이다. 그 길을 따라 나아갈 때,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 놀라운 상호작용 가운데 이루어진다.

우리 쪽에서 스승께 진심으로 자기를 내어맡기면 그만큼 마음의 본바탕을 들여다 보게 되고 마음의 본바탕을 보게 되면 그만큼 우리를 이끌고 가르치시는 스승께 귀의하여 자기를 더욱 맡기게 되는 것이다. 스승께로 전심귀의함과, 마음의 본바탕을 삶으로 경험하는 일은 이렇게 불가분(不可分)의 관계로서 상호작용 한다.


스승의 가르침과 그에 따른 수련의 효력을 제대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비록 겉으로 드러나는 극적인 변화가 보이지 않더라도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수련을 계속해야 한다.

낙심하여 포기하지 않고, 마음 수련의 길에는 나름대로 법칙과 필요한 과정이 있음을 믿어 자기 자신을 부드럽고 세련되게 대하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한 수련의 자세다.

 

스승들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수련에 힘쓰다 보면, 자신에게서 독특하게 드러나는 어떤 진실들을 발견하게 된다. 저마다 우리는 영낙없이 걸려 넘어지는 장소가 있고, 그 말만 들으면 참지 못하고 화를 내는 그런 말이 있다.

과거 좋지 못한 카르마의 유산으로 물려받은 나쁜 버릇이 있어서 끊임없이 그것을 되풀이하고 더욱 강화(强化)한다.

 

우리에게는 저마다 자기 자신과 세계를 보는 낡고 왜곡된 관점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움켜잡고는 좀처럼 고치려 하지 않는다. 마음 수련의 길에 들어서서 자신을 정직하게 관찰할 때 비로소, 우리가 그동안 그런 줄로만 알고 있던 것들이 망상(妄想)의 거미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차츰 깨닫기 시작한다.

 

이렇게 우리가 잘못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깨달음의 빛이 밝혀지고 새로운 치유의 불꽃이 당겨질 수 있다.

 

당신의 본디 마음이 스승의 그것과 똑같은 것임을 온전히 깨달을 때부터 당신과 스승은 떨어질 수 없다. 언제나 거기 그렇게 있는 당신의 본디 마음과 스승이 하나(one)인 때문이다.

당신과 스승이 떨어질 수 없는 사이임을 깨달을 때, 놀라운 감사와 외경과 충성심이 안에서 솟구친다. 그것을 가리켜 둣좀 린포체는 “바르게 봄[正見]에서 일어나는 충성심”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마음의 참본성을 있는 그대로 봄으로써 자연 발생으로 이루어지는 전심귀의(專心歸依)다.


전심귀의(devotion)야말로 구도자의 모든 것이다.

우리 마음 속에 오직 스승님 한 분이 있을 뿐이요 그분께 귀의하려는 뜨거운 열정으로 타오른다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 모든 일이 그분의 축복인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스승께 자기를 바치는 마음으로 전심귀의코자 한다면, 그것 자체가 기도다.

모든 생각들이 오직 스승께 귀의하는 데로 수렴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 바른 생각, 옳은 판단으로 대처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선다. 보이는 모든 형태가 스승의 모습이요, 들리는 모든 소리가 기도요, 온갖 거칠고 미묘한 생각들이 스승께로 돌아가 나를 맡기게 하는 도우미다. 허공에서 풀어진 매듭들처럼, 모든 것이 그 절대 본성(the absolute nature) 안에서 저절로 해방된다. ―딜고 키옌체 린포체

 

절대 진리는 생각하는 마음의 힘으로 깨달아지지 않는다.
그리고, 생각하는 마음을 넘어서는 길은 가슴을 관통한다고, 모든 위대한 스승들이 말씀하셨다.

전심귀의(專心歸依, devotion)가 바로 그 가슴을 관통하는 길이다.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 두 사람이 당신 안에 살고 있다.

하나는 수다스럽고 요구하는 게 많고 히스테리칼하고 계산속이 빠른 에고(ego)다.

다른 하나는 숨어 있는 영적존재(hidden spiritual being)로서 그가 조용하게 내는 지혜로운 음성을 당신은 거의 듣지 못하거나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른다.

그러나 스승의 가르침에 더욱 더 귀를 기울이고 그 가르침을 깊이 묵상하며 그 가르침을 좇아서 살고자 애를 쓰면 쓸수록, 당신 내면의 음성이 뚜렷해지고, 불교에서 “분별하는 깨어있음”(discriminating awareness)이라고 부르는, 내면의 지혜가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그때 비로소 당신은 그의 진실한 안내를, 에고의 떠들썩하고 번잡하고 헷갈리는 목소리로부터 분별해내게 된다. 그리하여 당신의 참자아에 대한 기억이, 그 장엄하고 확실한 모습과 더불어, 당신에게도 돌아오는 것이다.

이렇게 당신은 당신 안에 있는 ‘지혜로운 안내자’를 일깨워 그의 지혜로운 안내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분별하는 깨어있음이 더욱 선명하고 강해짐에 따라 에고의 여러 속임수들에 넘어가지 않고 진실(진리, truth)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진실(진리)의 말을 더욱 분명하고 힘있게 듣는 것이다.

 

밀라레파의 제자인 감포파가 스승을 떠나면서 물었다.
“제가 언제쯤부터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밀라레파가 대답했다.
“네가 지금의 너와 같지 않을 때, 네가 모든 것을 달리 인식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네 앞에 있는 이 늙은이가 다름 아닌 붓다 자신으로 네 눈에 보일 때, 바로 그 때부터 너는 네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다.”

나에게 학생들을 가르칠 능력을 주고 나로 하여금 계속 배움의 길에 열린 마음으로 정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나를 가르친 스승들께 나를 맡기는, 귀의(歸依)하는 마음이다.

나의 스승인 딜고 키옌체 린포체께서는 남에게서 배우는 겸손한 자세를 언제나 잃지 않으셨고 때로는 당신 제자들한테서도 기꺼이 배우셨다. 스승께 끝없이 귀의함으로써 남을 가르치는 지혜도 얻고 쉼 없이 배우는 겸손함도 얻는 것이다.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은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요,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은 이번 생(生) 뿐아니라 앞으로 올 여러 생들에서 어떻게 행동할지를 배우는 것이다.

당신 자신을 진실로 변화시키고, 어떻게 하면 남들을 돕는 성숙된 존재로 환생할 것인지
그 방법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당신이 세상을 가장 힘있게 도와주는 길이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수행생활에 몸과 마음을 바치고 그래서 마침내 마음의 본바탕을 알아, 죽음의 순간을 자기 안에 있는 불성(佛性)을 깨워 일으키는 기회로 삼고서, 오직 남을 돕고 이롭게 하고자 다시 환생한다면, 그런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세계 곳곳의 교육기관에서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를 심어줄 필요성이 절실하다. 아이들은 죽음으로부터 보호받을게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죽음의 실체를 보고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어째서 사람들은 이 단순하고 불가피한 사실을 한사코 외면하려는 걸까?

죽음에 대한 지식, 죽어가는 이를 돕는 방법, 죽음이 지니고 있는 영적 의미를 사회 모든 계층이 알고 있어야 한다.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모든 교육기관에서 심도있게 그리고 생생하게 죽음에 관한 것들을 가르쳐야 한다.

특히 죽어가는 이들을 보살피고 그들에게 많은 책임을 지고 있는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그럴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바삐 오가며 종종걸음을 치고 춤도 추는데, 죽음에 대하여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저 모든 것이 좋기만 하고 즐겁기만 하다.

그러나 막상 그들 자신에게 또는 아내와 남편과 아이들과 친구들에게 죽음이 닥칠 때,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비통에 젖어 울고 불고 절망하고 분노하는 모습이라니!

죽음으로 하여금 우리를 파멸시키지 못하게 하려면, 지금까지 죽음에 대하여 가졌던 자세를 완전히 바꾸어, 죽음을 낯선 것으로 여기지 말고 자주 겪어보는 가운데 죽음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자주 죽음을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는 죽음이 어디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니 우리가 모든 곳에서 그것을 기다리기로 하자.

"죽음을 연습하는 것은 자유를 연습하는 것이다. 죽는 법을 배운 사람은 노예가 되는 법을 배우지 않은 사람이다."(몬테뉴)

조용히, 그리고 되풀이해서 죽음은 예고 없이 닥친다는 엄연한 사실을 묵상하는 일이 중요하다.

티베트 속담에 나오는 비둘기처럼 되지 말 일이다. 그 어리숙한 비둘기는 침상을 만드느라고 밤새도록 설치다가 잠자리에 들기도 전에 밝아오는 새벽을 맞는다.

 

붓다도 죽었다. 그분의 죽음은 어리석고 게으른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충격을 줌으로써, 모든 것이 덧없고, 죽음은 살아 있는 것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진실을 깨우치기 위한 것이었다.


붓다는 다가오는 당신의 죽음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든 발자국들 가운데서 코끼리 발자국이 가장 뛰어나다.
 모든 명상들 가운데서 죽음에 대한 명상이 가장 뛰어나다.”

 

우리 마음이 고요하여 어지럽지 않은 상태를 몇 분도 유지 못한다는 사실이야말로 특이한 일 아닌가? 우리 마음은 너무나도 분주하고 여러 가지 일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가끔 나는, 우리가 이렇게 복잡한 현대 문명도시에 살고 있는 것이 죽음 직후에 고통당하는 혼령들과 같은 상태에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모습들로 쪼개져 있다. 자기가 참으로 누군지, 자신의 어떤 모습이 참 자기인지, 우리는 모른다. 너무나도 많은 목소리들, 명령들, 느낌들이 우리를 지배하려고 서로 싸우는데 우리는 그 다툼의 소용돌이에서 산지사방 흩어지는 자기를 본다. 고향 집 방에는 아무도 없다. 그 때, 명상이 마음을 집으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당신 마음이 저절로 자연스럽게 안정된다면, 순수하게 깨어 있으면서 고요한 상태에 머물 수 있다면, 어떤 명상법도 더 이상 필요치 않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에게 그런 상태에 도달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단순히 깨어 있는 방법을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생각)이 너무나 거칠고 번잡하여 그것을 일깨우는 특별한 방법 또는 수단이 필요하다.

당신의 마음 바탕에 대한 이해와, 이랬다 저랬다 변덕스러운 기분에 대한 지식과, 수련을 통해서 얻은 통찰을 한 데 모아, 순간순간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일이 그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특별한 상황이나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당신의 마음(생각)을 다스리고 바꾸는 데 알맞은 방법을 제대로 사용하는 기술을 터득하는 것이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하랴?

범부(凡夫)는 자기 이익을 위해 일하고, 붓다는 남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니 다만, 그 둘의 다름을 볼지어다. 내 만일 남들의 고통을 나의 행복과 바꾸지 않는다면 붓다의 자리에 이르지 못할뿐더러 이곳 삼사라에서도 참된 기쁨을 맛보지 못하리. ― 샨티데바

“당신들이 만일 여자 꽁무니를 따라다니거나 돈벌러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시간의 십분에 일만 마음 수련하는 데 쓴다면, 몇 년 안에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 라마크리쉬나


작가가 여러 해에 걸쳐 혹독한 습작기를 거친 뒤에야 글이 저절로 써지는 경지를 맛보고, 무용수가 피나는 연습과 노력 끝에 절로 춰지는 춤의 비밀을 알게 되듯이, 명상이 당신을 어디로 이끌려 하는지를 알게 될 때 비로소 당신은 몸과 마음과 정성을 기울여 명상수련에 임하며 인내와 노력과 지성(知性)으로 정진(精進)하게 될 것이다.


명상 수련을 할 때, “쇼핑 정신”(Shopping mentatity)에 발목 잡히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 스승, 저 스승 찾아다니면서 이 방법 저 방법 집적거리느라고 어느 한 가지 방법도 착실하게 실천 못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모든 영적 전통의 스승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은, 어느 한 길에 들어섰거든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 하여 그 길의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한눈 팔지 말고 정진하라는 것이다.

티베트에서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를 알아, 모든 것을 이룬다.”

여러 가지 수련법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권리는 언제든지 열려있고 따라서 굳이 어느 하나에 당장 매달려 있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으로, 좀더 별난 것을 찾아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자세야말로 현대인의 변덕스런 문화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고약하고 위험한 속임수들 가운데 하나다. 또한 우리의 영적 탐구를 훼방하는, 가장 효과적인 에고의 술책이다.

이 세상에 무엇보다 필요한 존재는 보살(bodhisattva)들이다.

롱첸파의 말대로, “불굴의 갑옷을 입은” 평화꾼들, 자신의 꿈에 몸을 바쳐 이 세상 구석구석 자비와 지혜를 공급하는 보살들이 있어야 한다. 변호사 보살, 예술가 보살, 정치인 보살, 의사 보살, 경제인 보살, 선생 보살, 과학자 보살, 기술자 보살, 엔지니어 보살 등 사람들 살아가는 현장에서 자비와 지혜를 전해주는 채널로 기능하는 보살들이 필요하다.

자신의 마음과 행실뿐 아니라 남들의 마음과 행실까지도 변화시키고, 이 세계를 존속시키며 더 좋은 내일을 만들기 위하여 붓다들과 조사(祖師)들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데 지치지 않는 보살들이 우리에게는 절실히 필요하다.